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ː가―대소(呵呵大笑)
[명사][하다형 자동사] 껄껄거리며 한바탕 크게
웃음.
- 가가호호(家家戶戶)
Ⅰ [명사] 집집. 한 집 한 집.
Ⅱ[부사] 집집마다.
¶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다.
- 가담―항설(街談巷說)
[명사] ☞가담(街談).
- 가ː렴―주구(苛斂誅求)
[명사] 조세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백성을 못살게 들볶음.
- 가서―만금(家書萬金)
[명사] [가서(家書)는 만금의 값어치가 있다는 뜻으로] 집에서 온 편지의 반갑고 소중함을 이르는
말.
- 가ː인―박명(佳人薄命)
[―방―][명사] 아름다운 여자는 수명이 짧음. [소식(蘇軾)의 ‘박명가인시(薄命佳人詩)’에서 유래함.]
미인박명.
- 가ː정맹어호(苛政猛於虎)
[명사]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뜻으로] ‘혹독한 정치의 폐가 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예기(禮記)’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임.]
- 각고―면려(刻苦勉勵)
[―꼬멸―][명사][하다형 자동사] 고생을 무릅쓰고 열심히
노력함.
- 각골―난망(刻骨難忘)
[―꼴란―][명사][하다형 타동사] (입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뼈에 깊이 사무치어 결코 잊히지 아니함.
¶ 그동안
보살펴 주신 은혜는 실로 각골난망입니다.
- 각골―명심(刻骨銘心)
[―꼴―][명사][하다형 타동사]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겨)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음.
가가대소(呵呵大笑) 껄껄 크게 소리내어 웃음.
가가호호(家家戶戶) 집집마다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함.
가기이기방(可欺以其方) 그럴 듯한 말로써 남을 속일 수 있음.
가담항설(街談巷設) 세상의 풍문. 길거리의 화제.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에 세간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다만 사면에 벽만이 둘려
있을
뿐이라는 뜻. 집안이 가난함을 비유한 말이다
가동가서(可東可西)
동쪽이라도 좋고 서쪽이라도 좋다.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다
가동주졸(街童走卒) 길거리에서 노는 철없는 아이. 하류배.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 같은 것을 가혹하게 받고 물건을 강제로 청구하여 백성을
못
살게 구는 일.
가롱성진(假弄成眞) 처음에 실없이 한 말이 나중에 정말이 된다는 말. 농가성진.
가모수거(家母手鉅) 지어미 손 큰 것.
가무담석(家無擔石) 석(石)은 한 항아리, 담(擔)은 두 항아리라는 뜻으로 집에
모아
놓은
재산이 조금도 없음을 말한다.
가봉녀(加捧女) 전부(前夫)의 아들을 거느린 재가녀(再嫁女). 즉, 전 남편의
아들을
데리고
재혼한 여자를 말한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음.
가부지친(?莩之親) 촌수가 먼 인척.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집이 가난해지면 좋은 아내를 생각하게 된다. 궁핍한
지
경이
되면 훌륭한 관리자가 생각난다는 의미.
가서만금(家書萬金)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의 가치가 있다.
가인박명(佳人薄命) 여자의 용모가 너무 아름다우면 운명이
기구함.
《出典》'蘇軾'의 詩, 이 시의 작자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 데서 전하여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雙頰凝?髮抹漆眼光入廉珠的白樂
故將白練作仙衣不許紅膏汗天質
吳音嬌軟帶兒癡無限間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閉門春盡楊花落
이 시는 1086년부터 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서움.
苛:가혹할 가, 政:정사 정, 猛:사나울 맹, 於:어조사 어, 虎:범 호 [출전]
<禮記> <檀弓記>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주] 태산 :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오악(五嶽) 중 동악으로 중국 제일의 명산. 도교의 영지(靈地). 해발1335m. '於' : ① 어조사 어. '…에,
…에서, …보다' 등의 뜻을 나타냄. ② 탄식하는 소리 오. (예) '於乎(오호)'-감탄하는 소리. 가정(苛政) : 가혹한 정치, (동)
학정(虐政), (반) 관정(寬政). 가렴주구(苛斂誅求) :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음.
각고면려(刻苦勉勵) 모든 고생을 이겨 내며 부지런히 노력함.
각곡유목(刻鵠類鶩) 고니를 조각하다가 이루어내지 못하고 집오리가 되었다.
높은
뜻을
갖고 어떤 일을 성취하려다가 중도에 그쳐 다른 사람의
조소를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각골난망(刻骨難忘) 은덕을 입어 고마운 마음이 뼛속에까지 깊이 스며 잊혀지지
아니함.
각골명심(刻骨銘心) 마음에 깊이 새겨 둠.
각득기소(各得其所)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 원래 사람들이 자기
분
수에
맞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후에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적절한 배치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각색(脚色) 각본으로 만듦. 소설·설화·서사시 따위 문학 작품을 무대 상영이 나
영화
촬영을 위하여 희곡이나 시나리오로 고쳐 씀.
각자무치(角者無齒) 뿔이 있는 이는 이가 없다는 뜻임, 한 사람이 모든
복을
겸하지 못함 을 이룸.
각자위정(各自爲政)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전체와의 조화나
타
인과의
협력을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
각주구검(刻舟求劍) 사리에 어둡고 융통성이 없음. 《出典》'呂氏春秋' 戰國時代,
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楚人 有涉江者 其劍 自舟中 墜於水 遽刻其舟 曰『是 吾劍之所從墜』舟止 從其所刻者
入水求之 舟己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己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兎)
각축(角逐) 서로 이기려고 다툼.
간난신고(艱難辛苦) 몹시 고되고 어려움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친하게 사귐. 《出典》韓愈의
'柳
子厚墓誌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 字는 '退之')와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운동을 제창한 문우(文友)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墓誌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 둣하지만 일단 털끝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유사어]피간담(披肝膽)
간두지세(竿頭之勢) 대나무 가지 꼭대기에 서 있게 된 형세. 어려움이 극도에
달
하여
아주 위태로운 상황을 말한다.
간세지재(間世之材) 썩 뛰어난 인물
간어제초(間於齊楚) 주(周)나라 말기에 작은 제후국인 勝나라가 좀 큰 축에 드는
齊나라와
楚나라 사이에 위치해서 괴로움을 겪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말. 약자가 강자 사이에 끼어서 괴로움을 받는다는
뜻
으로
쓰인다.
간장막야(干將莫耶) 명검도 사람의 손이 가야 빛나듯 사람도 교육해서
선도해야
한다.
간특(姦慝) 간사하고 능갈침
갈이천정(渴而穿井) 목이 말라야 비로소 우물을 팜.
감불생심(敢不生心)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함
감언이설(甘言利說)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남을 꾐.
감지덕지(感之德之)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몹시 고맙게 여기는 말, 또는
그렇게
여길만한
일.
감탄고토(甘呑苦吐) 사리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 지 않으면 싫어함.
갑남을녀(甲男乙女)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善男善女=匹夫匹婦=張三李
四=愚夫愚婦=樵童汲婦)
강구연월(康衢煙月) 태평한 세상의 평화스러운 풍경.
강근지친(强近之親) 도와 줄만한 가까운 친척
강시(?屍) 얼어 죽은 송장
강노지말(강弩之末) 센 놋쇠로 쏜 화살도 먼 데까지 다 가면 힘이 다해서
노(魯)나
라에서
나는 얇은 명주도 뚫을 수 없다는 문맥에서
유래.(强
弩之末,
力不能入魯縞). 강대한 힘일지라도 최후의
쇠약해짐
에는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강한 군사도 원정을 가면
군력이
쇠퇴하기 마련이다.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陣圖) 중에
있는
말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강목수생(剛木水生)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 어려운 사람에게 없는 것을
내라고
억지를 부리며 강요하는 것을 비유한다.
강호연파(江湖煙波)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뽀얗게 이는 잔
물결
개과천선(改過遷善)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
개관사정(蓋棺事定) 사람이 죽고 관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개권유익(開卷有益) 책을 펴서 읽으면 반드시 이로움이 있다. '개권(開卷)'은
책을
펴서
읽는 것을 말한다.
개문납적(開門納賊) 문을 열고 도적에게 바친다. 스스로 재화(災禍)를 끌어
들이는
것을
말함. (=開門而揖盜)
개문이읍도(開門而揖盜) 문을 열고 절까지 해가며 도둑을 맞이 한다. 스스로
재
화(災禍)를
자초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말한다.
개선광정(改善匡正) 좋도록 고치고 바로잡음
개옥개행(改玉改行) 차고 다닐 옥의 종류를 바꾸면 걸음 걸이도 바꾸어야 한다.
법을
변경하면 일도 고쳐야 한다는 뜻.
거기부정(擧棋不定) 바둑을 두는데 포석(布石)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뜻. 사물을 명확한 방침이나 계획을
갖지
않고
대함을 의미한다.
개찬(改竄) 글을 고쳐 바로 잡음
거두절미(去頭截尾) 사실의 줄거리만 말하고 부수적인 것을 빼어 버림.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흐림, 곧,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음
거수마룡(車水馬龍) 거마의 왕래가 흐르는 물이나 길게 늘어진 용처럼 끊임없이
많은
것을 형용한다. 즉, 행렬이 성대한 모양을 말한다.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에 있어서는 앞으로 닥칠 위태로움을 생각함
거안제미(擧案齊眉)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다. 《出典》'後漢書'의 逸民傳 집은
가
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縣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皐白通)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日
欲得賢如梁伯?者鴻聞而聘之 字之日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春 每歸 妻爲具食不敢於鴻 前仰視 擧案齊眉.
거이기양이체(居移氣養移體)
처한 위치에 따라 기상이 달라지고 먹고 입는
것에
의해 몸이 달라진다.
거자불추래자불거(去者不追來者不据)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물리치지
않는다.
거자일소(去者日疎) 서로 떨어져 있으면 점점 소원해짐.(죽은 사람을 )
거재두량(車載斗量) 차에 싣고 말로 헤아림, 곧, 아주 많음. 또는 썩 많아서
귀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
건곤일척(乾坤一擲) 마지막 운명을 걸고 승부를 다투는 것. 운명이 매우
어려운
고비에 당해 있음을 가리키기도 함 《出典》韓愈의 詩 '過鴻溝'
이 말은, 당나라의 大文章家인 한유가 河南省 內의 鴻溝를 지나다가 그 옛날(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乾坤一擲'을 촉구한 張良 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 <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용은 지치고, 호랑이는
피곤하여 이 강을 가르니, 억만 창생들은 성명(性命)이 있다. 누가 군왕을 권하여 말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진정 한 번 던짐을 이루어
건곤(乾坤)을 건다. <과홍구(過鴻溝)> 中에서 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 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
항우가 齊 趙
梁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田榮) 진여(陳餘) 팽월(彭越)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弑害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 대군을 휘몰아 팽성(彭城)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敵)의 수중에
남겨둔 채 겨우 목숨만 살아 하남성 內의 형양(滎陽)으로 패주했다. 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漢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사오나, 楚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楚나라를 멸하려는 천의(天意)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養虎遺患]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였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韓信) 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安徽城 내의 垓下에서 楚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四面楚歌' 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안휘성 내의
烏江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걸아득금(乞兒得錦) 분수 밖에 생긴 일을 지나치게 자랑함. 거지 아이가
비단을
얻음
걸견폐요(桀犬吠堯) 개는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 폭군 걸왕(桀王)의 개도
성
왕(聖王)
요(堯)임금을 보면 짓는다. 웃사람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아랫 사람을 진심과 믿음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은
자기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는 것을 이름
걸해골(乞骸骨) 자신의 몸이나 해치지 말고 돌아가게 해달라
乞:빌 걸, 骸:뼈 해, 骨:뼈 골 [준말]걸해(乞骸). [원말]원사해골(願賜骸骨).
[동의어]걸신(乞身). [참조]건곤일척(乾坤一擲). [출전]《史記》〈項羽本記〉,《子春秋》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늙은 재상(宰相)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임금에게 그만두기를 주청(奏請)함을 이루는 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쫓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고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유방은 지난해(B.C. 203) 항우가 반란을 일으킨 팽월(彭越)ㅗ전영(田榮) 등을 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서주(徐州)]을 공략했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하남성(河南省) 내]로 도망쳤다. 그러나 수개월 후
군량(軍糧) 수송로까지 끊겨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자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항우는 응할 생각이었으나 아부(亞父: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란 뜻) 범증(范增)이 반대하는 바람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유방의 참모 진평(陳平)은 간첩을 풀어 초나라 진중(陣中)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범증이 항우 몰래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고.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은밀히 유방과 강화의 사신을 보냈다. 진평은 항우를
섬기다가 유방의 신하가 된 사람인 만큼 누구보다도 항우를 잘 안다. 그래서 성급하고도 단순한 항우의 성격을 겨냥한 이간책은 멋지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진평은 장량(張良) 등 여러 중신(重臣)과 함께 정중히 사신을 맞이하고 이렇게 물었다. "아부(범증을 지칭)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나는 초패왕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요." 사신은 불쾌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초왕의 사신이라고? 난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면서 잘 차린 음식을 소찬(素饌)으로 바꾸게 한 뒤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범증은 크게 노했다. "천하의 대세는 결정된 것과 같사오니,
전하 스스로 처리하시오소서. 신은 이제 '해골을 빌어[乞骸骨]' 초야에 묻힐까 하나이다."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등창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주] 소찬(素饌) : ① 고기나
생선이 들어가지 아니한 반찬. ② 남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의 겸양의 말. 등창[背瘡] : 한의학에서, 등에 나는 큰 부스럼을 일컫는 말.
검려지기(黔驢之技) 黔州(검주)는 나귀가 없는 땅이라 어떤 사람이 나귀를 그
곳에
가져다
야산에 풀어놨는데 호랑이가 보고 대단히
무서워했다.
호랑이가
두려워하며 나귀 주위를 이리저리 배회했는데,
나귀가 뒷발로
호랑이를 찼다. 호랑이는 나귀의 재주가 그것
뿐인
것을 알고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버렸다는 고사. 즉,
별볼일
없는 기량을 뽐내는 것을 말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하게 하고 넓힌다. 《出
典》'大學'
八條目四書의 하나인《大學》은 유교의 교의(敎義)를 간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서 그 내용은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으로 요약된다.
팔조목(八條目) 중 여섯 조목에 대해서는《大學》에 해설이 나와 있으나
'격물'과 '치지' 의 두 조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없다. 그래서 宋代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나와 유교 사상의 근본
문제 중의 하나로 논쟁의 표적이 되어 왔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宋나라 주자(朱子 : 朱憙, 1130-1200)의 설과 明나라
왕양명(王陽明 : 王守仁, 1472-1528)의 설을 들 수 있다.
① 朱子의 說 : 萬物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理)' 를 갖추고 있다. '이(理)'를 하나하나 궁구(窮究)해 나가면 어느 땐가는 활연(豁然)히 만물의 겉과 속, 그리고
세밀함(精)과 거침(粗)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② 왕양명(王陽明)의 說 : 격물(格物)의 '物'이란 사(事)이다. '事'란 어버이를
섬긴다든가 임금을 섬긴다든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 곧 뜻이 있는 곳을 말한다. '事'라고 한 이상에는 거기에 마음이 있고, 마음 밖에는 '物'도
없고 '理'도 없다. 그러므로 격물의 '格'이란 '바로 잡는다'라고 읽어야 하며 '事'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格物'이다. 악을
떠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양지(良知)를 명확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지(知)를 이루는(致) 것이며,
'致知'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 많은 변화가 있어 다른 세대인 것처럼 느끼게 됨을 비유하는
말
격탁양청(激濁揚淸) 탁류를 몰아내고 청파를 끌어 들임. 惡을 미워하고 善을
좋
아함.
격화소양(隔靴搔榻) 애는 쓰되 정통을 찌르지 못하여 안타까움. 신 신고 발바닥
긁기
격화파양(隔靴爬痒)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이 일의 효과를
내긴
했어도 만족감을 얻기 어려움.
견강부회(牽强附會) 억지로 말을 끌어붙여 자기가 주장하는 조건에 맞도록 함.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그것이 의리에 맞는가 어떤가를 먼저
생각해야
함.
견마지로(犬馬之勞) 자기의 노력을 낮추어 일컫는 말.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
하는
노력
견마지성(犬馬之誠) 임금이나 나라에 정성으로 바치는 정성. 자기의 정성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견마지양(犬馬之養) 개나 말을 기를 때에도 먹이기는 한다. 부모를 모시는 데
먹는
것이나
돌보고 만다면 개와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부모를
소홀히 대접하고 공경하지 않음을 뜻함.
견문발검(見蚊拔劍) 대단치 않은 일에 쓸데없이 크게 노하는 소인을 일컫는 말.
견물생심(見物生心) 실물을 보면 욕심이 생김.
견벽청야(堅壁淸野) 견벽은 성벽을 견고히 지키는 것. 청야는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함을 말한다.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수단이다.
견선여갈(見善如渴) 착한 일을 보기를 마치 목마른 것같이
하라
견선종지(見善從之) 착한 일이나 착한 사람을 보면 그것을
따르라.
견설고골(犬齧枯骨) 개가 말라빠진 뼈를 핥음. 아무 맛도 없는 것을
뜻한다.
견아상제(犬牙相制)
개의 어금니가 서로 맞지 않는 것. 국경선이 볼록 나오고
오목
들어가
서로 견제하려는 형세를 말한다.
견여금석(堅如金石) 서로 맺은 맹세가 금석과 같이 굳음.
견위수명(見危授命) 나라의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싸움.
견위치명(見危致命) 위태로운 상황을 만나면 목숨을 바친다.
견원지간(犬猿之間) 사이가 매우 나쁜 관계.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견인불발(堅忍不拔) 굳게 참고 견디어 뜻을 딴 데로 옮기지 않음.
견토방구(見兎放狗) 토끼를 발견한 후에 사냥개를 풀어도 늦지 않는다. 일이
일어
남을
기다린 후에 대처해도 좋다는 뜻.
견토지쟁(犬兎之爭)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 곧 ① 양자의 다툼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利)를 봄에 비유. 횡재(橫財)함의
비유.
②
쓸데없는 다툼의 비유.犬:개 견, 兎:토끼 토, 之:갈 지(…의), 爭:다툴 쟁. [동의어]전부지공(田父之功). 방휼지쟁(蚌鷸之爭).
어부지리(漁父之利).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출전]《戰國策》〈齊策〉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重用)된 순우곤(淳于?)은 원래 해학(諧謔)과 변론의 뛰어난 세객(說客)이었다. 제나라 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로(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名犬)이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를
뒤쫓았사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돈 다음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바람에 개도 토끼도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나이다. 이 때 그것을 발견한 '전부(田父 : 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田父之功]'을 하였나이다. 지금 제나라와 위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하는 바람에 군사도 백성도 지치고 쇠약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온데 서쪽의 진(秦)나라나 남쪽의 초(楚)나라가 이를 기화로
'전부지공'을 거두려 하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위나라를 칠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다. [주] '之' ① 갈 지. 가다, 향하다. 예) '之東之西(지동지서)'-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함. 곧 마음을 질정(質定 : 갈피를
잡고 헤아려서 작정함)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는 뜻. ② …의. 주격ㅗ소유격을 나타내는 접속사. 예) '人之常情(인지상정)'-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통 인정. ③ 이 지. 지시 대명사로 쓰임[是(시)와 같은 뜻]. 예) '論之(논지)'-이것을 따져서 말함. 세객 : 교묘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각처를 유세(遊說)하고 다니는 사람. 제국(諸國)의 군주(君主)가 저마다 패자(覇者)를 지향하며 패도정치(覇道政治)를 펼쳤던
전국 시대(戰國時代)에는 책사(策士)ㅗ모사(謀士) 또는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세객이 많았음.
결자해지(結者解之) 처음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 그 일을 끝맺어야 함.
결초보은(結草報恩)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出典》'春秋左氏傳
춘추시대
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改嫁시키도록
하여라."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顆)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케 해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顆)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改嫁시켜 드렸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이 晉나라를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魏顆)는 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秦의 大力士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넘어지게 하여 위과(魏顆)가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改嫁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候治兵于稷 以略秋士 立黎侯而還 及洛魏顆敗 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初魏武子有擘妾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 以亢杜回 杜回足質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겸인지용(兼人之勇) 혼자서 몇 사람을 당해 낼 만한 용기.
겸제(箝制) 자유를 억누름
경거망동(輕擧妄動) 경솔하고 망령된 행동.
경국제세(經國濟世) 국사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함.
경국지색(傾國之色) 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용모가 빼어난 미인.(傾城之美) 《出
典》'漢書'
李夫人傳 '傾國'이 '傾城'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傾國이란 말은 李白의 [名花傾國兩相歡]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왕은
색(色)을 중히 여겨 傾國을 생각한다.]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妻子를 변설로써 찾아준 후공(侯公)을 漢高祖가 [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경궁지조(驚弓之鳥) 화살에 놀란 새. 있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것을
가리
킨다.
경이원지(敬而遠之)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
경원(敬遠)
존경은
하면서도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는 말.
[출전]《論語》〈雍也篇(옹야편)〉 敬:공경할 경. 遠:멀리할 원.
[원말]경이원지(敬而遠之). [참조]자불어(子不語). 존경하되 멀리함.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않음. 춘추 시대의 성인 공자(孔子)에게
어느 날, 조금 어리석은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知)란 무엇입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고 '혼령(魂靈)이나 신(神)에 대해서는 존경하되 멀리한다면[敬 神而遠之]' 이것을 지(知)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에 실려 있는 글이다. 또 〈술이편(述而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공자는 괴(怪)난(亂)신(神)을 말하지
않았다. [子不語 怪力亂神(자불어 괴력란신)] 즉, 공자가 괴이(怪異)폭력(暴力)문란(紊亂)귀신(鬼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괴'와 '신' 이하는 초월자(超越者)에게는 따를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知)인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주] '존경하되 멀리한다.'는 이 '경원'이란 말이 오늘날에는 '꺼리어 피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
경당문노(耕當問奴) 일은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 옳음.
경산조수(耕山釣水) 산에 가 밭을 갈고 물에 가 낚시질을 함.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해 한 가로운 생활을 함.
경이원지(敬而遠之)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 실제는 꺼리어 멀리함.
경인자인항경지(敬人者人恒敬之)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늘
그를
공경해준다.
경조부박(輕燼浮薄) 말과 행동이 가볍고 무게가 없음.
경죽서난( 竹書難) 고대(古代)엔 대나무가 종이 역할을 했다. 초(楚)나라와
월(越
)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대나무 잎을 사용해 그 나쁜
행실을
기록하는데,
악행이 너무 많아 다 쓰기 어렵다는 뜻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들석거리게 한다.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한다는
말.
경천위지(經天緯地)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림.
경화수월(鏡花水月) ①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② 볼 수만
있고 가질 수
없는
것
계구우후(鷄口牛後)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말.
[출전]《史記》〈蘇秦列傳〉 [원말] 영위계 구
물위우후
(寧爲?口勿爲牛後).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 곧 큰 집단의 말석보다는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말. 전국시대 중엽, 동주(東周)의 도읍
낙양(洛陽)에 소진(蘇秦: ?∼B.C.317)이란 종횡가(縱橫家:모사)가 있었다. 그는 합종책(合縱策)으로 입신할 뜻을 품고,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동진(東進) 정책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6국을 순방하던 중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을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나라는 지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병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차제에 6국이 남북, 즉 세로[縱]로 손을 잡는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책을 막고 국토를 보존하시오소서.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寧爲鷄口]쇠꼬리는 되지 말라[勿爲牛後]'는 옛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혜왕은 소진의 합종설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6국의
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소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정치가가 되었다. [주] 종횡가 :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제국(諸國)의
군주(君主)들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정책을 유세(遊說)하여 그들 여러 나라를 종(縱)ㅗ횡(橫)으로 묶어서 경륜(經綸)하려던
외교가(外交家)책사(策士)모사(謀士)의 총칭. 합종책을 설(說)한 소진과, 소진이 피살된(B.C.317) 후 합종책을 깨기 위한
연횡책(蓮衡策)을 펴 성공한 장의(張儀)가 그 대표로 꼽힘.
계군일학(鷄群一鶴) [원말]계군일학(鷄群一鶴)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동의어]군계일학(群鷄一鶴). 계군고학(鷄群孤鶴). [출전]《晉書》〈?紹傳〉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
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紹:?∼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천거했다. "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缺)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월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 "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鷄群一鶴]'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계란유골(鷄卵有骨) 늘 일이 안 되는 사람이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났으나
역시
잘 안 됨.
계륵(鷄肋) '닭의 갈비'라는 뜻으로, '자기에게 별로 요긴한 것은 아니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사물'을 일컫는 말. <後漢書>,몸이 몹시 약함의 비유.《出典》'後漢書' 楊修傳 삼국 정립 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 유비(劉備)가 익주(益州)를 점령하고 한중(漢中)을 평정한
다음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兵站은
제갈량(諸葛亮)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데 반하여 조조는 兵站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하고 거기에다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 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修)가 듣고 長安으로 귀환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겠소?(修獨曰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라고 답했다. 양수는 죽임을 당했다.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조조는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한중에서 후퇴하고, 그곳을 확보한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위(魏)나라는 촉한(蜀漢)과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後漢書》楊修傳에 실려
있으며, 오늘날 <닭의 갈비[鷄肋]>는 그다지 쓸모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는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
진(晉:西晉,
265∼316)나라 초기에 죽림 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취하여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은 점잖게 말했다. "보다시피 '닭갈비[鷄肋]'처럼 빈약한 몸이라서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는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계명구도(鷄鳴拘盜) 얕고 비겁한 지혜로 물건을 훔치거나 남을 속임. 《出典》'史記'
孟嘗君列傳
전국시대 중엽, 齊나라 孟嘗君은 왕족으로 재상을 지낸 정곽군(靖郭君)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靖郭君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薛)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렸다. 이 무렵(B.C
298), 맹상군은 대국(大國)인 秦나라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3,000명의 식객(食客)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호백구(狐白?)를
예물로 진상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정작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寵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맹상군을 수행한 식객 중 도둑질에 능한 특기를 가진 '구도'란 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궁중으로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涵谷關)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동행한 식객 중에 소리 흉내내기에 특기가 있는 '계명'이 인가(人家) 쪽으로 사라지자 이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문을 나와 말[馬]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한다. [주] 호백구 :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을 여러 장
모아 이어서 만든 갖옷. 귀족ㅗ고관 대작(高官大爵)만이 입을 수 있었던 데서 귀족의 상징 물이 되기도 했다고 함. 호구(狐?)라고도
일컬음.
계명구폐상문(鷄鳴狗吠相聞) 닭 울음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땅이
활짝
트여있고, 이웃 지방이 잘 보이고 인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뜻.
계포일낙(季布一諾) 한 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고고지성(呱呱之聲) 아기가 세상에 출산하면서 처음 우는 소리.
고굉지신(股肱之臣) 임금이 팔다리와 같이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
고군분투(孤軍奮鬪) 도움이 없고 수가 적은 군사가 대적과 용감하게 잘 싸움.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잘 해냄.
고금독보(古今獨步) 고금을 통하여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음.
고두사죄(叩頭謝罪) 머리를 조아려 사죄함
고량진미(膏粱珍味)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고려의 공사는 고작해야 3일 밖에 가지 못한다는
말
(世宗實錄) 고려 때 공사는 사흘마다 바뀐다.
시작하는
일이 오래 가지 못 함.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데가 없음.
고립무의(孤立無依)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음.
고목사회(枯木死灰) 형체는 마른 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아무 생각이 없음. 사람의 無爲無心함을
비유
한다.
고복격양(鼓腹擊壤) 의식(衣食)이 풍부하고 안락하여 태평 세월을 즐기는 일. 《出
典》'十八史略'
樂府詩集 擊壤歌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堯)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민정(民情)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立我烝民(입아증민)]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莫匪爾極(막비이극)]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不識不知(불식부지)]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順帝之則(순제지칙)]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鼓腹]'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日出而作 日入而息(일출이작 일입이식)]
밭을 갈아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耕田而食
鑿井而飮(경전이식 착정이음)]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帝力何有于我哉(제력하유우아제)]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주] 격양 : 나무로 만든 신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 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擊] 맞추는 놀이라는 설과 '흙으로 만든 악기를 타는 일'이라는 설도 있음. 【동의어】격양지가(擊壤之歌),
격양가(擊壤歌)
고분지통(鼓盆之痛) 아내가 죽은 슬픔.
고성낙일(孤城落日)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사정이나 형편. 《出典》唐나라
王維의
詩 이 詩는 왕유(王維:699-759)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인 <送韋評事-위평사를 보냄>에서 읊은 것이다.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蕭關)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欲逐將軍取右賢沙場走馬向居延
遙知漢使蕭關外愁見孤城落日邊
이 詩에서는 직접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음이 안 놓이는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孤城落日]이 불려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요새(要塞)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그곳에서 겪을 안타까운 처지를 상상하여, 그 처지를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요새(要塞) 밖에서의 안타까움을 '孤城'과 '落日'이라는 사물에 집약시킨
왕유(王維)의 필치도 멋지지만, 이것을 홀로 쓸쓸하게 완전히 썩어버릴 일에 마음이 안 놓이는 것에다 연관지어 사용하는 후세 사람들의 말[言]
부리는 법도 또한 묘미가 있다.
고식지계(姑息之計) 일시적으로 편안하고자 생각해 낸 계책.
고신원루(孤臣寃淚)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
고신척영(孤身隻影) 외로운 몸과 그 몸의 그림자 하나뿐. 붙일 곳 없이 떠도는
외
로운
신세라는 뜻이다.
고왕독맥(孤往獨驀) 외로이 가고 홀로 달림.
고장난명(孤掌難鳴) 한쪽 손뼉은 울리지 못한다. 혼자서는 일을 이루기가 어려움.
맞서는
이가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아니함.
고좌우이언타(顧左右而言他) 좌우를 돌아보며 엉뚱한 말을 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
고침안면(高枕安眠)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다. 《出典》戰國策 魏策
/ '史記' 張儀列傳
전국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횡(連橫)을 주장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 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禍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哀王)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王)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이 끝나고 나면 즐거움이 옴. ↔ 흥진비래(興盡悲來)
고희(古稀) 일흔 살이나 일흔 살이 된 때.
곡돌사신(曲突徙薪) 화재(火災)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 즉, 화(禍)를
미연에
방지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 왜곡된 학문을 하여 세속의 인기를 끌고자 함. . 《出典》'史記'
儒林傳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유사어】어용학자(御用學者)
곤수유투(困獸猶鬪) 위급한 경우에느 짐승일지라도 적을 향해 싸우려 덤빔. 곧
궁
지에
빠지면 약한 자가 도리어 강한 자를 해칠 수 있다는 뜻.
골육상쟁(骨肉相爭) 동족끼리 서로 싸움의 비유.
공곡공음(空谷 音) 빈 골짜기의 발자욱 소리. 몹시 신기한 일, 뜻밖의 기쁨,
반가운
소식
등을 의미한다.
공리공론(空理空論)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이론.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김.
공수래공수거(空手來工手去) 세상에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
공중누각(空中樓閣) 사물의 기초가 견고하지 못함.(砂上樓閣) 《出典》'夢溪筆談'
송
나라의
학자 심괄(沈括:號-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遙見空際有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의 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이처럼 '空中樓閣'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海市'라는 것은 '신기루(蜃氣樓)'를 가리키는 말이다.
[史記]의 '천관서(天官書)'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기(蜃氣)는 누대(樓臺)를 본뜬다. 넓은 들판의 기운이 궁궐을 이룬다.
蜃氣象樓臺 廣野氣成宮闕. [유사어]과대망상(誇大妄想)
공하(恐?) 위협, 을러댐.
과공비례(過恭非禮)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가 아니다.
과대망상(誇大妄想) 사실보다 과장하여 지나치게 상상하는 망령된 생각.
과맥전대취(過麥田大醉) 밀 밭을 지나는데 밀로 만든 누룩을 생각하고 취하게
됨.
즉,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친 것은 도리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
[출전]《論語》〈先進扁〉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뜻. 어느 날 제자인
자공(子貢:B.C. 520∼456)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
자공이 다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 공자는 중용[中庸: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중정(中正)함]의 도(道)를 말했던 것이다. [주] 자공 :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위(衛)나라 출신으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정치에 뛰어난 후에 노(魯)나라ㅗ위(衛)나라의 재상을 역임함. 제자 중에서 제일 부자였으므로, 경제적으로 공자를
도왔다고 함. 자하 :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공문 십철의 한 사람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됨. 공문 중에서 후세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제자로, 공자가 산정(刪定)한 《시경(詩經)》《역경(易經)》《춘추(春秋)》를 전했다고 함.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그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이불개시위과의(過而不改是謂過矣)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을
'
잘못'이라
하는 것이다.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오이밭에서는 신발을 고쳐신지 마라.
남에게
의심받을 짓은 아예 하 지 말라는 뜻(李下不整冠)
[출전] 《列女傳》, 《文選》〈樂府篇〉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원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동의어] 과전리 이하관(瓜田履 李下冠), 이하관 과전리.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허물이 줄 알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과혁지시(?革之尸)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 《出典》'後漢書' 馬援傳 마원(馬援)은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맹장으로 다시 계속해서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환영인파 속에는 지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맹익(孟翼)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은
듯한 인사말을 하자 마원은,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이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일곱 군(郡)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戶)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가 자청하여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을 다같이 환송토록
명했다고 한다
관견(管見) 붓대롱 속으로 밖을 보는 좁은 소견.
관생(冠省) 문안 인사를 생략한다는 뜻으로, 편지 따위의 첫머리에 쓰는 말.(관략,
제례,
제번, 전략)
관중지천(管中之天) 대통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소견이 좁음을 이름.
(管中竅天)
관포지교(管鮑之交) 친구와 매우 다정하고 허물 없는 교제를 함. 《出典》'史記' 列子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 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 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
【유사어】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 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시도지교(市道之交)
괄목상대(刮目相對)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갑자기 향상됨을 일컫는 말. 《出典》'三國志' 吳志 呂蒙傳注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 : 182-252)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復吳下阿夢)'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주] 여몽 : 재상 노숙이 병사(病死)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 국세(國勢)를 신장하는데 힘썼음. 여몽은
촉(蜀) 땅을 차지하면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魏)나라의 조조(曺操)와 화해ㅗ제휴할 것을 진언, 성사시키고 기회를 노렸음.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가 중원(中原)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 때를 놓이지 않고 출격하여 관우의 여러 성(城)을 하나하나 공략(攻略)한 끝에 마침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오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명장으로 추앙을 받았음.
광일미구(曠日彌久)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낸다는 뜻.
[출전]《戰國策》〈趙策〉 전국 시대 말엽,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의
일이다.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은 혜문왕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3개 성읍(城邑)을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명장 전단(田單)의 파견을
요청했다. 전단은 일찍이 연나라의 침략군을 화우지계(火牛之計)로 격파한 명장인데 조나라의 요청에 따라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는 재상 평원군(平原君)에게 항의하고 나섰다. "아니, 조나라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제게 맡겨 주신다면 당장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평원군은 안 된다고 말했다. 구러자 조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원수간이긴 합니다만 전단은 타국인
조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한 조나라는 제나라의 패업(?業)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단은 조나라 군사를 장악한 채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낼 것입니다[曠日彌久].' 두 나라가 병력을 소모하여 피폐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평원군은 조사의 의견을
묵살한 채 미리 정한 방침대로 전단에게 조나라 군사를 맡겨 연나라 침공군과 대적케 했다. 결과는 조사가 예언한 대로 두 나라는 장기전에서 병력만
소모하고 말았다. [주] 화우지계 : 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 기름 바른 갈대 다발을 매단 다음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술.
광일지구(曠日持久) 세월을 헛되이 오랫동안 보낸다. 긴 세월을 보내고 나니
헛되이
세월만
지났다는 말로 쓰인다. 그냥, 긴 시간을 보냈다는
의
미로도
쓰임.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깨끗하고 맑고 고결한 인품이나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 《出典》'宋書' 周敦滯傳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滯 : 1017-1073)가 나와서《태극도설(太極圖說)》과《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滯)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앞에서 말한 뜻이거니와,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괘관(掛冠) 갓을 벗어 건다. 관직을 버리고 사퇴하다
괴여만리장성(怪汝萬里長城) 만리장성 같은 존재를 없애다.
교각살우(矯角殺牛) 소의 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임.
교병필패(驕兵必敗) 자기 군대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적에게 위엄을 보이려는
병
정은
적의 군대에게 반드시 패한다는 뜻.
교언영색(巧言令色)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과 아첨하는 눈빛. 《出典》'論語' 學而篇
공
자(孔子
: 이름은 '丘', B.C 551-479)는 아첨꾼에 대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에는 '인(仁)'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子路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仁)'에 가깝다.(剛毅木訥
近仁)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擁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文質彬彬
然後君子) 즉,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자라는 뜻이다. 【반의어】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참 조】눌언민행(訥言敏行)
교왕과직(矯枉過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정도에 지나치게 됨. 矯枉過正(교왕
과정)
교주고슬(膠柱鼓瑟) 고지식하여 변통성이 전혀 없음.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조
나라에
조사(趙奢)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括)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趙奢)는,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括)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膠柱]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大軍)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音]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교천언심(交淺言深)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데 심중의 말을 함부로 지껄임.
교칠지심(膠漆之心) 아교[膠]와 옻칠[漆]처럼 끈끈한 사귐이란 뜻으로, 아주
친
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교분(交分)을 이르는 말. 《出典》元微之 白氏文集
교칠지심(膠漆之心) 唐나라때 백낙천(白樂天)과 원미지(元微之)는 교서랑(校書郞)시절의 동료요, 천자(天子)가 친재(親裁)하여 등용하는 과거에
함께 급제했고, 詩의 혁신에도 뜻을 같이 해서 漢나라 시대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의 폐단인 백성들의 분노와 고통과 번뇌를 담은 악부(樂府)에
유교적인 민본사상을 맥박치게 하는 신악부(新樂府)를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람 다 시골로 좌천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니
그리워서 백낙천이 원미지에게 편지를 썼다.
"4월 10일 밤에 낙천은 아뢴다.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이미 3년이
지났네.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도 2년이 되려고 하네. 인생이란 길지 않은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니 말일세. 하물며
아교와 옻칠 같은 마음(況以膠漆之心)으로써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으니 말일세.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물러 서도 서로 잊을 수
없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어, 각자 흰머리가 되려고 하네. 미지여, 미지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실로 하늘이 하신 것이라면,
이것을 어찌하랴!" 四月 十日夜 樂天白 微之 微之 不見足下面 已三年矣 不得足下書 欲二年矣 人生幾何 離闊如此 況以膠漆之心 置於胡越之身 進不得相合
退不得相忘 牽?乖隔 各欲白首 微之 微之 如何 如何 天實爲之 謂之奈何.
교쾌(狡쾌) 간사하고 능갈침.
교토사이주구팽(狡兎死而走拘烹)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던 개를 삶는다는
뜻,
필요할 때 는 실컷 쓰다가 그 소용이
없어
지면
몰인정하게 내버리는 세상 인심.
교토삼굴(狡兎三窟) 슬기로운 토끼는 도망갈 구멍을 셋 파 놓는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은 모두 나의 학업을 증진시킴.
구곡간장(九曲肝腸) 굽이굽이 사무친 마음 속.
구미속초(狗尾續貂) 개꼬리로써 담비꼬리에 이음. 훌륭한 것의 뒤를 보잘
것없는
것이 이음. 벼슬을 마구 함부로 줌. 쓸만한 인격자가
없어
비열한
사람을 고관(高官)에 등용함을 비유.
구밀복검(口蜜腹劍) 입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지녔음.
겉으로는
친절하나 속으로는 남을 해치려 함.
《出典》新唐書 장량과 제갈량, 강태공 등이 좋은 방면의 모사(謀士)였다면, 당
현종(唐玄宗)때 재상을 19년 지낸 이임보(李林甫)는 나쁜 방면으로 그들과 맞먹는 모사였다. 간사하기로는 조조와 필적할 인물이나 조조는
대인(大人)에 속하지만 임보는 소인(小人) 가운데 소인(小人)이었다. 당나라를 뒤엎을 만한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를 두려워했다.《십팔사략(十八史略)》에 기록된 이임보의 평(評)을 보자.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蜜腹劍]'라고 말했다. 서재에 앉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다음은 반드시 주살(誅殺)이 있었으며 가끔 큰 옥사를 일으켰다.
태자로부터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재상 지위에 있던 19년 동안에 천하의 난리를 길러내었으나, 현종(玄宗)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안록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李林甫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 '口有蜜腹有劍' 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之亂 而上不悟 然綠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末
敢反. [유사어]소리장도(笑裏藏刀), 소중유검(笑中有劍)
구사일생(九死一生)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남.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남. 말과 행동이 유치함의 뜻.
구십춘광(九十春光) ① 노인의 마음이 청년같이 젋음을 이름 ② 봄의
석달
구십일
동안
구우일모(九牛一毛) 썩 많은 가운데 극히 적은 것. 司馬遷, <報任安書> 《出典》'漢書'
報任安書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
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 : 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 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유사어】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구이지학(口耳之學) 입과 귀로만 배움. 들은 풍월 격으로 아무런 연구성이 없는
천박한
학문을 말한다.
구인공휴일궤( 九 功虧一 )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될 곳에서, 손을 빼기
때문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한다.
구전문사(求田問舍) 부칠 논밭을 구하고 살 집을 물음, 곧 국가
대사에는
관심이
없고 일신 상의 이익에만 마음을 씀.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가르쳐 주고 마음으로 전함.
구절양장(九折羊腸) 길이 매우 꼬불꼬불하고 험함.
구화지문(口禍之門) 입이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 된다.
구화투신(救火投薪) 불을 끈답시고 땔나무를 던진다. 폐해(弊害)를 없애려고 한
행위가
폐해를 조장하게 되는 것을 비유.
국사무쌍(國士無梗) 둘도 없는 뛰어난 인물
[출전]《史記》〈淮陰侯列傳〉나라 안에 견줄 만한 자가 없는 인재라는 뜻으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한 한왕 원년(元年:B.C. 206)의 일이다. 당시
한군(漢軍)에는 한신(韓信)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초군(楚軍)에 속해 있었으나 아무리 군략(軍略)을 헌책(獻策)해도 받아 주지 않는
항우에게 실망하여 초군을 이탈, 한군에 투신한 자이다. 그 후 한신은 우연한 일로 재능을 인정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직책상 승상인 소하(蕭何)와도 자주 만났다. 그래서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 소하는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무렵, 고향을 멀리 떠나온 한군은 향수에 젖어 도망치는 장병이 날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 도망병 가운데는 한신도 끼어
있었다. 영재(英才)를 자부하는 그는 치속도위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자 황급히 말에 올라
그 뒤를 쫓았다. 그 광경을 본 장수가 소하도 도망가는 줄 알고 유방에게 고했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듯이 낙담한 유방은 노여움 또한 컸다.
그러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노한 얼굴로 도망친 이유를 물었다. "승상(丞相)이란 자가 도망을 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오?" "도망친 것이 아니오라, 도망친 자를 잡으러 갔던 것이옵니다." "그래, 누구를?" "한신이옵니다." "뭐, 한신? 이제까지
열 명이 넘는 장군이 도망쳤지만, 경은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뒤쫓은 적이 있소?" "이제까지 도망친 제장(諸將) 따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사오나,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이 파촉(巴蜀)의 땅만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한신이란 인물은 필요
없사옵니다. 하오나 동방으로 진출해서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이 소망이시라면 한신을 제쳐놓고는 함께 군략을 도모할 인물이 없는 줄로 아나이다."
"물론, 과인은 천하 통일이 소망이오." "하오면 한신을 활용하시오소서." "짐은 한신이란 인물을 모르지만 경이 그토록 천거하니 경을 위해 그를
장군으로 기용하겠소." "그 정도로는 활용하실 수 없사옵니다." "그러면 대장군에 임명하겠소." 이리하여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다. 즉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유사어]동량지기(棟梁之器)
국척( ) 겁이 많아 어떻게 할 줄 모른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가 망해 국민은 흩어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만
남았다.
군계일학(群鷄一鶴) 변변치 못한 여럿 중에서 홀로 뛰어난 사람. 《出典》'晉書' ?紹傳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혜강(?康)의 아들로 혜소(?紹)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 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에게 상주(常住)하였다.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秘書郞)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紹)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동의어】계군일학(鷄群一鶴)
군맹무상(群盲撫象) 군맹평상(群盲評象).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진다는
뜻.
곧 ① 범인(凡人)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의 비유. ② 범인의 좁은 식견의 비유.
[출전]《涅槃經(열반경)》 인도의 경면왕(鏡面王)이 어느 날 맹인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끌어오게 한 다음 소경들에게 만져 보라고 했다.
얼마 후 경면왕은 소경들에게 물었다. "이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느냐?" 그러자 소경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알았나이다."
"그럼, 어디 한 사람씩 말해 보아라." 소경들의 대답은 각기 자기가 만져 본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달랐다. "무와 같사옵니다." (상아)
"키와 같나이다." (귀) "돌과 같사옵니다." (머리) "절굿공 같사옵니다." (코) "널빤지와 같사옵니다." (다리) "독과 같사옵니다."
(배) "새끼줄과 같사옵니다." (꼬리)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비유한 것이고, 소경들은 밝지 못한 모든
중생(衆生)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들이 석가모니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모든 중생들에게는 각기
석가모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웅할거(軍雄割據) 여러 영웅이 각지에 자리잡고 서로 세력을 다툼.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군자삼락(君子三樂) 군자의 세 가지 낙. 첫째,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출전]《孟子》〈盡心篇〉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B.C. 372?∼289?)는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澤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한편 공자는 《논어(論語)》〈계시편(季시篇)〉에서 '손해 되는
세가지 좋아함[損者三樂(손자삼요)]'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교락(驕樂:방자함을 즐김), 일락(逸樂:놀기를 즐김), 연락(宴樂:주색을 즐김).
[유사어] 익자삼요(益者三樂) [반의어] 손자삼요(損者三樂)
군자여소인(君子與小人) 인격자와 비인격자
군자원포주(君子遠疱廚)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짐승 죽이는 것을
못
보아 푸줏간을 멀리하다.
군자지교담약수(君子之交淡若水)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 즉,
군자의
사귐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담박하기 때문에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
이다.(물이
없으면 금방 갈증을 느끼므로 계속 찾게 된다.)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는 확실하게 선인으로 변한다.
궁구막추(窮狗莫追) 쫓기던 개가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돌변할 지 모르니 쫓지
말라.
궁년누세(窮年累世) 궁년은 자기의 한 평생, 누세는 자손 대대, 즉 본인의 한
평생과
자손
대대란 말.
궁여지책(窮餘之策) 막다른 골목에서 그 국면을 타개하려고 생각다 못해 짜낸
꾀
권모술수(權謀術數)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변통성 있게 둘러맞추는
모략이나
수단.
권불십년(權不十年) 권세는 십년을 넘지 못함. 곧, 부당하게 잡은 권세는
오래
가지 않음.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행실을 권장하고 악한 행실을 징계함. 《出典》'春秋左氏傳'
노(魯)나라
성공(成公) 14년 9월에 제(齊)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가 있던 교여(僑如 : 宣伯)가 부인 강씨(姜氏)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고 높여서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宣伯)이 제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갔었을
때는 선백을 숙손(叔孫)이라고 불러 군주(君主)의 사자로 높여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권토중래(捲土重來) 한 번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분기하여 재도전함. 《出典》杜
牧의
詩 '題烏江亭'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 : 803-852)의 詩 <제오강정(題烏江亭)>에 나오 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
勝敗兵家不可期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豪傑捲土重來未可知
오강(烏江 : 安徽省 內 所在)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 : B.C
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해하(垓下 : 안휘성 내 소재)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餘 子弟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無面渡江東]'
부형들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만장(波瀾萬丈)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杜牧)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참 조】선즉제인(先則制人), 건곤일척(乾坤一擲), 사면초가(四面楚歌)
궤사(詭詐) 간사스로운 꾀로 속임.
귀매최이(鬼魅最易) 감상자가 잘 모르는 것이 그리기 쉽다.
귀배괄모(龜背刮毛) 없는 거북 등의 털을 벗겨 뜯는다. 없는 것을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다.
귀거래(歸去來)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귀곡천계(貴鵠賤鷄) 따오기를 귀히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김.
곧,
먼 데 것을 귀히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김.
극구광음(隙駒光陰) 흘러가는 세월의 빠름은 달려가는 말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인생의 덧없고 짧음을 비유.
극기복례(克己復禮) 사욕을 누르고 예의 범절을 좇음. 《出典》'論語' 顔淵篇 공자의
대
표적
사상은 '인(仁)'이었다.《논어(論語)》에는 "仁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仁한가? 모든 사람이 仁 때문에 살면서 仁을
모르고 仁을 외면한다"고 하시며 "仁 좋아하기를 색(色)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라고도 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도
인(仁)의 정의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감이 인(仁)이 된다. 하루동안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 인(仁)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묻자, "예(禮)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禮)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禮)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했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근근자자(僅僅姉姉)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
근묵자흑(近墨者黑) 나쁜 사람과 어울리면 그의 좋지 못한 행실에 물듦.(近朱者赤)
근장보졸(勤將補拙) 서투른 것을 보충하는 데에는 부지런함이 으뜸임을
뜻한다.
근화일일자위영(槿花一日自爲榮)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무궁화 같이
사람의
영화는
덧없다.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과 같이 몹시 귀중한 법률이나 규범.
금란지계(金蘭之契) 벗 사이의 교정이 깊음을 이름. 금은 지극히 견고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 을 합치면 그 견고함이 금을 능히 단절할 수
있으며,
두 사람의 진정의 말을 향기로운 난초에 비유하여
금란이라함.
《出典》'易經' 繫辭上傳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同人 先號宖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惑出惑處 惑默惑 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易經 繫辭上傳》몹시 친밀한 사이를 [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白樂天의 시구에도 나온다.
【참 고】금란부(金蘭簿)
금상첨화(錦上添花) 좋은 일이 거듭해서 일어남. 《出典》王安石의 詩 '卽事'
왕안석(王
安石)은
북송(北宋) 중엽,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하려고 획기적인 신법(新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鬼才)일 뿐 아니라 송(宋)나라 시대의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다음 시 <卽事>는 그가 만년(晩年)에 정계를 떠나 남경(南京)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은 남원을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의 화려함이 있네.
문앞의 버들은 옛 도령의 집이요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라.
좋은 모임에서 술잔을
거듭 비우려 하는데
아름다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
내
근원에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
河流南苑岸西斜風有晶光露有華
門柳故人陶令宅井桐前日總持家
嘉招欲履盃中?麗唱仍添錦上花
便作武陵樽俎客川源應未少紅霞
금석뇌약(金石牢約) 금과 돌같은 굳은 언약. 서로 언약함이 매우 굳음을
비유.
금석맹약(金石盟約) 금과 돌같이 굳게 맹세해 맺은
약속
금설폐구(金舌蔽口) 금으로 혀를 만들어 입을 가린다.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아
니함.
금성옥진(金聲玉振) 金은 鍾, 聲은 宣, 玉은 磬, 振은 收를 의미. 팔음을
합주할 때
먼저
종을 쳐서 그 소리를 베풀고 마지막에 경을 쳐서 그
운을
거두어
주악을 끝냄. 轉하여 智德이 갖추어 있음을 비유한다.
금성철벽(金城鐵壁) 아주 튼튼한 방어 진지. (金城湯池)
금성탕지(金城湯池) 아주 튼튼한 방어 진지. 금성탕지(金城湯池) 가까이 가기
힘든
견고한
성 《出典》'漢書' ?通傳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 B.C
246-210)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전국시대 6강국의 후예들이 군사를 일으켜 고을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관청을 점거했다. 그
무렵,무신(武信)이라는 사람이 조(趙)나라의 옛땅을 평정하고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컬었다. 이를 본 모사 괴통(?通)은 범양 현령(范陽縣令)
서공(徐公)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지금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대로 하시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공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 위급하다는 거요?" "사또께서 현령으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에 진(秦)나라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부모를 처형당한 사람, 손발이 잘린 사람,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그들이 사또를 원망하며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또 무슨 말이오?" "제가 사또를 대신해서 지금 세력이 한창인 무신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사또를 후대할 것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오." 이리하여
무신군을 찾아간 괴통(?通)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귀공(貴公)이 범양을 쳐서 현령이 항복한 경우, 그 현령을 푸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귀를 바라는 각지의 현령들은 '항복하면 범양 현령처럼 푸대접받는다.'며 더욱 군비(軍備)를 강화하여 마치 '끓어오르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金城湯池]' 같은 철벽(鐵壁)의 수비를 굳히고 귀공의 군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땐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 범양 현령을
극진히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각지의 현령들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기꺼이 항복할 것입니다."
【동의어】탕지철성(湯池鐵城) 【유사어】금성철벽(金城鐵壁)
금슬(琴瑟) 거문고와 비파, 부부간의 애정.(琴瑟相和), 琴瑟之樂(금슬지락)
금오옥토(金烏玉兎) 일월(日月)을 말한다. 금오는 태양, 옥토는 달을 가리키는
말
이다.
금의야행(錦衣夜行) 비단 옷 입고 밤길 걷기. 아무 보람 없는 행동. 《出典》'漢書'
項
籍傳
/ '史記' 項羽本紀 유방(劉邦)에 이어 진(秦)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둔 3세 황제 자영(子?)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것을 안주 삼아 미인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또 간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합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 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음을 알게된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가 이렇게
말했다. "초(楚)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而冠]처럼 지혜 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잡아 삶아 죽였다고 한다. 【동의어】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금의주행(錦衣晝行)
금의옥식(錦衣玉食) 비단 옷과 흰쌀밥. 사치스럽고 호강스러운 생활.
금의환향(錦衣還鄕) 벼슬하여 또는 성공하여 고향에 돌아옴.
금지옥엽(金枝玉葉) 임금의 집안과 자손, 귀여운 자손.
급수공덕(汲水功德) 불교용어. 물을 떠 남에게 주는 공덕. 지극히 쉽고도 대단치
않으나,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선행이라는 의미.
급수공덕(給水功德) 불교용어. 물을 떠 남에게 주는 공덕. 지극히 쉽고도 대단치
않으나,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선행이라는 의미.
기고만장(氣高萬丈) 일이 뜻대로 잘 될 때에 기꺼워하거나 또는 성을 낼 때에,
그
기운이 펄 펄 나는 일.
기구지업(箕 之業) 선대(先代)의 업(業)을 완전히 이어받음을
뜻한다.
기사회생(起死回生) 중병으로 죽을 뻔하다가 도로 살아나 회복됨.
기세도명(欺世盜名) 세상 사람을 속이고 허명을 드러냄.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
아라.
기우(杞憂) 옛날 기(杞) 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을 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쓸데없이 걱정함을 이르는 말. [출전]《列子》〈天瑞篇(천서편) 기인지우(杞人之優) [준말] 기우(杞優). [동의어] 기인우천(杞人優天). [유사어]
오우천월(吳牛喘月). 〉 주왕조(周王朝) 시대, 기나라에 쓸데없는 군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진다면 몸둘
곳이 없지 않은가?' 그는 이런 걱정을 하느라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저러다 죽지 않을까?' 걱정이 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하늘은 (공)기가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기가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몸을 굴신(屈伸:굽힘과 폄)하고 호흡을 하는
것도 늘 하늘 안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일월성신(日月星辰:해와 달과
별)이 떨어저 내릴 게 아닌가?" "일월성신이란 것도 역시 쌓인 기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일 뿐이야. 설령 떨어져 내린다 해도 다칠 염려는
없다네." "그럼, 땅이 꺼지는 일은 없을까?" "땅은 흙이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사방에 흙이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뛰고 구르는 것도 늘
땅 위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땅이 꺼진단 말인가? 그러니 이젠 쓸데없는 군걱정은 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기차당우차방(旣借堂又借房) 대청 빌면 안방 빌자 한다. 체면없이 이것저것
요구함.
기호지세(騎虎之勢) 이미 시작한 일이라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出典》'隋書' 獨孤皇后傳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남편의 뜻을 알고 있던 아내 독고부인(獨孤夫人)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 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옵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페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隋)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周나라의 宣帝가 돌아가심을 당하여, 高祖인 文帝가 조정에 들어가서 백가지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사람을 시켜 高祖에 일러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그러한 것이니, 호랑이를 탄 형세로 내려 올 수가 없으니, 이것에
힘쓰라." 當周宣帝崩 高祖入居禁中 總百揆 后使人謂高祖曰 大事已然 騎虎之勢 不得不勉之. 【원 말】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기호난하(騎虎難下)
기화가거(奇貨可居) 진귀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을 얻게 한다는 뜻.
곧
①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음. ② 훗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돌봐 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 ③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음.
[출전]《史記》〈呂不韋列傳〉 전국시대 말,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B.C.235)는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이야말로 기화(奇貨)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莊襄王)]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