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13일(두번째 일요일)

가을나들이?

영주 소수서원 인문캠프(이원복님)에 왔다가 여기까지 들렀다.

햇살 도탑고....하늘 푸르고

이런 가을날에 ~ 이런 좋은날에

난 안동이다.


안동은 수태왔지만 이런 가을은 첨이다.

공연장앞의 화장실에 갔더니 여성화장실 줄이 장난이 아니다.

일행들은 떠나고...

작은 볼 일 보는데도 20분이 훨씬 지체됐다.


이렇게 좋은날 사람들이 원캉? 많이 몰려드니....그럴만도,

화회마을을 한 바퀴 돌자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허겁지검 달려 가자니 혼자 산책하기로 맘 먹었다.


낙동강이 보이는 뚝방으로 올랐다.

늘 와도 좋은 가로수길이 좋았던 기억에....


어쩜

디세랄이 아닌 고작 핸폰으로 당겨 찍었는데도

햇살이 바늘처럼 하나 하나 다 살아있네~


가을을 눈부신 가을을 다 담아왔다.

연밭의 시들어 오그라진 연잎마저도 정겨운
















여기 이 집이 안동화회마을회관 대문에 붙어있던

기교없이 순수한 글씨체

입춘대길 건양다경도 찍어보고...

마을회관도 안동화회마을이라 품격이 다르구먼....






담장 옆으로 난 길을 올라서니

벼논에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있다.

대나무숲에 참새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새소리가 무슨 물 흐르는 소리로 들린다.



참새를 쫒는 내 허수아비가 콕 쳐박혔길래

돌멩이를 줏어다

바로 세워주고 한 컷!!

훠이~~~

참새야 내가 새잡는 매다!!





 

 

 

 

 

 

낙동강 12경인 

안동 부용대  를 오르는 길이었다.

시작 길은 산을 오르는 것 같아 보여 나같이 둔한 사람들에게 두려워말라고 친절하게도 부용대까지 450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부용대에 올라 바라본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감돌아 흘러 그 안에 있는 하회마을이 마치 물속에서 솟아오른  한송이 연꽃으로 보인다는

뜻에서 부용대로 지어졌다 한다. 깎아지른 듯 한 벼랑이라 부용대에 오르면 발아래가 아찔하다.

낙동강물이 이렇듯 하회마을을 휘감아 돌아 흘러서 아마도 풍산 류씨(흐를 류)와 풍수가 맞아 떨어져서 풍산유씨 일가가 번성한 게 아닌가

보고있다.

 

 

 

바라본 동네의 느낌은 옛 정취가 묻어나서 낙안읍성 같아 보이지만 초가마을의 서민들 집이 대부분인 낙안읍성과는 달리 하회마을은

솟을대문이 있는 양반가의 마을이 대부분이다.

몇몇 보이는 초가는 집안일을 도우는 사람들이 나가 살았던 형태의 주택이라고 한다.

 

 

 

휘감아 도는 낙동간 물길 건너 마을을 빙 두르고 있는 솔밭은 만송정이라는 비보림(허한곳을 채운다는 풍수)으로 소나무 만그루를

심었다는데 현재는 100여그루가 남아있다 한다.

아마도 만그루가 아니라 많이 심었다는 걸 대신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짐작을 해본다.

 

 

 

부용대에서 강 건너 뚝방까지 230여m에 줄을 달아 <선유줄불놀이>를 즐겼던 낙동강변의 불꽃잔치가 유명하단다.

안동을 여러 번 왔지만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물론 시위가 어두운 야간에 진행되는 놀이로 선유줄불놀이옛 뱃놀이의 일종으로,

뱃놀이와 불꽃놀이가 아우러져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 하회마을 만송정 일대에서 두 차례 시연이 된다고 한다.

 

 

 

언제 나도 양반처럼배를 타고 시를 지은 후 <낙화야~>소리치면 부용대에서 불이 아니라

낙화, 꽃이 뚝뚝 떨어지는 60여m의 절벽을 화려하게 바라보는 양반들이 즐기던 풍류를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다면 꿈일까?

 

 

 

 

 

 

 

 

이른 아침, 떠오르는 햇살 그림자에 부지런한 노파의 실루엣이

기울어진 나무 그림자랑 닮아있다.

 

 

 

 

 

 

 

 

2010년 5월 중순 초하의 부용대와 만송정

 

 

 

 

 

 

 

배삯은 3만여원 정도면 하회마을을 구비도는 낙동강과 부용대를

강을 떠가는 내를 타고 구경을 할 수가 있다 한다.

 

 

 

낙동강뱐을 따라 죽이어진 벚꽃가로수길 

나 역시나 구경을 못해봤으니....이 사진두고 상상이나 해봐야겠다.

▼ 

사진출처는 .....자료구하러 다니다가 X뉴스에서 퍼 온 것 같은데 ,,,어딘지 잊었다.

선유줄불놀이

 

 

 *안동하회마을을 부용대에서 바라보다*

 

 

낙동강이 큰 S자 모양으로 마을 주변을 휘돌아 간다. 그래서 하회(河回)라 했다.
오른편 안동시에서 흘러나와 왼 편으로 흘러간다.

하회마을을 찍은 항공사진/사진 안동 하회마을 홈페이지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나흘간 한국을 방문하였다.
방한 일정은 영국 왕실의 계획에 맞춰 의전 행사를 최대한 배제하고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여정으로
이어졌는데, 이 가운데 안동 하회마을이 선정되면서 이루어졌다.

이후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이라는 브랜드를 얻어 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상업화의 일면에 전통마을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훼손이라는 부정적 측면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과 가치 제고를 위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같은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 용인 한국민속촌과 다른 점!

한국민속촌은 관광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시설이지만, 
안동 하회마을은 ‘마을’이란 말 그대로 현재 200명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이자 행정구역입니다.
사적인 생활 공간과 관광을 위하여 개방된 공간이 한 마을 내에 함께 있습니다. 
국가에서 1984년 하회마을에 대한 ‘민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민속자료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하회마을의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2010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했습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 바깥 풍경

 

세월 따라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담과 그 길을 따라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다.

 

 

골목안에는 담장을 헐고 이런 광광상품 가게가 특이하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보물 제553호 예안이씨 충효당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담장이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담장안 풍경

 

 

좀 죄송하지만 닫겨진 대문안의 담장은 팔을 하늘로 뻗어 는에는 보이지 않지만

되는대로 셔터를 눌렀다. ㅎ 담장인 풍경이 더욱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이 열린 집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선지 사진은 수평이 맞지않지만 수평을 맞추려면 아까운 종횡의 이미지가

사라질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올려봅니다.

 

 

 

 

 

 

 

 

 

 

 

 

 

 

 

 

 

 

 

* 안동하회민속마을 솟을대문과 대문

 

                                           솟을대문의 정의/  양쪽으로 문간채를 두고 기와집의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이 대문은 풍산류씨 연예인 <류시원>의 본가이다. (좌측,아랫문패)
엘리자베스영국여왕이 안동을 방문하였을적에 생신상을 차려낸 장소이기도 하다.

 

안동 하회마을 나무가 있는 풍경들

 

안동 하회마을 삼신당 느티나무 

 

소원을 들어주는 기원나무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하회마을 중앙에 위치)

 

 

관광객의 기원이 나무에 주렁주렁

 

 

정성스레 마음을 담아 소원지를 달고....

그 소원 이루어지이다!

 

나도 이참에 손자를....

 

감만큼 주렁주렁~~

높다랗게 매달린 감!

관광객보라고 따지않고 그냥 둔 감들이 겨울 하늘을 수놓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

 

 

 이번에 찍은 사진과 여러해 전에 찍었던 사진

강건너 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막는 비보림으로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하여 만송정숲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100여 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숲(安東 河回마을 萬松亭 숲)은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다.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1]                                          위키백과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동족부락으로, 국보를 비롯해 보물·중요민속자료·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길지(吉地)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유씨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이는 일찍이 허씨(許氏)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안씨(安氏)들이, 그 다음에는 풍산유씨(豊山柳氏)들이 동족부락을 이룬 곳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 이미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유씨 동족촌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대유학자인 유운룡·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되었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戶)의 유서깊은 대·소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중 유운룡의 종택인 안동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종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을 비롯해 하회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하회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영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하회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하회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하회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하회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이며, 대부분이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다.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양진당·충효당·남촌택의 네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가옥들은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했다.

충효당 후원에 있는 영모각(永慕閣)은 유성룡의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각종 유물과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들 가옥 변두리에는 하인이나 노비·타성씨(他姓氏)가 거주하던 집들이 있는데, 이들은 3~4칸 규모의 토담집이다.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와 강상유화(江上流花) 놀이인 줄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색인 : 하회탈 및 병산탈).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이곳 강은 대략 최대 폭 300m, 최대수심 5m에 이르며 하회도선장의 나룻배를 이용해 주변지역과의 왕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상주와 풍산읍을 잇는 지방도와 연결된 길이 하회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1990년 현재 남촌·북촌의 총가구수는 102가구이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 빈 집의 증가와 가옥의 유지·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가옥들이 퇴락해가는 문제점을 안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안동마을 가운데 있는  안동하회마을 600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

 

 

 

 

오픈된지 한 달 남짓~ 된 리첼호텔에 들렀다.

완공된지 얼마 안되어 깨끗해서 좋았다. 안동문화관광단지내에 있는 리첼호텔

 

이층 창문쪽이  대형레스토랑

레스토랑에서 찍은 리첼 입구사진

 

 

안동호가 내려다 보이는 경북 안동시 성곡동 안동댐 일대 안동문화관광단지내에 문을 열었다. 
객실 90여 개를 갖춘 리첼호텔(사진)이 11월 3일 리첼 호텔 그랜드 오프닝 행사를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8층, 90실 규모의 리첼호텔은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안동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수려한 것이 장점인 친환경적인 호텔이다.
가족 관광객을 위해 모든 객실에 조리기구를 갖춰 직접 음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66만 m²(약 50만3000평) 규모인 안동문화관광단지는 내년 2, 3월 유교문화체험센터와 골프장 개장을 시작으로
한옥서당 10채와 조선시대 나루터도 복원한다.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이 있어 안동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다.

리첼 호텔은 '행복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호텔, 가족의 안락함'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안동댐 일대가 종합휴양공간으로 모습으로 관광객이 머무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것 같다.

 

안동문화관광단지 온뜨레피움 야외 식물원에서

바라 본 리첼호텔

모던한 로비 라운지

 

객실내부

트윈베드 침실

빌트인된 주방

 

다음날 아침

7:30분 뒷동산 너머 일출모습

날씨만 춥지않다면 아침 산책길로도 좋겠다.

 

신축건물답게 깨끗한 욕실

 

레스토랑& 바

호텔 2층인 레스토랑바로 들어가는 문

 

여기는 와인바

이상은 와인바 로즈마리

 

레스토랑에서 아침

다들 처음엔 떠름한 듯 하더니 ,,,맛있게 먹었다.

아침은 간단해도 되는데 뭔가 많이 차려졌다.

 

메뉴를 대충찍었는지라....

개인적으로는 한식! 큰뚝배기에 담긴 시래기 된장국이 얼마나 시원한지

술도 안먹은 속이 해장? 될 지경이었다.

토속적인 된장 그대로 끓여 낸 할머니 된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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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에서 찍은 우리 부부의 배낭

 

와인바에서

 

 

리첼호텔
054-850-9700
경북 안동시 성곡동 1546

 

 

리첼호텔은 안동문화관광단지 내 온뜨레피움 준공이후 두 번째로 개장한 시설물로 민자시설로서는 처음으로
금년말 준공되는 18홀 규모의 골프장과 유교랜드(유교문화체험센터)와 함께 안동지역을 찾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볼거리 제공과 숙박거점지 역할을 겸비한 체류형 복합휴양단지로 거듭나고 고용창출로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안동으로 떠난 여행(봉정사)

 

천등산 봉정사

 

11월30일 분명 늦가을이라고 우길 수도 있는데...

올해 가을은 실종하고 만추부터 모진 한파로 괴롭다가

안동에 도착하자 그나마 남쪽이라 군데 군데 남아있는 가을의 흔적들!!

국화와 낙엽이 꽃다이 예쁘다.

 

 

 

 

바람은 코끝에 쌩-하지만

햇살은 따사롭게 보이는 ...봉정사를 오르는 송림숲길이 예쁘다.

 

 

 

 

퇴계 선생이 머물었다가 물소리에 반했다는 명옥대

여름이면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옥소리로 들릴 듯하다.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을 통과해야만...

악업이 씻겨지고 부처님을 배알 할 수가...

 

 

비보

쌓아둔 돌의 의미는

옛날에 풍수지리상 기가 허한곳을 이렇게 막아주고 보호한다.

 

 

6,25 전란통에 모든 역사기록서가 다 불에 타고...

건물도 소실되어 옛모습으로 재건되었겠지만

눈에 보이는 봉정사의 자태는 예사롭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 모두에게 자랑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봉정서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영가지'에 따르면 '북서쪽 30리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이름난 절이 되었다.


가정 병인년(1566) 봄에 퇴계 선생께서 절의 동쪽 낙수대 건물에 붙인 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의 창건으로 보고있다.

 

창건 이 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6,25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紙)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얼마전까지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육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시에 상량문에서 고려말에 제작됐다는 묵서가 발견돼 지금까지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국보15호)로 인정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2월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하다.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 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봉정사는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 15호인 극락전, 국보 제 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덕휘루,무량홰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늙어 굽은 소나무가 길손을 반기는 듯~~

 

 

절 집 방문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오랜 세월 마음을 갈고 닦은 사람들의 영들이 오르내리는 것만 같아서...

 

 

오랜 세월의 묵은 때가 보이는 듯한

사찰 누각을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아직도 꽃이 피어있는 절집 경내는 햇살이 조용하다.

 

 

사찰누각 아래

따사로운 햇살도 모여 구도 중인듯...

 

 

이렇게 누각을 오를라치면

대웅전앞에 탑이 먼저 반기는데 탑이 없다.

탑은 극락전 앞에....그 이유는 뭘까?

 

 

 

국보 제 311호인 대웅전 

그닥 넓지 않은 조붓한 대웅전마당이

겸허하게 다가온다.

 

 

대웅전 문살이 화려하지도않고

단정한 모습이라 내 눈에는 더 좋아보인다.

 

 

국보 제 15호인 극락전

배흘림기둥에 토벽의 두 개 창살문은 마치 옥사같은 느낌이 들도록 생뚱맞아 보여..
예전 그대로 두었으면 좋았을 껄 여러번의 복원을 거쳐 고려의  옛건물이란 생각과는 멀어지는 느낌이다.

 

통상 대웅전마당에 탑이 세워져 있는데..극락전앞에 있음은

봉정사가 극락전의 건축이 먼저고 후순은 대웅전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극락전 앞 뜰에 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면,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 석탑이다.

  2중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비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82호

 

이 건 뭘까?

물이 고이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뭔가 소중한 물건을 올리는 모양이다.

등불? 제례음식? 해설사도 모르겠단다.

 

 

해설사의 해설을 놓쳤다. 매우 궁금해지는 ....지하 사용도다.

 

 

불현듯 영주 부석사의 느낌이 들었다.

 

 

절집을 나서며 길을 내려오는데...

배추밭에는 고라니가 뜯어먹은 듯 배추 윗둥이 다 뜯겨졌다.

아마도 절집 텃밭인 듯...

 

그대로 다 먹으라고 이젠 내어 준 듯~~

그래 함께 먹고사는 다 함께 부둥켜 안고가는 세상!!

부처가 어디 절 집에만 앉아 있더냐

사람 마음 마음마다 다 부처가 앉았거늘...

 

 

봉정사 솔숲길

소나무 정령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서 있는 것 같다.

아! 좋다!!

 

봉정사의 창건설화는 아랫글에 따로 있으니 참조 바라며 많은 소나무와 시원한 냇물과 맑은 공기로
산중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더 없이 좋은 쉼(休)의 장소로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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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작은 것에 감동을 받는다.

비구니승이 있는 사찰의 아름다운 정원도 보아왔지만

겨울 황량한 정원에 무슨 꽃나무인지 표식을 해 둔 것이 감동이다.

구도자가 이렇게 작고 섬세한 아름다움에도 눈을 뜬다면 필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실 도량의 스님임을.....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2

전화054-853-4181

 

 

 

 

봉정사를 오르며

 

 

전대미문의 사부곡(思夫曲)

 

 

 지난 '98년 4월, 안동시 정상동 택지조성을 위해 이곳에 있던 분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중후기를 살았던 고성이씨 15세 이명정(李命貞 1504-1565)의 처 일선문씨(一善文氏)가 미이라 상태로 발견되고, 이어 그의 손자인 이응태(李應泰 1556-1586)씨가 염습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한국복식사 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 이를 일반인과 함께하는 공유의 장으로 마련되었다. 전시물은 분묘에서 출토된 일선문씨의 장의·한삼·치마·저고리·개당고, 고성이씨의 적삼·오자·합당고·흑단령 등의 복식과 관련소품 약70여점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는 삼과 머리카락을 섞어서 만든 독특한 신발―미투리와 이응태의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눈길을 끌었는데,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하는 "사부곡(思夫曲)"은 남편을 여읜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이와 함께 동생을 잃은 슬픔을 담은 한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16세기 중후기 안동 양반들의 옷차림과 당시 상장례(喪葬禮)와 관련된 염습의(殮襲依)의 역할, 출토 복식의 사용목적과 배치, 착장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실로「450년만의 외출」이라고 하겠다. 

 

......세인들의 많은 지목을 받아 인기리에 특별전시회도 가졌던  자료들은 현재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서 문화해설사에게 질문했으나...아는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를, 부부의 사랑을 기려서  다리에다 정자에다 동상에다가 탑을 만들었는데 정작에 출토되어 한 때 전시되었던 유물들은 막상 구경은 커녕 어떤 약속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월영교나 원이동상, 탑등....많은 돈을 들여 관광전시용으로 겉모습만 번드레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시회 개막부터 집중됐던 학계와 일반인의 관심이 계속되고 매일 300여명 관람, 전화 문의 잇달았다는데... 특별 유물관 설립이 우선 아니었나 싶다.

포스코, 현대무용 450년 만의 외출 공연이 있었는가하면  무용, 국악가요, 오페라에 이어 책으로도 발간되어 화제다.     


 

450년만의 외출은 각매스컴 매체를 통해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5월 15~16 양일간 1박2일의 안통 투어였다.

저녁을 먹기위해 이동중이었는데 잠시 버스가 멈추더니 450년만의 외출의 편지를 쓴 원이母의 동상앞에 섰다. 옛날 여성이라 이름이 없다.

안동 사람들은 그저 <원이동상>이라고 부르나보다.  저녁을 먹고나오면 원이동상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배려였다. (click~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가..)

  

 

안동시장골목의 안동찜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시장앞이라 주차장도 마련이 되질 않았고 도로 중심부에 차를 대는 기이한 주차법이다.

<안동찜닭>을 먹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란다., 이야기가 옆으로 잠깐 샜지만 저녁 식사도중에도 해설사님의 테마가 있는 월영교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인쇄물이 없어 나눠받진 못했지만...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웹상에 검색하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테지만 ...... (원문은 크게 클릭해서 읽어 보세요~)

 

1)

2)

3)

4)

 

 

▼이응태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1586년)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마음 어디에 두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고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인쇄물 뒷장 3)에는  ▼형(이몽태)이 동생(이응태)에게 보낸 시(輓詩) 가 있다.
             

               泣訣舍弟 :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

              共汝奉旨甘   아우와 함께 어버이를 모신 지가
              于今三十一   이제 삽십일년이 되었네
              奄然隔重泉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니
              영原何太疾   어찌 이렇게 급하단 말인가
              拍地之茫茫   땅을 친들 그저 망망하기만 하고
              呼天之默默   하늘에 호소한들 대답이 없구나
              孤然我獨留   외로이 나만 내버려 두고
              汝歸誰與匹   죽어서 뉘와 더불어 함께 할런지
              汝留遺後兒   자네가 남기고 간 어린 자식
              我在猶可護   내 살았으니 그래도 보실필 수 있구려
              所望好上仙   바라는 바는 어서 하늘에 오르는 것
              三生何不遠   삼생은 어찌 빠르지 않을쏜가
              亦望勸有助   또 바라는 건 부지런히 도움을 내려주어
              親庭壽萬億   부모님이 만세토록 장수하시는 거라네
              舍兄神亂哭草 형이 정신없이 곡하며 쓴다

 

 

월영교(月映橋)라는 이름은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월영교의 모습과 어울림직한 이름이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성이씨, 이응태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월영교는 미투리모양으로 제작된 월영교를 세웠다고 한다.

월영교 다리를 밟으며 연인들은 사랑이 영원할 것을 기원할 것이다.

 

 

월영교 중간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여앉아 원이 아버지로 시작된 사부곡(思夫曲)을 낭송하다.

 

 

 남편을 여윈 아내의 애절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오랜 세월 월영교의 거미줄 사이로 보이는 바로 저 곳에서 출토되었다 한다. 

 

 지금은 고층의 아파트 즐비한 불야성인 곳~

1998년 4월 안동 정상동 택지조성을 위해 이곳에 있던 분묘를 이장하던 중 출토된 유물(월영교 팔각정에서 바라보이는 곳)

 저 뒤로 보이는 객사와 월영교가 어찌보면 원이엄마의 애끓는 울음이 들리 듯 좀 으스스한 조명연출이긴 하다.

데크목으로 만든 다리라 걷기에 경쾌하다.

달 밝은 밤 .....마구 쏟아지듯 떨어지는 유성도 보일 것 같은 낙동강위의 칠흑같은 밤이다.(조명만 없다면..)

월영교 팔각정

원이엄마의 혼이 담겼을라나? 거미는 실을 빼어 거미줄을 친다.

원이엄마는 남편에게 마지막 선물로 머리카락을 엮어 미투리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

 미투리: 삼(麻)과 머리카락으로 섞어 짠 짚신(대렴용)이다. 신발을 쌌던 한지에 고성 이씨가 "신어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한다.

450년만의 외출,

그 곳은 강물에 반영된 흔들림없는 불빛들이 서로 손을 맞잡은 반영으로 긴-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못다 한 이야기는 강물처럼 흐르고....

 

 

글/이요조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되자는 5월21일 부부의 날에

 

 

 

 

 한국판 '사랑과 영혼의 증표'처럼 되어버린 <450년만의 외출> 원이엄마의 편지글을 보고 굳이 내 개인의 사족을 붙여보자면 사랑은 자기愛, 즉 자기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어쩌면 지독한 에고이즘 (egoism) 인지도 모른다.

원이엄마의 두 번이나 반복된 글에서 .....나는 조선의 미망인들이 호곡할 때 哭의 후렴이 <여보!!  나는 어찌 살라고~~> 이 듯....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가 두 번이나 나온다.

죽은자는 비록 말이없지만.....아무리 한들 죽은자보다야 나을 것을....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다...내가 지독한 에고이스트인가?

 

그리고 또 한귀절 ,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여기서 말이다. 요즘 사람으로도 조금은 농염한 표현이다.

옛날엔 오래 출타한 남편이 들어오면 ..먼-빛으로 바라보고 얼른 정지깐으로 내닫는 게 이치였다 한다. (민초들의 삶)

노랫말에 있듯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도 아주 근대적인 신식이었다.  하물며 450여년전에 이런 표현은 무척 대담하고 할 것이다.

 

궁색한 변명이라 치면 나는 개인적으로도 무덤덤한 ....친구같은 부부애를  선호한다. ㅎ~ 삶의 투철한 쟁의를 벌인,  싸우고 찟기고 그러다가 감싸주는 전우애같은 사랑~

"턱턱 사랑 영이별이요 실뚱머룩 장래수"라는 옛말도 있듯이 옛 어르신들은 그렇게 가르쳤다.

유별나게 좋아라하면 .....그 게 마(魔)가붙어 영 이별 수가 든다고 했다. 액살이 끼일까봐 그저 소 닭보듯 실뚱멀뚱 하게 살으련다.

굵고 짧게 사랑하느니....손자 증손자까지 누릴라믄 실뚱멀뚱한 부부관계가 될란다. 나는.....그저 흐르는가 멈췄는가 싶어보이는 저 강물처럼 살란다.

늘 대하는 밥처럼 달지도 기름지지도 않게....

 

450년 후의 어느 아내가 ......<원이 엄마!! 실로 대단하였소!>라고....그 사랑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음에~~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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