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이라지만 비는 흩뿌리고 날씨는 춥고 변덕을 부렸다.

통녕, 세병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세병관은 통영 여황산 자락에 있다는데, 충렬사처럼 번듯한 사거리에 있는 게 아니어서 동네 골목길로 접어 들어야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안에서 대충 촬영을 했다.

 

 

충렬로 사거리에 있는 충렬사도 지나치고...

충렬사는 두세 번 왔었지만...그 땐 딱히 여행글을 쓸 때가 아니어선지 아니면 나이 어려 철이 없었는지.......그저 칼이 차암 크구나~ 무지 무겁겠는 걸?

역시 (이순신) 장군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런 생뚱맞은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골목길로  접어 들어간 곳은 마치 동네 주차장을 방불케했다.

복원도를 클릭!  크게 확대해서 보세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이 통제영의 일부이군요~

복원사업이 어머어마한 규모로군요!  앞으로 복원 완료될 통제영은 통영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 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제영 복원사업, 5일 유적지 발굴조사 성과 보고

 ▲ 발굴 작업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통제영지 발굴현장.

뒤로 보이는 건물이 통제영의 일부인 세병관(국보 305호)

 

 

세병관 오르는 돌계단에서 .....  고맙게도 어느정도 웃비가 그쳤다.

 

입구 돌계단 위로 보이는 근대에 복원한 누각   망일루

 

 

예전에는 바다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높은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통영시내가 복잡해져서

바다가 있으리라는 짐작뿐인 조선소의 호이스트만 보일 뿐...위치는 아늑한 곳에 자리잡았다.

 

 

 

춘백이 길손을 반긴다.

 

 세월의 궤적이 담긴 돌계단

 

망일루 사이로 통영시가  바라다 보인다.

지붕위에 있는 용머리는 잡상이 아니고 용의 얼굴을 한 토우다 잡상은 궁궐이나 기타 임금님과 연관있는 건물에만 오릴 수 있다. 홀수로 올린다. 물론 용머리 토우는 뺀 숫자가 잡상의 수인데,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한다.

 

 

그 곳에는 봄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나포리라 부르는 미항, 통영! 통영시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수항루 (受降樓)

조선 전기에 북쪽 변경에서 자주 노략질하던 야인(여진족)의 항복을 받고서 이것을 징표로 남기기 위하여 누각을 짓고 붙인 이름인데, 함북 종성(鐘城)의 성내에 있는 3층 누각

 

 

 

귀한 금목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정성어린 손길에 무척 단아한 모습이다.

 

남쪽에서만 생육이 되며 만리향이란 다른 이름도 있으며 서향이라고도 불리운다.

노란꽃이 피는 금목서, 흰꽃이 피는 은목서...꽃이 피면 그 향내는 무척이나 대단하다.

격이 있는 선비를 비교하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지과문(止戈門)

'창을 거둔다'는 뜻으로 '세병'과 함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을 담고 있다.


 

  

止와 戈를 합하면 굳셀 무(武)가 된다.
어쩌면 전쟁으로 맞서 싸우는 굳센 의지가 내포되었다는 일설도 있다고 한다.

 

 

 문화재명 : 통영세병관 (統營洗兵館)
 
지정번호 : 국보 305 호 (지정일 : 2002-10-14) 
 
소개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건물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1동)
 
시대구분 : 조선시대 중기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1

 

왜 이름을 세병관(洗兵館)이라 했을까?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 '洗兵馬行'의 마지막 두 구에 그 답이 있다.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서 /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서 / 다시는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할까?'에서 '병기를 깨끗이 씻는다'는 뜻의 한자말인 '세병'을 따다가 이름을 붙여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다.  ------------------- 이봉수<이순신이 싸운 바다>에서

 

 

 

 

우물마루 연등천장을 설치하여 멋을 한층더내었다.

 

 

 

안쪽의 중안3칸은 한단을 올려 전태단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 하였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을 총지휘하던 통제영의 객사(客舍)입니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목조 건물. 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전면 9칸·측면 5칸의 단층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호나 벽체가 없이 통간(通間)이어서 그 규모가 웅장하다. 보물 제293호.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웅장한 풍채만은 크게 뒤질 바 없는 객사이다.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성과 관아를 지었으나 세병관만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보수되었으며 이때 경내도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세병마(洗兵馬)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병마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두보의 대표적인 시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뿐아니라 현판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나 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문들은 다 올려져 있다.* 그림들이 오랜세월 퇴색하여서 흐리다.

  꽤나 방대한 객사이다.

 

 

 

문에도 드나드는 법이 있다한다. 東入西出이란다. 중간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한다.

문설주에 작은 해태가 받치고 있었다. 해태는 물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를 예방해 준다고 믿었다.

 

뭘까? 어디선가 말을 매어두는 것과 비슷한데....이 위에는 계단으로 올라....사람이 머무는 객사 지금으로 치면 영빈관인데....웬 주차장? (뭘까?)

 

 

 

 

비를 머금은 동백꽃~

  

 

 

 

두륭포기사비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 구인후 제19대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의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 이학재, 이승주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가 없어진 듯하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아름다운 수항루 모습!

 

 

 

'통영 세병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했던가? ..... 이순신장군과 직접적인 연관이야 없지만...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통영을 지나치며 안 가볼 수 없는 곳,  세병관이었다.

 

 

이순신의 후일담은 드라마로 불멸의 이순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나, 어디까지나 그 건 소설이요 드라마였다. 선조는 난을 피해 다니며 전전긍긍 왕좌를 유지했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계획의 전란으로  무수한 공을 거뒀으나 선조는 그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한다.

학설에는 선조와 이순신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있다한다.

아무튼 아주 치밀한 전투계략을 도모한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통영를 여러번 왔지만  한산대첩이 있었던 한산도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으로...기약해얄 밖에...

 

 

글:사진/이요조

 

 한산도 한산대첩현장/시 홈페이지에서

 

 

             

 

 

 찾아가시는 길

 

1) 대중교통

통영시외버스터미널앞 시내버스(도남동,봉평동 방면 승차) → 중앙동 백화점앞에

서 하차 → 세병관까지 도보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2) 자가교통

통영시 원문검문소를 지나 시내 간선도로 진입 → 세종병원(직진) → 북신사거리

(2차선에 붙어 시내 방면 진입) → 중앙동 백화점 앞 신호등 우회전 →문화동 샛

길(사거리 우회전) → 세병관까지 200미터 정도 가면 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렸다. 이순신이 향수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그를 예찬하는 현상은 오늘 정치인들에 등을 돌린 민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기침체와 우울한 현실정치에 식상한 국민들은 이순신같은 영웅을 갈망하고 있다.  그는 권력다툼에 빠지지 않았고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노량해전에 온몸을 던졌다. 요즘 ‘이순신 신드롬’은 정치,경제, 문화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다. 이순신에게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그리고, 경제인들은 이순신에게서 CEO 의 자질을 배우자고 한다.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듯이  선조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이순신을 의심하고 제거하려한다.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답답한 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사랑했고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그는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우직스럽게 나라에 충성하는 삶을 살았다.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하기 위해 권세가의 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당시는 대과에 급제해도 권세나 세도의 문중에 드나들지 않거나 끄나풀을 잡지 못하면 벼슬에 오르지 못하던 때였다. 당시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가 되어 공의 사람됨을 알고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으나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애석해 하자 이순신은 “일가간에는 서로 볼 수 있지만, 그 분이 지금 상당한 지위인 이조판서로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무공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지덕을 겸비하였던 문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조에서 그의 재능과 뛰어난 시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바닷가 저무는 가을빛에
   추위에 기러기 높이 날아 진을 쳤도다.
   근심하는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
   새벽달만 활과 칼에 비치는 도다.

  해진 영중에서 나라 걱정을 하느라 가을 풍경 속 저녁놀 비끼는 하늘의 안행에도 전진을 연상하고 잠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새벽에  싸늘한 달빛이 활과 칼날에 비치는 것을 예리한 시적감각으로 표현했다.
  그의 시조에서 애끓는 애국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그가 효자였던 것은 난중일기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인군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죄를 받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했더니 어버이 또한 가셨도다!”

  오늘 이 시대는 이순신 같은 인물을 갈망하고 있다. 모처럼 한국인의 가슴에 피어오른 이순신신드롬이 모든 분야에 확장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들이 많이 배출되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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