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을 만나러 가는 길> 을 잘 써내려 오다가 막상 본문을 쓰려니 막상 어줍기만 하다.

서예가로 또는 의술가유명했던 미수허목선생의 고향인  연천인군에서는 호를 일러 <허미수>라고 불렀다.

눈에 묘역이 확 들어오는 순간, 특이하게도 검은색 일색인 장명등 문인석등이 유난히 품위있고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그림 서예 문장에 특히 능하셨다니...아마도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막연한 꿈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정월대보름이 아니던가!

나는 허목선생의 비를 어루만지며  언감생심이지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흠모하는 제게도 그 은사를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라고....

언감생심이라고 했든가?  허목선생의 동해척추비, 일명 퇴조비에서 그가 짓고 쓴 글에서조차 신묘한 능력이 있다는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가!!

 

1660년 10월부터 2년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조수가 들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하자 '퇴조비'를 세웠다. 훌륭한 목민관(牧民官) 치적의 일환으로 '척주동해비'가 탄생된 것이다  선생은 당나라 한퇴지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한 고사를 따라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비를 세우니,

과연 그  날부터 조수의 환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이 것이 이 비를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14일날 보름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밤하늘에 만월처럼 두둥실 뜬 달을 바라보고 지났기에 날자가 헷갈렸다.

막상 대보름 밤에...아차! 오늘이 대보름밤인데...  불현듯 달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뜨락에 내려섰으나

子時를 접어든 시각의 하늘엔 구름이 달을 가리고 뿌우연 달문 자리만 내 정수리위에 와있다.

그러나 흐믓했다. 허목선생의 비를 만져보며 소원을 빌었으니 이 어찌 알차지 않은가?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나는 빙긋 웃고 있었다.

 

임진강가에서 무속굿을 벌리는 아낙이나 무에 다르랴...잘 되고 싶은 애오라지 염원이거늘....

 

 

2009년 2월 9일 이요조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29세 때인 1624년(인조2) 광주(廣州)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정진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장명등과 비석

비문은 손수 써놓고 운명하신 듯...

이 곳 비석 역시나 전쟁의 상흔이 빗겨갈리 만무하다.

아마도 비석을 의지하여 한 생명이 몸을 숨기고 총격전을 벌인 당시 참상이 여실하다.

 

 

흰 비문은 일월석(日月石)이라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랍니다.(연천향토문화사 이준용님의 말씀)

비석의 옆구리는 뎅겅 잘려나가고...

향로석과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이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입니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곳까지 가져온 돌입니다. (이준용님의 해설) 

 

문인석 뒤로 보이는 구덩이에 초병이 발을 헛디뎠다.

난데 없는 홀에 의아해하는 것 같아

비틀거리던 초병에게 나는 아는 척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마도..이 것은 궁궐에 가면 양 쪽으로 물이 담긴 석물이 있는데 굳이 고쳐서 이름지으라면 방화수다.

화마가 들어오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음..벌써 누가 먼저왔군> 하며 돌아간다는...토템적인 방화수가 목적이다.

무덤 양쪽에 ...특이하게 아주 낮게 지면 아래로 설치되었다. 비오면 자동으로 괴이고 증발은 더디되겠다.

아래 해태(물 속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화마를 지켜준다는 속설)는 인평대군의(포천) 묘에서 찍어 온 것이다.

물론 양옆으로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비교/인평대군 묘역의 해태석상 

 

 

상석과 향로석이 있는데 단순하나 향로석에는 글자같은 문양이 보인다. 

 

 

벼슬을 한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문인석은

무덤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세우는데 다양한 종류가 있다.

 

 

 

흰대리석으로 비를 세웠다.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

허목선생은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비석의 후면

비석의 후면은 고인 생전의 업적을 나타낸다.

 

 

찾아가는길/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

북삼교를 지나 (허브빌리지/좌측) 직진(2~3분)  징파리 초소 

신분증 맡기고 초병의 안내를 받아 4km가량 더 들어가서 오른편 둥근 돌모양의 안내석이 있음

우측으로 더 들어가면 입구 좌측에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잔디마당이 나옴

주차공간도 있음  오른쪽 동산.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허목(許穆.1595 ~ 1682)의 묘이다. 허목의 자는
문보․화보이며, 호는 미수,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
해군 7년) 정언웅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2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를
완성하였다. 관직에 뜻이 없었던 듯 여러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

1657년 정계생활을 시작, 1674년(현종15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
천으로 돌아와 저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
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효종 사
후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동사≫≪미수기언≫≪경설≫≪경례유찬≫등이 있고,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
사를 받았는데, 선생의 묘비 글과 삼척의 동해척주비를 통해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허목묘의 석물은
독특하게 검은색이며, 예술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①임진강 풀리자 '미수허목'을 찾아 떠난 길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6에 글에 연하여 씁니다.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는 민통선 안에 위치했다.

징파 초소까지 다다라서 어떻게 왔냐는 말에 여차저차 이야기를 하니 좀 기다려 보란다.

마침 페인트 깡통을 두 병사가 들고 나온 곳으로 다가가서 묻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찾아왔다는데요. (안에)있습니까?> <응, 있어>

하사라고 한다. 초소의 고참인 모양이다. 어떻게 왔냐고 묻고 신분증을 맡겨놓고 병사를 한사람 대동하고 들어가란다.

그리고 나중에 카메라를 한 번 확인시켜주시면 된단다.

 

한 200m들어가자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긴한데 좌측으로 4km더 가서 있다는 안내판이다.

초병에게 물어보니 그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어떤 분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초병에게 안내를 받는 게 아니라 그저 감시를 받는

감시병 한 사람을 달고 직접 두리번거리며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길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무튼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래도 고맙게 두어군데 안내표지판이 있었고 큰돌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일일이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흔히 공덕비라고도 말하는 신도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산위로 오르기 쉽도록 깨끗하게 단장된 계단을 올랐다.

어림잠작으로 아마도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닐까 싶었는데...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종중이니 모두가 양천허씨가 맞긴 맞다.

대리석계단은 동산의 봉우리 위쪽으로 더 연결이 되었고 그 위로 올라가니 근간에(1994년) 의정부 송산리 묘역이 개발로 인해 수용당하여

이 곳으로 이장하여 다시 세운 묘였다.

 

부근 일대가 모두 양천허씨 종중묘역이므로 그제사 다시 둘러보니..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동산이 또 있다.

특이하게 검은 문인석들로 둘러싸인  묘 한 기 <아, 맞어...연천군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그 묘소가 이제야 기억속에 들어오다니~>

서둘러 다시 내려와 우측 안쪽으로 들어가니 5백여평 쯤 되보이는 너른 잔디 마당이 나온다. 정자도 있고 간이 화장실도 두 개나 설치된 걸로 봐서

문중에 초상이 나거나 벌초를 할 때나 문중 행사를 갖는 장소인가 보다.

잔디를 얼마나 곱게 심었는지 동산자체를 큰 왕릉 못잖게 손질을 해두었다.

 

입구 계단을 오르려 다다르자 이상한 돌무덤 같은 게 보인다.

<아!  石棺이다>......이모저모 사진을 찍고 내 발걸음으로 길이를 재어보니 보통 행보로는 네 걸음이요 성큼성큼은 세 걸음의 길이다.

여섯자가웃은 좋이 되겠다.  안을 비쳐서 요리조리 사진도 찍어보고....신기하기만 하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훈(薰) 이라면 방금 다녀온 곳의 동산 정수리에  이장한 듯 새로 만들어진 묘의 임자가 아니던가?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우리말로는 널이라고 불러지는 관(棺), 500년이 된 석관을 이렇게 자세히 만져보다니....

물론 용산 박물관에 있는 석관처럼 그림이나 글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석관은 아니지만 그 투박하고 단순함이 마음에 차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둘러보지 않아도 그리 서운하지 않을 것 같은 흡족한 마음이다.

 

석관 내부를 찍어보았다.

열려진 석관위로 한줄기 햇살도 들어오고, 파르라니 뭔가 새싹도 움트고, 낙엽도 찾아들었다.

 

처음 잘 모르고 찾아올라간 묘역이 목적인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니라고 실망하며 괜히 올라갔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뵙고 무려 500여년을 누워계시던 관을 이리도 만져보니 그 게 도리고 예의가 아닌가?

 

잘 가꾸어진 계단을 조금 더 오르자 비로소 그분의 묘소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다음글③로 계속)

 

 

우리나라의 관은 재료에 따라 목관(木棺)·옹관(甕棺)·석관(石棺)·와관(瓦棺)·도관(陶棺)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목관은 신분에 따른 구별없이 거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평양 정백동 유적, 백제 무령왕릉, 신라 천마총 등의 목관이 대표적이다. 옹관은 토기그릇을 시체 담는 관으로 대용했던 것으로서, 단옹식 옹관과 조합식 옹관으로 구분되며 부여 송국리 독무덤이 잘 알려져 있다. 돌을 재료로 한 석관으로는 고발식석관(刳拔式石棺)과 조합식석관이 있다. 와관은 기와를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유적에 남아 있다. 화장이 성행하면서 많이 제작되었던 도관은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것으로서, 공주시 마암리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검색

 

 

 

미수허목의 묘역에 들어서다.

 

계단을 향해가는 오른편에 석관이 놓여있다.

 

 여기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양천허씨 협천공파 종회

 글이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낙엽들이 찾아들었다. 햇살도...새 생명도 움이트고,

 의정부 송산의 도시계획으로 94년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한다.

 오른쪽이 (薰)공의 것이고 좌측이 비의 것이다.

 뒤로 고즈넉한 민통선안의 풍경이 보인다.

 빛이 있으니 생명을 가진 새싹도 움트고...

 석실내부는 충분히 넉넉해보인다.

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보아도 역시 아름답다.

널이 아름다운 것인지...돌이 아름다운 것인지....나 역시 구분이 잘 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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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잘 못알고 올라갔던 묘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역입구에는  미수 선생의 생애와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미수 선생과 그의 증조부 許磁님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 곳에서부터는 양천허씨 종중 묘역을 알리는 입구인 셈이다.

 

 미수 허목의 신도비

 

문인석이 세워진 이 묘로 착각했었다. 

 6.25 전란의 참사가 이렇듯 흉흉한 사실로 남아있는 곳!

흉탄은 문인석의 왼쪽 어깨를 날려버렸다.

등 뒤를 보면...얼마나 총탄의 위력이 쎈지...

순간 소름이 오싹끼쳤다.

 전란중에는 북쪽 땅이다가 (3,8선 이북)

전후에는 우리땅이지만....민간인은 출입을 할 수 없는 곳! 

 

문인석에 핀 돌이끼가 세원무상을 말해주는 듯...오른쪽 문인석의 건너편 귀부분 아래가 <미수 허목>의 묘역이다. 

 

잘 못 찾아간 양천 허씨의 훈공묘 ↗ 

계단을 더 오르니

 새로 이장한 묘였다.

 바로 석관의 주인인 셈이다.

석관이 출토된지 대략 500여년으로 셈하니 <미수 허목>은 300여년 전에 가셨으니

200여년을 앞서신 선조 할아버지인 셈이다.

 

(다음 글로 이어씁니다)

 

이요조

 

 

인평대군 묘(麟坪大君 墓) 및 신도비,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인평대군의 제문을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네 임금이 직접 짓고 쓰신 어제어필을
비석에 새긴 것인데 인평대군묘 좌측에 비각을 짓고 두 개의 쌍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합니다.



인평대군 신도비

 

 

 

 

지정번호 : 130
명칭 : 인평대군묘 및 신도비
수량/보유종별 : 일원
소유자(보유자 ): 전주이씨

           인평대군파종중종회
소재지 : 신북면 신평리 산 46-1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2, 6,5

 

 

 


묘역은 곡담이 둘러져 있고 묘비1기 상석1기 문인석 4기(소형2, 대형2)향로석1기 망주석2기 장명등1기가 배치되어 있다. 묘역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묘비에는 유명 조선국 인평대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경공지묘 복천부부인오씨부좌(有明朝鮮國麟坪大君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忠敬公之墓 福川府夫人吳氏 左)의 명문과 무술구월초삼일(戊戌九月初三日) 의 건립기문이 있다.

상석의 고석(鼓石)은 사면에 사자상이 양각으로 조식되어 있고 문인석, 장명등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묘역은 묘전을 장대석으로 치장하였고 장명등은 안상문(眼像文),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하였다.

원형의 호석을 두른 봉분은 직경 550, 높이 175cm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을 진설할 때 사용하였던 판석이 놓여있고 마주하여 묘비의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문인석은 두손으로 홀을 잡고 있는 모습이며 관복의 앞자락에는 운문(雲文)이 조식되어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60여m 전면하단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총고325, 폭115, 두께35cm의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사실적표현의 정교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은 오정일(吳挺一)이 한것으로 되어 있다.

인평대군 이요(李 )는 인조의 3남, 효종의 동생으로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서예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어 제자백가에 정통했다. 인조8년(1630)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부왕을 남한산성에 효종했다. 인조18년(1640)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효종1년(1650)부터 4차에 걸쳐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병자호란의 비분을 읊은 시가 전해온다. 호는 충경(忠敬)이며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등이 있다.

묘역은 1800여평으로 매우 광대한 편이고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어필로 된 치제문비가 있어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인평대군 묘소인지 몰랐습니다.

한음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묘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경기도 포천 신북면, 경복대학 부근일 거라고 찾아갔는데...

경복대학을 기준으로 경복대학 우편(남측)에 묘소가 있기에 달려갔더니 .....

오성과 한음을 찾아서 다니다가 어부지리로 간 곳이었습니다.

이덕형님의 서원은 경복대학 왼편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묘소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 했고 석양은 날카롭게 눈을 찔렀습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나 친필을 직접 새긴 것이라기에

궁금해졌습니다.

글시체를 볼 수 있다기에, 전 보았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도 카메라도 석양빛을 버거워했습니다.

묘소 둔덕에 올라가니 얼마나 바람이 쎈지 칼바람이었습니다.

묘소 앞에 인석과 석물이 잘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묘소아래 사당도 열어 보았습니다.

사당 앞에는 묘소를 지키는 분의 집인지 인가가 한 채 있엇고

추운 날씨 탓에 텅빈 주차장엔 쌓인 눈이 추위에 엉겨 있었습니다.

귀한 문화재를 만난 기쁨,

추운 날시 탓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포천하면 예로부터 물이 좋아서 온천도 유명하고 막걸리도 유명하지요.

막걸리 두어 잔에 온천욕 보다는 역사탐방을 하고 선조들의 발자취 흔적을 보고

포천 일동 막걸리에 이동갈비도 아무렴 좋지만....

쨍한 바람에 역사적 문화체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바쁜 절구질에도 손 들어 갈 짬 있다는데 이 추위에 어느 하루 포근한 날 없을까요?

자~ 아이들과 함께....우리 떠나 보실까요? 

 

 

 

글:사진/ 이요조

 

 

 

 

인석(人石)혹은 석인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무덤앞에는 이런 인석을 두는 걸 우리 선조들은 좋아했습니다.

무덤을 잘 지키라는 뜻이겠지요.

인석에는 아주 다양한 모습과 종류가 많습니다. 아마 검색해 보시면 재미 있으실 듯~~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인평대군의 묘소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묘소는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경볻대학 가기전 진입로 1Km 전방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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