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나의 비둘기**


잿빛 하늘에 그려진 신도림역의 비둘기.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아리고 저려서,
불가항력인 존재에게 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악마적 쾌락이 절망적이어서,
벌써 읽고 돌아서 나가기를.........

신도림동은 내 성장기의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거주한 동네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동네이다.

나는 도림동 철뚝길 몰랭이 개발도상국의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다.
어느 날 전철이 생기면서 집 앞으로 다니던
숱한 통행인의 발길을 막아 버리고
우리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머니로 하여금 전업(輾業)을 하게 하였다.

전셋집 장독대너머 엄청난 도림교회는
나날이 그 교세를 확장했으며 바벨탑처럼
웅장한 교회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집에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는
동시에 햇볕을 착취해 가버렸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볕을 쬐이지 못하는 장독대의 기이한 운명
그 가난하고 비전 없는 동네에서
우리가족은 이십 오년을 버텨냈다.

기차와 전동차의 파열음이 고막을 찢었고
철뚝길 옆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외쳐대는
소리는 기차나 전동차의 그것보다도 더 요란했다.
늘상 희부염한 하늘은 절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에 충분했다.

신도림동과 이웃하고 구로동과 이웃하는
햇살만이 무상으로 쏟아지던 속이 말간 동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신도림동에 전철역이
생기더니 도림동을 저만치 밀쳐내고 급부상했다.
덩달아 더 초라해진 도림동의 우울한 모습은
한동안 우리를 버석거리는 한숨으로 몰아 갔다.


가장 어둡고 번잡한 도시의 한복판.
그곳에 둥지를 튼 발가락이 부러진
비둘기와 그의 친구들.
공포와 회유의 간극에서 길들여진
가엾은 나의 비둘기, 내 사랑의 비둘기.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있다.
내 뼈가 자라고 내 비둘기가 나머지
발가락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시.

그의 유린당한 생명이, 공포에 떨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야 하는 신도림동이 애처로워서
심각한 불균형의 성장기 어느 쯤으로 퇴행한
자아는 고스란히 두 뺨으로 설움을 받는다.

내가 살았던 도림동은 내 기억의
가장 절실한 부분을 도배하고 있으며,
피와 살이 엉켜서 나를 키우고 살찌운 동네이다.

철길이 막히기 전 수 많은 노동자들이
철길 위 육교를 줄타기하며 문래동으로,
양평동으로, 구로동으로 생계를 위해서
힘차게 또는 고달프게 발걸음을 내딛던
간이역과 같던 동네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들의 부산하고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어둠을 걷어 내고
또 혼곤한 수마 속으로 빠져 갔다.

점심 때가 설핏 지나면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온 새끼소녀가 자잘한 찐고구마를
양은쟁반 위에 올려 놓고 바삐 지나치는
행인들의 발치 아래에서 희망의 눈빛을
저울질하며 궁색한 가계의 한 몫을 분담했다.

홍합을 보도블럭 위에 질펀하게 쏟아붓고
한 깡통에 백 원씩 호객하던 미경아빠의
걸죽한 음성이 오늘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지금도 나는 우리의 가슴팍을 훈훈하게 뎁히던
그 겨울날의 애환어린 홍합 국물을 잊지 못한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뿌연 국물이 우러나면
식구수대로 머리를 맞대고 '후루룩 쩝쩝'거리며
홍합껍질로 떠서 마시던 기찬 국물의 맛.

방림방적의 어린 여공들은 삼 월 중순이면
벌써 맨다리에 반팔인 회색빛 유니폼을 입었다.
저당잡힌 젊음 위로 흐르던 고단한 찌꺼기들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혹은 가문을 일으킬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책임진다는
명제를 안고 그렇게 시들어갔다.

그 시대의 공원들이 굳이 '전태일의 분신'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니더라도
파리한 목숨줄을 이어가기에는
시대의 엄청난 불행으로 여겨졌다.
산업역군이란 미명아래 스러져간 그들의 피빛 청춘.

다림질이 되질않아 구겨질대로 구겨진
양복 바지를 입고 나선 곱슬머리 총각은
나를 보자 쑥스러운듯 멋적게 웃었다.

허옇게 바랜 그의 무기질 웃음은
내 심장에 노오란 현기증으로 촘촘히 박혀 왔다.

그 청년의 백지장같던 미소가 가여워서
저만치 내려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선택받은 소수의 신분이었더라면
저렇게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을텐데' 하는
그 때 비추어진 나의 편협한 사고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몰랭이 골목에 사는 남루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세나 신분 상승은 외면한 듯,
언제나 그렇게 가난하게 초라하게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내 마음의 상심으로 남아 있었다.

노모가 물려준 손바닥만한 집터에서
노가다로 실업자로 그날그날을 전전하던
소갈딱지 없는 아들은 낮술에 취해 날마다
아내와 싸움질을 하다가 어느 날 첫 단추의
오류를 깨우친 여자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중의 버거운 직분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렸고,

세탁소를 하던 집의 맏딸은 옆방의 호스테스를 따라
가출 이 년만에 머리털이 노오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마음이 아파서 제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했던
닭집의 막내 아들은 끝내 동네 똘마니로 전락했으며,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던 주인 집 외아들은
소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스스로가 거머쥔
주홍글씨의 수인으로 덧칠의 명수가 되어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오금이 저려서
"짱구 오빠" 하면서 반색을 했다.
이미 그 시절 나는 삶의 횡포와 타협하는
친절한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내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짱구다.

나는 짱구오빠에게 무엇을 해 주고 싶었을까!
두렵고 답답한 그 때의 내 심정은
그에게 맘껏 달릴 수 있는 도주로를,
절대로 체포가 불가능한 자유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정의하는 그의 범죄성의 해악과는 무관하게
그는 생포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처럼 보였다.
살아서 쓸개에 끊임 없이 빨대를 꽂혀야 하는
비운의 곰을 닮아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박제된 삶을 연명했으며,
제도권 속의 우월한 인간들이 내세운
그릇된 율법사관의 희생양이 되어
처참한 전생을 되풀이 하는듯 보였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내 인식의 궁핍한 도림동.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버렸다.

사 년전 아버지가 페암으로 세상을 뜨신 뒤에,
죽어도 도림동을 떠나지 않겠다던 어머니를
반강제나 다름없는 협박으로 등을 돌린 뒤
그 후로는 가보질 못했다.

나의 질긴 운명의 사슬이 묶여 있으며
우리 가족사의 생생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곳.
어머니의 끈끈한 인정이 살아 있는 골목쟁이 사람들.

팔 할의 바람이 미당을 키웠다면
팔 할의 동경에 대한 굶주림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초라하게 쇠락하고 쓸쓸하여도,
내가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 안달했던
애증의 동네라 하여도,
나는 도림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내 성장기를 잿빛으로 찌들게 한 동네이며
희망이란 기차 대신 절망이란
기차만을 떠나 보냈던 동네이지만
나는 그 시절이 없으면 부유하는
한 마리의 유충에 불과하다.

도림동에서의 윤택했던 기억의 회로를
지워버린다면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신도림역에서 신음하는
발가락이 잘리운 비둘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 비둘기.
내 서러운 눈물의 비둘기
내 황량한 사막의 비둘기.

내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 어찌 내 가슴을 쓰라리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도림역의 비둘기(발가락 잘려나간)를 읽고**


글/이현옥








Daum cafe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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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진해 경화동의 하사관 학교에서
하사관 기본교육 28주를 마치고
새벽 미명에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우리
악만 살아남은 46명의 해병 신임 하사관들은,
우리를 수송하기 위해 김포 청룡부대에서
나온 '청룡 버스'에 나눠 타고 김포 반도로 떠났다.


말로만 듣던 전방으로 향하면서 소문으로 익히 들은
'청룡부대'에 대한 공포감을 서로 나누던 우리는 김포읍을
지나서도 30분이나 계속 북으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점점
말을 잃어갔다.


모두들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전방이라더니 이러다 정말 철책선 앞에 내리는거 아냐'라는
생각으로 두려움반 호기심 반 뭐 그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 때, 어떤 놈이 신음소리를 내듯 나즈막한 소리를 질렀다.


"씨벌... 다들 밖에 봐봐..."
그놈의 말에 밖을 쳐다 본 우리는,
하늘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을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벌써 눈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조오또... 서울에서 반팔 입고 입대한 게 엊그제 인데
여긴 벌써 눈이 오는구만..."


눈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어 하던 우리는 차창에 스치는 길거리마다
빨간바탕에 노오란 글씨로 새겨진 청룡부대 마크들을 보며
오싹함을 느꼈고, 유격 부대 마크가 걸려 있던
'벽암지 교육대'안에 임시로 만든 하사관 특수교육대라는 곳에
들어서면서 그 앞에 걸려져 있던 구호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국가가 부르면 어디를 가도 최정예 전투 요원으로...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었으면 난 이곳에 오지 않았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선배 해병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자'
"악을 기르자" '죽음을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다'


젠장......이윽고 버스가 멈추더니,
버스 문이 열리고 빨간색 팔각모를 쓴 교관이 버스에 탑승했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그 교관은 우리를 보고 나즈막히 말했다.
"연병장에 4열 종대로 집합하는 시간 25초 준다.
만약 늦는 새끼가 있다면..." 그렇게 말한 후 교관은 모자를
살짝 쳐들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죽. 인. 다. "


우리는 잠시 내리는 눈을 보며 젖어있던 상념에서
후다닥 깨어나 번개같이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왜냐면... 교관의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우린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고 느꼈던 지난 7개월의
하사관 학교 생활의 공포감에 비해 거의 두배의 고통에 시달리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우리들에게 교관들은 말 그대로 전술학이나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교관이 아니라 팔각모를 깊게 눌러 쓰고 구타라는
먹이를 찾아 헤매이는 '하이에나'였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우리들을 심한 욕과 구타로 윽박질렀다.
"옷 벗는데 30초 실시!!"
"샤워 하는데 3분 실시!!"
"전투화 끈 매는데 10초 실시!!"
"식사시간 15초 실시"


그들은 시간내에 우리가 완수하지 못할 때엔 자신이 갖고 있는
정신봉으로 우리의 어느 부분이든 골프 풀스윙하듯 후려갈겼다.
무방비 상태로 맞은 동기들은 특히 얼굴부위를 맞을경우
입안이 다 터져 며칠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


이렇게 숨쉴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중요한 훈련을 눈 앞에 두고 내무반에서 교육대 최고의
악명을 날리던 독사 교관이 훈시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야간 침투작전 중 가장 중요한 훈련에 대한 설명이었기에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었고 모두들 교관이 그 악명높은 독사 교관인
관계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빛을 초롱거리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뿌우우웅~~~!!"
난 내 옆에 앉아 있던 놈의 히프 쪽에서 터져 나오는
이 소리에 흠찟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모든 동기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오는 것을 느꼈고,
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돌처럼 굳어 버렸다.


"......" "......"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방귀를 꾼 내 옆의 놈은 물론이고...
방귀소리에 놀라 이쪽을 쳐다보는 동기들의 모든 눈엔...
공포의 정신봉과 이단 옆차기가 날라올 것이라는 공포감이 가득했고...
방구 소리가 인근 지역에서 들려 주범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지독한 방귀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두 가지의 복합적인 고통 앞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흐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타에 예외를 두지 않던 독사가 아무 말 없이 하던 말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역시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였던가...기가 막힌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보던
동기들은 안도의 눈빛으로 시선을 거둬들였고...
나 역시 안도의 눈빛으로 내 옆에서 방귀를 낀 진짜 주범을 쳐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고, 내 옆에서 방귀를 끼고 본인 스스로가 더 놀랬던 그 놈
역시, 나를 안도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쉬는 찰라에...


"푸식... 푸식... 푸시식..."
오옷!!!!!! 이 미친 자식이!!!!!
너무나 안심이 된 나머지 기도 안 막힌 방귀소리를 내었던 것이었다!!!
더 이상의 용서는 바랄 수도 없었다.
평소 깊게 눌러 쓴 모자에서 눈동자를 발견할 수 없던 독사가
지휘봉을 던져버리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분명 '어느 자식이야!!'라고 묻는 게 역력하였는데...
그 눈빛에 나는 본능적으로 '예31번 올빼미 하사 임!두!만!'이라는...
내가 범인임을 자수하는 관등성명을 대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휘이익!!!" 빛보다도 빨리 그의 정신봉이 내 주탱이를 날려 버렸고
그 뒤로 태권도 3단을 자랑하는 교관의 이단 옆차기가
내 가슴을 즈려 밟았다. 그리고 약 10분 동안...
내무반에서는 아래와 같이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모든 초식들이 전개되었다.
허공답보 (허공에서 실전되는 초절정 고수들의 경공술. 내공이 바탕되야 됨)
금나수 (소림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손으로 잡아 공격하는 기술)
태극권 (무당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남의 힘을 빌려 공격하는 기술)
복호장 (아미파에서 사용하는 무술로 호랑이를 잡을 때 쓰는 장법)
매화권법 (화산파에서 사용하는 매화의 모습에서 유래된 권법)


물론 위의 말은 웃자고 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맞을 수 있었는가 싶을 만큼
참 많이 맞았다. 언제나 한탄스러운 건...
그런 순간에 기절이라도 해서 의무반으로 실려가면 좋으련만...
내 맷집과 정신은 그걸 다 맞으면서도 더 맞을 수 있다는 게
슬픈 현실이었다.


그 뒤로...
그는 나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떠받들고 살았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나의 높은 인격을 존경한다며...
그는 자신의 종교를 팔아서 얻은 초쿄파이를 내게 갖다 주었고...
아침식사 때 딱 한번 나오는 피같은 250미리 우유도 가끔 내게 주었다.
내가 아무리 사양해도 그리고 그 귀한 화랑담배도 난 그 이후
떨어지지 않았다.
개도 은혜를 갚는다'라는 말로 내게 강권을 했고
난 그것을 못이긴체 받아들이고.........



시골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도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농사짓는 분들의 그 정직하고 성실함을 그대로 본받았던 사람이었고
앞으로 훌륭한 영농지도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순박했다고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남을 위해 댓가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자그마한 은혜를 베푼 사람에겐 두고두고 갚는
그야말로 훌륭한 인격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힘든 후반기 특수교육대 생활을 마치고...
특교대 생활의 괴로웠던 만큼이나 나에게 주어진 힘들었던 군생활을
거의 마쳐가던 어느 날...
제대를 얼마 안 남겨 놓고 해병대 역사상 기억될만한
안전사고가 일어났었다.


세상 사람들 에게는 알려진 일이 없는 사고였지만
이 사고로 많은 해병들이 죽었고
본부대 간부였던 나는 그들의 장례식을 주관해야만 했고
난... 그곳에서 우연찮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LMG사격장 교관을 하던 그가 서투른 신병의 오발사고에서
자신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지금은 이렇게 관에 누워서 나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 앞에 멀쩡히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고...
그 와 함께 죽어간 사병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내 마음은...
아마..........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군대만 아니었더면.....내 그를 위해 마음 놓고 울어라도 주었으련만,
눈물을 참아가며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준비하는
나의 가슴은 갈래갈래 찢어나가는 듯 했다.


나중에 제대한 후 사회에 나가서 맘 놓고 만나보자고 했던
우리였건만...그 힘든 군 생활을 다 끝내고 얼마 남겨 놓치 않은
이 상황에서...그와 헤어진지 벌써 23년
이럴순 없었다...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
난 지금 그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보다는 그의 청룡부대 하사관 특교대 때의
번호였던 32번 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남겨 놓고 간 형상들은 많이 남아 있다.
쵸코파이...
우유...
농촌...
그리고...
눈물...

오늘 토요일 오후 텔레비젼에서 군대관련 프로그램을 보다
문득 기억나는 이 친구를 떠올리며...
이렇게 몇 자 끄적거렸다.
이 청명한 5월에 먼저간 친구를 그리며...


ㅡ남도사랑ㅡ













숫자의 美學 // 벤취마킹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한 사람이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5-3=2).(2+2=4) 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이 들지않는 계산이라.
쉽게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의 설명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5-3=2)란.
어떤 오해(5) 라도 세번(3) 을 생각하면
이해(2) 할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2+2=4)란,
이해(2) 와 이해(2) 가 모일때,
사랑(4) 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사람을 오해할때가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해는
대개 잘못된 선입견, 편견, 이해의 부족에서 생기고,
결국 오해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5-3=2) 라는 아무리 큰 오해라도,
세번 생각하면 이해할수 있다는 풀이가
새삼 귀하게 여겨집니다.


사실
영어로 "이해" 를 말하는 "understand" 는,
"밑에 서다" 라는 뜻으로
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이해라는 것입니다.

이해와 이해가 모여 사랑이 된다는 말,
너무도 귀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이해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은.
"가까운 타인" 삶으로
전락해 버린 듯 싶습니다.

낚시 바늘의 되꼬부라진 부분을,
"미늘" 이라고 부릅니다.
한번 걸린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미늘 때문입니다.

가까운 타인으로 살아가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늘을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는
때때로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벽 앞에
모두가 타인이 되곤 합니다.


( 5 - 3 = 2 ),
( 2 + 2 = 4 ) 란 단순한 셈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와 서로를 가로막고
때로는 멀리 떨어뜨려 놓은
온갖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풀어버리고,
우리 모두
"사랑" 에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벤취마킹 드림((^_^))









face=굴림체>

**동행자**


족히 30분쯤은 기다렸다가 겨우 행선지를 확인하고는 시외버스를 탔다.
흔들리는 버스에 아직 적응치 못하고 잠시 비틀대며 자리를 찾는 내게
로, 옆 자리에 올려 놓았던 앉은키만한 커다란 베낭을 들어 바닥으로
내려 자리를 마련 하시고는 와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시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아, 감사합니다.”
얼른 인사를 드리며 풀썩 넘어지듯 할아버지께서 내어주신 빈자리로 가
앉았다

잠시 후...
버스의 흔들림에 차츰 몸이 익숙해 짐을 느끼며 자리를 내어주신 옆 자
리의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으로 나는 조심스레 말을 붙여 보았다

"할아버지, 어디로 산행을 떠나시는지요?"
"나? 등산..청평으로 가지."
"녜,거기..호수가 참 좋지요?"

언젠가 청평호 앞에서, 산을 타고 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면서 안개 속
같이 불투명한 아침을 맞이하던 어느 날의 하루를 떠올리며 무심한 질
문을 드리는 내게로 할아버지는 참 진지한 답변을 해오신다

"그럼, 좋은 게 호수 뿐인가 어디."
"......."
"거긴 뭐든지 다 좋아. 예전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사람
도 좋고, 물도 산도 다 좋지. 그래서 올 여름은 거기서 나려고 가는 걸"
"베낭이 무겁진 않으신가요?"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손때가 묻고 군데군데 까만 곰팡이의 흔적이 남
은 큼지막한 군청색 베낭으로 눈길을 보내는 나를 따라 할아버지는 마
치 오래도록 정을 주며 함께 살아온 애완견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듯 살
가운 손길로 베낭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신다.

"무겁긴, 아직 이 정돈 괜찮아. 예전에 비하면 모든 걸 절반으로 줄인
걸. 이젠 힘이 들어서 텐트는 못 가지고 다녀. 그래, 민박을 정해 놓고
다니지."
"오래도록 산을 타셨나보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할아버지 연세를 여쭈
어보고 싶은데요.."
"나? 이제 여든 넷이라우. 산을 탄지는 한 삼십년 됐고..우리 남한
땅에 있는 산은 거의 다 가봤지. 외국의 낮은 산 몇 개 가 보았고..."
"녜? 이렇게도 정정하신데 여든이 넘으셨다구요? 그럼 산엔 자주 가
시는지요?"
"그럼! 일년이면 반은 산에서 지낸 다오"
"어머나 그럼, 할머님이 싫어라 하시지 않으시나요?"
"없는 걸! 먼저 떠나 보낸 지 한 7년쯤 됐어...건강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애기 엄마도 운동 열심히 해요. 여자들이 건강해야 해."
"아 저런,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괜찮아.그런 걸 가지고 죄송은 무슨..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할 일인
걸. 나도 준비하고 있지."
"녜? 무슨 준비를..어떻게요?"
"죽는 거! 그거 연습하고 있어야 해! 첨엔 좀 두렵게 생각했지. 그런데
이젠 아녀. 그동안 마음을 많이 비워냈거든. 욕심을 버리면 두려울 게
없어."

차창 밖으로 아침부터 흐린 하늘이 낮게 내려와 앉았더니 어느새 후두
두둑 유리창을 향해 빗방울을 뿌리고 있다.
어느새, 두눈에 가득 걱정을 담아버린 나.....

"비가 오는데요 할아버지.."
"내 걱정할 일은 없다우. 난 민박집으로 가면 돼. 단골집이니 아무 때
나 가지. 방이 없으면 주인장하고 같이 자면 되고."
"아,그러셨군요..그래도 자녀분들이 걱정 하지 않을까요?"

"첨엔 딸이 성화를 부리더니 이젠 내 고집에 항복했는지 잠잠해. 간간
이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집에 들릴때만 찬가지를 날라오곤 해. 난 딸
만 셋이라우."
"녜, 딸들이 더 살갑지 않던가요 할아버지?"
"다 똑같아. 자식이란 그저 키우는 재미고..다 크고 나면 지들 살기에
바쁜 게지."

"자식에게도 절대 욕심 가지면 안돼. 내가 줄 수 있는 만큼만 주고,
절대 바라지는 말아야 내 맘이 편한 법이야."
"그것도 욕심을 버리는 차원인가요?"
"그렇지!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 지는 게야. 그게 하루 아침에 얻어지
는 게 아니니 탈이지. 나이 들어 다 늙어진 다음에 깨달아지니 말이야.
절대 남의 것 탐하지 말어. 내 것도 다 못 쓰고, 누리지 못하고 가는
게 인생이야. 욕심을 버리고 살면, 사는데 돈도 많이 안 든다는 걸 알
게 되지."

"그런데 말이야 아직 젊음이 있다면 그게 절대로 안돼야. 젊다는 건 욕
심이 있다는 것이거든, 그땐 그게 욕심인지 뭔지도 모르는 법이고....
희망이나 꿈 같은 것과 혼돈 되어 오는 경우가 많아서 절대로 모른단

이야. 그러니 나이가 그저 먹는 건 아닌 게지. 허허허허허"

에구, 아무래도 이 할아버진 산신령님이신가 보다.

"할아버진 혹시 신앙이 있으세요?"
"나? 전엔 교회도 나가보고 절에도 가봤는데..지금은 그냥 마음으로
하나님만 믿고 살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계시는 분이시고 나는
그분을 경외하거든. 왜냐하면,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또,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 만나야 할 분이잖은가. 허허…허허.. 그러는 애기 엄마는
신앙심을 아직 못 가졌나?"
"녜에..저도 할아버지처럼..아,벌써..삼거리가 나왔네요 할아버지! 전
예서 이제 내려야만 되거든요. 그럼..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꼭,
건강하시구요.."
"그래,그래...잘 가요."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오랜 외국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할머니 속도 많이 썩혀주었다시며....그래서 좀더 일찍,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고도 하셨
다. 볼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나는 작고 못난 것
일지라도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겨보
며 진실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모든 동행자는 언제나 내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그러기에 나는,
무시로 길 떠나기를 참 좋아하나보다.




글/솔향







Daum cafe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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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밑에 문주란이 방망이 만한 꽃대를 내밀기 시작했다.
" 야 ! 문주란이 또 꽃을 피우려나봐 ! 올해엔 세 번째 아냐 ? "

설흔 살이 넘은 늙은이, 덩치만 커서 이리저리 발길에 차이며 언제 쓰레기로
처리될 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던 문주란 -

이 문주란은 내가 제주도에 전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출 단속을 무릎쓰고
숨겨 가지고 온 거다. 형제들에게 기념으로 한 그루씩 분양했지만,겨울철 관
리가 불편하고 잎이 무성하여 이사다니다가 모두 버림을 받고,지금 나에게만
한 그루 남아있다.

어머니가 보살필 때에는 해마다 한번 씩 꽃을 피우고, 그 진한 향기를 떨치
던 것이 요즘 몇년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겨울에는 베렌다에 방치되여
동해를 감내해야 했고, 비료는 고사하고 물도 잘 못 얻어 먹으니 그 초라한
모습이 흡사 병든 늙은이 꼴이다.

더군다나, 덩치가 커서 공간을 많이 점하고 다른 화초를 덮는다고 미움을 받아
왔다. 그래도 큰 아들하고 나이가 같고, 어머니가 보살피던 것이라 해서 차마
내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봄 화원에 드나들면서 특수 비료를 만들어 시험삼아서 몇몇
나무에 시비를 하였는데, 그 성과가 두어달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년 동안 보지 못하던 꽃대가 한꺼번에 두 개나 삐죽이 솟아났고, 얼마 뒤 환상
적인 꽃다발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니는 물론, 가족 모두가 신기하게 바라보
며 찬사를 보냈다.

봄이 이지러지며 문주란 꽃도 시들어 갔다. 그 장대한 꽃대를 칼로 잘라내며.
나는 만유의 흥망성쇠를 연상하였다.

그런데, 엇그제 물을 주다가 살펴 보니 꽃대 하나가 슬며시 솟아나고 사흘만에
꽃봉우리를 터뜨렸다.
" 올해는 무슨 경사가 생기려나봐 ! 세번 째 꽃이 피어났어 ! "
나는 소리쳤다.

나는 비료의 효과를 잘 알면서도 그것이 집안에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라고
믿고 싶었다. 만일 나에게 지금 천복이 내린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돈?
명예 ? 권력 ? 골라잡을 것이 없다. 지금 이대로면 족하다. 다만, 환란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주란을 구박하지 말고 시골 화원
으로 옮겨서라도 잘 보호해 주어야지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는 문주란을
내가 할 수 있는 날 까지 간직해야지-.**








할머니와 산비둘기




..
길가로 문 하나 열면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꼬부랑 할머니 무릎짚고 나와 길바닥에 모이를 뿌려 줍니다.
산비둘기 한마리 다리를 절룸거리며,
자리를 옮겨가며 흩어진 쌀알을 먹고 있습니다.
한톨, 두톨, 그리고 할머니 한번 올려다보고....,
이른아침 달동네 같은 도심속의 빈가들이 모여사는
한 동네 좁은 골목길에서의 광경입니다.
의지할 자식들이 없어 홀로 사는 할머니의 손등이며
얼굴에 검버섯이 돋은 할머니, 한손은 굽은허리를 지탱하려
무릎을 짚고 프라스틱 모이 그릇을 든 손이 가늘게 떨며,
모이먹기에 열심인 산비둘기에게 연민의 정을 주고 있습니다.
카키색 브라우스에 회색 몸베 차림을 한 꼬부랑 할머니를
산비둘기는 매일아침 이렇게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늦은 가을 어느날,
동네뒤 텃밭에 채소를 돌보러 꼬부랑 허리를
나무지팡이에 의지하며 갔다가 밭언덕 아래 이랑에서
할머니를 보고 도망가려 퍼덕거리는 산비둘기를 보고
다가가니 다리에 절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새잡이 포수의 납탄에 왼쪽다리 발목의 뼈가
부서진 것이었습니다.
무우씨뿌린 받이랑을 발톱으로 후비고 주둥이로 쪼아내던
놈이지 싶어 그냥두고 오려 하였으나,
안쓰러운 마음에 잡히지 않으려는 놈을 부여잡고
근근히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약을 바르고
헝겁을 감아주어 치료하며,
늦가을 부터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동거하며
따뜻한 방안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습니다.
붙잡아 집에가서 치료해 주려하니 기를쓰고 도망가려
퍼드득 거리던 놈이 이제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산비둘기는 할머니 손에서 치료되었으나
다리뼈 접골이 잘못되어 옆으로 젖혀저 짧아진 한쪽 다리를
절룸거리며 생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처음 할머니집을 방문하였을때,
할머니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성질이 급해
온 방안을 휘젖고 다니면서 벽이며 유리창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탈출 기회만 노리던 놈이, 이제는 할머니와 친숙해져서
방안 한켠에 자리를 틀고 할머니 외출때는 집을 지켰습니다.

봄이되니 산으로 되돌려 보내도 얼어 죽을리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산비둘기 다리 상처도 다 아문터라,
붙잡아 길가에 내어 놓았으나 할머니따라 방안으로
들어가려 또 퍼드득, 안쓰러운 마음에 다시 들여 놓기를 여러번,
할머니는 슬펐습니다. 나 죽으면 너 돌보아 줄 사람 없으니
너같이 못난 절룸발이 산비둘기를 누가 돌보아 주랴며
밖에 내어놓고 문을 걸어 잠그니,
이틀 밤낮을 할머니 방문 밖에서 닫힌문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소리낮춰 울더니 산으로 날아가고,
다시 홀로된 할머니는 몸이 불편한 자신의 신세가
산비둘기와 같다며 눈물을 짓습니다.
그날 이후 산비둘기는 매일아침 해뜨기전 할머니를 방문하였고,
아침나절을 방의 열린 문안의 햇볕 가리개의 발너머 할머니 모습을
바라보며 길가에 쪼그려 앉아 보냈고, 할머니는 모이를 다 먹었으니
어여 산으로 가라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던 첫여름 어느날, 그날 아침에는 산비둘기가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간밤은 비바람이 몹시도 몰아쳐 할머니의 방 북쪽 창문을
빗방울이 세차게도 때리던 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궂은 날씨탓에 온몸이 쑤셔왔고 잠못이룬
불편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으나
산비둘기가 보이지 않아 못내 아쉬워 하였습니다.
간밤의 비바람에 몸이 성치않은 산비둘기가 어찌되었는지
깊은 한숨속에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던 낮이 지나고 비갠 저녁이 왔습니다.
자리를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는 때였습니다.
방문밖 구구거리는 산비둘기 소리에 행여 하는 마음으로
몸을 추스려 문을 여니,
산비둘기 도심 전기불빛따라 할머니집 찾아와 처연하게 부르짖는 소리에라!



윤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


오래 전엔 여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도
하나의 진기한 구경 꺼리었던 때가 있었지요.
요즘엔 너무도 보편화되어 눈 요기꺼리도 안되지만…….

조명 은은한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늘씬한 여인이
긴 머리 멋지게 틀어 올린 채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흰 담배 한 대 끼어들고 도도한 모습으로 뿜어 올리는 담배 연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걸 감히 흉내도 못 내고,
보는 것만도
눈부셔서 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슬쩍 훔쳐보지만요.

담배라면 내 어머니만큼 피우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인식할 때부터 어머님은 담배를 피우셨고
돌아가시기 얼마전까지도 담배는 어머니의 유일한 벗 이였으니까요.
말씀인 즉 새파랗게 젊으신 새댁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셨다는데
그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속앓이 때문이었다고 하셨지요.

병명도 잘 모르고 제대로 된 병원 한번 가 볼 처지가 못 될 때
민간요법의 하나로 담배는 그 시절 유일한 치료법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배우게 된 담배는 평생 어머니의 벗이자 자존심이요,
세상사를 마시고 내뿜는 돌출구였지요.

딸인 나와 다투고 난 후 토라져서
담배 한 대 피워 무시고 돌아 앉아 있던 그 뒷모습.
한복 저고리에 쪽진 모습이
비록 멋진 신식여성들의 그럴싸한 그림은 아니라도
그 자그마하고 둥근 어깨너머로 뿜어져 올라가던
그때의 담배 연기는 어머니의 가슴에 꽁꽁 묻혀있던
화를 풀어내는 실타래 같아보였지요.

평생 그 걸 보고 느끼며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담배를 그리 즐기며 사셨어도 아흔이 넘도록
건강하게 장수 하셔서 그런지
담배 피우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오히려 담배 못 피우는 남자를 만나 살면서
급한 성격의 남편이 앞 뒤 가릴 것 없이 화다닥 거릴 때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자신을 돌아다보시려 하시던 어머님의
담배 연기 피워 올리던 그 때 그 뒷모습이 그리워집니다.

-2002. 3. 15 일. 대청에 오른 글-















삭 삭, 귓전을 스쳐가는 갈바람 소리.
"삐리릭 삐리릭"
"훠어이 훠어이"
"딱 딱"

누렇게 나락 익어가는
논엔 참새 쫓는 소리가 한창이다.
이맘 때 쯤이면 마당엔 벌건 고추가 한 가득이고
들녘은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풍요롭다.

"어이, 칠복이 탁배기 한 잔 하고 가게".
억새숲 사이로 새참 소쿠리가 논두렁을 건너고
술주전자를 든 아이들 웃음이 연어처럼 날뛰었다.
아낙들은 두렁에 찬을 풀고,
고등어 조림이며 고깃국을 맛깔나게 내놓았다.
수저도 서너 벌 더 챙기고 반찬도 넉넉히 담아
새참은 늘 푸짐했다.

사기대접에 뽀얀 탁배기가 콸콸 따라지고
장에 다녀오는 사람,
구들지기 노인들까지 다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지난 봄 물꼬 싸움에 멱살 잡혀 앙숙처럼 지냈던
칠복씨도 슬쩍 끼여 못이기는 척 한 잔 비웠다.

술은 추수 후 햅쌀로 담그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집 저집 술익는 냄새가 시큼하게 번졌다.
아낙들은 날잡아 쌀 몇 됫박을 담갔다가
시루에 쪄 고두밥을 지었다.

김이 오르고 시룻번이 익어가면
그 달짝지근한 밀떡을 떼어먹는 재미에
아이들은 부뚜막 옆을 고양이처럼 지켰다.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 멍석에 말린 이 밥은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아 손을 많이 탔다.
누룩이 묻어 까슬한 밥을 아이들은
한줌씩 뭉쳐 내달음치곤 했다.

이 밥을 맛 잘든 독에 담고 물을 잡아
절절 끓는 아랫목에 솜이불 폭 씌워 익혔다.
2∼3일 지나면 발효하면서 버글버글 끓어 오를때면
어머니는 쉬지 않게 온도조절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독을 들여다봤다.

고구마통가리 썩는 듯,
메주를 띄우는 듯 그 쾨쾨한 냄새는 정말 지독했다.
술에 대가 돌면 독 안에 용수를 박아 말간 청주를 떠냈다.
물을 부어가며 체에 거르면 '막 걸렀다' 하여 막걸리가 되고
텁텁하지만 진한 맛이 있었다.

연누른 빛 맑은 술에 밥알이 동동 뜬 동동주는
달짝지근하여 입에 쩍 붙는데
도수가 높아 마시다보면 은근하게 취했다.

꾼들은 냄새가 알싸하게 올라오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맛을 본답시고
간을 재다 종일 취해 돌아다녔다.
또 아낙들은 술이 익으면 지나는 체부든 동냥아치든
마루로 불러 김치에 술 한보시기 씩 내왔다.

간식거리가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이 술 찌끼에 사카린을 타 먹곤 했다.
그것도 술인지라 가끔 벌겋게 취해 드러눕는 일도 있었다.

"술도감이다!"
멀리 신작로를 타고 밀주 단속원의 자전거가
나타나면 동네는 선술집처럼 술렁댔다.

대부분 농가에선 제사며 농삿일,
잔칫날에 쓰려고 술을 한 독쯤 익히고 있었다.
삽짝을 걸고 밭으로 내빼기도 하고
이곳 저곳 숨길 곳을 찾느라 소란을 떨었다.

먹다만 술주전자는 아궁이에 밀어넣고
나뭇간, 장독, 헛청, 뒤란 대숲,
심지어는 썩은내 푹푹 나는 두엄까지 들춰 숨겼다.

시치미 딱 잡아 떼는 통에 단속원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집안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였다.
특히 철없는 아이들 입단속에 아낙들은 애가 달았다.

모두 그런 일 없다며 손사래를 치면
술도감은 슬그머니 물러섰다가 동구 밖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눈깔사탕 하나로 꼬드겼다.

알록달록한 그 사탕을 보면
어머니의 당부는 까맣게 잊고 술술 불어버렸다.
물론 그날 저녁엔 부모님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했다.
술을 1말 정도 담갔다가 걸리면
쌀 10말은 벌금으로 물어야했고 무엇보다도 오라가라
해대는 통에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시큼한 술냄새를 맡고 이웃집에서
"이 집 술 담그나" 하면"식초 내린다네"하며
눈짓하곤 했다.

"술 한 되 받아오너라".
담근 술도 여의치 않으면 점방에 심부름을 시켰으나
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점방 술독엔 나무 술구기가 독 속에 담겨 있었고
됫박 인심은 주인 맘이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 밭둑에 앉아
술을 반 주전자쯤 마시고 우물물로 채웠다.
그러면 어른들은 점방 여편네가
물을 타서 싱겁다며 삿대질을 했고
아이들은 슬그머니 꽁지를 뺐다.

장맛처럼 이 술맛도 손내림이 있어
집안마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해 술맛을 보면
그집 아낙들의 손끝 맛을 알 수 있었다.

꽃이나 과일껍질을 넣어 만든 가향주,
아지랑이처럼 술빛이 아롱거린다는 백하주,
봄철 진달래꽃을 넣은 두견주,
여름철 황혼녘에 빚어 밤을 재운 뒤
새벽닭이 울면 마실 수 있다는 계명주,
연꽃향기가 난다는 하향주,
비스듬히 자란 소나무에 넣고 빚었다는 와송주,
네 번을 빚어 1년이 지나도 쉬지 않는다는 사마주….

일과 화해, 축복의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고,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던 술.

우리들은 어쩌면 이 가을의 어느 길목에서,
볕 잘드는 툇마루에 길손처럼 초대받아
잘익은 술 한 잔 대접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1.체부=우편배달원
2.술도감=밀주 단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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