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밑에 문주란이 방망이 만한 꽃대를 내밀기 시작했다.
" 야 ! 문주란이 또 꽃을 피우려나봐 ! 올해엔 세 번째 아냐 ? "

설흔 살이 넘은 늙은이, 덩치만 커서 이리저리 발길에 차이며 언제 쓰레기로
처리될 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던 문주란 -

이 문주란은 내가 제주도에 전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출 단속을 무릎쓰고
숨겨 가지고 온 거다. 형제들에게 기념으로 한 그루씩 분양했지만,겨울철 관
리가 불편하고 잎이 무성하여 이사다니다가 모두 버림을 받고,지금 나에게만
한 그루 남아있다.

어머니가 보살필 때에는 해마다 한번 씩 꽃을 피우고, 그 진한 향기를 떨치
던 것이 요즘 몇년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겨울에는 베렌다에 방치되여
동해를 감내해야 했고, 비료는 고사하고 물도 잘 못 얻어 먹으니 그 초라한
모습이 흡사 병든 늙은이 꼴이다.

더군다나, 덩치가 커서 공간을 많이 점하고 다른 화초를 덮는다고 미움을 받아
왔다. 그래도 큰 아들하고 나이가 같고, 어머니가 보살피던 것이라 해서 차마
내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봄 화원에 드나들면서 특수 비료를 만들어 시험삼아서 몇몇
나무에 시비를 하였는데, 그 성과가 두어달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년 동안 보지 못하던 꽃대가 한꺼번에 두 개나 삐죽이 솟아났고, 얼마 뒤 환상
적인 꽃다발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니는 물론, 가족 모두가 신기하게 바라보
며 찬사를 보냈다.

봄이 이지러지며 문주란 꽃도 시들어 갔다. 그 장대한 꽃대를 칼로 잘라내며.
나는 만유의 흥망성쇠를 연상하였다.

그런데, 엇그제 물을 주다가 살펴 보니 꽃대 하나가 슬며시 솟아나고 사흘만에
꽃봉우리를 터뜨렸다.
" 올해는 무슨 경사가 생기려나봐 ! 세번 째 꽃이 피어났어 ! "
나는 소리쳤다.

나는 비료의 효과를 잘 알면서도 그것이 집안에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라고
믿고 싶었다. 만일 나에게 지금 천복이 내린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돈?
명예 ? 권력 ? 골라잡을 것이 없다. 지금 이대로면 족하다. 다만, 환란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주란을 구박하지 말고 시골 화원
으로 옮겨서라도 잘 보호해 주어야지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는 문주란을
내가 할 수 있는 날 까지 간직해야지-.**








할머니와 산비둘기




..
길가로 문 하나 열면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꼬부랑 할머니 무릎짚고 나와 길바닥에 모이를 뿌려 줍니다.
산비둘기 한마리 다리를 절룸거리며,
자리를 옮겨가며 흩어진 쌀알을 먹고 있습니다.
한톨, 두톨, 그리고 할머니 한번 올려다보고....,
이른아침 달동네 같은 도심속의 빈가들이 모여사는
한 동네 좁은 골목길에서의 광경입니다.
의지할 자식들이 없어 홀로 사는 할머니의 손등이며
얼굴에 검버섯이 돋은 할머니, 한손은 굽은허리를 지탱하려
무릎을 짚고 프라스틱 모이 그릇을 든 손이 가늘게 떨며,
모이먹기에 열심인 산비둘기에게 연민의 정을 주고 있습니다.
카키색 브라우스에 회색 몸베 차림을 한 꼬부랑 할머니를
산비둘기는 매일아침 이렇게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늦은 가을 어느날,
동네뒤 텃밭에 채소를 돌보러 꼬부랑 허리를
나무지팡이에 의지하며 갔다가 밭언덕 아래 이랑에서
할머니를 보고 도망가려 퍼덕거리는 산비둘기를 보고
다가가니 다리에 절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새잡이 포수의 납탄에 왼쪽다리 발목의 뼈가
부서진 것이었습니다.
무우씨뿌린 받이랑을 발톱으로 후비고 주둥이로 쪼아내던
놈이지 싶어 그냥두고 오려 하였으나,
안쓰러운 마음에 잡히지 않으려는 놈을 부여잡고
근근히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약을 바르고
헝겁을 감아주어 치료하며,
늦가을 부터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동거하며
따뜻한 방안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습니다.
붙잡아 집에가서 치료해 주려하니 기를쓰고 도망가려
퍼드득 거리던 놈이 이제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산비둘기는 할머니 손에서 치료되었으나
다리뼈 접골이 잘못되어 옆으로 젖혀저 짧아진 한쪽 다리를
절룸거리며 생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처음 할머니집을 방문하였을때,
할머니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성질이 급해
온 방안을 휘젖고 다니면서 벽이며 유리창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탈출 기회만 노리던 놈이, 이제는 할머니와 친숙해져서
방안 한켠에 자리를 틀고 할머니 외출때는 집을 지켰습니다.

봄이되니 산으로 되돌려 보내도 얼어 죽을리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산비둘기 다리 상처도 다 아문터라,
붙잡아 길가에 내어 놓았으나 할머니따라 방안으로
들어가려 또 퍼드득, 안쓰러운 마음에 다시 들여 놓기를 여러번,
할머니는 슬펐습니다. 나 죽으면 너 돌보아 줄 사람 없으니
너같이 못난 절룸발이 산비둘기를 누가 돌보아 주랴며
밖에 내어놓고 문을 걸어 잠그니,
이틀 밤낮을 할머니 방문 밖에서 닫힌문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소리낮춰 울더니 산으로 날아가고,
다시 홀로된 할머니는 몸이 불편한 자신의 신세가
산비둘기와 같다며 눈물을 짓습니다.
그날 이후 산비둘기는 매일아침 해뜨기전 할머니를 방문하였고,
아침나절을 방의 열린 문안의 햇볕 가리개의 발너머 할머니 모습을
바라보며 길가에 쪼그려 앉아 보냈고, 할머니는 모이를 다 먹었으니
어여 산으로 가라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던 첫여름 어느날, 그날 아침에는 산비둘기가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간밤은 비바람이 몹시도 몰아쳐 할머니의 방 북쪽 창문을
빗방울이 세차게도 때리던 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궂은 날씨탓에 온몸이 쑤셔왔고 잠못이룬
불편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으나
산비둘기가 보이지 않아 못내 아쉬워 하였습니다.
간밤의 비바람에 몸이 성치않은 산비둘기가 어찌되었는지
깊은 한숨속에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던 낮이 지나고 비갠 저녁이 왔습니다.
자리를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는 때였습니다.
방문밖 구구거리는 산비둘기 소리에 행여 하는 마음으로
몸을 추스려 문을 여니,
산비둘기 도심 전기불빛따라 할머니집 찾아와 처연하게 부르짖는 소리에라!



윤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


오래 전엔 여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도
하나의 진기한 구경 꺼리었던 때가 있었지요.
요즘엔 너무도 보편화되어 눈 요기꺼리도 안되지만…….

조명 은은한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늘씬한 여인이
긴 머리 멋지게 틀어 올린 채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흰 담배 한 대 끼어들고 도도한 모습으로 뿜어 올리는 담배 연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걸 감히 흉내도 못 내고,
보는 것만도
눈부셔서 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슬쩍 훔쳐보지만요.

담배라면 내 어머니만큼 피우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인식할 때부터 어머님은 담배를 피우셨고
돌아가시기 얼마전까지도 담배는 어머니의 유일한 벗 이였으니까요.
말씀인 즉 새파랗게 젊으신 새댁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셨다는데
그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속앓이 때문이었다고 하셨지요.

병명도 잘 모르고 제대로 된 병원 한번 가 볼 처지가 못 될 때
민간요법의 하나로 담배는 그 시절 유일한 치료법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배우게 된 담배는 평생 어머니의 벗이자 자존심이요,
세상사를 마시고 내뿜는 돌출구였지요.

딸인 나와 다투고 난 후 토라져서
담배 한 대 피워 무시고 돌아 앉아 있던 그 뒷모습.
한복 저고리에 쪽진 모습이
비록 멋진 신식여성들의 그럴싸한 그림은 아니라도
그 자그마하고 둥근 어깨너머로 뿜어져 올라가던
그때의 담배 연기는 어머니의 가슴에 꽁꽁 묻혀있던
화를 풀어내는 실타래 같아보였지요.

평생 그 걸 보고 느끼며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담배를 그리 즐기며 사셨어도 아흔이 넘도록
건강하게 장수 하셔서 그런지
담배 피우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오히려 담배 못 피우는 남자를 만나 살면서
급한 성격의 남편이 앞 뒤 가릴 것 없이 화다닥 거릴 때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자신을 돌아다보시려 하시던 어머님의
담배 연기 피워 올리던 그 때 그 뒷모습이 그리워집니다.

-2002. 3. 15 일. 대청에 오른 글-















삭 삭, 귓전을 스쳐가는 갈바람 소리.
"삐리릭 삐리릭"
"훠어이 훠어이"
"딱 딱"

누렇게 나락 익어가는
논엔 참새 쫓는 소리가 한창이다.
이맘 때 쯤이면 마당엔 벌건 고추가 한 가득이고
들녘은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풍요롭다.

"어이, 칠복이 탁배기 한 잔 하고 가게".
억새숲 사이로 새참 소쿠리가 논두렁을 건너고
술주전자를 든 아이들 웃음이 연어처럼 날뛰었다.
아낙들은 두렁에 찬을 풀고,
고등어 조림이며 고깃국을 맛깔나게 내놓았다.
수저도 서너 벌 더 챙기고 반찬도 넉넉히 담아
새참은 늘 푸짐했다.

사기대접에 뽀얀 탁배기가 콸콸 따라지고
장에 다녀오는 사람,
구들지기 노인들까지 다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지난 봄 물꼬 싸움에 멱살 잡혀 앙숙처럼 지냈던
칠복씨도 슬쩍 끼여 못이기는 척 한 잔 비웠다.

술은 추수 후 햅쌀로 담그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집 저집 술익는 냄새가 시큼하게 번졌다.
아낙들은 날잡아 쌀 몇 됫박을 담갔다가
시루에 쪄 고두밥을 지었다.

김이 오르고 시룻번이 익어가면
그 달짝지근한 밀떡을 떼어먹는 재미에
아이들은 부뚜막 옆을 고양이처럼 지켰다.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 멍석에 말린 이 밥은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아 손을 많이 탔다.
누룩이 묻어 까슬한 밥을 아이들은
한줌씩 뭉쳐 내달음치곤 했다.

이 밥을 맛 잘든 독에 담고 물을 잡아
절절 끓는 아랫목에 솜이불 폭 씌워 익혔다.
2∼3일 지나면 발효하면서 버글버글 끓어 오를때면
어머니는 쉬지 않게 온도조절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독을 들여다봤다.

고구마통가리 썩는 듯,
메주를 띄우는 듯 그 쾨쾨한 냄새는 정말 지독했다.
술에 대가 돌면 독 안에 용수를 박아 말간 청주를 떠냈다.
물을 부어가며 체에 거르면 '막 걸렀다' 하여 막걸리가 되고
텁텁하지만 진한 맛이 있었다.

연누른 빛 맑은 술에 밥알이 동동 뜬 동동주는
달짝지근하여 입에 쩍 붙는데
도수가 높아 마시다보면 은근하게 취했다.

꾼들은 냄새가 알싸하게 올라오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맛을 본답시고
간을 재다 종일 취해 돌아다녔다.
또 아낙들은 술이 익으면 지나는 체부든 동냥아치든
마루로 불러 김치에 술 한보시기 씩 내왔다.

간식거리가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이 술 찌끼에 사카린을 타 먹곤 했다.
그것도 술인지라 가끔 벌겋게 취해 드러눕는 일도 있었다.

"술도감이다!"
멀리 신작로를 타고 밀주 단속원의 자전거가
나타나면 동네는 선술집처럼 술렁댔다.

대부분 농가에선 제사며 농삿일,
잔칫날에 쓰려고 술을 한 독쯤 익히고 있었다.
삽짝을 걸고 밭으로 내빼기도 하고
이곳 저곳 숨길 곳을 찾느라 소란을 떨었다.

먹다만 술주전자는 아궁이에 밀어넣고
나뭇간, 장독, 헛청, 뒤란 대숲,
심지어는 썩은내 푹푹 나는 두엄까지 들춰 숨겼다.

시치미 딱 잡아 떼는 통에 단속원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집안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였다.
특히 철없는 아이들 입단속에 아낙들은 애가 달았다.

모두 그런 일 없다며 손사래를 치면
술도감은 슬그머니 물러섰다가 동구 밖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눈깔사탕 하나로 꼬드겼다.

알록달록한 그 사탕을 보면
어머니의 당부는 까맣게 잊고 술술 불어버렸다.
물론 그날 저녁엔 부모님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했다.
술을 1말 정도 담갔다가 걸리면
쌀 10말은 벌금으로 물어야했고 무엇보다도 오라가라
해대는 통에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시큼한 술냄새를 맡고 이웃집에서
"이 집 술 담그나" 하면"식초 내린다네"하며
눈짓하곤 했다.

"술 한 되 받아오너라".
담근 술도 여의치 않으면 점방에 심부름을 시켰으나
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점방 술독엔 나무 술구기가 독 속에 담겨 있었고
됫박 인심은 주인 맘이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 밭둑에 앉아
술을 반 주전자쯤 마시고 우물물로 채웠다.
그러면 어른들은 점방 여편네가
물을 타서 싱겁다며 삿대질을 했고
아이들은 슬그머니 꽁지를 뺐다.

장맛처럼 이 술맛도 손내림이 있어
집안마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해 술맛을 보면
그집 아낙들의 손끝 맛을 알 수 있었다.

꽃이나 과일껍질을 넣어 만든 가향주,
아지랑이처럼 술빛이 아롱거린다는 백하주,
봄철 진달래꽃을 넣은 두견주,
여름철 황혼녘에 빚어 밤을 재운 뒤
새벽닭이 울면 마실 수 있다는 계명주,
연꽃향기가 난다는 하향주,
비스듬히 자란 소나무에 넣고 빚었다는 와송주,
네 번을 빚어 1년이 지나도 쉬지 않는다는 사마주….

일과 화해, 축복의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고,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던 술.

우리들은 어쩌면 이 가을의 어느 길목에서,
볕 잘드는 툇마루에 길손처럼 초대받아
잘익은 술 한 잔 대접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1.체부=우편배달원
2.술도감=밀주 단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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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무 리 *




어젯밤,
달무리가 지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다.

꽃샘추위 속에
하얗게 피었던 백목련도
이제 다지고
가지에는 초록의 새 잎이 돋았다.

방문을 활짝 열고 산을 본다.

촉촉히 내리는 빗속에
마주한 산이 물안개에 묻혔고
습기 머금은 하늘은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해 보인다.

먼 데서 봄꿩이 울고 있다.

산자락을 돌아
빗속을 더듬어 들려오는 산꿩 울음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함이 묻어난다.

감자 캐는 계절이 채 오기도 전에
새알 크기의
어린 자주색 감자를 너무 먹었을 때,

가슴이 아려오는 듯한
그런 기억의 아릿함에
우산 하나만 든 채 들길을 나서 본다.

보리밭,
아직 덜 여문 이삭이지만 후끈함이
콧끝을 간지런다.

풋풋한 보리내음에 문득
그 옛날 춘궁기의 보릿고개가 생각난다.
우리의 가난은 보릿고개를 넘느라
그렇게 헐벗고 굶주렸나보다.

하루 세 끼니를 제대로 못먹어
얼굴에는 온통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꺼칠하게 핀 마른 버짐이 떠날 날이 없었다.

노루꼬리만큼씩 자꾸 길어지는 봄날이
허기를 달래기에는 천 년같이 길어
산과 들을 쏘다니며 진달래(참꽃) 꽃잎과
산딸기(뱀딸기)를 따 먹느라

입술과 혓바닥은 늘
퍼렇게 꽃물이 들었고,보리깜부기를
꺾어 먹은 날은 까맣게 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웃느라 배가 더 고프기도 했다.

눈과 코는 없어지고
하얀 이만 커다랗게 얼굴을 차지하고
벌죽대는 게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토담 옆 장독대 주위에 떨어진
떨떠름한 감꽃이 유일한 주전부리였지만
어쩌다 개떡이나 밀떡이 생기면 그게
그렇게 꿀 맛일 수가 없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고 소다를 넣어 부풀린
이름 그대로의
밀떡 개떡 송기떡 쑥떡이었다.

봄비 내리는 넓은 들판에는
파랗게 쑥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채
그냥 쑥밭으로 자라고 있다.

이른 봄,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봄이 오는 들녘에는 바구니를 든
흰 옷 입은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나물 캐러 봄의 길목을
해가 저물도록 서성거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 때는 늘상 술도가(양조장)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행열이 있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술을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酒粕)와
아래기를 얻기 위해 지루한 줄도 모르고
두어 시간을 기다린다.

사카린을 넣은 단맛에 먹다가
그만 취해서 그날 오후부터 하루 낮과 밤을
얼굴이 벌개져 정신없이 잠만 잤었다.

그 후 한 달이 넘도록 속병이 나서
무던히도 고생을 하는 바람에 밀밭 근처에만 가도
취하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전설처럼 멀리 떠난 보릿고개,
우리의 가난 고개였고 눈물과 배고픔에
허기졌던 시절이었다.

내리 삼 년 가뭄 끝에
첫 달무리가 밤하늘에 걸렸을 때
어둑어둑한 밤길을 서둘러 달려가
보리밭 두렁에 나란히 앉아서

"저 놈이 어서 여물어야 할낀데.."

달무리를 연신 올려다보며
마디 굵은 손으로 내 어린 손을
꼭 잡으시던 아버지, 지금은 경산묘원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와 같이
조용히 누워 계신다.

밭에서 돌아온 그날 밤
마당가에는 해거리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이
소복소복 하얗게 떨어졌고
그해는 풍년이 들었다.

봄비가 내리기 전날,
달무리를 볼 때마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우리 어린 날들의 기억들이
해거름 봄비 속에서 자꾸만 떠오른다.

우산 끝에 맺히는 빗방울 너머로
먼 데 산꿩이 울고 있다.

(2002.4.22. 魚來山님이 쓴 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둥지로 쪼로록 달려가 노랗고 따뜻한 닭 알을
가슴에 품어보곤 엄마에게 가져 다 주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이였던가 봅니다
우리집에는 알을 낳는 닭이 두 마리 있었습니다
매일 낳는 닭 알은 나와 동생들에게 신발이랑 과자랑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신기한 요술구슬이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두개씩 들어 있던 닭 둥지의 알은
달랑 한 알 밖에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닭은 모두 울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는 둥지로 가서
주위를 살피더니 하나밖에 없는 알을 보고

“이제 늙어서 알은 낳지않고 헛울음만 지르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엄마의 허탈한 목소리와 함께
그 다음날 부턴 나는 둥지에 있는 한 개의 닭 알을
깨어 질세라 조심스레 꺼 내어 엄마에게 가져 다 주곤 하였지요

약 보름간을 그렇게 나의 닭 알 나르는 심부름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이제 늙은 닭의 울음소리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십 여 일이 지난 어느날 이였던가 봅니다
난데없이 방앗간 옆 헛간에서 들려오는

“꼬꼬대 꼬꼬 꼬꼬대 꼬꼬 “ 하는

닭의 울음소리에 헛간으로 달려간 나는 헛간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보리짚단을 뒤적이다 깜짝 놀라 소스라 칠번 하였습니다

보리짚단 속에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노랗고 따뜻한 닭 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늙은 닭은 방앗간 둥지를 떠나
아무도 가지않는 이곳 헛간창고에서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소복이 담겨 있는 탐스러운 닭 알을 보는 순간
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닭 알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보배로만 여겨졌거든요

오십 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 날들을 찬찬히 돌이키며 생각해 보아도
그 때만큼 내 마음이 부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저녁상에 계란 요리가 올라오면
보리짚단 속에 소복이 쌓여있던 닭 알을 떠올리며
예닐곱 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 깊은 행복감에 젖어 봅니다



-길벗-












십여년간을 병원신세를 지는 작은 놈이었습니다.

고놈이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7급 재검판정을 받았지요.
그날은 온종일 악다구니로 보냈습니다.
울지않으려고,
더 행동은 거칠었더랬습니다.

가족회의를 여러번 했고.
본인의 의사가 입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떳떳하고 건강한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전 현역입영의 길을 택했습니다.

복무 중인 큰놈이 걱정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어쩌시려구요.
안보내는게 더 나은거 아닐까요?"

두달을 온몸으로 뛰었지요.
남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뛴다던데...
바보 밥텡이 엄마는 군대에 아들을 보내려고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8일 3급으로 현역입영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열아홉 아들놈은
3급 판정의 서류를 들고 벙싯벙싯 웃음입니다.
내 찢어지는 가슴속은 아랑곳 않구요.
우리집의 애물...
떠나간 이가 그렇게 불렀지요.
애물이라니요.
아닙니다.
고놈이 있어 제가 요만큼이라도 겸손해 질 수 있었던걸요.
고놈이 있어
지금의 시간을 견디어내는 것을요...


그날 저녁
화장실에 물 틀어놓고 엉엉울었습니다.
16년의 세월을 뛰어서...
첨 병원에 갔던일이 떠올랐기 때문에요.
암담함...
처절함...
두려움...
공포...

그리고 기도...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에미란 이름으로
나는 고놈앞에서는
울지 못합니다.
에미란 영원히 자식들에겐 하늘인것을요...

며칠전,
아니 6월 30일,
서해안에서 북한과의 교전이 있었더랬지요.
그곳과 가까운 곳에 큰놈이 복무 중입니다.
경기도 파주...
안타까운 마음에 전화를 넣었으나 비상이었는지 전화가 불통이었습니다.
한밤을 꼴딱 새우고,
종종걸음으로 무릎꿇었었지요.

다행히 큰놈에게는 별일이 없었지마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다섯목숨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제가 꼭 작은 놈에게 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은놈이 오늘 아침 나를 울렸습니다.
별 것 아닌 일이 었는데 내 설움에 고놈에게 포악을 부렸습니다.

학교를 보내놓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울었습니다.
기대어 울 어깨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슴도 없이,
꺼이꺼이 내처 울었더랬습니다.
항상 씩씩한 옥이도,
오랜 외로움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여자인 모양입니다.

난 바보 미련 곰탱이입니다.


절영에서
옥이이모.




-늙어봐야 안다.-


나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늙기 시작할까?
그것이 늘 궁금했다.
50이 지나면서 새치가 늘어도 나는 늙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머리야 일찍 세는 사람이 있지. 젊은이도 새치는 있으니까."

60 이 지나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이를 누가 물으면 적당히 얼버무리며 딴 소리를 했다.
"나이가 문젠가, 그 사람의 건강상태가 중요하지. 사람에 따라서 10년의 차이는 생긴다고 보거든……."

그러는 동안,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남들은 나를 할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제 정말 늙은 것일까?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수평 대에도 오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면서
이젠 나도 정녕 늙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노인의 마음!
그걸 누가 알까?
자신이 늙어봐야 노인의 사정은 알게 되리라.
세상에서 점차 소외당하는 느낌,
만사를 허무로 돌리는 마음,
잘못을 보고도 관용하려는 여유,
사회적 유대에서 풀려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자식들이나 다른 젊은이들은 형식적으로 노인을 위하는 것일 뿐,
진정한 노인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늙어봐야 늙은이 마음을 알듯이
죽어봐야 진정 죽음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야 돌아간 부모의 노년기 마음을 하나씩 헤아리게 된다.

시집간 딸이 가져온 머루술 한 병
하얀 도자기에 붉은 머루술
감악산 머루술은 이름 높은 명주란다.

얼마나 향기로울까
병마개를 딸듯하다가
나도 모르게 멈춘 손길

술을 좋아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또 목이 메인다.

아버지 가신 뒤 세 번째 가을이 가고
어머니 눈감은 뒤 두 번째 봄이 오는데
내 머리는 희어져도
어머니는 보고 싶다.
아버지가 그리워 서럽다.

-2002, 1, 21. 청춘극장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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