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dzislaw Beksinski





보랏빛 보(褓)


작은큰통



비가 오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비가 오면 감성이 증폭되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지.

비가 오면 세상이 눅눅해지고,
비가 오면 활성이 감소되고,
그래서 기분이 침잠 되지.

시인은 비를 노래하고
주당은 술을 마시지만
그래도 비는 비일 뿐이지.

그래...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간에,
누구든지 멋진 보랏빛 보를 쓰고자 하지.

그 보랏빛 보에 수를 놓지.
치장과 각색으로 자가발전(發電)이 계속되면
마침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지.

이상한 나라로 가면
멋진 탈과 멋진 보를 만나게되고
잘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만날 수 있지.

그런데 조심해야돼.
그 아름다운 보를 절대로 열어보면 안되지.
자칫하면 공을 들인 그 보가 물거품이 돼버리거든.

우리가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유전자에 그렇게 프로그램이 되어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이구...
우리가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일까?

아닐지도 몰라.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우리와 유전자의 존속에 도움이 될까?

누가 그러더군.
유전자가 우리를 만들고
유전자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우리 두뇌가 너무 똑똑해져서
이따금은 반항을 할 수 있다더군.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보랏빛 보를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안의 괴물을 보고 경악하기도 하지만,
보를 들추고 경악하는 나는 누구일까.

보랏빛 보일까?
괴물일까?








Re:보랏빛 보(褓),, 놀라운 진실




느티나무



푸른 들과 산 속에는 생물들의 쟁탈전

느릿느릿 기어가는 굼벵이를 개미들이 산채로 물어뜯고,

사마귀는 작은 곤충들을 노리고 새들은 사마귀를 잡아먹고,

새는 매들이 노린다.



농부들이 들판에서 일하는 모습, 참 아름답다.

자연의 한 모퉁이에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저 사람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이다.

젊은 시절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다 장가도 들지 못한 채,

마흔을 넘겼다.

일을 너무해서 허리가 굽어 걸을 때는 땅을 봐야한다.

늘 빚으로 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초라한 집마저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아들은 무너지는 억장을 주체할 수 없어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자포자기이다.




도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몸담고 있는 직장의 윗사람들이나 일에 대해서 밤이면 한 잔 술기운을 빌려 욕을 하고는

아침에 눈뜨면 다시 그 거대한 조직으로 들어가 사근사근 열심히 일한다.

어젯밤 내가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비켜서서 바라보면 열심히 움직이는 이 사회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삶의 단면들의 밑바닥은 차라리 비극이다.




사람들은 보랏빛 보를, 때로는 색색의 보로 삶의 깊은 곳을 덮고 있다.

몇 겹인지 알 길이 없는 두터운 보, 이것은 가식이다.

세상은 '보랏빛 보' 가식으로 덮은 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가식을 무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어낸다면, 즉시 사회에서 격리됨을 느낀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며 스스로 사회와 함께 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혼자의 방황을 이어가게 된다. 자신의 의견이 인정받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으로부터

우매하다는 말을 들어도 반론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보랏빛 가식의 보를 들춰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사고의 격리이다.

거기에는 서로서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덮고 있던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고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본성을 보는 것이다. 초라하고 여태껏 생각해왔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정립한다면,

이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리라.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삶들은 자신의 본성을 들춰보면, 회의와 허탈에 빠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을 덮고 있던 '가식의 보랏빛 보'의 색깔이

너무나 찬란한 행복으로 기워져 있기 때문에

그 행복에의 유혹을 절대로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며,

주위의 사람들 즉 사회로부터 쏟아질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다.

가식의 행복과 비난을 감수하며 혼자의 외로운 삶, 사무치는 고독을

참아 낼 수 있을 만큼 성숙된 지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지적능력이 특출하여 일찍이

이 자연과 생물들의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천재들의 삶이 우리 범인들에게는 비극으로 비춰지는 까닭이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내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엽총을 입에 넣었다.

이상은 총독부 토목기사의 자리를 그만 두었다.

니체는 세상을 향해서 발광을 해 버렸다.

까뮈는 뫼르소를 내세워 살인을 하고도 눈도 꿈쩍 않더니

자동차 사고로 위장하여 가버렸다.

로렌스는 사막을 돌며 자신을 채찍질하더니 오토바이의 속도로
타고 가버렸다.

베토벤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슬퍼한 슈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파먹는 병고를 내버려 둔 채, 작곡에만

몰두하다 건강을 헤쳐 죽었다.




천재들의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이다.

그러나 그 천재들은 자신의 삶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여긴다.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의 괄호 밖으로 자신을 기꺼이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덮고 있는 휘황한 보를 열어볼 능력도 없고,

열어볼 엄두를 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저 색색이 수놓인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그 삶이 허망하다는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이 덮칠지라도,

세상과 함께 살아야만 숨을 쉰다는 것을 느끼는 한 우리는

그 보랏빛 보를 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망으로 살아온 삶의 허구를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산이나 산기슭의 밭 가운데 큰 혹을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보랏빛 보'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글이며,

오늘 밤 나는 내 마음에 그 보를 한 장 더 추가한다.

스스로 더 어리석어지기를 바라면서...










Parlez Moi d'Amour (샹송) - Lucienne Boyer



































      친구야 !


      유정천리


      며칠 전 근무하는 날 친구를 만났다
      친구 !

      13년만에 만난 친구
      당시에 전세 300 변두리 헛간에 살던 시절
      헛간방

      반은 연탄보일러 반은 세면 바닥 그때 딸 늦게 난 딸 1살 짜리
      그해 겨울 추운 날 영하 20도 방에서 얼음이 얼었다.
      아내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새끼 얼어 죽이겠다고..
      아이고 늦게 난 내 새끼 ! 눈물이 찡했다.


    그 즉시로 농협에서 퇴직금 담보로 융자 얻어서 시내로 이사왔다.
    2000만원 짜리 빌라 전세
    결혼생활후 처음으로 좋은 집 이사와서 살았다.
    돈아끼려고 변두리 허름한 방만 찾다가 직장생활 13년만에...

    그때 그 어렵게 살던 시절
    그 전세 얻을 돈으로 시내 땅을 사고 또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 땅에 1999년도에 원룸을 손수 사람 사다가 지어 세를 받으면서
    생활 형편이 피었다.

    각설하고 그때 어렵던 시절 만났던 사람
    옆집에 세 살던 사람
    그 동갑내기 친구 ?
    어머니 홀어머니 과부 어머니
    근처 조양 회사에서 운전하던 사람
    나이는 같으나 나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친절하고 양심적인 사람.

    퇴근하다 보면 그 어머니가 마늘을 깐다.
    마늘 까는 일 부업 중국에서 수입한 마늘을 받아다가
    마늘을 까면 하루 5천 원 번다고 한다. 마늘이 얼마나 독한지 그 손이 시꺼멓다.
    그래도 열심히 하신다... 그 당시 60세

    나도 우리 어머니 생각나니 쉬는 날 놀러갔다.
    그냥은 못 가고 음료수를 근처 가게에서 사 가지고
    "잡수시고 하세요." 하면서
    "참으로 열심히 사시네요." 하면 그렇게 좋아 하셨다

    그 아들 동갑내기 그 부인도 참으로 착했다.
    "어머니가 하지 말래도 하세요."
    용돈 드린다고 해도
    "너희들이 번 돈 안쓰러워 못쓴다." 하시면서 하신다.

    그 어머니가 환갑을 하셨다.
    이웃집이니 안 갈 수 있나.
    돈 봉투 넣어서 갔다.
    술을 먹는데 그 아들들 딸들이 그리 좋아할 수가 없다.
    "많이 드세요." 하며
    먹고 가려고 하니 "더 놀다 가세요." 하며 붙잡는다.

    같이 먹던 일행, 근처 회사 사장 과장
    동갑내기 운전사 상관들 ?
    내가 일갈했다, 한마디했다,
    그 어머니 마늘 까는 어머니 도와드리자 ..? ..

    부좃돈 외 내 돈 1만원 먼저 냈다,
    그리고 당신들도 내라 해서 각자 1ㅡ 5만원 10사람 00만원
    더 모아서 그 어머니에게 드렸다.
    "마늘 까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세요." 하며 그리고 나도 이사를 왔다

    며칠 전 근무 중에 사무실 앞 지나가는 사람 !
    어디서 많이 봤는데....아하 그 어머니의 아들이다 .
    만나 반가워 근처 약국에서 박카스를 나눠 먹는데 그 친구가 말한다.
    내 근무 끝나는 시간 알려 달라고 하면서
    기어코 술 한 잔 대접한다고 하면서 집에 갔다가 밤 9시에 나왔다.

    그 친구가 말한다.
    그 동안 변한 이야기, 어렵게 세 살던 사람
    그 친구가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지금도 어머니 정정 하시다고 하고 지금은 73세이신 데 산에 가는 취미로 사신 단다.
    아마 혼자 일하셔서 자식 모르게 모아 놓은 돈이 아마 2천은 될 거라며 자랑이고,

    자신도 이제는 시내버스를 운전한다면 자랑한다.
    좋은 회사 왔다고, 경기 고속 ㅇㅇ ...
    사장이 성공시대에 나온 분이라며 부모모시는 사람은 부모 앞으로
    통장을 해서 5만원씩 더 넣어준다고 한다

    한 달에 130 가져온다며 자랑이고 1년에 퇴직금 전별금 포함 700씩 늘어난다며 자랑이고.
    처갓집 근처 논 10년 전 1000평 한 평에 1만 2천 원 사놓은 게 있는데
    논 옆으로 길이 뚫리면서 지금 평당 15만원 간다고 자랑이다

    집도 두 채 장만했다 하고, 아내가 공장 오래 다녀 돈 100 이상 벌어
    두 부부가 월 250정도 번다고 자랑이고, 나에 전체수입 보다 3분의 1밖에
    못 버는데도 참으로 긍지가 대단하다.
    긍정적인 사람 !

    딸이 공부를 잘해 반에서 2등 고 3인데 근처 명문학교 다닌다며
    ㅇㅇ 교대 시험 봐서 선생님 할거라며 자랑이고,
    열심히 살아서 빚은 없다며 자랑이고,
    앞으로 돈 모은 것 가지고 아내에게 식당 하라고 했다며 자랑이다.

    그 친구가 말한다.
    친구 하자고 나더러 의리가 있다고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때 어머니 회갑 날 친구가 놀던 장면 비디오 찍어놨는데
    지금도 그걸 보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머니 돈 드리는 것 일행과 노래하는 것 다 찍혔다 한다

    그 비디오 !
    13 년 전의 내 모습 !
    그걸 보러 간다며 또 약속했다.
    또 만나자고
    님의 어머니도 뵈올 겸...










      태양아 빛나라 !



      유정천리


      어제 아침 태양이 보인다 햇살이 비친다.
      얼마 만에 햇살이냐.

      요즘 시골 농민들 너무 울상이다.
      벼농사 고추농사 절단 난 사람들 많다.
      그들이 어떻게 빚 갚으려고...

      농사가 잘 되도 빚 갚기가 어려운데.. 자식새끼 학원비 빚도 상당하다
      그래봤자 취직도 안 되는데, 고급인력(?)이 너무 많다.
      쓸데없는 고급 인력..

      특히 아랫녘은 논에 벼를 갈아엎는 사람들도 있다.
      비가 매일 오다시피 하니 벼가 이삭이 나올 때 수정을 못한다.
      혹명나방으로 벼 잎이 말라 쭉정이 벼다.
      한숨으로 지샌다. 거기다 농산물 훔쳐 가는 놈까지 생긴다.

      하우스 안에 모셔둔 고추 등 무차별로 훔쳐간다.
      먹고살게 없어 훔쳐간다면 그나마 다행인가..?

      나야 뭐 그래도 월급쟁이 하면서 부업으로 농사 지니까 어쨌든 살지만
      많은 농민들 정말 어렵다. 곧 닥칠 수입개방도 문제.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 눈이 무서워진다. 인심이 사나워 진다.
      그런데다가 정치인들 돈 먹는 소리 대기업 노조들 데모하는 소리
      화물연대 파업하는 소리가 서민들은 울린다.

      앞집 사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
      요즘 일이 없다며 매일 논다고 울상이다.
      그러면서 욕한다.
      그 개새끼들 데모 때문에 우리까지 일거리 없다고
      같은 노동자가 노동자를 욕하는 세상.

      또 몇 놈이 나를 슬프게 한다.
      위조 카드 사용하다 걸린 놈, 윤락 업소에서 돈 받아먹은 놈
      그놈들이 다 경찰관이다,

      거기다 어느 신부 예비 신부의 현금 수송차 강도 미수
      젊은 부인의 새마을 금고 강도 소리
      이제는 과거의 어여쁜 처녀들이 아니다.

      이게 다 무엇인가.
      다 빚진 자들의 짓이다.
      어느 직업이든 빚진 자들은 범죄의 앞잡이가 된다.
      300 만 신용불량자들 갈곳이 없다.
      이들이 새 삶을 이루게 정치권이 움직여야 한다.

      일자리를 창출해야한다.
      오 ! 태양아 빛나라 !
      그나마 농사라도 잘되게
      먹거리나마 자급하게..,















































    졸업여행



    아들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간다.
    미국은 대학을 가게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이다.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하니 방학 때나 오게되고, 그렇게 대학 마치면 취직을 한다.


    그나마 가까운 도시에 직장을 잡으면 가끔이나마 볼 수 있지만
    타 주에 가게되면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집에 오게되니
    온전히 부모 밑에 있는 건 고교까지다.


    떠나 보내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2년 전 큰애가 졸업하고 대학갈 때도 둘이 여행을 했는데
    딸도 나도 무척 즐거웠고 좋은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동부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며 미국의 역사를 보기로 하고
    New Jersey, New York, Conneticut, Roade Island, Massachusette
    이렇게 5주를 거쳐 보스턴에 도착했다.


    영국군과 맞서 싸운 미국독립의 역사가 배어있는 Boston.
    지금은 하버드나 MIT 등 유명한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청교도들이
    미국에 뿌리내린 전통의 도시다.


    300년 남짓한 역사를 간직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많은 관광객으로 길이 좁아도 식민지시절 지어진 건물은 허물지 않고
    일층만 개조해 상점으로 쓰고 낡고 작은 집들도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이 대단하다.


    May Flower호가 1670년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Plymouth를 둘러보고
    배를 타고 Cape cod로 건너갔다.
    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니 무수한 생각이 오간다


    처음 그 애를 낳았을 때 "아들이에요" 하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큰댁에 아들이 없어 종손이므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응아 닦아달라던 어린애가 어느덧 저리 자라
    듬직한 어깨를 가진 청년으로 변했는지....


    초등 학교 입학식 때 엄마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던 큰 눈망울...
    아빠한테 자전거 배우던 날 처음 혼자 타게되자 볼이 발개져 들어와
    기어이 나를 끌고 운동장에서 자랑해 보이던 개구쟁이 내 아들...
    잦은 병치레로 날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던 아이.....
    우수한 누나에게 가려 항상 야단을 더 맞던 불쌍한 아들...


    이것저것 잔소리만 하고 사랑한다는 말 해본지가 언젠지 ...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니느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 자신 적응하기 바빠 무심한 엄마였다는 자책...
    사내아이라 사춘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서로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나보다 흠씬 커버려 언제부터인가 품안에 꼭 안아주지 못했는데
    벌써 내 곁을 떠나는구나.....


    가만히 아들 곁에 선다.
    해질녘의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둘 다 말이 없다.
    너무 아름다워 비장함까지 든다 .
    아들이 팔을 내 어깨에 두른다.


    매번 "구여운 우리엄마" 하며 놀리면
    '임마, 그래도 넌 내 배에서 나왔어" 하고 엉덩이를 치곤 했는데,
    해가 서서히 바다로 들어가는걸 보며 아들에게 말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이 안가지? 너랑 나도 그래.
    네가 바다이고 하늘일 수도 있고 내가 하늘이고 바다일 때도 있고....
    가족 떨어져 어디 가든 힘이 들 때면 지금 우리 보고있는 이 바다 생각해
    망망한 끝이 없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저녁노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조그맣게 여겨질 거야 아주 하찮은 거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과 깜깜해진 바다를 한참 더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도 다짐을 한다.
    아들이 떠난다고 슬퍼하지 말자.
    강보에 싸인 애기를 저만큼 키워 사회로 내보내는 내 책임을
    다했으니
    뿌듯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내 삶을 생각해 보자.
    그 애만 졸업한 게 아니라 나도 양육에서 졸업한 거다.
    이제 엄마의 손길은 필요 없으니 나도 애들로부터 독립해야 할 때다 .


    졸업여행
    여행이 끝나 어디론가 입학해야 하는데 나는 어느 학교에 입학해야 할까?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아들애를 기숙사에 넣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를 붙들고 있는 화두이다.



    글/필라







..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글/사라




지슬라브 백신스키/ Zdzislaw Beksinski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세상의 온갖 직업과 모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종교의 신앙마저도
      행복의 열쇠를 찾아 나서는 행위이자 몸부림이다.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가꾸는 것이다..
      규격화 된 행복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을 느끼는 체감온도는 사람마다 또는 지역과 풍습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개가 일의 성취감, 승리의 만족감, 사랑의 쾌감과 설렘 등에서
      행복의 체감온도가 상승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만족감과 포만감도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마치 행복을 만나는 것이 가파른 언덕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면 불행을 만나는 것은 언덕 위에서 내리막길로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속도와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른 모래를 가득 쥐고 있는
      포만감이 행복이라면 마른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빈주먹뿐인 허탈감이
      불행인 것이다.


      행복이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와 정진에 의해 쟁취하듯 얻어지는 것이라면
      불행은 생활의 틈 사이와 세월의 시간사이로 솟아 나오는 잡초와 같아
      잠시만 방일하거나 방심하면 무성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은 언제나 곤충의 더듬이처럼 무척추 동물의 촉수처럼 끊임없이
      행복거리를 찾아 분주하다.


      짐승들의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본능처럼 사람의 온갖 행위는 바로 이 행복을
      위한 몸부림이자 치열한 싸움인 것이다. 학교에는 시험지옥이지만 다녀야 하고
      직장은 스트레스의 창고지만 버릴 수 없는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다.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얼 모르고 덤벙대며 하는 게 결혼이지만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그 배경은
      혼자의 힘겨움보다는 둘이서 뜻과 힘을 모아 행복의 집을 설계하고 짓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이 지나고 7년쯤에 접어들면 뜻과 힘이 모아지기는커녕
      삐걱대며 불거져 나오는 생활의 파편에 서로 상처만 안고 으르렁대기 일쑤이다.
      연애와 약혼시절의 애정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생활의 뼈만 생선의 가시처럼
      앙상히 남아 불편한 관계로 서로 등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으르렁거리고 등 돌리며 불편한 이유도 철저히 계산된 행복에 대한
      손익계산서 때문이다. ' 내가 저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저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하며 과대망상을 하는 것도 보다 나은 행복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에 있어 목마름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이혼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목마름마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온몸의 나사가 모조리 풀린,
      포기하고 체념하고 사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이 포기하고 체념하는 무관심은
      숱한 눈물과 한숨 속에서 체득한, 자기만이라도 더 이상 망가지지 않기 위한
      생명보전적 욕구 때문이다. 이 생명보전적 욕구는 언젠가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을 거라는 가냘프나마 행복해질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혼하는 길이 더욱 불행해지고 처참해지는
      선택이라면 누가 주위에서 이혼을 권해도 단연코 마다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숱하게 고민하고 번민의 나날을 보내다가
      최후의 선택인 이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결혼은 마치 관습처럼 처녀 총각들이 의무이행이나 하는 것처럼 뭘 모르고
      덤벙대며 하는 것이지만 이혼은 결코 결혼처럼 가벼울 수 는 없는 것이다.
      결혼과 이혼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전자는 축하객이 많이 몰려들지만
      후자는 냉소와 손가락질과 입방아질이 몰려든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결혼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면 이혼에는 커다란 포기, 크나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늦을수록 좋지만 이혼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에도 후회나 아픔이 따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결혼은 신중할수록 좋고 이혼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장거리버스나
      기차를 탔을 경우에도 그날의 옆 좌석 사람에 따라 여행길이 즐거울 수도 짜증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루 이틀도 아닌 일생을 마주보며 잠자리를 함께 해야 하는 경우라면
      선택의 신중함이 배가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혼만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얼마큼 합께 살아가다 보면 발톱과 손톱은 물론이고 오장육부의 움직임까지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


      참고 또 참으며 삭혀 보지만 결국 둘의 만남이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보다 더 큰
      고통이라면 망설임 없이 갈라서야 되는 것이다. 빠를수록 좋다는 이유는 간단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부서진 수레보다는 젊음과 건강이 남아 있을 때가 홀로 서기에도
      재출발에도 든든한 활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라한 더블보다는 화려한 싱글 쪽이 어느 면을 보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화려한 싱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정적인 능력이 으뜸이 될 것이고 두 번째로는 예술이든
      학문이든 노동이든 생활의 활력과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그에 따른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은 곧 행복과 연결되는 고리이자 다리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마저 잃어버린 싱글은 차라리 초라한 더블 쪽에서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뒤이어 그럴 바엔 해보고 후회하겠다며 모두들 결혼 쪽으로 기울고 있는
      세상이다. 결혼생활은 끊임없는 게임의 연속이다. 알량한 자존심대결, 치사한 먹거리
      투정, 습관과 성격이 다른데서 온 이질감, 사소한 이해관계로 벌어지는 틈, 드러나는
      발톱, 쪼그라드는 인격, 거기에 따르는 실망과 배신감, 이쯤 되고 보면 상대방의
      몸에서는 단내가 나기 마련이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은커녕 의욕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보는 것만도 역겹고 힘겹다. 상대방만 미운 게 아니라 그의 부모도 그의 형제자매와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에 각자가 현명하게 주머니를 따로 차는
      경우가 허다하지만....물론 최악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리라 본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결혼생활에 있어 분명한 진리는 죽는 날까지
      해로하는 금실 좋은 부부일지라도 남편은 남자였고 아내는 여자였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아내를 묶어둘 수는 있을지 모르나 여자의 본성은 잡아둘 수 없는 것이며,
      아내는 남편을 묶어둘 수는 있을지 모르나 남자의 본성은 잡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하거나 이혼하거나 아니면 독신으로 살거나 궁극적인 삶의 지향목표는 보다 나은
      행복의 추구에 있다. 이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는 삶에 대한 집착 그 자체이며
      생명의 뿌리와도 같은 원초적 본능인 것이다. 종교와 신앙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도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자는 데에서 신앙이 발돋움하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신앙의 새싹은 발아되지 않는다. 불안하고 괴로운 슬픔과 좌절
      속에서 모든 신앙은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르므로 신앙인 이라면 누구나
      안락한 생활, 편안한 마음, 평화로운 나날을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를 전면 부인하고 괴롭고 슬픈 형벌의 삶을 살지라도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또는 갖은 고행(苦行)을 몸으로 실천하며 부처가 되겠다고 벼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나름대로 그 행위 자체서 위안과 희망, 또는 행복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심지어는 자살하고자 결심하는 사람, 이미 자살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으로서는
      그 방법만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죽어있는 시신을 발견하고 가족이나 동료들, 아니면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추구의 명예부분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자살은 단순한 포기가 아닌 또 하나의 앙갚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결심하고 결행하는 사람이 복잡하게 앙갚음에 대한 반사여론까지 계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지 모르나 자살하는 자는 대개가 유서를 남기거나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그것을 사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결심하고 결행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 자살자로서는 그 방법만이
      괴로움을 잊을 수 있고 편안히 잠들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에 이르게 하는 행위가 곧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온갖 행위는 곧 행복의 열쇠를 찾아 헤매는
      몸부림이자 게임의 승리를 위한 노력인 것이다. 생존경쟁은 행복을 위한 싸움이며
      행복의 체감온도에서 온갖 희열과 번민이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행복의 만족도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변화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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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터의 추억과 그 즐거움


    개여울


    지금도 길다란 줄에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 하얀 와이셔츠와
    아기의 기저귀가 바람에 나부끼는 여자의 작은 행복을 그린 시를 건네 준
    한 사람이 생각난다.


    그것이 프로포즈였다고 들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빨랫줄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보면 시속에 풍경이 주는 하얀 평화스런 모습과
    작은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잘하는 중에 하나가 빨래하는 거다.
    며칠 것을 한꺼번에 모아두었다가 하는 게 아닌 아침저녁과 수시로 하는 편이다.
    "당신 빨래하는 게 재미있어?
    "가끔 주머니 속에 있는 것까지 세탁해서 속상할 때도 있지만 빨래는 잘해..."
    남편의 말이다.


    빨래가 조금이라도 쌓여있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느껴 여행에서 늦게 돌아왔어도
    빨래는 해놓고 자야 속이 시원하다. 한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알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빨래를 잘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집 앞에 냇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숫대야에 빨래를 담아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힘차게 두드리다가
    흐리는 물에 이리 저리 헹구어서 손으로 비틀어 짜면 떨어지는 물방울의
    촉감에 마음까지 게운 해진다.


    옛날 어부들이 오랫동안 바위에서 생활하게 되면 옷을 벗어서 배 끝 모서리에
    매달아놓는다 한다. 그러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이 물살에 다 빨아지고
    아마 그런 원리로 세탁기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맑은 하늘아래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할 때면 작은 송사리 떼들이 지나가다
    발을 간질여 놀라기도 하고, 물풀이 떠내려오다가 발에 걸려 미끄러지기도
    하며 건너편에 아는 친구라도 보이면 "이제 온 거야 ? 하며 안부를 물었던
    그런 빨래터였다 .


    그때 비누는 양잿물로 만든 시꺼먼 비누, 그 특유의 냄새는 싫어하지만
    비누를 살 때 가끔씩 냄새를 맡아보고 산다.
    옛날 그 빨래 비누 냄새가 조금은 느껴지기 때문에 지금도 세제보다는
    비누를 좋아한다


    이런 우리 동네에 주말이면 시내에서 빨랫감을 잔뜩 리어카에 싣고 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시골 장터와 같이 북적거린다.


    빨래터를 아예 길다랗게 작은 높이로 3-4층으로 만들어 놓은 탓으로
    1층까지 물이 차있을 때는 2층에서 하면 되었고 물이 없을 때는 바닥으로
    내려가 돌 위에 앉아 옷을 허벅지까지 말아 올리고 발을 담그고 빨래를 하면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대야에 물에 띄워놓고 다슬기와 조개를 잡고 고무신으로 물고기
    잡느라 시끄럽고 즐거웠던 소풍 같은 주말 빨래터...


    날씨 좋은 날에는 곳곳에 아예 솥단지 까지 가져와 빨래를 삶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에 작은 숲 나뭇가지에 빨래를 말려가기도 했다.
    깊은 곳에서는 남자들의 수영 구역이었고 얕은 곳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수영장이기도 했으며(옷을 입은 체) 밤에는 동네 사람들이 물가로 나와 목욕을
    했었던 곳... 모두 함께 즐기는 여름놀이 장소였던 것이다.


    때론 남자들이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기도 하고 몇 개의 어항을 가지고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잡은 고기 중에서 색시 붕어의 선명한 색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얼마나 색깔이 이뻤던지...


    후에 우물대신 작두 (물을 넣어 펌프 식으로 물을 퍼 올림 )가 나와
    물이 차갑고 시원하긴 했지만 물이 달라서인지 빨래 때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나무 빨래판에 대강 주물러 세탁한 다음 농구공 넣듯이 옆에 세탁기를
    향해 던지는 손빨래를 주로 많이 하는 편이다


    일본여자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빨래판을 사 가지고 간다는 얘기를 오래 전에 들었다.
    빨래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다.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우리들 정서를 얼마나 빼앗아 가고 있는지...
    풍경화에서 나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방망이로 두드려가면서 냇가에서 빨래하는
    풍경이 그리운 여름이다.


    또 겨울철에는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라 호호 입김을 불어 가며 빨래를
    하기도 했고 많은 빨래를 하는 사람은 장작을 지펴가면서 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빨래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씻어내기도 했던 좋은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그렇게 한 다음 햇볕에 말린 빨래의 뽀송한 느낌...
    풀을 하여 아직 덜 말린 이불빨래 같은 것은 다듬이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구김살을 편 다음 햇볕에 말리면 빳빳해진 빨래 사이로 숨바꼭질하다 혼났던 기억들...


    말린 빨랫감을 손잡이 달린 동그란 다리미에 시뻘겋게 달군 숯을 넣고
    엄마와 둘이서 붙잡고 하던 다림질 불과 30-40년 전 일인데 꼭 이조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눈부신 태양아래 장대를 받친 빨랫줄에는 숨바꼭질하듯 빨간 잠자리가
    떼지어 날아와 앉고 건너편 이웃집 느티나무에서는 매미가 합창하는 소리들.


    저녁 늦게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다듬이 방망이 소리
    그 어떤 절묘한 악기소리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소리가 아직도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다니..

    이젠 볼 수 없는 그래서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그나마 아주 잊어버릴까봐 기억을 더듬어 써본다 .
    벌써 아이들에게 딴 세상 동화처럼 되어버렸지만...







    이름 값을 생각하며..


    개여울


    아주 오래 전 신문에서 아름다운 한글 이름을 공모했는데
    대상을 받은 이름이 참, 아름, 다움, 이란 이름을 가진 형제들 이였다.
    자녀 셋을 순 우리말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지어서인지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부모의 소망이 담겨진 이름 대로 잘 사는 것이 이름 값을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너무 귀하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그 이름 값을 못한 사람도 있고
    그 이름에 걸맞게 이름 값을 한 사람도 역사에 많이 있다.


    귀하고 화려하게 지으면 貴人縛命이라했던가?
    잘났다고 뽐내면 귀신도 시샘하고 명도 짧아진다 해서
    평범하게 오래 살라고 붙인 서민들의 이름들을 보면 재미있다.
    개똥이 쇠돌이, 마당쇠, 돌쇠 ,먹쇠 ... 향단이, 향심이, 곱단이 ...


    여자는 시집가면 그나마 아예 이름도 없이 누구 엄마 어멈 아니면
    원주댁. 서울댁 그리고 첫째야. 둘째야. 이렇게 불렀고
    이름도 길례. 말례. 분례. 순례. 복순이. 영순이. 말순이. 끝순이 등....


    또 일제 시대의 영향으로 끝에 子 가 많이 들어간 영자. 순자. 춘자. 명자...
    자녀가 많다보면 첫째가 순태인데 여섯 째 막내 이름은 태순이
    아들이 소원인 집에 딸이 나서 섭섭이 그만 낳으라고 붙인 이름이 끝순이. 말순이
    별 뜻도 없이 붙여진 많은 이름들.


    그런 이름들 때문에 부모원망을 하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고친 사람이 주위엔 많이 있다.
    내 친구 중 옥순이란 친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촌스럽고 싫다고 동희라고 부른다.
    깜박 잊고 "옥순아"하고 부르면 놀라 정색을 하며 싫어한다.


    역사책에서나 떠들썩한 사건 뒤에 신문 방송에서 불려진 이름을 보며
    자기 이름 값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노력이 필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중히 여긴다
    예수란 이름은 (저희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했으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로( 이스라엘)로 축복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수제자 어부 시몬은 베드로(반석)란 이름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으니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지어준 이름들이고 그렇게 살다간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아들을 낳았을 때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고른 이름이 曉敏(새벽 효 민첩할 민) 秀敏(빼어날 수 敏민첩할 민)
    두 아들의 이름이다. 새벽처럼 맑고 부지런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 같은
    사람이 되고 민첩하고 빼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좋은 이름이 많았지만 이 정도는 적어도 부모의 바램이 아닐까 ?


    내가 아는 목사님은 아들이름을 勝我 (승아 )라 지었다.
    자신을 이기라는 뜻인데 의미가 있어 좋아 보인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려운데 ... 이름 값을 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본다.


    엄마는 결혼한지 10년이 넘어서야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외삼촌이 지어준 이름이 愛永이다
    여자는 보통 永자를 잘 안 쓰지만 사랑 받고 오래 살라고 지어준 이름
    하지만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한다.
    사랑을 많이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그것처럼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자기 이름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면
    그렇게 되려고 적어도 노력을 하며 산다면
    이 세상에 나를 보내주신 하나님과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될 것이고
    나 또한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훗날 자녀에게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김폴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제헌절을 전후하여 아내의 재가를 얻자 이런 저런 이유로 김삿갓처럼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푸른 파도가 펼쳐지는 동해바다를 따라서
    망양의 하얀 모래를 밟아도 보고, 흰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를 가슴에
    안으며 강원도로 미끄러져 간다.


    바다가 보이는그린 캠퍼스 국립삼척대학교가 건립한
    해신당공원에도 들렸다. 처녀총각의 애절한 사연과 남근의 전설로 유명한
    갈남 2리의 공원은 영상수족관을 비롯 어촌의 옛 모습과 체험공간 등
    어촌 생활사를 전시하였으며 애랑과 섶넘이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이
    있어 관광객의 발을 머물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번의 여행 목적지는 영월이다.
    애달픈 단종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고장을 두루 섭렵하고팠기 때문이다.
    단종의 유폐지는 청령포이다. 청령포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




    (청령포 지방기념물 제5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에 깊은 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뒤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서 300척, 남북 470척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는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시작하셨다.


    고도(孤島) 아닌 이 절묘한 고도,
    이 곳처럼 절묘한 지형도 드물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영월 근교에
    이르러 300도 정도의 곡선을 그리는 곳이다. 따라서 3면이 강물인
    그 속은 숲이 우거지고 뒤에는 육륙봉의 험난한 산이 서 있어
    유폐시키기 알맞었을 것이다

    제한 구역 끝머리 제1봉 중턱에 세워진 망향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아리게 한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1.5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탑, 그러나 그 탑의 의미는 어느 탑보다 애처롭다.
    어린 몸으로 이 이상 높게 쌓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단종은 여기에
    오르면서 돌을 하나씩 나르면서 서낭당을 만들려고 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청령포의 이모저모)



    어린 단종은 여기에 올라 설 때마다. 산너머 멀리 있는
    그의 비인 정순왕후와 한양을 못내 그리워하였다니 어찌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앞에 놓고 아비규환의
    세계를 생각하면 삶이 무엇이고, 영욕이 무엇이관대 하는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한 두번 억울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세상 시름 다 잊고 한 번 쯤 이런 곳에 올라 한 걸음
    뒷발치에서 조용히 삶을 관조해 보는 여유야말로 이 세상 괴롬 다
    잊게 하지 않겠는가?

    망향대에서 정면에 바라보이는 곳이 노산대이다.
    단종은 수시로 이 곳에 올라 시를 짓고 읊었다 한다.
    또한 노산대는 단종이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를 따라 온 신하와
    궁녀들이 낙화처럼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곳이기도하여
    한참동안 눈을 감아 본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 이름:이상구



  


      도시로 가는 피서


      갑자기 도시에서 사람들이 밀려온다
      물 있는 계곡엔 텐트의 물결
      도로가에 선 차들의 기름 냄새
      고기 굽는 냄새
      물놀이
      고스톱
      술판
      늘어진 낮잠
      부채질.
      한 밤 중에 고기잡이
      우당탕 푸당탕...
      대낮부터 만취해서
      늘어진 사람,
      그 옆에서 부채질하는 사람(여자다)
      .
      .
      .
      자유 천지다

      내 낚시터,
      붕어 메기들은 놀라서
      숨 죽이고 있다

      그럼 나도
      텅빈 도시로 나가서
      피서나 할까

      거들먹거리며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밑을 갈 짓자 걸음으로
      험험 헛기침하며
      걸어봐야지

      할 일 없이 지하철타고
      왔다갔다도 해보고

      코가 향하는대로 가서
      도시의 단맛으로
      세치 혀도 즐겁게 하고

      혹시 두둑한 친구를 만나면
      팁 주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와 함께
      농밀한 터치도...

      계곡에 밀려왔던 사람들이
      다시 도시로 와서
      잠시나마 정들었던 도시의 거리를 차지하면
      난 계곡으로 와야지

      별들이 내려 앉고
      메기들이 별들의 이야기를 줏어 먹는
      꿈의 계곡으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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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연재).............잠실 베레모  (0) 2003.08.02
휴대폰에 새기는 말...............................솔향  (0) 2003.07.25
휴대폰에 새기는 말..........................솔향  (0) 2003.07.25



..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1)




    군복을 입은 형님과 C 레이션


    나는,
    6남매의 막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맨 위에 형님이고 중간에 누님들이 넷이었고
    막내로 내가 태어났으니 동기간들의 사랑은
    무던하게 많이 받았을 터였다.


    나에게 형님과의 첫 번째 기억은
    군복을 입은 형님의 모습이었다.
    형님은 무척 늦게 군대를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들의
    면회가 허용되던 시절이라 시골의 부모님들은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는 주말이면 온갖
    음식을 장만해서 이고 지고 훈련받느라고
    고생을 하는 아들을 찾아갔었다.


    그 시절에는 논산훈련소가 참으로 무서운 곳이었다.
    여름철에 날씨가 무더우면 하루에도 훈련병들이
    몇 명씩 죽어가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날씨가 더울 때면 오늘은 몇 명이나 죽었을까
    하는 것이훈련소 주변 사람들의 화젯거리였다.
    어떤 날에는 무려 일곱 명이나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기는 그럴 수밖에...
    어린 내가 보아도 누런 황토 흙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신병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지보다도 더 흉했었다.


    피부는 새까맣게 타고 굶주려 바싹 마른 말라깽이에다 훈련복은 너덜너덜 다 떨어져
    보기에도 상거지 같았으니 오늘날의 민주화된 군대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님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소냐 !!
    나의 어머님도 큰아들을 뒤늦게 군대에 보내 놓고는 매주일 면회를 갔었고
    그 중에서도 내가 몇 번쯤 따라 간 기억이 있다.


    면회 가는 좁은 길, 포장도 되지 않아서 먼지가 마구 일어나는 도로로 군용 트럭이
    마구 달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또, 어디인지 지금은 잊어 버렸지만 길가의 흙벽돌집에서 고향마을 출신의
    어느 가족이 살고 있었다는데, 어찌나 굶었는지 지나가던 군인이 보고는
    하도 불쌍해서 짬밥을 한 삽 퍼주었다는데...


    그 가족들... 며칠이나 굶었던지 넘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짬밥을 퍼먹은 까닭에
    온 가족이 먹은 밥으로 인해 급체를 해서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뻔했단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소....훌쩍...훌쩍...


    이야기를 바꾸어,
    그 형님이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
    군복을 입고는 커다란 자루 백을 메고 온 형님이 무척 멋있게 보였다.
    더구나,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는 앞에서 자루 백을 열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낼 때는 마치 형님이 마술사라도 된 것 같아 보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C 레이선 !!!
    캔을 따고 한 조각씩 나누어주던 형님의 그 거룩한 모습 ... !!1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 (2)


    형님이 멋진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다.



    시골 아이들은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기를 좋아했다.
    내가 일 곱살 때였던가... 그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앉아서 타는
    스케이트도 없었고 내가 직접 만들 실력도, 연장도, 자재도 없었다.
    나는 좀더 큰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스케이트가 한없이 부러웠다.
    흥...! 좋아 ! 형님한테 졸라 봐야지...

    - 형아 ! 나 스케이트 하나 만들어 줘...
    - 얘는... 무슨...
    하고는 형님은 무심결에 내가 형님한테 하는 최초의 부탁...
    그 어렵게 한 부탁을 거절하고 말았다.
    - 엥 ?


    나는 너무나 충격이었다.
    아니 이 귀여운 막내의 청을 무지막지하게 거절을 하다니...??
    - 엥 ? 엉 ? 우와 !! 엉 엉 엉 엉 엉 !!!
    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엉엉엉 대성통곡을 하면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 어 ?? 어럽쇼 ??
    형님은 그만 나의 날카로운 공격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어 !!! 야 !!! 태종아 ! 가만히 있어라 !!!


    흠... 그러면 그렇지... 내가 얼마나 아이큐가 높은데...
    결국 형님은 그날로 아주 멋진, 우리동네에서 제일 멋진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귀여운 막내의 손에 들려주었다.
    - 봐라 ! 얘들아 ! 내 스케이트가 너네들 것보다 훨씬 멋있다 !
    나는 스케이트를 타는 것보다도 아주 매끈하게 생긴 스케이트를 들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런데, 얼음판에 가서 그 스케이트를 타고는 씽씽씽 마구 달린다가
    방향을 조절하는 솜씨가 서툴러서, 다시 말해 운전실력이 없어서 !!!
    마구 달려서는 그만 방향을 못 잡고 논둑에 얼굴을 들이 박아버렸다 !!

    어이쿠 !! 눈에서 열불이 나고 대낮인데도 눈에는 별이 번쩍 번쩍거렸다.
    당연히 코피는 터져 줄줄 흐르고... !!
    지금 생각해도 아이쿠 우스워라... ㅎㅎㅎ
    나는 그 스케이트를 애지중지 하면서 3년도 더 사용했다.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5)


    기울어 가는 가문의 안타까운 형님의 모습!!



    형님은 군대 시절에 늦장가를 들었고, 그 무렵 우리 집 경제는 형편이 없었다.
    부친께서 병환 중이셨고, 종답을 두고 집안끼리 송사가 벌어졌고
    또 형님이 장가드시는 비용 등등하여 집안 경제는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였다.


    본래 호방하신 성품의 부친께서는 형님과 승부수를 띄웠다.

    - 야 ! 시종아(형님 이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병들어 기운이 없고
    이 쌀 30가마니가 우리 집 마지막 재산이다. 네가 큰아들이니
    이 쌀 30가마니를 가지고 장사를 하든지 논 선작을 사서 농사를 짓던지
    네 마음대로 해서 집안을 이끌고 가거라 !!


    어 !! 어버님 이것이 무슨 말씀이오니까 ?
    참으로 30세가 안된 시골의 청년 형님께는 날벼락일 것이었다.
    군대는 겨우 갔다왔지만 초등 학교 2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세상 경험도
    아무 것이 없는 형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님, 조카딸, 누나 셋,
    그리고 나 이렇게 무려 아홉 가족의 가장을 일거에 물려받았으니...

    시골집 한 채 밖에는 재산은 아무 것도 없고...
    - ....... ...... 몇 일간이나 형님 묵묵 부답.....


    형님은 장사의 장자도 모르던 분이었으니 무슨 도리가 있었으리요.
    부친께서 물려주신 쌀 30가마니로 가족들 1연치 식량을 남겨두고는
    나머지 쌀 20여 가마니로 고향에서 논산 읍내 가는 길옆... 그러니까... 정확하게
    논산 관촉사(동양 최대의 석불로 유명한) 앞들에서 선작 12 마지기를 사서
    일년 내내 뼈빠지도록 농사를 지었으나...


    겨우 본전을 찾기에도 부족했고 에라 ! 도시로 가자 !
    그래서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공항면 (지금 서울시 강서구 공항동)에 있는
    외가의 친척 되는 분이 경영하는 안전제약소(당시로서는 꽤 큰 회사였는데) 에
    취직을 하여 고향을 등지고 탈 시골에 성공하였다.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마지막회)


    형님의 마지막 편지 한 장


    내가 고리에서 근무하던 어느 겨울날, 뜻하지 아니한 형님의 편지가 날아왔다.
    참으로 처음 받아보는 형님의 편지요, 그 내용이 또한 너무 간절하였다.

    - 동생, 내가 그 동안 술을 많이 마시고 집안살림도 돌보지 못해 동생에게 미안하네.
    동생도 어머니 모시고 고생이 많겠으나 내가 그 동안 밀린 막걸리 값이 20만원인데
    좀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는 마음을 잡고 바르게 살겠네....


    아 ... !! 우리형님이 마음을 잡으신 단다 !!
    나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뛸 것만 같았다.
    그 때가 음력설 보름 전쯤이었으니 설날 고향에 가서 20만원 막걸리 값 갚아 드려야지..!!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편지를 받고서는 불과 며칠이 안 된 어느 일요일 오후 한가한 시간에...
    따르릉 ! 따르릉 !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네? 아니, 뭐라고요 !!??
    전화소리에 예민하신 어머님이 먼저 눈치를 채시고는..
    - 얘 ! 무슨 전화니 ? 엉 ! 무슨 전화냐 ??


    전화에서는 어머님께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나
    상황이 어떻게 숨길 처지가 아니었다.
    - 형님이...
    - 뭐 ! 얘야 ! 빨리 가자 !


    오히려 앞장을 서시는 어머님을 떼어둘 방안도 없어서 급히 동네 약국에 가서는
    현금 70만원을 빌려 가지고는 택시를 불렀다.
    경상도 고리에서 충남 연무읍 까지...
    나, 어머니, 아내, 아들 둘을 모두 태우고서 밤 택시는 고속도로의 공기를 갈랐다.
    나는 어떻게 형님의 장례를 치렀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형님의 돌아가신 얼굴 모습이 무척 평안해 보였다는 것과
    마지막 가시는 상여를 붙잡고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일 곱살 때 형님에게 스케이트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가
    처음에는 거절을 당하고 엉엉 울었듯이,
    - 엉 엉 엉 ! 엉 엉 엉 !
    내가 너무 슬프게 우는 바람에 다른 가족들은 미쳐 울지도 못했단다.


    나는 부친 산소 앞에 형님을 모시고 그 위에 차가운 흙이 덮일 때
    다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는 울어댔다.
    - 엉 엉 엉 ! 엉 엉 엉 !
    이 미련한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형님이 마음을 잡는다고 좋아하다가
    살아생전 단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다니...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고, 지금도 형님께 한없이 미안하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 세고의 외상값을 모두 정리하였다.
    형님 ! 먼길을 편안히 가소 !


    미련한 동생/잠실 베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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