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오늘은 6,25!!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한지 64년이 되는 해이다.

우연찮게 6월 들어 DMZ를 연거푸 탐방하게 되었다.

철원의 백마고지와 고석정,양구의 두타연 그리고 파주의 도라산 전망대!

오늘은 파주의 도라산 전망대와 양구 DMZ안에 있어 개방된지 얼마되지 않은 두타연폭포를 함께 소개하려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남북간 이념의 차이로 전쟁을 치르고 공동경비구역이라는 판문점이 생겨나고 남북은 60여년이 지나도록 대체상황이다.

 

경기태세가 삼엄한 DMZ....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땅!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운의 땅! DMZ가 이제는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  사람들은 그 곳을 일러 기적의 땅이라 부른다.

 

가려진 장막 저곳에선 새들은 남북을 자유로 넘나드는 자유 속에 평화를 노래한다. 수많은 생명들이 사랑을 하고 봄이면 생명이 꿈틀거리는 이곳이 평화가 된다면 오롯이 자연생태계가 살아있는 공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제 3땅굴을 둘러보았다.

사진찍는 게 허용되지 않아 그림판으로 대신해 보면~~

제 3 땅굴 이미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땅굴이라고 한다.

우리측 역갱도 300m 가량 궤도열차를 타고 내려가 방문허용 지역까지 돌아보고 오는데 1시간 소요, 임진강역이나 임진각에서 관광버스 이용시 총 3시간 소요된다.

 

제 3땅굴은 1974년 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74년 9월5일 북한의 귀순자 김부성씨가 남측 비무장지대 내의 커다란 미루나무를 보고 땅굴을 측량한 측량기사라고 아군에게 제보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남침예상 방향을 찾아 직경 7.5cm의 PVC파이프 시추공 107개를

 2m간격으로 물을 채워 설치하였습니다.
3년이 지난 1978년 6월10일 한 시추공에서 폭발음과 함께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주변에 5개의 시추공을 추가로 설치하던 중 적이 파내려온 남침용땅굴을 관통하게 되었습니다.
이 터널은 제 3땅굴을 관람하기 위해서 파주시에서 2003년 10월4일~ 2004년 6월19일 까지 TBM
기계로 길이 358m, 내경3m 경사도 11도로 굴착, 2004년 6월 30일 개통하여 관람객에게 도보관람로로 이용되고 있는 터널입니다.
제 3땅굴은 총길이 1,635m, 지하 73m에 위치 현재 265m만 도보로 견학할 수 있으며 265m 지점부터 군사분계선까지는 차단벽을 설치하여
더 이상 견학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DMZ 파주에 위치한 도라산 전망대를 둘러보러 처음으로 DMZ 전용열차 시승식에 참여했다. 출입신청서를 양식대로 쓰고 신분증을 제시 확인 후에야 들어 갈 수가 있다.

 

DMZ 열차 내 사진이 열차 벽면에 전시되어있다.

전쟁사진이다. 지금은 점차 잊혀져가는 세대 간의 격차로 이렇게라도 후세에 각인시켜야만 한다. 좀 더 있으면 남북 전쟁도 아이들이 활자로만 접할 시대가 올 것이니...

열차의 디자인은 남북 간의 통일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이미지로 그려졌다고 한다,

 

도라산역에 내리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 버스를 타고 제3 땅굴과 도라산 전망대를 둘러보면 된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은 미세먼지 농도가 심한 날이어선지 연무가 끼어 시야확보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분이 있어 세세하게 개성공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올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민통선안에 위치한 유일한 대성마을도 오른쪽으로 보였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만나본 어르신들~

연세 드신 분들이 삼삼오오 전쟁의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러 몰려나오셨다.

 




군인들도 현장학습차 땅굴 견학을 나왔다.

 

도라산전망대/이 날은 연무로 시야를 확보 못해 걸린 사진으로 대체

 

오랜 세월,

 DMZ는

천연적인 자연생태계를 이룬

초자연적인 공원으로 변모했다.

 

자연생태계 DMZ가 가로 놓여서 아름다운 아이러니를...

땅 아래로는 무시무시한 지뢰밭 일지라도, 훼손되지 않은 비밀의 정원같아 보인다.

도라산전망대를 둘러보고 다시 서울로 ~~

타고 들어 온 열차를 타고 되돌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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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두타연에서 모의 지뢰밭 탐사

 

 

 

 

 

 

 

 

 

두타연은 민통선안에 위치한 양구 8경의 제일 명소다.

전쟁이후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휴전선에서 발원한 수입천의 지류로 자연발생적인 폭포라 사람의 손때가 아직 타지 않은 곳 !

2년 전, 두타연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만해도 춘천에서 양구간 배후령터널이 처음 뚫리고 양구는 부쩍 가까워졌다.

오지라는 오명에서 풀려나 자연 그대로인 양구가 관광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희귀종 열목어 최대 서식처인 두타연은 3일전에 신청해야 갈 수 있었던 곳이 이젠 현장에서 신청하고 들어가면 된다.

단 신분증을 맡기고 태그(위치추적기)를 목에 걸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두 번째 찾는 곳이지만 여전히 물은 맑다. 하기야 금강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니.....

여기서 금강산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화가 박수근이 태어난 곳이라 전쟁당시 박수근의 그림들이 여기 지뢰밭 어딘가에 항아리로 묻혀있다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설이 구전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그림의 화가 박수근!

그 항아리를 찾는다면 로또쯤은 우스운 따 놓은 당상이다.

 

두타연은 그 물빛이 맑아서 놀란다.

그 맑은 물빛에 햇살이 부서져 눈을 찌르는 아름다움에 한 번 더 놀라고

그리고 생태계가 온전히 살아있어서 놀라고 모의지뢰밭에서 또 놀라고~~

놀라움의 연속이다.

 

탈렌트 소지섭이 이곳을 알리는 대표연예인으로~

소지섭 갤러리도 있고 소지섭길도 생겨났다. 소지섭갤러리도 있어 젊은 층들에게도 좋은 두타연 트레킹코스도 되어준다.

일일개방권 이후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건 사실이다.

 

두타연 주차장에 차를 대지 말고 훨씬 못미처 천혜자연환경 그대로인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다.

 

두타연에 오심을 환영하는 소지섭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햇살에 비친 눈부신 맑은 계곡물 징검다리 건느기

 

이글은 야성가족부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 여름 민통선여행은 어떠세요? view 발행

추천합니다 2014.06.26 15:40

01.호국보훈의 달, DMZ 남북전쟁이 발발한지 64년이 되는 해다. 우연찮게 6월 들어 DMZ를 연거푸 탐방하게 되었다. ..

 

 

 

 

희귀종 열목어가 산다는 양구 두타연폭포!!

 

 

민통선 안에 위치한 거라 사람의 손때가 아직 타지 않은 곳 !

2년 전, 두타연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만해도 춘천에서 양구간 배후령터널이 처음 뚫리고 양구는 부쩍 가까워졌다.

오지라는 오명에서 풀려나 자연 그대로인 양구가 관광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두타연은 3일전에 신청해야 갈 수 있었던 곳이 이젠 현장에서 신청하고 들어가면 된다.

단 신분증을 맡기고 태그(위치추적기)를 목에 걸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두 번째 찾는 곳이지만 여전히 물은 맑다. 하기야 금강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니.....

여기서 금강산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화가 박수근이 태어난 곳이라 전쟁당시 박수근의 그림들이 여기 지뢰밭 어딘가에 항아리로 묻혀있다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설이 구전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그림의 화가 박수근!

그 항아리를 찾는다면 로또쯤은 우스운 따 놓은 당상이다.

 

두타연은 그 물빛이 맑아서 놀란다.

그 맑은 물빛에 햇살이 부서져 눈을 찌르는 아름다움에 한 번 더 놀라고

그리고 생태계가 온전히 살아있어서 놀라고 모의지뢰밭에서 또 놀라고~~

놀라움의 연속이다.

 

탈렌트 소지섭이 이곳을 알리는 대표연예인으로~

소지섭 갤러리도 있고 소지섭길도 생겨났다. 소지섭갤러리도 있어 젊은 층들에게도 좋은 두타연 트레킹코스도 되어준다.

일일개방권 이후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건 사실이다.

 

두타연 주차장에 차를 대지 말고 훨씬 못미처 천혜자연환경 그대로인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다.

 

 

 

 

2012년 글

ITX 청춘열차 여행 & 양구 DMZ '두타연' 관광
http://blog.daum.net/yojo-lady/13746315

 

 

 

 

 

 

 

 

 

 

 

 

 

 

 

 

모두의 소원 "통일"의 염원

돌 하나 올려놓고 가는 길~

가을 두타연

두타연의 왕버들

 

 

 

 

에도 봄은 왔다.

얼었던 강이 풀리고 완연한 봄이 왔다.  강물에 봄빛이 한껏 녹아난 듯,  물빛은 푸르고 점잖은 듯 잔잔하다.

물은 원래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어서 양쪽의 강둑이 낮은 곳으로 쏠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여름우기에 접어들면 자칫 범람하기 쉬운 강이기도 하다.

다리 너머 낮은 곳, 기다란 밭뙤기엔 모종을 심었는지 낮은 비닐을 씌우고  참외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의 바쁜 일손이 보인다.

하늘에 그 운을 맡기고 다 앗기더라도....어쩔 수 없는 농사를 짓고 있다.

 

연천군으로 들어서는 곳은 북한지역인 중면 여척리로 중면 횡산리와 왕징면 강내리에서  누인 ‘S'자형으로 멋지게 굽어 흐른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는 듯 하다가 다시 분단된 국토의 한계선을 가로질러 흐르다가  다시 내려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한강과 합류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 254㎞를 달려 한강과 만나는 임진강 줄기는 56㎞가 파주시와 접하고 있으며 30㎞가 개발 가능지역이라고 했다.


 

분단된 탓에 자연경관이야 제대로지만....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던 곳에 임진강 두지나루 황포돛배가 떴다.

60만년전 지각변화로  한탄강과 임진강은 현무암 바위와 주상절리가 형성된 적벽이 아름다운 강들이다.

민통선안에 위치하였다가 지금은 풀려난 장남면 고랑포리 그 부근이야 아직 철책으로 막아져 있지만......

 

 

고량포구는 옛문헌에는 ‘皐浪渡’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임진강 일대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의 하나였다.
특히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 새우젓, 소금배 들이 장단의 대표적 특산물이었던 장단백태, 땔감, 곡물 등을 교역하였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경기북부 지역 농특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하여 주요 상권형성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고량포구에 다다르면 강물빛이 하얗게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고량포 여울목이란다.

이 여울목은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의 일당이 바로 이 여울목을 걸어서 지나온 그곳이다.

수심이 깊은 임진강인데도 이 여울목에 오면 갑자기 수심이 무릎정도로 얕아져서 강을 건널수 있다한다.  

고량포 여울목을 바라보고 뱃머리는 오던 방향을 선회하여 다시 돌아 나오는데 총 45분이 소요된다.

 

 

 

역광이라 강물이 검푸르게 보인다.

 

 

황포돛배를 운전하던 선장이 가르키는 곳, 강의 정 중앙 한가운데...저 너머 보이는 희미한 산이 바로 30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개성의 송악산이란다.

 

  

 

 

 

선장님의 배려로 뱃전에 편안히 앉아서 사진 찍으며....

음악소리가 들려오는지 조차도 잊고 나는 강물과 적벽을 흠씬 느끼며 교감을 시작했다.

 

  

칼로 잘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좌측은 문산지역 장좌리적벽,.오른쪽은 연천 원당리 적벽이다.

마주 바라보이는 곳이 고량포 여울목,  왼편이 군사한계선인 고량포구다.

 

 

내 눈에는 마치 토끼가 엎드린 듯 보이기도...

 

 

주상절리의 적벽모습

용암인 마그마가 바닷물이나 강물의 냉각 응고함에 따라 부피가 수축하여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금.

임진강 적벽의 주상절리는 모양이 상부는 바늘침 같게 생겼고 하부는 떡시루처럼 이중으로 생긴게 특이하다.

가로 세로, 이 두가지로 된 주상절리는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형태라 전한다.

 

 

 

 

 

이래서 돌단풍인가보다. 흙하나 없는 수직 석벽에 꽃을 피운 '돌단풍,

 

 

임진강의 어부들인가보다. 강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들의 모습은 차라리 편화롭게 보이기까지 하는데.

 

 

적벽에는 동굴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육이오 동란에는 방공호가 되어주기도 했단다.

이 동굴모양은 이름이 떠 오르지 않지만 덩치에 비해 머리가 아주 작은 갑각류(?) 작은 그런 동물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라다보이는 곳이 민통선 안에 있는 예전 고량포구,

이 부근에는 미수 허목의 묘역과 지금은 출입이 풀린 경순왕릉이 있다.

 

 

  예전 고량포구

왼쪽 아래엔 학교가 있고,문방구가 있고 우체국지소,화신백화점,변전소,금융조합,곡물검사소, 우전시장, 여관, 시계포 등이 있다.

 

 

아마도 예전부터 난 길인 듯, 길이 고불고불 정겹다.

화려했던 옛 정취는 어디로 사라지고....그나마 기억하던 사람들 조차 떠나고 나면

아마도 이런 자료뿐이리라~

 

 

정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어보인다.

선장님이 알아서 가르쳐주신다. 문산으로 가다가 장좌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3km가량 들어오면 이 곳이란다.

 

 

 

 

 

 

절벽에 흰꽃, 요즘 피는 흰꽃이 무에 있던가? 조팝나무? 배룽나무? 야광나무?

푸른 적벽에 등 기대어 하이얗게 무리져 피었다.

 

 

 

 

 

 

 

 

군데군데 산철쭉도 피어있는 적벽의 풍경,

임진강은 우기시 저 다리를 넘어 범람하기가 예사란다.

파주 문산,연천의 물난리가...바로  이 임진강?

왼편 강둑을 보니...잘 흘러내리던 강줄기가 질펀한 연천평야를 덮치게도 생겼다.

 

 

 

파주,문산쪽의 장좌리적벽은 그런대로 높이가 있어서 적벽위엔 그나마 수림이 울창한 편인데

지대가 좀 낮은 연천쪽 원당리적벽은 민둥머리 강둑이다.

 

 

우리 분단의 비극을 대표하는 임진강,

그 강물은 유유히 북에서 남으로 침묵속에 흐르건만 분단 60년의 아픔은

60만년의 역사를 가진 적벽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강물이..........시니컬하게 웃으며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글:사진/이 요조

 

다음글은  고량포, 묻혀버린 역사속으로 ③

 

 

 

 

 

 씨 풀리자 근질거려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다.

감기기운이 지끈지끈 오는 것 같아 누웠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산뜻한 바람이나  운동삼아 쐬고오자고 나선 길이다.

사실인즉슨 겨우내 참고 살았던...절절히 만나고싶은 인물이 꼭 있었다. 300여년전에 돌아가신 대학자 '미수허목'과 기생 '홍랑'이다.

영암에 갔을 때 홍랑과 최경창(崔慶昌)이 머물었던 곳도 사진을 찍고 시비도 보고,,,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400여년전 고운 사람이  파주에 누워있단다. 난, 홍랑도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홍랑은 <묏버들 꺽어~~>란 시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정도로만 알았는데 기막힌 러브스토리라니~

또 하나, 경북 봉화 여행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하여 귀동냥으로 처음 만나본 '미수허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만치 캄캄했었다.

우의정까지 오르고 시 서화에 능하며 특히 전서체로는 동양의 제 1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가 계신 곳!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만 외우고는 무작정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상하게 왕징면에만 오면 네비게이션이 기를 못피고 정신줄을 놓는다. 나중에사 알고보니 군사지역이 가까워서 그런 모양인데..

주소만 겨우 적어 온 군남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를 내 무슨 재주로 찾는단 말인가?

겨울 산골에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군남면, 화이트교를 건느려는 찰나, 도로에서 지나치며 이정표를 보고는 반가움에 무조건 우회를 하고는 그 동네 부근에 비슷한 묘역이 있나싶어

낮으막한 동산을 오르내렸다. 헛수고였다. 동네라고는 한결같이 빈집같은 적막감 뿐~어쩌다 마주친 사람도 전혀 모른다는 도리질 뿐~

이대로 돌아 가야하나 싶었을 때,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고...다행히 너무 자세히 가르쳐주긴 했지만...혼자선 갈 수 없는 곳이란다.

뭔말인고 하니 민통선 안에 묘역이 있다는 것이다.

북삼교를 지나 직진하면 초소가 있단다. 이...그랬어~ 이제사 기억이 난다.

전두환씨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브빌리지를 찾아왔을 때, 그 때도 네비게이션이 허브빌리지를 눈 앞에 두고도 빙빙돌려서

골탕을 먹이던..그래서 초소까지 갔다가 물어보고 되돌아나갔던 적이있었다.

징파 나루가 있다는 북삼교, 나루의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민간에서는 미수나루라고도 불린단다.

허목이 나들이를 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나루에 당도하여 술막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공에게 “미수 왔다!”라고 고함을 질러 나룻배가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 징파(澄波)나루.

얼었던 강물이 슬슬 풀려나는 정월대보름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랬는데......어허...낭패로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겨울 철새떼가 하늘을 가득 덮고있었다.

날씨 풀리자 날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움직임 같아 보인다.

 

 

먼-길 떠나기 위한 도약인지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북삼교에서 바라본 허브빌리지 뒷배경

 

 

254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진강 중에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구간은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임진강의 상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한강과 만나는 하류지역도 절반은 모르고 산다.

한강을 만나기 위해 남으로 흐르는 오후 임진강은 햇살을 수직으로 받으며 꽂꽂이 흘렀다.

군데군데 얼음이 눈치를 보듯 슬슬 풀려 녹아났다.

 

난데없이 다리위까지 들려오는 징소리...멀리 좌측 강가에 바짝 세워둔 차가 한 대 보였다.

 

 

부쩍궁금해보여서 줌인으로 당겨보니 굿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음력 정월 대보름!

용왕신에게 기원하는 중인가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다리 아래에 무려 3군데나....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기원을 새기는 걸까?

 

 

줌인으로 당겨보니 돼지머리와,  떡 과일, 쌀푸대등이 보인다. 거창하다.

 

 

바다에서는 만날볼 수 없는 그 무엇...강은 의연하게 침묵한다.  

 

 

얼었던 산골짜기 물들이 흘러흘러 이념따위는 상관없는 철새떼처럼 돌아 흐른다.

 

옛전설에 이 곳  절벽바위에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부엉바위로 부르다가 벙바위로 불려지기도 한다는....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 바위를 보니 고양이 형국이고

강 건너 마을은 쥐형상이더란다. 그래서 그 마을을 찾아가봤더니...쇠미해지고 있는 마을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저 벙바위,,아니지 고양이 바위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주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났더니....마을이 기가돌고 살아나서 한 사람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왕의 신임을 받게되자

안하무인이 되었고 고양이 눈을 가리는 일도 잊어버렸다한다.

끝내는 그 행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마을이 다시 피폐해지더라는 ....

<실제 이야기로 검색글에서 그 시대와 왕과 그 사람의 관직까지 알았는데...재차 검색이 되지 않는 애석함>

이 곳 사람들은 붉은 벙바위에게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한다.

지금은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이  그 곳에다가 허브빌리지란 이름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봄오자 녹아 흐를 것을 물은 얼어서 빛깔마저 달리하고.... 

모질게도 강물을 다 얼구어버린 한겨울의 江, 그 위로 흰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겨울 임진강을 보고싶다.

 

 

징파나루쪽(右) 

 물그림자 도도하고...

 

징파나루란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맑고 잔잔한 여울이 감미로와 보인다.

물이 맑아 징파라 했다지만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임진강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곳이 '군남댐'인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임진강은 홍수로 몸살을 앓고 들판이며 민가까지 질편하게 누워버리는 통에 아예 몸풀 곳을

마련해주느라 댐을 건축중인 모양이다.

 

 

이 곳은 기원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미수허목'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민통선 안에 모셔져 있다는데, 나는 과연 들어 갈 수가 있을까?

임진강 최북단의 다리 북삼교위에서 지금은 흔적뿐인  그가 드나들었다는 다리 북쪽의 나루를 바라본다.

지난해, 경북봉화를 두 번이나 거푸 방문을 했었다.  늦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선제일의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에 올라보고 점점 미수허목의  절필인<청암수석> 을 마지막으로 영면하셨다는 그 분이 궁금해졌다.

아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는 점점 만나고싶은 간절함에 솔직히 안달이 났었다.

나는 강서리 산 48번지를 찾아 삼북교를 건너 민통선 검문소, 징파리 초소를 향해 곧장 직진했다.

(다음글로 계속........./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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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이 글을 써 두신 후 15일만인가 운명하셨 전한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미수허목'을 알게되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다양한 옛 문서가 비치된 충재박물관

 

충재권벌은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큰 수석의 등위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둘레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거북이가 물 가운데 정자를 업고있는 형상으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충재권벌이 독서를 하는 곳으로 겨울에는 청암정 바로 앞의 건물에서는 겨울을 나고 바람을 쐬고(下사진 左) 

여름에는 즐겨 독서를 하거나 시문을 지었다는 정자로  닭실마을 황금들판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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