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연 친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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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군요.
예전에는 대구가 혹서로 지정된 곳이었지요.

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못살겠다는 대구가 잠잠합니다.

오랜 숙원사업으로 그 톱 상위권에서 물러났다네요.

그 건 바로 대구를 녹지대로 만든 것이었다는군요. 정말 자연은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지 싶습니다.
그러다...진주가 때 아니게 떠올랐습니다.
비닐 하우스 탓이랍니다. 특농작물로  생활은 윤택해졌을지 몰라도 여름엔 죽을 맛입니다.
얼마 전엔.. 밀양이 그랬다고요?
서울도 이젠... 건축 허가 낼 때..옥상을 정원으로 꾸며야만 허가를 내게 되었답니다.
정말 그럴 겁니다.
그 숱한 옥상들만... 시멘트에서 푸른 조경수로 가려진다면 복사열은 사라지겠지요.

 

청계고가철거
 삼일빌딩 탑라운지에서.../2004년 3월7일 오후 찍다./헐린 청계고가
(이러니...복사열로 안 덥고 배길까? 더구나..모두 에어컨을 사용하니..악순환 연속)


날씨가 무더울 때는 무언가 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몰입할 것이 있다는 것.
좋은 일이 아닐까요?
 
스티븐 킹의 [it]를 보겠다고, 무더위를 미스터리 괴기물로 이겨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아직 제1권도 다 떼지 않은... 솔직히 이 번 더위에 독서는 무리더군요.
 
타블렛, 익히기로 들어갑니다.
[브룩쉴즈]님도 사 두고는 아직 못 익혔다는....
사실..저도 이런 놀이로 혼자..익히기에 들어갑니다.
 
맨 위에다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올려 놓을라니...좀 그래서 거꾸로 올라갑니다.
요리도 맨 위에 완성 사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洪紅 ~~ /새겨 읽지 마세요. 걍... 아이들 흉내 내 본 것뿐이니까요.
 
자 그럼
스크롤바를 밑으로 죽--- 당겨 주세요.

손목 압박 좀 받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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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원래 크기 그대로 올려봅니다. 좀은 가장자리가 지저분한 듯도 하여  조금 더 정리를

해 봅니다. 이젠... 그래픽 디자인, 타블렛 초보가 노는 것을 여러분들께서는 잘 보셨습니다.
오늘은(8월13일) 날씨가 좀 흐리니..살만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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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70%로 줄인 이미지.. 깨끗하게 정리 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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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시 줄여보았습니다. 이젠 쓸만 합니다.

그러나 아시지요?  daum 자료실... 이미지가 실현되는 싸이즈가 따로 있다는 거...

물론 일률적인 거 깨끗해서 보기 좋습니다만... 이런 일 할 때는 조금...

구속감을 느낀다는 거...

맘에는 들지만... 칼럼에 나타나는 크기..성에 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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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매미가 숨어서 울고 있는 나무로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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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왕 망친 거...타블렛 판에 있는 설정된 이미지..마구 마구 불러내와서

한바탕 놉니다. 노는 게 아니라...기억하는 겁니다. 어떻게.. 저장된 프로그램에서

적절히 불러내어 사용할 수가 있을까?

이런 놀이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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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줄여놓고 보니... 텍스트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줄여도 너무 줄였습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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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텍스트를 넣고는 까불다가 포멧 전환시 이렇게 홀라당 색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다시 시작해야지요. 이젠 뭐..이깟 일에 그리 놀라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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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간을 뚝 떼내어  불러오기로 또 붙이고..붙이고....

완전 땜질입니다. 잘 하게 되면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이런~~ 제 이름,

J가 뭉개져서 새로 떠다가 옮겼더니..키도 맞지않고.. 더 우끼네요.

차라리..없던 걸로 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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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젠 height 가 마음에 들지 않아 키를 키우려 합니다.

그림을 다치지 않으려 잘라서 잇는 방법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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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너무 싸이즈가 넓은 것 같아 width 를 줄여 줍니다.

그리고 나무 등걸을 그립니다. 농담을 약간 주면서...

그리고 잎은 타블렛판에 설정된 이미지를 불러내왔습니다.

맘먹은 대로 나무에 달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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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사이버에서 고서 분위기가 좋아서 언젠가는 써 먹을 때가 있겠지 하고는

줏어와서 나름대로 손 봐서 꽁꽁 숨겨 두었습니다.

 

 

타블렛은 주로 그래픽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 쓰는 그림판입니다.
간단한 포샵기능도 가지고 있어,,,,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타블렛에 따라오는 펜마우스는 선이 없고 마치 볼펜 같아서

아주 자유자재로 그림이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육필 쓰기도 가능하구요.

아주 싼 것은 십만원 미만서부터...기십만원을 호가하는 것까지...종류가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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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색조를 좋아하고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흐가 마지막 머물렀던 곳, 프랑스  ‘오베흐-쉬흐-와즈’ 에서 사 온(선물받은)

머리 핀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귀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에게 머리 핀~하면 당연 블란서製가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버렸지만.... 

 

'고흐'의 침실이 그려져 있는 붉은 색조의 머리핀은 소중하게 여기는 액서서리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는 광선으로 흠집이 난 듯 보이지만...아무리 내 굴려도 흠하나 나지 않는

늘..갓 사온 듯한  반짝 반짝 윤이 나는 헤어-핀, 

그 하나에도 고흐의 침실 그림을 넣어서 만든....그래서 작은 시골임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연일 끊이질 않는다 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멋을 파는 ....그 안목에...나는 도취한다.

고흐의 침실 그림이 있는 핀을...가끔 꺼내어 머리를 빙빙돌려 핀으로 꽂으면....

붉은 색조가 있어 헤어-핀 하나로도 나는 충분히 호사스럽다............../이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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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에 그린 <<고흐의 방>>입니다.
동생에게 자기의 방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방이 휴식의 장소이고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요양원생활을 할때도 이방을 몇번이나 다시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침대옆에 벽에는 그림 두점, 방문도 두개, 침대에 베개도 두개, 빨간이불,,,
방에 안정감을 주려고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늘 떠돌이 생활을 했던
나무바닥과 파랑에 연보라빛이 나는 벽,



  고흐는 폴 고갱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갱의 정렬과 해박한 지식들은 고흐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몽마르뜨의 생활을 접고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고갱에 대한 수없이 많은 구원을 합니다.
아름다운 아를에 와서 같이 살자고.
 
  결국 고갱은 고흐와 3개월 남짓 함께 살지만,
고흐의 광기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고흐가 귀를 자른 건 이맘 때 쯤이었나 봅니다.
 위의 그림은 고흐가 고갱을 초대하기 전, 고갱의 마음을 사기 위해 집을 예쁘게 단장하던 무렵
자신의 침실을 그린 것입니다. 사선의 구도는 역시 불안정하고, 오른쪽의 파란 색 문은
고흐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불안감을 내포하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8년은 아를르에 와서 고갱이 함께 생활하며 제작 활동을 하던 해였습니다.
공동 생활은 이윽고 정신병의 발작, 귀를 자르는 사건등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지만,
그런 것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고흐에게는 기대에 부푼 나날이었습니다.

침실 그림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새로 실내 장식을 하기 위해
침실을 데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침실 데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평탄한 면을 만들면서 두텁게 칠한 붓을 크게 움직여갈 뿐...
나는 이들 여러 가지 색으로 여기에 절대적인 평화를 표현하고 싶다.]

점묘나 선묘를 억제한 평평한 칠의 시도, 이것은 같은 해 여름에 그려진 <아를르의 햇볕>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고흐에게는 저적으로 실험적인 것입니다.
침실 그림은 그 후에도 고흐의 마음을 끈 것 같습니다.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도 침실의 그림을 두 장 더 그렸다 합니다. .........../검색참조

 

 
   

고흐의 마지막 생가와 무덤.

Aubers-sur-Oise

 

파리의 북쪽으로 한시간 거리의 ‘오베흐-쉬흐-와즈’ 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는 곳이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 더욱 사랑 받고 있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오베흐-쉬흐-와즈'. 이곳은 천재화가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며, 많은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 오베흐의 계단 >, < 오베흐의 골목길 > 등도 한번쯤 거닐며 100년 전 마을 주변의 보리밭과 시청, 교회 등 '고흐'의 그림 속에 나타난 ‘오베흐-쉬흐-와즈’의 풍경을 떠올리며 천재 화가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30세에 이르러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로방스' 지역의 '아를르'로 옮기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흐'에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모티브를 준 반면 점점 심해지는 광기로 인해 자신의 귀를 면도날로 자르는 광기를 보이게 된다.

 

 

 

그 후 '고흐'는,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보호자 였던 동생 '테오' 의 권유로 '오베흐'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고흐'는 신경과 전문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가셰' 박사의 보살핌으로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고, 이 기간동안 70 여 점의 작품을 남긴다.
< 오베흐의 교회 >, < 오베흐의 길과 계단 >, < 가셰의 초상 >, < 까마귀 나는 밀밭 >, < 최후의 자화상 >같은 많은 유명 작품들이 이곳 '오베흐'를 배경으로 탄생하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림도구를 챙겨 마을을 나서서, 저녁이면 동생 '테오' 에게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를 편지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고흐'는 자신의 천재적인 정신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1890년 5월 20일 정착하여 70일 후인 7월 27일 자살을 하게 된다.

 

오베흐 교회 Eglise de l`Assomption

 

'고흐'의 유명한 그림인 '오베흐의 교회'의 모델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그림과 똑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루이 6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드-모리앤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기도실로 이용되었고, 이중 경사를 갖는 사각형 종탑의 지붕 모습이 독특하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뒤엉킨 '고흐'의 그림과는 달리 엄숙한 분위기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는, 작품의 대상으로의 역할만을 충실히 끝내고, '고흐'의 느낌이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조용히 서있다.

 

'고흐'의 집 Auberge Ravoux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이자 카페인 ‘고흐 기념박물관'으로 개조된 여인숙에서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고흐'의 초라하고 외로운 방을 볼 수 있는데, 작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가 있을 뿐이다. 1890년 5월 20일 ‘라부 여인숙 Auberge Ravoux’에 도착한 '고흐'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활발한 작업으로 70 여일 의 생의 마지막 기간 동안에 무려 70 여 점의 유화와 수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화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좁은 지붕 아래 작은방에는 침대와 작은 책상, 의자밖에 없어서 당시 화가의 쓸쓸한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고흐'는 그린 그림을 침대 밑에 보관하였단다.
식당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며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자!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산책

 

묘지에서 좀더 언덕을 오르면 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흐'가 왜 이 밀밭을 자신의 화폭에 담게 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흰색, 분홍색, 보라 빛으로 어우러진 푸른 하늘 아래에, 감자꽂이 드문 드문 피어있고, 갈아 부친 땅과 함께 온화한 연보라 빛과 아주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녹색의, 바다처럼 넓은 구릉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 초원에 저는 완전히 빨려 들어 갔습니다." 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고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생 ‘테오’ 에게 "극도의 고독함과 슬픔을 표현하는데 구속 당하지 않으면서, 혼란스러운 하늘아래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그리고 있다." 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테오’는 1890년 7월 27일 미완성의 답장에서 "그래서 무었을 원하는지요?" 라고 '고흐'에게 묻고 있다. 바로 그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고 신음한다.

 

묘지 Cimetiere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도 바로 죽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이틀이나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숨을 거둘 수 있었던 불운 했던 화가가 안식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언제나 '고흐'의 열렬한 팬이면서,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동생 '테오' 가 형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는지 6개월 간의 정신질환을 앓고 사망하여 네덜란드에 묻히었다가, 1914년 '테오'의 미망인 ‘요안나’의 뜻으로,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고 담쟁이 넝쿨이 이들의 불멸의 우애를 상징하는 듯이 무덤을 덮고 있다.


‘슬픔은 끝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내용출처 : 알고가자 프랑스 http:www.algogaj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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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적으로 생각해 보는 우리의 미술관 관광객 유치~~
우리의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곳, 제주 서귀포 그의 미술관에서 나는 폭풍우의 화가
'변 시지' 님을 황망히 찾아가느라 언뜻 본 기억으론

이중섭님의 '아이들' 그림을 드로잉, 판화로  해서 넣은 수공예품을 좀 호가로 판매하고 있었다.

 

막연히 아무나 스스럼없이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가격과 사용도에 한해,

작은 물건이지만 큰 느낌으로..예술인들의  긍지를 느끼게 해 줄,,,,,,

 우리 화가들을  기리고...그에 따른 문화산업들,...문화 관광객 유치,

진정 기념이 될 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소품들은 진정..요원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은 혼자만의 생각일까?............./이 요조

 

 

☆2004년 8월 어느 무더운 날, 자월도에서 드뎌....내 손을 벗어나다.

선물로 흔쾌히....

무겁고, 검고, 윤기나는 머리위에 붉은 핀이 어울릴 것 같아서

내 머칼은 이제..이 핀을 감당하기엔...탄력도 힘도....빛깔도 잃었버렸으므로,

참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기분으로....

 

집으로 오는 船上에서 그녀의 머리에 꽃힌 핀을 보았다.

부.럽.다.

 

 

 


 

 




Sojiro / 사랑의 숲



결국 그 헤어핀은 8월 31일 블로그 모모양에게 전달되다.


 

기당미술관

 

                폭풍의바다1

 

폭풍의바다2

폭풍의바다3

폭풍의바다4

폭풍의바다5

폭풍의바다6

폭풍의바다7

폭풍의바다8

폭풍의바다9

폭풍의바다10

폭풍의바다11

폭풍의바다12

폭풍의바다13

폭풍의바다14

 

출처:http://www.kcaf.or.kr/art500/byunshiji

 

 

 

자연 종교 인간

...질식 속의 명상

 

 

 
변시지선생님


님의 시선 끝간데는 어드메쯤일까? 그의 눈빛은 만남 내내 젖어 있었다./조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변시지님의 나그네라는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의 자화상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조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있게 산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혼자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그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에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또 기다리는 사람!..........이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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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제주도의 바람과, 말과, 바다를 주제로 그리는 변시지 화백..

따스한 귤빛의 그림 한구석 때론 말과 함께, 때론 혼자인 사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간과 바다에 대한 슬픈 시름과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일단은 여기저기서 무조건 옮겨왔습니다.

그의 그림을 사랑하여 그림을 읽는 작은 소리, 호흡 하나라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제 느낌은 따로 장을 마련 해야겠습니다.

주신 책도 아직 채 못 읽어봤거든요.

그 느낌 그대로....또 전파시키기 위해서,

재밌는 것은 나이를 고하간에 다들 님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변시지님의 홈페이URL/이 요조

http://www.kcaf.or.kr/art500/byunshiji/

 

 

 

 

 

처음엔 이름이 눈에 띄어서 알게된 분입니다..(왠지 반말이 안되네요;)

향년 75세의 원로 화가라고나 할까요...엄청나 십니다..

그림에서 세월이 느껴진다고 할까요-_-

그냥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네요...ㅜ_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폭풍의 바다(5)

제주바다(3)

무제

 

저..정말 대!대단하십니다!

 

 

 


/byunshij

..

타블렛 그림 그리기..과정 1,2,3

*바람*
 바람


*커튼*
 커튼



*바람과 커튼 그리고 나부*

* 바람의 精事 *
 바람의 精事








My life (03:42) - Clazziquai


demon
demon

 

 

 

 

 

 

 

 

 

눈

 

 

 

 

 

 

 

 

 

 

.

 

 

 

 

[이중섭!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화가 이중섭, 시대와 끝내 不和했던 천재"

평생지기 한묵 화백, 눈물의 회고강연




친구 이중섭과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원로화가 한묵씨



지난18일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가 열린 제주도 서귀포시 KAL호텔.
백발의 노화가가 강단에 올라섰다. 생전의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일본 유학시절부터 함께하며
평생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한묵(89) 화백이었다.
30분간 이어진 화단 원로의 강연은 생전의 이중섭에 대한 상투적인 회고가 아니었다.
시대와 불화(不和)했던 외로운 천재의 예술혼을 기리는 절절한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가면서
노(老) 화백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일부 청중들도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은 전설의 화가로 추앙받는 이중섭 화백이지만 살아 생전 그의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묵 화백은 회고했다. 북에서는 ‘인민의 적’이라고 공격 받았고 남에서는 ‘풍기문란’이란 이유로
그림이 철거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이중섭은 멋진 외모에 솔직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화백은 “중섭이가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건방지게 굴면 때려주기도 했죠.
여름에 원산 해수욕장에서 팬티 바람으로 서 있을 때 보면 중섭이 체격이 얼마나 근사했다고요.”
일제 말기, 한 화백은 금강산 온정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원산에 살던 이중섭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중섭이는 골치 아픈 일만 있으면 휙 하고 금강산으로 달려오곤 했습니다.”

한 화백은 이중섭의 예술적 좌절도 곁에서 지켜봤다. “광복 후 당시 예술동맹에서 중섭이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이들이 중섭이 그림을 보고 대뜸 ‘인민의 적’이라는 거예요.
소가 싸우고 닭이 싸우는 듯한 그림이 인민에게 공포심을 준다나요. 내용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섭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의 병은 근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했을 겁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 화백은 이중섭의 월남 배경을 짐작했다. “이중섭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지 않았나 싶어요. 북에서는 전시하려고 하면 당 문화부 심사를 받아야 했어니까요.
그림을 전부 이데올로기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심사할 때 ‘왜 빨간 꽃이 적냐’는 식으로 트집 잡곤 했지요.”

그렇다고 이중섭이 남에서 예술적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피란 시절 한 화백은 이중섭과
부산 남포동에서 ‘콩쥐팥쥐’ 오페라 무대장치를 맡았는데 이때 이중섭의 유명한 ‘은종이 그림’이
탄생했다고 한다. “극단장이 가끔 우리에게 담배를 주곤 했는데 중섭이가 어느 날 변소에서 일 보다가
옆에 굴러다니던 꼬부라진 못으로 담뱃갑 은종이에 그림을 그려봤답니다.

이후 우리가 피우던 담뱃갑도 전부 달라고 해서 열심히 그렸지요.”
이중섭은 은종이 위에다 주로 아이들을 그렸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가족들과 장난치는 내용인데
이게 또 문제가 됐어요. 서울서 은종이 그림을 전시하는데 ‘왜 이리 나체가 많냐’ ‘풍기문란이다’
라는 비난을 받고 그림이 강제 철거당했어요. 중섭이에게는 쇼크였지요.” 한 화백은 이어 “중섭이가
일본 여자와 산다고 눈총도 많이 받았다”며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을 많이도 퍼마셨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대구에 머무르던 이중섭을 시인 구상이 서울로 데려왔다. “깜짝 놀랐어요, 그 잘생겼던 중섭이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하고요. 통 먹질 않고 사람도 몰라보는 거예요.” 거식증에 걸린 것이었다.
한 화백은 친구들과 의논해 이중섭을 당시 육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어느 환자를 꽁꽁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거예요.
중섭이도 저런 학대 받는 것 아닌가 싶어 다른 병원으로 옮겼어요. 거기서는 전기 찜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묵 화백은 이중섭이 거식증에 시달리며 투병 생활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때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던 이중섭은 다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어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화장하고 나니 중섭이는 없어지고 뼈다귀만 남았어요. 그 가루를 반은 처가 있는 일본에 보내고
반은 망우리 묘지에 묻은 뒤 친구들과 비석을 세워줬습니다.”

 

 

 





"이중섭 [1916.4.10~1956.9.6]"







담배를 피우는 이중섭의 모습
 

이중섭 생가

서귀포, 그가 머물렀던 제주 생가 마루에 설치된 이중섭 부조(relief )

 
 
 이중섭, 이요조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서 만난 이중섭 미술관,
또 그 속에서 만난 폭풍우의 화가 '변시지'선생님
그 분의 그림을 소개하기에 너무 늦었다.
 
그분의 서울, 돈암동? 개인 미술관도 찾아 보기로 하였는데,
자제분의 관리..전화번호등이 적힌 명함과 책도 두 권이나 받아왔는데도
어려운 숙제처럼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한다.
 
⑥ 이중섭 편에서는 무식쟁이 이요조의 이중섭님 그림을 보고 느낀,
에필로그로 종지부 찍으려 했었는데...
 
변시지님의 그림으로 빨리 옮겨가기위해
⑥ 이중섭은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
 
 
아래 여백은 그 마지막 글을 넣기 위해 남겨 두어야겠다.
언젠가 쓰고 싶을 때,
 
다시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의 그림의 감동이 우러나올 때 
다시 쓰고자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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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올해들어 첫 매미가 울다.

길건너 편 아파트 숲에서 매미가 운다.

오전 9시 40분 2004년 여름 첫 매미 소리를 듣다.

 

근데 조금 다르다.

쓰르라민가?

 

시골을 좋아하긴 해도 도심지에서 자란 나,

 

동식물 실전에는 늘 약한데...

 

어떤이는 중국매미 소리까지도 가려내던데...

 

11시, 좀 전에도 또 운다.

 

울음소리는 지극히 약하다.

 

마음이 복잡하면 못 느낄 수도 있겠다.

 

우울하던 마음이 조금 가신다.

 

산이나 올라 가야겠다.

 

방학이라 큰(아들)넘이 있으니... 

 

......................

 

오늘에사 안 사실입니다.

아직 매미는 아니고요 쓰르라미라는군요.

보리가 누럴 때에 운다하여 일명 '보리매미'라고도 한다네요.

산에서도 들었습니다.

 

 

 

 

매미

 

 

..
세모배 매미

참 매미

풀 매미

소요산 매미

 

 

참깽깽 매미 자료:이영준의 한국의 매미<펌>

x-text/html; charset=EUC-KR" loop="true" repeat="true" volume="100" autostart="true" 087.mpg? movies image 20010197 zip1 data www.me.go.kr http:>

 이중섭 홈페이지 ... http://bull.new21.org/

 

 

초상화

초상화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 여인 ☆

 

여인
'대향'이란 서명을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 합니다.
모델은 후에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이랍니다.
엽서 말고는 몇점 안되는, 그의 초기작입니다.
이중섭이 마사코와 매우 가까워진 시기에 그녀를 그린 그림이 <여인>이다. 오른쪽 젖가슴과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두 갈래 머리카락의 한 가닥을 오른쪽 팔에 걸치고 그 일부분을 손가락으로 쥐게 함으로써 화면에 생기를 부여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곡선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상체는 벗고, 허리 부분에서 치마를 걸쳤는데 고갱의 타히티 시절 그림에 등장하는 멜라네시아 열도 문화권에서 입는 사롱과 흡사하여 그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마사코는 손과 발이 다소 큰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         

 

       

  

 

[아내에게 보낸 편지]

편지

글 사이사이에 그림을 곁들였다.

봉투의 주소와 받는 사람 이름을 쓰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느라 수많은 파지를 내곤 했다 한다.

 

 

 

부부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통영에서 그려진 대표작의 하나가 바로 새 그림이다.

흔히 <부부>라는 제목으로 통칭되고 있다.
그러나 이중섭의 서울 개인전 목록에는 <부부>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새들>이나 <애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데 아마도 이 제목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봉황>에 등장하는 새는 흔히 닭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봉황이다.
이중섭이 닭을 자주 그린 것은 사실이나 이 그림에 등장하는 새를 자세히 보면 털이 없는 목을 하고 있으며 아래쪽의 새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흡사한 꼬리털을 하고 있다.
닭이 아니라 봉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을 가리켜 부부를 그린 것으로 꼬집어 규정하거나 헤어져 있는 아내를 만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얼핏 보면 새들이 공중에서 정겹게 어울리고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정황임을 알 수 있다.

<봉황>을 비롯하여 비슷한 설정의 그림은 모두 위쪽에 수컷새가 그려져 있는데 화면 너머 무엇인가에 긴박(緊縛)된 듯 허공에 매달려 더 이상 내려오기 불가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쪽에 그려진 새 역시 날개를 끊임없이 파닥거리고 있지만 다리조차 땅에서 떼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다.
다리가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있다.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도무지 만나기 어려워 보인다.
아니 서로 만날 수 없는데 애를 쓰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겨우 입만 대일락말락한 상태인 것이다.
봉과 황이 만나고자 하나 그렇지 못하듯 실제로 이중섭은 아내와 결합하려고 애썼으나 결국 헤어진 채로 죽고 만다.


판잣집화실

 


 

[판잣집화실]
 

종이에 수채와 잉크
26.8×20.2cm
1953년

일본에 헤어져 있는 가족에게 보낸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9월에는 판잣집을 지어 혼자 지냈다.
이 무렵 이중섭은 일본의 가족에게 쓴 편지와 함께 <판잣집 화실>을 그려 보냈다.
이 그림은 종이에 펜으로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색을 입혔는데, 당시 이중섭이 살던 집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강아지가 웅크리고 있는 스산한 집 밖을 차가운 색으로 표현하였고, 그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한 칸 방안은 따뜻한 느낌의 진한 노랑색으로 칠하였다.
자신이 생활하는 작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집의 한쪽 면을 자른 듯이, 또는 투명한 벽을 통해 들여다보듯이 표현하였다.
방안에 누워 있는 이중섭은 쾌활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몸 전체는 건강함이 느껴지는 주홍빛으로 칠해져 있다.
그림 속 인물은 그림을 다 완성한 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낼 편지까지 써놓고 이제 하루의 일을 다했구나 하는 흡족한 표정으로 누워서 담배를 물고 있는 것 같다.
이 방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은 굴뚝의 연기로 피어오르는데 이 올라간 연기로 인해 차가운 하늘까지 밝게 느껴진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일본을 오가기가 더욱 쉬울 것이라 여겼을 터였다.

 

 

[이중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세상에서 제일로 상냥하고(?)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나의 남덕군.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9월 9일자 편지 고마웠소.
내 편지와 그림을 그토록 기뻐해줘서 ......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꽉차 있소.

책방의 돈 문제는 아고리가 떠날 때는 완전히 해결이 될 테니 염려 마시오.
태현이의 공부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요.
아빠가 가면 ...... 꼭 공부에 재미를 붙이도록 지도를 해줄 테니까 ...... 남의 집 아이는 아빠가 지도를 해주는데 ...... 싶어 너무 성급하게 무리를 하면 소중한 당신의 몸만 해치게 되오.
즐겁고 밝게 그리고 천천히 한 가지씩 노는 것보다 아빠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울 테니 ...... 그 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싫증이 나지 않도록 지도해주구려.
학교 공부란 생활해가는데 있어서 약간만이 필요할 따름이오.
전부가 아니잖소?
당신과 나의 소중하고 믿음직한 두 아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정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가장 훌륭한 자식들이라고 믿고 있소.

무엇보다 귀여운 마음의 아내 남덕군, 더욱더 밝고 마음 편히 모든 일을 처신해주기 바라오.
당신을 가장 행복한 천사로 만들어 보겠소.
안정을 지켜서 어서어서 건강을 되찾아 주오.
아빠는 당신과 두 아이들을 가슴 가득 채우고 더욱더 힘을 내어 열심히 제작하고 있소.
이제 한고비만 참으면 되오.
바짝 힘을 냅시다.

아빠 중섭


 

 

 

[어린이를 주제로 한 그림들.. 이중섭]

 


은박지화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굵어 새긴 위에 물감을 바른 뒤 이를 닦아내 긁힌 부분에만 물감을 먹게하는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방법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우리 미술의 특징의 하나로 내세운 상감기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의 개인전 목록에는 은지화들이 빠져 있지만, 그는 당시 50여점의 은지화를 출품했다고 한다. 오산 학교의 스승인 임용련의 부인이고 역시 화가인 백남순이 회상한 바에 의하면 화가는 오산 시절(사춘기 정도의 나이)부터 이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법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라 늘 그리기를 갈망하던 이중섭에게 만족을 줬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다음에 할 작품들의 밑그림으로 쓰이기도 한 것 같다.






봄의 어린이








다섯 아이와 끈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바닷가의 아이들








두 어린이와 복숭아








연꽃밭의 새와 소년








연꽃밭의 새와 소년








물놀이하는 아이들
 
 

Let It Be...숙명 가야금 연주단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1920년
5세가 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시작하였다.


1923년
마을의 서당을 다니다가 8세에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가서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선구적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초등과정을 같이 지내며 그 집에
가서 김찬영이 쓰던 화구와 미술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1929년
14세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중등 과정 내내 소를 즐겨 그려서 학생들과 하숙생
사이에서 소에 미쳤다는 평을 받았다.


1931년
16세 미술과 영어 과목의 교사로 부임한 유화가 임용련과
그의 부인 백남순에게 미술에 대 한 재능과 열의가 인정되
어 집중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린다. 이후 내내
한글 풀어쓰기로 이름 쓰기를 실천한다.


1935년
20세에 몇몇 동급생과 공모하여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낡은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불을 지름. 졸업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고 사진
첩은 취소 되었다. 졸업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사립 테이
고쿠 미술학교에 입학.연말에 다친뒤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사립 예술대학인 분카 가쿠잉으로 옮김. 이규상등이
동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인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고 함. 피카소와 루오에 심취하여 이들의 그림
을 모방하여 교수가 힐난한데 항의하기도 함. 실제로 학교
에서는 배운 것이 없고, 상급생인 문학수를 통해서 알게된
화가 쓰다 세이슈에게 오가면서 배운것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함.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를 알게됨


1938년
23세 5월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 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 하고, 협회상을 받았으며,
문학수와 함께 일본의 여러 평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반다. 조선인 출품자는 김환기, 박생광, 유영구, 주현이다.
이 무렵 같은 과의 후배인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940년
5월에 공모전에 <누운 여자>, <소의 머리>, <서있는 소>,
<작품1>, <작품2>를 출품하다. 10월 경성에서 열린 제4회
공모전에 <서있는 소>, <망월>, <소 의 머리>, <산의 풍경>
을 내어 길진섭, 김환기, 진환으로부터 찬사를 받다. 연말에
원산 에 머물면서 마사코에게 그림으로만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


1941년
26세 3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활동하던 조선인 유화가
김종찬, 김학준, 문학수, 이쾌대, 진환, 최재덕과 조선신미
술가협회를 결성하고, 5월에 창립전을 가짐. 이 무렵 이쾌대의
형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가르침과 형의
우리 문화재 수집 활동에 영향을 받아 휴가차 귀가 하면 개성
박물관에 다니면서 스케치에 몰두 4월 5번째 공모전에 <망월>과
<소의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됨.


1942년
6번째 공모전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지일
(遲日)>들을 출품하다. 이 무렵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이
상향'이라는 뜻의 "대향"으로 고치다.


1943년
28세 3월 7번째 공모전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에서
<소묘6>과 <망월>, <소와 소 녀>, <여인>을 출품.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평양출신의 화가들인 김병기, 문학수,
윤중식, 이호궁, 황염수와 6인전에 참가. 이 후 그림을 그리
면서 징병이나 정용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일하기도 함.
연필화 <소년>, <세 사람>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 다. 최재덕과 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림.


1946년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원부원이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
가 되었으나 금새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여
이가 옯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원산문
학가동맹 소속의 구상등이 펴낸 공동시집"응향(凝香)"의 표지
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복고적이고 반동적이라 하여 북조선문학
가동맹의 규탄을 받을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함. 이 무렵 화가
김민구, 이호궁, 한 묵등이 자주 들렀고, 화가 지망생 김영환,
김종식 등이 찾아와 그림 품평을 받기 시작함.


1947년
32세 6월 친구 오정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그림.
평양에서 열린 8.15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음. 아들 태현 태어남.


1949년
34세 봄 태성 태어남.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함.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에 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함께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화가 박수근과 사귐.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자주 술을 마심.


1950년
6월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위협에 부인과 두 아들, 장손인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감.


1951년
36세 부산에서 제주까지 배편을 제공해 준 선주가 사느 서귀포
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도착하여 그 집에서 두 달간 머물다.
<피난민의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것임. 이곳에서 그린
그림으로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 부인과 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병이 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
갔다가 곧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엽서가 시작됨. 박고석, 손응성, 한묵과
기조동인을 결성하고 전람회를 염.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인 오산의 후배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빛을 지게
됨. 3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 유영국,
장욱진의 그림과 함꼐 수상하다고 하여 계엄기관의 조사를 받다.
8월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끝에 일시 체류 허가를 얻어
일본으로 갔다가 곧 돌아옴. 이것이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 되다.
유강렬의 제의를 받아 통영으로 가서 안정을 얻게 되어 풍경화
등을 제작하고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다. <흰 소>, <황소>는 이
때의 작품임.


1954년
39세 봄에 함께 공모전에 함께 출품한 인연이 있는 화가 박광생
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
서울로 가서 6.25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링
대한 미술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 호평을 받음.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 40여점. 은지화를 비롯한 그림을 비롯한 소묘 50여점을
내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으나 당국은 은지화를 춘화라고 하여
철거하도록 했으며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고 술로 지내다가
빈털털이가 됨으로써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짐. 5월에 미국공
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짐. 저조한 실적, 영양 부족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 성가병원 정신과에 보내져 1달여 입원. 거식증
등의 증상으로 정신병자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반박하기
위하여 연필로 자화상을 그리다. 곧 서울로 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정신병원으로 다시 보내졌다.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 이 때 간장염에 금물인 술을
계속마셔 화달이 심해짐.


1956년
41세 영양 부족과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 대구전을 관장한 미국인 맥타가트에 의하여
미국 모던 아트 뮤지엄에 기증된 은지화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지켜보는 사람없이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망우리 고동묘지에 묻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세워지다.


1960년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 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이중섭의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정부에 의해 건국 훈장이 수여됨.


1979년
젊은 시절 애인에게 그려 보낸 엽서, 그림과 일본의 가족
에게 맡겼던 은지 그린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서울, 대구,
부산에서 열리다.


1980년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번역되어 출판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림.


1997년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살던집을 복원하여 개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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