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읽고ㅡ 스펜서 존슨 지음 / 이영진 옮김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 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난 여름은 정말 더웠다. 학생들의 방학과 함께 내가 읽어
야 할 책은 자그만치 60여권이나 되었다. 나이 탓인가? 늘 즐겨있던 책들
이 부담으로 내마음에 자라매김 할 즈음 이 책을 만났다.

모두 3부로 되어 있으며 1부는 동창들이 모여 힘든 삶을 이야기 하고 2부
는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치즈를 찾아 떠나
는 두 명의 쥐 '스니프'와 '스커 리' 그리고 꼬마 인간 '허'와'햄'이다.
변화에 적응해 가는 인간형과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는 사람과 변화를 제대로 맞지 못 하고 두려워 하는 인간형을 제시하며
스스로의 선택을 유도한다. 3부는 동창들이 이야기를 다 듣고 변화를 받
아드리는 사람과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점.변화하지 못하는 근
본적인 이유.변화를 두 려워하지 않는 마음.변화해야 하는 이유.변화를
준비 할 때 필요한 것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 글을 읽으며 '나의 치즈는 무엇일까?'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가정에 안주하고 시간의 여유를 갖을 때 난 왜 직장 에서 팽팽
한 긴장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처음 나의 치즈는 노후 준비였
다. 연금의 개념이 없을 때 건강이 안 좋아 사표를 냈고 다시 직장을 갖
은 후의 모든 수입은 2남1녀의 교육비에도 늘 부족했다. 자식의 투자가
노후 대책이 되었던 우리 부모님들 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세 아이들
의 교육에 모든 수입을 투자했다. 덕택에 아이들은 모두 좋은 직장에 다
니고 걸맞는 배우자를 만났다.

그러나, 세 아이들 다 떠나보낸 후, 텅 빈 내 손을 보며 뒤늦은 후회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노후대책' 이라는 단어가 꿈 속에서도 괴롭혔
다. 다시는 떠 올리고 싶지 않은 'IMF', 내가 소속된 분야의 학원 19개
중 14개가 쓰러졌다.학원생의 70%가 떠나는 현실 속에서 실의에 빠졌다.
'나도 문을 닫을 것인가?
차라리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받을까?'

그러나, 치즈를 찾아서 미로를 달리는 것이 꼭 생존 자체를 위해서만이
아닌 그 자체적인 만족과 보람을 위한 것이라고 한 '허'처럼 나의 직장
생활도 꼭 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도전이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교사도 기사도 내보내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미친듯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자신감을
가졌다.'하느님은 내 편이다.'라고.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고 학원은
'IMF'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그때의 그 힘은 어디
에서 왔을까?' 하고. 이제 나는 그 물음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전지
전능 하신 분이 나를 이끌어 주실거라는 신앙과 언제나 곁에서 나의 넋두
리를 들어주고 힘을 주었던 친구라고.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책을 읽고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허'에
게 치즈인 것이'햄'에게도 치즈일 수는 없듯이 각 개인의 가치관이 모두
다름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도전' 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삶을 원하는 분
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별장 [문화가산책] 번호:423 2002/03/15 00:56






소흔 일기

1. 반가운 아우 -2001, 4, 20.-

삐리릭
핸드폰이 오랜만에 울린다.
누굴까?

“형님, 저 여유.”
형님 아우하며 지내는 열린마당 친구다.
요즈음 신학대학 다니랴
사과 장사하랴
옆지기 병간호하랴
무척 바쁜 그다.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을 늘 간직하고 사는
그를 보면 내 마음마저 즐거워진다.

“지금 학교가 끝났는데
집에 가도 돼요?”
“당근이지.”

얼마 전 그의 집에 가서
한참이나 사과 장사를 같이 했었다.
작년에 농사지은 무라며 한 자루 주기도 하고
김을 서해안 가서 갖고 왔다며
주어서 잘 먹고 있다.

“저녁은?”
“집에서 라면 하나 먹고 왔어요.
밥을 차려 주어야 할 텐데
옆지기가 마침 외출 중이어서
커피 한잔씩 놓고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데
옆지기가 들어 왔다.

옆지기 왈 “저녁은요?”
“네, 먹었시유.”
“밥 있나?”
“있긴 있는데 찬밥이라…….”
“괜찮아, 차려오지.”
없는 반찬에 그것도 찬밥을…….
그러나 그는 맛있게 먹는다.

“형수님, 밥 더 있시유?”
거뜬히 두 그릇을 …….
우리 내외는 찬밥을 먹게 해서
미안해 죽겠는데
그런 눈치를 채고는 아주 맛있게 먹어 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곤 열한시가 넘어서 갔다

“형수님, 한 번 놀러 오세요.”
“네, 꼭 갈게요.”
사과가 다 떨어져서
이제는 원두막 짓고 수박장사를 할 거란다.
그 땐 또 가서 같이 팔아 줘야지.

*****

2.고양이와 전쟁 -2001, 5, 27.-

며칠 전에 우리 집 지붕에
고양이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습니다.

처음엔 지붕위에서 쳐다보는 놈들 눈망울이 예뻐서
그래 같이 살자 하며
드나들며 지붕을 쳐다보곤
눈을 마주쳐 왔는데,

근데 요놈들이 좀 크니까
천장 속이 지네들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는데 우당탕 쿵탕
이게 장난이 아닙디다.

하여 이제 나가 살라고
추방작전 개시했지요.
우선 천장으로 들어가는 테라스와
지붕 사이에 틈새를 완전 봉쇄하고
천장엘 못 들어오게 한 채,
지붕 위에서 그놈들과 대치.

막 쫓으니까 어미란 놈이
새끼들 내 팽개치고는
저만 담을 타고 줄행랑 쳤어요.
지붕 끝에서 불안에 떠는
어린놈들 눈망울이 애처롭더라구요.

그래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하고 말았는데
요놈들이 또 다시
천장에서 쿵탕거리는 거예요.

결국 다시 지붕에 올라가
한 놈을 잡았는데
아 글쎄, 캬~~아악! 하더니만 할퀴잖아요.
얼떨결에 내동댕이를 쳤더니 땅으로 떨어졌지요.
퍽 소리가 나기에 내려다보니 꼼짝을 안 해요.

에고 죽었나보다 하고 얼른 내려와 보니
휘리릭 도망을 가더이다.
다행이다 싶어 작전을 종료 했는데,
밤이 깊어가니 계속 야옹거리며
애처롭게 울어 대니 어쩌면 좋대요?

오늘밤
잠은 다 잔 것 같군요.
허 그것 참....... .

-대청에 오른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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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습니다.


아이들 봉숭아 꽃물을 들이려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 꽃잎을 따 모았습니다.
워낙 땅이 거칠어 봉숭아 키가 10 ~ 15cm나 될까요?
꽃잎은 기껏 한 두 송이...
그래도 모으니 한 됫박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론 턱도 없지요.
내일은 꽃잎 채취에 시간을 써야 되겠습니다.

ㅇㅇ들과 함께 걱정하며 어떻게든 한 줌씩만 따 오면...
일곱 줌은 되지 않겠습니까만,
어디 제 맘 같아야지요.
ㅇㅇ에게 맡겨 놓고 나왔지만
돌아오는 목요일은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서...


이 여름날은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이런저런 상상은 해 봅니다만 짐작 가지는 않네요.


논바닥이 환히 보이도록 듬성했던 모들이,
이젠 제법 자라서 목이 길고...

깃이 흰,
그 새들을 만나기가 모 심을 그 무렵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그들 키만큼 자란 벼로 인해,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으로는 도저히 그 자태를 볼 수가 없거든요.
다행히 서행을 하거나 신호를 받고 있을 때면
가끔 머리를 들어 주어서
희고 가느다란 목만 잠깐 보여 줄 뿐
다시 먹이 찾기에 바쁜 그들인 것을요.
제발
먹지 말아야 될 것은 안 먹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남은 별것도 아니라는데,
미물들이라 하는데,
왜 저는 소중하며 애착이 가는 것인지요?

금붕어...
실내에 방역을 하느라고
잠깐 딴 곳에 옮겨 놓았던 것을
오후께야 주검으로 내 눈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좁은 용기와 더워진 물 속에서
속절없이 맞았을 그들의 최후가 그려집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책임지지 못햇습니다.

숨 막힐 환경이었고 그 환경은 사람이 준 것이었죠.

"뭐! 아침에는 멀쩡했다고? 그게 말이나 되나!"
"지금까지 무려 몇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사 찾았나!"
"여름 오후가 되기까지 그 用器 속이 얼마나 더워졌겠어."
"여태까지..."

"........"

"물이 더우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어!"
"개울물 수초가 우거진 곳에
물고기가 모인다는 것도 몰랐어!"
"정신 나간..."

그렇게 고함쳐도 속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사람보다도 더 좋을까'
이런 소리들도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벌써 아이들은
"금붕어는 어디 있어요?"
아침마다 수면 위로 오르는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한 식구로 마음으로 눈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아이들이
그 예쁜 것들을 찾고 있슴은 당연한 것이지요.


아무 일도 아닌 것을
또 대단한 것처럼 이러는 나는 도대체 누굴까....


이 아침, 저는 또 저 바깥 세상을 탄식하며
괜히 화를 부추겨 보았습니다

이제 봉숭아꽃이나 따러 나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님들.


2002. 7. 17 울타리



대청 번호:52121





늙음과 낡음*

곱게 늙어가는 이를 만나면,
세상이 참 고와 보입니다.
늙음속에 낡음이 있지 않고,
도리어 새로움이 있습니다.
곱게 늙어가는 이들은 늙지만, 낡지는 않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글자로는 불과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서로 정반대의 길을 달릴 수 있습니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와 절망 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늙음이 곧 낡음 이라면
삶은 곧 '죽어감'일 뿐입니다.
늙어도 낡지 않는다면 삶은 나날이 새롭습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은 더욱 새로워 집니다.
더 원숙한 삶이 펼쳐지고
더 농익은 깨우침이 다가옵니다.

늙은 나이에도 젊은 마음이 있습니다.
늙었으나 새로운 인격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낡은 마음이 있습니다.
젊었으나 쇠잔한 인격입니다.

겉은 낡아 가도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름답게 늙는 것입니다.
겉이 늙어 갈수록
속은 더욱 낡아 지는것이 추하게 늙는 것입니다.

새로움과 낡음은
삶의 미추를 갈라 놓습니다.
글자 한 획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과 인격이 다른 것 입니다.


시작하는 월요일
하루하루 예쁨있는
좋은 나날 되소서....semosi















**가엾은 나의 비둘기**


잿빛 하늘에 그려진 신도림역의 비둘기.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아리고 저려서,
불가항력인 존재에게 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악마적 쾌락이 절망적이어서,
벌써 읽고 돌아서 나가기를.........

신도림동은 내 성장기의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거주한 동네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동네이다.

나는 도림동 철뚝길 몰랭이 개발도상국의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다.
어느 날 전철이 생기면서 집 앞으로 다니던
숱한 통행인의 발길을 막아 버리고
우리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머니로 하여금 전업(輾業)을 하게 하였다.

전셋집 장독대너머 엄청난 도림교회는
나날이 그 교세를 확장했으며 바벨탑처럼
웅장한 교회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집에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는
동시에 햇볕을 착취해 가버렸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볕을 쬐이지 못하는 장독대의 기이한 운명
그 가난하고 비전 없는 동네에서
우리가족은 이십 오년을 버텨냈다.

기차와 전동차의 파열음이 고막을 찢었고
철뚝길 옆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외쳐대는
소리는 기차나 전동차의 그것보다도 더 요란했다.
늘상 희부염한 하늘은 절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에 충분했다.

신도림동과 이웃하고 구로동과 이웃하는
햇살만이 무상으로 쏟아지던 속이 말간 동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신도림동에 전철역이
생기더니 도림동을 저만치 밀쳐내고 급부상했다.
덩달아 더 초라해진 도림동의 우울한 모습은
한동안 우리를 버석거리는 한숨으로 몰아 갔다.


가장 어둡고 번잡한 도시의 한복판.
그곳에 둥지를 튼 발가락이 부러진
비둘기와 그의 친구들.
공포와 회유의 간극에서 길들여진
가엾은 나의 비둘기, 내 사랑의 비둘기.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있다.
내 뼈가 자라고 내 비둘기가 나머지
발가락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시.

그의 유린당한 생명이, 공포에 떨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야 하는 신도림동이 애처로워서
심각한 불균형의 성장기 어느 쯤으로 퇴행한
자아는 고스란히 두 뺨으로 설움을 받는다.

내가 살았던 도림동은 내 기억의
가장 절실한 부분을 도배하고 있으며,
피와 살이 엉켜서 나를 키우고 살찌운 동네이다.

철길이 막히기 전 수 많은 노동자들이
철길 위 육교를 줄타기하며 문래동으로,
양평동으로, 구로동으로 생계를 위해서
힘차게 또는 고달프게 발걸음을 내딛던
간이역과 같던 동네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들의 부산하고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어둠을 걷어 내고
또 혼곤한 수마 속으로 빠져 갔다.

점심 때가 설핏 지나면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온 새끼소녀가 자잘한 찐고구마를
양은쟁반 위에 올려 놓고 바삐 지나치는
행인들의 발치 아래에서 희망의 눈빛을
저울질하며 궁색한 가계의 한 몫을 분담했다.

홍합을 보도블럭 위에 질펀하게 쏟아붓고
한 깡통에 백 원씩 호객하던 미경아빠의
걸죽한 음성이 오늘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지금도 나는 우리의 가슴팍을 훈훈하게 뎁히던
그 겨울날의 애환어린 홍합 국물을 잊지 못한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뿌연 국물이 우러나면
식구수대로 머리를 맞대고 '후루룩 쩝쩝'거리며
홍합껍질로 떠서 마시던 기찬 국물의 맛.

방림방적의 어린 여공들은 삼 월 중순이면
벌써 맨다리에 반팔인 회색빛 유니폼을 입었다.
저당잡힌 젊음 위로 흐르던 고단한 찌꺼기들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혹은 가문을 일으킬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책임진다는
명제를 안고 그렇게 시들어갔다.

그 시대의 공원들이 굳이 '전태일의 분신'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니더라도
파리한 목숨줄을 이어가기에는
시대의 엄청난 불행으로 여겨졌다.
산업역군이란 미명아래 스러져간 그들의 피빛 청춘.

다림질이 되질않아 구겨질대로 구겨진
양복 바지를 입고 나선 곱슬머리 총각은
나를 보자 쑥스러운듯 멋적게 웃었다.

허옇게 바랜 그의 무기질 웃음은
내 심장에 노오란 현기증으로 촘촘히 박혀 왔다.

그 청년의 백지장같던 미소가 가여워서
저만치 내려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선택받은 소수의 신분이었더라면
저렇게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을텐데' 하는
그 때 비추어진 나의 편협한 사고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몰랭이 골목에 사는 남루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세나 신분 상승은 외면한 듯,
언제나 그렇게 가난하게 초라하게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내 마음의 상심으로 남아 있었다.

노모가 물려준 손바닥만한 집터에서
노가다로 실업자로 그날그날을 전전하던
소갈딱지 없는 아들은 낮술에 취해 날마다
아내와 싸움질을 하다가 어느 날 첫 단추의
오류를 깨우친 여자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중의 버거운 직분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렸고,

세탁소를 하던 집의 맏딸은 옆방의 호스테스를 따라
가출 이 년만에 머리털이 노오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마음이 아파서 제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했던
닭집의 막내 아들은 끝내 동네 똘마니로 전락했으며,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던 주인 집 외아들은
소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스스로가 거머쥔
주홍글씨의 수인으로 덧칠의 명수가 되어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오금이 저려서
"짱구 오빠" 하면서 반색을 했다.
이미 그 시절 나는 삶의 횡포와 타협하는
친절한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내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짱구다.

나는 짱구오빠에게 무엇을 해 주고 싶었을까!
두렵고 답답한 그 때의 내 심정은
그에게 맘껏 달릴 수 있는 도주로를,
절대로 체포가 불가능한 자유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정의하는 그의 범죄성의 해악과는 무관하게
그는 생포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처럼 보였다.
살아서 쓸개에 끊임 없이 빨대를 꽂혀야 하는
비운의 곰을 닮아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박제된 삶을 연명했으며,
제도권 속의 우월한 인간들이 내세운
그릇된 율법사관의 희생양이 되어
처참한 전생을 되풀이 하는듯 보였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내 인식의 궁핍한 도림동.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버렸다.

사 년전 아버지가 페암으로 세상을 뜨신 뒤에,
죽어도 도림동을 떠나지 않겠다던 어머니를
반강제나 다름없는 협박으로 등을 돌린 뒤
그 후로는 가보질 못했다.

나의 질긴 운명의 사슬이 묶여 있으며
우리 가족사의 생생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곳.
어머니의 끈끈한 인정이 살아 있는 골목쟁이 사람들.

팔 할의 바람이 미당을 키웠다면
팔 할의 동경에 대한 굶주림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초라하게 쇠락하고 쓸쓸하여도,
내가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 안달했던
애증의 동네라 하여도,
나는 도림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내 성장기를 잿빛으로 찌들게 한 동네이며
희망이란 기차 대신 절망이란
기차만을 떠나 보냈던 동네이지만
나는 그 시절이 없으면 부유하는
한 마리의 유충에 불과하다.

도림동에서의 윤택했던 기억의 회로를
지워버린다면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신도림역에서 신음하는
발가락이 잘리운 비둘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 비둘기.
내 서러운 눈물의 비둘기
내 황량한 사막의 비둘기.

내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 어찌 내 가슴을 쓰라리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도림역의 비둘기(발가락 잘려나간)를 읽고**


글/이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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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진해 경화동의 하사관 학교에서
하사관 기본교육 28주를 마치고
새벽 미명에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우리
악만 살아남은 46명의 해병 신임 하사관들은,
우리를 수송하기 위해 김포 청룡부대에서
나온 '청룡 버스'에 나눠 타고 김포 반도로 떠났다.


말로만 듣던 전방으로 향하면서 소문으로 익히 들은
'청룡부대'에 대한 공포감을 서로 나누던 우리는 김포읍을
지나서도 30분이나 계속 북으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점점
말을 잃어갔다.


모두들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전방이라더니 이러다 정말 철책선 앞에 내리는거 아냐'라는
생각으로 두려움반 호기심 반 뭐 그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 때, 어떤 놈이 신음소리를 내듯 나즈막한 소리를 질렀다.


"씨벌... 다들 밖에 봐봐..."
그놈의 말에 밖을 쳐다 본 우리는,
하늘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을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벌써 눈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조오또... 서울에서 반팔 입고 입대한 게 엊그제 인데
여긴 벌써 눈이 오는구만..."


눈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어 하던 우리는 차창에 스치는 길거리마다
빨간바탕에 노오란 글씨로 새겨진 청룡부대 마크들을 보며
오싹함을 느꼈고, 유격 부대 마크가 걸려 있던
'벽암지 교육대'안에 임시로 만든 하사관 특수교육대라는 곳에
들어서면서 그 앞에 걸려져 있던 구호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국가가 부르면 어디를 가도 최정예 전투 요원으로...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었으면 난 이곳에 오지 않았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선배 해병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자'
"악을 기르자" '죽음을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다'


젠장......이윽고 버스가 멈추더니,
버스 문이 열리고 빨간색 팔각모를 쓴 교관이 버스에 탑승했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그 교관은 우리를 보고 나즈막히 말했다.
"연병장에 4열 종대로 집합하는 시간 25초 준다.
만약 늦는 새끼가 있다면..." 그렇게 말한 후 교관은 모자를
살짝 쳐들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죽. 인. 다. "


우리는 잠시 내리는 눈을 보며 젖어있던 상념에서
후다닥 깨어나 번개같이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왜냐면... 교관의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우린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고 느꼈던 지난 7개월의
하사관 학교 생활의 공포감에 비해 거의 두배의 고통에 시달리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우리들에게 교관들은 말 그대로 전술학이나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교관이 아니라 팔각모를 깊게 눌러 쓰고 구타라는
먹이를 찾아 헤매이는 '하이에나'였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우리들을 심한 욕과 구타로 윽박질렀다.
"옷 벗는데 30초 실시!!"
"샤워 하는데 3분 실시!!"
"전투화 끈 매는데 10초 실시!!"
"식사시간 15초 실시"


그들은 시간내에 우리가 완수하지 못할 때엔 자신이 갖고 있는
정신봉으로 우리의 어느 부분이든 골프 풀스윙하듯 후려갈겼다.
무방비 상태로 맞은 동기들은 특히 얼굴부위를 맞을경우
입안이 다 터져 며칠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


이렇게 숨쉴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중요한 훈련을 눈 앞에 두고 내무반에서 교육대 최고의
악명을 날리던 독사 교관이 훈시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야간 침투작전 중 가장 중요한 훈련에 대한 설명이었기에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었고 모두들 교관이 그 악명높은 독사 교관인
관계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빛을 초롱거리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뿌우우웅~~~!!"
난 내 옆에 앉아 있던 놈의 히프 쪽에서 터져 나오는
이 소리에 흠찟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모든 동기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오는 것을 느꼈고,
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돌처럼 굳어 버렸다.


"......" "......"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방귀를 꾼 내 옆의 놈은 물론이고...
방귀소리에 놀라 이쪽을 쳐다보는 동기들의 모든 눈엔...
공포의 정신봉과 이단 옆차기가 날라올 것이라는 공포감이 가득했고...
방구 소리가 인근 지역에서 들려 주범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지독한 방귀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두 가지의 복합적인 고통 앞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흐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타에 예외를 두지 않던 독사가 아무 말 없이 하던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역시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였던가...기가 막힌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보던
동기들은 안도의 눈빛으로 시선을 거둬들였고...
나 역시 안도의 눈빛으로 내 옆에서 방귀를 낀 진짜 주범을 쳐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고, 내 옆에서 방귀를 끼고 본인 스스로가 더 놀랬던 그 놈
역시, 나를 안도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쉬는 찰라에...


"푸식... 푸식... 푸시식..."
오옷!!!!!! 이 미친 자식이!!!!!
너무나 안심이 된 나머지 기도 안 막힌 방귀소리를 내었던 것이었다!!!
더 이상의 용서는 바랄 수도 없었다.
평소 깊게 눌러 쓴 모자에서 눈동자를 발견할 수 없던 독사가
지휘봉을 던져버리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분명 '어느 자식이야!!'라고 묻는 게 역력하였는데...
그 눈빛에 나는 본능적으로 '예31번 올빼미 하사 임!두!만!'이라는...
내가 범인임을 자수하는 관등성명을 대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휘이익!!!" 빛보다도 빨리 그의 정신봉이 내 주탱이를 날려 버렸고
그 뒤로 태권도 3단을 자랑하는 교관의 이단 옆차기가
내 가슴을 즈려 밟았다. 그리고 약 10분 동안...
내무반에서는 아래와 같이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모든 초식들이 전개되었다.
허공답보 (허공에서 실전되는 초절정 고수들의 경공술. 내공이 바탕되야 됨)
금나수 (소림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손으로 잡아 공격하는 기술)
태극권 (무당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남의 힘을 빌려 공격하는 기술)
복호장 (아미파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호랑이를 잡을 때 쓰는 장법)
매화권법 (화산파에서 사용하는 매화의 모습에서 유래된 권법)


물론 위의 말은 웃자고 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맞을 수 있었는가 싶을 만큼
참 많이 맞았다. 언제나 한탄스러운 건...
그런 순간에 기절이라도 해서 의무반으로 실려가면 좋으련만...
내 맷집과 정신은 그걸 다 맞으면서도 더 맞을 수 있다는 게
슬픈 현실이었다.


그 뒤로...
그는 나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떠받들고 살았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나의 높은 인격을 존경한다며...
그는 자신의 종교를 팔아서 얻은 초쿄파이를 내게 갖다 주었고...
아침식사 때 딱 한번 나오는 피같은 250미리 우유도 가끔 내게 주었다.
내가 아무리 사양해도 그리고 그 귀한 화랑담배도 난 그 이후
떨어지지 않았다.
개도 은혜를 갚는다'라는 말로 내게 강권을 했고
난 그것을 못이긴체 받아들이고.........



시골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도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농사짓는 분들의 그 정직하고 성실함을 그대로 본받았던 사람이었고
앞으로 훌륭한 영농지도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순박했다고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남을 위해 댓가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자그마한 은혜를 베푼 사람에겐 두고두고 갚는
그야말로 훌륭한 인격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힘든 후반기 특수교육대 생활을 마치고...
특교대 생활의 괴로웠던 만큼이나 나에게 주어진 힘들었던 군생활을
거의 마쳐가던 어느 날...
제대를 얼마 안 남겨 놓고 해병대 역사상 기억될만한
안전사고가 일어났었다.


세상 사람들 에게는 알려진 일이 없는 사고였지만
이 사고로 많은 해병들이 죽었고
본부대 간부였던 나는 그들의 장례식을 주관해야만 했고
난... 그곳에서 우연찮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LMG사격장 교관을 하던 그가 서투른 신병의 오발사고에서
자신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지금은 이렇게 관에 누워서 나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 앞에 멀쩡히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고...
그 와 함께 죽어간 사병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내 마음은...
아마..........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군대만 아니었더면.....내 그를 위해 마음 놓고 울어라도 주었으련만,
눈물을 참아가며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준비하는
나의 가슴은 갈래갈래 찢어나가는 듯 했다.


나중에 제대한 후 사회에 나가서 맘 놓고 만나보자고 했던
우리였건만...그 힘든 군 생활을 다 끝내고 얼마 남겨 놓치 않은
이 상황에서...그와 헤어진지 벌써 23년
이럴순 없었다...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
난 지금 그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보다는 그의 청룡부대 하사관 특교대 때의
번호였던 32번 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남겨 놓고 간 형상들은 많이 남아 있다.
쵸코파이...
우유...
농촌...
그리고...
눈물...

오늘 토요일 오후 텔레비젼에서 군대관련 프로그램을 보다
문득 기억나는 이 친구를 떠올리며...
이렇게 몇 자 끄적거렸다.
이 청명한 5월에 먼저간 친구를 그리며...


ㅡ남도사랑ㅡ













숫자의 美學 // 벤취마킹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한 사람이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5-3=2).(2+2=4) 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이 들지않는 계산이라.
쉽게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의 설명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5-3=2)란.
어떤 오해(5) 라도 세번(3) 을 생각하면
이해(2) 할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2+2=4)란,
이해(2) 와 이해(2) 가 모일때,
사랑(4) 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사람을 오해할때가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해는
대개 잘못된 선입견, 편견, 이해의 부족에서 생기고,
결국 오해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5-3=2) 라는 아무리 큰 오해라도,
세번 생각하면 이해할수 있다는 풀이가
새삼 귀하게 여겨집니다.


사실
영어로 "이해" 를 말하는 "understand" 는,
"밑에 서다" 라는 뜻으로
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이해라는 것입니다.

이해와 이해가 모여 사랑이 된다는 말,
너무도 귀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이해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은.
"가까운 타인" 삶으로
전락해 버린 듯 싶습니다.

낚시 바늘의 되꼬부라진 부분을,
"미늘" 이라고 부릅니다.
한번 걸린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미늘 때문입니다.

가까운 타인으로 살아가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늘을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는
때때로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벽 앞에
모두가 타인이 되곤 합니다.


( 5 - 3 = 2 ),
( 2 + 2 = 4 ) 란 단순한 셈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와 서로를 가로막고
때로는 멀리 떨어뜨려 놓은
온갖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풀어버리고,
우리 모두
"사랑" 에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벤취마킹 드림((^_^))









face=굴림체>

**동행자**


족히 30분쯤은 기다렸다가 겨우 행선지를 확인하고는 시외버스를 탔다.
흔들리는 버스에 아직 적응치 못하고 잠시 비틀대며 자리를 찾는 내게
로, 옆 자리에 올려 놓았던 앉은키만한 커다란 베낭을 들어 바닥으로
내려 자리를 마련 하시고는 와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시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아, 감사합니다.”
얼른 인사를 드리며 풀썩 넘어지듯 할아버지께서 내어주신 빈자리로 가
앉았다

잠시 후...
버스의 흔들림에 차츰 몸이 익숙해 짐을 느끼며 자리를 내어주신 옆 자
리의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으로 나는 조심스레 말을 붙여 보았다

"할아버지, 어디로 산행을 떠나시는지요?"
"나? 등산..청평으로 가지."
"녜,거기..호수가 참 좋지요?"

언젠가 청평호 앞에서, 산을 타고 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면서 안개 속
같이 불투명한 아침을 맞이하던 어느 날의 하루를 떠올리며 무심한 질
문을 드리는 내게로 할아버지는 참 진지한 답변을 해오신다

"그럼, 좋은 게 호수 뿐인가 어디."
"......."
"거긴 뭐든지 다 좋아. 예전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사람
도 좋고, 물도 산도 다 좋지. 그래서 올 여름은 거기서 나려고 가는 걸"
"베낭이 무겁진 않으신가요?"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손때가 묻고 군데군데 까만 곰팡이의 흔적이 남
은 큼지막한 군청색 베낭으로 눈길을 보내는 나를 따라 할아버지는 마
치 오래도록 정을 주며 함께 살아온 애완견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듯 살
가운 손길로 베낭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신다.

"무겁긴, 아직 이 정돈 괜찮아. 예전에 비하면 모든 걸 절반으로 줄인
걸. 이젠 힘이 들어서 텐트는 못 가지고 다녀. 그래, 민박을 정해 놓고
다니지."
"오래도록 산을 타셨나보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할아버지 연세를 여쭈
어보고 싶은데요.."
"나? 이제 여든 넷이라우. 산을 탄지는 한 삼십년 됐고..우리 남한
땅에 있는 산은 거의 다 가봤지. 외국의 낮은 산 몇 개 가 보았고..."
"녜? 이렇게도 정정하신데 여든이 넘으셨다구요? 그럼 산엔 자주 가
시는지요?"
"그럼! 일년이면 반은 산에서 지낸 다오"
"어머나 그럼, 할머님이 싫어라 하시지 않으시나요?"
"없는 걸! 먼저 떠나 보낸 지 한 7년쯤 됐어...건강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애기 엄마도 운동 열심히 해요. 여자들이 건강해야 해."
"아 저런,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괜찮아.그런 걸 가지고 죄송은 무슨..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할 일인
걸. 나도 준비하고 있지."
"녜? 무슨 준비를..어떻게요?"
"죽는 거! 그거 연습하고 있어야 해! 첨엔 좀 두렵게 생각했지. 그런데
이젠 아녀. 그동안 마음을 많이 비워냈거든. 욕심을 버리면 두려울 게
없어."

차창 밖으로 아침부터 흐린 하늘이 낮게 내려와 앉았더니 어느새 후두
두둑 유리창을 향해 빗방울을 뿌리고 있다.
어느새, 두눈에 가득 걱정을 담아버린 나.....

"비가 오는데요 할아버지.."
"내 걱정할 일은 없다우. 난 민박집으로 가면 돼. 단골집이니 아무 때
나 가지. 방이 없으면 주인장하고 같이 자면 되고."
"아,그러셨군요..그래도 자녀분들이 걱정 하지 않을까요?"

"첨엔 딸이 성화를 부리더니 이젠 내 고집에 항복했는지 잠잠해. 간간
이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집에 들릴때만 찬가지를 날라오곤 해. 난 딸
만 셋이라우."
"녜, 딸들이 더 살갑지 않던가요 할아버지?"
"다 똑같아. 자식이란 그저 키우는 재미고..다 크고 나면 지들 살기에
바쁜 게지."

"자식에게도 절대 욕심 가지면 안돼. 내가 줄 수 있는 만큼만 주고,
절대 바라지는 말아야 내 맘이 편한 법이야."
"그것도 욕심을 버리는 차원인가요?"
"그렇지!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 지는 게야. 그게 하루 아침에 얻어지
는 게 아니니 탈이지. 나이 들어 다 늙어진 다음에 깨달아지니 말이야.
절대 남의 것 탐하지 말어. 내 것도 다 못 쓰고, 누리지 못하고 가는
게 인생이야. 욕심을 버리고 살면, 사는데 돈도 많이 안 든다는 걸 알
게 되지."

"그런데 말이야 아직 젊음이 있다면 그게 절대로 안돼야. 젊다는 건 욕
심이 있다는 것이거든, 그땐 그게 욕심인지 뭔지도 모르는 법이고....
희망이나 꿈 같은 것과 혼돈 되어 오는 경우가 많아서 절대로 모른단

이야. 그러니 나이가 그저 먹는 건 아닌 게지. 허허허허허"

에구, 아무래도 이 할아버진 산신령님이신가 보다.

"할아버진 혹시 신앙이 있으세요?"
"나? 전엔 교회도 나가보고 절에도 가봤는데..지금은 그냥 마음으로
하나님만 믿고 살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계시는 분이시고 나는
그분을 경외하거든. 왜냐하면,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또,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 만나야 할 분이잖은가. 허허…허허.. 그러는 애기 엄마는
신앙심을 아직 못 가졌나?"
"녜에..저도 할아버지처럼..아,벌써..삼거리가 나왔네요 할아버지! 전
예서 이제 내려야만 되거든요. 그럼..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꼭,
건강하시구요.."
"그래,그래...잘 가요."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오랜 외국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할머니 속도 많이 썩혀주었다시며....그래서 좀더 일찍,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고도 하셨
다. 볼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나는 작고 못난 것
일지라도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겨보
며 진실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모든 동행자는 언제나 내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그러기에 나는,
무시로 길 떠나기를 참 좋아하나보다.




글/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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