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展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3층

 

http://www.chagallkorea.com/index.html

 

[<색채의 마술사 - 마르크 샤갈>展]

전시일정 : 2004년 07월 15일 ~ 2004년 10월 15일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3층

문의 : 724-2904~6

 

 

 

국내에서 보기 드문 서양미술 대가의 초대형 회고전이자, 마르크 샤갈의 한국 전시로는 국내 전시사상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번 전시회에는 세계 유명미술관에 소장된 샤갈의 주요 작품 120여 점이 소개된다.



규격 100호에서 200호에 달하는 대형 유화들과 국내에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역사적인 작품들이 포함돼 주목을 끈다.

이중 최고 가격의 전시작은 러시아 트레티아코프 소장 작품인 ‘도시 위에서(1914-1918)’로, 그림 한 점의 가격이 약 110억원에 이르며, 전시작에 대한 보험 액수만 해도 약 1천2백억 원에 달하는 규모다.


샤갈의 삶과 예술의 일대기 한 눈에 … 7개 주제로 전시 구성

 

 

 

 

 

▲위의 이미지는 웹 검색에서.

 

 

◎엄마와 딸의 감성 비교

 

 

지난 일요일 오후 3시 쯤,  샤갈 전을 보러갔다.

먼저 본 딸아이는 너무 좋다고 엄마랑 다시 간다더니...못이기는채 주말인데도 따라 나섰다.

아휴,,,인파,

미술감상을 하기엔...좀 심했다.

원래 미술관이란 그림 앞에서 한참을 쉬면서도 볼 수 있게끔..의자도 멀찍이 두어두는데...

인산인해...남의 뒤통수 너머로 무슨 그림을 감상한단 말인가?

익히 아는 그림들이 반가이 걸려있었다.

 

초입에는 그의 생애를 반증하는 사진 방이었다.

 

여러 전시실로 나뉘어 그림도 분류했었는데...

 

유대인이기도 한 샤갈,

그의 성서이야기는 아주 색다른 맛의 신앙을 접목시켜준다.

칼라로 표현한 다윗 그리고...예언가  이사야....

그의 '성서 이야기'에  시선을 갖대대보라... 나치의 압박 속에서도 그가 추구하는 성서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전성시대를 구현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행복해지려면 샤갈을 만나보라고...

정말 환타지한 컬러 감각이다. 스테인드글래스를 하기 전부터도 그의 색채감이라든가 상상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동료들의 그림에 제목 붙여주기를 좋아하던 샤갈....

그는 예술가로서 한 세기를 풍미하다 갔고... 그런 대로 살아생전 명성을 얻고...

아름다운 아내와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한 듯...

샤갈은 부인과...늘 행복에 쌓여 둥실 둥실 떠 있는 꿈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왜 아니랴?

샤갈은 분명 행복했었나보다.

그의 일생을 나타낸 사진전에서도 그의  행복한 일생을 읽을 수 있었다.

행복한 예술가의 혼이 깃든 붓!!! ...어찌...일필휘지가 아니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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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샤갈의 젊은 시절 딸,과 함께(이다? 그의  아내 이름인지...딸 이름인지 헷갈림)/ 딸아이가 이런 모습의 헤어스타일을 즐겼는지...자세히 보면 그림속에는 모두 (도시속에서등등) 단발머리의 여인과 하늘을 난다.  전시장에서는 그림촬영은 금지돼 있는데도 샤갈의 그림의 이해를 한 발 더 가까이 하기 위한 자료로 급히 찍다.  등 뒤로 맞은 편 그림이 묻어나다./단발머리 모습의 딸을 모델로 기용한.....나의 생각/이 요조

 

 

 


딸아이는 무덤덤한 엄마의 심드렁함이 두번째로 다시 찾은 저마저 감흥이 나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지난 번 8강 때? 오페라 유령을 보고도 마음은 온통 축구에 쏠리든....

그 엄마에게 다신 엄마랑 재미없어 함께 아니 온다더니... ㅎㅎ

딸아, 엄마는 욕심이 너무 많아 그렇단다.

실은 배가 슬슬 아파왔거든....

서울시청에서 36억원을 지원해주었다는데...한국화단에다 지원 좀 해주믄 안되나?

이 많은 관람료가 대체 얼마냐?

...^%$##@#*~~

 

감상하는 내내 서글픈 생각이 회오리쳤다.

우리의 화가 이중섭이...해변 가의 아이들의 나체, 아이들 고추 묘사 한 것을 트집삼아 풍기문란을 빌미로 전시 허락이 취소된, 해서  전시회를 포기해야 했던...

우리네의,  한 발이 아니라...한 세기나  뒤늦은  아둔한 예술의식~

종내는 천재를 죽음으로 밖에 몰수 없었던... 세상의 무지함

 

샤갈은?

이중섭보다 샤갈은 한 세대를 앞섰지만...

맘껏...나부를 그대로 아름답게 드러내고..나신의 남녀 포옹..등등을 보며

난 왜 난데없이 그시절...불운했던 우리의 천재화가 이중섭과 비교를 하는 걸까?

 

시대를...세상을 잘못 만난 두 화가를 마음 속으로 비교하는데,

가슴은 시려도  눈은 ...화려한 칼라에 매료되어,

몇 몇 그림 앞에서 정말 살아나는 몽환의 색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샤갈의 예술의 뿌리는 행복에서 기인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잔잔한 행복이 전이되어 옴을 느낄 수 있다.

정말인지...한 번 달려가 보시라~~

 

아주 낯익은 그림 앞에선...발이 떨어지려 않고,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상상가.....몽상가...꿈...등을

자유자재로 그린....  詩같은 그림들,

 

그는 운 좋은 현실에 머무르다간  자유로운 행운의 예술가였다.

 

한마디로 참으로

 

 [부럽다]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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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을  이상스레 끌어당기는 '꿈'이란 제하의 그림

하도 멍히 있으려니 눈치 빠른 딸이 가까이 다가와서 소근거린다.

"엄마..이 그림 사드려요?"     '"그래라..나도 그러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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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딸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흐~~ 알믄 난, 주금인데...)

 

 

 

샤갈의 그림을 도록으로 보고 평하였다면 지금당장 그 도록을 덮고 시립미술관으로 향하라
김종인2004.07.30 17:31 1

<베르시 강둑>, 샤갈, 1953
캔버스에 유화, 64 x 93.2 cm
베른, 개인 소장

Quai de Bercy, 1953
Huile sur toile, 64 x 93.2 cm
Collection privee, Berne


나는 대부분의 그림을
도록으로 보는걸 더 좋아한다.

다른사람의 잡음 및
줄서서 관람하며 밀려 가기는 일절없고
그림보호차원의 제한간격이나 가끔 엄한 조명의 방해로 인해
그 그림의 제 맛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여러가지 장애요소들이
도록을 펼치는 순간
한꺼번에 사라지고
거기에는 그림과 나만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겐 샤갈의 도록도 있다..
어찌어찌하다보니..생겼다
좋아서 구입한건 아닌듯 하다..
어..이것도 있었네..하고 새삼 신기해 했었으니..

솔직히 말하건데
샤갈의 도록은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허나
이번 전시회는 도록이 원본보다 대부분 낫지 않냐는
어눌하고 편협한 나같은 인간들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가격한다..

감히 단언컨대` 샤갈의 전시회는 진정한 예술이다..
샤갈의 작품을 논하지는 않겠다..
전시회..정말..제대로 기획했다..

샤갈이 이렇게 멋진 그림을 만들어낸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사진이나 카피본에서는 흉내가 불가능한
색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
그 작품 앞에 서면
온갖 색깔들이 춤을 추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수 있다는 사실..
전시회에서 체험해보지 않으면 절. 대. 로. 모를것이다..
제대로 된 작품으로 제대로 된 전시회를 기획해준..

누구냐..하튼..그분들에게 박수를..

그리고 진정한 색채의 마술가 샤갈에게 경의를..!!



===========================================(아래글은 펌)=====

소설가 함정임 '샤갈전'을 보고
[한국일보 2004-07-19]

"관념 뛰어넘는 아름다움 꿈과 사랑 잃어버린 이여
샤갈의 화폭에 빠져보라"

한 쌍의 젊은 연인이 도시 위를 흰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다.
남자의 초록셔츠와 여자의 검은 단발 머리,
시인처럼 허공에 뜬 남자의 긴 발,
남자의팔에 안겨 날개처럼 하늘을 젓는 여인의 긴 팔.
연인의 자유로운 유영(遊泳)아래 도시는 숨죽인 듯 고요하다
(‘도시 위에서’).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한 여인이 순백의 전라(全裸)로 등을 돌린 채
마을 위에 모로 길게 누워있다.
여인은 가슴에 간직한 비밀(사랑)이 새나갈까 봐
턱과 두 팔을 옹송그려 제 가슴을 꼭 감싸 안고 있다.
돌아누운 여인의 눈부신 누드 아래 마을은 바야흐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비프테스크의 누드’).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샤갈이 왔다. 꿈의 연금술사,
아니 꿈의 전도사, 눈을 뜬 채 꿈을 꾸게 만드는 샤갈이 왔다 길래,
먹구름 비바람 속을 뚫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사람들은 지붕 위를 걸어 다니고, 바이올린 주자의 얼굴은 초록,
뺨을 맞댄 연인의 얼굴은 파랑, 길이든 문이든 벽이든 탑이든
염소와 양과 수탉들이 숨바꼭질하고,
나무와 집들은 물구나무선 채 둥둥 떠다닌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뒤흔들어놓은 듯한,
눈에 보이지 않는 초현실을 현실인 양 불러내놓은 듯한
샤갈의 그림들은 이상하게,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그것들을 이상하다고 보지않고 오히려 아름답다고,
신비롭다고 감탄한다.

‘샤갈이니까’‘그래야 샤갈이지’ 라며
샤갈에 관한 한 서로 잘 통한다는 듯이 맞장구까지 친다.

그 샤갈, 우리들의 샤갈이 서울에 왔다. 색의 발견자,
아니 색의 마술사,눈을 감아도 온통 색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샤갈이, 이번에 정말, 제대로왔다.

80년에 걸친 샤갈 작품의 회고전 형식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작가에게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평생 몇 번 만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도 강조해야겠다.

유대계 러시아 청년 모이세이 사하로비치가 파리에 도착한 직후
마르크 샤갈로 이름을 바꾸고 그린 1910년대 작품부터,
러시아 혁명기와 베를린 체류기와 미국 망명생활을 거쳐
남프랑스 지중해 마을 생 폴 드 방스에 정착해 그린
1980년대 작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모스크바 유대인극장을 장식한‘문학’‘음악’‘무용’‘연극’ 연작이
눈에 띈다. 이번 회고전의 특별한 선물 중 하나다.

사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유서 깊은 정동 길을 걸어
빗방울 흩뿌리는시립미술관 마당의 포석을 밟을 때까지 그래,
폴 베를렌의 시구절처럼, 익숙한 꿈, 자주 보는 꿈인 양,
약간의 기이함, 그것도 익숙한 기이함을 위안처럼
샤갈에게 기대했었다.

그런데 유리 회전문을 통과해 마주친 샤갈은
이전의 익숙한 꿈을 멋지게 배반하며 전혀 낯설게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2층과 3층 여섯개의 홀로이어지는 120여점의 작품들을
두 차례나 돌아보고도 차마 돌아서 나오지못했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들을 순례하며 산발적으로 만났던 샤갈,
도록이나 샤갈 평전을 통해 만났던 샤갈,
그것으로 굳건히 샤갈이라는 고정된 성채를
내멋대로 관념에 심어버렸던 것이 실수처럼 반성이 되었다.
유리 회전문을 돌아 나오자
먹구름은 미술관 하늘을 조금 벗어나 있었고,
광장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미술관 옆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며
샤갈에게 가는 마음, 가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을 흐뭇하게 되뇌었다.
놀랍게도, 꿈을 꾸어본 지 오래된 사람,
아니 도무지 꿈을 꾸기가 쉽지 않은 사람,
그래서 언젠가부터 꿈의 불구자가 되어버린 사람은
샤갈에게 갈것을 권한다.

또한 사랑을 어찌 해야 할지 삶의 가장 난해한 과제로 안고있는
그 사람도 샤갈에게 갈 것을 권한다.
꿈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이있다면, 그것은 샤갈의 화폭이다.
지독한 혼란의 끝에서도 다시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힘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샤갈의 연인들이다.

누가 샤갈을 만나고도 사랑을, 삶을 두려워하랴.
아,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샤갈에게 갈 때는 그동안의 샤갈은 깨끗이 잊으라는 것!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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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등? 아무튼 미술교과서에 나온 아주 낯익은 그림. 

 

※삽화작품도 꽤나 있었습니다.

 



Liszt : Oh! Quand Je Dors "오, 꿈에 오소서" (T.Dokshitser) 04. Liszt : Oh! Quand Je Dors "오, 꿈에 오소서" (T.Dokshitser)

 





    마르크 샤갈 1887~1985


    샤갈(marc chagall)은 비테브스크의 도시 벨로러시안의 유태인 거주지에서
    가난한 대가족의 일곱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어 염장 공장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는 가사일을 돌보았다.
    학교시절부터 어린 소년 샤갈은 드로잉에서 뚜렷한 재능을 보였다.
    형상의 창조를 금지하는 유태교에 거슬러 그는 19세의 나이에
    지역 화가 예유다 펜의 공장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사진 작업실에서 수정하는 일을 하였다.
    2년 후 샤갈은 성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로 생계를 꾸리게 되기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힘겨운 생활을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미술 학교에서 학생 시기를 보낸 후 그는
    러시아 발레단에서 소도구와 의상을 디자인하는 명성 높은 디자이너
    레온 박스트에게 소개되어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스트는 곧 이 젊은 화가의 창조적인 개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샤갈에 대해 "나의 가르침을 경청한 후 그는 파스텔 연필을 집어들어
    내가 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했다"라고 말했다.





비테브스크를 넘어서


    파리인 아방가르드

    파리에 거주하는 샤갈의 한 보헤미안 동료는
    샤갈을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애칭은 어떤 관점에서 이 예술가가 후일 비평가나 미술사가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함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가-시인으로서의 샤갈의 정체는 앙드레 브르통이 그를 현대 회화에
    '변형'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조형 예술의 위대한 천재로 규정한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 난다.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상징과 민속적인 이야기에 애정을 지닌 샤갈은
    이러한 주제들을 회화에 끌어들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주제를 거부하는
    가장 급진적인 전위 미술가들에 의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적인 정신과 문화적인 해석이란 두 특징은 그 어느 것도
    샤갈 작품의 완전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작품은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부분적으로 서유럽 미술 전통과 다른
    문화적 전통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Paris


    예술의 변형

    샤갈은 전위 예술의 서정 시인이었으며. 매우 추상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의미에 디자이너이자 뛰어난 무대 장치가였으며.
    신전. 오페라 하우스, 강당, 미술관 등 거대한 규모의
    서구 건축물의 벽화나 천장화를 그린 화가였다.
    그는 또한 모자이크와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과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화가-시인, 화가-음악가, 화가-디자이너, 화가-무대 장치가로서 샤갈은
    언제나 예술의 원칙들을 통합하고자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변형'(metamorphosis)의 화가였다.
    그는 많은 전위 미술가들처럼 각각의 예술의 유형들을
    변화, 중첩함으로써 장르, 색, 형태들을 변형하였다.




나와 마을


    변용

    초현실주의자들은 변용(transmutations)을
    그들의 기본적인 모티프의 하나로 포용했다.
    그들에게서 리얼리티란 끝없이 흐르고 사리지는 것들,
    경험과 이미지의 연속이었다.
    샤갈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항상 가깝게 지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그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는 파리의 전위 그룹을 처음 대할 때부터 이미 변형의 관점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그는 먼저 색채의 사실주의적인 사용과 주제의 진실성에 의존할 것을 거부한
    야수주의자들의 색채 해방을 이해했다.
    야수주의의 시각에서 얼굴은 노란색일 수 있고, 소는 빨간색이나 푸른색일 수 있다.
    더 극단적으로 색들은 대상들의 경계를 무시하고
    각각 별도의 독자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샤갈은 또한 입체주의의 혁명적인 방식인 삼차원 공간을 파괴하고
    그것을 시간과 기억의 영역에서 시각적으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샤갈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하늘과 땅 또는 전경과 원경의 관계가 자주 전도되는
    변용의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수평적 구조과 서 있는 인물들의 수직적 구조는
    그의 공간 논리술에서 인물들은 겹쳐지고 대기를 뚫고 높이 솟아오르며,
    머리들은 몸통에서부터 분리되고 팔다리가 나뉘어 떨어지며, 의상은 조각이 난다.





The Fiddler


    문화의 근원

    샤갈은 전통에 대하여 깊은 사랑과 관심을 지녔지만,
    그러나 항상 단순한 중재자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오히려 이전의 경험과 문화적 기억에 대한 해석자였다.
    게다가 전위적인 새로움을 수용하는 그의 능력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처음 전위 미술을 경험했을 때 그것의 분석적인 접근 방식,
    즉 문화적인 배경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제로의 상태에서 새롭게 출발하려는
    과학적인 정신의 틀을 거부했다.
    그가 비터브스크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서
    말레비치나 리시츠키와 충돌했던 점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샤갈은 그가 태어난 나라의 상징주의적 전통을 거듭 재확인했다.
    그는 그의 민족이 보유한 위대한 신비에 전위적인 예술적 자유를 투사하고자 했으며
    동부 유럽의 유태 문화 전통을 보편적인 시각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열렬히 수용하였으나,
    우상 숭배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에 의해 다소 완화된 감각으로써였다.
    "내가 천사의 날개를 그릴 때. 그것은 동시에 불꽃이고 생각이며 또는 욕망이다...
    형상 자체에 대한 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나를 개별적인상징들로서가 아니라, 형태와 색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판단하라...
    하나의 상징은 출발점이 아니라 귀착점이어야 한다."
    현실을 일련의 변화로 재해석하는 것은 샤갈의 형태와 주제에 확실히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것은 놀랄 만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문화적 예술적 전통들에 대한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직후 샤갈은
    "프롤레타리아 화가는
    그 자신과 자신의 재능이 사회에 속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안다"고 말했다.
    그가 비록 후에 러시아를 떠났고 그곳에서 큰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결코 이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샤갈이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의 형식적 자기 몰입을 거부하고
    자신의 문화적 근원과 종교적 배경을 재확인한 것은,
    흔히 말해지는 회피나 '신비주의'로의 피신이 아니라
    그의 주변 세계를 포용하는 것이었다.





To Russia, Asses and Others



    미술, 사랑, 그리고 의식

    샤갈이 세계를 포용하는 것은 여러 층으로 표명됐다.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은 물리적으로 나타났다.
    즉 그의 손과 재료와의 상호 연관과, 두터운 임파스토(두껍게 칠하기)를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매체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장식성을 고려한 창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번째로 그것은 개인적이었다.
    그가 사랑에 대하여 끊임없이 언급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 동물,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보편적인 변형 에너지의 근원으로 삼은 방식은 매우 독자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서커스, 극장, 공공 기도와 같이
    대중들과 함께 하는 행사들을 찬양한 점에서 그것은 공공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주변 세계를 감싸안고자 하는 샤갈의 열망은, 항상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그를 20세기 미술가 중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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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그림 상단이 잘려버린... 최근 작이라.. 감시가 무척 심했던... 이궁,

아랫그림은 웹에서 흐르는 것을 줏어왔습니다. 좋군요. 편하고...

 

 

, 샤갈 (1887~1985)

 

 

 

 

 

 

 

 


 

   

     


    .

    ◇ 2004년 9월1일 고양시 덕양 [어울림누리] 미술관개관 전시 /변시지 선생님과


     

     

     

     

    많이 쇠잔해지셨습니다.
    먼젓번 보다 ... 
    뭔가 늘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이 번 가을에 서귀포가면 뵈어야지 했었는데...
    누군가 제 방명록에다 선생님의 전시회를 알려왔습니다.
     "나는 꼼퓨타 몰라요"  하신 선생님이 하실 리는 만무하고.... 
      
    9월 1일「덕양어울림누리」개관기념특별전으로 '변시지, 마음의 풍경'전이란 전시를 개최하는군요.
    참고하시길....
    우성 변시지 폭풍의화가/홈페이지 http://www.artgy.or.kr/"


    고양, 덕양구에 [어울림 누리]라는 미술관 개관식에 기관장급이하 손님들이

    대거 운집 성황리에 막을 올렸습니다.

     

    저도 함께 가지는 광고를 내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겠다]

    라는 전제를 달았더니....

    그 무슨 일이  예기치 않게 생긴 고로 정말 경황없이 나갔더랬지요.

     

    국립 군산대 교수, 이건용님의 차분하고도 진지한 말씀 도중에 들어갔습니다.

    동영상 실에 사람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늦게 온 죄로 자리도 없어 맨 앞에 가쁜 숨을 고르며

    화면 가득 펼쳐진 선생님의 그림에 넋을 잃다가 그만... 슬라이드가 끝나고

    황토색..부드러운 밝음이 사라지자 이내 제 정신으로 돌아온 순간...

    중요한 사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니,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숙연해서도 카메라를 꺼낼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습니다.


    .


    이래서 뭔 기록을 남기겠다고...원,

    참, 전시실엔 미공개작이 많은 고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저는 강의 끝난 후 잠깐 들어 갈 한적한 시간에 두어 컷 찍을 수가..)

     

     

    변시지 선생님의 좀은 초췌해지신 모습을 보니...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전, 작은 蘭 분하나 챙겨갔었는데...너무 작아 선지...

    제일 앞에 나와있었습니다.

    '이그 부끄러라~~'

     

    "선생님~~ 건강하세요"

    "가을에...서귀포 기당 미술관으로 찾아가 뵙겠습니다.

     


    미술관/찾아오시는 길/지도/교통편


    http://www.artgy.or.kr/help/map01_01.asp"



     

    변시지선생님
    ▲ 지난 봄,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만나 뵌 선생님!

    ▼어제 9월1일 경망 중에 전시회에 참석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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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9월 1일(수) ~ 2004년 10월 15일(금)
    45일간
    덕양어울림누리 어울림미술관 제 1, 2 전시장


    어울림대극장의 면막작가이기도 한 우성(于城)
    변시지(邊時志)선생의 작품으로 여는 어울림미술관
    개관전은 미공개 최근작(1990~2004) 30여점과
    시기별 주요작(1960~2004) 20여점 및 유럽기행
    스케치와 화첩을 통해서 보는 작가의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세계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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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던(함께 관람하자고 했던)

    한 분이 오셨습니다. 도록도 한 부씩 챙겼습니다.

     

    그리고

    년 전에 사업차  인연으로 지인이 된 분이 고양으로 발령 나 계셨습니다.

    그 곳에 오셨더군요.(기관장으로 참석)

    해서 잠깐 동행인과  사무실에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다음 번개모임은
    일년에 춘추로 두번 개관하는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미술역사를 보여주는 아주 쟁쟁한...미술관입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일시는 10월 중순경에 잡겠습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성북동 성신여대 하차.

    성북2동에 위치한
    '머리가 맑아지는 전통차'와 '가슴이 뜨거워지는 술' 이 있는....
    <수연산방>, 월북작가 [이태준]님의
    그림자 아름다운 한옥, 생가 거기에는
    그 차와 그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
     
     
    설원당님
    일전에 표가 있다고 함께 가자시던
    아쉽게도 기회를 놓치고
    딸은 갔다와서는 색채가 정말 살아있다고
    너무 좋아하며 엄마랑 스케쥴 잡는다더니...
    바쁜지..그 후론 아무런 말이 없고
    색채의 마술사[샤갈전]을 갔으면도 싶고...
    (10월15일 전시 종료)
    차후 미술관
    번개에도 많은 참석 바랍니다.
     

     

     music:허준 ost/산

     

     

    9월 1일「덕양어울림누리」개관기념특별전으로 '변시지, 마음의 풍경'전이란 전시를 개최하는군요. 참고하시길.... http://www.artgy.or.kr/

     

     

    변시지 선생님, 왕팬이면서도 모르고 있는 제게 누군가  8월 중순경에

    방명록에다 남기신 글입니다./감사합니다.(네임에 클릭이 되질 않아서요)

     

    내일은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고양으로 갑니다. 

    이 글 읽으시는 분들...아무나 친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양, 덕양어울림누리라는 미술관이 내일 개관한다는군요.

    개관식은 오후7시.

     

    아마도 내일 오후 마당은 볼거리가 아주 많을 것 같습니다.

    방금, 변선생님께 전화드리고 확인했습니다.

    내일 오후2시 40분에 [변시지님의 그림에 대한 강의]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강의하실 선생님...존함은 잊었습니다.

    오후5:00시에 전시회open에 변시지화백님도 뵐 수 있다고 합니다.

    고양 가까운 곳에 계신 분들께서는 많은 참여 바랍니다.

    저는 2시40분 강의를 들으러 갈 예정입니다. 이요조/016-382-1919

     

    미술관/찾아오시는길/지도/교통편

    http://www.artgy.or.kr/help/map01_01.asp

     

     

     

    2004년 9월 1일(수) ~ 2004년 10월 15일(금)
    45일간
    덕양어울림누리 어울림미술관 제 1, 2 전시장


    어울림대극장의 면막작가이기도 한 우성(于城)
    변시지(邊時志)선생의 작품으로 여는 어울림미술관
    개관전은 미공개 최근작(1990~2004) 30여점과
    시기별 주요작(1960~2004) 20여점 및 유럽기행
    스케치와 화첩을 통해서 보는 작가의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세계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485

     

     

    1.

    낮에서 밤으로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 버린다.

     

    194

     

     

    2.

    고독한 무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192

     

     

    3.

    평일도 나혼자

    앞문을 열어 봐도 주인이 없고
    뒷문을 열어 봐도 주인이 없어

    선착장에 한참 서 있다 돌아와서
    또 그런 식으로
    앞문을 열어 봐도 사람이 없고
    뒷문을 열어 봐도 사람이 없어

    선착장에 한참 서 있다 돌아와서
    또 그런 식으로
    이 섬도 이 방도 나 혼자
    그저 실컷 나 혼자

    앞문을 열어 봐도
    뒷문을 열어 봐도

    그저 나 혼자
    실컷 나 혼자

     

     

    374

     

     

    4.

    취한 사람은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397

     

     

    5.

    여유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있게 산다.

     

     

     

     

     

      
     


    검은바다

     


     

    소년

     


     

    정오의 고독

     


     

    황소

     

     


     

     

     

    그림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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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색조를 좋아하고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흐가 마지막 머물렀던 곳, 프랑스  ‘오베흐-쉬흐-와즈’ 에서 사 온(선물받은)

    머리 핀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귀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에게 머리 핀~하면 당연 블란서製가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버렸지만.... 

     

    '고흐'의 침실이 그려져 있는 붉은 색조의 머리핀은 소중하게 여기는 액서서리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는 광선으로 흠집이 난 듯 보이지만...아무리 내 굴려도 흠하나 나지 않는

    늘..갓 사온 듯한  반짝 반짝 윤이 나는 헤어-핀, 

    그 하나에도 고흐의 침실 그림을 넣어서 만든....그래서 작은 시골임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연일 끊이질 않는다 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멋을 파는 ....그 안목에...나는 도취한다.

    고흐의 침실 그림이 있는 핀을...가끔 꺼내어 머리를 빙빙돌려 핀으로 꽂으면....

    붉은 색조가 있어 헤어-핀 하나로도 나는 충분히 호사스럽다............../이 요조

     

     
     

    .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에 그린 <<고흐의 방>>입니다.
    동생에게 자기의 방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방이 휴식의 장소이고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요양원생활을 할때도 이방을 몇번이나 다시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침대옆에 벽에는 그림 두점, 방문도 두개, 침대에 베개도 두개, 빨간이불,,,
    방에 안정감을 주려고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늘 떠돌이 생활을 했던
    나무바닥과 파랑에 연보라빛이 나는 벽,



      고흐는 폴 고갱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갱의 정렬과 해박한 지식들은 고흐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몽마르뜨의 생활을 접고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고갱에 대한 수없이 많은 구원을 합니다.
    아름다운 아를에 와서 같이 살자고.
     
      결국 고갱은 고흐와 3개월 남짓 함께 살지만,
    고흐의 광기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고흐가 귀를 자른 건 이맘 때 쯤이었나 봅니다.
     위의 그림은 고흐가 고갱을 초대하기 전, 고갱의 마음을 사기 위해 집을 예쁘게 단장하던 무렵
    자신의 침실을 그린 것입니다. 사선의 구도는 역시 불안정하고, 오른쪽의 파란 색 문은
    고흐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불안감을 내포하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8년은 아를르에 와서 고갱이 함께 생활하며 제작 활동을 하던 해였습니다.
    공동 생활은 이윽고 정신병의 발작, 귀를 자르는 사건등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지만,
    그런 것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고흐에게는 기대에 부푼 나날이었습니다.

    침실 그림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새로 실내 장식을 하기 위해
    침실을 데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침실 데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평탄한 면을 만들면서 두텁게 칠한 붓을 크게 움직여갈 뿐...
    나는 이들 여러 가지 색으로 여기에 절대적인 평화를 표현하고 싶다.]

    점묘나 선묘를 억제한 평평한 칠의 시도, 이것은 같은 해 여름에 그려진 <아를르의 햇볕>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고흐에게는 저적으로 실험적인 것입니다.
    침실 그림은 그 후에도 고흐의 마음을 끈 것 같습니다.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도 침실의 그림을 두 장 더 그렸다 합니다. .........../검색참조

     

     
       

    고흐의 마지막 생가와 무덤.

    Aubers-sur-Oise

     

    파리의 북쪽으로 한시간 거리의 ‘오베흐-쉬흐-와즈’ 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는 곳이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 더욱 사랑 받고 있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오베흐-쉬흐-와즈'. 이곳은 천재화가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며, 많은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 오베흐의 계단 >, < 오베흐의 골목길 > 등도 한번쯤 거닐며 100년 전 마을 주변의 보리밭과 시청, 교회 등 '고흐'의 그림 속에 나타난 ‘오베흐-쉬흐-와즈’의 풍경을 떠올리며 천재 화가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30세에 이르러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로방스' 지역의 '아를르'로 옮기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흐'에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모티브를 준 반면 점점 심해지는 광기로 인해 자신의 귀를 면도날로 자르는 광기를 보이게 된다.

     

     

     

    그 후 '고흐'는,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보호자 였던 동생 '테오' 의 권유로 '오베흐'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고흐'는 신경과 전문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가셰' 박사의 보살핌으로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고, 이 기간동안 70 여 점의 작품을 남긴다.
    < 오베흐의 교회 >, < 오베흐의 길과 계단 >, < 가셰의 초상 >, < 까마귀 나는 밀밭 >, < 최후의 자화상 >같은 많은 유명 작품들이 이곳 '오베흐'를 배경으로 탄생하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림도구를 챙겨 마을을 나서서, 저녁이면 동생 '테오' 에게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를 편지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고흐'는 자신의 천재적인 정신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1890년 5월 20일 정착하여 70일 후인 7월 27일 자살을 하게 된다.

     

    오베흐 교회 Eglise de l`Assomption

     

    '고흐'의 유명한 그림인 '오베흐의 교회'의 모델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그림과 똑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루이 6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드-모리앤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기도실로 이용되었고, 이중 경사를 갖는 사각형 종탑의 지붕 모습이 독특하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뒤엉킨 '고흐'의 그림과는 달리 엄숙한 분위기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는, 작품의 대상으로의 역할만을 충실히 끝내고, '고흐'의 느낌이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조용히 서있다.

     

    '고흐'의 집 Auberge Ravoux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이자 카페인 ‘고흐 기념박물관'으로 개조된 여인숙에서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고흐'의 초라하고 외로운 방을 볼 수 있는데, 작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가 있을 뿐이다. 1890년 5월 20일 ‘라부 여인숙 Auberge Ravoux’에 도착한 '고흐'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활발한 작업으로 70 여일 의 생의 마지막 기간 동안에 무려 70 여 점의 유화와 수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화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좁은 지붕 아래 작은방에는 침대와 작은 책상, 의자밖에 없어서 당시 화가의 쓸쓸한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고흐'는 그린 그림을 침대 밑에 보관하였단다.
    식당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며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자!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산책

     

    묘지에서 좀더 언덕을 오르면 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흐'가 왜 이 밀밭을 자신의 화폭에 담게 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흰색, 분홍색, 보라 빛으로 어우러진 푸른 하늘 아래에, 감자꽂이 드문 드문 피어있고, 갈아 부친 땅과 함께 온화한 연보라 빛과 아주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녹색의, 바다처럼 넓은 구릉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 초원에 저는 완전히 빨려 들어 갔습니다." 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고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생 ‘테오’ 에게 "극도의 고독함과 슬픔을 표현하는데 구속 당하지 않으면서, 혼란스러운 하늘아래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그리고 있다." 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테오’는 1890년 7월 27일 미완성의 답장에서 "그래서 무었을 원하는지요?" 라고 '고흐'에게 묻고 있다. 바로 그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고 신음한다.

     

    묘지 Cimetiere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도 바로 죽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이틀이나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숨을 거둘 수 있었던 불운 했던 화가가 안식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언제나 '고흐'의 열렬한 팬이면서,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동생 '테오' 가 형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는지 6개월 간의 정신질환을 앓고 사망하여 네덜란드에 묻히었다가, 1914년 '테오'의 미망인 ‘요안나’의 뜻으로,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고 담쟁이 넝쿨이 이들의 불멸의 우애를 상징하는 듯이 무덤을 덮고 있다.


    ‘슬픔은 끝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내용출처 : 알고가자 프랑스 http:www.algogaj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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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적으로 생각해 보는 우리의 미술관 관광객 유치~~
    우리의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곳, 제주 서귀포 그의 미술관에서 나는 폭풍우의 화가
    '변 시지' 님을 황망히 찾아가느라 언뜻 본 기억으론

    이중섭님의 '아이들' 그림을 드로잉, 판화로  해서 넣은 수공예품을 좀 호가로 판매하고 있었다.

     

    막연히 아무나 스스럼없이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가격과 사용도에 한해,

    작은 물건이지만 큰 느낌으로..예술인들의  긍지를 느끼게 해 줄,,,,,,

     우리 화가들을  기리고...그에 따른 문화산업들,...문화 관광객 유치,

    진정 기념이 될 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소품들은 진정..요원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은 혼자만의 생각일까?............./이 요조

     

     

    ☆2004년 8월 어느 무더운 날, 자월도에서 드뎌....내 손을 벗어나다.

    선물로 흔쾌히....

    무겁고, 검고, 윤기나는 머리위에 붉은 핀이 어울릴 것 같아서

    내 머칼은 이제..이 핀을 감당하기엔...탄력도 힘도....빛깔도 잃었버렸으므로,

    참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기분으로....

     

    집으로 오는 船上에서 그녀의 머리에 꽃힌 핀을 보았다.

    부.럽.다.

     

     

     


     

     




    Sojiro / 사랑의 숲



    결국 그 헤어핀은 8월 31일 블로그 모모양에게 전달되다.


     

    기당미술관

     

                    폭풍의바다1

     

    폭풍의바다2

    폭풍의바다3

    폭풍의바다4

    폭풍의바다5

    폭풍의바다6

    폭풍의바다7

    폭풍의바다8

    폭풍의바다9

    폭풍의바다10

    폭풍의바다11

    폭풍의바다12

    폭풍의바다13

    폭풍의바다14

     

    출처:http://www.kcaf.or.kr/art500/byunshiji

     

     

     

    자연 종교 인간

    ...질식 속의 명상

     

     

     
    변시지선생님


    님의 시선 끝간데는 어드메쯤일까? 그의 눈빛은 만남 내내 젖어 있었다./조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변시지님의 나그네라는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의 자화상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조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있게 산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혼자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그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에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또 기다리는 사람!..........이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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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제주도의 바람과, 말과, 바다를 주제로 그리는 변시지 화백..

    따스한 귤빛의 그림 한구석 때론 말과 함께, 때론 혼자인 사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간과 바다에 대한 슬픈 시름과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일단은 여기저기서 무조건 옮겨왔습니다.

    그의 그림을 사랑하여 그림을 읽는 작은 소리, 호흡 하나라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제 느낌은 따로 장을 마련 해야겠습니다.

    주신 책도 아직 채 못 읽어봤거든요.

    그 느낌 그대로....또 전파시키기 위해서,

    재밌는 것은 나이를 고하간에 다들 님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변시지님의 홈페이URL/이 요조

    http://www.kcaf.or.kr/art500/byunshiji/

     

     

     

     

     

    처음엔 이름이 눈에 띄어서 알게된 분입니다..(왠지 반말이 안되네요;)

    향년 75세의 원로 화가라고나 할까요...엄청나 십니다..

    그림에서 세월이 느껴진다고 할까요-_-

    그냥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네요...ㅜ_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폭풍의 바다(5)

    제주바다(3)

    무제

     

    저..정말 대!대단하십니다!

     

     

     


    /byunshij

     

    [이중섭!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화가 이중섭, 시대와 끝내 不和했던 천재"

    평생지기 한묵 화백, 눈물의 회고강연




    친구 이중섭과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원로화가 한묵씨



    지난18일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가 열린 제주도 서귀포시 KAL호텔.
    백발의 노화가가 강단에 올라섰다. 생전의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일본 유학시절부터 함께하며
    평생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한묵(89) 화백이었다.
    30분간 이어진 화단 원로의 강연은 생전의 이중섭에 대한 상투적인 회고가 아니었다.
    시대와 불화(不和)했던 외로운 천재의 예술혼을 기리는 절절한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가면서
    노(老) 화백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일부 청중들도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은 전설의 화가로 추앙받는 이중섭 화백이지만 살아 생전 그의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묵 화백은 회고했다. 북에서는 ‘인민의 적’이라고 공격 받았고 남에서는 ‘풍기문란’이란 이유로
    그림이 철거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이중섭은 멋진 외모에 솔직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화백은 “중섭이가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건방지게 굴면 때려주기도 했죠.
    여름에 원산 해수욕장에서 팬티 바람으로 서 있을 때 보면 중섭이 체격이 얼마나 근사했다고요.”
    일제 말기, 한 화백은 금강산 온정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원산에 살던 이중섭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중섭이는 골치 아픈 일만 있으면 휙 하고 금강산으로 달려오곤 했습니다.”

    한 화백은 이중섭의 예술적 좌절도 곁에서 지켜봤다. “광복 후 당시 예술동맹에서 중섭이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이들이 중섭이 그림을 보고 대뜸 ‘인민의 적’이라는 거예요.
    소가 싸우고 닭이 싸우는 듯한 그림이 인민에게 공포심을 준다나요. 내용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섭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의 병은 근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했을 겁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 화백은 이중섭의 월남 배경을 짐작했다. “이중섭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지 않았나 싶어요. 북에서는 전시하려고 하면 당 문화부 심사를 받아야 했어니까요.
    그림을 전부 이데올로기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심사할 때 ‘왜 빨간 꽃이 적냐’는 식으로 트집 잡곤 했지요.”

    그렇다고 이중섭이 남에서 예술적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피란 시절 한 화백은 이중섭과
    부산 남포동에서 ‘콩쥐팥쥐’ 오페라 무대장치를 맡았는데 이때 이중섭의 유명한 ‘은종이 그림’이
    탄생했다고 한다. “극단장이 가끔 우리에게 담배를 주곤 했는데 중섭이가 어느 날 변소에서 일 보다가
    옆에 굴러다니던 꼬부라진 못으로 담뱃갑 은종이에 그림을 그려봤답니다.

    이후 우리가 피우던 담뱃갑도 전부 달라고 해서 열심히 그렸지요.”
    이중섭은 은종이 위에다 주로 아이들을 그렸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가족들과 장난치는 내용인데
    이게 또 문제가 됐어요. 서울서 은종이 그림을 전시하는데 ‘왜 이리 나체가 많냐’ ‘풍기문란이다’
    라는 비난을 받고 그림이 강제 철거당했어요. 중섭이에게는 쇼크였지요.” 한 화백은 이어 “중섭이가
    일본 여자와 산다고 눈총도 많이 받았다”며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을 많이도 퍼마셨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대구에 머무르던 이중섭을 시인 구상이 서울로 데려왔다. “깜짝 놀랐어요, 그 잘생겼던 중섭이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하고요. 통 먹질 않고 사람도 몰라보는 거예요.” 거식증에 걸린 것이었다.
    한 화백은 친구들과 의논해 이중섭을 당시 육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어느 환자를 꽁꽁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거예요.
    중섭이도 저런 학대 받는 것 아닌가 싶어 다른 병원으로 옮겼어요. 거기서는 전기 찜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묵 화백은 이중섭이 거식증에 시달리며 투병 생활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때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던 이중섭은 다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어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화장하고 나니 중섭이는 없어지고 뼈다귀만 남았어요. 그 가루를 반은 처가 있는 일본에 보내고
    반은 망우리 묘지에 묻은 뒤 친구들과 비석을 세워줬습니다.”

     

     

     





    "이중섭 [1916.4.10~1956.9.6]"







    담배를 피우는 이중섭의 모습
     

    이중섭 생가

    서귀포, 그가 머물렀던 제주 생가 마루에 설치된 이중섭 부조(relief )

     
     
     이중섭, 이요조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서 만난 이중섭 미술관,
    또 그 속에서 만난 폭풍우의 화가 '변시지'선생님
    그 분의 그림을 소개하기에 너무 늦었다.
     
    그분의 서울, 돈암동? 개인 미술관도 찾아 보기로 하였는데,
    자제분의 관리..전화번호등이 적힌 명함과 책도 두 권이나 받아왔는데도
    어려운 숙제처럼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한다.
     
    ⑥ 이중섭 편에서는 무식쟁이 이요조의 이중섭님 그림을 보고 느낀,
    에필로그로 종지부 찍으려 했었는데...
     
    변시지님의 그림으로 빨리 옮겨가기위해
    ⑥ 이중섭은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
     
     
    아래 여백은 그 마지막 글을 넣기 위해 남겨 두어야겠다.
    언젠가 쓰고 싶을 때,
     
    다시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의 그림의 감동이 우러나올 때 
    다시 쓰고자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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