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12경인 

안동 부용대  를 오르는 길이었다.

시작 길은 산을 오르는 것 같아 보여 나같이 둔한 사람들에게 두려워말라고 친절하게도 부용대까지 450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부용대에 올라 바라본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감돌아 흘러 그 안에 있는 하회마을이 마치 물속에서 솟아오른  한송이 연꽃으로 보인다는

뜻에서 부용대로 지어졌다 한다. 깎아지른 듯 한 벼랑이라 부용대에 오르면 발아래가 아찔하다.

낙동강물이 이렇듯 하회마을을 휘감아 돌아 흘러서 아마도 풍산 류씨(흐를 류)와 풍수가 맞아 떨어져서 풍산유씨 일가가 번성한 게 아닌가

보고있다.

 

 

 

바라본 동네의 느낌은 옛 정취가 묻어나서 낙안읍성 같아 보이지만 초가마을의 서민들 집이 대부분인 낙안읍성과는 달리 하회마을은

솟을대문이 있는 양반가의 마을이 대부분이다.

몇몇 보이는 초가는 집안일을 도우는 사람들이 나가 살았던 형태의 주택이라고 한다.

 

 

 

휘감아 도는 낙동간 물길 건너 마을을 빙 두르고 있는 솔밭은 만송정이라는 비보림(허한곳을 채운다는 풍수)으로 소나무 만그루를

심었다는데 현재는 100여그루가 남아있다 한다.

아마도 만그루가 아니라 많이 심었다는 걸 대신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짐작을 해본다.

 

 

 

부용대에서 강 건너 뚝방까지 230여m에 줄을 달아 <선유줄불놀이>를 즐겼던 낙동강변의 불꽃잔치가 유명하단다.

안동을 여러 번 왔지만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물론 시위가 어두운 야간에 진행되는 놀이로 선유줄불놀이옛 뱃놀이의 일종으로,

뱃놀이와 불꽃놀이가 아우러져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 하회마을 만송정 일대에서 두 차례 시연이 된다고 한다.

 

 

 

언제 나도 양반처럼배를 타고 시를 지은 후 <낙화야~>소리치면 부용대에서 불이 아니라

낙화, 꽃이 뚝뚝 떨어지는 60여m의 절벽을 화려하게 바라보는 양반들이 즐기던 풍류를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다면 꿈일까?

 

 

 

 

 

 

 

 

이른 아침, 떠오르는 햇살 그림자에 부지런한 노파의 실루엣이

기울어진 나무 그림자랑 닮아있다.

 

 

 

 

 

 

 

 

2010년 5월 중순 초하의 부용대와 만송정

 

 

 

 

 

 

 

배삯은 3만여원 정도면 하회마을을 구비도는 낙동강과 부용대를

강을 떠가는 내를 타고 구경을 할 수가 있다 한다.

 

 

 

낙동강뱐을 따라 죽이어진 벚꽃가로수길 

나 역시나 구경을 못해봤으니....이 사진두고 상상이나 해봐야겠다.

▼ 

사진출처는 .....자료구하러 다니다가 X뉴스에서 퍼 온 것 같은데 ,,,어딘지 잊었다.

선유줄불놀이

 

 

 *안동하회마을을 부용대에서 바라보다*

 

 

낙동강이 큰 S자 모양으로 마을 주변을 휘돌아 간다. 그래서 하회(河回)라 했다.
오른편 안동시에서 흘러나와 왼 편으로 흘러간다.

하회마을을 찍은 항공사진/사진 안동 하회마을 홈페이지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나흘간 한국을 방문하였다.
방한 일정은 영국 왕실의 계획에 맞춰 의전 행사를 최대한 배제하고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여정으로
이어졌는데, 이 가운데 안동 하회마을이 선정되면서 이루어졌다.

이후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이라는 브랜드를 얻어 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상업화의 일면에 전통마을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훼손이라는 부정적 측면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과 가치 제고를 위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같은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 용인 한국민속촌과 다른 점!

한국민속촌은 관광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시설이지만, 
안동 하회마을은 ‘마을’이란 말 그대로 현재 200명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이자 행정구역입니다.
사적인 생활 공간과 관광을 위하여 개방된 공간이 한 마을 내에 함께 있습니다. 
국가에서 1984년 하회마을에 대한 ‘민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민속자료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하회마을의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2010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했습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 바깥 풍경

 

세월 따라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담과 그 길을 따라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다.

 

 

골목안에는 담장을 헐고 이런 광광상품 가게가 특이하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보물 제553호 예안이씨 충효당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담장이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안 풍경

 

 

좀 죄송하지만 닫겨진 대문안의 담장은 팔을 하늘로 뻗어 는에는 보이지 않지만

되는대로 셔터를 눌렀다. ㅎ 담장인 풍경이 더욱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이 열린 집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선지 사진은 수평이 맞지않지만 수평을 맞추려면 아까운 종횡의 이미지가

사라질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올려봅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솟을대문과 대문

 

                                           솟을대문의 정의/  양쪽으로 문간채를 두고 기와집의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이 대문은 풍산류씨 연예인 <류시원>의 본가이다. (좌측,아랫문패)
엘리자베스영국여왕이 안동을 방문하였을적에 생신상을 차려낸 장소이기도 하다.

 

안동 하회마을 나무가 있는 풍경들

 

안동 하회마을 삼신당 느티나무 

 

소원을 들어주는 기원나무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하회마을 중앙에 위치)

 

 

관광객의 기원이 나무에 주렁주렁

 

 

정성스레 마음을 담아 소원지를 달고....

그 소원 이루어지이다!

 

나도 이참에 손자를....

 

감만큼 주렁주렁~~

높다랗게 매달린 감!

관광객보라고 따지않고 그냥 둔 감들이 겨울 하늘을 수놓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

 

 

 이번에 찍은 사진과 여러해 전에 찍었던 사진

강건너 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막는 비보림으로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하여 만송정숲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100여 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숲(安東 河回마을 萬松亭 숲)은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다.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1]                                          위키백과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동족부락으로, 국보를 비롯해 보물·중요민속자료·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길지(吉地)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유씨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이는 일찍이 허씨(許氏)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안씨(安氏)들이, 그 다음에는 풍산유씨(豊山柳氏)들이 동족부락을 이룬 곳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 이미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유씨 동족촌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대유학자인 유운룡·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되었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戶)의 유서깊은 대·소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중 유운룡의 종택인 안동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종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을 비롯해 하회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하회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영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하회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하회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하회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하회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이며, 대부분이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다.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양진당·충효당·남촌택의 네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가옥들은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했다.

충효당 후원에 있는 영모각(永慕閣)은 유성룡의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각종 유물과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들 가옥 변두리에는 하인이나 노비·타성씨(他姓氏)가 거주하던 집들이 있는데, 이들은 3~4칸 규모의 토담집이다.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와 강상유화(江上流花) 놀이인 줄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색인 : 하회탈 및 병산탈).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이곳 강은 대략 최대 폭 300m, 최대수심 5m에 이르며 하회도선장의 나룻배를 이용해 주변지역과의 왕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상주와 풍산읍을 잇는 지방도와 연결된 길이 하회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1990년 현재 남촌·북촌의 총가구수는 102가구이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 빈 집의 증가와 가옥의 유지·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가옥들이 퇴락해가는 문제점을 안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안동마을 가운데 있는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

 

 

 

 

붓글씨는 잘 모르지만 나는 미수 허목의 팬이다.

미수 허목의 서체를 안동여행에서 하회마을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만나고는

입이 헤~ 벌어지며 기분이 급 좋아졌다.

씩씩하게도 그를 찾아 군사분계선까지 군인을 하나 달고 찾아가지 않았던가?

 

충효당

예안이씨 충효당은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준교이다.
예안이씨 충효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홍인의 충과 이홍인의 8세손
이한오의 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을 띤 유서 깊은 집이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담장 안은 화장실이다.

 

 

담장안을 들어오니 솟을 대문이 또 따로있다.

마주보이는 곳이 충효당 본채이다.

 ▼

 

눈에 띄이는 여러게의 소화기만 봐도

충효당 가치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보물 제553호

 

 

현재 후손이 충효당 왼켠의 또 다른 담너머 안채에 기거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장마철이라도

그렇게 (습기로)누지진 않겠다.

습기를 피해 전체 돌을 쌓아 지은 것이 꽤나 보기에도 좋고

실용성도 있어보인다.

 

 

 

충효당 현판은 정침의 사랑마루에 게첨되어 있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미수의 전서체가 아주 재미있다.

충성충忠은 가운데 받들어 모시는 태양 즉 임금을 뜻하며

효는 孝 노인老을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며

집당堂은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형상의 전서체가 볼수록 그림으로 다가오듯 재미있다.

 

미수를 꼭 만나보러

나는 2009년 2월에 연천군 왕징면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미수의 묘역을 찾았다.

 

미수 허목을 만나보다. 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8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예안이씨 충효당
종목 보물 553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안채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전화번호 054-858-4768

 

 

 

청암정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걸린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허목선생은 호가 미수여서일까?  우연일까?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보물 제592-1호 
 동해비첩(東海碑帖)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고문운부*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

충재박물관에 있는 원본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으로
일월석(日月石)이라는 귀한 흰 돌에 새겼다 한다.

 

6,25동란중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난무하다.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은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이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 곳까지 가져온 돌이라는 설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송시열의 일화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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