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외할머니~~






    어릴 적,
    지가 뭘 안다고 모기 뜯는 시골이 좋아서
    주로 여름방학이면 무작정 가기를 주저치 않던

    나의 고향같은~
    외갓집,

    딸 여덟에(엄마 말고 이모가 일곱) 외삼촌 하나,
    나는 그 외삼촌, 얼굴조차도 모른다.

    좀 똑똑해서 외지로 공부를 시켜놨더니 그넘의 이념이 뭔지 북쪽으로 넘어가 버렸단다.
    그 일이 있은 후 외할머니는 머리에 먹물이나 들지 않았다면
    혹시나 이 불행을 모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늘 후회속에서 사셨고

    월북한 아들때문에 전기고문도 당해보셨다는 외할부지는
    늘 깡마르고 온몸이 시원찮아 농삿일이라곤 마흔이 넘은 바보 숫총각
    머슴,문도령의 손을 빌지 않으면 스므댓마지기가 넘는 농사를 어림도 못내어 볼 일이였다.

    그 때 이모들은 멀리서 순사가 온다 싶으면
    네째이모는 등잔에 든 외기름(석유)을 홀랑 마시고는 이내 얼굴이 노오란해져서 네 방 구석을 뒹굴었다 한다.

    그래야만 그 지긋지긋한 무서운 고문같은 질문에 모면할 수가 있으므로...
    한 겨울에도 다 큰 처녀들을 마당에 세워놓고 찬물을 조금씩 천천히 내려부었다던 순사들..
    온몸이 꽁꽁 얼어 붙어 들어가는 고문들...
    "니네 오빠를 어디로 숨겼지?"
    온방을 구둣발로 지근대며 벌집을 만들던 아픈 기억들을 이모들은 나눠 가졌다 한다.

    갖은 고문을 다 겪은 그 후로
    언제나 객담이 끓던 외할부지는 내가 유일한 말동무셨고 내게는 유일한 요즘의 티브이처럼 이야기 상자셨다.
    숱한 전설같은 이야기들만 가슴에 심어주신 채 내가 중학생이 되자 곧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보다 연하이신 외할부진 편찮으신 몸에 늘 오일장에 나가신 할머니를
    무척이나 기다리시는 걸 어린 눈에도 숱하게 보았다.

    "야야~~ 요조야 저어기... 혹 니 할매 아인가 봐라"
    외할머니 장에 가신날은 이런 일로 부르시길 대여섯 차례~~

    막상 할머니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날 내 쫓으신다.
    "퍼뜩 나가보거래이 퍼뜩~~"

    날래 달려나가서 할무이 짐을 받아들고 집으로 헥헥거리며 숨차 들어와서는
    "할배~~ 할배요~~"
    하고 아무리 불러도 아니계신다.
    "어라 좀 전까지만 해도 늘 여기 삽짝에 서 계셨는데.."

    여덟째, 막내 딸 이모에게
    "참말로 이상시럽따.. 할배는 하루종일 할매만 기다려 놓고는.."

    .............

    한 두어달 전
    그 막내 이모가 잠시 상경했다.
    근 삼일 밤을 잠도 자지 않고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인자 그만 자자"
    그래놓고는 또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막내 이모와 질녀(다섯살 차이)사이,
    형제와는 또 다른 함께 자란 친구같기도 한..반가움에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이모야 그 때 외할부지 와 그랬째 늘 그렇게나 할매 지다려 놓고는 막상 할매 들오시만
    뒷마당에서 엉뚱한 일이나 붙들고 계시고...?"

    '에그 바보야 니는 그것도 모리나.. 할배는 할매인테 늘 부끄러바하데~ 아마 연상이라 그래스까?
    늘 그라데.. 눈도 바로 몬 치다보고..조아는 하믄서..."

    "아 그랬꾸나...그래서..."

    이제사 아는 바보, 그래 그 게 사랑인가보다.

    또 이야기 끝에 이모가 하는 말이 어느날 나를 뭔일로 야단을 쳤더니 내가 달려 들더란다.
    그래서 패 주렸더니 힘이 어찌나 쎈지 마주 달겨들어 덤비더란다.
    해서

    "이너무 가스나 인자 우리집에 오지 마라" 하니까
    "가스나야 니나 우리집에 오지마라" 하는 이야기에 둘이 킥킥 대며 웃었다.
    "ㅋㅋ 싸운 기억은 쪼메 나는데.. 내가 그라더나.. 참말로 못됐때이 콱 쌔리 패주지?"
    "하이구..니를? 고집도 쎄고 힘도 쎄서.."

    방학이 끝나고 추수하기 까지는 한가해지면 막내 이모는 이질녀(조카)를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부산 나들이를 즐겨하곤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6,25,

    예전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다가 ...말 할 수 있으리~~
    차마 필설로 옮길 수 없는 빨갱이로 몰아치던 시절,
    동족상잔의 아픔을 깨닫고 햇볕정책을 펴고 있는 세상이 도래했으니 망정이지....

    이산가족들은 거의 다 만나보는 좋은 세상인데.. 외할머니 94세로 돌아가신지 10여년~
    92세 나시던 해 내가 보고 싶다시며
    김해에서 경기도까지 날 찾아 다니러 오신 정정하신 외할머니~

    오늘 외할무이가 그립따
    하나 아들을 가슴에 묻고 그립다 말 한마디 못해보고 어금니로 앙다물고 사셨을...

    어느 해, 여름 할머니에게서 냄시가 났다.
    할머니 몸에다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온몸 탐색전을 벌이던 나,
    드뎌 찾아내었다.

    숱이 별로 없어 머리를 묶어 비네(비녀)를 찌르던 그 검둥 헝겊에서 나는 물내였다.
    말릴 틈도 없이 축축한 채로 묶어 비틀어 쪽을 찌시니..
    그 굽굽한 습기가 시큼한 물내로 변해서 났던 것이다.
    그 물내가 할머니의 냄새로 내게 기억 되다니..

    빈틈없이 깔끔하셨던 할머니~~
    그래서 딸 여덟을 모질게 키우신 할머니,
    나에게만은 언제나 자상하시던 우리 외할머니~
    어느날 우연히도 이상시레 풍기던 그 시큼하던 물내라도 맡고싶다.

    내 낳아주신 엄마 아버지의 비중 못잖게 보고싶은 나의 외할부지 외할머니,
    아들하나 딸 여덟~
    그 귀한 아들을 이념의 강너머 보내놓고 맘껏 울지도 못했던 잿빛 암울한 세대를 살다가신

    그리운 내 외할머니~~




    *6,25 오늘 아침, 제가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 처음으로 입 열어 봅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외가에서 이모들은 아무도 이젠 오라비를 찾으러 들지 않는군요.
    아무튼 세상 많이 좋아졌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오형제는 자주 소근거렸습니다.
    "우리는 이담에 해외유학도 못 가~~ "
    사실이지 그 당시만 해도 이데올르기의 골은 깊어서 외삼춘이 월북자여도
    신원조회에 나타날 시절이었습니다.

    문학가 이문열님의 아비가 월북자가 되어 아예 취업도 포기한 채 붓을 들었든 게
    지금의 글쟁이 이문열을 만들었다는 웃지못할 비화가..
    정말 이데올르기가 뭔지?
    월북한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한 그 당시 먹물깨나 든 사람들은 공산당을 쫓은 게 아니라
    이론적 칼막스의 사회주의를 숭배했던 것 뿐이라는데, 비슷한 그 둘의 진정한 차이를 몰랐던 게지요.

    부르조아에 회의를 느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한다는 것이 아마도 사회주의에 입각하게 되는가 봅니다.
    전쟁이 나고 빨갱이로 몰아 세워지고 무차별 총살을 가하니
    살고자 할 수 없이 숨어 다니다가 쫓기듯 북쪽으로 울며 울며 떠난 저들인 것을...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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