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을 만나러 가는 길> 을 잘 써내려 오다가 막상 본문을 쓰려니 막상 어줍기만 하다.

서예가로 또는 의술가유명했던 미수허목선생의 고향인  연천인군에서는 호를 일러 <허미수>라고 불렀다.

눈에 묘역이 확 들어오는 순간, 특이하게도 검은색 일색인 장명등 문인석등이 유난히 품위있고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그림 서예 문장에 특히 능하셨다니...아마도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막연한 꿈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정월대보름이 아니던가!

나는 허목선생의 비를 어루만지며  언감생심이지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흠모하는 제게도 그 은사를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라고....

언감생심이라고 했든가?  허목선생의 동해척추비, 일명 퇴조비에서 그가 짓고 쓴 글에서조차 신묘한 능력이 있다는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가!!

 

1660년 10월부터 2년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조수가 들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하자 '퇴조비'를 세웠다. 훌륭한 목민관(牧民官) 치적의 일환으로 '척주동해비'가 탄생된 것이다  선생은 당나라 한퇴지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한 고사를 따라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비를 세우니,

과연 그  날부터 조수의 환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이 것이 이 비를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14일날 보름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밤하늘에 만월처럼 두둥실 뜬 달을 바라보고 지났기에 날자가 헷갈렸다.

막상 대보름 밤에...아차! 오늘이 대보름밤인데...  불현듯 달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뜨락에 내려섰으나

子時를 접어든 시각의 하늘엔 구름이 달을 가리고 뿌우연 달문 자리만 내 정수리위에 와있다.

그러나 흐믓했다. 허목선생의 비를 만져보며 소원을 빌었으니 이 어찌 알차지 않은가?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나는 빙긋 웃고 있었다.

 

임진강가에서 무속굿을 벌리는 아낙이나 무에 다르랴...잘 되고 싶은 애오라지 염원이거늘....

 

 

2009년 2월 9일 이요조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29세 때인 1624년(인조2) 광주(廣州)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정진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장명등과 비석

비문은 손수 써놓고 운명하신 듯...

이 곳 비석 역시나 전쟁의 상흔이 빗겨갈리 만무하다.

아마도 비석을 의지하여 한 생명이 몸을 숨기고 총격전을 벌인 당시 참상이 여실하다.

 

 

흰 비문은 일월석(日月石)이라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랍니다.(연천향토문화사 이준용님의 말씀)

비석의 옆구리는 뎅겅 잘려나가고...

향로석과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이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입니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곳까지 가져온 돌입니다. (이준용님의 해설) 

 

문인석 뒤로 보이는 구덩이에 초병이 발을 헛디뎠다.

난데 없는 홀에 의아해하는 것 같아

비틀거리던 초병에게 나는 아는 척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마도..이 것은 궁궐에 가면 양 쪽으로 물이 담긴 석물이 있는데 굳이 고쳐서 이름지으라면 방화수다.

화마가 들어오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음..벌써 누가 먼저왔군> 하며 돌아간다는...토템적인 방화수가 목적이다.

무덤 양쪽에 ...특이하게 아주 낮게 지면 아래로 설치되었다. 비오면 자동으로 괴이고 증발은 더디되겠다.

아래 해태(물 속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화마를 지켜준다는 속설)는 인평대군의(포천) 묘에서 찍어 온 것이다.

물론 양옆으로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비교/인평대군 묘역의 해태석상 

 

 

상석과 향로석이 있는데 단순하나 향로석에는 글자같은 문양이 보인다. 

 

 

벼슬을 한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문인석은

무덤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세우는데 다양한 종류가 있다.

 

 

 

흰대리석으로 비를 세웠다.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

허목선생은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비석의 후면

비석의 후면은 고인 생전의 업적을 나타낸다.

 

 

찾아가는길/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

북삼교를 지나 (허브빌리지/좌측) 직진(2~3분)  징파리 초소 

신분증 맡기고 초병의 안내를 받아 4km가량 더 들어가서 오른편 둥근 돌모양의 안내석이 있음

우측으로 더 들어가면 입구 좌측에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잔디마당이 나옴

주차공간도 있음  오른쪽 동산.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허목(許穆.1595 ~ 1682)의 묘이다. 허목의 자는
문보․화보이며, 호는 미수,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
해군 7년) 정언웅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2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를
완성하였다. 관직에 뜻이 없었던 듯 여러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

1657년 정계생활을 시작, 1674년(현종15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
천으로 돌아와 저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
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효종 사
후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동사≫≪미수기언≫≪경설≫≪경례유찬≫등이 있고,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
사를 받았는데, 선생의 묘비 글과 삼척의 동해척주비를 통해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허목묘의 석물은
독특하게 검은색이며, 예술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해남에서 온 편지가 아니라 해남에서 쓴 편지....

 

 

 

 

 

지금은 해남땅,  배낭하나 달랑메고 나 홀로 여행을 떠나왔다.

 

해남땅은 처음이라...일단 광주까지 KTX로 내려왔다.

 

3시 15분 용산에서 기차를 탔다.

 

부랴부랴 나오느라 점심을 걸렀다,

 

좀체 외식을 즐겨하지 않는데...얼마나 배가고팠는지, 도시락을 하나 사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용산서 광주까지도 말만 ktx 지 시간은 그저 그런 거 같았다.

부산까지가 2시간 40분

광주는 15시 15분에서 17시 45분 도착이니 2시간 30분 소요된다.

 

부리나케 해남으로 가야하는데...

조금 변동이 생겼다.

내일 아침까지 도착해도 될 것 같았다.

 

도착 15분 전 쯤에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하릴없이 영화를 보았다.

 

"연리지"라는 영화였다.

참으로 제작비도 얼마 들이지 않은 게으른 영화였다.

단지,  조금 이름났다는 여배우 하나 꼭두각시로 앞세워 놓고....

 

자고 가라고 말렸지만...한 발이라도 앞 당겨 놓을 욕심에 터미널로 부지런히 향했더니

막차?였는지....조금기다렸다가 10시 5분 버스를 탔다.

 

터미널까지 따라나왔던 친구는 아마도 삐졌나보다. 버스가 떠나기 직전까지 수다를 부렸다.

 

 

버스에 손님도 별로 없었고

나는 배낭을 베고 누워서 휙휙 스쳐가는 하늘을 보았다.

보름인가? 휘영청 보름달이 계속 따라오고 있다.

 

구름속에 가렸다가 빼꼼히 얼굴을 내비쳤다가...

 

                                    박목월님의 나그네 시가 자꾸만  입에서 뱅뱅 감돌아 외워졌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아저씨가 일러주는 지역이름들....조금씩 들어보았던 작은 소읍 소도시들을 지나...밤 11시가 다 되어 해남에 도착했다.

 

해남터미널에 내리고 보니 시골처럼 캄캄하다.

잠자러 혼자서 모텔을 찾아들기도 그렇고... 택시가 줄줄이 대기중이길래 일단 올라탔다.

"아저씨~ 가까운 찜질방 좀 찾아 주세요~"

 

"저긴데..."하며 차를 움직이는 아저씨...로타리를 하나 돌자마자 내려주고는 1,800원이다.

택시가 줄줄이 대기 줄을 섰으니...할 수 없는 노릇이란다.

 

아저씨도 난생처음 가까운데 내려줘 보신다하고.

나도 택시를 가장 최단거리로 타 봤다며 그냥 웃고 내렸다.

 

지금시각 1:07분

 

낯선 고장에 와서 나는 낯 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일이면 해남 볼일을 끝마칠 수 있으려나?

 

보길도나 들어 갈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부활절 주일은 꼭 올라가야 하는데...마음이 그리 넉넉하진 않다.

 

 

자야겠다.

 건조증에 눈이 무척 슴벅거린다.

 

 

4월14일 새벽, 찜질방에서 이요조

사진은 며칠 뒤에, 

 

 

 

 

 

낯 선 거리에서 허둥대다.

 

욕실옆에 붙은 여자 휴게실에 들어가서 잠은 잘 잤다.

고단해서 그런지 1시30분 쯤 잠자리에 들어서 5시까지 푹-잘잤다.

이 후에 잠은 오지 않고

심심한데...때나 밀어 볼가하고..여기 때밀이는 출퇴근이란다.

때타올을 하나 샀다.

 

물에서 한참을 놀다가 제 자리로 오니...샤워 타올이 없다. 어디서 흘렸나보다.

 나오다가 보니...좀 비싼 핀을 라커룸에 두고 나왔다.

 왜 이러지? 허둥대고 있다.

하기사 솔직히 말해서 나홀로 여행은 처음이니....이렇게 가벼운 흥분으로 허둥댄다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2006년...5년 전 봄....무턱대고 떠난 여행,

2011년 다시금 생각해봐도 너무 소중하고 잘 한 일이다.

경비는 총 30여만원 쯤 든 것 같다.

여행을 망서리는 모든 이에게 드리는 말은

 

'여행은 꿈 꾸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신발끈을 조여매는 것이다.'

 

 

보길도여행

http://blog.daum.net/yojo-lady/7708412

 

 

 

 

 

 

일기처럼 쓴 글이라 비공개로 잠겨있고 사진 하나도 없다.

어제 마침 EBS에서 보길도가 나오는지라 방가워서 TV를 찍었다.

우암송시열의 글 씐 바위도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건너갔던 기억이 난다.

다른 공개성 글에 사진은 빼곡히 올려져 있으니....

http://blog.daum.net/yojo-lady/7708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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