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표충사에 당도한 날은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신유년(2011) 여름은 시작서 부터- 모기도 입이 비뚤어지고, 호박줄기 밑둥이 허전해진다는 가을을 알리는 처서가
다 되도록 비가 연일 계속해서 내렸다. 장마라는 우기가 따로 없어졌나 보다.
추적추적내리는 비에 차에서 내리고 보니 표충사를 품고있는 재약산 자락, 골골이 이제 비가 그만 그치려는지,
물안개가 스멀스멀 산봉오리를 향해 오르는 모습이 수묵담채화를 그리는 신선의 붓놀림을 눈 앞에서 보는 듯 하였다.
이렇게 칙칙한 날...절집을 찾아들었으니 한 편으로는 암울해 보일 것만 같은 절간의 분위기를 감내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놀라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폭염에, 습기에 여름이면 꽃이 귀하다 못해 이런 때에 웬 절간에 난데 없는 붉은 꽃천지라니..!!
우선 화사해서 좋다. 갑자기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 했고 아마도 꽃처럼 알듯 말듯 뺨도 붉어왔으리라!
표충사가 그러했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미당의 싯귀가 비오는 여름 날, 여독에 지친 여행자에게
한 줄기 감로수처럼, 가슴과 머리를 ...이토록 명징한 울림을 주는가?
물안개 자욱한 자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속에 붉은 꽃들이 내 가슴 속 밑바닥까지 먹먹하도록 어루만져 준다.
홍진(紅塵)에 긴장된 마음이 스르르 풀려나는 이 편안함...<아! 좋다!!>
큰스님의 큰 말씀 못지 않은 감동을 부드러운 진홍빛 꽃에서도 받을 수 있음이야....
나무 자태가 고운만큼 마치 규방 처녀처럼 절집이 그렇게 아름다와 보일 수가 없다.
온통 절집이 붉은 목백일홍으로 화사해지는 여름날,
표충사로 떠나보라고....늘 떠나고 싶지만 행로를 못잡는 여행객이라면 아무나 잡고 목이 쉬게 이야기하고 또 할 것 같다.
석 달 하고도 열흘을 붉게 피고지고 피고지는 목백일홍 꽃처럼....
아무래도 글 제목은 <절집에 꽃놀이 가다>라고 붙여야 할 것 같다.
목백일홍/배롱나무
어느 이름이 더 예쁘다고는 말 않겠지만...대개의 나무들은 봄에 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무덥고 습한 꽃구경하기 귀한 시절/7월,8월,9월/에 석달열흘이 넘도록 꽃을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진분홀꽃잎을 만발하
고있으니 수관전체가 발갛게 아름답다.
내가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 강릉 여행길에서다.
매끈한 나무등걸에 반했는데...목백일홍은 이렇게 수피가 옷을 벗는다하여 양반가에서는 이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절간에서는 이 나무를 즐겨 심었는데...껍질을 벗는 나무를 보고 해탈한다고 하여 좋은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다.
관념도 이와같이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나름인 모양이다.
배롱나무는 습기를 무척 좋아하여 장마가 끝나 갈 무렵부터 붉은 꽃을 터트리는데...수간사이에 전정을 잘 하여 통풍을
도와주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
일본사람들은 줄기가 너무 매끈하여<원숭이가 미끄러지는 나무>라고하여“사루스베리”부른다. 중국 사람들은 柏痒
樹(백양수)라고 부른다 나무 줄기가 매끈하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줄기를 매만지면 나무가 간지러움을 타서 떤다는 것이
다
이 나무는 얇은 껍질 때문에 추위에 약하고 잎도 다른 나무보다 늦게 피고 또한 햇빛을 좋아하는 양수이며 단독 독립수로
기르는 것이 모아심기 군식보다 보기에 좋다
배롱나무는 줄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고풍스러움과 멋스러움이 더해 가는 특징이 있어 조경수로서의 가치를 더해준다. 잎이
작고 키가 크지않기에 주택이나 공원이나 도심지나 큰나무 작은나무들과 참 잘 어울리는 경관조경수다.
배롱은 줄기 선이 고운 이 땅의 대표적 향토수종이다.
표충사(表忠寺)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에 있는 사찰이다. 654년(태종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
림사(竹林寺)라 하였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39년(조선 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
면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기고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석탑이다. 1995년의 해체 보수 때에 나온 많은 유물은 탑과 표충사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고, 지붕돌의
주름도 1개가 줄어든 4개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여러 장식과 함께, 아직도 찰주가 높이 솟아 잇고, 3층의 지붕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2층의 지붕돌에는 근년의 것이긴 하지만, 풍탁이 달려 있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균형 있는 전체적 비례와 우아한
모습은 같은 시기의 석탑 중에서도 뛰어나다.
표충사에는 국보,보물,중요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청동함은향완(국보 제75호),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표충사 석등(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서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을 비롯한 대광전,만일루,팔상전,명부전 등 법당건물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표충서원
표충사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
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불가식으로 제를 지내고 나면 유생들은 유교식으로 제를 다시 올리는 곳이라고 한다,
진화대비 절집 전용소방차
비가 오는데도 표충사 부근의 캠핑장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기있다.
주변추천음식점
표충사 주차장 입구에는 식당이 즐비하다.
약산가든의 더덕구이와 특히 흑염소불고기가 맛있었고 더덕막걸리가 일품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 상가 내 ☏ 055-352-7786
주변관광명소/ 얼음골, 호박소, 재약산, 사자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