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야외마당 및 오솔길
'Art Safari' 관람은 무료입니다.
주야 시간 제한 없습니다.
2007,4,28~ 5,27일까지

 

 

시립미술관 아트 사파리


해마다 5월이면 기다려지는 [시립미술관봄나들이]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 정원 여기저기 작품들이 오래전 부터 늘 그자리에 있어왔던 것처럼 들어 앉았다.
금속조형물, 플라스틱? 아크릴? 조형물?
어떤 작품은 숲 속에 어떤 작품은 솟대처럼 공중에 높이 매달렸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나들이 많이도 왔다.

 

실내 전시 미술품들은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지만...야외 조형물은 아이들이 만져보고 사진도 찍고 ...

즐거워하는 모습들~~

덕수궁 돌담길을 봄나들이 산책삼아 걸으며 찾아온 서울시립미술관의 야외 공짜 미술관 관람은 자유롭고 여유가 있어 좋았다. 봄바람도 솔-솔-불고 햇살도 반짝이고....

 뭐, 5월 5일만 어린이 날인가?  5월은 성년의 날도 있고...성년 축하식 데이트로 이 곳이 어떨까?

밤이면 데이트 장소로도 아주 좋겠다. 작품마다 별도 조명이 있어 야간이 더 환상적일지 모르겠다.

가끔씩은 다른나라, 별세계에 와있는 듯한....느낌의 푸른 정원,

올 봄에는 문화와 더욱 가까워지는...그래서 오월 신록처럼 우리, 날마다 짙푸러지자!!

 

 

 

글:사진/이요조

 

 

 

 

 

 

'전신덕'님의 <나른한 오후> 연작 중 1

 

 

 

 

 

미술관 건물도 엄연한 하나의 작품인 것을..

 

▲  '류신정'님의 작품 ...Close Vitality?  제 보기엔 Open Vitality 같아 보이네요,,,ㅎㅎㅎ

 

 

 

▲ '최혜광'님 작품

  

 

'금중기'님 작품 <무거운 집> ....현대인들을 비꼬는 풍자 카툰 한 장면이 엉금엉금 바깥으로 봄나들이 나온 것 같지 않으세요?

 

'강용면'님의 작품으로 <온고지신 2007-말>

 

웬걸 아빠가 더 신이 났다.

 

보다못한 엄마가 아이들을 불러 챙기고...ㅎㅎㅎ

 

 밤이면 불이 들어와 무척 환상적이겠다. 내 눈에는 하늘을 마구 날아다닐 유니콘 같아 보인다.

 

어때....친구! 이만하면 아름다운 세상을 껴안고 살아볼만하지 않은가?  

 

 

어! 공룡알인가?

 

 

 

▼ '박발륜'님의 작품으로

 

블루 바탕에 빨강 dot 무늬 강아지는 달마시안 강아지처럼 친근스럽기조차 하다.

 

 

 

 

 

  

 

 헉! 눈부셔....눈 부시다니까~~

 

  

신선이 따로 있을소냐? 난....높은 곳에서 유유자적...즐기기나 하련다.

 

 

미술관은 당분간 침묵이다.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나오며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나오는 길....연둣빛 신록에 눈이 아리다.

 

            Art Safari, Art in Bloom 2007 exhibition in outdoor road and garden of Seoul Museum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야외마당 및 오솔길에서 2007.4.28~ 5.27 까지 열리는
    2007 미술관 봄나들이전은 무료입니다.
※ 단, 본관 내부에서 열리는 《한국화 1953-2007》전,《신소장작품 2006》전,
    《천경자의 혼》상설전은 별도 관람권을 구입하셔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실내 미술전시 관람시 사진촬영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촬영을 금지하는 이유는

1. 작품의 저작권자가 작가에게 있기 때문에 작가의 허락없이 작품을 촬영할 수 없으며,
2. 카메라 라이트를 사용시 작품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고
3. 촬영을 하면서 다른 관람자에게 방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와 이용안내 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안내

http://seoulmoa.seoul.go.kr/html/kor/aboutsema/map.jsp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소문구 대법원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시는 길은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 또는 2호선 시청역 12번 출구로
나오셔서 시청 별관과 덕수궁 돌담길 사이로 오시면 미술관 진입로가 보이며
이길을 따라 올라오시면 됩니다.

버스로 오실 경우에는 시청 정류장이나 서대문 정류장에서 하차 하시면 됩니다.

미술관내 주차 시설은 협소한 관계로 미술품 운반 및 업무용 차량 이외의 일반
차량은 주차가 어려우니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주차요금은 월요일 부터 토요일까지는 10분당 800원을, 공휴일은 10분당 600원
으로 유료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약도는 관람안내 > 이용안내 > 오시는길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포옹'  저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던 '은행나무 침대' 에서 오랜 시일이 흐른 후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미단 공주와 종문은 황혼의 들녘에서 은은한 햇살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환생한다.

 

그 어떤것도 우릴 갈라놓지 못해요. 그대 곁엔 언제나 내가 있어요...영원히~


어제 5천 년 전 포옹한 채 눈 감은 연인 유골 발견된 보도 사진을 뉴스로 접하고는 나는 뭔가  풀지못한 문제를 풀은 듯 ....기분이 싸-아 했다. 

...........

 

지금처럼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없고 개인 홈페이지가 성황인 10여 년 전,

나도 홈페이지를 개설했었다. 비록 선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 때  '백신스키'를 처음 알았고

그의 그림을 맞닥뜨렸을 때의 섬뜩함에 기가 질려 버렸다.

처음엔 얼핏 헤비메틀음악에나 어울림직한 그림이라고 폄하해 버렸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때  전율에 가까울 정도의 암울한  그의 그림을 접하고는 눈을 쉬 뗄 수 없었던 나는 이 후로 백신스키의 그림이라면  무조건하고 웹상에 떠도는 그림을 죄다 긁어모았지 싶다. 무려 4~50여개의....


물론 그의 이력에 대한 긴-글을 수집 정리 스크랩했다.

지금와서 활자화 시키려니 기억에 한계가 있어서 포털싸이트를 뒤져  검색을 해봐도 이전의 내가 수집하여 잃었던 자료(홈페이지 해킹)의  1/1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요즘에는 저작권법이란 게 있어서 함부로 가져올 수도 없지만...

아예 서점에서 그의 화보집을 산다면 또 모를까~


벡신스키 (Zdzislaw Beksinski)
1929년-폴란드 카르파티아산맥 근처의 도시 "샤녹(sanok)"에서 출생 유년시절을 2차대전의 영향으로 암울함속에서 보냄.
Cracow에서 건축학을 전공, 졸업 후 건축 감독으로 몇 년을 보내던 중 건축설계에 대한 압박감과 지겨움으로 건축일을 그만두고, 예술작업에 뛰어듦
1958년-비평가들로부터 그의 사진작업들이 호평을 받기 시작함.
그후, 그는 드로잉(drawing)작업에 심취함. 그의 극사실적인 묘사와 난해한 작업이 시작됨.
폴란드 현대예술의 대표주자가 됨 1977년 - 가족과 함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Warsaw)로 이주. 폴란드를 비롯, 유럽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함. 1990-새로운 매체인 컴퓨터그래픽 작업 시작.


이외에도 기억을 되돌려 부언하자면 그는 절대적 반전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철사를 뒤엉키게 만들어 석고를 부치고, 마치 기괴한 주검을 나타내어 얼마나 전쟁이 죽음이 참혹하고 무서운지를 나타내려했다고 전한다.

그의 그림들을 모으면서 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의 화산석, 유물로만 알고 있던 '포옹'을 만나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그 확인이 있기 전, 화산재에 파묻힌 실제의 유물로 알고는 참으로 그 사랑에 감동했었다.

그런데...그 화가를 알고 나서 가공된 이야기에 시들하기는커녕, 그럴 수도 있을거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뉴스를 접하고 가히'백신스키'의 '포옹' 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두 팔로 서로를 감싸고 서로를 응시하는 듯한 이 유골은 5천 년에서 6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남녀의 유골이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돼 화제다.

6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부근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유골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치아 상태가 잘 보존 된 것으로 볼 때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는 이어 "이 유골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더군다나 포옹하고 있는 형태의 유골이 발견하고는 모두 굉장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지난 25년간 폼페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유명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을 해왔지만 이렇게 감동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발굴을 이끈 엘레나 멘토니의 설명.

 

 

폼페이 최후의 날 엿보기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무더기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한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 프레스코화는 그 시대 남자들의 생활을 잘말해준다 .

자신의 성기와 금은보화를 저울에 달고 있다.

 

폼페이를 신의 재앙이라고 부른다면 아마 이런 퇴폐한 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현대인들은 추정한다. 

정죄(定罪)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예시의 역사가 아닌가 싶다.

 

 

2007,2,8. 이요조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

 

 

피카소를 만나보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2006, 7월 14일)날씨는 매우 후텁지근했지만

미술관가는 길은 아직은 연초록빛 은행나무 그늘아래로 걷기엔 기분은 상큼했다.

오히려 에어컨 설치 잘 되어있는 미술관 관람은 한여름도 좋지 않을까 권유하며~~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향하는 덕수궁 돌담길~

함께 가 보실까요?

전시장 내부 사진은 당연 찍을 수 없지만...

 

샤갈전에 가서 사람들에게 한 번 치인적이 있는지라 주말은 피하고 부러 주중을 선택해서 갔다.

태풍이 지나갔지만 폭우가 쏟아지던 화욜날(11일) 가면 무지 널널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바짓가랑이는 다 젖을 것만 같았고....을씨년스러워 참았던 게 금요일이 되었다.

 

 

 

가만....샤갈도....붉은 색이었나?

초록빛 거리에 붉은 걸이게 현수막,  피카소가 그 답게 꽤나 열정적으로 다가온다. 

 

 

미술관 입구

 

해 묵은 향나무의 인고의 몸짓도 예술?

 

내 느낌에는 너무 화려하지도 결코 넘치지도 않은 모던한 느낌의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서 부터 무척이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미술관 자체를 감상  둘러 보는 것도 ....좋지않을까...하는

 

 

 

매표소 입구, 예매가 아니면 주말엔 줄 깨나 설 성 부른....

 

빨강이다.

아마 그의 삶도 색채로 고르라면 빨강일 것 같다.

 

지난 번 샤갈전 기록을 뒤져 비교해 보니...화이트에 블루다.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는 그의(샤갈)그림

불루가 아니고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를 끌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생각을...조금~

 

역시 피카소 그는 단연코 Red다.

 

 

금요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주중이라 한산한...

 

서양 갤러리문화는 편안한 의자가 많이 놓여져 있어서 편히 앉아서도 오래 감상할 수 있게끔 되어있다는 데 우리는 주말이면 완전 도때기 시장 모습이다.

큐레이터의 설명도 듣고 천천한 감상을 원한다면 주중을 필히 이용하시라 권하고 싶다(월욜은 휴관)

 

 

전시실 바깥 곳곳에 휴식의자는 그런대로 갖춰진 셈이다.

 

 

찍으면 안되지만 큐레이터를 쫓아 설명을 듣고자 몰려다니는 사람들 뒷 모습만 한 컷!

 

나는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

 

 

한때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피카소의 암울한 청색시대를 주조했던

그의 친구 페르낭드 모습?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휴게실 매점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술관 입구

 

 

창에서 바라보이는 곳 북악산인가?

 

휴게실

 

휴게실 팥빙수와 쿠키~

 

3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shop~

 

 

휴게실에서 내려가는 나무계단

 

덕수궁 석조전이 마주 바라다 보인다.

 

미술관 매장답게 명화들로 만들어진 소품들~~

 

고흐와 크림트의 그림...모네의 수련등이 보인다.

실크 스카프가...8만여원, 넥타이가 6만여워~ 가량

 

 

그림 넥타이 청색계열 그림이 무난해 보인다. /내가 보기엔...역시 모네의 수련이 그 중 마음에 듬~ (右 3)

 

 

 

 

이전 글 (2)에서 부분 발췌문

 

*미술지에서 읽었던 내 기억 뒤집기+


많은 사람들은 예술은 몰라도 피카소는 다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말하기를"눈이 튀어 나온다느니~""코가 납작해졌다....."
또는"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댔다""입이 얼었다"이런 왜곡된 언어들처럼...
왜곡되게 그려진바로 그점이 피카소의 그림의 키워드가 된다.
피카소는 살아생전 부와 명예와 사랑을 누린 아주 특별한 예술가였다.
여러 여자들과의 열렬한 사랑......아마 그는 틀림없이 대단한 열정가 였으리라...
그는 많은 여자들에게서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었고 그는 많은 여자들을 앎으로 해서 氣를 뺏기는 게 아니라 되려
영감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1973년에 91세로 사망했다.     200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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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년
폭염이 내리 쬐던 여름,
63빌딩 1층 전시관에서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시”<게르니카>를 관람했다.
파블로 피카소는(1881-1973.스페인 출생 파리활동) 전쟁의 인간말살,파괴에 대해 1937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349 가로776센티의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인간파괴를 고발한 예술가의 양심으로----
광복기념 행사 일환으로 열린 이, 전시회를 관람하며 전쟁이 끝난 우리의 싯점에서 우린
<게르니카>의 비극에서 진정으로 해방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였다.
전쟁이 발발 한지 어언 50년,
냉전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 돌아서고---
우린 20세기를 빛낸 천재화가 최고의 걸작인 <게르니카>를 만난다.
고국,스페인의 소도시<게르니카>가 파시스트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은 기사를 읽은
피카소가 분노하여 수십 번의 밑그림(exquisse)을 통해 완성한 그림.
엄청난 충격과 사회적 이슈를 일으킨 에스키스42점과 그 작품을 대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한층 가까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생존 시,드물게도 가장 부요를 누리던 운 좋은 예술가 피카소!---
그의 작품 <게르니카>의 뒷얘기를 찾아 보기로 했다.

캔버스에 나타난 숫소는 파시즘이 아니라 잔인성과 암흑을 표현한 것이라고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답했다고 했다.
게르니카의 화폭 속에서는 진짜 적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마찬가지로 정의에 편에 서있는 자가 누구인지도 찾아내기 어렵다.
인민을 상징하는 것으로 편리하게 해석했던 숫소도 피를 흘리면서 보이지않는 적을 찾고 있는 것처럼 광폭스럽게 그려져 있다.

포화에 견디는 얼굴, 추위에 견디는 얼굴
거부에 밤에 부정에 타격에 견디는 얼굴

뒤집혀진 죽은 심장

여인들 아이들은 같은 붉은 장미들을
눈 속에 지녀
저마다 자신의 피를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승리<부분>)

,엘뤼아르’(프랑스 최고의 저항시인,자유의 찬가노래 1894-1952)
피카소완 남다른 친분 관계며 굳건한 예술적 동지이다
그가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 한귀절을 빌면
“한폭의 그림앞에 설 수 있는 시인처럼 한편의 시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피카소는 분명 시인 기질이 넘쳐 흐르는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피카소 자신이 상당량의 시를 쓴바 있고
‘앙드레 브르통’이 “시인 피카소”라 당당히 불러준 사실에서도
그의 시적 상상력의 풍부함과 창조성을 확인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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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하나다.
예술은 언어가 필요치 않다.
예술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커무니케이션을 이루기 때문이다.

문학이 그러하고 음악이 그러하고 그림이 그러하고
무용이 그렇다.(난, 무용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용은 샤먼에서 기인한다고 들었다.
신과의 교접----
마치 신 들린 듯한 몸짓이 아니고서야 어찌 몽매한 범인이 공감이 있을까?---
무언의 그 어떤 느낌, 우린 본능의 느낌으로 그냥 알고 있다.
단지 표현에 한계성만 느낄뿐, (2000년도 글에서~)

 

 

 

 

......2006년에 만난 피카소.........

 

 

그는 또 다른 이야기를 몰고 왔다.

기획 전시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그 색깔을 달리한다.

큐레이터를 쫓아 다니기에 평일이라도 6~70명은 좋이된다. 어떤 해설은 잘 들리고 어느 그림은 건성 지나가듯 하지만,

시대적으로 일목요연 분류 게시된 피카소 그림들... 함께 동거한 여인에 따라 그림도 그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시대적 나눔이 곧 현실의 배우자와의 나눔도 되는 듯,

그 배우자와의 삶에서 그림도 바뀌고 주,모델도 바뀌는...이 번 피카소 주제 컵셉은 넷상에서 한참  떠 돌던

피카소의 여인들 이야기에 포카스가 맞춰졌다.

어쩌면 <게르니카>전 보다 시대의 유행흐름인 누리꾼들의 입맛에 맞춘 듯....

 

그의 그림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와 모델이란 제목하의 수많은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점은

다소 거칠고 조악해 보이는 드로잉과 왜곡

 

한결같이 웬 여성 모델들의 성기는 그렇게 과다노출 크로즈엎 시켰는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그의 그림에서 오는 섭함이 아니다.

 

우리나라  천재화가 이중섭님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온다.

그는 아이들 그림에서 夏童을 많이 그렸고 자연 성기가 노출된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은 전시를 앞두고 그림이 내려지는 불운을 맞았다.

그림이 쌍스럽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에 의해서~~

 

1880년대에 출생한 파블로 피카소와 1916년에 태어난 이중섭,

우리의 불운했던 화가가 왜 가슴 한 켠에서 청승처럼 꿈틀거리는지....

 

왜 시대는 ...세상은..... 관점이랄지...관념?이  그렇게나 다른지?

우리는 왜 그렇게 예술의 눈뜸이 늦었는지....참으로 애닯은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피카소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과감하고도 거칠어 보이는 붓질이다.

실로 거리낌없는 단숨의 붓놀림들이다.

그에게 캔버스가 주어지면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사람처럼 단숨에 스윽쓱 대충? 그리고는 그 자체가 완성인 적이 많았다 한다.

마치 동양화의 선의 미술...여백의 미술을  짐작,   커닝한 것처럼 말이다.

 

시쳇말로 제 꼴리는대로 그린 그림...요즘 아이들이 본다면 호색환 변태라고 주저없이 말할 것 같다.

그는 자유뷴방한 화가이면서 누릴 건 다 누렸다.

부와 명예와 여자 마저도....아마도 그의 정력은 대단했었지 싶다.

그의 예술적 에너지는 끝없는 스테미너에서 나온 게 아닌지 짐작한다.

 

 

그의 그림이 조악내지는...거친듯 하다고 했던 생각은 오히려 판화 에칭부분에 가서 그 생각을 접는다.

동판, 석판이라 하기에는 얼마나 섬세한지 차라리 몽환적 분위기가 나는 그림들...

그의 싸인, 년도가 거꾸로만 보이는 것만 아니라면 실제 내가 선호하는 (그 다운?)그림인 듯...

역시 대가답구나!! 하는 인정의 기 눌림을 받았다.

 

 

깨어진 그림!!

 

그는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을 그린다는 파블로 피카소!

 

내 자화상을 들여다 보니...마치 피카소가 그린 그림보다 더 하다는 생각을 잠시잠깐 해본....

피카소와의 데이트~ 좋았습니다.

 

이상 무식쟁이의 그림읽기 이요조 였습니다.

 

 

 

 

 

 

2006년 7월 14일 다녀와서 15일 쓰다.

 

 

 

 


파블로 피카소 ( 1881~ 1973년 스페인 말라가 출생)

 

피카소전/서울시립미술관  http://www.seoulmoa.org/  

기간/5월20~9월3일(월요일 휴관)

지하철 이용/시청 1번 출구 : 덕수궁(左) 돌담길을 끼고 250m 좌측

요금/12,000원(성인) 5,000(어린이)

관람시간/오전 10시~ 오후 10시(평일) /오전10~오후 8시(토,일 공휴일)

전시문의/02-724-2900

ARS 2124-8800

 

 

 

7월17일 제헌절은 월요일이지만 개관합니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젊었을 때 모습(22歲)

 

 

간송 전형필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 2006. 5. 21 ~ 6. 4



언제적부터 벼르기만하다가 놓치기를 여러해~ 드디어 간송미술관을 찾아갔다.

간송미술관은 한 해 두 번, 5월과 10월에 걸쳐 2회,  매회 딱 2주간만 열리는 특이한 미술관이다.

올해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알려져 계속 끊이지 않는 발길에 놀라워하고 있다한다.


올해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62) 선생의 탄신 100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수장가 손으로 흘러가는 한국 문화재 수천 점을 가산을 털어 지킨 간송의 뜻을 되새기는 '간송 탄신 백 주년 기념 특별대전이 열린다.

평소 볼 수 없는 간송미술관의 명품 100선이 한꺼번에 나온다. 대부분 국보급이다.  

간송의 100주년 기념전인지라 작품 선정에 유별난 신경을 썼다. 소장품 명품 중 명품 100점을 골랐는데 간송미술관에는 아직도 많은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은 소장품으로 유명하다.

그 그림을 해마다 한번씩 거풍시키듯 교체로 관람을 시키는 거로 알고 있다.

 

오월이나 시월 주로 두 째주부터 개관인데, 올 해는 오월 개관일이 한 주 늦어졌다.

100주년 특별대전으로 그림을 선별해서 전시하기에 그만큼 고심한 흔적이라고 본다.

국보급 고미술품, 문화재를 수집한 전형필님도 대단하지만 오늘날까지 잘 지켜온 '최완수'실장님 역시 대단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신 분이다. 

 

처음 찾아간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일인들이 마구 수집해가는 미술품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하나 둘 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는 그는 큰 부잣집 아들이었다한다. 상속받은 유산을, 일제강점기하에 일인들의 노략질은 뭍으로만 그저 상륙한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일인들은 우리보다 먼저 예술을 알고 이해한 민족인가 보다.  그림도자가..심지어 돌로 만든 조각품까지도 깡그리 옮겨 나르기 시작했다한다.


그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심지어 어마한 웃돈을 주면서 까지 되돌려 산 그림이 있었다고 전에 어디선가 읽었다.


범접치 못할 부잣집의 대문이 어렵게 열리듯,  미술관은 마치 공개되기를 꺼려하는 고옥(보화각)으로 이끼 낀 정원과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먼저 반겼다. 올곧은 부자의 개인소장이었던 미술관을 구경하러 간 것이다.


특별전답게 일층에서 그림의 대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많은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림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 특별전의 주조를 이루었는데....신윤복의 미인도 앞에서 아름답게 성장한 여인의 향기를 맡아보기에 한 점 부족함 없었다. 거의 25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미인도를 채색한 치마나 노리개의 선연한 색깔이 치마 질감까지도 세모시였는 듯 마치 어루만져 본다면 지금이라도 감각이 돋아날 것처럼, 한마디로 멋졌다.

한동안 그 그림앞에서 사람들은 그 여인의 향내를 맡으려 머물다가 떼지지 않은 발걸음을  밀려드는 인파에 등 떠밀려 움직이게 되는데....

 

그 그림은 100주년 특별전의 가장 백미인 자리에 전시되었고, 그 아래 바닥 오른쪽 비껴나서  4~5호짜리 초라한 그림하나! 아마 제목이 '평범한 아낙의 일상' 쯤으로(아니면 그 비슷한) 기억하는데 절구질 하는 아낙의 약간은 굽은 등으로 초가집과 함께 그린 소박하다기엔 미인도에 비해 초라한 듯한 그림이었다. 역시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나는 연민을 느꼈다.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아낙이고 등이 구부정한 걸 표현한 걸 보면 옛날이라  감안하고도 지금의 내 나이와 엇비슷하구나!  하는....

무심결에 "왜 이 그림이 이렇게 미인도 발 아래 있지?"  했더니 동행이 잽싸게 받아치는 말이 

"저 그림은 천하절색이고....이 그림은 촌부(시골아낙)잖아요?"해서 둘은 순간 터지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인은 어디서든 무엇으로든(그림으로라도)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나는 그림을 공부했다거나 그런 특별한 사람도 아니지만 거의가 다 아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그런 잘 알려진 그림들이다. 명필가 추사와 겸재가 나란히 전시되어 비교하며 감상하기에 용이하도록 전시되어 있었고,  신사임당의 포도그림 같은데 그림에는 그저 신씨라고 성밖에 쓰지 않았던 여자들의 암울한 시대성을 눈으로 보고 가슴이 짜안해왔다.

그림이나 도자기들 모두는 국사교과서나 혹은 미술교과서에서 익히 보아왔던 국보급 작품들이다.

 

초등 때는 별 기억이 없지만 중등, 고등 학년마다 책이 바뀔 때마다 받아보던 미술교과서!

책 중에서  지질도 가장 좋고 인쇄비용도 가장 비쌀 것 같았던 양장지의 미술책,

김홍도의 그림이나 신윤복의 그림들이 세계의 명화들과 뒤섞여 있던 미술교과서의 그림책,

대략 작은 포스트잇 정도의 크기였지만 우리는 미술시간에 그 교과서를 펴놓고 그림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나름대로 익혀왔을 뿐...

김홍도에 대해서 신윤복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지식의 한계는 나름의 독서를 통해서인 것 같다.

그나마 요즘에서 미술도서가 나왔지 예전에는 그나마도 일반인들이 미술에 대한 상식을 얻을 곳이라고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미술책만 펴놓고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기초적인  미술사적 공부만 했어도...

수업시간에  준비물로 챙겨간 조각칼, 조각도구로 우리는 옆의 친구 것을 보며 스스로 배워나갔을 뿐,

그림을 그리는데도 상호간에 서로 곁눈질로 익혔을 뿐, 미술사에 대한 공부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받았던 교육은 상당히 시대를 앞섰던 환경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미술실이 따로 있었고 특활시간 미술부들이 사용하던 수많은 석고상들과 이즐들~ 미술실 테이블은 아주 넓어서 무슨 작업을 해도 용이하게끔 시설은 잘 되어있었지만  우리 선조 화가들에 대한 그림의 이해를 돕는 그 어떤  진지한 수업을 받은 기억이 없다.


오늘 미술대전에 어필된 신윤복의 실물크기와 같은 미인도에 대해서 기자는 마치 귀밑머리의 보송거림 까지 세세해서 간지럽다는 극찬을 했더라마는,  그부분 나는 시큰둥했다. 너무나 눈에만 익었지 마음에는 그리 익혀두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내게 무슨 진골의 피가 짜다라 흐른다고~~

 시대적으로 구중 규방의 아녀자를 모델로 그릴 수 없기에 신윤복은 주로 기생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왔다는 데 대한 폄하의 경시감인지, 그림은 그림으로 보아야하는데, 근대를 살고 있는 내가 이럴진대 까마득한 우리 조상들은

춘화를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혜원 신윤복, 그 당대에서는 그래서 더우기 환쟁이라고 경시하는 대접은 했던 게 아닐까?

...................


이상은 턱없이 무지한 쉰을 훨씬 넘은 아줌니가  간송을 다녀온 느낌을 글로 써보았다.

나는 잘 쓰지 못하지만 먼저 내 생각의 글을 먼저 써본 다음 검색을 해서 보완해 나간다. 전문가적인 이야기야

천지에 널려있으니~~ 먼저 읽다보면 자칫 자신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검색을 하는데,  "교과서에만 보던 문화재"라는 제하의 글에 공감을 느낄수 있어 얼마나 반갑던지,

 

사람들의 느낌을 검색으로 읽으려 해도 그저 한결같이 따온 그림이야기뿐이다.

초등학교때부터의 이런 교육은 어떨까?   미술관을 다녀온 느낌을 글로 써 보기~

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님의 말처럼 제 눈높이의 이야기 하기를 다들 꺼릴까?

초등아이다운 어린이 이야기, 청년들의 이야기, 미술학도들의 이야기, 나처럼 밥짓다 나온 아줌마들의 어눌하지만 가슴으로 느낀 솔직한 이야기, 이야기는 하다가 보면 는다. 스텝 바이 스텝이라고나 할까? 적다가 보면 실제 내게 흡수가 되는 유익한 공부가 된다. 고서화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  아니면 연세가 있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오신 분들, 그런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아마 고인이신 창시자는 더 듣고 기뻐하실 지도 모를 일이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재밌는 사실은 이층전시실에 가면 중앙에 간송의 서화가 8점이나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은 그림이 있었다. 한 4~5호쯤 되려나?

해맑은 아이들 그림처럼 시화에 잘 그려지는 그림처럼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그림이 두 점 보였다.

글씨는 물론 잘 모르겠지만 간결했고 올해로  100해가 되신 그(전형필1906~1962)의 그림은 아주 친근감이 있어 좋았다.


모든 예술은 국경을 초월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천재를 몰라봐도 국외에서 먼저 인정받고 알려지는 걸 보게 된다.

日人들이 우리의 서화나 도자기에 심지어는 보통 석상인 벅수까지도 넘나보던 그네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시점에서 일인들에게 비싼 돈으로 되돌려 받았던 간송, 전형필!

그는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낸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보화각(간송박물관/ 옛이름)주변 사진을 찍다. 이요조/글

그 외 그림은 검색이미지로 대체합니다.

 

 

 

 

 

 

 

 

 





간송미술관 http://snowblue.sookmyung.ac.kr/museology_dig/gallery/gansong.htm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97-1 전화번호: 02-762-0442



간송미술관은 현재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 연구실장 최완수) 부설 미술관이지만

그 출발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박물관이었다.

설립자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선생이다.

이곳에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의 원본을 비롯한 고서 1만여 점과 서화, 석조물, 자기 등 골동품 3천여 점이 소장돼 있다.

간송이 직접 그린 서화 8점도 소개된다. 6월 4일까지.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97-1 전화번호: 02-762-0442

관 람 시 간: 평상시(평일, 주말 구분 없이 엽니다) / 10:00~17:00

휴관일: 연 2회(5월, 10월)의 정기전시회 이외 휴관

간송 미술관(월요일 휴관)

요 금: 무료

주차장: 성북초교 운동장(임시)


원하는 관람자에게는 도록이나, 소장 작품의 인쇄본을 팔기도 합니다.

 

 

*교통편

 

-자가운전-

경복궁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삼청동 삼청터널을 지나자마자 
삼청각을 지나서 우회전하여 300미터쯤 내려가면 됩니다.
(우회전하는 곳이 주택가의 작은 갈림길입니다.)
내리막길로 가다 삼거리의 왼편에 있습니다.

 

 

-대중교통-

시내버스 85번이용 성북초등학교 앞 하차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하차 10분 도보 한성대 입구에서 6번출구로 나가신 다음

그길로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거리는 한 1km정도 됩니다.




[펌글/일부]


미술관을 40년간 꾸려온 최완수 연구실장은 간송의 컬렉션이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가능했다고 한다.

간송의 탄생부터 그렇다. 자손이 드문 조선 최고 갑부 집안에서 태어나고, 젊은 시절에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두 숨지는 바람에 집안의 재산을 몽땅 혼자 상속받았다. 젊은 거부(巨富)의 관심을 고미술로 이끌어 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의 만남도 운명적이다. 한국 고미술의 역사를 집대성한 오세창은 간송이 마음

놓고 문화재를 사들일 수 있게 만든 최고의 감식안(鑑識眼)이었다. 62년 가산이 기우는 와중에 간송이

갑자기 숨지면서 남긴 보물들을 오늘까지 지켜온 최 실장의 자부심과 옹고집도 초인적이다.


그러나 미술관의 운명을 하늘에 기대기엔 세상이 너무 바뀌었다. 고미술 감상 수요가 최근 급증했다.

68년 전 만들어진 보화각 건물은 전시관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문화재다. 성 바깥 골짜기였던 미술관 터는

번잡한 도심이 된 지 오래다. 최 실장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국민 모두의 소유니까"라고

답한다. 이제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한다.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부터 나서야 한다.


올해가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탄생 100주년이다. 간송미술관은 매년 봄 가을 정기전을 통해

간송이 평생 모은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번엔 간송의 100주년 기념전인지라 작품 선정에 유별난

신경을 썼다. 소장품 명품 중 명품 100점을 골랐는데, 그 중엔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71호

'동국정운',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가 즐비하다. 겸재 정선의 '풍악내산총람',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 등 걸작 그림도 볼 수 있다. 국보만 12점, 보물이 10점이다. 21일부터 2주간 전시한다.

 

보화각/간송미술관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고려시대는 청자다. 그러나 간송의 청자 대표선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으로 어깨의 당당함은 남성미를, 잘록한 허리는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수작 중의 수작이다.

신윤복의 미인도/최순우 국립박물관장은 신윤복의 숱한 기녀들의 그림이 이 미인도를 하나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라는데....

단원 김홍도/‘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 나귀 타고 말 가는데 버드나무에서 꾀꼬리가 울고 있어서 그것을 말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는다는 그림이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단옷날 그네타기 나온 여인네들이 냇물에 몸을 씻는 장면을 묘사.

 

.................

 

무슨 글이든지..페이지 넘어갈 때 까지 저는 수정을 계속합니다.

스크랩하신 분들 참조하시라, 말씀 드립니다./이요조

 

 

Vincent..

휴가중 못난 사진을 한 장 찍어 놓고는 고흐의 starry night을 떠 올렸다.

해운대, 바다축제 전야제였다.

불꽃놀이를 찍었는데...

언제나 밤바다를 찍으면 해무의 포말인지? 사진에 자주 물방울의 흔적이 묻어났다.

달리 아는 지식이 없으니, 혼자 끙끙 앓을 수 밖에,

다른 이미지를 겨냥했으면 못 쓸판인데...

내 보기에는 불꽃과 어우러진 푸른 밤이 마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해운대의 송림이 불꽃놀이에 놀랐는지 고흐의 삼나무처럼 머리끝을 쭈빗쭈빗 들고 있고......

어쨌거나 엎어진김에 쉬어가듯, 고흐를 되새겨보는 탐구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나는 반고흐의 그림이 좋다.
그는 인생의 절반이상이 우울증과 괴로움에 시달렸지민 하지만 그림의 대한 열정하나 만큼은....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었나보다.

고흐는 어쩌면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열정을 어디에 쏟아야 하는지를 아는사람이었으니까

고흐의 작품중에 starry night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을 보면 꿈틀거리듯한 별들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를 보는 듯 한데,

 

얼마전 티뷔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심리학자?) 병든 사람의 눈에는 심리적으로(들은대로 쓸 수가 없네요 기억에 남은 ...대충)

그렇게 보인다는 그 실예를 들어 이 그림을 대표로 거론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단 한 번의 해외여행에 별 볼일 없는 여행을했지만

오래전에 여자들만 갔더니 가이드가 막중한 책임의식을 느꼈는지 도통 밤에는 나가지도 못하게 위협적인 말로 감금?을 했고 우린 착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공기가 맑은 나라에선 달이 놀랍도록 크고 별도 크고 밝다고 했다.

만약에 내가 밤에 나가 별을 봤더라면 고흐의 별과 같지 않았을가 한다.

난시가 있어서 빛번짐이 매우 심하니 아마도 고흐처럼 별이 꼭 저렇게 보였을 것!

눈을 혹사한 날은 냉장고에 든 그릇이 두개로 포개져서도 보이니,

각설하고..

 

왜 아닐까마는 이 그림은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이지만

춤추는 듯한 삼나무와 살아서 발광체가 된듯한 별과...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에게 묘한 마력을 주는 것 같다.

 

 

'마르뜨 로베르'란 미술평론가가 이 그림을 보면서

"이 환각을 일으키는 작품속에는 그러나 어떤 무질서도 없다.

반 고호는 아주 확실하게 구성의 균형을 잡으면서 그의 세계관의 주인이 되어 있다" 라고 한 말이 너무도 실감나게 느껴졌다.

 

이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은 고호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얻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그러면서도 또 우리에게 삶의 따뜻함을 준다.

 

 

Dana Winner 가 부른 이 감미로운 선율은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바로 고흐의 starry night를 보고 영감을 얻어 부른 노래라 한다.
 
 
이상 윗글은 아는 데 까지만 보이는 그대로 쓴...글:사진/이요조 
 


고흐가 그 삶의 마지막 1년, 정신병과 싸우며 그린 작품이다.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고갱과 다투다가 자기 귀를 자른 고흐는 아를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간혹 발작을 일으켜 "나는 자신에게 과(課)해진 미치광이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며 1889년 5월 아를에서 가까운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는 그해의 7월과 12월에도 발작을 되풀이하였으며, 이 그림은 그 발작 사이에 그린 상 레미 시대의 작품이다.

고흐가 비저널이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는 거의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현실의 사물에 밀착하는 화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한 고흐도 본질적으로는 서정가(抒情家)이고, 뛰어난 비저널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을 상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였으며, 그의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 성숙함이 이윽고 상 레미 시대에 있어 비저널로서의 고흐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철창이 쳐진 정신병원의 창 너머로는 상 레미의 시가와 별이 깔린 하늘이 보인다. 별 하나하나는 심장의 동계(動悸)처럼 빛을 변화시키고 끝 모를 창궁(蒼穹)의 푸름은 그 중핵(中核)을 탐구하는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별들도 소용돌이치고 모두가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는 이 장대(壯大)한 밤의 시(詩)는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접촉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정성·신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신비한 밤이다.

37년의 짧은 삶을 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오랜 우회(迂廻)의 길을 걷다가 27세가 되던 1880년에야 화가의 길에 들어, 불과 10년의 작품생활 끝에 회화사(繪畵史)를 빛내는 숱한 명작을 남겼다.

그것도 발작과 퇴원이 되풀이된 그의 마지막 삶의 2년 반을 보낸 아를 시대에 약 200점, 상 레미 시대에 약 100점의 그림을 남겨, 이 기간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開花期)였다.

그의 예술적 정신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포비즘'  화가들의 지표가 되었다./검색글

 


 

 반 고흐의 또 하나의 그림(上) " 별이 빛나는 밤 "을 보면 북두칠성이 수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원 대신 바닷가를 택함으로써

 반 고흐는 온 세상을 밝히고 있는 별빛의 황홀한 광휘를 보다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영롱하고 그윽한 신비를 만든 이가 어딘가 따로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은

 밀레와 반 고흐의 " 별이 빛나는 밤 "을 지배하고 있는 동일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밀레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성소를 연상시키는 광원을 위치시켰던 반면

 이미 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혹은 자신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여기고 있었던

 반 고흐의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빛의 근원이 나타나있지 않다.

 

 

                                                                                                 자료 - KANS 아트옥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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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1,21~
 
 
 

Vincent/Dana Winner

 


No, 247
◎ 이름: 이요조
◎ 일본문화개방에 대해: 의견을 적어 주세요.
2002/3/6(수) 10:16 (MSIE5.0,Windows98;DigExt) 211.198.117.252 1024x768
◎ 조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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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못하면 숨막힐 것 같아 하는 짓거리 *월간 미술을 정기구독하고 예술적으로 편집된 것 같은,
    '네이버'란 잡지를 포켓사이즈로 인터넷 주문하고.....
    (포켓싸이즈는 가격이 현저히 싸므로)EBS 화요일 오후 9시 20분 '이주헌의 미술기행"을 시청한답니다내가 그림을 알고자하는 知慾에 대해서 용을 쓰는 한계에 머문
    방편들이지요.아이들 셋 중에 둘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습니다. 하나는 전혀 아니지만,둘은 글짓기와 그리기에 조금 남 다른 재능을 보였지요.
    하나는 그리기 쪽으로
    조금 더 낫고 또 하나는 글짓기 쪽으로...그러면서도 두 가지를 잘 해냈지만, 나는 그만...또 다른 각오를 해야했습니다.그런데 난, 글짓기를 더 잘하는 아이의 재능을 가위로 싹둑 잘라 내버렸고그리기를 아니..놀라운 색채감이 있던 아이의 재능은 지우개로 빡빡 문질러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직 그 뿌리의 상흔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자르고 지우고, 자르고 지우고의 반복의 愚를 범했던? 그 이유는 다음에나
    써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본능은 잠재해 있습니다. 
    그 것을 어떻게 끄집어(개발) 내느냐의 차이일 뿐, 
    신석기 시대 동굴벽화에서 우리는 종종 그 시대의 사냥감인 짐승들을 봅니다.
    바로 그 그림이 일종의 주술적인 목적으로 그린 것이랍니다.
    벽에다 사냥감을 그려놓고 활을 던져 어떤. 주술과도 같이 용맹을 줄거라
    믿어 담력을 길러내고 활을 맞는 그림의 짐승은 힘이 빠질 것 같은.....
    그런 뜻으로...그려진 것이 라네요.
    중세기 그림에서 신화를 그대로 인용한 그림을 많이 보게됩니다.
    신화를 알고 난 후 그림을 보면,,,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회화를 표현한 그림, 누구의 그림인지...이름을 잊었습니다.
    그 그림은 언뜻 보면 남자가 그냥 앉아있고 젊은 아가씨가 붓을 들고 있습니다.
    뜻을 모르면 그저 그런 그림입니다. 그런데...그 속 깊은 그림의 사정은
    사랑하는 연인의 젊은 청년이 죽었답니다. 처녀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앞으로 그를 그리워할...무서운 아픔을 먼저 생각해 내고 그를 그렸답니다.
    벽으로 끌고 가서 그림자가 벽에 잘 나타나도록 등잔을 갖다 놓고 그의 옆얼굴이
    선명한 그림자의 선을 따라 그의 옆얼굴 선을 그리는 것이랍니다.
    그 그림이 최초의 회화를 표현한 그림이라 하는군요.
    그리고 그림 이해를 돕는 해프닝 이야기 하나...개발도상국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사람고기를 판다고 그곳 주민들이 데몬스트레이션을 벌이더랍니다.
    알고 본즉 돼지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돼지고기가, 소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쇠고기가,
    그런데 아기이유식에 웃는 아기가 그려져 있었으니 그 물건은 사람고기라는 것이었답니다.
    우리는 간단한 사람 표정을 그릴 때 웃는 사람은 입이 올라가게 그리고 
    화 난 사람은 눈이 올라가게 그립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약간의 상이점이 작용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볼 때는 '졸라멘' 같다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림을 보았을 때, 사람에 따라서 느낌은 같지 않습니다.
    다 다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뜻이라면...주눅드실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매끈하고 유연하게 그린 수려한 그림보다 다소 거칠고 어눌해도 마음에 와 닿는 살아 있는
    그림들을 우리는 만납니다.
    어떤 그림은 따스한 기운으로 어떤 그림은 무섭도록 섬칫한 기분으로 어떤 그림은,
    또 다른..언어로..
    그럴 때...
    마음에 집히는 대로 먼저 느낌을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그 후에라도 작가의 프로필을 자세히 보고 그 그린 모든 상황을, 그려진 메시지를 읽어 
    느낌을 보탠다면 더 이상의 금상첨화가 있을 수 없겠지요.
    물론 우리는 전문 평론가가 아닙니다. 그저 보고 나름대로 느끼면 그만인 것입니다.
    반 고흐의 누런 황금 보리밭을 보고
    내 마음에도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과 작열하는 프로방스의 태양이 느껴졌다면
    이미 당신은 아주 훌륭합니다.
    다른 영감이 떠올랐어도 당신은 바라던 바 그림과 아주 가까워진 것입니다.
    역시 그의 그림에서
    날아가고 있는 까마귀를 보고 그 울음소리를 들리는 듯하다면
    그 울음이 전하는 바로 고흐의 심경으로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까마귀가_있는_보리밭* /上그림쌩 레미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낸 고흐는 동생의 추천으로 오베르에 오게 된다. 하지만 오베르에 오게 된 이후부터 그의 외로움은 더 커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낸 시기 중의 하나이다. 
    결과적인 해석일지는 모르나 이 시기의 그림은 그의 불행한 종말을 암시라도 하는 듯
    짙은 어둠의 이미지가 강하다. 오베르의 교회에 나타나는 무거운 하늘의 이미지가 그렇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하늘이 또한 그러하다. 
    특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그 역동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불길한 이미지도 크게 느껴진다.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는 밀밭과 파도 치듯 구부러진 길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그의 심리상태를 보는 듯하며,
    금방 폭풍우가 몰아칠 듯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불길함이 다가온다.
     그 속을 날고 있는 까마귀의 존재가 이러한 느낌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을 남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우리의 그림...우리작가를, 먼저 알자는 큰 뜻이 요즘 화두로 부상됩니다만..저, 역시나...요즘 들어 겨우 '최북'/칠칠이 를 책에서 알았지요...그 보다도  빈센트 반 고흐를 더 먼저 알기에....부끄럽지만그에다가 우선 비유해 드렸습니다.언제...동양화 읽기라도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십시다.쉽게는 김정희의 세한도 정도라도 가려 볼 줄은 알아야겠기에.....東洋畵는 주로 線으로 구성된 담채화로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으며,서양화는 面의 구성된 유채화로 입체감이 뛰어난 극사실에 가깝다는 것만전하고 다음으로 약속드립니다.첨글/이흥로 화백 님도 계신데...심히 부끄럽습니다.미루에서는 요만큼 입니다.(미루나무에 걸린 바람/舊칼럼)넓은 아량으로 보아주시기를....
    다음, 아랫글은 제가 2001년 봄 쯤에...모 신문에 난 기사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마침..생각이 나길래 찾아왔습니다.
      
    *추상 미술도 재밌네[펌]*
    ◆사진설명 : 몬드리안 作‘적 ·황 ·청 ’/下그림


    웬만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추상미술은 ‘컴플렉스’의 대상이다.
    한국 보통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인상파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 온 드니즈 르네의 컬렉션 ‘20세기 추상미술의
    빛과 움직임'전은 실물 명작을 감상함으로써 '추상미술 컴플렉스’를 
    극복할 좋은 기회. 
    조선일보는 평론가 이주헌씨의 안내로 ‘20세기 추상미술…’전에 나온 
    명작들의 감상포인트를 살펴보는 ‘추상미술도 재밌네’를 연재한다. 
    ( 편집자 ) 20세기의 전설적인 화상 드니즈 르네가 다뤄온 작품은 주로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기하학적 추상이다. 
    내면의 감정을 분출하는 서정적 추상에 비해 한층 이지적으로 보이는
    이 미술은 그만큼 더 어렵게 느껴진다.
     현대 미술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감상이 가능할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느낌을 얻기 위한 행위이다. 
    바로 이런 자신감을 갖고 현대 추상 미술을 한 번 헤집고 다녀 보자. 
    그 첫 대상은 추상미술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인 몬드리안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대체로 하얀 평면 위에 수직, 수평의 검은 선과 
    적, 황, 청, 흑의 색면으로 구성돼 있다. 너무나도 단순하다. 어슷비슷한 
    이 그림들에서 우리는 무얼 봐야 하는 걸까? 보고 있는 걸까? 
    아니, 흰색은 그 티 없는 순결함으로 모든 것의 시초, 근원이 되어준다.
    거기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대지, 대양, 바탕 따위를 연상시킨다. 
    수평선에서 서 있는 나무를 떠올릴 사람이 없듯이 수직선에서 누운 대지를 
    떠올릴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선은 서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사람, 나무, 건물 등.
    우리는 뜻도 세운다. 뜻이 서야 실천이 있다. 그런 까닭에 수직선에서는 
    어떤 의지, 생명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근본적 환경으로서의 수평선과 실천적 의지로서의 수직선이 만나면
    그것이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색면은 그 세상이 빚어낸 역사적, 개인사적, 진화사적 사건들일것이다.
    복잡하고 제각각 달라 보여도 세상살이란 다 똑같다. 모든 것의 근원은 같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은 세상의 다름을 이야기하는 화두가 아니라,
    세상의 같음을 이야기하는 화두이다.단지 세상의 표정만이 시시때때로 변할 뿐이다. 
    몬드리안은 구성의 간단한 조정을 통해 그 복잡해 보이는 변화를 손쉽게
    ‘정식화’했다.그 정리를 통해 몬드리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세상 살아보니 어떻습디까?
    커서 결혼하고 애 낳고 늙고 죽고, 별 다를 것 없지요? 우리 쉽고 단순하게 삽시다. 
     
    ( 미술평론가 아트스페이스서울 관장 ) 
     



    이 글을 다 쓰고 난 지금 4시30분입니다.글 쓰는 중간에 일어나서 밖을 보았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지금 다시 내다보니.....진눈깨비에서....이젠 멈추고차도만 번지르르하군요.땅에 닿자 곧 녹아내리는 모양입니다.내일은 아니 오늘은 좀 추울 모양입니다.못다한 일 하려면.....전 오늘 좀 바빠야겠습니다.편히 주무시겠지요? 고운님들~`  안녕히 주무세요이요조/2002년 3월 6일 春雪내린 새벽.
    ** 2002년 삼월에 씌여진 글을 읽었습니다.
    어찌 열정이 식어버린 듯 싶습니다.
    요즘은 독서도 못하고 늘 보는 잡지도 없어졌습니다.
    마음도 많이 피폐해져 가는 듯 합니다.
    거우 만 삼년 전, 일인데도 많이 느려지고 둔해진 저를 봅니다.
    자성의 마무리로 2004년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흐르는 음악은'OVER &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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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여행중에 만난 이 그림 앞에서 순간 나는 세한도를 느꼈다.

      그리고 아래 작품 설명을 읽고는 세한도와의 교감을 알고  나 자신이 대견해서 무척 기뻤다.

      청맹과니 내 눈에도  애써  세한도와 연관을 짓다니..... 이 아니 흐믓한 일인가?

      그 것도 바로 두 작품 다 제주도와 그리고  추운 겨울 따뜻한 茶 한 잔이  떠 올려지는 그림들이니....

       

      세한송, 이 그림은 제주도 [오설록]전시관에서  내가 만나 본 그림이다.

       아마도  소장은  태평양화학이 틀림없을터~~

      그 그림을  녹차와 걸맞게 소장해 준 것이 고마울 따름, 꼭 적재적소에 와 있는 느낌에,

      설록차와 세한송, 연이어 세한도까지 떠 올리게 하는....푸른 녹차밭 그 속에 자리잡은 [o'sulloc 오설록 뮤지엄]館

       

      매화를 닮은 녹차꽃이 제주도 맵찬 바람속에 하이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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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클릭~` 크게 하신 후 글을 읽으시면 됩니다.

       

      내게는  입수된지 오랜 추사 김정희님의 난그림이 한 점, 있는데...

      보시는 분들은 이 그림이 혹시나 가짜가 아닐까 염려 않으셔도 된다.

      왜냐면 믿을만한 데서 나온 영인본이기 때문이다.

      잘모르지만 그의 간결한 붓 끝에서 김정희의 선비다운 교양과 인품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에, 무시로 이 그림 앞에 서면 마음을 가다듬고 눈길로 붓 끝을 따라 허공에다 난을 쳐 본다.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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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ulloc 오설록

      설록차 뮤지엄 오설록 (064)794-5312. http://www.osulloc.co.kr/museum/mu_intro.jsp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 개관.


      제주와 녹차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추사가 이곳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차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자 다승(茶僧) 초의선사가 봄마다 차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글을 보냈으니 그 우정이 지금의 한라산 자락 푸른 차나무의 물결로 다시 태어난 것일 게다.
      인근에는 추사가 머물렀던 적거지가 있다.
      복원된 옛 초가와 함께 기념관이 있어서 추사의 호쾌한 글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니 다향만리 제주 다원 여행의 덤인 셈이다.

       

       

      아랫글은 조선후기 서화가 김정희(金正喜)편/펌글입니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으니 <세한도>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세 한 도 
                                                        

       


      한때 초막에서 샘물 길어 차 달이노라
      때는 동지섣달 긴긴 밤
      차거운 달빛이 문풍지 뚫고
      소나무 그림자 청한(靑寒)한 기운 일으키고
      돌샘물 길어 차 마시던 추사(秋史)의 넋은
      제주도 거센 바람되어 머물고
      돌 여자 바람이 많아 삼다(三多)
      거지 도둑 문이 없어 삼무(三無)
      바람 홍수 가뭄이 심해 삼재(三災)의 땅
      유배지 탐라에는 아직도 칼바람이 부는데
      정한(情恨)이 많아 애틋한 제주에
      청풍명월로 머물고 있나니
      돌하르방으로 지켜보고 있나니

       

       

       윤효선(소암)

       

      ▼ 추사 김정희님 자세히 알기

      http://ncolumn1.daum.net/dist/commentLogin?sid=02GYe&eid=0KmAm&skin=t02&color=yl&view_fldid=00aBQ

      ▲조선 후기의 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문인화 보기/펌글

       

       

      아래 사진은 윗 내용과 무관하나 그저 좋아서 찍어 둔 것인데 .....훗 날 정원을

      이런 모양새로 그리면서...어찌보면 강요배님의 세한도를 현대식으로 풀어 그리셨다면 나는 세한도를 현대식으로 이런  정원과 집은 어떨까 생각해봤다.

       

      '허균'의 '누실명'도 본문은 옛글인 고로 그저 그리 닿아들진 않아도 현대어 풀이에서야  그제서야  썩..좋음을 알아 챈 무식한 나, /이제는 열광하는,

       

      그런데... 그 게 풀이하는 개개인에 따라 그 느낌이 그 매력이 자꾸만 달라지는 것을.....

       

      아무튼 '세한도'의 풍취를 인위적으로 흉내내본다면 하는....생각에서 완전히 사족같은 image를 첨부하는 무식쟁이 나임을 자처하노니~~~

       

      그림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지 않는가?

      [세한도와 세한송]

      강요배님의 현대식으로 풀어그린 그림보다야 그 윤기가 덜하다.

      함부로 평을 말라는 [세한도이지만] 뱃길로도 멀...제주도 유배길,
      아마도 제목(歲寒圖) 그대로 유배의 심정과 그리고 자신의 청렴결백한 심중의 그림이니 강요배님의 그림처럼 여유로움 같은 건 없을게다
      그가 그리려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마음이었을 테니까.....

      -------------

       

       

      내 둔한 마음에  바늘끝 만큼이라도 닿은 '세한도'임에야  칼럼주인 상상에 맡겨야지 어쩌겠는가?

      흐~`

       

      죄송스런 / 이요조

       

      .

      서귀포?  모사찰, 좀 떨어진 경내에서

      .


      고택 옆에 있는 추사묘역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충남문화재자료 제188호. 조선시대.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세 한 도 
                                                        

       


      한때 초막에서 샘물 길어 차 달이노라
      때는 동지섣달 긴긴 밤
      차거운 달빛이 문풍지 뚫고
      소나무 그림자 청한(靑寒)한 기운 일으키고
      돌샘물 길어 차 마시던 추사(秋史)의 넋은
      제주도 거센 바람되어 머물고
      돌 여자 바람이 많아 삼다(三多)
      거지 도둑 문이 없어 삼무(三無)
      바람 홍수 가뭄이 심해 삼재(三災)의 땅
      유배지 탐라에는 아직도 칼바람이 부는데
      정한(情恨)이 많아 애틋한 제주에
      청풍명월로 머물고 있나니
      돌하르방으로 지켜보고 있나니

       

       

       윤효선(소암)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의 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문인화.
      지정번호국보 제180호
      지정연도1974년 12월 31일
      소장손창근(孫昌根)
      소재지서울 종로구 청운동 52-109
      시대조선 후기
      크기가로 69.2㎝, 세로 23㎝
      종류문인화

      1974년 12월 31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1844년(헌종 10) 작이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69.2㎝, 세로 23㎝이다. 서울 손창근() 소장하고 있다. 작가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송백()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은 수묵과 마른 붓질 및 필획의 감각만으로 그려졌으며,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주위에 송백 두 그루씩이 대칭을 이루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되었다. 오른편 상단에는 '세한도()'라는 화제와 "우선시상완당()"이라는 글과 관지()를 적었다.

      이처럼 극도로 생략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는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이며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수법을 쓴 것 같다. 작가의 농축된 내면 세계에서 비롯된 필선과 먹빛이 풍기는 담백 아담한 분위기는 문인화가 지향한 사의()와 문기()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1844) ]
      고사 소요란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입니다. 그의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원나라 문인화풍의 간결한 필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데요, 작품의 완숙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느 그림처럼 가슴 속에서 붇받치는 감동에 밀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그려진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입니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 데요,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합니다. 그나 저나 그림에 도장은 참 많이도 찍혀 있네요.

       

       

      [ 영영백운(英英白雲) (1844)]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는 발문이 오른 쪽에 적혀있네요.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다가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허로움마저 느낄 수 있네요. 제주 유배 중에 기거하던 자신의 집을 그렸습니다. 고고한 모습이죠.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 추사 김정희 서 (1844)]
      조선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고 있는 그가 고독한 유배 생활 중에 이루어낸 예술 세계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물욕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자신을 비워 창조해낸 거죠. 조선시대에는 글씨자체의 멋과 아름다움도 즐겼는데요, 글씨도 그림처럼 열정을 다하여 써 내려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묵란도 (1892)]
      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입니다. 그는 추사에게 난치는 것을 배웠는 데요, 추사는 이하응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난 그림을 그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치 벼랑에 핀 듯 바위 틈새에 피어 난초와 괴석이 어울린 석란의 모습인데요, 그림 두 폭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대원군이 노년의 병중에 그렸음에도 매우 깔끔하고 고결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방석도산수도 (1850)]
      추사가 아끼던 제자 허유가 젊은 시절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그림 위의 발문은 김정희가 썼습니다. 깔끔하고 고매한 정서가 전형적인 문인화의 품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감각 그대로 다소 거칠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태도도 묻어나고 있네요.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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