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정자

양산8경 임경대에서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정자 <임경대>를 찾아서~

 

고운 최치원1이 즐겨 놀았다는 곳!

양산팔경중 하나 임경대2를 찾아가는 길이다.

 

바위에 씌인 시는 다 닳아서 형체를 알리 없지만....

낙동강마저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기막히게 좋다는 그래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다는 곳!!

 

오봉산을 오르는중이었다.

산봉우리 겹쳐진 사이로 빨간 홍시감이 그만 꼴까닥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먹었지? 아까 그 홍시감? 누구 본 사람? >

우리가 임경대에 도착했을 때는 그만 노을은 지고 피빛 잔명만 붉으스레 남아있었다.

<아~ 10분만 일찍 왔더면......우리도....나도 시가 나왔을텐데~~>

 

실은 아쉽게도 사진은 노을 져버리자 그저 그렇게 밋밋했다.

카메라 Av 설정을 -로 놓았더니 노을이 잔명이 그런대로 짙어진다.

 


강 건너가 김해란다.


줌인했더니....경겨운 마을의 저녁풍경이 다가온다.

 

 

........................

 

년전에 합천해인사의 소리길을 걷다가 농산정을 만났다.

역시 최치원선생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은둔하며 지내던 한 곳!
<농산정>이 생각났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던 선생은

분명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을거며...그리고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았나

나름 생각해본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요.

신라로 돌아오니  6두품이란 굴레의 관직에서

그다지 기개를 다 펴지 못한 것 같다.

지리산자락 즉 농산정에서 신발만 두고 사라져....신선이 되었다는 설이있다.

아무튼

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임을....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사유의 시간 외에는 아무런 말이 필요없는 곳!

홍진으로 가득한 이 세상 이야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산조차 물소리에 먹먹한 !

그래서 지금은 문화재로 등록 되어진 농(聾/귀머거리농)자를 붙인 “농산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서 있고

최치원의 詩가 어우러진 곳!!

이 곳!

임경대 역시 그러하니...

 

그가 생각나서...

농산정도 임경대도...초야에 묻혀 은둔한 심경도...

 

 

양산 8경 유적지 임경대 초입길에는

임경대를 찾아 최치원선생을 기리며, 또는 임경대의 비경을 시로 노래한

숱한 묵객들의 한시를 비를 만들어 조경을 해두었다.

낙동강을 바라보는 벼랑의 숲이 좋고.....

일몰은 시간을 맞춰 가면 아주 좋은 강물에 비치는 반영의 노을을 즐기시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될 것 같은 경관이다. 

 

 

 


 

  1.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이해가 깊었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이다. 진성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 7년 만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876년 강남도 선주의 표수현위로 임명되었다. 880년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 임명되었다.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골품제의 한계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천령·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한 뒤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 관직에서 물러났다.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하며 지냈고, 말년에 해인사에 들어가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본문으로]
  2. 일명 고운대, 최공대(崔公臺)라고 하는데, 황산강(현 낙동강의 옛 이름) 서쪽 절벽 위에 있다. 벽에는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조감하기 어렵고, 시만 전할 뿐이다. 임경대는 오봉산 제1봉의 7부 능선에 있는 바위 봉우리로 낙동강과 건너편의 산, 들과 어울려 수려한 산천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명소 중의 하나다.물금에서 국도 1022호선을 따라 원동면 화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왼편에 육각의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정자는 양산시에서 관광객들의 쉼터로 만든 것이다. 임경대는 이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운 최치원이 즐겨 놀던 곳으로, 낙동강 동쪽 절벽 위에 있었다.하다.임경대는 낙동강과 인접한 오봉산에 위치하며, 근처에 등산 코스 및 행글라이더 활강장이 있어, 산악인들과 행글라이더 동호인들의 발길이 증가하고 있다. [본문으로]

 

부산하면 한자어로 가마부(釜) 뫼산(山)!!

산들이 마치 가마솥을 걸도록 빙 둘러쌓여 있대서 釜山이다.

내가 태어나던 1950년에 6,25남북전쟁이 터지고 피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부산까지 내려왔다.

최남단 부산까지 마구 물밀듯이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은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 판자촌을 형성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 되고 넷이 여덟이 되고 그렇게 판자촌은 불어나서 산동네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높은 줄 모르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갔다.

 

2013년 3월 부산역 맞은편 옛 남선창고 터에서 산복도로 까꼬막(산비탈의 경상도 사투리)까지 1.5㎞ 구간을 초량 산복도로 ‘이바구길’로 조성했다고 한다.

영도다리...자갈치...국제시장....모두 잊지못할 전쟁의 상흔을 품고있는 이름들이다.

특히 부산역 맞은편의 초량과 그 아래 영주동은 산동네다.

아니 아니 부산의 산동네는 어디가나 다 있다. 감천문화마을도 그렇고...내가 다닌 남부민초등학교도 산복도로 위에 있다.

초량과 영주동 산동네는 옛부터 말이 있다.

외항선박이 밤에 부두에 들어와서 고층빌딩의 야경에 놀라고....

아침에 바라 본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의 풍경에 또 한 번 놀라고~~

TV에서 얼핏 얼핏 보았지만 초량 산동네가 이렇게 <이바구길>이란 새 이름표를 달고 문화의 거리로 거듭 태어난 모습을 처음 가봤다.

 

내 어릴 적 초딩 때, 3째이모의 집이 초량 산동네였다.

방학 때 이종사촌들과 어울리려 어쩌다 가면 다닥다닥 붙은 동네....그리고 창문으로 들리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목소리~~

 

그러다가 내가 고딩때 쯤은 그 집을 헐고 이층집을 짓고 일대가 서서히 변모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8째 이모의 신혼집도 초량으로 시작한 추억들~ 

 

물이 넉넉치 않아 물부족으로 물지게가 등장했고~~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던~~ 아련한 추억들....

오늘은 그 곳 초량의 이바구길 여행을 도울 게스트하우스 '이바구충전소'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그 곳 노인정에서 운영한다는 게스트하우스충전소는 꽤 정감있었습니다.

붉은 파벽돌로 쌓은 현관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게스트하우스가 복작일 때도 있지만 넉넉하게 공간을 쓸 때도 있다십니다.

작은 창밖을 보면 부산 항만의 바다가 보이고 부산대교도 보이고 부산역도 바라보이고...이국적인 모습을 충분히 감상하며 즐기실 수가 있습니다.



▲요금표 1인이 15,000원이고 방을 빌려 쓸 수도 있다

 

잡다한 사설이 무에 필요할까요? 직접 오셔서 부산여행을 하며 눈으로 보고 느끼고 담아가시면 될 것을....

요즘 뜨는 <부산 어디까지 가봤니?> 프로로도 자세한 소개가 .....

부산역 전경

부산역 앞쪽은 차이나타운이 있다. 아직도 정리가 덜 된 듯한 부산역 앞 메인도로 뒷 편의 모습!!

초량 산동네 피난촌 형성

물지게행렬 부산사람들은 물지게를 몰랐는데....

피난민들이 물지게를 사용하자 너도 나도 따라서 물지게 유행 선풍!

 

 

 


게스트하우스 '이바구충전소' 의 전망도 좋고....내부도 아기자기 정겹고~  특히 외관이 옛 전쟁시 추억을 떠 올려줘서 더 구수하고~


 

초량의 유명한 계단...몇 계단이라던가?  아 글치 168계단?

 

ㅋㅋㅋ 뉴욕의 다운타운거리 빌딩들도 이렇게 삼갈래던디....ㅎㅎ

 

 

 

▲  한참을 돌고 돌아도 못다본 이 곳!

옛 남선창고(명태고방)터의 흔적(돌담)

ㅎ 하도 페인트 칼라가 알로꿍 달로꿍 하 예뻐서~~~

이바구길.....세부적으로 들어가 이바구 다 지낄라믄

이야기 10꼭지도 더 되겠다.

담에 또 시간나면 순차적으로~~

 

 

 

 

 

드라마 <드림> 촬영지, 부산 기장 바닷가에 세워진 '죽성성당'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바다~ 실컷 보니 좋다!

 

서울에서 출발 감포에서 점심을 먹고 죽성성당(실제 미사는 드리지않는 세트장)을 둘러보고 부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버스기사분이 아마도 네비를 목적지를 부산으로 하신 듯~

청도를 찍고 경주로 다시 올라왔다.

경주 보문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토함산으로 접어들었다.

 

토함산 수목이 울울창창이다. 토함산구경 걸판지게 해부렀다.

대신 부산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한 시간 가까이 우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배가 고파왔다.

실제는 먼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후경이라 죽성성당으로 향했는데...성당 소개에 앞서 먹거리이야기가 도리에 어긋난다 싶다.

이미지 차례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게 순서에 맞다.

 

드라마 <드림>은 보질 못했다.

그래서 기장에 이런 성당이 있는줄도 까마득히 몰랐다.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파도가 일면 장난이 아닐텐데....

 

이번 여름은 큐슈지방 아소산을 둘러보았지....바다는 오랜만이다.

아! 바다다!!

물 만난 고기처럼 퍼득거리며 뛰어다녔다.

역시 바다를 보고 자란 부산가스나 맞다.

 

성당은 그런대로 80%쯤은 제대로 지어진 듯 보였다.

붉은 등대를 등 뒤로 엎고 있어서 좀 안전해 보이는 포즈지만 성당입구 출입문 유리현관은 굳게 잠겨있었다.

<잘 활용할 수는 없을까? 기장군을 위해~~>

 

 

 

주차장에 내려서 바닷가로 나가는 동네의 벽화다.

일일이 다 찍기엔 요즘 너무 벽화가 많고....

이 그림은 넘 귀여워서 찰칵!!


 

 

 

 


 

 

 

 


 

 

 

 

 

 

 

 

 

지독하게 무더웠다.

짜증이 서리서리 올라왔다.

 

누가 마을 이름앞에 관용적인 미사여구를 마음대로 갖다붙이는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마을 이라는데....

 

경남 고성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담마을이 있다.

블로그엔 단지 이 마을만 올라와 있질 않다.

멀리는 탁-트인 바다가 보이고 ..꽤나 단아한 마을로 기억된다.

 

남사예담촌처럼  무서운 덤프트럭이 질주하는 길가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경북군위 대율리 한밤마을과 의성 산운마을만해도 그렇다.

무척 아름다운 마을이다.

 

남사예담촌의 들여다 본 마을안 집들은 마당이 그렇게 정성들여 가꾸어져 있지도 않았다.

아직 공사중인 집들이 부지기수~

관에서 대출받아 공사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지만

임시 분바르고 담장한다고 그런다고 아름다운 마을이 급조해지지도 않을터~

내면의 아름다움이 우러나와 관광객들이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이끼낀 진정한 역사의 아름다움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20일전에 벳부 키츠키 성하마을을 다녀왔다.

 에도(江戶) 시대 (1603~1868) 때 무사마을이다.

나는 앵글을 그들의 정원에다 맞춰보았다(글 쓸 예정)

 

정원이야 3~400년을 그대로 이어질리 만무하겠지만 적어도 그들만의 전통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더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마을은 여기 사진 찍은 두어곳 뿐....

집안 뜰로 가도 잡초만 무성해있고 특별히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은 볼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그래도 썩 괜찮은 길,

 최씨고가 입구에서

산청 남사리 최씨 고가가

그런대로 위용을 갖추고 있어서 담아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한국식 정원은 간결했으나

막상 들어가서 둘러 본 결과 구석구석 풀무더기

카메라를 정면 말고는 들이 댈 곳이 없다.

 

 

 

 

대문을 밀고 나오다가 재미있는 문고리(잠금장치)를 발견

자동 개폐기가 좀 그림을 망치지만....

 

빗장을 넣어 거북이 목을 올렸다 누르면 잠기게 되는 재미있는

잠금장치다.

사람의 손때가 묻어 반질거린다.

나도 거북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쓰다듬어도 보고....ㅎ

 

그리고 부부회화나무

이렇게 마주 바라보다가 교차되어 서로 기대어 섰다.

마치 부부처럼~

이 아래를 지나면 금슬이 좋아져 백년해로한단다.

회화나무는 본시 선비나무인데....

남사예담촌이라 가능했을지도.....

매미껍질 킬러인 내 눈을 못 벗어난

우화하고 벗겨진 허물~~

 

날씨 선선하고 나무들이 추색을 띌 때

이 마을을 다시 찾는다면 시각이 좀 달라질까?

아무리 그래도 큰 차들이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인도곁을

휙휙 스치듯 지나치는데....

옷깃이 펄럭인다.

삼북중에도 소름이 오싹 돋는다.

 

 

 

 

 

 

 

 

 

 

 

 

 

 

 

부산이 고향인 내겐 어릴적부터 자주 들어왔던 말...

<함양산청>이라는 ..사자성어같은 이 말은 오지중에 오지 심심산골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랬는데, 산청은 지금 옛말을  내던지듯 벗어버리고  도약을 했고 그 도약을 시금석으로 삼아 비상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릴적(초딩즈음) 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ㅋ 꿈이라고 쓰고보니 원대한 그런 꿈이 아니라 쓰잘때기없는 개꿈 같은 걸 자주 꿨다.

 

기억에 남는 거는 어디든 훨훨 날아다니는 꿈과 또 하나 차를 놓치는 꿈이었다.

차를 놓쳐서 아쉬운 게 아니라....늘 함께 갈 사람이 그 차를 타고 떠나버린...

어떤 서운함보다는 억울함 분함 원망 심술...뭐 그런 느낌이었다.

 

깨어서도 서운한김에 엄마나 아빠에게 칭얼대면 잘됐다. 그런 건 ...타고 떠나면 좋지않는 길이라 위로해주셨다.

오히려 못 탄 게 다행이라는 말씀에 늘 위안을 받곤 했는데.....

 

지금에사 검색을 해보니 <차를 놓치는꿈 - 시험이나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는.....

내 위로 언니가 하나~

언니는 늘 또래들과 잘 어울려 놀러나가고 난 언니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해

어린 나이에 늘 안달이었고 불만이 많았던 유년기였다.

 

 

.........................산청팸투어

 

 

 

7월 말 (28~29일)산청팸투어를 갔다.

1박을 하고 그 이튿날 아침 정취암을 가는데....큰 관광버스라 버스주차장에 내려서 가팔진 비탈길을 걸어내려간다.

산청 폭염주의보가 내렸단다.

어제는 대원사를 찾았다. 그나마 계곡이라 그런대로 참아줄만했다.  발목이 자꾸만 시큰거렸다.

시큰거리는 발목이 정취암을 찾아내려가긴 괜찮지만 다시 올라오려면 .....아서라~

내 발목을 주인인 내가 조금 아껴주기로 했다.

가던길을 되돌아올라왔다. 그늘도 하나 없는 버스주차장 열기는 대단했다.

 

나 말고도 (우리팀이 아닌 낯 선)낙오병 둘은 쬐그만 나무그늘을 빌어 구차하게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계속 산으로만 향해 위로만 올라왔던 기억에 기사분에게  천천히 오던길로 되돌아 걸어 가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정취암에서 버스승차시간까지 알아두고는 카메라와 물 우산만 챙겨든 채 천천히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길이 새로 닦인 듯 했다.

도로주변에 식물들이 공사로 거의 사라지고 다시금 생겨나고 있는 중이었다.

오리나무잎이 새 순을 뿅뿅 터트리고 있었고 자리공....싸리꽃 지칭개 달맞이 고마리 설악초 망개(갑자기 본래 이름이 생각나질 않네) 까치수영같이 생긴 노란꽃은 이름이 뭘까?

 

정취암 오르는 산길도로 축재등은 튼튼하게 잘 쌓여져있었다.

빗물이 쏟아지는 언덕에도 씨멘트로 잘 단장되었다. 마치 공사를 감리하러 나온 이처럼 여기저기 둘러보며 산길을 내려온다.

왕꼬들배기도 따서 맛을 보다가 너무 쓴 맛에 치를 부르르 떨고

망개잎을 따서 맛을 보니 떫고 시고 쓰고 새콤하고...달고 - 오미자 맛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사부작사부작 걸어내려왔더니 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째야쓰까? 길이 세갈래다. 삼거리가 나올줄이야~~

 

삼거리에 있지니 땡볕이고.....그 삼거리를 횡단하며 자주 오가는 흙을 실어나르는 덤프트럭이 무섭게 들락인다.(맨 위엣 사진)

삼거리 길을 사이에 두고 흙을 퍼서 길을 건너 흙을 붓고 하는 작업이  5분에 한 번씩 오가는 것 같다.

그 먼지하며~~ 그래서 조금 떨어진 시원한 터널(동물이동로?) 그늘을 발견하고 파라솔대신 나를 자외선으로부터 지켜준 우산도 놔두고...선글라스도 벗고 물통도 두고 잠깐 앉아서 쉬다가 고개를 돌려 본 순간 .....

 

헉!!!!!!

아! 내가 타야할 버스 머리가 보인다.

멈추어진 걸로 봐서 나를 기다린 듯하다.

얼른 널부러진 짐을 챙겨서 뛰는데...발목이 더 아프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버스.....나를 봤나보다 했더니 그냥 방향을 반대로 돌려 슬슬 가기 시작한다.

......

 

달리는 버스를 쫓아 달렸다.

난 움직이는 차가 얼마나 빠른지 그제서야 알았다.

순식간에 육중한 버스가 비행기처럼 날아 산모롱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털석 주저 앉고 싶었다.

 

 

.......난감하네..............증말 난감했다. 

 

내 나쁜 습관은 전화기를 늘 무시하는 습관이다.

여행시에도 늘 버스에 둔 짐속에 팽겨쳐두거나 가지고 다니질 않는다.

 

인적도 없는 산중에서 연락할 길이 막막하다.

그렇다고 이 무더위에 덤프트럭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께 전화를 빌려달라 할 수도 없는일이 아닌가?

 

그런데 산고개 아래 저 멀리 찝차가 한 대 보인다.

그리로 무조건  내달렸다. 시큰거리는 발목으로.... 절둑이며~

그 차도 또 사라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공사현장에 왔는지 여기저기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분께 전화를 빌렸다.

 

 

급한대로 전화기는 받아들었으나 막상 외우는 번호가 하나도 없다.

캄캄하다.

아~~ 맞어 내 번호로 눌렀다. 분명히 일행들은 내게 전화를 했을 것이고,

그 수신음은 버스에 두고온 내 가방속에서 울렸을테니~~

<아! 바로 받는다. 이제 살았다!>

전화를 빌린분께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머리를 얼마나 조아렸는지 모르겠다.

 

 

버스는 꽤 내려갔나보다.

좀 기다렸더니 되돌아왔다.

안그래도 기사분은 다른 길로 갔나보다고 돌아 올 참이었단다.

 

 

버스에 오르며 너무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우예 이런 창피한일이~~

내 자리에 앉자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치가 떨리도록 싫었던 꿈!!

그 때는 우리 엄마가 날 위로해주셨는데....<그 버스 안타길 오히려 천만다행이다~>이라면서,

그런데...나이들어 이게 뭔 일이람~

이 무안함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누가 날 위로해주지?>

 

 

 

그 길은 어디든 다 통하나보다.

내려갔던 길로 다시 돌리려나 했더니 그대로 간다.(어디로 가든 산청읍내로 갈 수 있나보다)

버스에서 내려 정취암 사진을 찍었다. (망원렌즈 카메라를 가져왔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기암절벽에 매달린 천년암자, 정취암을 그렇게 멀리 길 가에 서서 조망했다. 멀리서 봐도 아름답다.

그냥 무리하더라도 갔으면 좋았을텐데....달리느라 발목을 더 혹사했으니~~

 

 

예쁜 산청읍내 벽화거리를 산책하고

점심을 먹은 후,

 "동의보감촌'에 들러 돌에서 기를 받는 이색체험을 하고.....

보이지 않는 힘, 한방 氣 체험!!을 느꼈다.

 

 

팸투어 1박2일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 다음 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야하나? 그냥 동네 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을까 했는데,

무더위에 너무 지쳤는지...누워서 뒹굴뒹굴....그랬는데 그 다음 날 발목 통증이 말끔히 거짓말처럼 개운해졌다.

석경과 귀감석에서 정말 기를 받은 것일까?

그 이야기는 다음 글로....(계속)

 

 

 

 

정취암 가는 길목에...벼랑의 정취가 다르다.

그래서 정취암인가?

 

노란꽃은 짚신나물이라네요. 오른쪽은 고마리 비슷하지만 아닌걸로 (물 있는 곳이 아니라서?)

대성산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좋았다.

큰 비에 흙사태가 나지 않게끔 잘 되어있다.

청미래넝쿨(망개) 맛이 오묘했다.

쓰고 떫고 달고 시고....방부제 역활이 되므로

망개잎으로 떡을 싸두면 쉬변질되지 않는다.

 

 

 

높은 대성산골골이 수로도 잘 설치되었고~

요기서 쉬다가 그만 ....흑

서울로 올라갈 우리 일행들

 KTX좌석 번호도 내가 갖고 있는데....ㅠ

이런 장난(사진찍기)하며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정취암

전국에서 제일 맛나다는 웅석딸기 영농조합

산청읍내 벽화거리에서 한 컷~

 

 

여행일정표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여행일정이나 동선이 너무 알차고 좋아

누구에게나 참고가 되어도 좋을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영양 선바위

 

 

영양 산촌생활박물관

 

  영양 관광도중에 산촌생활박물관을 잠깐 둘렀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이 지역(경북영양)산골생활관이라

투방집, 통나무집 또는 귀틀집으로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짧은 시간에

만든 집으로 지붕은 억새나 굴피 등을 덮어 만든 집을 볼 수 있었으며

제일 궁금했던 옹기의 다양한 종류 그 이름들을 알 수 있어 좋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이름을 하나하나 배우며 아! 그랬구나...알아가는 감동으로

다이돌핀이 쑹쑹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나 역시나 옹기를 좋아하는터라  20여개의 옹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냥 옛 용도는 모른 채 나름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가

부끄럽게도 요강을 항아리 제일 위에 올려놓았던 우를 범했다가

이 곳을 다녀와서는 바닥에 얼른 내려놓았다. 

 

 옹기 이름 제대로 알기 

 

모양이 심플해서 좋은 길쭉한 원통 흙화분이 좋아

트리안을 심어 기르는 황토 화분이 바로 여기 굴뚝에서 아이템을 얻어왔구나!

똥장군을 나무로 된 것만 알고 있는데...옹기장군도 있었구나!

귀여븐 옹기 화로도 있었네.

 

술항아리가 따로 있었고...장항아리도 모양이 다르고,

배가 부르게 생긴 물 단지도 물두멍이라 불렀네~

 

소주고리도 있고, 소주다락도 있고....소주고리는 알겠는데 소주 다락은 또 뭔데?

두루미?

 

술병은 내게도 있으니 잘 알겠고....떡시루야 뭐~

입구가 널찍한 너래기는 또 뭐꼬?

 

시간이 빠듯해서 사진만 찍어왔는데...이름까지는 보여도 해설은 판독이 불가하다.

 

어머! 고추장 단지도 따로 있었네~

 

물지게 동우도 있네...양쪽으로 줄을 넣어 매도록 귀가 두 개나 있다.

그 옆에 깃동우, 동우란 말이 맞는 걸까? 동이가 맞는 말이 아닐까?

작은 여자아이들이 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올 만한 크기다.

 

옹가지는 뭐며 감자버지기는 또 무슨 말이공?

풀돌은 알겠는데...분마기같은~

새우젓독도 수집해둬서 물화분으로 쓰고 있어서 잘 알긴 하지만...

밥솥, 약탕기는 잘 알겠는데...

옹기 밥통은 또 뭐람? 우리 집에 있는 납작한 근래 옹기가 이 밥통을 닮아있다.

 

허거걱~ 이 게 뭐람? 사기요강이 아니라 옹기요강이?

시골 시가에서 이상하게 생긴 옹기라 차에 싣고 와서 아끼며 사랑하는 옹기가 요강이라니~

난 그것도 모르고 장독대 항아리 위에 엎어 두었는데...요강이라니~~

뭘 알아야 ...그 사용처를 제대로 사용하지~

 

그 외...산촌생활박물관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많았지만 난 오늘 옹기만 공부해도 벅차다.

이미지를 click하시면옹기 이름을 볼 수가~

옹기 이름만 궁금하면

내 블로그로 달려와 열어봐야겠구마...

 

이외에도 다양한 산촌생활용품들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옹기전만.....

 

 

 

 

 

 

 

 

 

 

 

 

 

 

 

이외에도 다양한 산촌 생활용품들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옹기전만.....ㅎ

 

 

산촌생활박물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영양로 963
(지번)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20
전화 054-680-5362
홈페이지 museum.yyg.go.kr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비비추가 담겨진 이 옹기는 그럼 너래기!

너래기치고는 너무 넓고 크다 물두멍?

 

장독대 항아리 맨위에 엎어 올려진 옹기 요강!

그 용도를 알고는

깜짝 놀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오른쪽 구석재기)

 

ㅋㅋ 다양한 요강 활용법


새우젓독


밥통이란 옹기를 닮은 근래 옹기

 

옹기의 소박한 손가락 그림이 참 좋다

 

 

 

황토굴뚝을 닮은 것 같은 화분

술병

 

참 그리고 보니 울산 세계 옹기축제도 갔다와서

찍은 사진을 보고 흐믓해하며

포스팅 한 것 같은데

이리 이름을 알려고 애쓰진 않은 것 같다..

.

.

.

이런 가긴했는데...미국가기 바빠서 아까운 포스팅을

날려 보냈나 보다.

코닝뮤지엄은 무려 7꼭지의 글을...헉!~

 

 

 

 

코닝 유리박물관(Corning Museum of Glass)#1 체험편 | 해외 2011.02.06 07:55

유리박물관(Corning Museum of Glass)은 뉴욕 주의 핑거레이크스 지역에 있으며 뉴욕 주의 코닝(city)인근에 있다. 코닝뮤지엄에 들린 방문소감은 남달랐다. 두 달 전 우리나라 울산의 세계 옹기축제를 보고 옹기 전시관을 보고 막...

 

 

 

 

 

 

주일재와 사우단에 가려진 서하원

주일재는 사우단이 있는 곳의 서재이고

서하원은 서쪽 노을이 깃드는 마루를 이름이다.

네 벗을 이르는 매란국죽의 그림자가 서하원의 서녘 햇살을 가려준다.

 

사우단

네 벗을 위해 쌓은 단 위에

매란국죽을 심어 둔 곳으로

사우단이라 불렀다.

 


 

2009년에 도 왔었으니 실로 8년만이다.
서석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석지가 어떻게 생겼지? (서석지가 들었으면 서운할테다.)

글도 올렸었다.  그런데도 뇌리에서는 잊혀진 연못이 되었으니...그래도 새삼 다시 공부하는 느낌으로 임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자연의 풍광을 거스르지 않고 한데 어우러지는 예천의 초간정같은 정자는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어

문화재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객실에 온가족을 불러 모아 밤새 물소리 들으며 1박도 했거늘~~

 

敬亭은 정원 서석지로 더 알려졌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그 대단한 개인의 정자는 담장으로 둘러쳐져서 아무나 드려다 볼 수 없게끔 폐쇄된 공간인 셈이다.

영남좌도에서 이퇴계의 덕행을 우러러 그의 학문사상을 따르려는 유파가 생겨나며 이 학파를 퇴계학파라고 한다.
퇴계학파의 유파를 계승하고 배우는 학풍을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혼자 생각을 해본다.

 

 

정자의 이름은  공경할 敬에 정자 '亭'' 경정'이었고 목적은 수신(修身)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는 즉 공부하는 곳이었다.
이황의 가르침대로 유교사상의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든 조선시대  민가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정자는 두 가지 형태의 것이 있는데...하나는 풍류를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수신을 위한 것으로 나뉜다는 것으로 배웠다.

 

敬亭의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서석지'는 우리나라 조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전남 완도에 있는 '부용원'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 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3대 정원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 서석지(英陽 瑞石池) 


서석지는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선생은 1577(선조10年)에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선생이 우산(愚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수업하여 경학(經學)의 지결(旨訣)을
배웠다. 선생은 성리학과 시(詩)에 능하였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1627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1636년(仁祖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 1동)에서 살았다 한다.

 

선생은 서쪽의 구릉 하에 흰 돌이 서있는 곳에 못을 파고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우로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을 두고 경정(敬亭)이라 일컫었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건물이 방박하고 사방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좌편에 서실 두 칸을 별도로 개축 하였으니 주일제라 말한다.
못 가운데는 부용화(연화)가 있어 여름에는 정자위로 향기를 풍기며 꽃을 구경할 만하다.

 

 

 

 

 

 

 

정영방은 어떤분일까?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조선 중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 호는 석문(石門). 할아버지는 정원충(鄭元忠),
친아버지는 정식(鄭湜)

정영방은 경상도 용궁현(지금의 예천)포내리(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아버지의 사촌형제였던 정조(왕이 아님)의 양자가 되어 송천으로 이사하였다.
상주의 우복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정경세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확하였다. 1605년(선조38)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료로 진출할 생각을 거두고 산림처사로 살았다.

1636년 예천 용궁의 가산을 맏아들 정혼에게 맡기고 영양의 입암으로 이주하여 서석지, 경정, 주일재, 운서헌, 유종정 등을 짓고
영양 인근에 사는 이시명, 조전, 조임과 교류하였다. 1650년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읍취정을 지었다.

문집으로 4권 3책의 <석문집(石門集)>이 있다.

예천 마산리사(馬山理社)에 제향되었다.

 

 

 

 

 

누마루 난간에서

그 틈새로 바라보다.

 

 

 

 

 

 

 

보호수/ 400년된 은행나무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경관을 더욱 좋게 하며 경정의 역사(현재 수령이 400살이 넘었다)를 말하여 준다.
은행나무 등걸에 핀 곰팡이와 연이은 기와담장의 푸른 이끼와 곰팡이가. 말없이 세월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보였다.

 

 

四友壇(사우단)이라 이름 지음은?

그럼? 인근 영양에 살며 교류했던  이시명, 조전, 조임과 본인 정영방을 이름인가?

아마도 그럴꺼란 혼자만의 생각을...

(서석지를 관찰하느라 해설사님 이야기를 놓치고 뒷북치는...)

 

 

또한 이 서석지는 1982년 2월 20일 서울 산림청 임업시험장 강당에서『한국정원문화연구회』주체로 열린
『서석지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문화재 전문위원 민경현(閔庚玹)씨가 이 정원(庭苑)이 갖는 독특한 양식과
조경술(造景術)등을 분석 평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하였다.

 

 

 

주일재

사우단에 접한 서재 

 

 

서하헌:석양이 비친다는 마루~

사우단에 함께 심어진 소나무가 자라나 오후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다.사우단을

살펴본 결과....대나무와 매화나무 그리고 국화가 자라나고있었다.

난은 어디갔는고?

 

2009년도 연꽃이 지고 있을 무렵

 

이 탑은 모전석탑 중에서 전체적인 균형미와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춘 우수한 탑으로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국보 제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模塼塔]

 

또는 봉감리에 있다고 해서 봉감5층모전석탑이라고도 불린다.

 


모전탑 [模塼塔] 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아올린 탑을 이름이다.
경주의 분황사(芬皇寺) 석탑이 모전탑의 대표적이다.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을 전탑 (塼塔)
모(模)자는 형부인 나무(木)와 성부인 '가릴 모(莫)'로 된 형성자이다.
이에 模는 법(모) 모습(모)....

 

 

모전탑을 찾아가는 날은 폭염주의보가 내린 오후였다.

탑들은 그 소재가 절에 있거나 들에있는 게 많은데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은

들판에 서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바로 떠서 볼수 없을 정도로뜨거운 한 낮이었다.

 

땡볕을 가르며 간 곳은 이렇게 마주 바라보이는 산도 탑처럼 보이는 곳이다.

산 아래 절벽을 끼고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강물이 흐르고 그 들판 한가운데

땡볕 가운데 우뚝 서서

탑은 장중한 아름다움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봉삼마을에 있다는 이유로 <봉감탑>이라고도 불린다.

 

 

탑신 하반부에는 화강암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문주와 미석이 있는 불산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국보 제187호

모전탑 [模塼塔]
통일신라시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높이가 약 11m이며 봉삼마을에 있다는 이유로 <봉감탑>이라고도 불린다.
평평한 자연석 기단 위에 2단의 탑신받침을 쌓고 탑신은 수성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탑신 하반부에는 화강암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문주와 미석이 있는 불산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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