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 무 리 *




어젯밤,
달무리가 지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다.

꽃샘추위 속에
하얗게 피었던 백목련도
이제 다지고
가지에는 초록의 새 잎이 돋았다.

방문을 활짝 열고 산을 본다.

촉촉히 내리는 빗속에
마주한 산이 물안개에 묻혔고
습기 머금은 하늘은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해 보인다.

먼 데서 봄꿩이 울고 있다.

산자락을 돌아
빗속을 더듬어 들려오는 산꿩 울음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함이 묻어난다.

감자 캐는 계절이 채 오기도 전에
새알 크기의
어린 자주색 감자를 너무 먹었을 때,

가슴이 아려오는 듯한
그런 기억의 아릿함에
우산 하나만 든 채 들길을 나서 본다.

보리밭,
아직 덜 여문 이삭이지만 후끈함이
콧끝을 간지런다.

풋풋한 보리내음에 문득
그 옛날 춘궁기의 보릿고개가 생각난다.
우리의 가난은 보릿고개를 넘느라
그렇게 헐벗고 굶주렸나보다.

하루 세 끼니를 제대로 못먹어
얼굴에는 온통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꺼칠하게 핀 마른 버짐이 떠날 날이 없었다.

노루꼬리만큼씩 자꾸 길어지는 봄날이
허기를 달래기에는 천 년같이 길어
산과 들을 쏘다니며 진달래(참꽃) 꽃잎과
산딸기(뱀딸기)를 따 먹느라

입술과 혓바닥은 늘
퍼렇게 꽃물이 들었고,보리깜부기를
꺾어 먹은 날은 까맣게 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웃느라 배가 더 고프기도 했다.

눈과 코는 없어지고
하얀 이만 커다랗게 얼굴을 차지하고
벌죽대는 게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토담 옆 장독대 주위에 떨어진
떨떠름한 감꽃이 유일한 주전부리였지만
어쩌다 개떡이나 밀떡이 생기면 그게
그렇게 꿀 맛일 수가 없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고 소다를 넣어 부풀린
이름 그대로의
밀떡 개떡 송기떡 쑥떡이었다.

봄비 내리는 넓은 들판에는
파랗게 쑥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채
그냥 쑥밭으로 자라고 있다.

이른 봄,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봄이 오는 들녘에는 바구니를 든
흰 옷 입은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나물 캐러 봄의 길목을
해가 저물도록 서성거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 때는 늘상 술도가(양조장)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행열이 있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술을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酒粕)와
아래기를 얻기 위해 지루한 줄도 모르고
두어 시간을 기다린다.

사카린을 넣은 단맛에 먹다가
그만 취해서 그날 오후부터 하루 낮과 밤을
얼굴이 벌개져 정신없이 잠만 잤었다.

그 후 한 달이 넘도록 속병이 나서
무던히도 고생을 하는 바람에 밀밭 근처에만 가도
취하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전설처럼 멀리 떠난 보릿고개,
우리의 가난 고개였고 눈물과 배고픔에
허기졌던 시절이었다.

내리 삼 년 가뭄 끝에
첫 달무리가 밤하늘에 걸렸을 때
어둑어둑한 밤길을 서둘러 달려가
보리밭 두렁에 나란히 앉아서

"저 놈이 어서 여물어야 할낀데.."

달무리를 연신 올려다보며
마디 굵은 손으로 내 어린 손을
꼭 잡으시던 아버지, 지금은 경산묘원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와 같이
조용히 누워 계신다.

밭에서 돌아온 그날 밤
마당가에는 해거리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이
소복소복 하얗게 떨어졌고
그해는 풍년이 들었다.

봄비가 내리기 전날,
달무리를 볼 때마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우리 어린 날들의 기억들이
해거름 봄비 속에서 자꾸만 떠오른다.

우산 끝에 맺히는 빗방울 너머로
먼 데 산꿩이 울고 있다.

(2002.4.22. 魚來山님이 쓴 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둥지로 쪼로록 달려가 노랗고 따뜻한 닭 알을
가슴에 품어보곤 엄마에게 가져 다 주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이였던가 봅니다
우리집에는 알을 낳는 닭이 두 마리 있었습니다
매일 낳는 닭 알은 나와 동생들에게 신발이랑 과자랑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신기한 요술구슬이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두개씩 들어 있던 닭 둥지의 알은
달랑 한 알 밖에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닭은 모두 울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는 둥지로 가서
주위를 살피더니 하나밖에 없는 알을 보고

“이제 늙어서 알은 낳지않고 헛울음만 지르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엄마의 허탈한 목소리와 함께
그 다음날 부턴 나는 둥지에 있는 한 개의 닭 알을
깨어 질세라 조심스레 꺼 내어 엄마에게 가져 다 주곤 하였지요

약 보름간을 그렇게 나의 닭 알 나르는 심부름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이제 늙은 닭의 울음소리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십 여 일이 지난 어느날 이였던가 봅니다
난데없이 방앗간 옆 헛간에서 들려오는

“꼬꼬대 꼬꼬 꼬꼬대 꼬꼬 “ 하는

닭의 울음소리에 헛간으로 달려간 나는 헛간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보리짚단을 뒤적이다 깜짝 놀라 소스라 칠번 하였습니다

보리짚단 속에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노랗고 따뜻한 닭 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늙은 닭은 방앗간 둥지를 떠나
아무도 가지않는 이곳 헛간창고에서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소복이 담겨 있는 탐스러운 닭 알을 보는 순간
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닭 알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보배로만 여겨졌거든요

오십 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 날들을 찬찬히 돌이키며 생각해 보아도
그 때만큼 내 마음이 부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저녁상에 계란 요리가 올라오면
보리짚단 속에 소복이 쌓여있던 닭 알을 떠올리며
예닐곱 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 깊은 행복감에 젖어 봅니다



-길벗-












십여년간을 병원신세를 지는 작은 놈이었습니다.

고놈이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7급 재검판정을 받았지요.
그날은 온종일 악다구니로 보냈습니다.
울지않으려고,
더 행동은 거칠었더랬습니다.

가족회의를 여러번 했고.
본인의 의사가 입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떳떳하고 건강한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전 현역입영의 길을 택했습니다.

복무 중인 큰놈이 걱정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어쩌시려구요.
안보내는게 더 나은거 아닐까요?"

두달을 온몸으로 뛰었지요.
남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뛴다던데...
바보 밥텡이 엄마는 군대에 아들을 보내려고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8일 3급으로 현역입영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열아홉 아들놈은
3급 판정의 서류를 들고 벙싯벙싯 웃음입니다.
내 찢어지는 가슴속은 아랑곳 않구요.
우리집의 애물...
떠나간 이가 그렇게 불렀지요.
애물이라니요.
아닙니다.
고놈이 있어 제가 요만큼이라도 겸손해 질 수 있었던걸요.
고놈이 있어
지금의 시간을 견디어내는 것을요...


그날 저녁
화장실에 물 틀어놓고 엉엉울었습니다.
16년의 세월을 뛰어서...
첨 병원에 갔던일이 떠올랐기 때문에요.
암담함...
처절함...
두려움...
공포...

그리고 기도...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에미란 이름으로
나는 고놈앞에서는
울지 못합니다.
에미란 영원히 자식들에겐 하늘인것을요...

며칠전,
아니 6월 30일,
서해안에서 북한과의 교전이 있었더랬지요.
그곳과 가까운 곳에 큰놈이 복무 중입니다.
경기도 파주...
안타까운 마음에 전화를 넣었으나 비상이었는지 전화가 불통이었습니다.
한밤을 꼴딱 새우고,
종종걸음으로 무릎꿇었었지요.

다행히 큰놈에게는 별일이 없었지마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다섯목숨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제가 꼭 작은 놈에게 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은놈이 오늘 아침 나를 울렸습니다.
별 것 아닌 일이 었는데 내 설움에 고놈에게 포악을 부렸습니다.

학교를 보내놓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울었습니다.
기대어 울 어깨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슴도 없이,
꺼이꺼이 내처 울었더랬습니다.
항상 씩씩한 옥이도,
오랜 외로움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여자인 모양입니다.

난 바보 미련 곰탱이입니다.


절영에서
옥이이모.




-늙어봐야 안다.-


나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늙기 시작할까?
그것이 늘 궁금했다.
50이 지나면서 새치가 늘어도 나는 늙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머리야 일찍 세는 사람이 있지. 젊은이도 새치는 있으니까."

60 이 지나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이를 누가 물으면 적당히 얼버무리며 딴 소리를 했다.
"나이가 문젠가, 그 사람의 건강상태가 중요하지. 사람에 따라서 10년의 차이는 생긴다고 보거든……."

그러는 동안,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남들은 나를 할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제 정말 늙은 것일까?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수평 대에도 오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면서
이젠 나도 정녕 늙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노인의 마음!
그걸 누가 알까?
자신이 늙어봐야 노인의 사정은 알게 되리라.
세상에서 점차 소외당하는 느낌,
만사를 허무로 돌리는 마음,
잘못을 보고도 관용하려는 여유,
사회적 유대에서 풀려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자식들이나 다른 젊은이들은 형식적으로 노인을 위하는 것일 뿐,
진정한 노인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늙어봐야 늙은이 마음을 알듯이
죽어봐야 진정 죽음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야 돌아간 부모의 노년기 마음을 하나씩 헤아리게 된다.

시집간 딸이 가져온 머루술 한 병
하얀 도자기에 붉은 머루술
감악산 머루술은 이름 높은 명주란다.

얼마나 향기로울까
병마개를 딸듯하다가
나도 모르게 멈춘 손길

술을 좋아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또 목이 메인다.

아버지 가신 뒤 세 번째 가을이 가고
어머니 눈감은 뒤 두 번째 봄이 오는데
내 머리는 희어져도
어머니는 보고 싶다.
아버지가 그리워 서럽다.

-2002, 1, 21. 청춘극장에 올린 글-








일주일만인가?
아마 꼭 일주일만에 전화를 했을꺼야.

" 나 많이 아퍼."하는 니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겨우내 몸살을 달고 지내는 니 모습이 내내 안스러웠는데......

봄이 되어도 넌 예전의 너로 돌아오지 못하고
늘 어딘가 기운없는 모습이었어.

"나이가 들려나봐"
당연하지
니 나이가 몇인데?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때
그때 넌 열 여덟 난 아마 스물이었을꺼야.
근데 벌써 우리 나이가 넌 마흔다섯,난 마흔 일곱

마흔다섯이 되도록 짝을 찾지못하는 니 모습을 보며
안스럽기보다는 혼자 당당하게 독립해서 사는 모습이 좋아보이고
어떤땐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지금 누군가 널 챙겨줄 사람이
아니 이렇게 몸이 아플때 나말구 누군가에게
"나 많이 아퍼"란 말을 할 그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니가 쌓아가는 담이 자꾸만 높이와 깊이를 더해가
어떤 땐 감히 엿볼수조차 없는 커다란 것으로 느껴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남에 대한 배려가 지극한
어디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친구란다.

혼자라고 끼니 거르지 말고
늦도록 일한다고 잠 시간 놓치지말고.

니가 계획하는 현리의 집이 완성되면 내 재봉틀을 옯겨 놓고
옷감에 찍어주는 니 판화작품으로
근사한 우리만의 작품을 만들려면
너하고 난
아직은 누구보다도 건강해야한단다.

내 친구 정매야!!
몸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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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흰색 우산을 준비하고 나를 맞았다.

베이직한 면바지 위에 잘 어울리는 검정 베스트,

그 위에 걸쳐 입은 베이지색 자켓....

그녀는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봄비 내리는 명동에서 백합처럼 밝고 예쁜 그녀를 만났다.

좀은 차갑게 느껴지는 샤프함이 볼 때 마다 나를 기분을 좋게한다.

내가 든 작은 쇼핑백을 말 없이 자기 몫으로 가져간다.

팔짱을 낀 다른 한 손으로 우산를 받고,

자신의 키를 내게 알맞게 맞춰준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 오는 시각에 백화점으로 갔다.

얼마 전에 지난, 내 생일 선물을 꼭 챙겨 주어야 겠단다.

그녀가 미리 봐 두었다는 실크 스카프는 한 눈에 내 것이었다.

사랑인 양, 보드랍게도 금세 내 목을 휘감아 내렸다.

뜻밖에 10% d.c까지 받는 행운도 얻었다.

다시 팔장을 끼고 봄 비 내리는 명동 거리로 나왔다.

산채비빔밥과 항아리 수제비를 시켰다.

각자 다른 음식을 시켜서 두 가지를 동시에 맛보는 재미 또한 솔솔하였다.

늦은 저녁을 먹고 그녀가 다시 또 재촉을 한다.

"Seattle's Best Coffee"

1-4층이 온통 다 커피숍이다.

3층까지 다리품을 팔았으나 빈 자리가 없다.

4층까지 올라갔다.

비오는 날은 창가에 앉아야 한다며 기어코 나를 창가로 안내했다.

무슨 커피를 마실거냐고 형식적으로 묻고는 아래층으로 간 그녀는

10여분 후에 예쁜 종이컵에 담긴 맛난 커피를 손수 배달해 왔다.

그곳은 self 였다.

달콤한 생크림이 소복이 얹혀진,

그 위에 길다란 쵸코렛이 살풋 걸쳐진 커피....

향 좋은 커피가 아니더라도 우린 충분히 행복하였다.

창 밖에는 봄비가 부슬거린다.

연인들이 우산을 받고, 더러는 그냥 총총히들 지나간다.

그녀와 나는

조용조용 내리는 봄비를 행복하게 바라본다.

우린 한동안 말을 아꼈다.

고른 치열과 반듯한 이마에서 그녀의 예쁜 마음을 읽는다.

거기에 알맞게 가미된 유머와 적당한 애교...

그녀는 어디에서 왔을까!


합리적인 사고,

반듯한 품행..

그녀는 예쁘다.

그녀는 가끔 내 핸폰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주기도 한다.

사랑한다고.

아프지 말라고...

어느 연인이 이토록 곱고 풋풋한 감성을 지녔을까!

그녀를 키워 낸 바람같은 세월이

오늘, 찔레꽃 향기처럼 아픈 한을 던져 준다.

그녀는...

그녀는...

지천명의 어떤 유부남을 "아빠" 라 부르는 예쁜 숙녀이다.


그녀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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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정말로 오랜만에 목욕탕엘 갔다.
매일 운동을 하면서 샤워를 하니 목욕탕 갈일이 없어 잘 가지 않는데,
어느덧 엄마보다 훌쩍 커버린 딸아이가 친구랑 목욕탕 같이 가기로 했는데, 펑크났다면서 같이 가자는 바람에 따라나선 것이다.

온천이 가깝다 보니 동네목욕탕 시설도 덩달아 좋아져서 목욕탕 안에, 한증막과 찜질방이 같이 붙어 있고, 서비스도 만점이다.

한참 목욕을 하는데, 옆에서 애기하나 데리고 목욕하는 젊은 엄마가 신경이 쓰여 목욕을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

샤워기는 그나마 절수장치를 해 놓아서 꼭 누르지 않으면 물이 나오지 않지만, 수도꼭지는 수동이라 잠그지 않으면 물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쓸만큼만 받아지면 끄면 되는데, 아이를 닦아주면서 계속 물을 틀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나 잘하면 되는데, 영 신경이 쓰인다.
만약에 내가 참견했을때 생기는 잡음을 여러방향으로 생각해 봤다.

참견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고, 댁이 목욕탕 주인이냐고 할수도 있고, 못들은척 할 수도 있고, 아니꼬운 눈초리로 쳐다볼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상황 모두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얼른 하고 나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조바심이 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어코 한마디 하고 말았다.
"애기엄마 물이 계속 넘치네요? 애기 닦아주느라고 잘 못봤나 보다"
라고 결코 듣기 싫지 않을 단어를 고르고 골라 참견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 이 젊은 애기엄마 양식은 있는 엄마였는지.
"어머나, 이런. 아이고~~ 죄송해요.." 한다.

휴~~ 하고 한숨이 다 나왔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것을 하면서 후회할일까지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던 만큼 좋게 받아들여준 그 애기엄마가 오히려 고마웠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내것이 아니라고 해서 또 내돈 들어가는게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수돗물을 철철 넘치게 틀어놓지는 않는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검소와 절약을 미덕으로 살았기 때문에 내것 남의것 할것 없이 아껴주는데, 별로 어려움 없이 살아온 젊은 세대들이 아무 생각없이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낭비하고 있는것이다.

옛날에는 학용품을 하나 잃어버려도 꼭 주인이 찾아 갔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사물함에는 멀쩡하고 새것인 학용품들이 주인이 찾아가지 않아 넘쳐나고 있단다.

잃어버리면 또 사주는 부모님도 문제고, 그러므로 해서 물건의 소중함을 모르는 우리 아이들 또한 문제이다.

소비도 미덕이라는 말도 있지만, 과소비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얼마전 매스컴을 통해서 카드빚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도 있었다.
만약에 어려서부터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더라면, 결코 그런일은 없었을 것이다.

큰부자는 하늘이 내지만 작은부자는 검소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원하는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는 풍족함 보다는 검소함으로 생활하는 습관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헤라님이 2002.6.17에 쓴 글)




<요한 일기>

2001, 7, 26. 17:05.

-아이고~~~~ 속상해 죽겠네 !!-

엊그제 23일부터 25일까지
이곳 광주대학교 후기 신입생모집 접수기간이었다.

내가 가고픈 외국어학부 는 아예 신입생모집이 없고
그런대로 가고픈 문예창작학과 2명 사회복지과는 단 1명 뿐
검정고시 합격자 자격으론 어려운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 이다.
참다 못해 어제 오후 1시엔 학교에 갔다가 입학원서를 다시 들고
돌아서는데 가슴만 미어진다. 갈 곳도 없다 복도에 서있다.

밖으로 나와 그늘 밑에 앉았다. 공연히 답답해진다. 엉엉 울고 싶다.
마구 투정만 하고 싶다 화가 치밀어온다. 어디 가서 악이라도 쓰고 싶다.
누구에게 원망도 할 수 없고 뉘 잘못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지?

쉰일곱, 이 나이에 무슨 대학? 내 뒤통수에 대고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가자 벌써 5시다.
집에 돌아오는 운전대는 방향을 잃었다. 끼~익!~~~~

다행히 가드레일 덕분에 냇가에 빠지진 않았다.
미쳤다. 미쳤지 미쳤어. 네 자신을 알라. 내년에도 갈 수 있는 걸…….
욕심도 많다. 공부한지 반년 만에 학교 못 간다고 속상해 하는 거냐?

속 하나도 없는 요한이 에게 이럴 때 누가 소수한잔 하자하면
참 좋으련만............

----**----


2001년 12월 1일. 17:58.

-합격 ! 떨리는 내 가슴을 열어보실래요?-

40년 전 이맘때쯤
꼭~잡고 있던 가방 끈을 놓쳤습니다.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허공을 헤매는 내손에는 잡히질 않았습니다.

**

4.19 때 고향 부여 뒤로하고
돈 안 드는 학교 찾아 일가친척 하나 없는 광주로…….

의. 식. 주 홀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고2중퇴! 한 맺힌 학업!
대망의 꿈은 있으나 없는 것.
배고픔은 날 가로 막았습니다.

작년11월7일, 영어만 배울게 아니라 해보자!
네 시간씩 잤습니다. 금년4월5일 시험을 치렀습니다.
오늘 합격통지서 받았습니다.
눈물이 나와 자판이 느립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지금.............

별것도 아닌 것이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네요.
대학교에도 가볼 겁니다. 금년 가을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너무 좋아서 우리 열린마당님들께
자랑 한 번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한 올림―

**

저 오늘 낮 12시에 편지 한 장 받았습니다.

광주대학교 인문사회대학 외국어학부 합격통지서 !
혹시 나 불합격 될까봐 여러 날을 묻혀 있다가
오늘은 온~ 세상이 다~내 것인 양 너무 좋아서
열린마당님들에게 자랑합니다.
저 팔푼이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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