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老시인 김춘수님을 티브이 모니터를 통해 뵈오며,
평생을 시로 점철된 그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잔잔하지만 깊게 울리는
감동을 느꼈다.

개인적인 체험을 시속에 옮기기를 철저하게 삼가 했던 시인이지만,
작년에 아내를 삶 저편의 세계로 먼저 떠나보낸 이후로는 아내에 대한
애절한 애도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시 속에 묻어난다는 말씀을 하시며
조용히 웃으시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적이시던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껏 모든 청춘의 들끓는 가슴속으로, 꽃보다 아름다운 '나’와 '너'
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시 [꽃]을 쓴 시인이지만 최근 30년간은
거의 '무의미’의 시만을 쓰셨다는 시인 김춘수님.

그의 무의미 시란,
시에 나온 모든 언어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달지 말고 그저 느낌으로
읽고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시라고 말씀 하신다.
시를 쓴 시인이 그러하였듯이 읽는 이도 그렇게..
아니, 그래야만 하는 그런 시 읽기....

老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스님의 불경소리를 듣는 듯 그저 자연스럽게 그 불경의 내용 보다는
들려오는 음률의 울림을 따라서 리듬으로 들으라는....
그래서, 시란 분명한 표제가 있는 베토벤 보다는 음의 조화가 돋보이는
모짜르트의 음악 같은 것이라신다.

그의 이런 시에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다는가에 대한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실 때, 티브이 모니터 앞의 나는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해 혼자 깔깔거렸다.

고교에서 국어교사를 하고있는 시인의 제자가 어느 날인가 사관학교의
입시에 나온 문제라면서 시인의 시에 대한 질문이 담긴 시험지를 들고
왔었다고 한다. 그래 그 문제를 보시고는 손수 답을 적어서 주셨더니
다음날 다시 찾아온 제자의 손엔 답지에 맞춰 채점된 어제의 바로 그
시험지가 들려있었고, 시험지를 보자 무심코 건네 받은 시인은 그만
깜짝 놀라셨는데...그 이유가 바로, 시험지에 채점된 시인의 점수가
겨우 40점 이었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시를 쓴 작가가 그 시에 관한 문제를 직접 풀어서 40점의 점수를 받았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느냐시며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한 컷의 사진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다.

너무도 자연스런 시를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이 낳은
너무도 인위적인 문제점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자연스러움을 얻기까지엔 老시인에게도 젊은 날의,
얼마나 많은 노력(창작의 과정)이 뒤따랐을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시를 두고 형식주의니 기교주의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신 老시인의 이런 말씀을
기사화된 활자로 읽을 수가 있었으니까..

"예술과정이란 곧 창작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많은 노력 끝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제 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에
불과해요. 진정한 자연스러움이란 오랜 예술적 수련을 거친 뒤에야
생겨나는 법입니다."

그토록이나 오랜 세월동안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회자의 말에 예나 지금이나 깡마른 얼굴에 굵은 테 안경알 속으로
아직도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맞추며 老시인은 말했다.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다만 시를 쓰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쓰게 되고..
그래서, 생활하듯이 자연스런 일이 바로 '시 쓰기’ 라고..
그러기에 '시 쓰기’가 평생 유일한 업(業)이자 취미이며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며 아이처럼 순하게 웃으시던 시인..

팔십 평생 아직 한번도 은행엘 혼자 가 본 적이 없다는 老시인의 한 마디에,
나는 현실속의 그가 얼마나 많은 것에 부인을 믿고 의존해 왔을지에 대해
조심스런 상상을 해보며 혼자만의 미소를 지어 본다.(남편에게 이런 저런
은행일을 은근슬쩍 떠맡기기 좋아하는 나의 모습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시란 현실을 멀리하고 떠날수록 더욱 현실에 관여하게 되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말씀 하셨었나보다.

언제쯤인가..
나도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형식과 기교의 알찬 땀흘림의 과정을 거친 후,
진정한 노력의 산물로만 주어질 정말 자연스러운 그런 시를 말이다


솔향


별장 문화가산책 글번호:113 날짜:2001/07/13 23:26























도둑놈 천국에 살면서  









세금을 꼬박꼬박 내다가 망조가 난
아버지 얼굴이 그립다
측은한 마음이 덕지덕지 불어난다.



못 입고 못 먹고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의 윤기 없는 살점을
노리는 도둑놈이 찾아온다.



콩나물 천원어치를 에누리하여
오백 원에 사들고 오는
그대의 얼굴이 서럽다.



단돈 만원이 생긴다면
밤하늘 별빛 고운 은하수를 사고 싶다
그대의 하얀 밤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



희망의 권리를 부여받고
태어난 불행한 우리들
도둑질한 뇌물을 지키기 위해
진돗개를 키우는 도둑놈의 나라.



오늘,
도둑놈의 천국에 살면서
나도,
대도전서(大盜傳書)를 읽기 시작한다.



옥매산/박종영











사람의 가치

사람의 가치는 어떻게 따져 측정할까
똑 같은 사람이라도 판단하는 기준과 판단하는 주체
그리고 판단 대상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힘이 세고 없고 하는 사람의 가치는 옛날 머슴 세경 매길 때
가치 기준일게다. 거기에 머리까지 영리하면 더 비싼 가치가 있을거다

얼굴 이쁘고 몸매 좋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하는 기준은
옛날 기생 고르는 포주의 기준일게다
거기에 손님 등까지 잘 치고 외상 술값 잘 받아오면 풀러스 알파의
가치가 더 하겠지 그렇지만 황진이의 경우는 또 다른 가치기준이
있을테니 예외로 치자

현대의 건설 시장에 한 번 가보자
요새는 힘든 일을 않는 사람이 많아져서 건설 공사장에 사람이 없다
아침 인력시장에 가보면 일손이 바쁜 현장에서 봉고차를 대령하여
사람을 실러 오는데 늙은이 젊은이 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막상 임금 줄 때는 아무래도 나이 먹은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그 가치가 돈 만 원이라도 빠진다 물론 여자는 남자 보다 몇푼이
더 싸다 기분 나쁘지만 어쩔 수 없다 장사는 장사니까

어디 사람 가치 한 번 더 따져 보자
재벌회사에서 일당 백만 원하는 고급두뇌의 엘리트가 시골의 농사일로
하루 품팔이 하러 갔다고 하면 그 일당은 얼마나 줄까?
일자 무식쟁이의 육십 먹은 노인의 일당쯤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젊음도 늙음도, 학식이 높음도 낮음도 사람가치의
판단기준이 될 수가 없다 하겠다
단지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가치의 기준일 뿐일게다

나는 시골에 팔순의 아버님이 계신다
다들 그랬듯이 나도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 한테 많이도 혼나면서 자랐다
내가 자라 장년이 되면서 부모님은 노인이 되시니 자연히 아버님은
판단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긴다
어느 때는 불효스럽게도 아버님께 핀찬(?)을 하게된다
그럴 때는 그 자존심 많으신 아버님은 그 눈빛이 고퉁스러워 하심을
볼 수가 있다 나는 곧 후회하고 잘못을 빌게 되면 그냥 됐다 라고 만 하신다
나이를 먹음은 누구나 어쩔 수가 없다 죄도 아니다
자연 현상일 뿐이다 나무가 자라 고목이 되듯이

그러므로 나이를 많이 먹음이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하여 가치의
판단기준이 될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러할진데 사람에 대하여서랴
단지 힘의 세기나 키가 크다거나 얼굴이 이쁘거나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손재주가 있다거나 등등의 것들은 그 필요에 따라서 효용의 가치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질 수 있을 뿐 또 배우고 못 배우고 병신이고 병신이 아니고
지금 나이가 들고 안 들고 등이 사람가치의 기준 또한 되어서는 안되지 싶다

내가 왜 요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글이 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시골에 연로한 부모님이 계셔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서 일까 나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아닐텐데 그런데 가끔 찾는 대청마루가 때로는 우울하다
凡夫의 생각이 올시다












튜이호아의 암시장은 깨끗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폭염 속의 한가로움에

슬슬 장난 끼가 발동해

무기상에 들어가자마자

맥주 5.can 꽁가이 1.

하고 큰소리로 주문했다.

(술과 여자를 주문하자, 주인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안면은 많고

거래는 깨끗하고

화를 낼 수도 없고

없는 술에, 여자는 더욱이



제기랄

술은 집에 있는 것 가지고 오고,
여자는 마누라가 나오고 있으니...



그놈의 장사가 무엇인지?

그들의 마음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이제 그만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장난이 심했다고 말하면서

장난을 접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중대장님의 무전 재촉에 할 수 없이

주문을 시작했다.

C. K 2정과 수류탄 5개 실탄 150발을 주문했고

가지고 나온 맥주를 비우기도 전에 준비가 끝나고 있었고

총 550불을 주고 거래는 현금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대대적인 작전이 끝나고 나면 많은 휴식들이 주어진다.

그 날도 3소대는 강가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1중대는 큰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물개로 통하는 박 병장이 연못에서 놀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갑자기 박 병장이 소리를 지르고 물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있었지만

장난하는 줄 알고 바라만 보고 다들 웃고 있었으니

그런데 물 속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급히 물 속에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소대가 대대적인 수색을 펴보니 수초에 감겨 죽어 있지 않은가?

금방 비상히 걸리고 소대장 중대장이 왔다.

군에서 안전사고는 큰 골칫거리였으니 더욱이 사망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중대장 이하 장교 하사관은

진급에 지장이 많으며 직속상관은 책임을 묻고 있다.



금요일 저녁 11시 40분 매복조에서 상황이 타전되었다.

1소대 매복조와 베트콩의 대대적인 총격전이 있었고

포대의 조명 지원도 모자라 헬기 조명까지 가세해

난민촌 입구는 대낮같이 밝았다.

지루했던 불꽃놀이는 2시간 가까이 가서야 끝이 났다.

전과와 아군의 피해는

베트콩 사살2명 C. K 소총 2정 수류탄 5개 실탄 다수

아군 피해는 전사1명으로 밤중에 이동병원으로 공수.



물에 익사한 박 병장을 위생병 이 병장은 잘도 닦고 있다.

나무 그늘에 판초우의를 깔고 알코올로 정성스럽게 3번을 닦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있다.

그런데 한시간도 채 못 되어

다시 옷을 벗기고 헌옷을 입히고 땅바닥에 몇 번을 굴리고 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중대장님의 호출이다.

품목을 적어 주고는 즉시 다녀오라고 했다.

투이호아의 암시장을



부대장의 묵인 하에 가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고

죽은 박 병장은 업혀 나가

김 하사가 조준하는 C. K 소총에 정면을 관통하여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명치에 단 방울의 피가 흘렸다.

저승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두 번 죽는 사자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동작동에 장엄하고 잠들고 있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우리 인류 평화를 위해 자유의 십자군으로 참전하다

장렬한 최후를 바친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부의 특혜와 연금으로 잘 지내고 있을게다.



김 하사는 죽은 박 병장을 다시 C .K 소총으로 죽이는 공에 의해

57$의 봉급을 10개월 간 못 받는 대가로

화랑 무공훈장을 받고 진급도 했으며

조국을 위해

영원히 길이 빛날 금자탑을 쌓고 있었고

악질하사라는 오명을 벗고

지금은 근엄한 상사로 군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건 어느 날의 가짜 상황 일지다.

그렇지만 실제 일이다.

가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결국에는 진실은 없어지고

가짜만 남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현실에서는 흔한 대리전이 판을 치고 있다.

가짜가 진짜가 되는.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자가 되어 편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었다는 근사한 이유와 함께.

시치미를 잘도 떼면서.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치부하면서



자본주의의 부산물이요,

우리 현실이 자신도 모르게 만들고 있지,

자아의 인간성 상실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어쩜 이 대리 전은

엘리트들의 포장된 유희인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어차피 인간성 상실이라고 매도하면 그만 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웬 조화일까?



요즘 어르신들의 요양시설을 자주 간다.

여기에서 대리 전 생각이 자주 나는 것은 내 과민성일까?

그냥 내 할 일만 하고 돌아오면 그만인데.

그래도, 그래도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휴일에 책임자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봉사자들은 몰려오고, 급박한 상황은 늘 일어나고 있는데

이곳에서 대리전이라니

곧 해소되리라 기대하면서도 뒷맛은 개운치가 않은 것은 날씨 탓일까?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총을 근사한 언행과 사물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는 이야기는 접더라도

상류사회나 최고 지성인들의

상실된 인간미와 치졸한 행동,

끼리끼리의 야합의 행동에 실망한지 오래이다.



자존심을 최고로 지칭하는 글 쓰는 사람들조차도

교묘한 자기미화와

자아 상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부분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대리전쟁 속에서 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존경받는 곳에서

받은 충격에 실신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돌아가고 싶다.

가서 통곡하리라.



이제 정석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자아를 찾을 때까지



그리고는

이 가짜 속의 나를 찾아서

그 님의 사랑 속으로 돌아가리라.

영원히.





(2002.6.12. 보리밭님이 쓴 글)














** 동생 아다다 **






내 슬픈 전설의 22 페이지( 그림 천경자 )




저는 착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는 순수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는 저기 서 있는 사람은
하얀 사람이다 라고 하면
하얀 사람인줄 아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아다다~순진하고 착했습니다
제가 50평생 동안...가장 좋아하는 친구
친구의 동생도 아다다처럼 벙어리였습니다
헤헤 웃는...그냥, 아아"의 소리 밖에 못하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국민학교만 나오고
더이상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안 보낸 것입니다
학교는 못가도 그녀는 웃으며
싸돌아 다니기만 했습니다.
농사 일과 집안 일은 맡아놓고
그녀의 차지였습니다

친구네 집은 우리 마을에서 강건너
저편인데 시오리 거리였습니다.
힘드는 생활인데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반기며 오빠와 오빠 친구인 나를
하염없이 좋아만 했습니다.
그냥 얼굴울 보면 압니다
눈빛만 보아도 압니다.
맨날,여기 저기 바보라 소리를 듣는
그 동생이 얼마나 우리들 오빠들을 좋아 하는지를..
행동과 말에서 표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위선과 가식이라고는 전혀 티끌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긴?=그러나 너무도 예쁜
그런 친구의 동생이었습니다

또래 애들은 고등학생이었는데도
그녀는 일만하는 시골소녀였습니다.
우리들이 대학생이였을 때에 친구 집에서
그녀를 볼라치면 항상
솥두껑처럼 큰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논으로 밭으로 나다니며..밭을 매는
키는 멀대처럼 솟고,저고리 해삼 적삼은 헤져
햇볕에 그을린 붉은 속살이 드러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언제나 미소지으며, 아다~로 반기는,
그녀는 제 친구의 동생이였습니다.
.............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막 되던
어느 해에 친구의 집에 갔었습니다,
그 때 친구 동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친구의 동생을 물었지만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의 눈가엔 작은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히고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더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서는 내내 저의 눈 앞은
그 동생의 해맑게 웃는 옛 모습만 어른거렸습니다
........
그 뒤 들리는 이야기로 여름 날
홍수로 불어난 내를 건너다 물에 휩쓸려
그렇게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고향의 江은 평상시에는
조그만 물줄기가 맑게 흐르는 내인데도,
비만 오면 맹수처럼 불어나는
물쌀돌이를 일으키며 무섭게 내달리는 江이 됩니다

곧 아랫 마을 허리가 꼽추인 총각에게
시집 가는 날을 잡아놓고 기뻐하고 좋아 했었다는데
그날도 일만시키는 성화에 못이겨 강건너 밭을 매러 갔다가
갑작스레 쏟아진 여름 폭우에 넘친 강물을 건너다 그랬답니다,
.......

.......

그후 이제는 벌써 20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너무도 착한 이미지로
지금껏 제 맘 속에 남아있습니다
...
...
백치아다다(계용묵의), 노래 아다다~
아다다가 생각나는군요
백치 아~다다,..누가 불렀던가요
오래 전의 노래 아다다
너무도 착하고 착한 우리 아다다,
너무도 가엾은 우리 아다다,
불쌍하고,불쌍한 착한 아다다
몇 년 전인가..이미자와 조영남이
세종문화회관 이미자콘써트에서
이 曲 아~다다를 부르더군요,
미칠듯이 밀려 왔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밀려오는 애원의 곡조가
이미자외 조영남의 美聲으로 어우러져
제 마음을 후비어
제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글/이주민








햇살이 몹시도 따뜻하던 어느 봄날에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어떤 할머니께서 좌판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하시고 계십니다. 지나가며 우린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 부자는 아니더라도 우리 부부 손잡고 공원에라도 산책하는 여유와 국수 한그릇 사 먹을수 있는 형편이라도 되어야지 우린 저렇게 되게 낭비말고 부지런히 살자며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런 한달 후 친정 엄마께서 우리 집에 다니려 오셨습니다. 아침에 식구 모두 직장에 나가고 혼자 심심하셨는지 운동 삼아 동네 한바퀴 도시다가 할머니를 발견하시고 과일 좀 사오셨다며 저녁 먹은 후 내 놓으십니다. 그러면서 젊을땐 고왔겠다며 "그 연세에 쯧쯧" 혀를 차시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 다음날 엄마께서 좋아하시는 메밀국수를 하려고 장국 만들어 식혀두고 국수를 삶아 놓고 냉장고를 뒤져 파를 찾으니 다 먹었는지... 할 수 없이 수퍼에 파를 사러 가다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나서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께로 향했습니다.



"할머니 잔파 천원치만 주세요. 봉투는 여기 있으니 여기에 담아 주세요." 파가 담긴 봉투를 내미시며 한줌 덤으로 더 주시며 고마워 하십니다. 봉투까지 들고 와서 더 주는 거라며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푸근해 보이고 비록 자판에서 장사를 하고 계시지만 고운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시장 다닐 때면 꼭 장바구니와 비닐봉투를 가지고 다닙니다. 내게는 비록 하찮은 봉투이지만 장사꾼들에게는 돈이니까요. 좀 귀찮더라도 가져갑니다.



난 가끔 할머니께 뭘 사러 갔다가 놀다 오기도 하며 시장에서 사고 받은 봉투는 깨끗이 씻어 차곡차곡 말려 두었다 할머니께 갖다 드리면 고마워 하시며 과일 몇개 집어 주십니다. 내가 받지 않으면 도리어 할머니께서 미안해 하실까봐 그중에 못생기고 흠 있는 걸로 몇개 골라 도망가듯 뛰어 가면 할머니께서는 나를 부릅니다. 그건 팔지 못해서 할머니께서 먹을려고 두었던 거라며 좋은 것 가져 가라고 고함을 지르십니다. 난 뒤돌아 보며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얼른 집으로 갑니다.



어느날 할머니께 김치지짐 몇개 구워서 갖다 드리면서 가족이 없으시냐고 여쭈니 "놀면 뭐하노 힘 있을때 움직여 손자 용돈도 주고 내도 좀 쓰지" 하시면 씁쓸하게 웃으십니다. 젊은 시절때 참 고왔던 얼굴이며 그런대로 사셨던 인품인데 어찌하여 저 연세에 길거리 자판에서 장사를 하시며 사시게 되었을까 가슴이 아픕니다.



난 가끔 남편과 다투거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엔 지짐 몇개 구워 할머니께 갑니다. 어린 시절 동네 머슴아들에게 맞고는 친할머니께 이르듯이 할머니께 남편 흉도 보며 화를 내기도 하면 할머닌 사람 좋은 웃음으로 "참거라" 하십니다.
"참는 사람이 이기는 기다. 남정네들 알고 보묜 불쌍하데이 그래도 색시 신랑은 그만하몬 된기다, 꼭 시장 같이 댕기고 심부림도 잘 하드마이 천난만날 젊인기 아이라 쌔움 하지 말거라" 하십니다.
난 할머니 말씀에 잠시 내 자신이 부끄러워 집니다. 그런 내 투정을 항상 잘 받아 주시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말씀을 더러 해 주시는 할머니가 참 좋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 밤에 남편이 내게 그럽니다. 비오는데도 천막밑에서 찬밥 드시고 계시기에 인사도 않고 얼른 와버렸다고 하는 남편도 마음이 안쓰러운가 봅니다. 내내 그말이 가슴에 맺혀 있었습니다. 그날도 남편이 늦는다는 전화에 남편줄 밥을 도시락에 담고 지짐 몇개 굽고 된장찌개 가지고 할머니께 갔습니다. 비닐을 덮어 쓰시고 계시는 초라한 모습에 공연히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가족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그들이 미웠습니다. 한사코 마다하시는 할머니께 던지듯 도시락을 드리고는 돌아서는데 내 눈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밤 늦게 들어 온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잘 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 주는데 갑자기 왈칵 또 눈물이 쏟아집니다. 아마도 예전에 내가 고생하던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가 봅니다. 울면서 나 늙어서 할머니처럼 그렇게 살기 싫으니 돈 많이 벌라고 하니 남편은 웃으며 알았다며 그런 내가 어린애 같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그런 남편이 듬직해 보입니다.




(2002,3,24, 새침이님이 쓴 글)







비...... 글:보니/ 강길수



비가 오고있는 대지의 모습은 우리를 순수하게 한다.

정갈하게 가꾸어진 잔디밭 위에
한 줄기의 소나기가 내릴 때,

작은 연못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무수히 파문지며 물기둥이 솟을 때,

연록으로 물든 봄의 산야에 보슬비가 내릴 때,
비는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한다.


어느 비 오는 가을날,
낙엽 깔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알게된 소녀가
열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비만 오면 비통에 잠기던
다정했던 옛 벗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게 될 때,

여행길의 차창에 빗줄기가 흐를 때,
그리하여,
문득
지난날의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확 되살아나고,
"아! 나는 바보였었다!"라고 후회하게 될 때,
흐르는 빗줄기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비는 쉴 새없이 대지를 두드린다.
대지는 문을 열고 생명은 눈을 뜬다.


한 포기의 방울꽃이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을 때,
밤새껏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멎어 버리고,
산뜻한 새 아침의 햇살은 터지도록 맑고,
순결한 방울 소리가 온 아침에 퍼질 때,
어제 내린 비는 기묘하기만 하다.


비 온 후의 깔끔하고 순결한 생명의 대지,
온통 맑고 푸른 하늘,
신선한 공기,
청아한 새소리‥‥‥.
이 모든 것은 신비로운 비의 작업이다.


비가 있는 대지
축복 받은 곳,
생명의 고향.

비가 없는 대지
버림 받은 곳,
황량한 사막.

비는 대지의 생명소(生命素),
대지의 혈액(血液).
비는 혈관을 따라 흐르며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제거한다.


대지는 싱싱하고 온통 푸르다.
골고타의 언덕 위에 암흑이 뒤덮고 비가 내릴 때,
거룩한 빗방울 방울 성혈(聖血)이 되어
온 세상을 씻어 내리고,
순교자의 붉은 피로 연연히 이어 왔으리니,

비는
거룩한 사랑의 상징,
영생(永生)의 효시.


비는 내려야 한다.
사랑의 비는 내려야 한다.
너의 마음에도,
나의 마음에도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도‥‥‥.
비는 내려야 한다.


공해로 질식되는 자연을 씻어주고,
기계와
정보와
돈의 노예로 전락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독선과
아집과
이기와
그릇된 사상과
무관심을 모두 씻어버리고,
맑고 순수한 영혼이 숨쉬는 대지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진노의 대왕 폭풍우가 되어
혼돈의 현대에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한다.
더 격렬한 '노아의 홍수'가 필요한 세태(世態)다.

장마철은 와도 참 비는 내릴 줄 모르는가?
비를 그리는 내 마음
어둡고 내가 찾는
맑은 동공(瞳孔)들은 어디에 있는가?


비는 우리를 기다리게 한다.
대지는 갈증으로 신음하고,
곡식은 말라죽을 때,
농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때,
비는 끈기 있는 인내심을,
사심 없는 맑은 마음을 요구한다.

비는 또, 우리를 당황하고 슬프게 한다.
폭풍우가
노도(怒濤)보다 등등한 기세로 대지를 삼켜 버릴 때,
갈증에 신음하던 대지는 홍수에 휩쓸리고,
무수한 수재민이 생길 때,
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느 덧
홍수의 상처도 아물어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가 내릴 때,
비는 비로소 기쁨을 선사한다.

대지와 생명을 사랑하는 비는
온 누리에 영그는 열매와 곡식이
자신의 분신(分身)이란 것을
그리고, 결코
비는
인간들의 이기,
자만,
독선,
아집,
탐욕,
분노,
나태‥‥·,
이런 것들과는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한다.

비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로운 용서의 선물이다.

구름으로 승화한 빗방울은
바람 타고 대지를 살피다가 필요한 곳곳에 내린다.


비는 태초부터 대지에 내린다.
뭇 생명을 발아시키고,
양육하며,
이물을 씻어 내린다.

비는 대지의 혈액,
그 기묘한 작업을 계속한다.
비가 오고 있는
대지의 모습은 우리를 순수하게 한다.




별채: 번호:22320









하남시 사회문화회관 조감도 (석정님의 공모 출품작 디자인 송윤호)


7년 전에,
역삼동에 한 설계사무소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건축의 축자도 모르는 내가 특공대로 초빙되어 간 꼴이다.
설계비 20억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이므로,
회사의 사활을 걸고 일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동생 친구의 부탁이고, 사장도 동향에 동갑내기이라 흔쾌히 입사했다.
나름대로 "컴도사" 소리를 들으면서 전직원 교육도 해 주었다.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면서.....

일상근무 시간에도, 툭하면 직원들이 불러댔다.
내 일을 하면서도, 사무실을 이곳 저곳으로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고집 쎈 컴맹들을 수준까지 올려 놓았다.
IMF가 터지고, 이름 있던 사무실들이 쓰러져 갈 때에,
우리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두가지 대형 프로젝트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설계실 직원들이 3개월 째 일이 없어 놀게 되었다.
결국 두 개의 사무실을 하나로 뭉쳐서 구조 조정을 했다.

오산에서 출퇴근하려니, 어쩔 수 없이 자가용을 이용하였다.
기름 값은 폭등하고, 주차비에 도로비에, 절반은 땅에 버리면서,
열심히 다녔다.

처 자식들 장래를 위해서 끝까지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정월, 비장한 각오로 두개의 프로젝트를 해결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살 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30 여일을 철야를 했고, 한가지만 통과 되기를 빌었던 것이,
2월 중순에,
두가지 모두 통과되었다. 무려 30억을 딴 것이다.
기대 밖의 성과에 다른 직원들은 축제가 벌어지고,
나는 집에서 죽은듯이 밀린 잠을 잤다.

축하와 위로의 전화를 받으면서.....

그렇게 일어났는데.....

일간지에 직원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건축사 한명 뽑는데, 이력서가 수천장!, 가히 경제난을 알만 했다.

사장 입이 찢어졌다.
나는 그로써 만능인이 되어 버렸다.
관공서에까지 초대되어, 전산망을 휘젖기도 했다.

결국 40여명이던 직원이 300여명이 되었고, 사무실도 크게 이전했다.
꿈에 부푼 사장은, 합병도 하고 연구실도 차리고,
일본,독일,프랑스 유학파들과 석사급을 대거 기용했다.
방계 사업도 벌리고, 사장 식구들이 사업을 분담했다.
회장도 세우고, 부사장도 둘을 두고, 임원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자동차도 고물 그랜져를 버리고 에쿠스로 바꾸었다.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은 사장은,
오늘의 자기를 있게 해 준 직원들을 도태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대망의 프로젝트들은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도,
전혀 진척이 되지 않았다.

홀로 실장인 나는,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 속에서 시달림만 받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실적에 목마른 사장의 안달에,
정든 직원들은 하나 둘씩 떠나갔다.
결국 나 홀로 남아서 신입 사원들과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사공이 많아서인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발언권도 없어졌고,
그저 로보트처럼 일만 했다.

과거에는 두어달씩 연구해서 하던 일들을,
언제부터인지 두어 주만에 처리해야만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겹치기로, 이쪽 저쪽 사무실에서 계획한 일들도 하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년,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운전대에 앉을 수도 없을 지경으로 다리와 온 몸에 통증이 왔다.
진통제를 먹으면서 지팡이를 짚고서도 태연하게 일을 계속했다.

결국 쓸모 없는 퇴물 취급을 당하고,
물갈이를 하려 하면서도,
그래도 눈치는 보여서 함부로 하지를 못하더니,
명색이 공신인데...

결국 사장 입에서 생트집이 나오고 말았다.

병원에서도 오지도 말고, 경보를 많이 하란다.
바로 근골격증이다.
진단도 없고 산재도 안된다. 걸을 수도 없는데 환자가 아니란다.
백약이 무효이고, 오로지 운동을 해야만 하는데,

왜 그토록 미련하게 살았는지.....

그래서, 마침 후배들의 부탁으로 조금 편한 일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만 쉬라는 것을 뿌리치고 직장을 옮겼다.

쉽게 생각했던 일이, 몇명 안되는 직원들과 하려니까 어려워졌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위해서, 강원도까지 택시보다 더 뛰었다.
그렇게 해서 4개월 만에 일은 성사되었다.

그런데.....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사람이 오래도록 준비를 해서,
남에게 빠지지 않는 주단가게를 차렸다.

제법 장사가 되는 것 같더니,
월드컵에, 비수기가 닥쳐서 많은 적자를 내고 있다.

몇개월 쉬었지만, 여전히 몸에는 자신이 없다.
산책을 일삼다가 너무나도 무료해서,
법률서적도 뒤져보고,
사이버 공간에서 얼굴 모르는 제자들도 두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미련이 남았다.
이 시대에 컴퓨터디자인의 원조라는 자부심이 그것인데,
어느 분야 보다도 더욱 빨리 늙어야 하는 것이,
요놈의 직업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사무실을 개설하려고 보니까, 집사람이 선수를 쳐 버렸다.
셔터맨이나 하고 운전기사나 하면서 지내기에는,

진짜로 속이 터질 지경이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
저마다 살기가 바쁘니까, 시간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30년 만에 시골의 국민학교 스승도 찾아 뵈었고,
소꼽친구들도 찾아 보았지만,

아직은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정말로 화가 치민다. 세상은 왜 이 꼴이고, 나는 왜 요 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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