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하회마을을 부용대에서 바라보다*

 

 

낙동강이 큰 S자 모양으로 마을 주변을 휘돌아 간다. 그래서 하회(河回)라 했다.
오른편 안동시에서 흘러나와 왼 편으로 흘러간다.

하회마을을 찍은 항공사진/사진 안동 하회마을 홈페이지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나흘간 한국을 방문하였다.
방한 일정은 영국 왕실의 계획에 맞춰 의전 행사를 최대한 배제하고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여정으로
이어졌는데, 이 가운데 안동 하회마을이 선정되면서 이루어졌다.

이후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이라는 브랜드를 얻어 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상업화의 일면에 전통마을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훼손이라는 부정적 측면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과 가치 제고를 위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같은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 용인 한국민속촌과 다른 점!

한국민속촌은 관광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시설이지만, 
안동 하회마을은 ‘마을’이란 말 그대로 현재 200명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이자 행정구역입니다.
사적인 생활 공간과 관광을 위하여 개방된 공간이 한 마을 내에 함께 있습니다. 
국가에서 1984년 하회마을에 대한 ‘민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민속자료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하회마을의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2010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했습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 바깥 풍경

 

세월 따라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담과 그 길을 따라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다.

 

 

골목안에는 담장을 헐고 이런 광광상품 가게가 특이하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보물 제553호 예안이씨 충효당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담장이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안 풍경

 

 

좀 죄송하지만 닫겨진 대문안의 담장은 팔을 하늘로 뻗어 는에는 보이지 않지만

되는대로 셔터를 눌렀다. ㅎ 담장인 풍경이 더욱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이 열린 집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선지 사진은 수평이 맞지않지만 수평을 맞추려면 아까운 종횡의 이미지가

사라질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올려봅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솟을대문과 대문

 

                                           솟을대문의 정의/  양쪽으로 문간채를 두고 기와집의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이 대문은 풍산류씨 연예인 <류시원>의 본가이다. (좌측,아랫문패)
엘리자베스영국여왕이 안동을 방문하였을적에 생신상을 차려낸 장소이기도 하다.

 

안동 하회마을 나무가 있는 풍경들

 

안동 하회마을 삼신당 느티나무 

 

소원을 들어주는 기원나무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하회마을 중앙에 위치)

 

 

관광객의 기원이 나무에 주렁주렁

 

 

정성스레 마음을 담아 소원지를 달고....

그 소원 이루어지이다!

 

나도 이참에 손자를....

 

감만큼 주렁주렁~~

높다랗게 매달린 감!

관광객보라고 따지않고 그냥 둔 감들이 겨울 하늘을 수놓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

 

 

 이번에 찍은 사진과 여러해 전에 찍었던 사진

강건너 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막는 비보림으로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하여 만송정숲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100여 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숲(安東 河回마을 萬松亭 숲)은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다.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1]                                          위키백과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동족부락으로, 국보를 비롯해 보물·중요민속자료·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길지(吉地)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유씨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이는 일찍이 허씨(許氏)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안씨(安氏)들이, 그 다음에는 풍산유씨(豊山柳氏)들이 동족부락을 이룬 곳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 이미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유씨 동족촌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대유학자인 유운룡·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되었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戶)의 유서깊은 대·소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중 유운룡의 종택인 안동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종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을 비롯해 하회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하회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영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하회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하회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하회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하회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이며, 대부분이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다.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양진당·충효당·남촌택의 네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가옥들은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했다.

충효당 후원에 있는 영모각(永慕閣)은 유성룡의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각종 유물과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들 가옥 변두리에는 하인이나 노비·타성씨(他姓氏)가 거주하던 집들이 있는데, 이들은 3~4칸 규모의 토담집이다.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와 강상유화(江上流花) 놀이인 줄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색인 : 하회탈 및 병산탈).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이곳 강은 대략 최대 폭 300m, 최대수심 5m에 이르며 하회도선장의 나룻배를 이용해 주변지역과의 왕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상주와 풍산읍을 잇는 지방도와 연결된 길이 하회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1990년 현재 남촌·북촌의 총가구수는 102가구이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 빈 집의 증가와 가옥의 유지·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가옥들이 퇴락해가는 문제점을 안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안동마을 가운데 있는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

 

 

 

 

오픈된지 한 달 남짓~ 된 리첼호텔에 들렀다.

완공된지 얼마 안되어 깨끗해서 좋았다. 안동문화관광단지내에 있는 리첼호텔

 

이층 창문쪽이  대형레스토랑

레스토랑에서 찍은 리첼 입구사진

 

 

안동호가 내려다 보이는 경북 안동시 성곡동 안동댐 일대 안동문화관광단지내에 문을 열었다. 
객실 90여 개를 갖춘 리첼호텔(사진)이 11월 3일 리첼 호텔 그랜드 오프닝 행사를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8층, 90실 규모의 리첼호텔은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안동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수려한 것이 장점인 친환경적인 호텔이다.
가족 관광객을 위해 모든 객실에 조리기구를 갖춰 직접 음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66만 m²(약 50만3000평) 규모인 안동문화관광단지는 내년 2, 3월 유교문화체험센터와 골프장 개장을 시작으로
한옥서당 10채와 조선시대 나루터도 복원한다.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이 있어 안동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다.

리첼 호텔은 '행복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호텔, 가족의 안락함'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안동댐 일대가 종합휴양공간으로 모습으로 관광객이 머무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것 같다.

 

안동문화관광단지 온뜨레피움 야외 식물원에서

바라 본 리첼호텔

모던한 로비 라운지

 

객실내부

트윈베드 침실

빌트인된 주방

 

다음날 아침

7:30분 뒷동산 너머 일출모습

날씨만 춥지않다면 아침 산책길로도 좋겠다.

 

신축건물답게 깨끗한 욕실

 

레스토랑& 바

호텔 2층인 레스토랑바로 들어가는 문

 

여기는 와인바

이상은 와인바 로즈마리

 

레스토랑에서 아침

다들 처음엔 떠름한 듯 하더니 ,,,맛있게 먹었다.

아침은 간단해도 되는데 뭔가 많이 차려졌다.

 

메뉴를 대충찍었는지라....

개인적으로는 한식! 큰뚝배기에 담긴 시래기 된장국이 얼마나 시원한지

술도 안먹은 속이 해장? 될 지경이었다.

토속적인 된장 그대로 끓여 낸 할머니 된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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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에서 찍은 우리 부부의 배낭

 

와인바에서

 

 

리첼호텔
054-850-9700
경북 안동시 성곡동 1546

 

 

리첼호텔은 안동문화관광단지 내 온뜨레피움 준공이후 두 번째로 개장한 시설물로 민자시설로서는 처음으로
금년말 준공되는 18홀 규모의 골프장과 유교랜드(유교문화체험센터)와 함께 안동지역을 찾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볼거리 제공과 숙박거점지 역할을 겸비한 체류형 복합휴양단지로 거듭나고 고용창출로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6월은 호국영령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이 있고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아픈 상흔의 6,25 전쟁이 있었던 달이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62주년이 되었다.

전쟁을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아이들은 6,25에 대한 참상을 알지 못한다.

 

용산구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더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관람객들로 붐볐고 또한 볼만하게 잘 전시된 곳이라 여겨졌다.

관람료는 무료이고 10인 이상이면 해설사의 도움을 청하면 좋고 아니면 해설사가 있는 단체관람에 슬쩍 묻혀 해설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왜 전쟁 박물관이 아니고 기념관이라고 할까?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이유는?

첫째, 전쟁이 북침이 아닌 남침인데 왜 기념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에 대한 답변입니다. “기념”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뜻 깊은 일을 잊지 아니하고 생각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기념하는 대상의 긍정․부정적 의미를 떠나

기억하고 의미를 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업회에서 ‘전쟁’과 ‘기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전쟁을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로서 전쟁을 잊

지 않고 기억하게 하고 그 교훈을 인식시킴으로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념관 회랑에 새겨진 17만 명의 전사자 명단도 이들 호국영령들의 위업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다른 많은 이름 중에서 전쟁기념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전쟁기념관 명칭제정은 기념관 설립준비 당시부터 전쟁기념관, 호국기념관, 군사박물관 등의 명칭을 놓고 각 계층별 설문조사와 공청회 등 다양한 여

론 수렴 과정을 거친 결과 전쟁기념관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에 상정되어 결정되었습니다. 제정이후에도 명칭변경관련 언론보도와 민원이 여러 차례 있어 설문조사 등을 통해 적절성을 검토한 결과 현재의 명칭이 기념관 건립목적과 사업성격

에 가장 부합된 것으로 판단하여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예를 보면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독일, 미국, 스페인, 호주 등 선진 각국에서는 대부분 WAR MEMORIAL 또는 WAR MUSEUM이라는 명칭을 사용 하는데 우리말로는 전쟁기념관 또는 전쟁박물관이라는 뜻으로 전쟁기념관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 알고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전쟁기념관은 우리 반만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호국의 전당이다.

이곳에 와서 전쟁의 스토리를 눈으로 보고  우리 국민의 하나 됨을 익히고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 온 선조들의 애국심이 후손들에게 가슴으로 느껴져 길이 전해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6월 시작되는 무더위와 장마 속에 전쟁기념관으로  역사적 체험을 가족 나들이로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추운겨울 살을에이는 삭풍속의 1,4 후퇴 피난민의 모습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을 괴롭히는 인민군들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 숨어지내는 남자들

광안에 그 바닥에도 피신처를 만들고 숨어지내던 사람들

피난처에서는 비록 천막이지만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야외수업과 천막교실

부상자속출

어린이들은 거지꼴이나 진배없었고

끼니조차 때우기 어려웠다.

피난민들의 비참한 생활상

화장실도 당연 모자라 줄을 서고

어린이들도 비위생적으로 길러졌다.

집이라고는 노숙자나 별반 다름없었으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짐꾼(지겠꾼) 노릇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전사통보를 받고 애통해 하는 가족들

꿀꿀이죽으로 연명하고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도 부지기수!

남편을 잃은 부인들은 아이들을 위해 길거리에서 풀빵장수등....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군부대에서 나오는 짠밥으로 다시 끓여 가난한 자들은 주린배를 채우기도 하고...

전쟁시절 피난민들의 생활은 고달픔이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유엔군 전사자 추모비

 

 

 

 

시대별 구분

그밖에도 시대별로 잘 구분되어있었다.

고려시대 고구려시대, 그 시대에는 어떤 전쟁이 있었으며 무기는 어땠을까? 궁금증을 풀어준다.

 

 

 

 

 

 

 

 

 


▼실외에도 비행기 장갑차등이 전시돼있어 볼거리가 많다. 

▲ 옥외전시장

전쟁기념관에는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호국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으로 최고의 기념관  그 곳을 찾아보는 호국의 달로 맞이해 보자

 

 

기념관에는 볼거리도 많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이끌어오고 있는 화랑정신, 백의민족정신, 그리고 우리 국토와 태극기, 금수강산, 우주의 신비 등을 상징적으로 담아 호국의지를 표현하였다. 1993년 작가 서승원의 작품이다. 호국의지를 구성하는 이들 요소들은 애국충정과 민족적 결속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의 공간안에서 서로 조화(Harmoney)를 이룬다. 실제의 그림을 컴퓨터를 이용, 확대하여 천장 원통형 면에 설치하였다.

 

* 개인의 느낌으로는 호국영령의 혼들이 눈동자처럼 우리 민족을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모습으로 생각되는

 느낌이 들어 아주 좋았습니다.

 



 


보다 아늑하고 쾌적하게 리모델링한 의무실수유실이 실내전시실 입구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찾아오시는길

기차

- 서울역에서 지하철 4호선타고 삼각지역(1번 출구) 하차, 도보 5분 거리

 

지하철

- 4호선 삼각지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6호선 삼각지역 11,12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 거리


- 1호선 남영역에서 내려 도보로 10분 거리

 

시내버스

- 전쟁기념관 정문/후문앞, 국방부 앞에서 내림
- 정문 110B, 740, 421 - 파랑간선
- 삼각지역 149, 150, 151, 152, 500, 501, 502, 504, 506, 507, 605, 750A, 750B, 751, 752 - 파랑간선
 6001 - 공항버스, 용산03 - 마을버스

 

승용차

- 이태원, 반포방면에서는 동문으로 진입
- 노량진, 신촌, 서울역 방면에서는 북문으로 진입

 

전쟁기념관은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유모차와 휠체어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안내데스크에 신분증을 맡기시면 무료로 대여해 드립니다.

다만

유모차는 안전사고 방지와 다른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24개월 미만 유아에게만 대여해 드리고 있으며,

유모차와 휠체어 모두 실내 전시장에서만 사용 하실 수 있습니다.

 

주말처럼 이용객이 많을 때에는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차량을 이용하여 오시는 관람객께서는 가지고 오실 것을 권합니다.

관람 시간 

09:00~18:00 (17:00까지 입장 가능)

 

관람요금/무료

 

주차요금

구분  요금


소형차
(15인승이하)  - 관람 및 일반차량 : 2시간까지 2,000원
- 웨딩홀 하객차량 : 2시간까지 2,000원
- 초과 30분당: 1,000원


중/대형차
(16인승이상)  - 관람 및 일반차량 : 2시간까지 10,000원
- 초과 30분당: 3,000원


기념관 주소 : 140-021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용산동1가)
문의전화/FAX : (02)709-3139, 3114 / (02)709-3100
단체관람예약 : (02)709-3139
단체식사예약 : 뮤지엄카페(한식,분식,양식) (02)709-3221~2

 

 

 

 

전쟁기념관 캐릭터 '무돌이'

 

 

 

 

 

 

 

경상남도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진주시와 사천시, 서쪽은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 군,

남쪽은 남해군, 북쪽은 산청군과 함양군,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다.

전체면적은 675.55㎢이며 총인구가 52,589명(2007년 6월 30일 기준)에 이른다.

1읍 12면 108 동리가 있으며 군청의 소재지는 하동읍 읍내리다.

섬진강을 옆으로 끼고 죽- 달렸다.

우리는 기차여행과 연계된 버스로 이동중이었다.

해설사님은 남의 땅 광양으로 살짝 접어드는가 하더니 <산마루 그리워>란 찻집으로 이동시켰다.

그 이유를 알만하다.

하동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기차가 지나기는 경치를 찍었으면 좋으련만.....찻집에 있는 손님이 방금 지나갔단다. 애석해라~~

 

맨위엣 사진은 파노라마로 찍을 수 있는 기능이 내 카메라엔 없어 두 장을 연결해 붙여보았다.

솜씨가 영판 없어서....ㅎㅎㅎㅎ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하동을 보고나니 웬지 하동이 더 친근스럽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마치 늘 편지만 주고받던 연인의 얼굴을 마주 대한 것처럼 그렇게 더 정이 가고 익숙해지는 느낌!!!

 

이제 최참판댁으로 가면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것 같다.

 

6월,

물에 첨벙 몸을 던지기 딱 좋은 날씨다.

일행중 누군가가 붉게 익은 앵두가지를 하나 꺾어왔다.

앵두가 붉게 익은 계절!! 유월이다.

 

섬진강 강가엔 물놀이인지.....재첩을 잡는 사람들인지 강가엔 사람들이 에븝 보인다.

섬진강과 하동...재첩국, 최참판댁....쌍계사 십리 벚꽃길,

그 하동에 와서 나는 차를 한 잔 마시며 하동을 지긋이 눈아래 풍경으로 두고 감상에 젖었나니......

 

 

 

 

 

 

 

 

 

먼저 하동의 전경을 눈에 익힌 후

박경리님의 대하소설, 최참판댁과 쌍계사로 Go Go!!

최참판댁글은 다음......

 

 


 

 

 



061)772-7071

전남 광양시 다압면 '산마루 그리워' 찻집에서

 

 

 

 

한국의 산토리니 'ES 리조트' (통영)

 

*에머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언덕위에 리조트*

통영, 거제도, 고성은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매년 찾아가는 곳이다.

낚시를 가거나 또는 해산물을 실컷 먹고 싶을 때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남편 친구가 있어서 더 부추기는 여행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특히 통영 산양읍 미륵도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남편이 낚시를 할 때 무료해지면 나 홀로 여기 저기

기웃대던 곳이기도 하다.

 

경관도 멋들어진 통영 수산과학관!

http://blog.daum.net/yojo-lady/10443059 

 

글이 포스팅 된 걸 보면 만 5년 전 일이기도 한데...그 때(2007년)는

'ES 리조트' 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 때는 너무나 한적하기만 했던 과학관이었다.

 

2010년 배를 타고 욕지도, 한산도를 다녀오는 배에서 찍은 사진에는 이제야 찾아보니 미륵도 수산과학관 뒤로

'ES 리조트' 가 보이는 걸 발견했다.

‘ES리조트’는 회원제로 예약 가능하며  비수기 때만 비회원제도 예약이 가능하기도 하다고 한다.

 

아! 이야기가 거꾸로 설명되었다.

코레일 남도여행팀으로 KTX를 타고 서울서 출발 창원역에 도착하여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장사도’를 탐방하고 저녁을 먹고는 어둑해져서야 'ES 리조트'에 도착했다.

미륵도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어두운 밤이라 정작에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새소리에 일어나니 어느 쪽이든 바다로 둘러싸인 'ES 리조트' 가히 아름다웠다.

아침 일찍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아침을 먹고 주차장까지 내려가자니 이상한 건물지붕이 보인다.

내려와 보니 세상에나!! 바로 수산과학관이다.

아! 이 곳에 서서 남해바다를 향해 얼마나 사진을 많이 찍어댔던가!!

 

바다로 떠난 여행(도다리낚시)http://blog.daum.net/yojo-lady/10580929

 

저 물가 방파제에선 봄 도다리를 잡았던 곳이다. 

수산과학관 바로 아래 방파제에서도 낚시를 했고 조금 더 들어간 척포 방파제도 낚시 포인트다.

온 가족이 여행을 가서 아빠는 낚시를 아이들과 엄마는 과학관과 방파제 부근의 갯 모래밭에서 놀 거리가

아주 무궁무진 한 곳이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이렇게 품격높은 리조트가 숨어 있었다니....

자, 이제 한국의 산토리니 같은 'ES 리조트'의 아름다운 경관을 솜씨는 없지만 사진으로 올려보자면....ㅎ`


 

큰 욕실이 두 개나 있었는데...셀프카메라가 되버렸다.

맨 아래 만 5년 전 사진이 있고.....<비교된다>

엔틱풍의 가구로 꾸며진 실내

분위기는 지중해식...리조트 경관은 산토리니 ......<좋은 건 다 둘러다 대본다 ㅎ`>

 

'ES 리조트' 전망대

▲바다로 가고픈 목마?

▼ 전망대의 풀장

바다와 연결된듯한...풀장의 모습

▼ 풀장의 물이 바다의 풍광과 맞닿아 있고...

 

 

▼올망졸망한 다도해의 풍경

 

 

 

 

▼ 방사한 토끼들의 낙원.....사람 무서운 줄을 모른다.

 

 

 

 

 

 

 

'ES카페' 와 한식당'달아', 세미나실, 수퍼, 노래방

 

▲ 이 건물이 카페

◀내부의 모습이다.

녹색으로 감아 올라가는 담장이가 아름답고 바다로 향한 창은 넓어 조망하기 좋은 카페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 한 이 곳!!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는 이 곳!!

  

다른 곳에 나다닐 필요도 없이 그저 리조트 안에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이곳은 그냥 며칠 푹 쉬었다 가도 참으로 좋을 곳이다.

 

 

 

 

 

아침을 먹었던 식당

 

 

 

 

선너머에 또 섬....그 너머에 또 섬이다.

 

 

수산과학관 입구(2007년)

수산과학관

수산과학관에서 내려다 본 2007년 봄

2010년  뱃길에서 찍었던 사진

수산과학관 위로 'ES 리조트'가 보였다. (이제사 다시보니~)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남리 산 120번지
이에스 오리엔탈
055-644-0069

 

 

 

 

 

 

 

 

 

 

 

 

케블카를 타고 통영 미륵산을 오르며...

코레일 남도여행 알리기 프로젝트다.

KTX로 창원역에 내려서 거가대교(가덕도에서 거제도구간연결 다리)를 지나  거제도에서 장사도를 갔다가  1박 후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중이다.

 

한려수도 앞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으니 조망권이야 더 할 데 없다.

눈앞이 한산도 앞바다 바로 한산대첩이 치러졌던 곳이다.

해상전으로는 세계사에도 길이 남는 해전이었다.

 

 

멀리 바다를 보다가 아래로 내려다보니...기가 막힌 숲길이 펼쳐진다. 

케블카는 2분 후,,,,숲이 시작되는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4분 후는  맨 위의 숲으로 난 황톳길을 보여줬다.

전망대 못미처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미래사, 그 곳으로 이어진 길일까?

부쩍 궁금하다.

미래사로 산길을 올라서 케블카 전망대까지 올라보고 싶다.

내려올 때는 힘들면 타고 내려와도 좋겠고...

 

오전 9시에 탑승한 케블카는 10분간을 올라가는데 그 경치가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속이 탁 트인다고 할까?

요즘은 지방마다 길을 만들어 걷기를 권장 하고있다.

세계가 다  걷기 유행의 돌풍이다.  요즘은 산으로 수직으로 힘들게 오르기보다 수평으로 산 둘레나 산자락을 걷는다.

그렇게 자주하는 것도 아니면서 길을 보고 왜 탐을 내는지...

 

통영시가가 환히 내려다 보이고 바다 전면에는 한산도 추봉도가 보이고....섬, 섬들이 이어진다.

 

2010년 미륵산을 바라보며 물길을 갔던 사진도 올려보고

언제였던가?  저기 아래 바닷가 산모롱이를 돌아가던 (미륵도) 바닷길도 궁금해서 내려가 보고는  길로는 만족을 못해 아예

물가까지 내려가 보았던 기억의 사진들을 모아 올려보며....

 

코레일 남도여행길 이야기는 죽- 이어져 계속~~~


 



 

 

 

 

 

 

 

 

 

 미륵도(산양일주로)길


바다를 끼고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길.....미륵도는 이런 길이 많습니다. 걸어보고 싶은 길~

언젠가 역시 미륵도 수산과학관 부근에서 그 길을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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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내려다 보며 사진을 찍다보니...이런 멋진 길이 보이는군요.
바로 미륵도(산양도)일주도로 였지요.
위에서 보니 더 멋진 길이 당신을 유혹하진 않나요?
저 길을 내려가서 직접 걸어보고 싶지 않으세요?
전 그만 내려가봅니다.  길이 저렇게 죽-  이어지는군요.
좀 더 가까이~ 더...가까이~~
아래로 내려오니....이 길이군요.
길섶에 핀...야생화, 살갈퀴가 바다를 향해 자라고 민들레 홀씨는 날아 갈 준비를 끝내고 있군요.
숫제 길 아래로 저 길 아래로 내려가볼까요?
바닷물가까이로  아! 바닷물이 깨끗해서 안이 다 들여다 보이네요.
한여름이라면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고도 싶고....



 

 


 

통영앞바다와 케블카가 보이는 미륵산  물 길 (이요조 2010.10.11글)

http://blog.daum.net/yojo-lady/13745809

 

바다에서 바라 본 미륵산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가야산 해인사에 들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그저 사진만 올립니다. 오늘이 석가탄신일 경하드리는 마음으로 이 장을 꾸밉니다. _()_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쓴인 나무는 산벚나무 등으로 ,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이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해인사의 승려들이 머무는 요사채인가보다.

좌측 사진에는 우산도 나란히 나란히....우측 댓돌에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해인사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숲을 느끼다.


 

해인사 생태숲길

 

강산이 네 번 이상 변하고도 남을 오랜 세월 뒤에 찾아온 해인사!!

해인사 들어가는 숲길에는 온갖 나무와 풀들 새소리, 물소리에 귀가 먹먹한 해인사 숲길은 그저 길이 아니라 자연 생태길로 변해 있었다.

합천의 소리길의 부분이기도 한 해인사 길은 자연 숲속을 걷는 트레킹 코스로는 이만한 데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고맙게도 하나하나 알아보기 싶게 자상하게 붙여진 식물들 이름표!

가야산 숲길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묵묵히 또 다시 자라고 죽고 태어나 자라 영원의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200여년이 넘은 나이로 살다 1945년에 고사목이 된 느티나무....

사람들은 자기보다 오래 살다간  고사목 느티나무에 작은 돌들을 얹어 기원하고 있었다.

무슨 소망을 바라는 것일까?

 

두 그루의 고사목이 있는 부근엔 이름 모를 키가 아주 큰 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자라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줄기의 곁가지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 바오밥나무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두 그루의 나무는 얼마나 키가 큰지 하늘로 향한 꼭대기에서 이마를 대고 소곤거리고 있지만  정작에 우리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나누는 걸까?  선문답을 주고받는 걸까?

 

 

사진으로 다시 보기만 해도 내 한 몸이 푸른 녹색으로 물 들것 같은 5월의 신록속으로 ....

그 곳으로 나 빈 손으로 그저 들어가노니 ...감사히 초록을 여소서!! 

 

 

                                                                                                                                                                                                글/이 요조

 

 

 

 

 

 

 

 

 


 



 



 일주문 전 <영지>


<영지>의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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