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 북적,

오늘은 평소에 5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이 걸려도 겨우 갈동말동.

어디서 쏟아 부어버린 걸까?

순회(?)조차 포기해 버린 날.

나조차 나서면 그 것이 민폐.



알아 찾아오는 사람 맞기로 하고,

사진기 맨 녀석 독촉하여 옥양폭포나 다녀 올까?

잽싼 녀석이 오늘따라 실탄없는 전투참가!

눈알 부라리며

내가

독촉하여 잊었다고 매운 주먹으로 때려데며 필림노릇 하란다.

사진기에 몇장 국건데기 말라 비틀어진 것같이 남아

파리 앉다 턱에 걸린 시레기같은 몇장으로 찍다보니

약이 바짝 올라 필림이야 아무데나 사대면 되지만,

녀석 작가라고,

100짜리 필림은 아닐꺼구

못 들은 척 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산골 물골 찾아 들었으니 구하기 포기하는 내 맘 알기나 알았을까?

심통나 뽀루퉁 한게 여간 속 상해 하는게 아닌갑다.

ㅡ 오늘만 날이니? ㅡ

곁으론 암 말않고 전투병 잘못이라 우기고 말았다.



내가 안내한 곳이 작품 가치 있는 절경이긴 절경인 갑다.

속으로 우쭐한 재미에

마음 달래고 하산.

덤으로 따라 온

너댓 명 거기 떼놓고

사유지인지라 노장 주인께 은근 슬쩍 떼밀어 자리 달라 놀게하고,

남은 사람들께 추워 감기 걸려도 못 책임진다 엄포 놓고.



내 굴로 돌아 오는 길 더더욱 엉망진창 ,

길이 전부 주차장이라!

약 3km 거리

왕복 2차선에 길 양쪽으로 세워진 주차 전쟁.

이것 저것 전쟁인가?



길섶 물가엔 벗고 뛰는 하동(?)들 길옆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애,어른 다들 벗고 젓고 난리법석.

상.하행 교대로 빠지려니 교통정리 포졸님들 넋잃은 표정.

그러거나 말거나 실탄 못 챙겨 아쉽다고

실탄없는 총쟁이 작가는 뽀루퉁.

사진기 만든 과학자 누구야!



오늘은 채운사 주지 방에 "하마선도" 기웃거려 볼까 작정했더랬는데.

포기.

국도변이 이 모양이니 계곡 안이야 말해 뭐 하겠나?

친구들 보여 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선 눈 앞에 삼삼한게 내 부터 보고싶어 안달인 맘 달래려고 가슴 쓸어 내리는데....



고개 넘어 내 굴 찾아드니 여기 또 마음 쓰게 하는 일 널려있다.

잽싸게 왔다 갔다.

친구 녀석 맘 안 상하게 히죽거리면서...

그래도 친구녀석 곁에 있으니 손님 아무리 북적여도 녀석 어디 불편하지않나 걱정이 먼저다.

녀석 방안에 처박혀 단단히 삐진 모양.

다시 가서 작품 건지고 싶은데

내가 움직여 주지않으니 밉어 죽겠나 보제?



서울서 오기로한 형 소식만 묻는다.

내 속알 딱지나, 저 속알 딱지나!

속으로 씨익 웃으면서도 곁으로 어벙벙한 표정으로

"글쎄? 오려나 말려나?"

형이야 약속이 폭탄인데 않 오실리 없지만 저 약 올라 자꾸 묻지만 난 나 몰라다.

ㅡ 용용 죽겠지? ㅡ



땀 뻘뻘 흘리며 오늘 같으 날 고속도로까지 주차장인데

뛰다 . 날다. 기다, 걷다

다리려 온 형,

보자 말자 얼른 가잔다.

숨도 돌리지 않고 막혀 죽으라고?



땍끼 놈에 아우야 이 글 보고 들랑 울어라!

나 말고 너 욕해 줄 사람없는 세상 좋은 세상!

그래서 나는 더 좋은 세상.

아하

널보고 울어랄 수 있는 내 심술이 신난다.



그래도 둘이서 컴에 머리 맞대고 신나 낄낄 거리니 공연히 셈난다.

요게 내 심술 통이라.



포도주 한잔에도 사실 낮 술은 나를 팽그르르 취하게 하는데 그 기운에 이곳 저곳 돌아보고 또 드려다 보며 헤헤 거린다.

손님과 친구에 차이

있어서 든든한게 친군갑다.



가버린다고 나서며 싱글거리는 얼굴이 미운게 그 탓인가보다.

젠장,

또,

젠장,

혼자 버려지는가 보다.

제일 보기 싫은게 떠나는 사람 뒷 모습이다.

근데

지금 내 눈에선 왜?

물이 흐르지?

글씨가 않보여.



그러다 보니

난 아주 나쁜 친구가 하나 있다.

이 놈 아주 고약한 놈이다.

뭐?

나더러

여성학도 모르는 놈이라고?

세상에 날보고 빵점이란 놈이 다 있어?

짜식!

넌 갈 때 간다고 인사 한마디도 않고 간 놈이 잖아?

내가 젤 싫어하는 뒷 모습조차 제대로 보여주기라도 했니?

너 그렇게 고약하게 굴다간 천 년 쯤 살고 벽에 똥 바르다 못해

그 똥에다가 "아지노모도" 처서 먹어라.

못 된 놈!

자식 넌 사람이 뭔지 알기나 하니?



천 년은 살아라.



형아!

아우아!

너 말고.



지금 쯤 잘 도착하여 꿈 속에 있겠지!



친구야

잘자라.

그래도 친구 너 보고잡다,

형아도,

아우도.


가을!

가을인가?
하기야 立秋가 이미 지났으니....

지난달 찾았던 덕유산
연록의 능선에 흐드러지게 핀 산나리
그 아름다움이 제것인양 그 위를 한가히 날던 고추잠자리떼....

그저 山中이어서려니 했더니만
그게 바로 찾아오는 가을을 예고함이었나보다.

오한에 눈이 뜨인다.
침대보로 온기를 되찾는건 금방 한계에 부딪친다.
마지못해 일어나 닫는 베란다 창 밖으로
대모산 초입의 네온 불빛이
파르라니 빛나는건 아마 가을의 냉기탓이 아닐까?

그래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오늘 아침 어느 신문에 윤동주시인의 序詩가 올라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부끄러워했다."

왜일까?
나는 여기서 왜 가을하늘을 연상했을까?
평생을 가지고 다니는 내 닉이 된 가을하늘을 말이다.

이 가을의 초입에서
다시 접하는 서시를 음미하며
나는 올 한해의 나를 뒤돌아본다.

한해를 열며
참으로 많은걸 갈망했고
그리고 많은걸 베풀어 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돌아보는 지금
내 희망과는 너무 많이 동떨어져 있다.

이 가을이 가면
하얀 겨울이 오고...
또 한해가 시작되겠지?
그럼 또 다시 새로운걸 희망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남은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2002.8.14






 





◎ 이름:박대성/열마당쇠

2002/8/14(수) 16:54 (MSIE5.0,Windows98;DigExt) 61.80.4.51 1024x768


http://lee1233.x-y.net/tech_img/image/userimage/basistitle2.gif align=absmiddle border=0> 어른이 읽는 동시  































































◎ 이름:박대성/열마당쇠

2002/8/14(수) 16:54 (MSIE5.0,Windows98;DigExt) 61.80.4.51 1024x768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시


 














제목;우리 놀이터




1



툇마루,토방은 우리 놀이터

소꿉장난 할때는 꼭 놀지요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서

사금파리 줏어다 솥단지 걸고

마른흙 모아서 밥을 하고요

봄나물 뜯어다 반찬 만들어

이웃끼리 골고루 나눠 먹지요.



2



냇가 다리밑은 우리 놀이터

비가 오고난뒤 꼭 놀지요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서

대소쿠리 가져와 휘휘 저으면

검정고무신에 가득 차지요

미꾸라지 잡아서 구워 먹어요

솔개들 뱅뱅돌며 입맛 다시죠.



3



마을 어귀 논바닥은 우리 놀이터

추수가 끝난뒤 꼭 놀지요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서

말뚝박기 놀이도 신이 나고요

딱지치기,자치기 재미있어요

해가 서산에 걸릴 때 까지

고추 잠자리 빙빙빙 같이 놀지요.



4



앞동산,뒷동산은 우리 놀이터

눈이 온날은 꼭 놀지요

아이들,어른들 모두 모여서

워워워-워워워-소리 지르면

꿩들이 훨훨훨훨 날아 가고요

토끼들이 후다다닥 도망 가지요

눈오는 겨울날이 신이 납니다.





































아버지와 겨울 부채






"아버지 저 왔습니다."
"왜 이리 더디 왔느냐."

추석에 뵈온 친정아버지를 며칠 전
구정이 코앞으로 다가올 즈음에서야 뵈오러 갔었다.

문을 밀치며 반가워하시는 여든 일곱의 아버지.
어머니를 먼저 보내신 지도 어언 5년여...
모습을 뵙는 순간 마음속에서 아릿한 아픔이 일렁이며 일어났다.

같은 서울에서 내 차를 몰고가면 30분이고 지하철도 바꿔타지 않고
1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출가외인 딸년은 앉자마자 치밀어 오르는
더운 목젖을 가라앉히면서 찾아 뵙지 못한 변명을 있는 데로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아버지께서
"그래...그 병풍 내가 꼭 한번보고 싶구나.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애를 써서 글씨를 쓰고
더 더욱 그 어른의 글이 내용이라면, 그런데 내가 가서 볼 수도 없고."

혹독하리 만큼 딸들에게 특히 엄격했던 아버지 그렇게도 호랑이시던 옛모습은
간 곳이 없고 어지럼증을 호소하시며 차를 타고 하시는 외출도 손과
다리를 떨 정도로 건강이 쇠잔해 지셨다.

한참을 뭉그적거리시더니 윗목에 있는 장롱의 서랍을 여시고는,
'어느 문중의 碑文을 지어주었더니 약간의 사례비와 함께 선물로
보내왔다는 전주 합죽선 부채 두 자루'를 꺼내놓으시더니...
"여기에는 蘭(난)을 치고 ...
이곳에는 "制外 安內 (제외 안내)라는 ...글을 써서 완성해 오려므나."

"蘭(난)을 친 부채는 너의 향기가 날것이니 내가 지닐 것이고
制外 安內 (제외안내: 밖의 일을 잘 제어하면 집안도 편안해진다 라는 뜻)
글씨를 쓴 부채는 정서방(남편)을 줄 것이니라." 하시면서
이 두 가지를 만들어서 곧 가져오라 하신다.

"아버지 천천히 해서 여름이 되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내가 그때까지 살려나 모르겠다." 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주신 숙제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아버지의 여생이 아주 조금 남았음을 일러주는 듯 했다.

지금 나는 매일 부채를 만지며 하루라도 빨리 숙제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은 채 부채에 그릴 난과 글씨 연습에 하루를 바친다.
이 딸자식의 향기가 담긴 겨울부채를 가슴에 하루라도 빨리 품고
싶으신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을 읽고 왔기에....
아버지~~!!!!!!!!


윤비









폭포 앞에서




-해맞이-



부딪힘이 새로움을 창조해 낸다 .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어지는 것

물보라 일으키는 포말의 튕김도

속내를 달구기 위한 몸부림



자유를 향한 허물을 벗고

직각을 뛰어 넘어

낭떠러지를 곤두박질 친다

소(沼) 가득 수평의 물살 위에

또 다른 비약을

준비하는 기울기



한 방울의 외침이

가슴을 쓸어 내린다






슬픈 가을여행

참으로 오랜만의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적 없는 해인사 암자로 오르는 숲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작에는 아무생각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은 슬프도록 푸르고 구름은 걱정 한점없이 평화롭게 떠가고
바람은 또 그렇게 새소리와 함께 가을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암자 밑 고냉지 채소밭의 무우랑 김장배추는
스님들의 그 청정한 몸과 마음만치도 싱싱하고 깨끗하게
겨울을 준비하고 이따금 딱! 딱! 떨어져 내리는
도토리 열매의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저의 죄 많은 심장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보현암 금강굴 널따란 법당에는 향내마저 바람에 씻기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텅빔으로..... 화려한 금빛
비로자나 부처님은 저의 외로운 영혼을 아시는 듯 모르시는 듯
삼매경의 평안함으로 그냥 계시더이다.
법당에 혼자 30분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삼선암 선방에서 공부하는 비구니스님들의 회색빛 장삼과
그 해맑은 얼굴빛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참으로 좋으시구나!! 해서 많이도 부럽기도 했습니다.
인연의 끈을 과감히 끊고 출가할 수 있었음에....

숲속길 여기저기에는 이름 모를 풀벌레와
마지막 꽃을 피우는 들꽃들의 향연으로
가을빛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고
먼 암자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의
그 단조로우면서도 감미로운 소리는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함께 평안과 평온과 깨끗함을 노래하더이다.

해인사 구비를 감고 흐르는 계곡 물은
쉴새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송사리 떼 같은 작은 물고기들을
어울리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굽이쳐 흘러가는지
그렇게 마냥 흐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의 어지러운 생각과 내 더러운 영혼의 찌꺼기도
그 맑은 물살에 묻혀 씻겨져 내리면 좋으련만............
마냥 그러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밀짚모자를 쓴 너무나 해맑은 비구니스님이
제 곁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인삼을 다린 차 한잔을 조그만 보온병에서
따라서 전하는 겁니다.
그 뜨거운 차 한잔과 함께 스님이 저에게 들려주신
20 여분간의 법문은
제 서러운 이번 가을여행의 해답이 되어 왔습니다.

인연은 끊고자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연의 연이 끝나야 자연히 사라지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
주어라~~~~~ 무엇이든지 끊임없이 줄 수 있을 때까지 주어라....
연이 다하면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떠나갈 것이니.....
그 스님은 선방으로만 다니면서 참선을 하신다는 先炅스님이였습니다.

스님이 참선 후 보행시간에 산길을 내려가면서
본 모습이나 다시 올라오실 때 모습그대로 혼자 앉아있는 저를 보면서
참으로 고민이 많은 보살이구나 생각하여
옆으로 와서 얼굴을 보니 전혀 고민 있는 얼굴이 아닌
맑고 밝은 얼굴 이여서 차나 한잔 권하고 가려다...........

허나 저는 선경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하느님은 또 다른 이런 모습으로 저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나를 이렇게 타일러 주시려는 구나
막연하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과 헤어져 한없이 계곡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더러는
떨어져 내리는 도토리 열매를 줍고 있었습니다.

정말 내려오기 싫었습니다.
그냥 한없이 가을 속에 묻혀있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냥 그 속에서 침잠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발걸음은 어쩔 수 없는 세상사의 인연을 찾아서
내려오는 길을 접어들어야 했으며
나의 슬픈 가을여행도 메말라 가는 구절초의
몇 송이 남지 않은 보랏빛 꽃송이의 애절한 빛 바램으로
쓰러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슬픈 가을여행은
또다시 일상으로의 회귀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당신의 따뜻한 영혼의 위로와
先炅스님의 법문은 내 가슴의 또 다른 의미로
슬픈 가운데에서도 행복하게 떠오를 수 있는
소중한 가을여행의 진실이었습니다.

남쪽의 낭만의 가을여행이었습니다. (2001.9.28)






대흥사 다산초당



봄비가 대지를 적신다. 남풍이 불어 먼 산과 들에 새 생명들이 꿈틀댄다.
개울가의 버드나무는 벌써 파릇한 새싹이 터지기 시작한다.
매년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봄이면 늘 새롭다.
겨우내 눈 밑에서 꿈꾸던 생명들이 이제 기지개를 켜고 있다.
탄생은 아우성으로 시작한다. 제 혼을 덮고 있던 껍질을 깨고 터져 나오는
생명들은 가냘프지만 힘찬 울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꽃, 풀, 벌레들이 껍질을 깨는 아픔의 소리가 산과 들에 울려 퍼진다.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정말 잔인한 계절이 봄이다.
화사한 아름다움에는 죽음과 멸망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한 시절을 풍미하고 다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거기 있다.

한 포기 풀, 한 송이 꽃, 한 마리의 벌레에게도 자신이 가야할 운명이 있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운명, 그렇기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아름답지만 아프다.
꽃과 풀들은 한 철을 살고 나면 다시 아름다움을 거두어야 하고,
벌레들은 나뭇잎을 갉아먹거나 다른 생명들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인간들도 화사한 봄의 교향악을 즐기고 있지만,
저마다의 가슴에는 또 다른 한을 안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며,
삶 자체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어쩔 수 없는 한을 안고 있다.
다른 생명들을 취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은 '한'을 숙명처럼 안고 있다.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세상에 내 던지는 화두 중에 '무소유'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젊은 시절 그 '무소유'에 심취하여 참으로 좋은 말이며, 인간이라면 이것을
실천해 봄직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스님에게서
연비도 받았다. 내 팔뚝의 연비 자국은 내 마음이 지나온 고뇌의 흔적이다.

스님과 대담을 하는 중에 내 취미가 붕어 낚시라고 말하니, 살생을 하면 업을 쌓으니
낚시를 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낚아서 아침에 다시 놓아주고 온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한다.
한참을 이야기 중에 내가 물었다. 그러면 에스키모 나 저 북쪽 지방의 툰트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짐승을 잡지 않으면 굶어 죽는데 그들은 그럼 어찌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스님의 말이 '먹고살기 위해서(생계를 위해서) 하는 살생은 어쩔 수 없고 괜찮다'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살생이 허용되고 취미를
위해서는 업이 된다? 그것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잡혀 죽는 생명들이 인간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아깝지 않고,
오락을 위해서는 아깝다는 말인가? 죽는 쪽에서 보면 이러나 저러나 억울한 것은
똑 같을 텐데... 모두다 인간의 잣대에서 만들어 낸, 주관적인 인간 편의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진리는 한가지 일 텐데, 이렇듯 상대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변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낚시 대를 잡았다. 살생유택을 생각하면서
낚시 가방을 꾸렸다.

세월이 흘러 그 스님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묻혀서 살고 있다. 요즈음 다시
그 '무소유'라는 말에 대해서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해 사색에 잠겨 있다. 사람들은
관념적인 말을 좋아한다. 가슴을 뭔가 푸근히 적셔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관념어
글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로운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안개에 싸여 자신이 그 관념어를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아직 자신이 수양이 덜 됐거나,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보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성취할 것으로 다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개 선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어는 죽을 때까지도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무소유'라는 말은 관념어이다. 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을 뜻한다.
마음도 비우고 가진 게 없는 완전히 비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소유의
참뜻을 모르고 하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과 글이란 단순하고
그 뜻이 명료해야 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적든 많든 자신의 육체를 보존할 물질들을 소유하도록 자연은 생명들에게 부여해 주었다.
진실로 살기 위해서는 소유해야만 한다. 자연의 먹이 사슬은 곧 소유의 차원에서
이해 할 수도 있겠다. '백수의 왕' 사자는 무소유와 소유 중에 어느 쪽일까.
한 마리 사자가 영양 한 마리를 잡아 메어 두고 있지 않다고 해서 무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고 배가 고프면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소유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소유와 무소유는 인간만을 위한 명제인가. 먹이 사슬의 최정상에는
인간이 있다. 무소유는 먹이 사슬의 하부 구조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면, 우리는 무소유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연계의 어떠한 생명체도 먹이 사슬의 구조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며,
하부의 것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화두를 내 던지는 스님들은 그들의 생이 그러한 것을 추구하도록 스스로
길을 선택했다. 산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세상의 살아가는 모든 인연과
법칙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신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부터 혼자이다.
그들에게는 무소유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지라도 그 목표(해탈)에 이르는
한 방편일 수도 있다. 즉, 그들의 목표는 해탈이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때는 무소유를 갈파하여 소유를 지향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가끔 본다.
우리들이 자주 가는 대 사찰이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넉넉한 소유로 재화가 넘친다.
햇살이 따사로운 선방에 앉아 한 잔의 녹차를 음미하며 산새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세속의 인간들을 바라본다. 불쌍한 중생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며, 무소유를 되뇌인다.
실로 세속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재화를 주고받으며, 삶에 고통받는 인간들을 보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 지리라고 한다. 정말 말 그대로 내 것 다 버리고
식구들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무소유를 실천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소유를 향하고 있다. 지구상의 거의 전 인류가 소유를 지향하고 있다.

산사의 곡간은 항상 그득 채워져 있으며, 그들이 마시는 녹차는 엄청 비싼 것이다.
100g 짜리 한 통 값이 거의 쌀 20kg 한 부대와 맞먹는 가격이다. 기차역이나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무소유'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겠는가?
위장을 비워 둔 채로 수행을 할 수는 없다. 수행하려면 기운을 차려야 한다. 다만,
아주 적게 먹는다. 그리고 농사지은 사람을 생각해서 깨끗이 먹는다. 그러나 먹는다는
그 자체는 우리와 다를 게 없다. 곡간에 먹을 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곡간의 먹거리들은 소유이다. 속세에는 스님들이 먹는 것보다 더 적게 먹으며 주린 배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선행으로 살아온 사람도 많다
도둑질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보고 도움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누더기를 걸치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자문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무소유론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을 배고프지만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무소유론으로 가능한가?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생을 하며 살기로 작정을 했다.
자손을 잇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낳은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재화란 그리 쉽게 벌리지 않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언행으로 후회를
하면서도 내일이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 삶이 아프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 팽개치고
혼자 산사로 들어가 인연을 끊을 수는 없다. 우리 인류가 전부가 서로의 인연을 끊고
산사에 들어가 수행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무소유) 세상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어일 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마음 편히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도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극락이며 천당일 것이다.
극락과 천당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며, 우리는 현재 숨쉬고 있다

이 세상에서 거지가 행복하다는 말은 못 들었다. 다만 조금 가진 것에 만족하면
그것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행복일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의 느낌이니까.
속세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소유가 아니고, 소유이다. 다만 소유함에 있어 정도를 걷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을 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동생이 태어나서 동생에
대해서 잠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다 자연스런 일이다. 위장을 가진 인간이나 동물이나
심지어 나무와 풀과 꽃들도 필요한 물질들을 자신의 몸 속으로 받아 들여야 생명을
부지 할 수가 있다. 받아들이려고 하는 욕구, 그것이 욕심이며 또한 삶에 대한 의지이다.
자라면서 자신과 남을 위해 재화를 얻으려는 것은 당연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즉, 속세에 사는 사람들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다.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한다.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소유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혹자는 마음으로라도 도와 주는 것도
아름답다고 한다. 물론 헐뜯는 것보다는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구두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스님들의 목표는 차원 높은 '해탈'이며, 속세인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다.
이 양자의 목표가 다르다. 해탈을 성취하는 데는 무소유가 필수이지만, 행복한 삶을 얻는 데는
소유가 필수이다.
누군가가 '부자라고 다 행복하고, 가난뱅이라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대신 할 수 있다. 그것은 행복론이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같은 마음이면
재물이 많은 것이 좋지 않겠는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밧줄 던져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소유를 외친다면 말이 되겠는가. 밧줄은 재화이며 곧 소유이다.
그때 밧줄이 없으면 무소유이며 구두선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눈에 보이는 사물은 다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은 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공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공이다. 불공은 공하지 않는 것이다.
공하지 않다는 말은 텅 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야심경은
이 불공처가 부처가 머무는 곳이며, 보살과 여래가 본래부터 앉을 곳이라고 한다.
공하지 않고 뭔가가 있는 불공처는 이 세상이다. 우주이며 우리의 지구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본래 부처이며 보살이며, 여래이다.
다만 먹어야 살 수 있는 부처들이다. 부처가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그 곳에 가려면 선행을 하며 때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삶의 의지를 기각하면 이루어질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눈물 젖은 빵도 겨우 먹는 사람에게 무소유를 갈파하여 그 사람이 수긍을 하고
실천 할 수 있다면 나도 무소유를 행해 보고 싶다.
그러나 오랜 세월 새겨가며 생각해 왔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다 본래 선하므로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 갈 뿐이다.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날, 녹차 향을 즐기며 무소유를 생각한다.


부석사







부석사의 4월


천년을 타오르고도
다 타오르지 못한 절집 처마 밑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상사화
소리도 없이 흘린 눈물 한 방울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눈물만큼 뜨거운 마음 자락을 놓지 못해
무량수전 부처 손끝에 필 우담바라보다
더 먼저 전생을 살고
다 못한 인연을 못내 그리워 하기 위해
제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앙상한 가지 하나

제 모태였던 지팡이 보다도 더 야위어
눈녹는 소리로 제 살을 저며 잎눈을 틔우는
살빛만이 이슬도 내리지 않는 맨 땅에
젖은 몸으로 누워 있다
미륵불처럼



계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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