중년의 이혼남이 인터넷 재혼 사이트에서 채팅으로 만난 여러 여성들과 신나게 놀아나다 고교생 아들의 파토 내기로 끝장 나고 쇠고랑까지 찼다. 이 중년의 카사노바는 대담하게도 만나는 여성들을 집으로 데려와 결혼 할 사이라며 아들에게 인사까지 시켰고 이에 여성들은 깜빡 속았을 것이다.
큰 업체를 운영하는 이혼남으로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에게 많은 여성들이 만남에 응했고, 그 여성들은 삼사십대 중반의 전, 현직 여교사들이나 간호원으로서 대부분 전문직 여성들이 걸려들었다는데 아마도 그런 여성만을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렇게 만난 여성들과 결혼을 전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며 수천만을 갈취하였단다.
이 남자는 주중에는 가까운 서울과 일산, 분당에 사는 여성들과 즐겼고, 주말에는 천안이나 울산에 사는 여성들을 만나러 지방으로 내려갔다니 전국을 무대로 하느라 바빴을까? 신났을까? 하지만 이 남자는 아버지의 파렴치함에 환멸을 느낀 아들의 폭로로 결국 파국을 맞은 것이다.
어머니와의 이혼이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임을 알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메일 아이디를 빌려 아버지가 울산의 K여인과 주고받은 낯뜨거운 내용의 편지를 아버지의 서울 연인 L씨에게 보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실을 알게된 L씨의 고소로 혼인빙자 간음으로 구속되었단다.
이 남자는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들을 믿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성격의 소유자일까? 아들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닮는다는데 자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어 어찌하려 했는지 정말 간 큰 아버지였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 개인적인 사생활이야 뭐라고 하겠냐만 자식에게만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자식까지 결론적으로 자신의 범행에 끌어들인 결과를 낳은 그 아버지는 자식에게 당해도 싸다.
오늘도 방황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그대를 지켜보고 있는 아들을 두려워하라.
동반 자살
선진국인 프랑스 같은 나라에선 모든 것이 너무나 잘 보장되었기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무료한 삶을 끊는 일명 염세주의자들도 있긴 하단다. 과거 우리도 낭만주의에 심취해 인간적인 고민을 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아쉬움을 남긴 소위 인텔리들도 있다.
하나뿐인 귀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까 마는, 오죽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까 싶기도 하지만, 이즈음엔 그 이유가 대부분 카드 빚에 시달리다 궁지에 몰려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접 할 때마다 착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부산 금정산에서 이십대 청년 두 명이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고 한 명은 중태에 빠졌다. 이들은 불어나는 카드 빚을 청산 할 길이 없자 강도 짓까지 하게 됐고 좁혀지는 수사망에 마지막 길을 택한 것이다. 한창 꿈에 부풀어 희망찬 내일을 설계 할 나이의 푸른 젊음들이 불과 명함 한 장 크기의 플라스틱 쪼가리 한 장 잘못 사용하여 그들의 인생을 끝장내고 말았으니 어쩔거나!
물론 분수를 모르고 살다 그리됐으니 그 책임이야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들에게 분수를 가르쳐 주지 못한 책임은 우리들 세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고기를 낚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잡은 고기를 주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기 한 마리 낚기에 얼마의 노고와 인내가 필요한지를 모른 채 얻은 고기를 편하게 먹는 것밖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쓰는 즐거움만 배운 그들에게 카드는 부모님의 호주머니처럼 요술 방망이였을 것이다. 기계에 넣기만 하면 지폐가 콸콸 쏟아지는 그 조그만 카드 한 장이 그들에겐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원하면 펑펑 쏟아낼 줄만 알던 기계가 어느 날부터 나오지 않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참을 수 없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여기 저기서 이리 때우고 저리 꾸려가다 결국은 신용불량자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물론, 무한정 책임 질 수 있는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예외겠지만...
우리 전후 세대의 부모들 고생 안하고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이 한이 맺히도록 뼈저린 고생을 해보았기에 내가 하던 고생을 내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기 싫다는 그 맹목적인 자식 사랑이 오늘날의 무능한 젊은이들을 양산하게 된다. 나 하나 고생으로 자식들만은 호강시키겠다는 잘못된 자기만의 욕심에 모든 사회적 비리가 파생된다.
내가 살아가던 그 시절에 비해서 지금은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그렇지 않아도 고생을 모르고 사는데 자기가 가진 분수만큼 사는 방법도 가르치지 않은 채 위로만 올려다보게 길러 놓으면 어쩌나.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 말, 옛 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 제발, 자식을 기르는 일 만이라도 옛말을 거울 삼았으면 한다.
아까운 이 땅의 젊은이들이 피지도 못한 채 저 세상으로 사라져 가는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