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 1.

축제가 끝났다.
1년 365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라는 소리만 듣던 아이들이라
비록 이틀 동안의 축제였지만 그 준비는 대단했다.

1학년은 합창경연대회를 했고
우리 학년에서는 반별 발표회가 있었다.

1학년들도 참 대단했다.
합창대회인데도 간단한 의상을 저희들이 직접 마름질하여 해 입고는
어른 뺨치게 지휘도 잘 했지만 입,퇴장 하나에까지 온갖 신경을 다 썼다.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반이었다.
원래 내가 아이들을 닦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영향도 없진 않겠지만

별난 개성으로 학교에서 소문난 놈들이 좀 있어
우리반은 늘 자유분방하고 시끄럽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살아있다고 좋게 보시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하여튼, 다른 반들은 모두 댄스를 준비했는데
바로 옆반인 3반과 우리반은 연극을 준비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내가 봐도 참 잘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옆반에게 근소한 점수 차이로 지고 말았다.

옆반에 진 것도 진 것이었지만 아이들이 화가 난 건
대본짜기에, 의상마련에, 무대배경그리기에, 대사외기 등등
그렇게 여러 가지 준비를 많이 한 연극보다
단순한 댄스에 후한 점수를 준 선생님들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반이 옆반에게 진 이유는
마지막에 곁들인 댄스가 노출이 심했기 때문이었다는 뒷소문이 있었다.
어쨌든,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튿날, 체육대회.
4종목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3종목은 초반에 다 탈락하고 말았다.
내가 지기만 하면 국물도 없다고 엄포까지 놓았던 줄다리기마저 지고 말았다.

마지막 한 종목은 열 명이 함께 넘는 '긴줄넘기'였다.
1차 시도에 42번을 넘었다.

1등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차 시도에 한 놈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가 '시작' 소리를 듣지 못했다.
1번도 넘지 못하고 줄이 걸리고 말았다.

아이들은 미처 준비가 안 되었으니 다시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심판을 보신 선생님은 냉정했다.
다른 심판관의 눈도 있고 어디까지나 시합은 시합이라는 거다.
나도 같이 사정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실 나도 많이 서운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두 놈이 울면서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잠시 뒤엔 모든 아이들이 그만 다 교실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까지 운동장에 서 있지 말고 들어오라고 마구 잡아당겼다.

가 보니 모두가 울고 있었다.
좋은 말로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어 다시 교무실로 내려왔더니
심판을 보신 젊은 최선생님이 아무래도 자기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교실에 가 보시겠다고 했다.

한 10여 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기에 교실에 올라가 봤더니
최선생님은 계속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계셨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쉽게 화가 풀리지 않았고 계속 원망의 말만 쏘아붙였다.
내가 그만하면 됐으니까 내려가시라고 권했다.
선생님은 할 수 없이 그냥 내려가셨다.

그러던 중에
최선생님을 좋아하던 아이 하나가 선생님에게 손전화로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최선생님에게서 바로 답메시지가 왔다.
'난 너희들을 사랑한다. 정말 미안하다.'고...

잠시 뒤, 미리 마음먹고 있기도 했었지만
아이들의 화를 풀기도 할 겸 내가 점심으로 자장면을 쏘겠다고 했다.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이
그 소리에 한두 놈씩 풀어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아이가
"야, 우리 최선생님도 모시고 자장면 같이 먹자."고 제안을 했고
아이들은 '그래, 그러자' 하고 찬성을 했고 교무실로 선생님을 모시러 갔다.

하지만 먼 곳에서 통근을 하시는 최선생님은
토요일이라 이미 가고 안 계셨다.

한 아이가 다시 제안을 했다.
"야, 우리 모두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난리가 났다.
전화기가 없는 아이들도 다른 아이의 것을 빌려 메시지를 보냈다.
최선생님에게 몹시 미안했던 나도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잠시 뒤,
"야, 메시지 왔다!"
"나도 왔어! 우릴 사랑하신대!"
"어, 나도 왔네! 우리반이 좋다고 하시네!"

올해의 축제와 체육대회는
나도, 우리반 아이들도,
또 최선생님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가네







   

      동백 너의 열정에 산다




      글 / 박종영


      꿈이 영글때마다 별빛이 찾아와
      꽃술에 수를 놓았었지.

      동박새가 몰래 날아와
      깊숙이 넣은 꿀샘은
      조매화(鳥媒花)
      네 웃음으로 자지러지고.

      청록의 그늘이 싫은 봄나비가 탐내어
      긴 더듬이로 얼굴을 문지르네
      하얀 것보다
      붉은색이 고운 동백의 열정
      꽃댕기 사주라던
      그대가 얼굴 붉히던 날.

      툭툭 눈물처럼 지는 네꽃잎 주어모아
      목에 걸어주었지.

      추억이 그려진다 얼굴에
      다소곳이 입술 내미는 동백꽃 한송이.




      2001. 11. 15.
      music : Helene / le miracle de la mour







홍시곶감








    맛있는 홍시곶감~



    옛말에 어린이가 울 때
    곶감 줄께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할 만큼
    곶감은 맛이있는 것이리라.

    정말 옛날 어릴 때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감 몇 개를 깎아 처마에 매달아 두시고,
    요렇게하면 곶감이 된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으며~,
    그 후
    하얗게 분말로 씌워진 부드러운 곳감을 씹으면 향긋한 감내와 함께
    단맛이 어울러져서 싶을수록 깊은 맛이 느낄 때마다 그 기억이 새롭다.

    곶감은 그냥 먹어도 좋으나, 겨울에 시원한 수정과 속에 담궈져
    적당히 부드러워진 살이 혀에 녹듯하는 달콤 하면서도 계피향과
    어울리는 향과 맛은 일품이며 갈증을 씻어주는 효과가 있다.

    이제 가을 곶감이 이미 시작되는 계절이된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중국 곳감이 들어와서,
    모양만 비슷했지 고유의 옛 맛을 내지 못하고,
    일부 음식점에서도 식사후 수정과라고 내주나 그 맛이 너무
    원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애들에게는 곶감이나 수정과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생각 안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와서라기 보다는 이름만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서,
    너무 상업적으로 성의없이 엉터리로 만들어 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大長今 이란 연속극을 통해 우리 전통 음식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고급스럽고 맛있다는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주말 대둔산 모임을 통해, 농지기님의 농장을 방문했다가
    난생, 처음으로 "홍시곶감"이란 걸 먹어 보았는데~

    곶감 외부는 말랐으나, 내부는 홍시 상태로서 곶감과 홍시의 두 가지
    맛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단맛을 내고있었다.
    아~ 곶감이 이렇게 맛있을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이제 까지는 유통 및 보관 운송상의 문제로 이러한
    맛있는 상태로는 출하를 못했으나, 최근 포장 및 유통 기술의 발달로
    이제 가능하다고 한다.

    중국 등 저가의 수입 농산물이 판치는 어려운 시기에도,
    아직 우리 농촌을 지키시며, 기술적인 발전과 유통개선 및 경영 현대화,
    무공해 식품 개발등을 통해 경쟁력 확보를 위해 힘쓰시는 분들이 계신 것에 마음 든든함을 느꼈다.

    금주말쯤 부터야 출하가 가능하다 하시어, 택배 발송을 부탁드리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는데,
    요즘 그 택배가 언제나 도착하려나 하며~ 기다려진다.



    글/데니/ 11월11일:20:28.









    꼬리말쓰기




    농지기/ 감사합니다 넘 칭창을 해 주시니 몸둘 곳이 없네요..

    연 4일 비가 온 관계로 며칠 더 바람 좀 쏘여 18일에 발송하여 19일에 받으시도록 하겠읍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내내 평안하소서 [23:08:42]




    黃眞伊/ 바닥에 드러누워서 찍은 홍시곶감 사진에다가... 데니님 글 부쳐서 열린칼럼으로

    갖고 갈랍니다. 농지기님~~ 정말... 꿀맛이였어요... [23:17:04]




    여백/ 꼴깍~~!!.. [23:19:22]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좀 이른 결혼을 했다.
결혼이 급했던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고
결혼 다음 해 부터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한숨 돌리게 되던 어느날,
갑자기 공부가 더 하고 싶다는 너무도 강한 욕망에 시달리기 시작했구
해야겠다는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이 무엇이던 지체할 수 없는 성격때문에
큰아이가 다섯살, 작은아이 네살 되던 해 나는 대학원이라는 곳에 등록을 했다.

그때 남편은 고등학교 평교사였고 남편의 월급만으로 내 학비 부담까지는
좀 벅찬 생활이기에 당연히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음대 지망생 몇명을 개인지도 하면서 호텔 커피숖과 고급 레스토랑에
재즈 피아니스트로 일을 했었던 것.

30대 초반의 아이 둘을 가진 유부녀였으나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아무런 의심없이
나를 20대 후반쯤의 처녀로 믿어주게 했던 것같다.

물론 남편은 아직까지도 그 시절 내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단지 학생들의 개인지도만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이 사실은 아마 죽을 때 쯤 털어 놓을까? 말까??^^)

어쨌건 그렇게 1년반 정도를 지내면서 그곳 종사자들이
슬그머니 내게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었다.

여자 종업원들이야 자연스레 언니, 언니, 하면서 호칭에 별 무리가 없었지만
남자 웨이터들에게는 호칭이 좀 애매했던 모양이었다.
나이들이 거의 스물두 셋, 많아야 스물다섯 정도이니 당연히 내가 연배였고
그렇다고 누나라고 부르기는 어색하고 미스 아무개라는 호칭으로는
내 분위기라 아니라고 했다.(무슨 분위기를 말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미스라는 호칭이 직업 여성들에게 쓰이는 호칭쯤으로 해석되어서가 아닌가 싶었다)
선생님은 너무 거리감이 있고..... 어쩌구 쑥덕거리기에
"그냥 할매라고 불러라" 한마디 했더니 슬그머니 그게 별명이 되어버렸고
별명이 호칭처럼 되어 버렸었다.

격일로 저녁 7시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두 타임,
그러니까 중간에 30분 쉬는 시간이 있었고 내게는 쉬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첫 타임 연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오면 테이블 위에는 언제나 약간의 간식거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때로 몇 통씩의 팬레터가 있을 때도 있었다.
고백컨데 데이트 신청도 부지기수였고......^^

'데이트도 안하고 시집은 언제 가요? ' 라는 질문을 그 얼마나 많이 받았었던가..
그리고 유혹들은 또 얼마나 많았었는지.........ㅎㅎㅎ

연탄불이 꺼지지나 않았을까 불안해 하면서 내일 아침 식단을 걱정해야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마치는 시간이 무섭게 '땡'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가 그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 눈에는 대단히 단정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불우한 환경속에서 정말 불우하게 생활하던 그 사람들의 눈에
자신들과는 전혀 별개의 세상에 살고 있을거라는 작은 환상을 갖게 해 주면서
그러나 정말은 전혀 별거 아니던 나는 할매라는 호칭에 애정을 담아 불러주던
그 마음들이 어쩌다 가끔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그런 날...........
지금은 그들도 중년의 나이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고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혹시 계십니까??

1980년대 초,
최상급으로 꼽히던 부산 대아호텔 커피숖에서 피아노 치던 그 여인을 알고 계시는 분??

그게 바로 저 였답니다... ^___^


2003.11.4. sesil님의 글











    가을 운동회





    요즘 가을 운동회 시즌인가 봐요.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북소리 박수소리 마이크소리 함성이
    들립니다.


    열린마당에 출몰하시는 분들은 거의가 다 운동회 추억이
    있을 텐데 거의가 도회지나 아니면 그 근처에 살던 분들 보단
    나처럼 산간 오지의 초동학교의 운동회 추억처럼 신나는 게
    없을 듯 싶은데요



    어릴 때 운동회는 환상이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전날부터 가슴이 퉁탕대던 시절인데요.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온 동네 면 전체가 이날은 축제의 마당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이라도 이날은 밤을 삶아 오는 건 기본이었고요.
    잘하면 오징어도 먹어 볼 수 있고 김밥도 먹을 수 있는 날입니다.
    나는 늘 할머니께서 자반고등어를 구어서 김밥에다 가져 오셨으니
    당시 김밥이라면 살만한 집안입니다.
    우리 집은 30여 호 집이 있는 마을에서 부자였으니 당연했지요.


    소풍날 할아버지는 언제나 하얀 본부석 천막에 교장선생님
    면장 지서장 등이 앉는 일등 석 뒷줄에 늘 앉아 있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가 거기 앉아 계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손자인 내 덕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했거든요.


    필경 조부께서는 내가 저 앞에 서있는 아무개의 할애비다
    하시면서 천막 고급자석으로 오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운동회에서는 늘 선서를 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선서는 내가 했습니다.
    목소리 크지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선생님 말 잘 듣지.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그렇겠지만
    하여간에 6년간 운동회 선서와 반장을 도맡아 했으니 조부께서
    당연히 자랑을 하셨을 건 뻔합니다.


    내가 할아버지 연세가 된 지금 만일 내 손자가 예전에
    나처럼 앞에서 호령하고 깃발 들고 아이들 데리고 다니고
    상품 줄 때 선생님 심부름하고 아이들 운동장으로 들고나는걸
    모두 데리고 가고 나오고 하는걸 보았다면
    나도 본부석에서 큰소리를 치면서 앉아 있고도 남습니다.


    조부의 즐거움을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네요.
    혹여 손자가 있으신 분들은 공감을 하실텐데요.


    요즘은 손자가 있다 해봐야 다 핵가족이라
    아들들이 데리고 살고 있고 며느리 눈치보랴 지금의 노인들은
    즐거워 할 틈도 없을 테지만 당시의 나의 조부는 엄청 즐거워 하셨습니다.
    경춘선 철도를 놓을 때 철로목을 날라주고 받은 돈으로 사들인 전답.
    자수성가를 해서 30여 호 되는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들었으니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는 왕이셨습니다.


    운동회에서 당시는 기마전을 잘 시켰습니다.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국주의가 남아서인지
    남자애들은 단체 기마전을 했는데 이것이 남자들에겐 더 없는 흥미였습니다.
    기마전 아시죠 ?
    앞에 한 애가 서고 뒤에 둘이 어깨를 집고 한 명이 올라타서 상대방의
    모자를 뺐거나 하는 게임.
    함성을 질러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게임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국어 책에는 화랑 관창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들어가 목이
    잘려 와서 이걸 본 신라 병사들이 계백군을 물리 쳤다 하는 게 있었는데요.
    물론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충성심을 일깨우는 것일텐데
    이것을 보고 나도 화랑 관창이 되겠단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 기마전시합만 있다 하면 학교 운동장이 조용해 졌고
    구경하는 학부모들은 거의 일어나서 응원을 하던 참이라 선수들은 거의
    결사행진이었지요. 사고를 우려했음인지 선생님들이 총 출동되어
    모자를 뺐기고 내리지 않는 팀에는 가차없이 끌어내리곤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깃발을 든 팀의 마지막 모자를 뺏어야 이기는 게임.
    함성을 질러 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갈 때면 운동회장은
    모두 아연 긴장했습니다.
    이것도 어릴 때부터 선천적인 재주가 있었던지 늘 우리편이 이겼는데
    단 한번 땅에 거꾸로 떨어진 것 말고는 모두 이겼습니다.


    잘난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즐거움.
    지금 운동회서도 기마전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서 가는 손자의 모습.
    할아버지도 정말 긴장 하셨을 겁니다.


    글/산울림










































      산사의 고요함을 깨우며...


      글/황금빛노을



      잠을 자다가 거의 영감을 받은 듯한 충격으로
      눈을 떴다..FM에서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너그럽고 조용한 행복함으로 거실 가득 메운다.

      얼른 깨어나 컴퓨터를 열고 어제의 환상 같은 하루를
      필력해 둬야 한다는 무언의 감지를 느낀다.

      어제의 시작은..
      아픈 친구를 보면서 그저 속상하다 는..

      아..참 속상했다.
      친구의 말라비틀어진 손하며 얼굴의 그늘하며
      우리는 그 친구가 맘 담고 있다는 마산의 조그만 선원을 찾았다..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들어가 보니 조용한 산사 같은 분위기..
      시내 한복판에서 들어보는 유난히 뗑그렁거리는 풍경소리가
      흩어진 중생들의 맘을 주워 모은다..

      그 친구..
      땀을 흘리며 가누기 힘든 몸과 맘을 두 손에 모아
      108배로 내 안에 힘든 나를 털어 낸다..

      기특하다..

      선원에서 귀한 녹차 한잔 공양하고 돌아서 나왔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집에 내려주고
      또 한 친구와 아직 해가 내리려면 한참이 남았음에
      하루해가 너무 아까워 다시 차를 돌려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친구의 이모님이 거하고 계신다는 통도사 자락의 성전암으로..

      아~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또 한번의 맘에 소요를 일으킨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산사의 풍경..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살갗을 투시해 들어오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싸늘한 공기의 기류.
      그 느낌..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퍼더버리고 앉아 고운 사람이랑
      공시적 감각을 초월한 그런 맘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행복함으로 나를 꽉 채운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시간에 나의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가..
      아~난 어둠을 감싸고 있는 이런 산에서의 종소리는 드라마에서나
      들음직한...그래서 내 귀를 잠시 의심할 정도로 가슴을 울렸다.

      친구가 저녁 예불 종소리란다.
      엉덩이에 가시 찔린 사람처럼 정신이 확 돌아온다.
      그리움에 엄살 떨고 김빠진 삶이라고 자책하고
      시무룩하게 하루를 대충 때우던 나에게
      어떤 신선함과 숭고함을 경고하는 듯한 저 종소리.

      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 순간 내 맘 얼른 국화꽃 한 다발 말아 쥐고
      달려나가 부처님 전에 예쁘게 놓았다.

      그 어떤 화려함보다 소박한 노란 소국 한 다발을
      맘 다 비운 고운 미소와 함께 살포시 내려놓으며
      멀미나게 향기로운 산사 마당의 천리향을 맘에 살짝 훔쳐왔다

      어둠은 고요함을 붙들고 촘촘히 박힌
      계곡의 물소리를 더 생생하게 울린다..

      맛있는 밥도 배부르게 먹고 소박하고 다정한 이모님이 건네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귀한 차들을 대접받았는데
      혀가 놀라 이 귀한 맛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연신 몇 잔을 마시며
      음미했다.

      중국에서 가져왔다는데..
      웅담에 재워 발효했다는 오룡차와 인삼에 재워 발효했다는 차..
      관음철 녹차..여러 가지 차와 어우러진
      산사의 고요함을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안개의 두터운 몸피 너머
      가물가물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뒤로한 채
      좀 멀게 느껴지는 산 능선을 흐린 눈으로 구별해내며
      조심조심 산을 내려왔다..

      수음하다 들킨 소년처럼
      몽환처럼 느껴지는 어젯밤 나를 깨운 기억들..
      영혼의 배고픔..이 글을 쓰면서
      말간 커피 두 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숨겨둔 애인처럼 은밀한 기억을 여기에 저장한다.

      친구가 다시 건강해지길 바라며..



      음악 김영동/먼길
      김영동/먼길












크로쉐 바늘 쎗트








          글/구름에 달 가듯


          70년대 후반 젊고 철없고 꿈이 많은 때였다.
          나는 어느 연구소에 위촉으로 드나들고 있었고,
          그곳 소장님의 여비서로 일하던 L 과는
          서로 직장인 이상의 호감을 갖고있다 믿고^^ 있었고,
          어찌하여 모처럼 일본에 일주일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상품은 비교적 귀한 편이었고
          또 해외출장도 많이 다니지 못하던 때라
          퇴근길 뻐스 속에서 큰 맘 먹고 L 에게 물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구...
          한참 생각 끝에 L 은 크로쉐 바늘 쎗트 얘기를 했다.
          크로바 상표라 했던가...


          친구 하나가 그걸 갖고 있는데 참 좋다는 얘기며,
          시내에서 구하려해도 참 구하기가 힘든다는 얘기며...
          언제나 천사같이 곱고 예쁘던 L 은
          그 작은 크로바 크로쉐 바늘 쎗트 하나가
          얼마나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 것인가를
          별로 어렵지 않게 내게 확신시켜주었다.


          흠, 그 정도라면...경제적으로 별로 여유가 없었던 내게
          L 의 조그마한 바램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참...세상의 총각놈들은 어찌 이리 모두 눈이 멀었을까?"
          그때 L 은 25, 나보다 여덟살 아래,
          어려서 고아가 되어 홀로된 이모님과 어렵게 살고있었고
          좀처럼 혼사가 이루어지지를 못했다.


          그날부터 나는 퇴근하면 집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크로쉐 얘기를 시작했고 또 아주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길에 바늘 쎗트 하나 사다달라는 주문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이제 됐다.
          나는 이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L 에게
          그녀가 그리도 원하는 크로바 바늘쎗트를 선물할 수 있다.


          하느님 앞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어차피 집사람을 위해 하나 사는데 곁들여 한벌 더 사서
          그리도 그걸 원하는 L 에게 준다하여 뭐 그리 탓할 일일까?
          더구나 나는 L 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의 京都교또는 왜 그리 촌이었던지...
          더구나 중심지의 백화점에서는 취급을 하지 않았고
          시내를 거의 다 뒤져서야 오후 늦게
          크로바 대리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고
          나는 반가움에 무려 여섯 셋트나 쇼핑백에 집어 넣었고
          귀국시 그중 두 셋트는 동행했던 친구의 짐에 슬쩍 넣어 왔다.


          그래서 집사람은 네 셋트만 보았고...
          동행했던 친구는 별 관심 없이, 짐이 잘못 섞였다 하며
          그 소중한 두 셋트를 내 사무실로 보내왔다.
          지금도 그 때 좋아하던 L 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시누들에게 하나씩 돌리던 집사람의 즐거움도 생각난다.


          10 여년전 L 은 아직 혼자였고,
          어느 이혼남 건축설계사와 혼삿말이 오가고 있었고,
          우린 하룻밤을 이야기로(강조^^) 지냈는데
          그때 그 크로쉐 바늘 셋트를 아직 지니고 있었다.



























      딸의 편지를 받아보고....


      두류봉



      자식을 낳아 길러 보아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고,
      내 비록 열살이전에 양친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외롭게 자라오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한번도 잊은 바 없고, 애뜻한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 없다.

      그러던 내 자신이
      우리 부모님의 살고간 일생을 훌쩍 뛰어넘는 나이가 되어
      나름대로 귀하고 중하게 여기던 자식들이 자라서
      모두가 제 갈길을 향하여 부모품을 이리 저리 떠나고 나니
      가슴 저미도록 그 자식들이 그립고 또한 보고 싶다.

      아들을 군대 보낼 때도 외부로 표출 않는 눈물을 흘렸고,
      이번에 딸아이가 방학이라고 내곁에 와 있으면서
      모처럼 교감하며 말없는 가운데 느끼던 부녀의 정을
      떠나보낸 후 새삼스럽게 크고도 비중있는 자식의 자리를 알 것만 같다.

      딸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보고 휴대전화를 만져본다.
      그 아이가 떠난 집은 너무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은 기분이다.

      추석이라고 제사 드리고
      아들과 함께 산정호수를 돌아보고 명성산 기슭을 거닐어 보아도
      딸아이가 보고 싶은 맘과 곁에 없는 아쉬움을 이길 순 없다.

      "아들아! 너도 너의 앞길을 위하여 곧 떠나겠지?"

      우리 딸아이의 편지를 여기에 올려본다.























    이 세상 최고인 우리 아빠에게


    어제 전화를 하여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왈칵 눈물이 났어요~~
    자주 자주 전화하고 싶어도 나는 아침 8시 반∼오후 2시 반까지 수업이 계속 되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면 거긴 새벽3∼4시라서 전화를 못했죠....

    그리곤 홈스테이 집엔 저녁 5시나 6시까지 가야 해서 주무시는 아빠가 깨시면
    안될 것 같아서 일부러 새벽에 전화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죠.

    앞으론 조금씩 짬 내서 짧게 짧게 라도 이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위치에 계시는
    우리 아빠께 자주 전화할게요.

    그런데 아빠!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하는 걸 카드번호하고 그 방법을 어서 알려주세요.
    어제 $10짜리 전화카드를 샀는데, 그 카드 가지고는 30분 정도도 겨우 전화할 수 있어요~~

    참! 이번에 저 새 통장을 하나 다시 만들었어요~~
    아직 까진 $1,500 이상 있으니, 다음 달까지 홈스테이 비용과 생활비는 괜찮을 듯 해요.

    내 은행 계좌번호는 TD CANADA TRUST이고...
    Delolain Avenue 이고요 (이것이 또한 저의 집주소인 Ayala네 집이죠. 782-3331)

    지금 지내고 있는 홈스테이 집은 고양이가 조금 징그러운 것 빼고는 다 좋아요~
    부잣집이라 손님들을 초대해서 만찬도 자주 즐기고......
    매일 바베큐나 치킨 같은 음식들을 주니깐. 입에 안 맞는 음식만 먹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다음 달에도 계속 이 집에 머무르려고 해요.

    낼까지 다음달 홈스테이 비를 지불해야 하고,($700)
    이번 주엔 새 학기 개강 후 우리 과의 친목 캠핑을 가고($200)

    그리고, 다 다음주엔 4일 동안 뉴욕에 가려고 생각 중이에요.
    단체로 가는 거라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돈이 조금 많이 들어 우리 아빠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310)

    유익한 Week Activity에는 참가하려고 노력중인데..조금 비싸네요~~
    어쨌든, 돈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말씀 드릴게요~

    아! 우리 학교는 St. Clair 역에 있고,
    제가 사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역은 Eglinton 이에요~
    집에서는 버스 한번만 타면 갈 수 있고, Eglinton 에서 St. Clair 까지는
    두 정거장 밖에 안 돼서,.,. 학교 가는데 30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아침에 6시면 꼭 기상해서, 샤워하고, 아침 찾아 먹고 학교에 가죠~~
    이제는 이 딸도 다 커서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겨울옷들은 아마 조금 일찍 보내주셔야 할 거예요~
    겨울옷 뿐 아니라, 빨래를 너무 바빠서 마음대로 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이곳 가정에서는 조용한 가운데 개인생활을 만끽하는 분위기라
    밤에 시끄럽게 빨래를 못하니 지금 옷들이 부족할 수 밖예요~

    어쨌든, 날씨가 추워지면....
    다시 필요한 목록을 정해서 다시 편지를 보내 드릴게요.

    그럼,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원래 감기 같은 거 잘 이기니까 걱정 마시고요~
    제발 아빠는 쉬엄쉬엄 일하시고 건강에 유의하셔요*

    그럼. 또 편지 드리고 전화도 할게요!!!
    사랑해요~ 우리 *아빠!

    오빠한테도 안부 좀,,, 오빠한테는 담에 꼭 따로 편지 보낸다고 전해주세요~
    이곳에 와서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 디카로 찍은 사진 첨부합니다...*"*


    2003년 09월 09일 화요일, 아침 06시 21분
    이 세상에서 아빠를 젤 사랑하는 *^* 딸 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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