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는 잘 모르지만 나는 미수 허목의 팬이다.

미수 허목의 서체를 안동여행에서 하회마을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만나고는

입이 헤~ 벌어지며 기분이 급 좋아졌다.

씩씩하게도 그를 찾아 군사분계선까지 군인을 하나 달고 찾아가지 않았던가?

 

충효당

예안이씨 충효당은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준교이다.
예안이씨 충효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홍인의 충과 이홍인의 8세손
이한오의 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을 띤 유서 깊은 집이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담장 안은 화장실이다.

 

 

담장안을 들어오니 솟을 대문이 또 따로있다.

마주보이는 곳이 충효당 본채이다.

 ▼

 

눈에 띄이는 여러게의 소화기만 봐도

충효당 가치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보물 제553호

 

 

현재 후손이 충효당 왼켠의 또 다른 담너머 안채에 기거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장마철이라도

그렇게 (습기로)누지진 않겠다.

습기를 피해 전체 돌을 쌓아 지은 것이 꽤나 보기에도 좋고

실용성도 있어보인다.

 

 

 

충효당 현판은 정침의 사랑마루에 게첨되어 있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미수의 전서체가 아주 재미있다.

충성충忠은 가운데 받들어 모시는 태양 즉 임금을 뜻하며

효는 孝 노인老을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며

집당堂은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형상의 전서체가 볼수록 그림으로 다가오듯 재미있다.

 

미수를 꼭 만나보러

나는 2009년 2월에 연천군 왕징면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미수의 묘역을 찾았다.

 

미수 허목을 만나보다. 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8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예안이씨 충효당
종목 보물 553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안채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전화번호 054-858-4768

 

 

 

청암정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걸린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허목선생은 호가 미수여서일까?  우연일까?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보물 제592-1호 
 동해비첩(東海碑帖)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고문운부*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

충재박물관에 있는 원본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으로
일월석(日月石)이라는 귀한 흰 돌에 새겼다 한다.

 

6,25동란중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난무하다.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은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이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 곳까지 가져온 돌이라는 설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송시열의 일화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경북 봉화군은 요즘 들어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다. 선덕여왕에 청량사가 나오더니 이번 동이에도  청량산 청량사 설경이

나오는가 했더니 29회 30회엔 영남 제일의 정자 청암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답사하고 포스팅 한 곳이라 얼마나 반가운지.. 그리고 영화 워낭소리도 청량산을 오프닝으로 시작했다 한다.

후토스 촬영지도 그렇고. 봉화와 드라마는 아주 길운을 나타내는 조짐이 되고 봉화군은 그에 힘입어 날로 유명세를 띌 터이다.

 '동이'드라마는 TV를 보면서 캡쳐했고, 청암정은 두 번 답사중에 찍어둔 사진이다.

청암정은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등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 일대는 사적및 명승 제 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동이' 

조선조 제 21대 영조임금의 생모이자 19대 숙종임금의 후궁이었던 천민출신 여인 숙빈최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극화한다.
개국 300년만에 최초로 왕권을 확립한 조선조 최고의 절대군주 숙종!  서인과 남인 세력이 집권과 실권을 반복하며 환국을 거듭하던 숙종시대~
그 시기에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궁중 최하층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 여인, 숙빈 최씨! 그녀의 이야기!

 

 

남편도 함께 다녀온 곳인데.....드라마를 보며 우리가 다녀온 곳, 청암정이라고 하자

드라마에서 본 그대로 궁에서 가까운 임금의 사가라는데...왠 봉화냐는 말에  나머지 가족들 모두 웃었다. 막상 드라마 보는 날은 그냥 넘기고 재방송을 찾아서 캡쳐했다.

드라마에 간혹 나오는 경치가 좋은 곳은  드라마와 일치하는 경관을 물색하러 다니는 직업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방에서 자기 고장을 홍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발빠른 인기드라마 물색 유치하는 정성도 분명 있었을 거다.

 

 

 야외 촬영은 경북봉화 닭실마을 현지에서 ~

    실내촬영은 세트장에서~ 청암정은 정자일 뿐 실제  방은  없다.

촬영조명은 마치 달빛 부서지는 밤을 연출하고...

처음 만나 본 청암정은 대낮에다 성하가 사그라드는 늦여름이라 별 맛이 없었는데....

옛날엔 정말 이런 분위기였을 것 이라 ....상상하며~~

동이를 처단하려 괴한들이 잠입하고~~

교교한 달빛아래 격투가 벌어진다.

 

독서를 좋아하던 권벌장군의 여름지내기는 청암정이요.

책 읽으며 겨울을지내는 곳이다 (뒷배경건물)

드라마 '동이'의 인기가 치솟고..청암정도 그 이름을 떨치고.... 

 

   영남 제일의 정자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청암정' 

청암정은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경북 봉화읍 유곡리에는 오래묵은 정자가 무려 101개나 존재한다.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태백산 백설령하에 금계포란형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100여호의 가옥이 산자락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다.닭실마을은 충재권벌의 입향조인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안동권씨 종가집이 있다.
종택에는 반달형월문과 자연석상에 지어서 둘레에 물을 대어 연못형식으로 만든 청암정이있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이 15년간 은거하면서  도학연구에 몰두하던 곳이다.

청암정의 정자자리는 거북형상의 수석자리였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독서를 좋아하셨던 충재 권벌선생의 서실인 셈이다.

 

청암정을 처음 찾은 날!   이런 설치물이 있어서 무척 궁금했다. ▲

관계자 말에 의하면 전날밤 이 곳에서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한다.

무척 좋았을거라는 상상에 부럽기만 했는데, 언젠 나도 참여를? 했던 스쳐지나간 생각이 뜻이 있으면 길이 있을 줄이야~    

이번 여름 휴가지로 추천하고 싶다.

청량산 등산을 하고 (선덕여왕과 동이)어린이들이 좋아 할 후토스 찰영지 세트장과 워낭소리 찰영지, 그리고 청암정 또 그리고 이도령과 성춘향이 아니라 실존 인물인

성도령의 본가 계서당에서 토요 음악회를 감상한다면 더 이상 온 가족의 만족도를 높이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알찬  드라마 촬영지 경북 봉화로 Go! Go!                   글/이요조

▼ 

여름밤! 청암정을 둘러싸는 아름다운 선율…

 오는 7월 3일 저녁 8시부터 2010세계유교문화축전의 세부행사의 하나인 야간고가공연이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의 청암정에서 있을 예정이다.

“맑은 날 바람처럼 비갠 뒤 달빛처럼…,”이라는 테마로 국악과 한국무용은 물론 색소폰과 통기타 연주까지 다양한 연주와 포퍼먼스를 마련하여 공연을 찾는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공연을 선보일 것이다.

 이번 공연은 봉화군과 세계유교문화축전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봉화문화원이 주관하여 고가공연을 찾는 방문객의 마음속에 청암정의 아름다운 정취 속 맑은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으며 일회성 공연이 아니라 2010. 7. 3 ~ 10. 3일까지 거의 매주 토요일 저녁 청암정(3회), 도암정(3회), 계서당(3회), 봉화향교(2회) 총 11회에 걸쳐 계속되어 봉화를 찾는 관광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주말저녁 평소 접하기 어려운 좋은 공연을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가와 정자에서 감상할 수 있어 고품격 문화예술공연과 전통의 조화를 만날 수 있다.

 청암정을 무대로 한 고가공연을 찾아 고운 선율도 마음에 담아가고 야외공연 속에서 한여름밤 무더위도 식혀보자.

                                                                                                                                 문화체육관광과 지역마케팅 담당 손병규 054-679-6321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31

 

 

 

 

 

 씨 풀리자 근질거려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다.

감기기운이 지끈지끈 오는 것 같아 누웠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산뜻한 바람이나  운동삼아 쐬고오자고 나선 길이다.

사실인즉슨 겨우내 참고 살았던...절절히 만나고싶은 인물이 꼭 있었다. 300여년전에 돌아가신 대학자 '미수허목'과 기생 '홍랑'이다.

영암에 갔을 때 홍랑과 최경창(崔慶昌)이 머물었던 곳도 사진을 찍고 시비도 보고,,,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400여년전 고운 사람이  파주에 누워있단다. 난, 홍랑도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홍랑은 <묏버들 꺽어~~>란 시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정도로만 알았는데 기막힌 러브스토리라니~

또 하나, 경북 봉화 여행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하여 귀동냥으로 처음 만나본 '미수허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만치 캄캄했었다.

우의정까지 오르고 시 서화에 능하며 특히 전서체로는 동양의 제 1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가 계신 곳!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만 외우고는 무작정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상하게 왕징면에만 오면 네비게이션이 기를 못피고 정신줄을 놓는다. 나중에사 알고보니 군사지역이 가까워서 그런 모양인데..

주소만 겨우 적어 온 군남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를 내 무슨 재주로 찾는단 말인가?

겨울 산골에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군남면, 화이트교를 건느려는 찰나, 도로에서 지나치며 이정표를 보고는 반가움에 무조건 우회를 하고는 그 동네 부근에 비슷한 묘역이 있나싶어

낮으막한 동산을 오르내렸다. 헛수고였다. 동네라고는 한결같이 빈집같은 적막감 뿐~어쩌다 마주친 사람도 전혀 모른다는 도리질 뿐~

이대로 돌아 가야하나 싶었을 때,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고...다행히 너무 자세히 가르쳐주긴 했지만...혼자선 갈 수 없는 곳이란다.

뭔말인고 하니 민통선 안에 묘역이 있다는 것이다.

북삼교를 지나 직진하면 초소가 있단다. 이...그랬어~ 이제사 기억이 난다.

전두환씨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브빌리지를 찾아왔을 때, 그 때도 네비게이션이 허브빌리지를 눈 앞에 두고도 빙빙돌려서

골탕을 먹이던..그래서 초소까지 갔다가 물어보고 되돌아나갔던 적이있었다.

징파 나루가 있다는 북삼교, 나루의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민간에서는 미수나루라고도 불린단다.

허목이 나들이를 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나루에 당도하여 술막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공에게 “미수 왔다!”라고 고함을 질러 나룻배가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 징파(澄波)나루.

얼었던 강물이 슬슬 풀려나는 정월대보름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랬는데......어허...낭패로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겨울 철새떼가 하늘을 가득 덮고있었다.

날씨 풀리자 날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움직임 같아 보인다.

 

 

먼-길 떠나기 위한 도약인지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북삼교에서 바라본 허브빌리지 뒷배경

 

 

254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진강 중에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구간은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임진강의 상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한강과 만나는 하류지역도 절반은 모르고 산다.

한강을 만나기 위해 남으로 흐르는 오후 임진강은 햇살을 수직으로 받으며 꽂꽂이 흘렀다.

군데군데 얼음이 눈치를 보듯 슬슬 풀려 녹아났다.

 

난데없이 다리위까지 들려오는 징소리...멀리 좌측 강가에 바짝 세워둔 차가 한 대 보였다.

 

 

부쩍궁금해보여서 줌인으로 당겨보니 굿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음력 정월 대보름!

용왕신에게 기원하는 중인가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다리 아래에 무려 3군데나....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기원을 새기는 걸까?

 

 

줌인으로 당겨보니 돼지머리와,  떡 과일, 쌀푸대등이 보인다. 거창하다.

 

 

바다에서는 만날볼 수 없는 그 무엇...강은 의연하게 침묵한다.  

 

 

얼었던 산골짜기 물들이 흘러흘러 이념따위는 상관없는 철새떼처럼 돌아 흐른다.

 

옛전설에 이 곳  절벽바위에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부엉바위로 부르다가 벙바위로 불려지기도 한다는....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 바위를 보니 고양이 형국이고

강 건너 마을은 쥐형상이더란다. 그래서 그 마을을 찾아가봤더니...쇠미해지고 있는 마을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저 벙바위,,아니지 고양이 바위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주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났더니....마을이 기가돌고 살아나서 한 사람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왕의 신임을 받게되자

안하무인이 되었고 고양이 눈을 가리는 일도 잊어버렸다한다.

끝내는 그 행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마을이 다시 피폐해지더라는 ....

<실제 이야기로 검색글에서 그 시대와 왕과 그 사람의 관직까지 알았는데...재차 검색이 되지 않는 애석함>

이 곳 사람들은 붉은 벙바위에게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한다.

지금은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이  그 곳에다가 허브빌리지란 이름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봄오자 녹아 흐를 것을 물은 얼어서 빛깔마저 달리하고.... 

모질게도 강물을 다 얼구어버린 한겨울의 江, 그 위로 흰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겨울 임진강을 보고싶다.

 

 

징파나루쪽(右) 

 물그림자 도도하고...

 

징파나루란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맑고 잔잔한 여울이 감미로와 보인다.

물이 맑아 징파라 했다지만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임진강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곳이 '군남댐'인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임진강은 홍수로 몸살을 앓고 들판이며 민가까지 질편하게 누워버리는 통에 아예 몸풀 곳을

마련해주느라 댐을 건축중인 모양이다.

 

 

이 곳은 기원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미수허목'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민통선 안에 모셔져 있다는데, 나는 과연 들어 갈 수가 있을까?

임진강 최북단의 다리 북삼교위에서 지금은 흔적뿐인  그가 드나들었다는 다리 북쪽의 나루를 바라본다.

지난해, 경북봉화를 두 번이나 거푸 방문을 했었다.  늦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선제일의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에 올라보고 점점 미수허목의  절필인<청암수석> 을 마지막으로 영면하셨다는 그 분이 궁금해졌다.

아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는 점점 만나고싶은 간절함에 솔직히 안달이 났었다.

나는 강서리 산 48번지를 찾아 삼북교를 건너 민통선 검문소, 징파리 초소를 향해 곧장 직진했다.

(다음글로 계속........./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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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이 글을 써 두신 후 15일만인가 운명하셨 전한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미수허목'을 알게되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다양한 옛 문서가 비치된 충재박물관

 

충재권벌은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큰 수석의 등위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둘레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거북이가 물 가운데 정자를 업고있는 형상으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충재권벌이 독서를 하는 곳으로 겨울에는 청암정 바로 앞의 건물에서는 겨울을 나고 바람을 쐬고(下사진 左) 

여름에는 즐겨 독서를 하거나 시문을 지었다는 정자로  닭실마을 황금들판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청암정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경북 봉화읍 유곡리에는 오래묵은 정자가 무려 101개나 존재한다.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태백산 백설령하에 금계포란형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100여호의 가옥이 산자락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다.
닭실마을은 충재권벌의 입향조인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안동권씨 종가집이 있다.
종택에는 반달형월문과 자연석상에 지어서 둘레에 물을 대어 연못형식으로 만든

청암정이있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이 15년간 은거하면서  도학연구에 몰두하며 장자 권동보와 함께

초가을의 청암정 모습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등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 일대는 사적및 명승 제 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초가을이지만 날씨가 아직은 더운날,

전날 밤에 이곳에서 야외음악회가 열렸다고한다.

가설무대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냇가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500m

이렇게 죽 이어져서 청암정에 물을 대어주고 돌아 흐른다.

 

충재는 독서를 즐겨했다고 한다.

왼쪽 가옥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른쪽 청암정에 올라 머리를 식히고...

겨울엔 충재당에서 여름엔 시원한 청암정에서,  

 

본시 이자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을 깎아 자연석 계단을 만들고 정자를 올렸다는데,

거북이는 물에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고 ....물을 끌여 들였다 한다.

 

 

물속에는 참개구리 한 마리~~ 

 

  

유배된 충재는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
(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
(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순당에서 '문정왕후'와 충재권벌 선생의 독대장면 연출디오라마 

을사사화당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소윤일파)에게 화를 입은 윤임등...에 대한 무고함을 간헌을 올리는 모습이다.

의로움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된 일이라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재권벌은 평안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닭실마을 담장은 흙으로 쌓았다.

사이사이 돌멩이를 지지대로 삼아서...

권씨의 종가

대문이 반달형(월문)으로 특이하다. 

 

종가집 마당 

문화해설가님께 들었는데..잊었다.(짚으로 엮은 것)

이 표시는 아직도 삼년상을 끝내지 않았다는 표식이란다. 

 한여름에 올라서면 드넓은 들판이 탁 트여서 무척 시원하다.

단촐하게 지어진 ' 충재당' 의 서실인 셈이다. 

지붕 양 옆으로 풍판을 대었다. (비바람을 가리는 용도) 

  

 

종가집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청암정이다. 

 청암정의 가을 

 물을 대지 않았다.

물이 없는 청암정의 가을 

 

  

 

 

이 바위의 용도가 무엇인가 궁금했더니 봉화는 지역 특성상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소나무를 베어와서 쐐기를 박아 나무를 키대로 길게 4쪽으로 나누어 놓고는

하나씩 이 곳에 지지대로 삼아 눕혀두고는 불을 밝혔다 한다.

다타면 또 당겨서 이 돌위에 걸쳐놓고 하면서,

 

밤에 야간집회(공부?) 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불붙은 소나무 가지를 걸쳐두었던 돌이라 한다.

소나무는 송진이 많아 바람에 불도 잘 꺼지지않고 오래가고 밝았다고 한다. 

 

 

 

 <닭실마을의 한과> 

닭실마을은 또 제사때 쓰는 한과로도 유명하다.
문중 부녀자들이 500년간 전해내려오는 방식으로 한과를 빗는다.
고추실로 문양을 넣고 쌀 튀밥으로 고명을 얹어 한과에 눈꽃이 핀 듯 빗어낸다.
시중 한과와는 달리 바삭한 느낌과 고소한 뒷 맛이 월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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