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사부곡(思夫曲)
지난 '98년 4월, 안동시 정상동 택지조성을 위해 이곳에 있던 분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중후기를 살았던 고성이씨 15세 이명정(李命貞 1504-1565)의 처 일선문씨(一善文氏)가 미이라 상태로 발견되고, 이어 그의 손자인 이응태(李應泰 1556-1586)씨가 염습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한국복식사 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 이를 일반인과 함께하는 공유의 장으로 마련되었다. 전시물은 분묘에서 출토된 일선문씨의 장의·한삼·치마·저고리·개당고, 고성이씨의 적삼·오자·합당고·흑단령 등의 복식과 관련소품 약70여점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는 삼과 머리카락을 섞어서 만든 독특한 신발―미투리와 이응태의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눈길을 끌었는데,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하는 "사부곡(思夫曲)"은 남편을 여읜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이와 함께 동생을 잃은 슬픔을 담은 한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16세기 중후기 안동 양반들의 옷차림과 당시 상장례(喪葬禮)와 관련된 염습의(殮襲依)의 역할, 출토 복식의 사용목적과 배치, 착장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실로「450년만의 외출」이라고 하겠다.
......세인들의 많은 지목을 받아 인기리에 특별전시회도 가졌던 자료들은 현재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서 문화해설사에게 질문했으나...아는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를, 부부의 사랑을 기려서 다리에다 정자에다 동상에다가 탑을 만들었는데 정작에 출토되어 한 때 전시되었던 유물들은 막상 구경은 커녕 어떤 약속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월영교나 원이동상, 탑등....많은 돈을 들여 관광전시용으로 겉모습만 번드레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시회 개막부터 집중됐던 학계와 일반인의 관심이 계속되고 매일 300여명 관람, 전화 문의 잇달았다는데... 특별 유물관 설립이 우선 아니었나 싶다.
포스코, 현대무용 450년 만의 외출 공연이 있었는가하면 무용, 국악가요, 오페라에 이어 책으로도 발간되어 화제다.
450년만의 외출은 각매스컴 매체를 통해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5월 15~16 양일간 1박2일의 안통 투어였다.
저녁을 먹기위해 이동중이었는데 잠시 버스가 멈추더니 450년만의 외출의 편지를 쓴 원이母의 동상앞에 섰다. 옛날 여성이라 이름이 없다.
안동 사람들은 그저 <원이동상>이라고 부르나보다. 저녁을 먹고나오면 원이동상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배려였다. (click~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가..)
안동시장골목의 안동찜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시장앞이라 주차장도 마련이 되질 않았고 도로 중심부에 차를 대는 기이한 주차법이다.
<안동찜닭>을 먹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란다., 이야기가 옆으로 잠깐 샜지만 저녁 식사도중에도 해설사님의 테마가 있는 월영교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인쇄물이 없어 나눠받진 못했지만...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웹상에 검색하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테지만 ...... (원문은 크게 클릭해서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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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이응태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1586년)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마음 어디에 두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고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인쇄물 뒷장 3)에는 ▼형(이몽태)이 동생(이응태)에게 보낸 시(輓詩) 가 있다.
泣訣舍弟 :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
共汝奉旨甘 아우와 함께 어버이를 모신 지가
于今三十一 이제 삽십일년이 되었네
奄然隔重泉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니
영原何太疾 어찌 이렇게 급하단 말인가
拍地之茫茫 땅을 친들 그저 망망하기만 하고
呼天之默默 하늘에 호소한들 대답이 없구나
孤然我獨留 외로이 나만 내버려 두고
汝歸誰與匹 죽어서 뉘와 더불어 함께 할런지
汝留遺後兒 자네가 남기고 간 어린 자식
我在猶可護 내 살았으니 그래도 보실필 수 있구려
所望好上仙 바라는 바는 어서 하늘에 오르는 것
三生何不遠 삼생은 어찌 빠르지 않을쏜가
亦望勸有助 또 바라는 건 부지런히 도움을 내려주어
親庭壽萬億 부모님이 만세토록 장수하시는 거라네
舍兄神亂哭草 형이 정신없이 곡하며 쓴다
월영교(月映橋)라는 이름은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월영교의 모습과 어울림직한 이름이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성이씨, 이응태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월영교는 미투리모양으로 제작된 월영교를 세웠다고 한다.
월영교 다리를 밟으며 연인들은 사랑이 영원할 것을 기원할 것이다.
월영교 중간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여앉아 원이 아버지로 시작된 사부곡(思夫曲)을 낭송하다.
남편을 여윈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오랜 세월 월영교의 거미줄 사이로 보이는 바로 저 곳에서 출토되었다 한다.
지금은 고층의 아파트 즐비한 불야성인 곳~
1998년 4월 안동 정상동 택지조성을 위해 이곳에 있던 분묘를 이장하던 중 출토된 유물(월영교 팔각정에서 바라보이는 곳)
저 뒤로 보이는 객사와 월영교가 어찌보면 원이엄마의 애끓는 울음이 들리 듯 좀 으스스한 조명연출이긴 하다.
데크목으로 만든 다리라 걷기에 경쾌하다.
달 밝은 밤 .....마구 쏟아지듯 떨어지는 유성도 보일 것 같은 낙동강위의 칠흑같은 밤이다.(조명만 없다면..)
월영교 팔각정
원이엄마의 혼이 담겼을라나? 거미는 실을 빼어 거미줄을 친다.
원이엄마는 남편에게 마지막 선물로 머리카락을 엮어 미투리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
미투리: 삼(麻)과 머리카락으로 섞어 짠 짚신(대렴용)이다. 신발을 쌌던 한지에 고성 이씨가 "신어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한다.
450년만의 외출,
그 곳은 강물에 반영된 흔들림없는 불빛들이 서로 손을 맞잡은 반영으로 긴-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못다 한 이야기는 강물처럼 흐르고....
글/이요조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되자는 5월21일 부부의 날에
한국판 '사랑과 영혼의 증표'처럼 되어버린 <450년만의 외출> 원이엄마의 편지글을 보고 굳이 내 개인의 사족을 붙여보자면 사랑은 자기愛, 즉 자기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어쩌면 지독한 에고이즘 (egoism) 인지도 모른다.
원이엄마의 두 번이나 반복된 글에서 .....나는 조선의 미망인들이 호곡할 때 哭의 후렴이 <여보!! 나는 어찌 살라고~~> 이 듯....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가 두 번이나 나온다.
죽은자는 비록 말이없지만.....아무리 한들 죽은자보다야 나을 것을....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다...내가 지독한 에고이스트인가?
그리고 또 한귀절 ,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여기서 말이다. 요즘 사람으로도 조금은 농염한 표현이다.
옛날엔 오래 출타한 남편이 들어오면 ..먼-빛으로 바라보고 얼른 정지깐으로 내닫는 게 이치였다 한다. (민초들의 삶)
노랫말에 있듯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도 아주 근대적인 신식이었다. 하물며 450여년전에 이런 표현은 무척 대담하고 할 것이다.
궁색한 변명이라 치면 나는 개인적으로도 무덤덤한 ....친구같은 부부애를 선호한다. ㅎ~ 삶의 투철한 쟁의를 벌인, 싸우고 찟기고 그러다가 감싸주는 전우애같은 사랑~
"턱턱 사랑 영이별이요 실뚱머룩 장래수"라는 옛말도 있듯이 옛 어르신들은 그렇게 가르쳤다.
유별나게 좋아라하면 .....그 게 마(魔)가붙어 영 이별 수가 든다고 했다. 액살이 끼일까봐 그저 소 닭보듯 실뚱멀뚱 하게 살으련다.
굵고 짧게 사랑하느니....손자 증손자까지 누릴라믄 실뚱멀뚱한 부부관계가 될란다. 나는.....그저 흐르는가 멈췄는가 싶어보이는 저 강물처럼 살란다.
늘 대하는 밥처럼 달지도 기름지지도 않게....
450년 후의 어느 아내가 ......<원이 엄마!! 실로 대단하였소!>라고....그 사랑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음에~~ /이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