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極東)의 진미’ 은어, 여름 강에 오르다

 

영남의 한 선비가 “더 이상 못먹고 죽는 건 괜찮으나 상놈의 입에 들어갈까 슬프다”고 유언했다는 ‘은구어(銀口魚)’. 중국 서진(西晋)의 장화가 쓴 박물지에 “먹고 남은 뼈를 강물에 버리니 그것도 물고기로 되살아났다”고 표현한 ‘샹위(香魚)’. 미 스탠퍼드대 초대총장이자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조던 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 “가장 맛있는 물고기가 뭐냐”고 묻자 일본인이 내놓았다는 ‘아유(鮎)’. 조던 박사가 맛을 보고 무릎을 치며 내뱉은 “Sweet fish!”. 이것은 모두 은어(銀魚)를 가리키는 각 나라의 이름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에서만 나는 은어는 2000년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극동(極東)의 진미다.

‘민물고기의 귀족’ 은어는 날고기건 익힌 고기건 맛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1급수 여울에서 물이끼만 먹고 살아 잡내가 없고 대신 은은한 수박향이 살 속에 배어있다. “쏘가리, 꺽지, 산천어가 담수의 미어(味魚)로 손꼽히지만 은어의 맛에는 못 미친다”는 게 물고기 전문가인 낚시인의 중평. 은어는 연어와 같은 모천회귀어로 한해살이다. 바다에서 겨울을 난 치어는 강물과 바닷물의 수온이 엇비슷해지는 4월부터 강으로 소상한다.

 

은어의 성장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하루에 1.5㎜, 0.37g씩 자란다. 6~8월 뜨거운 여름이 은어의 청춘기다. 강의 중류에서 20~28㎝ 성어로 자란 녀석들은 물줄기가 세찬 여울의 돌밭에 자리를 잡고 밤을 틈타 이끼를 갉아먹거나 상류로 이동한다.

은어가 가장 맛있는 시기는 6~7월. 유리아미노산 중 단맛이 강한 글리산, 프롤린이 이때 최고치를 보인다. 버들잎(15㎝)만큼 자란 ‘버들은어’를 최고급 횟감으로 꼽기도 하지만 18~23㎝ ‘댓잎은어’라야 짙은 향이 밴다. 8~9월 25㎝ 이상 자란 것은 굽거나 훈연해서 먹는다.

 

9~11월 산란기에 접어든 은어는 하류로 내려가서 한 마리의 암컷과 7~9마리의 수컷이 뒤엉켜 모래자갈을 헤집는 격렬한 난교 끝에 숨을 거둔다. 2주 만에 부화한 치어는 바다로 향한다.

 

 

횟집서 파는 은어는 양식한 것

 

은어의 계절 여름이 오면 섬진강 상류 곡성군부터 하류 하동군까지 은어를 맛보려는 관광객이 긴 행렬을 이룬다. 동해안으로 흘러드는 영동 지역의 울진 왕피천, 삼척 오십천, 양양 남대천도 이름난 은어 산지다. “씨알은 섬진강이 앞서나 맛은 영동산이 낫다”고들 한다.

 

 

강을 끼고 드라이브하면 물소리 시원한 여울목마다 긴 낚싯대를 펼쳐든 은어낚시인을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그들로부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연산 은어를 몇 마리 얻을 수도 있다. 사실 섬진강변 횟집에는 섬진강 은어가 없다.

 

횟집에서 파는 은어는 모두 양식산이기 때문이다. 동작이 잽싸고 돌 밑에 박혀 사는 자연산 은어는 투망이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아 횟집에 그 양을 조달할 수 없다. 양식 은어도 쫄깃하고 담백한 맛은 그대로지만 물이끼를 먹지 못해 수박향이 안 난다. 아무렴 맛이 자연산만 하겠는가. 횟집 주인이 은어낚시꾼이라면 모를까 ‘진짜 은어’를 사먹기란 극히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어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푸른 대숲의 바람, 물새 한가로운 강변에서 그 이상 어울리는 먹거리를 찾기란 힘들다. 올리브그린 등판에 은빛 복부, 아가미뚜껑의 황금빛 테…, 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은어를 보면 군침을 삼킨다.

 

배 주리던 옛날 기름진 은어는 강촌의 식량이었다. 그물을 치거나 돌로 물길을 막아 은어를 잡았다. 30년 전만 해도 두만강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모든 하천에서 떼지어 살았으나 1970년대 이후 진양호(1970·남강), 팔당댐(1973·한강), 안동호(1976·낙동강), 대청호(1980·금강), 영산강 하구언(1981), 낙동강 하구언(1987) 등의 댐과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은어의 물길은 차례차례 막혔다. 왕실에 진상하던 낙동강 상류의 봉화 은어는 멸종했고 밀양강 은어와 탐진강, 금강 은어도 거의 사라졌다. 현재 큰 강으로 유일하게 댐이 없는 섬진강과 동해안의 몇몇 천변만 은어가 소상하는 하천으로 남아 있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1820)에는 “양주 왕상탄(현재의 왕숙천)의 은어가 가장 맛이 좋다”고 했으니 한강에도 은어떼가 소상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등뼈 사이에 지방이 뭉쳐 있어 맛이 담백하며 비린내가 없다. 살아있을 때 오이향기가 난다.… 소금으로 간한 것을 먼불에 은근히 구워먹으면 맛과 향이 좋다”고 했으니 그 맛과 먹는 요령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는 은어를 신성시하기도

 

 

 

한·중·일 삼국 가운데 은어를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 9년(209) 기록에 “황후가 화전국 송포현의 물가에서 굽은 바늘을 드리우며 ‘나는 서방에 있는 재국(財國:신라를 지칭. 신공황후가 연오랑과 함께 건너간 신라의 세오녀란 설이 있다)을 구하려 한다. 이 일이 성공할 것이면 이 강의 물고기는 내 바늘을 물어다오’ 하면서 낚싯대를 걷어올리자 세린어(細鱗魚·은어)가 올라왔다”는 대목이 있다. ‘鮎’이란 이름은 물고기로 점을 쳤다는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본인은 은어를 신성시하기까지 한다.

 

그런 일본인이 첫손에 꼽는 은어는 공교롭게도 한국산이다. ‘조선 은어’의 명성은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을 건넜다. 오늘날에도 매년 150~200명의 일본낚시인이 개인으로 혹은 여행사투어로 은어낚시 관광을 오고 있다.

한국의 은어낚시인이 불과 300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다. 지난 6월 21일 산청군 경호강에서 만난 안도 요시미(58·나고야)씨는 “한국 은어는 크고 맛이 좋으며 성질이 용맹하여 파이팅이 좋다”고 했다. 안도씨 일행을 안내한 이운(41·서울)씨는 “일본엔 은어 낚시터가 훨씬 많지만 마릿수나 씨알이 한국에 못 미친다”고 했다.

 

은어는 지렁이 따위의 미끼를 먹지 않기 때문에 ‘놀림낚시’(일본에선 ‘도모츠리(友釣)’라 부른다)라고 하는 대단히 독특하고도 어려운 낚시로만 걸어낼 수 있다.

 

은어(씨은어)를 미끼삼아 다른 은어(먹자리 은어)를 낚는 것이다. 바윗돌을 끼고 ‘먹자리’를 형성한 은어는 제 영역을 침범하는 은어를 매몰차게 공격하는데 그 습성을 이용, 씨은어를 코 꿰어 낚싯줄에 연결하고 배지느러미에 세발갈고리바늘을 달아서 여울의 바위 뒤쪽으로 이끌어주면 먹자리은어는 침입자의 배를 들이박다가 갈고리바늘에 걸린다.

 

안도씨 일행은 천혜의 은어 품종을 보유한 한국의 정부가 수산자원과 낚시자원으로 개발하지 않는 데 대해 의아해했다. 은어낚시인 박경환(48·수원)씨는 “연어보다 은어가 더 투자가치 있는 어종이다. 우리나라 남대천을 찾는 연어는 실버나 레드새먼보다 하급의 첨새먼(chum salmon)인 반면 은어는 세계 제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어는 정부의 보호정책이 없이도 가혹한 환경변화에 스스로 적응해나가고 있다. 바다로 내려가는 물길이 끊기자 크고 깊은 호수를 바다 삼아 겨울을 나는 ‘육봉형(陸封型) 은어’로 변모한 것이다. 육봉은어가 처음 발견된 곳은 1995년 안동호였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청평내수면생태연구소 이완옥 박사는 “안동호와 상류의 명호천에서 자연발생적 육봉은어군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안동호 은어는 정치망에 의한 남획과 배스의 공격을 못 견디고 1997년경에 멸종했다.

 

영덕·봉화 등 은어축제도 확산

 

 

그 후 9년간 사라졌던 육봉은어가 최근 다시 살아났다. 작년 여름 진양호 상류 산청군의 경호강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은어떼가 발견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대청호 상류 옥천군의 금강 유역에 또 그만한 양의 은어가 발견됐다.

 

산청군은 1992년부터 밀양내수면연구소에서 채취한 수정란 500만개씩을 매년 방류해온 결과지만, 옥천군의 경우는 난데없이 나타난 노다지다.

 

이승로(55) 옥천군 축산계장은 “1997년에 봉화군에서 채취한 은어 수정란 300만개를 대청호 상류에 방류한 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작년 가을에 ‘이상한 물고기가 빙어망에 든다’는 어민의 얘기를 듣고 충북내수면연구소와 공동조사해 은어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산청군과 옥천군은 은어자원의 보호 증식, 은어축제 등 은어를 주민소득으로 연계할 수 있는 사업기획에 착수했다.

 

낚시인에 의하면 “순천시의 상사호 상류, 단양군의 충주호 상류에서도 제법 많은 양의 은어가 발견됐다”고 한다. 옥천군이 은어 방류 사실을 9년이나 잊었듯이 각 시군과 지역 어촌계, 양식업자 개인에 의해 소량씩 산발적으로 이뤄진 방류량과 방류시기는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은어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은어축제도 확산되고 있다. 올해로 6번째를 맞는 영덕군의 ‘오십천 은어축제’를 비롯해 ‘봉화 은어축제’ ‘왕피천 섬머페스티벌’ ‘탐진강 은어축제’ ‘서귀포 강정천 은어축제’ 등이 7월 말과 8월 초에 잇달아 열린다. 경북수산자원개발연구소에서는 지난 3월부터 왕피천 은어의 수정란에서 부화한 은어 치어 40만마리를 키워서 봉화군을 비롯한 경북도내 12개 시군의 하천에 무상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육봉은어가 아무리 번성해도 바다에서부터 올라온 해산(海産) 은어의 순수한 맛과 추억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한여름으로 치닫는 이 시간, 모든 하구에는 은어가 서성이고 있다. 낙동강 하구둑에 막힌 은어는 마산 해안이나 거제도로 들어간다.

 

그러나 물길이 짧은 옹색한 하천에선 크게 자라지 못한다. 바닷가 하천에서 간혹 잡히는 은어는 10~15㎝에 머물고 향기도 약하다. 돌아갈 강이, 여울이 쾅쾅 쏟아져내리고 이끼가 파릇파릇 자라는 강이 그들에겐 없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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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글, 등나무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서 퍼온 글, 나는야 이렇게 차례대로 세울 줄은 안다네~~

에쿠야,,,4가 거꾸로네...여기서 중요한 건데...흑싸리가 늘어지는 등나무라는데.../이요조

 

(펌글)

 

고도리연구

먼저 고도리는 일본말로서 고는 5를 뜻하고 도리는 새를 뜻합니다.

그래서 고도리 3장을 보시면 휘파람새 1마리, 종달새 1마리, 왜가리 3마리 합쳐서 총 5마리의

새가 있음을 아실 수 있을겁니다.

그럼 지금 부터 고도리에 나와 있는 새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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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시간의 사투 끝에 완성하고야 말았습니다. 꼭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고도리는 일본말로서 고는 5를 뜻하고 도리는 새를 뜻합니다.

그래서 고도리 3장을 보시면 휘파람새 1마리, 종달새 1마리, 왜가리 3마리 합쳐서 총 5마리의

새가 있음을 아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답변 내용중에 백과사전 내용이 있는데 이것들은 고도리에 나오는 새의 배경과 관련이

깊으므로 읽어 보시면 좋을듯 싶네요.

그럼 지금 부터 고도리에 나와 있는 새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1월 솔광의 두루미

(백과사전)두루미[Japanese crane]
몸길이 136∼140cm, 날개편길이 약 240cm, 몸무게 약 10kg이다. 온몸이 흰색이다.머리꼭대기는 피부가 드러나 붉고 이마에서 멱·목에 걸친 부위는 검다. 날개의 안쪽 둘째날개깃과 셋째날개깃은 검정색이고 나머지 날개깃은 흰색이다. 꽁지를 덮고 있는 둘째날개깃이 검정색이므로 앉아 있거나 걸을 때는 마치 꽁지가 검은 것처럼 보인다. 한 살된 어린새는 검정색 부분이 누런 갈색이며 만 3년이 되어야 완전히 검정색이 된다.

시베리아의 우수리지방과 중국 북동부, 일본 홋카이도 동부 등지에서 번식하며 겨울에는 남쪽의 중국 남동부와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 겨울을 난다. 일본의 홋카이도산 두루미는 번식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텃새이다. 둥지는 땅 위에 짚이나 마른 갈대를 높이 쌓아 올려 짓고 6월경 한배에 2개의 알을 낳는다. 알의 크기는 6.5×10cm 정도이다. 암수 함께 품어 32∼33일이면 부화하고 부화한 지 약 6개월 동안 어미새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먹이는 주로 미꾸라지·올챙이·갯지렁이·다슬기 등 동물성이나 옥수수나 화본과 식물의 씨앗도 먹는다. 동물원에서는 동물성 먹이와 배합사료를 먹인다.

한국에는 예로부터 10월 하순부터 수천 마리의 두루미떼가 찾아와 겨울을 났으나 지금은 대성동 자유의 마을, 경기도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 주변의 비무장지대 부근과 인천 및 강화도 부근의 해안 갯벌에 120∼150마리씩 찾아와 겨울을 날 뿐이다. 천연기념물 제202호(1968년 5월 30일)로 지정되었다. 국제조류보호회의(ICBP)와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의 《적색자료목록 제2권:Red Data Book 2》에는 국제보호조 부호 제46호로 등록되어 있다. 《적색자료목록》이란 전 세계의 멸종 위기에 빠진 동식물 목록과 실태 및 보호대책 등을 수록한 책자이다. 민간에서는 평화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 그림이나 자수 등에 그렸으나 실제로 이 그림은 두루미[鶴]가 아니라 황새[]가 잘못그려진 것이라 한다. 두루미의 수명은 지금까지 검은목두루미의 86년이 최고 수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루미는 겨울철새입니다. 그래서 1월을 상징하는 솔에 나와 있습니다."


2월 매조열의 휘파람새

화투짝 2월은 흔히 '2매조'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 매(梅=うめ)는 물론 매화요 조(鳥=とり)는 새입니다. 새는 새인데 무슨 새일까요? 화투짝 2월의 이 새를 일본에서는 うぐいす(휘파람새)라고 합니다.
이 새는 별명이 春告げ鳥(はるつげどり = 봄 알리는 새)라고도 하니, 매화와 더불어 초봄 자연의 절묘한 조화인 셈입니다.

그래서 일본어에는, 썩 잘 어울리는 어떤 짝을 가리켜,
梅に鶯(うめにうぐいす = 매화에 휘파람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 휘파람새가 꾀꼬리인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였습니다. 휘파람새가 따로 있습니다.

(백과사전)휘파람새[bush warbler]
몸길이는 수컷이 약 16cm, 암컷이 약 13cm이다. 윗면은 회갈색이고 아랫면은 회색을 띤 흰색이다. 꽁지는 둥글다. 높고 맑은 울음소리로 잘 알려진 새인데, 울 때는 부리의 선명한 오렌지색 아귀가 눈에 띈다.

1년 내내 단독 또는 암수 함께 생활하며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겁이 많아 수풀을 잘 떠나지 않는데, 수컷은 일정한 세력권을 점유하며 그 범위가 좁기 때문에 좁은 면적에 여러 마리가 서식한다.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하지만 높은 꼭대기에는 앉지 않고 관목이나 키가 큰 풀 사이에 들어가 먹이를 찾는다. 높이 날지도 않고 먼거리를 날아가지도 않는다. 5∼8월에 4∼6개의 알을 낳아 약 14일 동안 품는다. 먹이로는 딱정벌레·나비·매미·파리·벌 등의 곤충과 유충을 잡아먹는다.

"매화 나무가지에 홀로 앉아 있는 화투장안의 모습이 휘파람새의 서식이나 습성과 잘 어울리네요."


4월 흑싸리의 종달새

저도 이 글을 적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등나무를 우리가 흑싸리로 잘 못 부르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왜냐하면 등나무가 일본 전통시의 시어로 쓰이는 여름의 상징이랍니다. 물론 백과 사전을 찾아봐도 흑싸리라는 식물은 없습니다. 그냥 싸리나무는 있죠.

관련근거

(전략)...흑싸리로 잘못 읽고 있는 4월의 등나무는 일본 전통시의 시어로 쓰이는 여름의 상징이며 각종 행사시 가마에 장식하기도 하고 가문의 문양으로 쓰이는 등 일본인에게 친숙한 식물이다...(후략)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조규철 교수의 홈페이지

(백과사전)등나무[Japanese wistaria]
등, 참등이라고도 한다. 여름에 뙤약볕을 피해 그늘을 만들기 위해 흔히 심는 나무덩굴이다. 야생 상태인 것도 있으나 사찰과 집 근처에서 흔히 자란다. 오른쪽으로 감으면서 올라간다. 잎은 어긋나고 홀수 1회 깃꼴겹잎이며, 13∼19개의 작은잎으로 된다. 작은잎은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끝이 뾰족하다. 잎의 앞뒤에 털이 있으나 자라면서 없어진다.

꽃은 5월에 잎과 같이 피고 밑으로 처진 총상꽃차례[總狀花序]로 달리며, 연한 자줏빛이지만 흰색도 있다. 열매는 협과이며 부두러운 털로 덮여있는 꼬투리로 기부로 갈수록 좁아지고 겉에 털이 있으며 9월에 익는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하다. 꽃말은 ‘환영’이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등(for. alba)이라고 한다.

아무튼 논쟁의 사유가 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냥 참고하세요. 우리가 이글에서 알고자 하는 바는 새의 종류와 의미니깐요.

(백과사전)종다리[skylark]
몸길이 약 18cm이다. 윗면은 갈색 바탕에 검정색을 띤 세로얼룩무늬가 많고 아랫면은 잿빛 바탕에 가슴에 갈색 세로무늬가 있다. 머리에는 작고 둥근 갓털이 있다. 가까이서 보면 연한 황갈색 눈썹선이 보인다. 꽁지는 길고 흰색 바깥꽁지깃이 뚜렷하다. 한국 전역에서 번식하는 흔한 텃새이자 겨울새이다. 중부 이남에서는 겨울철 이동 시기에는 30∼40마리에서 수백 마리씩 겨울을 나는 무리를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탁 트인 평지나 농경지·구릉 등지에 모여든다. 눈이 내린 뒤에는 무리지어 행동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고, 봄과 여름에는 암수 함께 생활한다.

수컷은 텃세권을 가지고 있으나 범위는 비교적 좁다. 땅 위에서 양쪽 다리를 교대로 움직여 걸어다니면서 먹이를 찾는다. 배를 땅에 붙이고 쉬기도 하며 모래로 목욕도 한다. 날 때는 날개를 완만하게 퍼덕여 난다. 번식기의 수컷은 텃세권에서 수직으로 날아오른 뒤 날개를 심하게 퍼덕여서 한곳에 정지해 지저귀다가 다 지저귀고 나면 다시 내려앉는 행동을 한다. 둥지에 돌아올 때는 옆으로 흔들흔들 난다. 3~4월에지저귀기 시작하는데, 따뜻한 지방에서는 1월부터 지저귀기 시작하며 암컷을 부르기 위해서보다는 텃세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저귀는 경우가 많다.

강가 풀밭이나 보리밭·밀밭 등지에 흙을 오목하게 파서 둥지를 틀고 3∼6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품은 지 11∼12일이면 부화하고 새끼는 부화한 지 9∼10일이면 둥지를 떠난다. 식성은 잡식성이다. 식물성 먹이로는 잡초를 즐겨 먹는데, 주로 화본과와 사초과 식물의 씨앗을 먹는다. 동물성으로는 딱정벌레·벌·나비의 유충이나 매미·파리·메뚜기 따위를 잡아먹는다. 영국에서 일본에 이르는 북위 30° 이북의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분포하고 번식지의 남쪽 지역에서 겨울을 난다. 농약 등의 피해로 수가 점차 줄어들어 근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호조이다.

"강가 풀밭이나 보리밭·밀밭에 서식 한다고 그러니 4월 등나무 배경으로 잘 맞습니다."


8월 공산열의 철새

새가 날라가는 방향의 해석에 따라 새의 종류가 달라지므로 우선은 철새라고 명시하였습니다.
흔히 공산열의 억새 혹은 으악새(왁새)라고 많이 부릅니다. 이말은 근거로 새를 밝히자면 억새는 백과사전 찾아보시면 식물이름이므로 제외시키고 으악새는 어떤 분들은 억세풀을 말한다고 하고 어떤분들은 왁새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왁새는 바로 왜가리를 뜻합니다.

관련근거 - 한겨레신문 2002.11.10(일) 18:32

‘으악새’는 풀이 아니다/ 정재도


1980년대까지의 사전들에

“으악새:‘억새’의 방언.”

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으악새’가 ‘억새’인 줄로 알고들 있다.

김능인이 노랫말을 짓고,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고복수가 노래를 부른 ‘짝사랑’ 첫절에

“아 ∼ 으악새 슬피 우니 … 여울에 아롱 젖은 … 강물도 출렁출렁 …”이라고 나온다. 그러고 보니 ‘으악새’가 물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억새’는 산에나 들에 나서 자라는 풀이라 물과 관계가 없고, 울지도 않는다. ‘억새’의 사투리는 사전마다 ‘웍새’라고 되어 있다.

한편, 사전마다 ‘왁새’가 ‘왜가리’의 사투리로 되어 있다. ‘왁새’는 남쪽에서 봄에 우리나라에 와서 논이나 강, 호숫가 물에서 살다가 가을에 돌아가며 슬피 우는 철새다.

소리도 이 ‘왁새’가 ‘웍새’보다 ‘으악새’와 가깝다.

1990년대에 들어서 <우리말 큰사전>에 둘 다 살려서

“으악새1: → 억새”

“으악새2: → 왜가리”

라고 했는데, 앞엣것은 잘못이다. <국어대사전> 3판에 덩달아서 “으악새:①억새(경기) ②왜가리(평안)”라고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이라면 마땅히

“으악새:‘왜가리’의 사투리”

라고 바로잡아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였다.

‘한겨레’ 독자들은 ‘으악새’가 ‘풀’이 아니라 ‘새’라는 점을 새겨두자.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왜가리는 여름 철새이고 기러기는 겨울 철새입니다.
따라서 8월 공산열에 날라가는 철새가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면 떠나가는 이미지로 해석 가능하므로 왜가리이고 앞모습을 보이는 것이면 다가오는 이미지로 해석 가능하므로 기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화투장에는 옆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 할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검색을 해보면 공산열의 철새를 억새라고 표현한 글은 많으나, 기러기라고 표현한글은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수설이라 할 수 있는 왜가리쪽에 비중을 두겠습니다.

(백과사전)왜가리[gray heron]
몸길이 91∼102cm이다. 한국에서 보는 왜가리과에서 가장 큰 종이다. 등은 회색이고 아랫면은 흰색, 가슴 옆구리에는 회색 세로줄무늬가 있다. 머리는 흰색이며 검은 줄이 눈에서 뒷머리까지 이어져 댕기깃을 이룬다. 다리와 부리는 계절에 따라 노란색 또는 분홍색이다. 한국에서는 흔한 여름새이며 번식이 끝난 일부 무리는중남부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도 하는 텃새이다. 못·습지·논·개울·강·하구 등지의 물가에서 단독 또는 2∼3마리씩 작은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 주로 낮에 활동한다. 날 때는 목을 S자 모양으로 굽히고 다리는 꽁지 바깥쪽 뒤로 뻗는다. 이동할 때는 밤에도 난다.

침엽수·활엽수림에 집단으로 번식한다. 중대백로와 섞여 번식 집단을 이루거나 단독으로 무리를 짓는다. 수컷은 둥지 재료를 나르고 암컷이 둥지를 튼다. 4월 상순에서 5월 중순에 한배에 3∼5개의 알을 하루 건너 또는 3∼4일 간격으로 1개씩 낳는데 암수 함께 1개 또는 2개째 알부터 품기 시작한다. 25∼28일 동안 품은 뒤 부화하면 50∼55일 동안 암수 함께 기른다. 먹이는 어류를 비롯하여 개구리·뱀·들쥐·작은새·새우·곤충 등 다양하다.

백로와 함께 집단으로 찾아와 번식하는 곳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충청북도 진천군 노원리(천연기념물 13), 경기도 여주군 신접리(천연기념물 209), 전라남도 무안군 용월리(천연기념물 211), 강원도 양양군 포매리(천연기념물 229), 경상남도 통영시 도선리(천연기념물 231), 강원도 횡성군 압곡리(천연기념물 248) 등이다. 북부에 사는 번식집단은 겨울이면 남쪽으로 이동하나 남부의 집단은 주로 정착하여 텃새로 산다. 한국·일본·중국(동북부)·몽골·인도차이나·미얀마 등지에 분포한다.

(백과사전)기러기[wild goose ]
한자어로는 안(雁)·홍(鴻)이라 쓰고 옹계(翁鷄)·홍안(鴻雁)이라고도 한다. 몸은수컷이 암컷보다 크며, 몸빛깔은 종류에 따라 다르나 암수의 빛깔은 같다. 목은 몸보다 짧다. 부리는 밑부분이 둥글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치판(齒板)을 가지고 있다. 다리는 오리보다 앞으로 나와 있어 빨리 걸을 수 있다. 땅 위에 간단한 둥우리를 틀고 짝지어 살며 한배에 3~12개의 알을 낳아 24~33일 동안 품는데, 암컷이 알을 품는 동안 수컷은 주위를 경계한다.

새끼는 여름까지 어미새의 보호를 받다가 가을이 되면 둥지를 떠난다. 갯벌·호수·습지·논밭 등지에서 무리지어 산다. 전세계에 14종이 알려져 있으며 한국에는 흑기러기·회색기러기·쇠기러기·흰이마기러기·큰기러기·흰기러기·개리 등 7종이 찾아온다. 회색기러기와 흰이마기러기·흰기러기는 미조(迷鳥)이고 나머지 4종은 겨울새이다. 시베리아 동부와 사할린섬·알래스카 등지에서 번식하고 한국·일본·중국(북부)·몽골·북아메리카(서부) 등지에서 겨울을 난다.

【전승】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 43년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으로 날아 들었을 때 일관(日官)이 “먼 곳의 사람들이 찾아와 기탁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왕궁으로 날아 든 기러기를 하늘과 지상을 왕래하는 신(神)의 사자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규합총서》에는 기러기에 신(信)·예(禮)·절(節)·지(智)의 덕(德)이 있다고 적혀 있다.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다고 해서 전통혼례에서는 나무 기러기(木雁)을 전하는 의식이 있다. 또 다정한 형제처럼 줄을 지어 함께 날아다니므로, 남의 형제를 높여서 안행(雁行)이라고도 한다. 이동할 때 경험이 많은 기러기를 선두로 하여 V자 모양으로 높이 날아가는 것은 서열과 질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름 철새인 왜가리가 8월 가을에 공산위로 무리지어 떠나가는 모습입니다."


11월 오동광의 봉황새

(백과사전)봉황[鳳凰]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하는데, 사이좋게 오동나무에 살면서 예천(醴川:甘泉)을 마시고 대나무열매를 먹는다. 5색의 깃털을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音)의 묘음(妙音)을 내며, 뭇새의 왕으로서 귀하게 여기는 환상적인 영조(靈鳥)이다. 그래서 천자(天子)의 궁문(宮門)에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에 장식하여 봉거(鳳車) ·봉련(鳳輦) ·봉여(鳳輿)라고 한다. 그 밖에도 천자의 도읍인 장안(長安)을 봉성(鳳城),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 하여 천자를 미화하는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겼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경사스러운 일에 봉자(鳳字)를 썼다. 이를테면, 높은 벼슬을 봉경(鳳卿), 좋은 벗을 봉려(鳳侶), 아름다운 누(樓)를 봉루(鳳樓), 피리 등의 묘음을봉음(鳳音)이라고 하는 등 봉자가 들어간 나쁜 말은 없다. 또한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여 봉황내의(鳳凰來儀)라는 말도 썼다.

【봉황문(鳳凰文)】 봉황을 새긴 무늬를 말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머리의 앞쪽은 수컷의 기린, 뒤쪽은 사슴, 목은 뱀, 꽁지는 물고기로, 용과 같은 비늘이 있고, 등은 귀갑(龜甲)과 같으며, 턱은 제비, 부리는 닭과 같다.”고 쓰여 있다. 이 설(說)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새 ·짐승 ·물고기의 부분을 합친 모양의 봉황문은 유품(遺品)에는보이지 않으나, 이 가운데 닭 ·뱀 ·용을 합치면 가장 일반적인 봉황의 모습이 될 것같다. 이러한 봉황의 정형(定形)은 중국의 후한(後漢) 시대에 나타난다. 한국에도 불교와 함께 전래되어 예로부터 서상(瑞相)으로서 장식회화 등에 흔히 쓰인다.

"동광에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은 동광의 유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화투가 일본에서 전래된 놀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는 사실입니다. 바로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장려 된겁니다. 동광은 일본이 아시아를 모두 점령 했을 때를 상상해서 그린 지도라는 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기에 고귀함을 나타내는 봉황이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이 동양을 집어 삼키는 것은 고귀한 전설적인 일이다 이거죠. 그러니 성인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봉황을 집어 넣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담으로 일본 천황을 해석하기를 하늘에서 떨어진 봉황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 설에 따라서 동광에 봉황이 새겨진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12월 비열의 꿩새

(백과사전)꿩[pheasant]
전체길이 수컷 80cm, 암컷 60cm이다. 생김새는 닭과 비슷하나 꼬리가 길다. 수컷과암컷의 몸 빛깔이 아주 다른데, 흔히 빛깔이 고운 수컷을 장끼, 빛깔이 곱지 않은 암컷은 까투리라고 부른다. 주로 아시아 중남부, 중국 동부, 한국 등지에 약 50종이 분포한다.

【형태】 날개길이는 21∼24cm이고 꽁지길이는 수컷이 32∼56cm, 암컷이 26∼31cm이다. 몸무게는 수컷이 약 1kg, 암컷이 약 700g이다. 몸 빛깔은 전체적으로 붉은 갈색인데, 수컷은 머리꼭대기와 뒷머리가 녹색이 도는 갈색이고 깃털 기부는 어두운 갈색이다. 뒷머리에는 녹색 기운이 도는 쪽빛의 뿔 모양 깃이 나 있다. 눈 주위에는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고 쪽빛을 띤 보라색의 작은 깃이 드문드문 나 있는데 번식기에는 피부 전체가 부풀어오른다. 목 위쪽에는 녹색·빨강·검정 털이 차례로 나 있어 아름답고 빛에 따라 보라색 광택이나 녹색 광택이 난다. 목 아래에는 흰띠가 있다. 등과 어깨깃은 크림색이고 깃가장자리는 붉은 갈색에 금속성 광택이 난다. 가슴은 구릿빛이며 황금색 광택이 나고, 배의 중앙은 검은 갈색으로 윗배의 각 깃털 끝에서는 쪽빛을 띤 보라색 광택이 난다. 위꽁지덮깃은 깃가장자리가 가늘게 갈라지고 드문드문 붉은 갈색이나 올리브색을 띠는 부분도 있다. 아래꽁지덮깃은 붉은 갈색이고 각 깃털 끝과 기부는 검은 갈색이다. 꽁지는 18장의 깃으로 이루어지는데, 중앙의 1쌍이 특히 길고 올리브색을 띤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가로띠가 여러 개 나 있다. 꽁지 끝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고 깃가장자리는 가늘게 갈라지며 보라색을 띤 구릿빛이다. 부리는 연한 황갈색이다. 암컷의 이마·머리꼭대기·뒷머리는 검은색이고 깃털 가장자리는 황갈색이며 검은색 부분에서는 녹색의 금속성 광택이 난다. 앞목과 옆목은 구릿빛을 띤 옅은 갈색 바탕에 U자 모양의 검은색 얼룩무늬가 나 있고, 깃가장자리는 갈색과 구릿빛을 띤 회갈색이다. 몸의 윗면은 검은색에 갈색의 큰 얼룩무늬가 있으며 깃가장자리는 갈색과 구릿빛을 띤 황갈색이다.

【생태】 꿩은 대표적인 텃새이다. 알을 낳는 시기는 5∼6월이고 한배에서 6∼10(때로는 12∼18)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품는 기간은 약 21일이며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활동한다. 알은 갈색과 푸른빛을 띤 회색에 크기는 긴 쪽 지름이 약 42mm, 짧은 쪽 지름이 약 33mm이다. 먹이는 찔레열매를 비롯하여 각종 나무열매와 풀씨, 곡물의 낟알을 먹으며 메뚜기·개미·거미·지네·달팽이 등의 동물성 먹이도 잡아먹는다. 서식지는 다양해서 민가 부근이나 구릉·산간초지·숲에 살며 수컷은 높은 소리를 내지만 암컷은 낮은 소리를 낸다. 수컷 1마리에 암컷 여러 마리씩 무리를 짓고 사는데, 겨울이나 번식기 이외에는 따로 무리를 만든다. 한국, 중국 남동부, 일본, 칠레 북동부에 분포하며, 일본 홋카이도에는 한국에서 가지고 들어간 종이 살고 있다.

【민속】《삼국사기》에 흰꿩을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김춘추가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흰꿩을 귀하게 여겼고 꿩을 사냥해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속에서는 무당의 모자에 꿩깃을 꽂아 신(神)의 기운을 받는 매개체로 사용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개선장군의 머리에 꿩깃을 꽂아 주어 영광과 위용(威容)을 자랑하게 하였다.또 조선시대 중기에는 꿩을 상서로운 새로 여겨서 초례(醮禮)를 지내는 상에 꿩을 놓고 예를 올렸으며 폐백에는 꿩고기 포(脯)를 놓았다. 그밖에 전승설화에는 반드시 은혜를 갚는 새로 등장하며, 속담이나 격언에서는 다급해지면 풀섶에 머리만 처박고 몸뚱이는 드러내는 꿩의 습성에,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외고집과 어리석은 행동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꿩은 대표적인 텃새이기에 12월 겨울비에도 불쌍하게 저렇게 있는 것이죠."

스샷 출처 - http://lina2244.mytripod.co.kr/rule2.html

 

 

 

 

 

고도리…객사리…거북한 마을이름 싹 바꾼다" [동아일보]

 

 

행정구역 명칭 가운데 혐오감을 주거나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마을 이름이 대폭 정비된다.

전남도는 시군 행정구역 연혁과 명칭 유래를 조사한 뒤 변경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명칭을 행정자치부의 승인과 의회 의결을 거쳐 바꾸기로 했다고 23일 밝혔다.

도는 우선 객사리(客舍里), 방광리(放光里)처럼 듣기에 섬뜩하거나 신체 일부를 비하하는 것으로 들리는 마을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마을 이름에 사용된 왕(王·임금) 자가 왕(旺·성하다) 자로 바뀌는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일방적으로 바꾼 마을 명칭도 정비대상.

고도리(古道里)처럼 노름과 관련된 부정적 명칭이나 동(東)면이나 북(北)면 등 지역의 역사성 및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단순히 방위만 표시한 명칭도 바꾸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전남도는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역사유적지나 특산품, 관광명소를 활용해 행정구역 명칭을 정하는 브랜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도는 주민이 동의할 경우 해남군 송지면을 ‘땅끝면’으로, 해남군 문내면을 ‘우수영면’으로, 여수시 군자동을 ‘진남관동’으로, 장흥군 관산읍을 ‘정남진읍’으로 바꿀 방침이다.

전남도 관계자는 “향토사학자와 지명위원회, 문화재위원의 자문을 받고 해당 주민이 변경을 요구하거나 시군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이름을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의 전남도청 행정과 행정계 061-286-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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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나라의 산부터 소개할게요!

 

1. 속리산

속세를 떠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속리산은대한8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그 경관이 빼어나 1970년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소백산맥의 한 지맥으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괴산군 청천면. 칠성면.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산의 형태는천황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문장대. 관음봉등 9개의 봉우리가 마치 활처럼 휘어져 있다.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들이 조화롭게 위치, 풍치와 경관이 절승일뿐 아니라 고적과 천연기념물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산행과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속리산은 4계절이 모두 산자수명하기로 이름나 있는데 봄철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굽이치는 여울과 함께 아름다우며, 가을철에는 온 산의 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겨울철의 설경 또한 묵향기 그윽한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조금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대표적인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된 입구의정이품송을 비롯하여 법주사. 팔상전. 복천암. 석연지. 미래여불상. 동양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철근 콘크리트 입불상인 미륵불상. 쌍사자석등. 그외에 은폭. 쌍유동계곡. 선유동구곡. 화양구곡. 임경업 장군이 목을 축이며 훈련했던 경업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은거했던 암서제등 헤아릴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 한가지를 소개하면 국보제 5호인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을 들 수 있다. 신라 성덕왕19년(720)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기발한 의장과 뛰어난 조각솜씨가 일품으로 우리나라 석상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법주사대웅전 앞 마당에 위치하고 있음)

 

 

 

 

2. 주왕산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한 주왕산은 돌산이 병풍처럼 이어져석병산이라 불리고 경관이 금강산에 견줄만 하다 하여소금강이 라고도 불린다.

주왕산이란 지명은 신라때 주원왕이 임금 자리를 버리고 수도 하였다는 전설에서 나왔다는 설과, 중국 진나라에서 건너온 주왕이 진나라를 회복하려고 이곳에 웅거하였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곳 주왕산에는 주왕과 관련된 전설과 명소가 많다.
주왕산 입구에서 1.5km. 떨어진 지점에는 주왕산의 수문장 기암봉이 있으며, 고려 태조2년 보조국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대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창건했다는 대전사가 있다. 주왕의 딸 백련낭자를 위해 지었다는 백련암이란 여승방. 주왕이 숨어살았다는 주왕암이 있으며 명소로는 제1. 2. 3폭포가 연이어져 있으며, 기암. 자하성. 시루봉. 급수대. 향로봉등이주왕산 11경으로 불린다.
그야말로 주왕산은 암봉과 절벽. 폭포. 전설등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라 할수 있다.

주왕산을 다녀오며 살펴볼곳은 달기약수이다. 청송읍에서 주왕산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달기약수는 옛부터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곳 으로 그맛은 탄산수와 같은 톡 쏘는 맛이 성인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그외에 부동면에 위치한상이리 마을이다. 대전사를 통해서 주왕산을 오르는 코스가 명소고적으로 유명하다면 이곳 상이리마을 (부동중학교)은 절경이 띄어난 곳이다. 피서지로 많이 찾는 곳이지만 여름철에는 폭우등으로 주의해야한다.

주왕산의 최고봉인 왕거암을 오르는 계곡코스로 이곳 사람들은 절골 또는 신술골로 불리는데 좁은 협곡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절벽 거기에 아슬하게 걸린 소나무와 단풍... 그사이를 돌아 흐른는 청류. 가히 절경중에 절경이라 불릴만한 곳이다.

이곳을 둘러 볼 경우라면 입구 (상이전)에서 들어가는주산지 노거수를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달력의 표지그림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주산지는 수백년 묵은 노거수가 물에 잠겨 자라는 모습으로 이곳 청송군이 자랑하는 곳 이기도 하다.
주방산성으로 불리는 자하성은 이곳 대전사에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왕이 고려군을 막기위해 3년에 걸쳐 축성했다

 

 

 

 

3. 지리산

[ 개요 및 소개 ] 크고 작은 산맥의 줄기와 갈래가 얽키고 설켜 그 골격을 형성하고 그 골짜기의 품 속에서 오천 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가 함께 숨쉬는 곳.3개도, 5개 시.군.15개 읍 면에 걸쳐 있는 곳으로 그 면적만도 440.485㎢로 방대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전남.북. 경남. 구례군.남원시.하동군.산청군.함양군)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지리산은삼신산의 하나로 신라때는 5악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해서 지리산 이라 불리워 왔다.
또한 백두산의 맥이 이 곳까지 이어졌다하여 두류산이고 불리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닳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의미로“방장”이라 하여 방장산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한민족에 있어서 하나의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하늘로 통하는 창구로써.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민족의 생명의 근원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지리산은 포근한 산이요, 정감의 산이요, 생명을 떠 맡아온 부모와도 같은 존재이다.

자연경관으로서 지리산은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1500m 이상에 이르는 고산준봉이 10여개에 이르고 대표적인 계곡만도 칠선. 뱀사. 대원사.등 6개의 계곡과구룡. 불일. 용추폭포등 폭포만도 10여개에 이르며 한국을 대표할수 있는 대표적 사찰만도화엄사를 비롯하여 쌍계사. 연곡사. 대원사. 실상사등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산적해 있으며 민족의 비극인 동란중에는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곳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4. 치악산

강원도 원주시 동쪽을 가로질러 선 치악산은 우리국토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의 중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차령산맥으로최고봉은 비로봉이다.
우거진 숲과 수려한 경관으로 수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끊이질 않으며 우리나라국립공원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치악산의 원래의 지명은 단풍이 아름답다 하여 적악산 이라 불렀으나 상원사의 얽힌전설 뱀에게 잡힌 꿩을 구해준 나그네가 그 꿩의 보은으로 위기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치악산의 이름이 유래한다.

※ 이에 관한 설화는상원사 뒤 담벽에 전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치악산을 이야기 할려면 수많은 전설과 험한 산세로 인하여 전쟁이 날때면 군사적 요충지로 명소고적이 산재해 있다.
우선 산성만 살펴보아도 임란의 격전지 영원산성을 비롯하여 금두산성. 해미산성 . 왕건성등이 있으며 문화유적과 사찰이 곳곳에 어우러져 있다. 대표적 사찰로는 구룡사. 입석사. 국향사. 상원사가 있으며 상원사는 국내 사찰 중 해발이 세 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경순왕때 무착조사가 창건하여 참선도장으로 일관해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도사찰이다.

 

 

 

 

 

5. 토함산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황룡동에 자리잡고 있는 토함산은 한국불교 미술의 최고봉인 석굴암 불국사를 품고 있는신라불교의 성지다.

위치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하며 신라천년의 고도이며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이러한 문화유산은 유네스코에 의해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도시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기에 어느 한 부분을 이야기 하기란 쉽지가 않고 또한 어느 부분하나 하나가 임의로 해석되어 오류를 범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조심스런 마음으로 불국사를 얘기 하고자 한다.

토암산 기슭에 자리한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이상세계 (佛國土)를 구현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종교. 사회. 문화. 건축등. 모든분야를 총괄하여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곳이다.

 

 

 

 

6. 태백산

강원도 태백시 남부에 위치한 태백산은 한반도 태백산맥의 주봉이며, 이곳에서 소백산맥이 갈라져 나와 남서쪽으로 발달한다.
흰모래와 자갈이 샇여 마치 눈이 덮인 것 같다 하여 태백산이라 불렀다 하며, “크고 밝은 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라 5악중 북악 이었으며 한국의 12대 명산으로 불리며, 또한 우리나라의 삼신산의 하나로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 추앙받아왔다.

태백산맥은 북한의 강원도 원산만 남쪽의 황룡산(북한)에서 시작하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포에 이르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길이는 500km 평균높이 800m이르는 그야말로 한반도의 중추를 이루는 산맥이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에는 함백산. 구룡산. 청옥산등과 함께 1.000m 이상급의 산들이 100여개나 연봉을 이루고 있어 하나의 거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곳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인 경계가 나뉜다.

 

 

 

 

 

7. 설악산

강원도 양양군 인제군 속초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하며 주봉은 대청봉이다. 한국(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번째로 높은 산이며 2 금강산이라 불린다.

음력 8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했다.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란 뜻으로 설산. 설봉산이라고도 한다.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산세 울산바위를 비롯한 기암괴석 계곡의 맑은 물과 수많은 폭포 만해 한용운의 숨결이 살아있는 백담사를 비롯한 사찰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사철경관이 뛰어나 학생들로부터 수학여행지 선호도 1위를 놓치지 않는 곳이다

 

 

 

 

 

8. 마이산

[ 개요 및 소개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마령면에 자리잡은 마이산은 그 유명도에 있어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산이다. 호남의 지붕이라 불릴 만큼 평균해발이 300m 이르는 고원지대인 마이산은 암마이봉(685m)과 숫마이봉(678m)으로 이뤄져 있다.

곳곳에는 고려말의나옹선사의 수도처로 알려진 고금당 과 나옹대를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산적해 있고 무엇보다 마이산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탑사는 중앙탑, 일광탑, 월광탑, 신장탑등 80여개의 탑들이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이곳에 수도차 입산한 이갑룡처사에 의해 쌓은것인데 지난 일세기가 흐르는동안 그 숱한 태풍에도 쌓은탑에 돌한점 흐트러짐 없이 그 정교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공든탑이 무너지지않는다는 우리의 속담이 마치 이곳을 두고 한 말인냥 싶다

 

 

 

 

 

9. 신불산

[ 개요 및 소개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과 상북면, 양산시 원동면에 자리잡은 신불산은 영남알프스로 불리는가지산군에 있다. 산악지대가 아닌 영남에 거대한 1,000m급의 고산준봉들이 도열하듯 능선을 이루고있으니 이곳을영남의 알프스 또는영남의 공룡능으로 불린다.

여타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산준령에 광활한 평원과 주릉은 사계절 변화하는 환경에 맞쳐서 봄의 진달래와 억새, 가을의 억새평원 겨울의 설화는 이곳을 찾는 산악인들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수 있는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온천지구로 유명한 등억리에서 시작되는홍류폭포계곡은 여름철 많은 피서인파가 찾기도 한다.

 

 

 

 

 

 

10. 계룡산

대전광역시. 공주시. 논산시에 걸쳐 있는 계룡산은충남 제일의 명산으로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에 이룩된 산지로 능선이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이라 하여 지명되어진 이름이다.

주봉인천황봉을 중심으로 28개의 봉우리와 10개소의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 자태와 경관이 매우 뛰어나 삼국시대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신라통일 후에는오악중 서악으로 조선시대에는삼악중 중악으로 (삼악. 묘향산.상악. 계룡산.중악. 지리산.하악 ) 봉해질 정도로 이미 역사에서 검증된 명산이다.
현재는 국립공원1호인 지리산에 이어 국내20개의국립공원중 제2호로 지정되어있다.

계룡산은 산세와 풍수가 뛰어나 조선시대에는 수도로 거론된 적이 있으며 한때 조선의 천도 후보지로 선정되어 도성공사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정감록>의 도참서에는 조선의 다음 왕조 국도가 세워질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계룡산은 조선조 중엽이후 민중의 신앙적인 염원이 서린 이상적인 땅으로 여겨져 전국의 숱한 무속인이 모여 들었으나 지금은 환경보호와 철저한 관리로 자연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11. 무등산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화순군 이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무등산은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부드럽고 웅장해 성산으로 불리운다.
백제때는 무진악. 신라때는 무악. 고려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 무당산. 무덕산등으로 도 불렸으며 능선을 따라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기묘한 형상의 봉우리로 난공불락의 요새인양 위압적이고 산 정상부의 능선은 백마능선으로 불리며 억새밭이 펼쳐지고 봄 철쭉. 여름 계곡. 가을 단풍. 겨울 설경등이 다양한 형태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이어서 무등산3대절경으로 불리는입석대. 서석대. 광석대가 있는데 이 세 명승을 묶어서 무등산3대석경이라 부른다.

입석대는 높이10m∼15m의 석주 수십개가 신전같은 분위기로 남쪽을 향하여 반원형태로 서있다.
서석대는 서쪽으로 늘어선 장승같은 석주들이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수정같이 빛난다 하여 무등산을 일명 서석산이라 한것도 여기에 기인 한다

 

 

 

 

 

 

12. 백운산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봉강면. 다압면. 진상면에 위치한 백운산은 지리연봉의 남쪽 섬진강 기슭에 솟아있는 지리산 다음으로 전라남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정상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도솔봉. 또아리봉. 남쪽으로는 억불동등 1.000m이르는 봉우리들과 해발 900m에 달하는 크고작은 능선이 연봉을 이루는광양의 진산이자 이곳광양 주민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또한 억불동에서 백운산에 이르는 주능선은봄의 철죽과 가을의 억새가 만발할때면 그야말로 천상의 장관을 이루고 능선의 표고차는 100m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능선종주의 백미를 만끽할수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서북쪽의 도솔봉과 또아리봉은 봄철 경칩때가 되면고로쇠의 수액을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다.

 

 

 

 

 

 

13. 월출산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자리한 국립공원 월출산호남의 5대명산이며 호남정맥의 마지막 부분에 자리잡고 독립된 산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곳 호남은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산악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산이다.

산의 정상은천황봉이며 서쪽인 도갑사 방향은 저녁노을에 물든 모습과 능선에 피어난 억새 밀려가는 구름의 의 모습은 환성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산의 지형은 정상인 천황봉에서 남쪽방향은 강진군이 북쪽은 영암군이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불교유적이 많은 곳 이기도 하며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이 산재해 있는 곳 이기도 하다.
산의 동쪽에 위치한소금강이라 불리는 구절계곡은 공원내 최고의 풍치지구이며 칠치. 구절폭포등 이 자리하고 있다

 

 

 

 

 

 

14. 추월산

전라남도 담양군의 북쪽과 전라북도 순창군과의 경계에 솟은 추월산은 노령산맥의 줄기에 자리하며 정상은용추봉이다.

주변에는 군의 최고봉인 병풍산을 비롯하여 산성산 광덕산 장군봉 불다산이 연이어 있으며 담양호가 건설되며 경관이 잘 어우러져 사계절 아름다움을 연출하나 의외로 타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부경남을 비롯한 부산권역의 등산인들에게는 명산으로 알려져 영호남 지역의 등반객의 발길이 사계절 이어지는 곳이다.

산의 형태는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한마디도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마치 충북 월악산 영봉을 이곳 담양에다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

기암절벽에 걸친 절경과 처마끝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보리암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곳 보리암 바로 윗쪽에 자리한697봉 천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바라보는 담양호와 어우러진 모습은 발길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하여 지명에서 알수 있듯이가을단풍은 물론이며 사계절 어느때 찾아도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수 있는 곳이다

 

 

 

 

 

15. 팔각산

[ 개요/소개 ]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자리잡고 있는 팔각산은 지명그대로 여덟봉우리가 각을 세우고 당찬모습으로 동해를 바라보는 절경의 산이다. 이곳 팔각산은 높이만을 보고 대충 생각하고 산행에 나섰다간 정말 황당한 낭패를 당하기 일쑤이다.

먼저 이곳 팔각산은 제 1봉에서 8봉에 이르는 각봉우리가 저마다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특성이랄 것은 암봉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제5.6.7봉에서 서쪽방향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계곡으로 절벽을 이룬다. 이중 7봉은 오르지 말고 우회하길 바라며, 특히 7봉의 모습은 아찔한 높이의 환상적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덕군에서위험한 코스마다 안전시설물을 설치하여 위험요소가 많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팔각산이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주왕산. 내연산이 있어 외지인들은 주로 지명도가 높은 곳으로 찾지만 최근에는 기암괴석의 청류계곡인 옥계계곡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산이다. 특히 4월 초순경부터 이곳 옥계리 산자락에 자리잡은 하얀 복사꽃은 분재를 전시한 듯한 환상적이다

 

 

 

이제부턴 우리나라의 강입니다!!

 

1. 섬진강

 

 

 

 

2. 충주호

충주댐 나루터에서 쾌속 관광선과 대형 유람선이 충주호 뱃길 130리를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초가바위, 고래바위, 현학봉, 오노동, 신선봉, 강선대, 버들봉, 오성암, 설마봉, 제비봉, 두무산 등을 구비 돌아 신단양(장회)나루까지 운항된다.
또한, 동량면 하천리에 위치한
충주호 리조트는 옛 전설이 서린 780m의 옥녀봉을 등에 지고 광할한 충주 호반에 건설된 국내 제일의 호반관광지로 양궁장, 테니스장, 축구장, 퍼터골프장, 실내탁구장, 수영장 등의 운동시설 및 오락시설이 고루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충주호와 연계된 수상스포츠 시설이 겸비 되어 있어 전천후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3. 대청호

끝없이 이어지는 맑은 물과 호수 위에 섬처럼 떠있는 야산 그리고 새벽이면 물안개가 자욱이 떠오르고 낮에는 쪽빛 하늘과 흰구름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다 사이사이 울창한 숲터널로 꼬리를 감추는 호반도로가 자리잡고 있는곳이 바로 대청호이다.

대청호는 금강의 한가운데 댐을 막아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로 중부 내륙의 너른 들에 물줄기를 대는 중요한 수원지 역할을 한다. 대청댐은 대전과 충북 청원군 사이에 놓여있으며 저수용량 14억9천만t 중부권에서는 충주호 다음으로 큰 호수로 해발 200∼300m의 야산과 끝없이 이어지고 있어 대청호반은 푸근하고 넉넉하다. 이런 뛰어난 경관에도 불구하고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청남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80년대만해도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다.

지금은 거의 모든 길이 개방되어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또한 수많은 철새와 텃새의 쉼터인 대청호는 생태관광지로도 찾을 만하다. 여름에는 백로가 날아든다. 인근의 충남 연기 등에서 건너온 백로떼는 대청댐 수문 아래서 먹이를 구한다. 상류는 낚시가 금지돼 쏘가리와 자가사리, 붕어, 잉어와 함께 피라미들이 많이 서식하기 때문. 수면 위를 저공비행하다 먹잇감을 낚아채는 백로를 쉽게 볼 수 있다. 97년에는 93년 철원에서만 발견됐던 천연기념물 호사비오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호수를 한바퀴 돌아 보은과 옥천으로 이어지는 건너편은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화남면 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울창한 가로수 터널이 그림같다. 한낮에도 길이 어두울 정도이며 가장자리에는 차를 세워두고 호수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다.
담수능력 : 149백만톤
전력생산량 : 196~240백만 kw/년
용수공급량 : 1649백만톤

 

 

 

4. 백마강

 

 

5. 소금강

 

 

6. 한탄강

 

 

7. 한강

 

 

 

여행은 그 목적이 매우 다양해서 어떤 이는 식도락을 위해, 어떤 이는 불륜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한다. 자, 이번주 주말매거진은 역사와 전설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충북 청주에 공항이 들어선 지 꽤 오래 되었는데, 활주로 설계를 끝내고 부지를 고르다보니 활주로 예정 지역의 양쪽 끝 마을 이름이 각각 비상리(飛上里)요, 비하리(飛下里)였다. 마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예견이라도 한 듯 그리 이름이 붙어 있었으니 감탄스럽지 않은가. 아득한 옛날부터 “월악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날이 오리라”는 소문이 떠돌았으니 이 또한 놀랍고, 월악산 그림자를 물에 비출 충주댐이 들어선 곳 옛 지명이 ‘물막이골’이었으니 더욱더 놀랍다.


▲ 미륵리사지 돌부처
그 월악산. 한국의 대표적인 악산(嶽山)이다. 육중한 바위들이 산꼭대기를 가득 메우고, 사람들이 걷는 등산로도 팍팍한 돌길이 대부분이다. 하여 그 바위 틈틈이 숨어 있는 전설과 사연 또한 깊고 진하다. 전국 어디에서나 1박 코스로 잡을 수 있는 곳, 월악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여행지가 있다. 미륵리사지와 덕주사 마애불이다. 그리고 수안보온천은 덤이자 필수.

수안보에 짐을 풀고 곧바로 월악산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얼마 못가서 ‘미륵리사지’ 이정표가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어 들어가면 꽤 긴 오솔길이 나온다. 절, 아니 절터가 나온다. 불사가 한창인 ‘미륵세계사’의 요사채와 대웅전을 빼면 말 그대로 ‘절터’다. 텅 빈 공간에 탑 몇개와 멀리 보이는 돌부처, 그게 전부. 그런데 묘한 분위기가 있다. 봄바람이 가볍게 부는데, 개울을 건너 돌부처를 향해 걸어가본다. 맨 처음 맞는 것은 거북이상. 등에 분명히 비석을 지고 있었을 것이나 비석은 간 곳 없다. 거북이,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그러니 비석 또한 그러했을 것이고, 이 절의 주인이 웬만한 권력과 금력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전설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절을 세웠다고 했다. 나라는 망했고,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런 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절을 세워 수양을 했다고 했다. 그가 기도를 했음직한 자리에 돌부처가 우뚝 서 있다. 이곳 이름이 미륵리인데, 돌부처 또한 미륵불이다. 부처 또한 거대해서 그 규모에 일단 압도되고, 거친 돌로 쌓아 만든 그 낯선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경주 석굴암을 본떠 돌로 세면을 올리고 그 벽에 부처와 보살상을 모시는 자리를 뚫어놓았다. 미륵불, 석가모니가 해탈한 지 56억7000만년이 지나면 나타날 미래불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민초들은 미륵불을 모시며 해방을 꿈꿨는데, 마의태자 또한 신라의 부활을 꿈꾸며 미륵불에 의지했을 것이다. 최근 고려시대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절터 앞으로 길이 계속 이어지는데, 한창 발굴조사 중인 건물 터를 봐도 옛 절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산으로 사라지는 길 끝에는 ‘미륵대원사’라는 절이 있다. 한 스님이 화강암 기둥 108개를 세워 절을 짓겠다고 서원을 한 후 지금 20개 남짓 만들었다. 한 대(代)에 이룰 절이 아니다. 무너진 절터와 굳건한 맹세.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월악산을 가로지르는 송계계곡을 기분 좋게 드라이브하며 북상하면 덕주사라는 절이 나온다. 사하촌인 덕주골에 차를 대놓고 산길에 접어든다. 시멘트로 포장해 운치는 없지만 걷기는 딱 좋다. 절까지 2㎞. 개울이 있고 조선시대 산성인 덕주산성의 흔적이 도처에 있다.

전하기로는 마의태자의 여동생인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한다. 옛 절은 6·25 때 불탔고 지금 절은 새로 지은 것이다. 옛 절은 지금 절에서 1.5㎞ 산길 위에 있었다. 절은 간 곳 없지만 거기에 거대한 불상이 하나 있어 미륵리사지 돌부처를 바라보고 있으니 덕주사 마애불이요, 사람들은 바로 덕주공주 본인을 새긴 것이라고 한다.

첫 이정표 이후 도무지 마애불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렵다. 산길 1.5㎞는 못해도 30~40분을 잡아야 한다. 마애불 직전 계단에 이곳 스님들이 호스로 마실 물을 끌어다 놓았다. 목을 축이고 딱 3분만 더 오르면 저기 바위에 부처님이 바라본다. 참으로 거대하고, 한눈에 봐도 높은 신분을 모델로 삼았을 법하게 귀티가 난다. 태자 남매의 현세 인연을 내세에서도 이어주고 있는 돌부처들 앞에 서면 그 기분, 단순한 관광이나 등산과는 조금 다르다.

마애불을 뵙고 나면 다리가 아프고 온몸은 땀으로 절어 있다. 온천은 바로 이때 하는 것이다. ‘섭씨 27도가 넘고 인체에 무해한 물’이라고 온천법에 규정된 그런 물이 아니라 미네랄이 많고 50도가 넘는 진짜 온천, 수안보가 기다린다.( 별도 기사 참고 )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이 왔다. 문경새재로 가보자. 수안보에서 승용차로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조령 3관문부터 시작해 1관문까지 2시간 정도 산책 코스. 그 끝에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도 있고, 조금씩 싹을 내민 봄꽃들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사에서 가장 멍청하고 아둔한 전투로 기록될 탄금대 전투의 싹도 이곳에 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가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가장 두려워 했던 이가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장군이었고 가장 거북해 했던 곳이 이곳 조령이었다. 조령만 어떻게 뚫으면 명나라까지 올라갈 수 있을 터인데! 그런데 수색대들이 보고하기를 조령에 조선 군사가 없다는 게 아닌가! 몇번이나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돕는지고!”라는 말이 쏟아졌고 “오합지졸 조선군”이라는 말이 그 위를 덮었다. 조령을 지키고 있어야 할 장군 신립, 뒤로 강물이 시퍼렇게 흐르는 탄금대에 소위 배수진을 펴고 싸움에 나섰다가 부하들 다 죽고 한양 가는 길 열리고 자기는 자살했다. 그런 얼토당토 않는 역사, 문경새재 산책길에 있다.

그런데 정작 월악을 담고 있는 충주호는 지금 물이 말라 있다. 황사바람이 매섭고 호숫가에는 맨흙이 드러나 그리 아름답지가 않다. 하지만 유람선을 타는 맛은 여전하니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면 뱃놀이를 즐겨보시길. 역사와 전설 나들이, 그렇게 끝낸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들의 '강북 찬가'
2341 | 2006-02-22 추천 : 9 | 조회 : 33847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하나둘 사라져가는 낡고 오래된 시민아파트, 붉은 지붕과 노란 물통이 거북 등마냥 다닥다닥 붙어 도시의 지붕을 이룬 해방촌 풍경…. 도시민들의 눅진눅진한 삶이 녹아있는 풍경이 사라지기 전, 발품 팔아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며 기록해온 화가가 있다. 동양화가 정재호의 오래된 아파트 그림과 기록사진 속에 담긴 서울의 얼굴을 돌아본다. 

 

오래된 시민아파트의 정면을 축소해 전시장으로 가져온 듯 생생한 묘사가 넘치는 정재호의 '대광맨션아파트'.

  

'대광맨션아파트'의 세부. 집집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차양을 내려 빛을 가린 것이 이채롭다. 가난하되 자신의 공간을 꾸밀 줄 아는 이들의 소소한 개성이 다채로운 차양에서 드러난다.

 

그가 본격적으로 아파트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초부터다. 2003년 12월,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청운시민아파트를 오며가며 바라보다가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됐다. 옛 주인이 이사가던  날짜에 멈춰진 낡은 달력, 바닥에 널브러진 앨범들, 버려진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일제히 날아오르던 파리 떼, 독거노인 세탁봉사 날짜를 알리는 친절한 메모….  철거를 앞두고 사람들이 떠나 텅 빈 청운아파트에서 정 작가가 받은 첫 느낌은 마치 "건물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만 실종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재개발의 흐름에 밀려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애틋함은 작가의 경험에 일정 부분 기인한다. 1978년, 국민학교 1학년 무렵 처음 종암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던 작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옛 집터를 찾았을 때 많은 것이 변하지 않고 남아있음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유년기가 골목길 하나하나마다 기록되어 있는 곳, 금빛으로 빛나는 63빌딩이 한 층씩 키를 높여 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자랐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 것이다.

 

그가 마주친 옛 동네는 마음에 그렸던 소중한 추억의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시 2004년, 작가는 "철거를 앞둔 아파트에서 이미 떠난 사람들의 흔적과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의 절규를 마주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만난 풍경들은 나의 과거였고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현재였으며 또 그들의 미래이기도 했다"고 독백한다.

 

정 작가가 지금까지 자료를 모으고 그림으로 그려낸 아파트만 해도 회현시범아파트, 중산시범아파트, 대광맨션, 대성맨숀아파트, 수색아파트, 옥인시범아파트, 연희시범아파트, 금화시민아파트 등 10여 곳에 달한다.  그의 블로그에 놀러온 친구들이 "책을 써라" 하고 농담을 던질 만큼 취재한 자료의 양도 방대해졌다.

 

 

남산순환도로에서 보이는 해방촌 풍경이다. 해방과 함께 북쪽으로부터 월남한 사람들이,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을 차지하면서 시작된 해방촌의 역사를 담았다.

강북의 오래된 옛 동네를 훑는 정재호의 촘촘한 붓자욱은, '와우산'과 '을지로 순환선'에서 광각렌즈처럼 주변 사물을 세심하게 기록했던 최호철의 시각과 견줄만하다.

 

  

 

 

이제는 사라진 청운아파트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주로 높은 지대에 위치했던 시민아파트들은 전망 하나만큼은 어느 곳 못지 않게 시원했다.
 

첫 작업 대상이었던 청운아파트를 그린 <청운동 기념비 Ⅰ>(2004). 그림의 가로 폭이 4.5미터에 달한다.


2005년 12월 열린 네 번째 개인전 '오래된 아파트'전에서는 중산시범아파트가 입체로 재현되어 세월 담은 기념비로서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전했다.

 


<회현동 기념비>(2005). 정재호 작가는 "아파트 앞마당에서 아파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중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갔더니 1층이 아니고 5-6층인 독특한 구조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취재한 사진과 이야기들은, 이제 더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아파트들이 점차 철거되어 단 한 곳, 회현시범아파트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올해 안으로 재개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69년부터 71년까지 서울 달동네 곳곳에서는 아파트 신축 공사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당시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주도해 판자촌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식 주거시설인 시민아파트를 짓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평지가 아닌 산 중턱을 타고 이들 시민아파트가 건축된 것은, 원래 이 지역이 달동네 지역이어서 땅값이 싼 탓도 있었지만, 멀리서도 아파트가 잘 보이도록 '전시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9년 서울 달동네 판자촌을 밀어내고 들어선 시민아파트는 한때 420여 개 동에 달했으나, 1970년 4월 와우시민아파트가 부실공사로 인해 무너지면서 시민아파트 건축 방침이 전면 재검토되었다. 예외적으로 1972년 건축된 몇몇을 제외하면 시민아파트 시대는 1971년을 정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들 시민아파트는 요즘 아파트와 달리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거대한 축대 위에 올라앉은 아파트, 계단 통로 부분이 마치 변신 로보트처럼 툭 튀어나온 아파트,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구름다리로 이어 건널 수 있게 한 곳, 아파트가 마치 성곽처럼 공터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가운데를 텅 비워둔 곳…. 특히 모든 구조가 완성된 뒤 입주하는 오늘날의 아파트와 달리, 시공사가 기본 틀거리만 공사를 해주면 입주자가 알아서 내부 구조를 채워넣어야 하는 곳도 있었다 한다. 아파트이기는 하지만, 밖에서 바라본 주거공간의 형태(창이나 베란다의 모습)이 조금씩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아파트가 도저히 들어설 수 없을 듯한 산 중턱을 깎아 아파트를 세운 자리에는, 억척스레 삶터를 일궈나간 사람들의 의지가 담겼다. 비록 낡고 불편하지만, 공터의 중심에 꽃밭을 가꾸며 공동체적 생활 양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끈끈한 이웃의 정이 남아 있다. 정 작가는 이들 오래된 아파트를 가리켜 '도시의 기념비'라고 설명했다.


"흔히 멋진 것만 기념비라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오래된 아파트들이, 그 아파트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과 사건들을 증거하는 기념비라고 생각해요. 영광이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와 달리, 이런 기념비는 숨기고 싶은 역사인지도 모르죠. 경제적 가치를 상실한 건물을 없애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겠지만, 모든 것을 경제적 논리로만 몰아가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러나 그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오래된 아파트를 허물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아파트를 허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사의 단절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장소의 영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조만간 시민아파트가 모두 철거되어 그릴 건물이 사라지면, 서울 강북 특유의 공간과 그곳의 정서를 그림 속에 담고 싶다고 했다.

 

작가가 어렸을 때 본 종암동 풍경처럼, 우뚝 선 흰색 아파트와 붉은 지붕이 대조를 이루는 풍경은, 강북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지만, 또 지역마다 골목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재호 작가는 오늘도 오래된 골목과 낡은 아파트를 찾아,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다. 세월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소소한 서민들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정재호 작가가 아파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들. 시민아파트의 다양한

 존재 양식을 볼 수 있다.(아래 사진과 설명의 저작권은 정재호 작가에게 있습니다)

2005년 7월 3일, 회현아파트는 말도 안되게 거대한 계단식의 인공 축대 위에 서 있다. 직각으로 축대를 지지하고 있는 삼각형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이 아파트의 지형을 극복하고 있는 형국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회현아파트의 중정공간. 2005년 7월 3일, 계곡처럼 깊게 들어간 곳에 이곳 주민들의 공동공간이 있다. 아파트에 들어간 후에도 이곳 주민들은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곳은 어찌 보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의 ‘우물’같은 곳이다. 그 느낌은 깊고 깊다. 

 

청운아파트 고양이. 2004년 5월 16일. 사람은 떠났어도 고양이는 집을 버리지 않는다. 당시 이 고양이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청운아파트가 사라졌을 때 이 고양이는 산으로 올라가거나 아래 동네로 내려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을 것이다.

 

 

금화아파트, 1960년대 말 서울시 시민아파트 계획에 의해 지어졌던 아파트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곳이다. 당시 시민아파트는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시에서 프레임을 만들어 주면 그 속 구조를 직접 입주민들이 채워넣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의 전면은 조금씩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진 창문으로 채워져 있고 어떤 곳은 벽면마저도 그냥 뚫려있는 경우조차 있다.

 

아파트로 오르는 긴 경사로와는 달리 일단 대광맨션아파트의 내부로 진입하면 깜짝 놀랄만한 넓은 공간이 나타나고, 그 공간을 병풍처럼 건물들이 에워싼 형상을 가지고 있다. 산중턱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일반적으로 계단식의 공간 활용을 하는 것에 비해 독특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이 아파트의 압권은 바로 밖으로 돌출된 베란다의 버라이어티한 모습이다. 독특하게도 베란다마다 동네 가게에서나 할 법한 색색깔의 차양을 두르고 있다. 그 색 또한 노랑 주황 파랑 등의 예쁜 색깔이어서 오래된 아파트들이 가지고 있는 가난함의 형색과는 다른 생기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성맨숀아파트. 2005년 9월 28일. 독립문에서 사직터널로 가다가 왼쪽편에 위치한 아파트이다. 10층 짜리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동은 공중에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본 오래된 아파트중 가장 예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아파트를 보고 가난의 상징이라는 오래된 아파트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2006년 2월 22일 (수) 09:20   주간조선
“병원인가, 리조트인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가평군청에서도 차로 15분여를 더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이곳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지상 8층 지하 4층 대형병원이 들어서 있다. 병상 수는 280여개이지만 상당수가 1인실로 운영되고 한방병원과 특수 물리치료 시설, MRI와 CT 등 첨단 진단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 웬만한 대학병원 규모를 넘본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면 마치 서울 강남의 병원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이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은행, 편의점, 레스토랑 등이 병원 안에 있다. 하지만 병원 밖을 나서면 민가도 드문 산골이다. 이 병원에 들어와 있는 우리은행은 가평군에 있는 유일한 시중 은행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곳에 지난해 외국인 환자 1만7797명이 다녀갔다. 1일 평균 33.3명의 외국인 환자가 입원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왜 이렇게 큰 병원이 있으며, 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물게 외국인 환자들이 많이 오는 걸까. 병원은 통일교 재단이 2003년에 세운 청심병원이다. 자연히 이곳을 찾은 외국인 환자의 80%는 통일교인이다. 미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태국, 폴란드, 오스트리아, 대만, 중국, 러시아, 몽골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온다. 외국인 환자의 85%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는 통일교인이 20만명 안팎으로 있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통일교인이 있는 나라다.

병원은 이 때문에 외과, 산부인과, 정신과 등 일본인 의사를 4명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일본과 한국 의사 면허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전문의들이다. 이밖에 간호사, 의료기사 등 일본인 의료진은 총 37명이 있다.

환자 코디네이터 다카시마 유카리(여·29)씨는 “외국인 환자가 오면 입원 수속부터 퇴원시 병원비 정산까지 맡아서 처리해 준다”며 “일본인 환자만 담당하는 전속 직원이 2명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영어, 일어, 한국어가 유창해 외국인 환자를 전담하고 있다. 외국인 환자의 의료수가는 우리나라 건강보험 수가의 150%이다. 즉 치료비가 우리나라 병원보다 1.5배 비싼 셈이다. 이것이 국제 표준 진료수가라는 것이 병원 측의 설명이다. 병원에서는 진료비를 미화·일화 등 외국돈으로도 지불할 수 있다.

일본 환자들의 경우 이 병원에 낸 치료비를 본국에 돌아가 환급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공단과 같은 일본의 사회보험공단이 이곳의 진단서와 치료 내역서를 인정하고 있기 있다.

특이한 것은 병원에 일본인 산모들이 와서 분만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일본인 산모 분만 건수는 250여건이며, 이는 해마다 늘고 있다. 일본인 산모 하타 미키(30)씨는 지난 1월 30일 이곳에서 둘째 아기를 출산했다. 그는 뉴질랜드 근방의 솔로몬 제도에서 왔다. 하타씨는 “첫 아기는 일본에서 낳았지만 둘째 아기는 여기 와서 낳고 싶었다”며 “일본인 간호사와 의사들이 있다고 해서 안심하고 왔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인 랜스 리카베케씨는 솔로몬 제도 사람으로 부부는 통일교를 통해 맺어졌다. 통일교인이 이곳에서 아기를 낳고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교회에서 아기 이름도 지어준다. 하타씨도 이를 원했고, 교회에서 지어준 이름은 ‘성현’이었다. 따라서 하타씨의 둘째 아기 이름은 아버지 성을 따서 ‘성현 리카베케’가 됐다.

산부인과 병동의 일본인 간호사 마쓰모토 유코씨는 “일본인 산모가 하루 최대 30명이 입원한 적도 있다”며 “여기서는 자연분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남편이 가능한 분만실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분만 문화는 통일교의 교리가 아니라 일본식 분만 문화를 참조한 것이다. 워낙 일본인 산모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마쓰모토 간호사는 말했다.

‘공항 픽업 서비스’ 제공

산모들은 통상 출산 예정일 약 40일 전에 이곳으로 들어온다. 이곳 수련원에서 기거하면서 산전 관리를 하다가 예정일에 맞춰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련원 투숙 비용은 하루 2만원꼴로 저렴하다. 출산 후에는 약 2주간 한방요법으로 산후조리를 받고 돌아간다. 강흥림 홍보팀장은 “일본에는 산후조리 문화가 없는데 일본인 산모들이 아기 낳고 이곳의 찜질방에서 쉬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며 “일본에 소문이 나면서 통일교인이 아닌 산모들도 이곳을 찾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병원은 일본인 산모를 대상으로 ‘분만 패키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용은 항공비·분만 비용 등을 모두 포함해 30만엔(약 300만원)이다. 강흥림 팀장은 “일본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무조건 정부로부터 30만엔을 받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추어 운영한다”며 “일본에서 아기를 낳으면 병원 비용이 30만엔 넘게 나오기 때문에 일본인 산모들이 이곳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은 ‘분만 패키지’가 일본인 산모들에게 인기를 끌자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할 판촉 사무소를 올해 상반기 도쿄에 개설할 예정이다. 병원은 일본인 산모나 환자가 입국한다고 연락이 오면 ‘공항 픽업(Pick-up)’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본인 말기 암 환자들도 병원을 많이 찾고 있다. 통일교인 환자들은 죽기 전에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는다는 의미로, 교인이 아닌 환자들은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서 양·한방 협진 요법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는다. 일본인 의사인 노리히사 요코 가정의학과 과장은 “치료를 받으면서 편안한 휴식을 취해야 할 말기 암 환자들이 지내기는 이곳이 최고”라며 “이곳에 생을 마감하는 일본인 환자들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이곳 병원이 일본인 환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에는 한류(韓流)도 작용한다. 병원에서는 배로 겨울연가 촬영지인 남이섬까지 15분이면 갈 수 있다. 산후조리하는 산모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 남이섬 관광을 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병원에 선착장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남이섬에 일본인 환자와 가족들을 실어 나른다.

병원에는 간혹 서양에서 온 환자들도 입원한다. 통일교인이거나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영어가 통하는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기 때문이다. 병원은 이들을 위해서 서양식 ‘빵 식사’를 제공한다. 독일인 환자 하이디 스트라이벨(여·56)씨는 “영어가 가능한 의료진이 있어 좋다”며 “어지러움증이 있을 때마다 여기에 입원한다”고 말했다.

이곳은 통일교단이 세운 병원이지만 일반인 환자와 통일교인 환자 간에 차이는 없다. 의료진도 통일교인은 20~3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비(非) 교인이다. 비(非) 교인인 정신과 전문의 신성응 과장은 “이 지역 주민들은 처음에 통일교에서 병원을 세운다고 해서 이상하게 봤지만 이제는 종합병원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곳을 ‘종교 병원’으로 보지만 서양 사람들은 양·한방 요법을 더 좋아하고 이곳을 친환경 병원으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가평=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doctor@chosun.com)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스크랩입니다.

아니, 원조가 누군지 모르겠기에 긁었습니다.

아! 알아냈어요. 네이버 포토 게시물과 그 외 다수 짬뽕이군요.

 

어디서 왔든 어디가 됐든 간에 이 엄청난 자연의 경관 앞에 여지없이 작은, 내 주먹만한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맥박이 뜁니다.

혈액순환에, 제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 약으로 자주 볼랍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신지?..................................ㅎㅎㅎㅎ~~

 

이요조(요즘 저작권법이 많이 완화 되었다지요? 상업성만 아니라면)


쏘롱-라 의 아침 (5416M)

히말라야!
지구의 지붕 히말라야 가운데 쯤, 안나푸르나 연봉(連峰) 위로 아침 해가 솟아 올랐습니다. 발 아래는 구름 바다.
설산은 아침 햇살을 받아 분홍 감도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지만 반대쪽 사면(斜面)은 아직도 컴컴합니다. 최준환씨가 지난 10월 안나푸르나 트래킹 도중 만났던 장엄한 광경입니다.














그는 지난 11월 1일 위 사진을 비롯해 안나푸르나 트래킹 사진을 네이버 포토 게시판에 올려 네티즌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인터넷에는 제법 안나푸르나 사진이 올라 오지만 그가 올린 사진에는 국내 인터넷에서는 좀 처럼 보기 드문 장관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내 여행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는 코스와는 전혀 다른 코스를 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 10월6일부터 26일까지 긴 일정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다녀왔습니다.
'라운드 트레킹'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10일 일정으로 베이스캠프가 있는 곳까지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것으로 옆 지도에서 가운데 굵은 빨간표시가 안나푸르나 트레킹, 즉 ABC(Annapurna Base Camp)트레킹 코스인 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은 안나푸르나를 중심으로 한바퀴 도는 것으로 보름에서 20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지도에 형광녹색 선이 그 코스입니다.

최준환씨는 "라운드 트레킹은 더 높은 곳에 올라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설산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는 코스"라면서 "높은 고도의 코스를 오랫 동안 운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동행한 포터들 얘기로는 라운드 트레킹에 나서는 아시아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산을 좋아하고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일생에 한번은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하지만 다녀 온 사람들은 아마도 평생 그곳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라운드 트레킹 도중 해발 3800m 지역 묵티나트에서 찍은 것입니다. 최준환씨는 "너무나 난생 처음 대하는 풍광이어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공상 영화 속으로 들어 온게 아닐까'라는 느낌이었다"면서 "특히 하늘 빛은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최준환씨의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동행한 트레커는 지칠 땐 말을 타기도 했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끝까지 걸었다"고 합니다. 이 사진들은 그만큼 힘들게 촬영한 것들입니다.
안나푸르나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사진을 퍼 가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그는 바탕화면 용 사진을 따로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낮은 해발의 게르무 지역 (해발 1300m)
녹음이 우거진 지역은 걷고 생각하기 좋습니다.


부디스 룽다. 그리고 히말 (차메2670m)
마을. 펄럭이는 룽다가 자주 보일수록 설산과 가까워집니다.


트레커들에겐 가장 큰 휴식처인 롯지지붕. 한없이 걷다가 맞이하는 휴식은 과연 꿀맛을 넘어섭니다.


쏘롱패디-하이캠프 (4450m-)
목소리 보다 숨소리가 커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쏘롱패디에서 다음 코스로 떠나기전 한 컷.


쏘롱-라 의 아침 (5416m)
뒤늦게 고소 증세가 와서 구토를 하며 겨우 넘었습니다.
히말 8000m급 14좌를 등반하는 산악인들


묵티나트-무스탕 (3800m)


묵티나트-무스탕 (3800m)
자연의 모습이 아닌, 잘 꾸며진 거대한 실내 세트장


하루종일 짐을 지고 걷는 포터들. 하루에 12달러를 지불하지만 저들이 실제로 가져가는 돈은 몇 달러 안된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짐을 지고 가는데....


트레킹중 만난 독일 사람들. 저중에 한명은 결국 헬기에 실려갔습니다.


무스탕 카그베니 (2800m) 를 지나며..
3000m를 넘으며 느꼈던 히말의 황량함은 이곳 무스탕지역 카그베니를 지나며 .


무스탕 카그베니 (2800m)


트레커들은 지치면 저렇게 말을 이용해 타고 가기도 합니다.


때아닌 폭설로 사흘을 지체하기도 했습니다. (좀솜 2710m)


좀솜-칼로파니 일정중 들린 마을 어디쯤 입니다.


안나푸르나로 잘못알았던 생선꼬리란 뜻의 마차푸치레 입니다.


덜컹이는지프를 타고 오프로드를 달리는건 빼놓을수 없는 재미입니다. 지프를 타고 내려오며 트레킹을 마감합니다.

▶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바탕화면용 사진 보기

▼ 최준환씨의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코스
카트만두(1300M) → 베히사하르 → 쿠디 → 므흘블레(840M) → 게르무(1300M) → 탈 → 다나큐 → 차메(2670M) → 피상 → 마낭 → 야크카르카 → 쏘롱패디(4450M) → 쏘롱라(5416M) → 묵티나트(3800M) → 좀솜(2710M) → 칼로파니 → 따또파니 → 카그베니(2800M)



다음은 최준환씨가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하며 찍은 다른 트레커들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걷습니다.
산이좋아 걷는사람, 걷고싶어 걷는사람, 생각이 필요해 걷는사람, 돈을 벌기위해 걷는사람...
어떤 이유에서 이곳을 왔건 할수있는건 걷는 것 뿐입니다.
집을 떠나온 그곳에선 집이 그립습니다. 집에 돌아온 지금은 떠나온 그곳이 그립습니다.
그 곳이 어디건 떠나온 곳은 항상 그리운가 봅니다.

지금은 별로 쓰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수 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을 어르거나 놀릴 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고, 너의 진짜 엄마는 지금도 그곳에서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울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어른들의 그 말을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던 아이들도 정색을 하고 몇 번씩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도 지금 아이들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 말을 들으면 인터넷에 가서 확인을 한 다음 그 말이 어째서 거짓말인지에 대해 당장 어른들을 가르치려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효력을 잃어버린 말이 바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다리를 종합해보면 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리가 주로 등장하는 특징을 지닌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 다리 밑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각 지역에 따라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신빙성이 생겨서 아이가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 말은 과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은 그전에는 강원남도였다가 지금은 경상북도가 된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라는 곳이다. 순흥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지역으로 원래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로 편입되었던 곳이다.

고구려 때에는 급벌산군이었다가 신라로 편입되면서 경덕왕 때에 급산군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에 와서는 흥주로 되었고 고려말 조선초에 순정 혹은 순흥으로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니는 순흥은 영남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를 해오면서 그 명성을 떨쳤는데, 북쪽에는 송악이 있고 남쪽에는 순흥이 있다고 할 정도로 큰 도시였으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가 올 때도 비를 맞지 않고 처마밑으로 십리를 갈 수 있을 정도로 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말은 순흥의 번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명성을 떨치던 순흥이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은 세조 때의 일로 이곳으로 유배 온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역모의 땅으로 지목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건만 그 때의 아픔은 아직도 이 지역에 면면히 남아있는데, 금성단, 위리안치지지, 압각수, 경자바위, 피끈(끝) 등에 유적과 전설로 아로새겨져 있다. 

“다리 혹은 청다리 밑에서 아이를 주워왔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세운 후 이듬해에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1550년에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임금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체계적인 사립대학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처럼 최초의 사액서원이 성립되자 이때부터 전국의 선비들이 공부와 수양을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순흥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소수서원에 공부를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선비들은 주로 젊은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이 그 지역의 처녀들과 사랑을 나누면서부터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거의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바로 임신인데, 현대사회처럼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인지라 아이를 가지면 낳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당사자 집안에서는 비밀리에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한 밤중에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버려진 아이는 누군가가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자 이번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선비라면 최고의 신분이고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핏줄을 데려가 기르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서 몰려든 아이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아이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운이 나쁘면 몇 달씩을 기다려서 아이를 얻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으로 입양된 아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지금도 그 말이 남아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상당수의 아이가 입양되었다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화를 거듭하여 현대에 들어와서는 해당 지역의 다리를 증거물로 하는 이야기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흥의 청다리는 이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인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시멘트 다리에 불과한 모습이다. 그러나 청다리의 유래에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효불효전설(살아있는 부모에게는 효도지만 죽은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는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소백산에서 내려온 물이 죽계구곡을 지나 지금의 청다리 부근으로 흘러오는데, 그 때까지 이곳에는 물을 건너는 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죽계천의 남쪽 마을에는 아들을 하나 둔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는 청춘에 홀로 되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키우면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죽계천 북쪽에는 짚신을 삼아서 파는 짚신장수 홀애비가 살고 있었다. 이 짚신장수 홀애비가 순흥 시장에 짚신을 팔러왔다가 과부와 눈이 맞아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연애가 금지되었던 옛날 사회에서는 두 연인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밤중이 되면 과부는 죽계천의 물을 건너서 짚신장수를 만나곤 하였다.

봄이나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추운 겨울에 발을 적셔가며 물을 건넌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돌다리를 놓아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돌다리도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건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순흥 고을로 중앙에서 높은 분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높은 분이 지나갈 때를 기다려서 그 앞에 나가 어머니의 일을 고하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청을 넣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정을 들은 높은 사람은 아들의 효성이 지극하여 다리를 놓아주게 되었는데, 청을 넣어서 놓은 다리이기 때문에 청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다리는 돌아가선 아버지를 위해서는 불효를 저지르게 된 다리이고, 살아있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효도를 하게 된 것이니 불효라고도 하기 어렵지만 효도라고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다리를 효불효다리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세계의 특이한 도로들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여주세여~
 
   
그렇습니다 세계엔 정말 특이한 도로들이 많죠
 
어떤 도로들이 있는지 한번 쭉 보시죠^^
 
 

“에이 설마, 이런 도로가 실제 있을까요? 합성이겠죠!”
마치 스키 점프대를 올라가 듯 자동차 한대가 도로 위를 올라가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상당한 급경사임을 알 수 있는데요. 11월 말부터 네티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위 사진은 노르웨이에 실제로 있는 해안고속도로인 ‘대서양로(The Atlantic Road)’라고 합니다.

▼롤러코스터 도로
지난 11월 말 팝뉴스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매체들은 ‘노르웨이 세기의 건축물’에 대서양로가 선정됐다고 소개했습니다. 대서양로는 1989년 7월 개통된 8.2km의 노르웨이 북서부 해안 고속도로.
점프대를 연상시키는 경사 곡선로를 포함하고 있어 노르웨이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합니다.


대서양로를 지나는 것 자체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일 것 같은데요. 당연히 이 곳에선 과속은 ‘절대 금지’입니다.

인터넷에는 대서양로 사진 외에도 “설마, 이런 도로가 실제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만한 기상천외한 ‘도로’ 사진이 떠돌고 있습니다. 도깨비뉴스도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재미있는 ‘도로 사진’을 소개했었지요.
‘세상에는 별의별 도로가 다 있다’라는 주제로 이참에 재미있는 도로 사진을 한자리에 모아봤습니다. 천태만상의 도로 사진을 한번 살펴볼까요.

▼구름 위의 길

높이 343m의 세계 최고 다리, 미요교의 공사현장 모습입니다. 구름위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네티즌들에게 한때 합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화제의 사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다리 미요교 완성 모습.

미요교는 프랑스 남부 미요에 위치한 다리로 산악지대를 흐르는 타른강의 계곡을 가로지른다고 합니다. 2004년 12월 14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개통됐습니다.

▼어차피 돌아 올 길

원형으로 된 독특한 모양의 도로입니다. 이런 도로도 실제 있을까요?
위 도로는 일본에 실제로 있는 도로로 확인됐습니다. 독자 ‘굿모닝’님은 이 도로에 대해 “일본 건축가 노리코단의 Hiyoshi Community Center1999의 일부”라고 설명했는데요. 히요시 커뮤니티 센터는 교토에 위치하고 있으며 커뮤니티센터, 실내체육관 , 수영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용궁 가는 길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쭉 이어지는가 싶더니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있는 다리라고 믿기 어려워 지난 1월 독자분들께 확인을 부탁했었습니다. 당시 독자 '찹쌀모찌'님과 '헐헐'님이 자세한 정보와 함께 이 다리가 실제 존재하는 다리임을 알려 줬습니다.

'찹쌀모찌'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다리는 미국 메릴렌드 주와 버지니아 주의 놀폭을 잇는 다리로 체세픽 만을 가로 지르는 다리라고 합니다. 다리의 총길이는 17마일 정도이며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중간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고 수심이 깊은 중간 지점에는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다리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음주운전 전용도로

‘구불구불’ 차선이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차선을 따라 운전을 하면 마치 음주운전을 하는 것처럼 차를 몰게 될 것 같은데요. 정말  ‘음주운전 도로’라도 되는 것일까요?

독자 ‘생선장수’님은 “음주 운전도로는 아니고, 경남 마산에 실제로 있는 도로”라고 알려왔습니다. 그는 “학교 앞이라 운전자들에게 속도를 줄이라는 뜻에서 시각적으로 차선을 저렇게 한 것 같다”라고 설명해줬습니다.  

또,  ‘배고프다’님은 위와 비슷한 도로를 전남 광양시에서 봤다며 직접 사진을 제보해주기도 했습니다.

△전남 광양시 중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 근처의 도로


▼제설작업 하다 발견한 도로

많은 네티즌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로”라고 말한 사진입니다. 높은 눈더미 장벽 사이를 버스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위 도로는 일본 도야마현 알펜루트의 상징인 20m 높이의 설벽도로라고 합니다. 영화 ‘비밀’에서도 이 설벽도로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천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도로 사진 중에는 합성인 줄 알았으나 실제 존재하는 도로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실제 존재하는 도로라고 생각했으나 합성임이 밝혀진 사례도 있었는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천길’이라고 표시가 된 도로였습니다.


제주도로 보이는 곳 어느 다리 위에 황천길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글자 모양이 도로 위에 흔히 쓰는 서체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 사진은 합성으로 밝혀졌습니다.
길의 명칭은 표지판에 쓰지 길바닥에는 거의 없고, 또 교차로가 아닌 곳에는 도로 바닥에 글이 있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위 사진이 제보 게시판에 올라오자 독자 '머피'님은 “이게 바로 제대로 된 합성이다.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제4선록교라는 다리인데 누군가 합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주도에 전화해 확인해 본 결과, ”이 사진은 아주 유명한 합성사진이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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