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 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외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 많은 이론의 숲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이라든지, 또 이후 정립되어 온 '시론(詩論)'이나 시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1930년대쯤 아득하고 가난한 식민지 시대의 두메 마을 삼거리 주막의 늙은 주모가 역마살 탓에 기약 없이 출분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들려주는 하소연 같은 걸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요즈음 지식인이라든지 인문이라든지 사회라든지 하는 것 아닌, 온 몸으로 순박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제 가슴에 크게 울려오는 걸 느낍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는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너무 많은 이론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런 이론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시야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론에서 여러 가지를 얻어 와야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나 문화, 혹은 시에서, 이론은 모종의 장애가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시와 이야기하고 시와 더불어서 세상을 좀더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쪼록 이론보다는 여러분 가슴속의 시의 친구, 시의 연인, 시와 함께 오래 있어온 동행자들을 불러내 보기를 권합니다.
저는 미국으로 초빙 받아 동부의 하버드대와 서부의 버클리 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저는 '시는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이론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여러분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 나와 여러분이 만나는 시간은 가슴속에 들어있는 시를 꺼내서 시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애타는 황홀한 그리움의 시간이다'라고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론의 습관에 오래 젖어온 학생들은 '어, 저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눈알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군요. 그래서 첫 시간은 그렇게 낯설게 지내지만, 차츰 내 심장이 그들의 심장에 닿고, 내 넋이 그들의 넋과 얽히면서 강의실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가더군요. 학기말에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기념 촬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학문적인 것 혹은 과학적인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울음이 속 깊게 들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하지요. 돼지도 꿀꿀꿀 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봄밤의 소쩍새, 여름날의 뻐꾸기, 겨울날 기러기 들이 지나가면서 저 하늘 높이 떨어뜨리는 것, 우리는 그것을 '노래한다'든지 '소리를 낸다'고 표현하지 않고 '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두고 1950년대의 전후 모더니스트들은 한국말은 왜 노래한다 하지 않고 왜 운다고 하느냐면서 문제를 제기했지요. 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모국어의 이런 표현 형식은 엉터리이고 진부했겠지요. 3년 전에 불란서에 가서 시 낭송을 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노래한다는 말 대신 운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운다. 따라서 나도 울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내 시도 울음이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 말을 들은 청중들이 뭔가 무중력 상태로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더군요. 특히 불란서 시인들은 그 말에 미쳐서 한국에서는 '운다고 하느냐. 운다고 하느냐'면서 크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모두 잘 알다시피 불란서 시인 하면 폴 발레리 등 아주 지적인 시를 쓰는 사람들인데, 운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한자에도 울 명(鳴)자가 있습니다. 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기가 배고플 때 운다든지, 첫사랑에 좌절을 맛보고 김소월의 시 세계처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고 통곡하는 등 여러 가지 울음이 있습니다. 후르시초프 회상록에 보면, 독재자인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적인 독재자의 딸이 슬퍼하고 연민하는 걸 후르시초프가 건사하곤 했지요. 저는 그 회상록을 읽으면서 흐루시초프가 연민해 하면서 '숲 속에 가서 실컷 울고 오면 훨씬 나을 텐데, 울어야 할 숲조차 없구나' 하는 데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울음은 이처럼 인간의 맺히고 흐트러진 삶을 정화시켜 줍니다. 서양말로 한다면 '카타르시스'가 되겠지만, 우리 나라는 울음이 참 강한 민족입니다. 실컷 울고 나면 그 때 비로소 신세계가 만들어지지요. 피붙이 가운데 누가 원통하게 죽었거나, 찢어지는 아픔으로서의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거나 험악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비애를 겪었을 때 사람들은 많이 웁니다. 서양인들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그냥 울어 버립니다. 이런 정서는 우리가 그 동안 시를 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울음이라고 하는 일종의 삶의 형식, 어떤 수행 방식 울음도 수행입니다. 공부입니다. 무슨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 절간에 가서 참선을 하는 것, 이런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을 해나가는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울음 자체가 아주 기가 막힌 우리 삶을 정화시키는 수행 행위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이 가능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아! 이 일상을 다시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울음에 대한 이런 근원적인 의미 부여와는 상관없이 나도 옛날에는 눈물이 쓸데없이 많았습니다. 5월인가 6월쯤 등꽃이 필 무렵 문학을 하는 친구의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등꽃이 흐드러지게 마당에 피어 있고 확 달빛이 쏟아졌습니다. 그 달빛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울었어요. 그 때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일찍 들어가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지요. 처음에는 이 사람도 내 울음에 동조를 해서 '니가 우니까 나도 참 슬프다'면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술도 함께 마셨지요. 그런데 내가 폭포라도 쏟아져 나오듯 미치게 우니까, 나중에는 나에게 귀신들린 새끼라며 증오와 저주를 퍼붓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나는 미쳐서 막 울었지요. 새벽 3시 반 정도까지 울고 나니까 울음이 다 말라 버리더군요. '클레오파트라 시대에는 로마에는 눈물단지가 있었다더라. 눈물을 흘릴 때면 다이아몬드나 보석처럼 흘려서, 우리도 눈물단지나 하나씩 만들자'며 마구 울었지요. 새벽 4시쯤 부우 하고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우리 방에 귀신이 들어서 안 된다'고 추방해서 그 친구하고 10년 동안 절교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울음이 나한테는 오랫동안 있었어요. 지금도 조금씩은 있지만 울음이 10년씩 가다가 그 다음에는 불면증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껄껄걸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는데, 전에는 전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웃음은 위선자 아니면 생을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고,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웃고 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여겨져 이해를 안 했어요. 불면증이 10년이나 갔어요. 잠이 안 오니까 밤 12시쯤 되면 막소주를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곤 했지요. 그 때 술이 취해 있으면 이 세상에 내가 최고의 시를 쓴 것 같았는데, 다음날 낮 2시쯤 깨어서 보면 가장 졸렬한 시였어요. 밤에 술에 취해서 과장이 되었다가, 다음날 낮이 되어 과장이 다 꺼지고 나면 처참한 패잔병처럼 남아 있는 게 내 작품인 걸 많이 겪었죠.
이렇게 10년쯤의 세월을 보내다가 1970년의 어느 날 한 노동자의 죽음을 신문 기사에서 봤어요. 지금은 서울 무교동 골목의 낙지집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 때는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아주 맵고 짜고 독하고 이런 것만이 위안이 됐을 때지요. 통행 금지가 있을 때니까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 탁자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에 뻗어서 자곤 했습니다. 나중에 70년대, 8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으로 조사 받으러 다니고 잡혀가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재우고 할 때 그런 데서 훈련받은 게 도움이 되었어요. 좋은 침대에서만 잤더라면 7, 80년대를 겪어내는 데 좀 힘들었을 거에요. 그런 데서 인생을 막 굴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요. 70년대 한 노동자가 청계천에서 '일꾼들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면서 기름을 붓고 태워서 죽었는데, 그 때 나는 늘 내 죽음만 생각했어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나 같은 게 이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났나, 나는 빨리 이 세상에서 끝나야 할 존재다'라는 둥 늘 죽음을 생각하고 실천하다가 실패하곤 했었죠. 그랬는데 그 때 이 노동자의 죽음이 신문에 났어요. 이 자가 죽었는데 뭐냐 하며, 내 죽음하고 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슬슬 그 사람의 죽음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죽음의 환경이 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확 나한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잘 자고 코도 잘 골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6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3년을 산 적이 있는데, 원래 그 때는 살러 간 게 아니고 제주도 바다에 빠져죽으러 갔다가 너무 취해서 죽는 걸 잊어 버렸어요. 가방 속의 큰돌에 로프를 묶어가지고 내 허리에 묶어서 저 깊이 심해로 들어가, 안 떠오르도록 하려 마음먹었지요. 제주해협이 그때처럼 호수처럼 거울처럼 된 적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부드러워진 걸 젠틀 웨이브(신사 파도)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거울 같았습니다. 때마침 달은 비치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배 안의 매점에서 파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 명징한 이성만이 발달했습니다. 내가 죽음의 앞에 있으니까 술조차도 거절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의 공기가 좋아서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더군요. 계속 마셔댔는데 취하지 않고 결국 쓰러져 버렸지요. 부우 하는 뱃고동 소리에 깨어나 보니까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매고 죽는 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제주에 살게 되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다음에 읽어드릴 시의 배경의 일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옛날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 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그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종합해서 다른 시세계를 지향하려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세상을 다니기도 하고 여러 유혹도 있었습니다만, 나는 내 조국의 기호로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모국어는 참으로 심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에 이어, 심지어는 우리말을 없애 버리고 영어만을 쓰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저러면 저런 주장들이 나왔겠는가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열려진 상태일수록 우리 민족의 실체를 유지해준 우리 모국어는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우리 모국어를 지키는 한 전사가 될 생각입니다. 우리말 없이는 세상과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결코 단일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은 여러 민족, 다른 성, 다른 얼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多)'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다문화 정책을 쓰지 않습니까. 이런 때 우리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민족 이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맙니다. 미국의 동부, 혹은 뉴욕에서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를 그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포들이 어려운 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서 의사도 많이 배출하고 부자들도 많이 나왔습니다만, 이 점에서는 철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중국인, 일본인들은 우리와 달리 그들의 문화를 서구 사회에서 드높이 펼쳐 나갑니다. 문화 없이는 넓은 세상에 나가서 행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도구로서도 우리의 모국어와 문화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졸시 '폐결핵'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화가 친구에게 준 것입니다. 이십대에 이미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받은 친군데, 그가 막 출범한 현대시인협회에 보낸 것입니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짓드 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번의 긴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에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긴 기도와 소름 끼는 아래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 빛 연애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이 시는 현실과 허구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허구가 서로 섞여 버린 것이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화가 저도 모르게 역사로 돌아오고 역사인가 하면 다시 신화의 세계로 가는 걸 봅니다. 다른 나라의 상고사를 보면 어느 날은 전설이었다가, 다시 역사로 오고하는 걸 봅니다. 현실과 허구가 분화되지 않은 어떤 미칠 듯한 애매몽롱한 아주 불확실한 상태죠. 우리가 세상살이를 해나갈 때는 대체로 이분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허구는 따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지금 진행되고 있고 이렇죠. 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폐결핵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까지만 해도 폐결핵이라면 민법상 장가가고 시집갈 자격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민법상의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기침하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오갔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서 건강 진단을 해보았는데, 그때 비로소 한쪽 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떠돌고 술만 먹고 하는 사이에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떠나 버린 거지요. 그런 걸 보면 내가 염원하던 허구, 그것이 나중에 현실로 된 것입니다. 한 시인의 꿈이 냉엄한 현실로 진행된 거지요. 이것이 곧 문학을 이해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주도 시대의 '묘지송(墓地頌)'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참 무덤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가면 그곳의 무덤을 세어 보곤 합니다. 이것은 제주도 사라봉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씌어진 시입니다. 중앙의 잡지에 발표되면 그것으로 한 달을 위안을 받고 살던 시절, 시인 김수영이 좋다고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지요.
지난 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에게만 가을은 집 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뒤가 있다고 일러준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서 시에 대해 진지하고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제 개인을 통해서 어떻게 굴절하고 어떻게 변모되고 이끌어져 왔는가를 얘기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시의 구체성이 다가가기 바랍니다. 제가 아까 이론을 거부한 이유가 이것이죠. 그때 죽으러 제주도에 갔는데, 구 죽음이 새로 삶을 살게 해준 은총을 받았죠. 그래서 「해변의 운문집」과 「제주가집」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쓴 '내 아내의 농업(農業)'이라는 시입니다.
돌아온다. 어떤 장님도 눈을 뜨게 한다. 풀밭에서 온 이웃집 목우(牧牛)는 긴 입안이 가득하게 헛새김질을 한다. 제 주인의 잘못을 오래오래 걱정할 때도 있다. 청과물 장에 짐을 부리고 온 내 만혼(晩婚)의 처음, 아직 아내는 들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미농(美濃) 무우로 담근 깍두기와 찬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홍차를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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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高銀)
2005. 10. 21.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