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 석굴암 일몰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9번지.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석불사, 석굴암

 

 

어린 날의 수학여행, 그 토함산에 다시 올랐어라~

 

 

경주여행 첫 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들(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제 1의 타깃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집에서 싸가지고 간 간단한 점심을 먹고는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었다.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강원도 첩첩 두메산중 길 마냥 꼬불꼬불 실로 구절양장이다.


산길에 눈이 수북히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담임 선생님께서 일일이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주며 잠에 취한 어린 우리들의 등을 떠밀던

바로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의 귀함도 전혀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용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안마용 등 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칠기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모두는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씩이나
이를 닦다가 피가 나는 아이~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 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단숨에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산에 오르기 힘들었다는 기억뿐이니...이거야 원,

어디에서 뭐가 잘 못된 것이었는지..?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머리가 희끗한 나이에 이제서야 천년고도의 여행을 곱씹으며 불교문화와 신라 문화유산이나 뒤늦게사

공부하며 짚고 넘어가야겠다.

 

 

석굴암 향하는 길을 승용차로 오르며 모두는 어린 초등시절, 걸어올라왔던

수학여행길을 반추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도 이렇게 한참 힘겹게 오르는 길을..?

꼬불꼬불 구절양장이 따로 없다. 영낙없는 강원도 두메산길이다.

몇 번 토함산 계곡 절경을 찍으려 멈추어 섰지만 육안으로는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는데 안개때문에

카메라에는 다 잡히지 못했다. 그냥 차 안에서 찍은 근경만 두어장 올려보며...

눈쌓인 설경을 휙휙 뒤로 하고...토함산 정상이 해발 700이 넘는다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그렇다면 석굴암은 못해도 어림잡아 600고지 이상은 족히, 될 것이 아닌가?

 

 

사진에는 다 담아오지 못했지만 토함산의 산세나 수목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국제적

관광도시, 경주의 명산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국사, 석굴암, 보문관광단지, 무열왕릉 등 신라

고적관광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조용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산림내 휴식공간이란다.
그러게...산세가 그 멋이 뭔가 다르더라니 다음에 경주에 올 때는 불국사에서 필히 토함산을 올라야겠다.

토함산 정상에 올라 천년고도의 정기를 다시금 느껴봐야겠다.

 

 

[토함산]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5명산 중의 하나로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또한 소나무, 참나무 숲으로 덮여 녹음이 짙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굴암이 나타나는데 이 길은 산허리를 따라 돌아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관광객들이 이용한 길이다.
60년대 이전에는 이 길을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오르내렸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이 산이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산이 바닷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토함산 자연휴양림(휴양림사무소 054-772-1254)

 

 

주차장에다 차를 두고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다시 걸어야 한다.

눈바람이 차면서도 상쾌하다.

바지런히 걸어가며 불쑥 어린 날 언니의 난데없는 옛 이야기에 모두는 까르르~ 자지러졌다.


너무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눅눅하고

으스스한데, 사천왕도 싫고 무섭고..." 까지꺼 이거 볼려고 힘들게 올라왔나?' 싶어서 들고있었던

지팡이로  겁도 없이 X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로 만든 차단 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꼽을 쥐었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내가 그랬다면 또 몰라도?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ㅎ~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조금 힘들다가 웃음보가 터지는 바람에 가뿐하다.

 

↓ 복원된 바깥 모습 ↑

 

석굴암 도면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
(重祠)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 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복원하며 교체된 구조물들, 귀중한 신라인의 손길이 스민 소중한 유물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랑할만한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시티N님들과 공유하곺은 욕심에 그만,

처음 들어오자 잽싸게 찍느라...센터도 틀어지고, 그랬다. 점점 대담해져서 위엣 사진을 찍었지만

 아미타불  이마에 보석은 일제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눈에 반짝! 되비쳤다.
개보수 때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잘 박혀 있었다.

 

석굴암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그대로 비친다.

석불사 전경

 

무척 단아해 보이는 석불사 사찰 경내, 출입금지란 푯말이....못내 서운~

 

석불사 마당의 감로수 ~ 정말로 물맛이 달았다.

 

↑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을 뒤로 바라보며 ↓

 

토함산 일출은 유명하다.

경주 토함산과 석굴암의 일출 장면은 우리의 자랑거리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끼고 있는 토함산은 동해의 햇살이 가장 먼저 와 닿는 땅이다. 바다가 끓어 오르듯 붉은 구름을 피워 올리다가 순식간에 솟구치는 해돋이는 정초에 한 번쯤 가져 볼 만한 경험일 것이다.

 

내가 만난 토함산 일몰

 


 

석굴암의 건축 개요가 설화에 기인하자면,

이 설화(아래내용글)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는데....

 

니체가 그랬던가?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미래를 알려면 지금 행하고 있는 나를 보면 된다는,

 

되돌아 나오는 길에 일출 못잖은 토함산 일몰을 만났다.


'석굴암 일출' 대신이다.

 

역시나 유수깊은 천년고도 경주의 토함산다운 장관이다.

 

 

 

 

 

글/사진:이요조(2006년2월11일)

 

 

 

 

'토함산 - 송창식'

 

 


김대성 [金大城, 700~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관련업소 샵블로그 바로가기
석굴암

054-746-9903
GO
토함산자연휴양림

054-772-1254
GO

'여행발전소 > 문화유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야경  (0) 2006.02.20
기울어진 첨성대  (0) 2006.02.20
여행 첫 날(석굴암에 오르다)  (1) 2006.02.16
아! 이순신!  (0) 2006.01.11
인평대군  (0) 2006.01.09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경주여행 첫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이참에 검색하여 문화유산이나 공부하며 짚고 넘어갈 일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경주여행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언니 말이 더 우습다.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집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으스스해서 그 지팡이로
부처님 떵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를 잡았다.
무지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그 것만해도 힘들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여러님들과 공유하자는 욕심에 그만,
부처님 이마에 보석은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누에 반짝! 비쳐왔다.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 Vitalli Chaconne - Zino Francescatti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비친 모습이 더 재미난다.

나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다.
일출대신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

 

 

 

 

 

 

 

 

 

 

 

 

토함산 - 송창식

 

 

흐르는 곡은 이수인작곡의 "석굴암"입니다.

 

 

 

 

 

 

'여행발전소 > 문화유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울어진 첨성대  (0) 2006.02.20
토함산 석굴암의 일몰  (0) 2006.02.19
아! 이순신!  (0) 2006.01.11
인평대군  (0) 2006.01.09
③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의 묘소  (0) 2006.01.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