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59년 내포 연등축제'

 

내포연등축제(충남예산)

 

불기 2559(2015)년 5월 14일(목) 오후 6~9시

충남 예산 충남도청 옆 KBS 신축 예정부지에서

내포 봉축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본사 수덕사,

지역주지협의회, 도청불자회, 경찰청불자회, 수덕사신도회, 제7교구신도회의 주관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식순

1부 18:00 국악인 박애리, 팝핀댄서 팝핀현준 부부가 출연, 박애리씨가 사회를 맡았고

승무에는 이 애주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예능보유자)

학춤에는 박 은영 (중요무형문화재 제 40호 학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부 점등식 및 법요식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 법어

 

3부 연등회(제등행렬) 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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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내포 연등축제는 국악인 박애리씨가 사회를 보았는데 야무지게 능숙한 진행을 하고 있었다.

남편 팝핀현준과는 안 어울릴 것같은 조합으로 잘 어울리듯이

이 행사에도 역시 박애리씨는 남편과 묘한 어울림으로  조화를 이뤄냈다.

 

 

 

행사장에 불교와 관계된 인사들과 예산 주민들 그리고

내외 인사분 들이 속속 좌석을 채우고....

사물놀이패들의 팡파르에 축제행사가 시작을 알렸다.

 

 

비구니스님께서도 예쁜 연등을~~

 

팝핀현준의 사진은 막상 건지질 못했다.

찍긴 했는데...메모리카드가 오버돼서 지운다는 게 그만~ㅠ.ㅠ

 

 

 

행사가 진행되자 슬슬 바람이 일더니 날씨가 이상해지고 기온은 내려갔다.

승무의 흰 가사자락은 바람에 휘날리고

정말 환타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셔터만 마구 눌렀다.

 

왜? 동영상 생각도 못할 만큼 혼이 빠졌는지?

여태 본 승무 중 제일 나아보였는데...

메모리가 가득차서 작은 뷰파인더로 보면서 급히 지워 내고나니

이런 평면적인 사진만 달랑 한 장 남았다.

오호 애재라~~

 

 

승무: 이 애주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애석하게도 사진이 없고

행사장에서 찍어 둔 연 꽃차(내빈 음료로 마련된)

연꽃잎 사진을 보니 바람에 날리던 

승무의 가사자락이 연상되어 

올려봅니다.

 

 

학춤 매우 좋았습니다.

동영상으로 감상해보세요!

 

 

 

부처님전에 올려지는....

 

 

아이들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갑자기 기운은

바람답지 않게 매서운 찬바람으로 돌변하고....

그래도 동심은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포돌이 포순이 응아들과 함께~~

 

수덕사능혜스님과 백숙현원장

 


 

 

 

용이 입을 벌리면 무서운 화염을 내뿜고~~

 

 

추위야 물렀거라!

<등은 누나가 대신 들어줄께~>

어린 누나의 사랑도..

 

 

유모차를 탄 아가들도...

 

 

제등행렬은 시내로 향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미리 축하드리는 연등행사입니다.

 

 

큰 에애드벌룬은 혹 쓰러질지 몰라 크레인이 내내 줄을 연결하여

 안전하게 붙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이렇게 매서울 줄 알았나 봅니다!

 

 

 

 

 

 

 

예산 수덕사 템플스테이 왔습니다.

예산 연등축제가 있군요.

낮에는 윤봉길 의사 참배도 드리고 생가 (도중도) 도중도 공원에 갔더니 소나무가 너무 좋더군요.

 

봉수산산림욕장 개장식에도 참여했습니다.

사진은 주로 카메라에 들었지만 핸폰에 있는 몇 장으로

ㅡ ㅡ

용이 불을 품고 멋지길래 동영상을 찍었는데 그 걸 올리려하니 동영상은 못 올리게 되어있군요.

연등축제 행렬은 떠나고 바람은 불고 ㅡ

시가행진 나간 제등행렬이 되돌아 오기까지

수덕사 템플스테이관까지 우리 일행을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며 ㅡ

KBS 신축부지 옆 상가 건물 이층 카페베너에서 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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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사진

2015년 4월 16일 사진들(비오는 날)

 

 

 

 

달도 머물다 간다는 충북 영동 한천팔경 월류봉!

이 역시 예전 글이 있는 줄 알았다.블로그를 아무리 뒤져도 글이 없다.

이 경치를 처음 접한 감동은 가슴속에 그대로 남았는데....

처음 이 곳을 와보고는 풍광에 마음이 동하여 어찌나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지 ㅡ

그래놓고는 흔적도 없다니~

 

마주 바라보이는 저 봉우리들을 눈으로만 껴안아 보고 갔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이런~~ 다른 이들은 모두 등산을 한단다.

 

부럽다! 부러우면 진다고 했거늘 “오호 애재라~~”

 

마침 두 번째로 간 날은 비가 내렸다.

무거운 카메라도 두고 스마트폰으로 대충 찍었다.

 

아! 오늘 가벼운 카메라! 화면도 스마트폰처럼 터치가 되는 캐논100d가 오는 날이다.

면세점에서 입국하면서 누가 사 온다고 했다. 무게만 가벼운 게 아니라 가격도 무척 착하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렌즈(탑론)와도 호환이 되니 대대로 캐넌이다.

 

이 나이에 카메라가 슬슬 무거워졌으니 (카메라가 든 가방마저 부담스러울 지경)

이제 가벼운 카메라만 메면 어디든 훨훨 날아다녀야겠구나!!

 

.......

 

막상 저 속에 들어가면(등산) 이리도 멀리서 절절히 바라보는 마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담 번에는 멀리서 詩나 한 수 읊어보면 좋으련만~~

 

여행팀은 항상 와르르 내려서 사진 찍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월류봉이 우리를 바라 볼 때는 그럴 것이다.

불현듯 나타나서는 단체로 카메라 세례를 퍼붓다가 불현듯 다 사라지고 만 일장춘몽처럼...

 

詩는 커녕,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 음미할 시간조차 없다.

카메라에 담아 집에 와서야 내문서에 담아놓고서야 찬찬히 읽어보는 아이러니를....

 

국내 구석구석 여기저기를 하도 많이 나댕기는 터라 찡하게 가슴 때리는 감동만 있었다면 가히 절경이다.

월류봉처럼!

 

 

 

.............................................................................................................이요조 (2015년 4월 16일)

 

 

 

 

 

찾았습니다. 사진 몇 장...더~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옥계폭포를 찾아 가는 길

 

 

15여 년 전 초여름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석조물이나 정자도 없었고 자연 그대로였다.
그 때 봤던 박연폭포, 그 모습이 꾸밈도 없었던 옥계폭포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폭포에 이르러서는 물길 옆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갔지 싶다.

박연폭포로도 불리는 옥계폭포는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면 높으당한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시원한 물줄기가 수려한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물은 지금처럼 시퍼렇게 고여있질 못했다. 그냥 자갈무더기위로 쏟아지는 정도였으니 지금보다는 물구경은 좀 덜한 것이었을게다.

그래도 그런대로 시원한 폭포가 있어선지 서늘해서 좋았다. 그 때 우리는 폭포 앞 자연스레 놓인 너럭바위위에 앉아 놀았는데...
그런 바위는 길이 새로 닦이고 물길이 나면서 죄다 사라졌다.

아마도 그 때 내가 앉아 놀았던 너럭바위가 자주 찾았다는 시인 묵객과 난계선생이 앉아 노닐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때가 더 좋았다는 느낌에 석조물로 만든 다리, 난관 시설물등 가득한 옥계폭포를 마주하고는 조금 생경했다.

그러나 시퍼렇게 고인 물과 유명 관광지답게 깨끗하게 정리된 주변을 돌아보며...

뭐든 변화되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격세지감을 느끼도록,  10년이면 변하는 강산을 바라보는 허무감도 전혀 없진 않았다.


난계사에서 2km정도 떨어진 옥계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1km 쯤 가면 저수지의 물소리가 우렁차다.
물이 많을 때는 저수지 둑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벌써? 옥계폭포소린가 싶게 폭포를 무색하게하고 봄이면 벚꽃 길을 만드는 가로수길 숲이 우거진

산길을 약 300m 올라가면 옥계폭포 광장이 보이고 
폭포 물소리가 먼저 들리는 가 싶으면 이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30m의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옥계폭포인데 주위 경치가 뛰어나고 울창한 숲이 있어 경관이 좋아 한여름에도 서늘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온다는 짤막한 전설뿐~~

 

 

실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옥계폭포는 음을 나타내고

그 아래 바위는 양을 나타낸단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큰 양의 바위가 있었다는데

그 바위를 치우고는 윗마을 젊은 남정네들이 죽어나갔다는 몹쓸 구전이....

다시 이 양의 바위를 이 자리에다 갖다놓자

그런 변고가 없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다.

 

 

 

 

 

동영상을 찍었는데, 세로로 세워 찍었더니 보일 때는 그림이 누워서 나오길래 전환하였더니

이젠 좌우대칭이 바꿔져버린 동영상이 되어버린 게 흠이다. ㅎ (새겨서 보세요! ㅎ)
 

 

주변 둘러볼만한 곳/  영동국악체험촌 난계사, 난계국악기제작촌, 난계국악박물관, 난계생가, 등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75-1
043)740-3225(영동군 문화체육관광과)


 

 

 

 

 

 

 

호랑이가 품고있는 절 반야사!

반야사엔 돌무더기가 호랑이 형태로 되어있다. 삼층석탑과 요사채 되로 보이는 돌무더기 호랑이 형상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비바람 폭우가 몰아쳐도 그대로라는 호랑이~~~ 꼬리를 곧추 세우고 어디론가 바라보며 반야사를 지키고 있는듯한 모습의 호랑이 형상!


백화산에 앉은 호랑이 형상의 돌무더기,

반야사는 호랑이는 길이가 무려 300m 높이가 80m 정도라는군요.
유명한 영동 곶감 CF에도 나왔다는 호랑이....곶감과 호랑이 이야기로 영동에 자리한 호랑이~ 정말 곶감을 좋아하나봐요!

그 외에도 영동 반야사에 가면 호랑이가 있다 없다로도 나오고 여러 번 출연한
형상이라는군요!

 

 

 

해설사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신기한 모습에 빠져서~~

 

 

 

 

 

봄이 오는 냇물 징검다리를 건너뛰며

(함께 건너보는 기분으로 플레이~)

 

 

백화산에사는호랑이가 따라오는지 어째 으스스하다.

 

봄인 듯 봄이 아닌 가을 같은 봄!!

 

 

 

2014년 8월29일 사진 몇 장 더 찾았습니다.

 

 

 

 

 

 

 

 

 

 

 

 

 

 

 

 

 


 

영동국악체험촌

에서 1박을 하고 아침을 먹고는 여독에 찌부등한 몸으로 모두 커피를 찾는다.

 

국악체험촌에 와서 하루쯤은 커피를 잊고 우리차를 마셔도 좋으련만~

   

곧이어 명상체험이 있다고 전갈이 왔다.

명상이라기에 명상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좌선인줄 알았다.

완전 나를 내려놓고 스트레스를 확 풀어 내리는 그런 시간이어서 더 좋았다.

 

나는 짬을 내어 국악촌을 담장처럼 둘러쳐진 언덕을 올랐다. 솔바람 소리 명쾌하다.

혼자 잠시잠깐 잔디에 앉아 눈을 감고 풍욕을 즐기다가 왔다.(동영상)

 

국악체험촌은 5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에 앞서 제 41회 난계국악대회도 열린다.

2015년 5월 2일(토) ~ 5월 7일(목) 까지 6일간 영동국악체험촌과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에서 열린다.

 

국악의 보존과 체계적인 계승발전에 기여하는 목적을 가진 축제같은 국악 경연대회가 잘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 미리 소식 전해본다.

 

접수마감 4월24일까지

인터넷접수/영동난계국악축제홈페이지 (http://nanmf.org) 참조

문의/ Tel (043)742-2655 Fax (043) 742-0688

 

 

영동국악체험촌에서 명상시간


 

 

 

 

 

 

 

◈ 1....................명상, 실내보다 실외로 옮겨 풍욕도 즐겼으면

 

국악체험촌에서 명상시간을 가졌다.

난 여유시간에 혼자 언덕에 올랐다. 작은 언덕에 솔바람 소리가 유난하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둘러 모아 앉아 풍욕을 즐긴다면 좋은 건강명상에 더할 나위가 없겠다.

 

 


비교 글들을 잇대어 바라는 점을 적어봅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설문지를 나눠주며 바라고 싶은 말을 솔직히 적어달라기에

긴 -글  세세히 적지 못하고 이제야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가야금의 거장 황병기님 무대

 

 

나이가 들어가니 점차 국악이나 정가(경서도창, 판소리, 가야금병창)가 좋아지더라 하니 에미 말을 새겨들은 딸은 엄마의 문화생활 영역권을 넓혀 국악으로도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번 국악체험촌 공연장은 좀 뜨아했다.

난계국악단원들은 열과 성을 다한 크로스오브뮤직 연주로 우리들을 환영해주었지만

신설이라 모든게 완벽할 줄 알았는데...기자단을 초청해놓고 경비절감을 생각한 것인지 그냥 밋밋했다.

 

음향이고 조명이고 기본뿐이다.

마치 단순한 국악 경연대회같은 느낌이랄까?  아! 그러자니 생각난다.

 

그날의 아무런 장치나 기교가 없었던 연주회를...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님의 연주회(세종문화회관)를 갔었는데...그 때 그런 상황이다. 황병기님은 툭 건드리면 쓰러질 듯 쇠잔하셨고...그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 2'''''''조명과 음향의 중요성

   

세종문화회관이 노조쟁의중인 줄 몰랐었다.

문화회관 뒷마당에서 왁자지껄해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세종문화회관 예약공연들의 취소가 속출하고 있다한다.

음악회에 적절한 조명은 감상의 집중이 잘 된다. 이 건 그냥 세미나식의 조명일 뿐,

 

그저 기본 밝기뿐, 황병기님만 부분적으로 비춰질 약간의 스포트라이트도 아무런 조명도 없다. 그냥 초등학교 발표회장 같은 분위기다.

 

물론 내용보다 질이 좋으면 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가야금에 어울리게끔 조명으로라도 밤을 나타내고 달빛에 흔들리는 댓잎사귀 그림자로도 은은히 비춰질 줄 알았다. 

 

가야금의 거장 황병기님

http://blog.daum.net/yojo-lady/4162812

 

크로스오브 뮤지션 '양방언'

http://blog.daum.net/yojo-lady/7406798

 

(세종문화회관)  음향과 조명이 어찌나 현란한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고 음향은 귀나 뇌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세상의 모든 잡다한 생각을 단절시켰다.

참으로 화려했고 웅장했고 대단했다.

 

장구 괭과리 징과 피아노 등이 어우러진 신명난 한 판! 

 

그러자니 절로 흥이 났고 평소 싫고 좋음의 표현마저 둔해서 덤덤한 내 안에도 어디에 그런 흥이 숨어있었는지 나도 물론, 무대와 객석은 말 그대로 무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해주었다.

 

실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낀 날이었다.


 

 


 

◈ 3..............언제 어디서나 음향기 설치를 하여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면 ..

이나 식당 화장실까지도 앰프 설치~

 

영동국악체험촌은 그저 산을 깎아 건물만 덩그랗게 세웠지 

예술적 감성을 불러일으킬만한 자연환경적인 조건들은 거의 배제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 천마총에서

저녁 산책삼아, 운동 삼아 나가자고 부추겨서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어제 토요일 밤은 그렇게나 쌀쌀하더니 일요일 밤은 산책하기 딱 좋은 기온이다.

 

오늘이 바로 음력 대보름이 아닌가? 천마총은 입장시간이 늦어선지 모두 무료입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보다. 그래서? 불이 다소 꺼졌는지...어두컴컴했다.

 

산책길 곳곳에 앰프가 설치되었는지 가야금 가락이 잔잔히 흘러 나와 보름달밤의 운치를 더했다.

 

얼마나 좋은가?  행복한 한가로움이다.

달빛아래 온 가족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음악속에 산책을 한다는 게...

   

천마총은 나무 한 그루도 허수히 여기지 않는 고적지 본연의 모습, 바로 이런 상생의 마음이 길이 보존될 때...우리는 세세토록 무궁한 역사의 긍지를 가질 수 있을게다.

◀ 

지역사람인지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지만...뛰는 사람은 없었다.

 

이 조용한 명상 음악을 듣고 그 누가 뛰어 다니겠는가 말이다.

 

경주는 그런 연유로 정적인 사색의 도시가 분명하다.

 

◈ 4................한국적인 정원으로 꾸며졌으면, 큰 나무 그늘도 있고 연못도 있는 야외 작은 음악회도 열릴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경북 봉화의 수백 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청암정>

 

초가을이지만 날씨가 아직은 더운 날,

전날 밤에 이곳에서 야외음악회가 열렸다고 한다.

 

가설무대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

 

아마도 이 장소 여기서 라면 무슨 음악인들 멋스럽지 않았으리오만 ...

 

기회가 된다면 해마다 열린다는 봉화 청암정의 작은 음악회 국악연주회를 들어볼 가을밤을 기다려본다.

 

너무 좋은 우리음악 국악

 

연전에 중국에 체류할 당시,

 웨이하이와 칭다오 중간지점 류산에서 일이다.

중외상(중국에 거주하는 외국기업)들을 위한 가족의 밤을 가졌다.

 

나라마다 아무리 정서가 다르다 한들

파티 내내 중국 국악의 공연이 펼쳐졌는데...찢어지는 듯 한 악기소리~ 잡음에 가까운 음악들로 정말 고통스러웠다.

 

우리 국악은 어떤가? 물 흐르듯이 조용하고...애잔하여 때로는 슬프다가 서리서리 맺힌 限을 풀어내보다가~

격렬하게 흥이 몰아쳐 솟구치면 어깨춤이 절로 덩실덩실~하나 되는 멋-스런 국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 4................마지막으로

 

템플스테이를 가면 챙겨주는 옷처럼 그런 건 없더라도 ....개량한복에 가까운 옷들로 챙겨와서 국악체험촌을 거닐고 명상속에 산책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소소한 바램까지 적어보며,

.........................이 요조


 


하늘까지 울린다는 천고 얼마나 크길래?

울리는 소리가 하늘까지 퍼진다하여 천고라 이름지었다 한다.
그 대단한 위용을 뽐내는 천고!
천고를 국내 큰 축제나 행사때마다 사용하기를 원하지만 워낙 커서 옮길수가 없다고 한다.
천고가 한번 울릴때 마다 울림의 공명도 커서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국악촌에서 느끼고 배우다(영동국악체험촌 팸투어)
http://blog.daum.net/yojo-lady/13746963

 

 


 

충북 영동에 가면 포도가 많고 ..포도가 많이 재배되니 와인이 유명해 와이너리가 많다.

 

Winery는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말한다. Winery를 불어로는 샤또(Château) 혹은 도멘(Domaine), 이탈리아로 Cantina(칸티나), 스페인어로 Bodega(보데가), 포르투갈어로 Adega(아데가), 독일어로 Anbaugebiet(안바우게비이트)로 표현한다.
와인이 만들어지는 포도원 또는 양조장. 불어로는 샤또(Chateau) 혹은 도멘느(Domaine)라고 함.

 

그런 영동은 와인축제, 포도축제, 난계축제가 아우러져 개인적으로 영동 방문을 자주했었다.
영동 시내 거리에 심어져 붉은 감 열매를 자랑하는
가로수가 감나무라 또한 아름답다.

영동은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아~  우리나라 3대 악성중 난계 박연선생의 고향으로 국악을 한 걸음 더 가까이 하기에 무척 좋은 고장으로

2015년 5월에 드디어 영동국악촌이 그 개관을 앞두고 있다한다.


개관 전에 다녀올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장구 체험도 하고 기네스북에 오른 어마어마한 천고도 구경했지만 그 큰 천고가 비닐 천막 속에 갇혀있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

그랬는데 이 번에 와서 보니 천고가 천고각에 입택을 한 멋진 모습으로 척 마주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1박을 하면서 공연을 보면서 느끼고 체험했다.
산을 깎아 만든 곳이라 아직은 조경도 없고 경관은 부실해서 흠이지만 우리 아이들의 수학여행지로도 좋을 것 같다.

한군데에서 먹고 자고 맘껏 체험의 즐길꺼리까지 있다면 이 이상 더 바람직한 여행이 어디 있으랴~

인근 관광지로도 손색없는 곳이 많으니 가족여행으로도 아주 좋겠다.

2인 1실이 3만원 부터~~ 아주 착한 가격으로 저렴하다.

근대식 건물에 한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Tel 043-740-3892)

이제 영동에 가면 볼거리 체험거리에 알토란을 하나 더 보탠 것 같아  영동은 모름지기 관광 인프라 입지를 굳혔다.

 

 

 

 




 

 

 

 

 

 

 

 

 

 

 

 

 

 

 

 

 

 

여태 천고는 난계 박물관 옆자리 노촌에서 천막집속에 기거하고 있었다.

비라람 폭우에행여 천막이 날아가면 어쩌나 북에 습기가 차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였다가

이제야 영동국악체험촌에 천고각을 지어 드디어 천고가 입택을 했다.

2010년 8월 사진

천고의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다섯마리의 용이 휘감아 있는 화려한 단청으로 그려졌다.

 

 

천고의 제작비는 2억3천만원
소나무 원목 24,000재

소나무원목 15톤 트럭 4대분량

소가죽(소 40마리),

단청(다섯마리의 용 그림)
크기북지름이 5.5m,

북길이 6m ,

 무게 7톤


영국 기네스월드레코드스 등재(2011.7.6)


 


 

한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안전한 천고!

용 5 마리가 얼켜있는 천고각 단청

 

 

큰 북 "천고"의 고리를 슬그머니 잡아보았다.

엄청나게 크다. 천고를 칠 기회가 주어졌는데....언제 천고를 쳐보랴?

싶어서 소망을 담아 힘껏 두둘겨 쳤는데...아쉽게도 사진은 없다.

소망은 이루어지겠지!

 

영동국악촌 임실예약 2인1실 3만원부터~

 Tel 043-740-3892

 

 

 

태안 안면도에는 천년 역사의 소나무가 있다.

바로 안면송이라는 쭉 뻗은 토종 소나무(금강송)이다

태안의 안면송을 처음 알았다.

동해의 춘양목이나 금강송등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서해에도 이리 곧은 토종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해송이나 흑송으로 불리는 곰솔과 달리 안면송은

바닷가에서 자라면서도 줄기가 곧고 곁가지가 드문 적송이다

쭉 곧게 자라올라서 재목으로는 손실도 없겠다.

맨 위엣 부분은 파라솔처럼 솔잎이 창정한 것이 좀 특이했다.

안면도에 있는 산림전시관도 둘러보고

숲해설사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처음 배우는 신기한 사실들~~

아하!!

안면송 숲길을 걸으며 힐링!

해풍을 먹고 자란 안면송은 재질이 강하고 속이 꽉차 경복궁을 짓는데도 사용되는 등

높은 품질을 인정받고 . 고궁 재건과 남대문 복원에도 사용된 소중한 재목인데

숭례문 복원공사에 많은 나무가

안타깝게도 목수에 의해 1/10만 쓰이고 나머지는 그의 배로 들어갔단다.

역시 소나무 재질이 뛰어나다.

황장목 하더니....이래서 임금님의 관으로도 씌였나보다.

색깔도 좋고 결도 아름답다.

안면송 소나무는 토종인데도 다들 쭉쭉 곧아있다.

안면송은 잎이 주로 꼭대기에 달려 있다.

위아래 둘레가 비슷한 붉은 줄기가 곧고 매끈하게 뻗은 모습이..해안선을 따라길게 늘어서

빼어난 절경으로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안면송은

곤파스의 영향으로 7,500여 그루가 초토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는군요!! 

 

서해 황금열차(G_Train을 타고 태안에 가기위해 홍성역에 내린 여행길이다.

 

 

홍성역 입구 중앙에는

이 곳 출신 4분의 훌륭하신 충절을 기렸모셨다.

쭉쭉곧은 소나무가 바닷바람을 막아준 탓일까?

만해 한용운님은 일제의 서러움을 한탄하다 속세를 떠나셨지만

그 외 세 분은 다 의로운 죽음을 면치 못하셨다.


 


 

 

이 기회에 네 분의 충절을 다시 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디서 은은한 솔향이 번져난다.

쭉 곧은 안면송처럼 기상과 절개가 강한 님들이시여~~

 

연대순서별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주이고, 시호는 무민(武愍)이고,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우왕은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 의정부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성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1]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한용운

만해 숙명 한정옥(萬海, 俗名 韓貞玉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1]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에《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만해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김좌진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생 1889(고종 26) 사망 1930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산시역에 있는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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