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요즘 가을 운동회 시즌인가 봐요.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북소리 박수소리 마이크소리 함성이
    들립니다.


    열린마당에 출몰하시는 분들은 거의가 다 운동회 추억이
    있을 텐데 거의가 도회지나 아니면 그 근처에 살던 분들 보단
    나처럼 산간 오지의 초동학교의 운동회 추억처럼 신나는 게
    없을 듯 싶은데요



    어릴 때 운동회는 환상이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전날부터 가슴이 퉁탕대던 시절인데요.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온 동네 면 전체가 이날은 축제의 마당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이라도 이날은 밤을 삶아 오는 건 기본이었고요.
    잘하면 오징어도 먹어 볼 수 있고 김밥도 먹을 수 있는 날입니다.
    나는 늘 할머니께서 자반고등어를 구어서 김밥에다 가져 오셨으니
    당시 김밥이라면 살만한 집안입니다.
    우리 집은 30여 호 집이 있는 마을에서 부자였으니 당연했지요.


    소풍날 할아버지는 언제나 하얀 본부석 천막에 교장선생님
    면장 지서장 등이 앉는 일등 석 뒷줄에 늘 앉아 있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가 거기 앉아 계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손자인 내 덕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했거든요.


    필경 조부께서는 내가 저 앞에 서있는 아무개의 할애비다
    하시면서 천막 고급자석으로 오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운동회에서는 늘 선서를 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선서는 내가 했습니다.
    목소리 크지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선생님 말 잘 듣지.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그렇겠지만
    하여간에 6년간 운동회 선서와 반장을 도맡아 했으니 조부께서
    당연히 자랑을 하셨을 건 뻔합니다.


    내가 할아버지 연세가 된 지금 만일 내 손자가 예전에
    나처럼 앞에서 호령하고 깃발 들고 아이들 데리고 다니고
    상품 줄 때 선생님 심부름하고 아이들 운동장으로 들고나는걸
    모두 데리고 가고 나오고 하는걸 보았다면
    나도 본부석에서 큰소리를 치면서 앉아 있고도 남습니다.


    조부의 즐거움을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네요.
    혹여 손자가 있으신 분들은 공감을 하실텐데요.


    요즘은 손자가 있다 해봐야 다 핵가족이라
    아들들이 데리고 살고 있고 며느리 눈치보랴 지금의 노인들은
    즐거워 할 틈도 없을 테지만 당시의 나의 조부는 엄청 즐거워 하셨습니다.
    경춘선 철도를 놓을 때 철로목을 날라주고 받은 돈으로 사들인 전답.
    자수성가를 해서 30여 호 되는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들었으니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는 왕이셨습니다.


    운동회에서 당시는 기마전을 잘 시켰습니다.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국주의가 남아서인지
    남자애들은 단체 기마전을 했는데 이것이 남자들에겐 더 없는 흥미였습니다.
    기마전 아시죠 ?
    앞에 한 애가 서고 뒤에 둘이 어깨를 집고 한 명이 올라타서 상대방의
    모자를 뺐거나 하는 게임.
    함성을 질러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게임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국어 책에는 화랑 관창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들어가 목이
    잘려 와서 이걸 본 신라 병사들이 계백군을 물리 쳤다 하는 게 있었는데요.
    물론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충성심을 일깨우는 것일텐데
    이것을 보고 나도 화랑 관창이 되겠단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 기마전시합만 있다 하면 학교 운동장이 조용해 졌고
    구경하는 학부모들은 거의 일어나서 응원을 하던 참이라 선수들은 거의
    결사행진이었지요. 사고를 우려했음인지 선생님들이 총 출동되어
    모자를 뺐기고 내리지 않는 팀에는 가차없이 끌어내리곤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깃발을 든 팀의 마지막 모자를 뺏어야 이기는 게임.
    함성을 질러 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갈 때면 운동회장은
    모두 아연 긴장했습니다.
    이것도 어릴 때부터 선천적인 재주가 있었던지 늘 우리편이 이겼는데
    단 한번 땅에 거꾸로 떨어진 것 말고는 모두 이겼습니다.


    잘난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즐거움.
    지금 운동회서도 기마전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서 가는 손자의 모습.
    할아버지도 정말 긴장 하셨을 겁니다.


    글/산울림











































      산사의 고요함을 깨우며...


      글/황금빛노을



      잠을 자다가 거의 영감을 받은 듯한 충격으로
      눈을 떴다..FM에서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너그럽고 조용한 행복함으로 거실 가득 메운다.

      얼른 깨어나 컴퓨터를 열고 어제의 환상 같은 하루를
      필력해 둬야 한다는 무언의 감지를 느낀다.

      어제의 시작은..
      아픈 친구를 보면서 그저 속상하다 는..

      아..참 속상했다.
      친구의 말라비틀어진 손하며 얼굴의 그늘하며
      우리는 그 친구가 맘 담고 있다는 마산의 조그만 선원을 찾았다..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들어가 보니 조용한 산사 같은 분위기..
      시내 한복판에서 들어보는 유난히 뗑그렁거리는 풍경소리가
      흩어진 중생들의 맘을 주워 모은다..

      그 친구..
      땀을 흘리며 가누기 힘든 몸과 맘을 두 손에 모아
      108배로 내 안에 힘든 나를 털어 낸다..

      기특하다..

      선원에서 귀한 녹차 한잔 공양하고 돌아서 나왔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집에 내려주고
      또 한 친구와 아직 해가 내리려면 한참이 남았음에
      하루해가 너무 아까워 다시 차를 돌려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친구의 이모님이 거하고 계신다는 통도사 자락의 성전암으로..

      아~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또 한번의 맘에 소요를 일으킨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산사의 풍경..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살갗을 투시해 들어오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싸늘한 공기의 기류.
      그 느낌..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퍼더버리고 앉아 고운 사람이랑
      공시적 감각을 초월한 그런 맘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행복함으로 나를 꽉 채운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시간에 나의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가..
      아~난 어둠을 감싸고 있는 이런 산에서의 종소리는 드라마에서나
      들음직한...그래서 내 귀를 잠시 의심할 정도로 가슴을 울렸다.

      친구가 저녁 예불 종소리란다.
      엉덩이에 가시 찔린 사람처럼 정신이 확 돌아온다.
      그리움에 엄살 떨고 김빠진 삶이라고 자책하고
      시무룩하게 하루를 대충 때우던 나에게
      어떤 신선함과 숭고함을 경고하는 듯한 저 종소리.

      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 순간 내 맘 얼른 국화꽃 한 다발 말아 쥐고
      달려나가 부처님 전에 예쁘게 놓았다.

      그 어떤 화려함보다 소박한 노란 소국 한 다발을
      맘 다 비운 고운 미소와 함께 살포시 내려놓으며
      멀미나게 향기로운 산사 마당의 천리향을 맘에 살짝 훔쳐왔다

      어둠은 고요함을 붙들고 촘촘히 박힌
      계곡의 물소리를 더 생생하게 울린다..

      맛있는 밥도 배부르게 먹고 소박하고 다정한 이모님이 건네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귀한 차들을 대접받았는데
      혀가 놀라 이 귀한 맛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연신 몇 잔을 마시며
      음미했다.

      중국에서 가져왔다는데..
      웅담에 재워 발효했다는 오룡차와 인삼에 재워 발효했다는 차..
      관음철 녹차..여러 가지 차와 어우러진
      산사의 고요함을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안개의 두터운 몸피 너머
      가물가물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뒤로한 채
      좀 멀게 느껴지는 산 능선을 흐린 눈으로 구별해내며
      조심조심 산을 내려왔다..

      수음하다 들킨 소년처럼
      몽환처럼 느껴지는 어젯밤 나를 깨운 기억들..
      영혼의 배고픔..이 글을 쓰면서
      말간 커피 두 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숨겨둔 애인처럼 은밀한 기억을 여기에 저장한다.

      친구가 다시 건강해지길 바라며..



      음악 김영동/먼길
      김영동/먼길












크로쉐 바늘 쎗트








          글/구름에 달 가듯


          70년대 후반 젊고 철없고 꿈이 많은 때였다.
          나는 어느 연구소에 위촉으로 드나들고 있었고,
          그곳 소장님의 여비서로 일하던 L 과는
          서로 직장인 이상의 호감을 갖고있다 믿고^^ 있었고,
          어찌하여 모처럼 일본에 일주일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상품은 비교적 귀한 편이었고
          또 해외출장도 많이 다니지 못하던 때라
          퇴근길 뻐스 속에서 큰 맘 먹고 L 에게 물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구...
          한참 생각 끝에 L 은 크로쉐 바늘 쎗트 얘기를 했다.
          크로바 상표라 했던가...


          친구 하나가 그걸 갖고 있는데 참 좋다는 얘기며,
          시내에서 구하려해도 참 구하기가 힘든다는 얘기며...
          언제나 천사같이 곱고 예쁘던 L 은
          그 작은 크로바 크로쉐 바늘 쎗트 하나가
          얼마나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 것인가를
          별로 어렵지 않게 내게 확신시켜주었다.


          흠, 그 정도라면...경제적으로 별로 여유가 없었던 내게
          L 의 조그마한 바램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참...세상의 총각놈들은 어찌 이리 모두 눈이 멀었을까?"
          그때 L 은 25, 나보다 여덟살 아래,
          어려서 고아가 되어 홀로된 이모님과 어렵게 살고있었고
          좀처럼 혼사가 이루어지지를 못했다.


          그날부터 나는 퇴근하면 집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크로쉐 얘기를 시작했고 또 아주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길에 바늘 쎗트 하나 사다달라는 주문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이제 됐다.
          나는 이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L 에게
          그녀가 그리도 원하는 크로바 바늘쎗트를 선물할 수 있다.


          하느님 앞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어차피 집사람을 위해 하나 사는데 곁들여 한벌 더 사서
          그리도 그걸 원하는 L 에게 준다하여 뭐 그리 탓할 일일까?
          더구나 나는 L 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의 京都교또는 왜 그리 촌이었던지...
          더구나 중심지의 백화점에서는 취급을 하지 않았고
          시내를 거의 다 뒤져서야 오후 늦게
          크로바 대리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고
          나는 반가움에 무려 여섯 셋트나 쇼핑백에 집어 넣었고
          귀국시 그중 두 셋트는 동행했던 친구의 짐에 슬쩍 넣어 왔다.


          그래서 집사람은 네 셋트만 보았고...
          동행했던 친구는 별 관심 없이, 짐이 잘못 섞였다 하며
          그 소중한 두 셋트를 내 사무실로 보내왔다.
          지금도 그 때 좋아하던 L 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시누들에게 하나씩 돌리던 집사람의 즐거움도 생각난다.


          10 여년전 L 은 아직 혼자였고,
          어느 이혼남 건축설계사와 혼삿말이 오가고 있었고,
          우린 하룻밤을 이야기로(강조^^) 지냈는데
          그때 그 크로쉐 바늘 셋트를 아직 지니고 있었다.



























      딸의 편지를 받아보고....


      두류봉



      자식을 낳아 길러 보아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고,
      내 비록 열살이전에 양친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외롭게 자라오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한번도 잊은 바 없고, 애뜻한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 없다.

      그러던 내 자신이
      우리 부모님의 살고간 일생을 훌쩍 뛰어넘는 나이가 되어
      나름대로 귀하고 중하게 여기던 자식들이 자라서
      모두가 제 갈길을 향하여 부모품을 이리 저리 떠나고 나니
      가슴 저미도록 그 자식들이 그립고 또한 보고 싶다.

      아들을 군대 보낼 때도 외부로 표출 않는 눈물을 흘렸고,
      이번에 딸아이가 방학이라고 내곁에 와 있으면서
      모처럼 교감하며 말없는 가운데 느끼던 부녀의 정을
      떠나보낸 후 새삼스럽게 크고도 비중있는 자식의 자리를 알 것만 같다.

      딸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보고 휴대전화를 만져본다.
      그 아이가 떠난 집은 너무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은 기분이다.

      추석이라고 제사 드리고
      아들과 함께 산정호수를 돌아보고 명성산 기슭을 거닐어 보아도
      딸아이가 보고 싶은 맘과 곁에 없는 아쉬움을 이길 순 없다.

      "아들아! 너도 너의 앞길을 위하여 곧 떠나겠지?"

      우리 딸아이의 편지를 여기에 올려본다.























    이 세상 최고인 우리 아빠에게


    어제 전화를 하여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왈칵 눈물이 났어요~~
    자주 자주 전화하고 싶어도 나는 아침 8시 반∼오후 2시 반까지 수업이 계속 되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면 거긴 새벽3∼4시라서 전화를 못했죠....

    그리곤 홈스테이 집엔 저녁 5시나 6시까지 가야 해서 주무시는 아빠가 깨시면
    안될 것 같아서 일부러 새벽에 전화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죠.

    앞으론 조금씩 짬 내서 짧게 짧게 라도 이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위치에 계시는
    우리 아빠께 자주 전화할게요.

    그런데 아빠!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하는 걸 카드번호하고 그 방법을 어서 알려주세요.
    어제 $10짜리 전화카드를 샀는데, 그 카드 가지고는 30분 정도도 겨우 전화할 수 있어요~~

    참! 이번에 저 새 통장을 하나 다시 만들었어요~~
    아직 까진 $1,500 이상 있으니, 다음 달까지 홈스테이 비용과 생활비는 괜찮을 듯 해요.

    내 은행 계좌번호는 TD CANADA TRUST이고...
    Delolain Avenue 이고요 (이것이 또한 저의 집주소인 Ayala네 집이죠. 782-3331)

    지금 지내고 있는 홈스테이 집은 고양이가 조금 징그러운 것 빼고는 다 좋아요~
    부잣집이라 손님들을 초대해서 만찬도 자주 즐기고......
    매일 바베큐나 치킨 같은 음식들을 주니깐. 입에 안 맞는 음식만 먹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다음 달에도 계속 이 집에 머무르려고 해요.

    낼까지 다음달 홈스테이 비를 지불해야 하고,($700)
    이번 주엔 새 학기 개강 후 우리 과의 친목 캠핑을 가고($200)

    그리고, 다 다음주엔 4일 동안 뉴욕에 가려고 생각 중이에요.
    단체로 가는 거라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돈이 조금 많이 들어 우리 아빠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310)

    유익한 Week Activity에는 참가하려고 노력중인데..조금 비싸네요~~
    어쨌든, 돈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말씀 드릴게요~

    아! 우리 학교는 St. Clair 역에 있고,
    제가 사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역은 Eglinton 이에요~
    집에서는 버스 한번만 타면 갈 수 있고, Eglinton 에서 St. Clair 까지는
    두 정거장 밖에 안 돼서,.,. 학교 가는데 30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아침에 6시면 꼭 기상해서, 샤워하고, 아침 찾아 먹고 학교에 가죠~~
    이제는 이 딸도 다 커서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겨울옷들은 아마 조금 일찍 보내주셔야 할 거예요~
    겨울옷 뿐 아니라, 빨래를 너무 바빠서 마음대로 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이곳 가정에서는 조용한 가운데 개인생활을 만끽하는 분위기라
    밤에 시끄럽게 빨래를 못하니 지금 옷들이 부족할 수 밖예요~

    어쨌든, 날씨가 추워지면....
    다시 필요한 목록을 정해서 다시 편지를 보내 드릴게요.

    그럼,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원래 감기 같은 거 잘 이기니까 걱정 마시고요~
    제발 아빠는 쉬엄쉬엄 일하시고 건강에 유의하셔요*

    그럼. 또 편지 드리고 전화도 할게요!!!
    사랑해요~ 우리 *아빠!

    오빠한테도 안부 좀,,, 오빠한테는 담에 꼭 따로 편지 보낸다고 전해주세요~
    이곳에 와서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 디카로 찍은 사진 첨부합니다...*"*


    2003년 09월 09일 화요일, 아침 06시 21분
    이 세상에서 아빠를 젤 사랑하는 *^* 딸 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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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dzislaw Beksinski





보랏빛 보(褓)


작은큰통



비가 오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비가 오면 감성이 증폭되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지.

비가 오면 세상이 눅눅해지고,
비가 오면 활성이 감소되고,
그래서 기분이 침잠 되지.

시인은 비를 노래하고
주당은 술을 마시지만
그래도 비는 비일 뿐이지.

그래...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간에,
누구든지 멋진 보랏빛 보를 쓰고자 하지.

그 보랏빛 보에 수를 놓지.
치장과 각색으로 자가발전(發電)이 계속되면
마침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지.

이상한 나라로 가면
멋진 탈과 멋진 보를 만나게되고
잘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만날 수 있지.

그런데 조심해야돼.
그 아름다운 보를 절대로 열어보면 안되지.
자칫하면 공을 들인 그 보가 물거품이 돼버리거든.

우리가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유전자에 그렇게 프로그램이 되어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이구...
우리가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일까?

아닐지도 몰라.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우리와 유전자의 존속에 도움이 될까?

누가 그러더군.
유전자가 우리를 만들고
유전자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우리 두뇌가 너무 똑똑해져서
이따금은 반항을 할 수 있다더군.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보랏빛 보를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안의 괴물을 보고 경악하기도 하지만,
보를 들추고 경악하는 나는 누구일까.

보랏빛 보일까?
괴물일까?








Re:보랏빛 보(褓),, 놀라운 진실




느티나무



푸른 들과 산 속에는 생물들의 쟁탈전

느릿느릿 기어가는 굼벵이를 개미들이 산채로 물어뜯고,

사마귀는 작은 곤충들을 노리고 새들은 사마귀를 잡아먹고,

새는 매들이 노린다.



농부들이 들판에서 일하는 모습, 참 아름답다.

자연의 한 모퉁이에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저 사람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이다.

젊은 시절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다 장가도 들지 못한 채,

마흔을 넘겼다.

일을 너무해서 허리가 굽어 걸을 때는 땅을 봐야한다.

늘 빚으로 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초라한 집마저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아들은 무너지는 억장을 주체할 수 없어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자포자기이다.




도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몸담고 있는 직장의 윗사람들이나 일에 대해서 밤이면 한 잔 술기운을 빌려 욕을 하고는

아침에 눈뜨면 다시 그 거대한 조직으로 들어가 사근사근 열심히 일한다.

어젯밤 내가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비켜서서 바라보면 열심히 움직이는 이 사회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삶의 단면들의 밑바닥은 차라리 비극이다.




사람들은 보랏빛 보를, 때로는 색색의 보로 삶의 깊은 곳을 덮고 있다.

몇 겹인지 알 길이 없는 두터운 보, 이것은 가식이다.

세상은 '보랏빛 보' 가식으로 덮은 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가식을 무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어낸다면, 즉시 사회에서 격리됨을 느낀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며 스스로 사회와 함께 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혼자의 방황을 이어가게 된다. 자신의 의견이 인정받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으로부터

우매하다는 말을 들어도 반론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보랏빛 가식의 보를 들춰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사고의 격리이다.

거기에는 서로서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덮고 있던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고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본성을 보는 것이다. 초라하고 여태껏 생각해왔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정립한다면,

이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리라.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삶들은 자신의 본성을 들춰보면, 회의와 허탈에 빠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을 덮고 있던 '가식의 보랏빛 보'의 색깔이

너무나 찬란한 행복으로 기워져 있기 때문에

그 행복에의 유혹을 절대로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며,

주위의 사람들 즉 사회로부터 쏟아질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다.

가식의 행복과 비난을 감수하며 혼자의 외로운 삶, 사무치는 고독을

참아 낼 수 있을 만큼 성숙된 지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지적능력이 특출하여 일찍이

이 자연과 생물들의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천재들의 삶이 우리 범인들에게는 비극으로 비춰지는 까닭이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내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엽총을 입에 넣었다.

이상은 총독부 토목기사의 자리를 그만 두었다.

니체는 세상을 향해서 발광을 해 버렸다.

까뮈는 뫼르소를 내세워 살인을 하고도 눈도 꿈쩍 않더니

자동차 사고로 위장하여 가버렸다.

로렌스는 사막을 돌며 자신을 채찍질하더니 오토바이의 속도로
타고 가버렸다.

베토벤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슬퍼한 슈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파먹는 병고를 내버려 둔 채, 작곡에만

몰두하다 건강을 헤쳐 죽었다.




천재들의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이다.

그러나 그 천재들은 자신의 삶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여긴다.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의 괄호 밖으로 자신을 기꺼이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덮고 있는 휘황한 보를 열어볼 능력도 없고,

열어볼 엄두를 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저 색색이 수놓인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그 삶이 허망하다는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이 덮칠지라도,

세상과 함께 살아야만 숨을 쉰다는 것을 느끼는 한 우리는

그 보랏빛 보를 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망으로 살아온 삶의 허구를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산이나 산기슭의 밭 가운데 큰 혹을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보랏빛 보'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글이며,

오늘 밤 나는 내 마음에 그 보를 한 장 더 추가한다.

스스로 더 어리석어지기를 바라면서...










Parlez Moi d'Amour (샹송) - Lucienne Boyer



































      친구야 !


      유정천리


      며칠 전 근무하는 날 친구를 만났다
      친구 !

      13년만에 만난 친구
      당시에 전세 300 변두리 헛간에 살던 시절
      헛간방

      반은 연탄보일러 반은 세면 바닥 그때 딸 늦게 난 딸 1살 짜리
      그해 겨울 추운 날 영하 20도 방에서 얼음이 얼었다.
      아내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새끼 얼어 죽이겠다고..
      아이고 늦게 난 내 새끼 ! 눈물이 찡했다.


    그 즉시로 농협에서 퇴직금 담보로 융자 얻어서 시내로 이사왔다.
    2000만원 짜리 빌라 전세
    결혼생활후 처음으로 좋은 집 이사와서 살았다.
    돈아끼려고 변두리 허름한 방만 찾다가 직장생활 13년만에...

    그때 그 어렵게 살던 시절
    그 전세 얻을 돈으로 시내 땅을 사고 또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 땅에 1999년도에 원룸을 손수 사람 사다가 지어 세를 받으면서
    생활 형편이 피었다.

    각설하고 그때 어렵던 시절 만났던 사람
    옆집에 세 살던 사람
    그 동갑내기 친구 ?
    어머니 홀어머니 과부 어머니
    근처 조양 회사에서 운전하던 사람
    나이는 같으나 나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친절하고 양심적인 사람.

    퇴근하다 보면 그 어머니가 마늘을 깐다.
    마늘 까는 일 부업 중국에서 수입한 마늘을 받아다가
    마늘을 까면 하루 5천 원 번다고 한다. 마늘이 얼마나 독한지 그 손이 시꺼멓다.
    그래도 열심히 하신다... 그 당시 60세

    나도 우리 어머니 생각나니 쉬는 날 놀러갔다.
    그냥은 못 가고 음료수를 근처 가게에서 사 가지고
    "잡수시고 하세요." 하면서
    "참으로 열심히 사시네요." 하면 그렇게 좋아 하셨다

    그 아들 동갑내기 그 부인도 참으로 착했다.
    "어머니가 하지 말래도 하세요."
    용돈 드린다고 해도
    "너희들이 번 돈 안쓰러워 못쓴다." 하시면서 하신다.

    그 어머니가 환갑을 하셨다.
    이웃집이니 안 갈 수 있나.
    돈 봉투 넣어서 갔다.
    술을 먹는데 그 아들들 딸들이 그리 좋아할 수가 없다.
    "많이 드세요." 하며
    먹고 가려고 하니 "더 놀다 가세요." 하며 붙잡는다.

    같이 먹던 일행, 근처 회사 사장 과장
    동갑내기 운전사 상관들 ?
    내가 일갈했다, 한마디했다,
    그 어머니 마늘 까는 어머니 도와드리자 ..? ..

    부좃돈 외 내 돈 1만원 먼저 냈다,
    그리고 당신들도 내라 해서 각자 1ㅡ 5만원 10사람 00만원
    더 모아서 그 어머니에게 드렸다.
    "마늘 까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세요." 하며 그리고 나도 이사를 왔다

    며칠 전 근무 중에 사무실 앞 지나가는 사람 !
    어디서 많이 봤는데....아하 그 어머니의 아들이다 .
    만나 반가워 근처 약국에서 박카스를 나눠 먹는데 그 친구가 말한다.
    내 근무 끝나는 시간 알려 달라고 하면서
    기어코 술 한 잔 대접한다고 하면서 집에 갔다가 밤 9시에 나왔다.

    그 친구가 말한다.
    그 동안 변한 이야기, 어렵게 세 살던 사람
    그 친구가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지금도 어머니 정정 하시다고 하고 지금은 73세이신 데 산에 가는 취미로 사신 단다.
    아마 혼자 일하셔서 자식 모르게 모아 놓은 돈이 아마 2천은 될 거라며 자랑이고,

    자신도 이제는 시내버스를 운전한다면 자랑한다.
    좋은 회사 왔다고, 경기 고속 ㅇㅇ ...
    사장이 성공시대에 나온 분이라며 부모모시는 사람은 부모 앞으로
    통장을 해서 5만원씩 더 넣어준다고 한다

    한 달에 130 가져온다며 자랑이고 1년에 퇴직금 전별금 포함 700씩 늘어난다며 자랑이고.
    처갓집 근처 논 10년 전 1000평 한 평에 1만 2천 원 사놓은 게 있는데
    논 옆으로 길이 뚫리면서 지금 평당 15만원 간다고 자랑이다

    집도 두 채 장만했다 하고, 아내가 공장 오래 다녀 돈 100 이상 벌어
    두 부부가 월 250정도 번다고 자랑이고, 나에 전체수입 보다 3분의 1밖에
    못 버는데도 참으로 긍지가 대단하다.
    긍정적인 사람 !

    딸이 공부를 잘해 반에서 2등 고 3인데 근처 명문학교 다닌다며
    ㅇㅇ 교대 시험 봐서 선생님 할거라며 자랑이고,
    열심히 살아서 빚은 없다며 자랑이고,
    앞으로 돈 모은 것 가지고 아내에게 식당 하라고 했다며 자랑이다.

    그 친구가 말한다.
    친구 하자고 나더러 의리가 있다고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때 어머니 회갑 날 친구가 놀던 장면 비디오 찍어놨는데
    지금도 그걸 보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머니 돈 드리는 것 일행과 노래하는 것 다 찍혔다 한다

    그 비디오 !
    13 년 전의 내 모습 !
    그걸 보러 간다며 또 약속했다.
    또 만나자고
    님의 어머니도 뵈올 겸...










      태양아 빛나라 !



      유정천리


      어제 아침 태양이 보인다 햇살이 비친다.
      얼마 만에 햇살이냐.

      요즘 시골 농민들 너무 울상이다.
      벼농사 고추농사 절단 난 사람들 많다.
      그들이 어떻게 빚 갚으려고...

      농사가 잘 되도 빚 갚기가 어려운데.. 자식새끼 학원비 빚도 상당하다
      그래봤자 취직도 안 되는데, 고급인력(?)이 너무 많다.
      쓸데없는 고급 인력..

      특히 아랫녘은 논에 벼를 갈아엎는 사람들도 있다.
      비가 매일 오다시피 하니 벼가 이삭이 나올 때 수정을 못한다.
      혹명나방으로 벼 잎이 말라 쭉정이 벼다.
      한숨으로 지샌다. 거기다 농산물 훔쳐 가는 놈까지 생긴다.

      하우스 안에 모셔둔 고추 등 무차별로 훔쳐간다.
      먹고살게 없어 훔쳐간다면 그나마 다행인가..?

      나야 뭐 그래도 월급쟁이 하면서 부업으로 농사 지니까 어쨌든 살지만
      많은 농민들 정말 어렵다. 곧 닥칠 수입개방도 문제.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 눈이 무서워진다. 인심이 사나워 진다.
      그런데다가 정치인들 돈 먹는 소리 대기업 노조들 데모하는 소리
      화물연대 파업하는 소리가 서민들은 울린다.

      앞집 사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
      요즘 일이 없다며 매일 논다고 울상이다.
      그러면서 욕한다.
      그 개새끼들 데모 때문에 우리까지 일거리 없다고
      같은 노동자가 노동자를 욕하는 세상.

      또 몇 놈이 나를 슬프게 한다.
      위조 카드 사용하다 걸린 놈, 윤락 업소에서 돈 받아먹은 놈
      그놈들이 다 경찰관이다,

      거기다 어느 신부 예비 신부의 현금 수송차 강도 미수
      젊은 부인의 새마을 금고 강도 소리
      이제는 과거의 어여쁜 처녀들이 아니다.

      이게 다 무엇인가.
      다 빚진 자들의 짓이다.
      어느 직업이든 빚진 자들은 범죄의 앞잡이가 된다.
      300 만 신용불량자들 갈곳이 없다.
      이들이 새 삶을 이루게 정치권이 움직여야 한다.

      일자리를 창출해야한다.
      오 ! 태양아 빛나라 !
      그나마 농사라도 잘되게
      먹거리나마 자급하게..,















































    졸업여행



    아들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간다.
    미국은 대학을 가게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이다.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하니 방학 때나 오게되고, 그렇게 대학 마치면 취직을 한다.


    그나마 가까운 도시에 직장을 잡으면 가끔이나마 볼 수 있지만
    타 주에 가게되면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집에 오게되니
    온전히 부모 밑에 있는 건 고교까지다.


    떠나 보내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2년 전 큰애가 졸업하고 대학갈 때도 둘이 여행을 했는데
    딸도 나도 무척 즐거웠고 좋은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동부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며 미국의 역사를 보기로 하고
    New Jersey, New York, Conneticut, Roade Island, Massachusette
    이렇게 5주를 거쳐 보스턴에 도착했다.


    영국군과 맞서 싸운 미국독립의 역사가 배어있는 Boston.
    지금은 하버드나 MIT 등 유명한 대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청교도들이
    미국에 뿌리내린 전통의 도시다.


    300년 남짓한 역사를 간직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많은 관광객으로 길이 좁아도 식민지시절 지어진 건물은 허물지 않고
    일층만 개조해 상점으로 쓰고 낡고 작은 집들도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이 대단하다.


    May Flower호가 1670년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Plymouth를 둘러보고
    배를 타고 Cape cod로 건너갔다.
    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니 무수한 생각이 오간다


    처음 그 애를 낳았을 때 "아들이에요" 하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큰댁에 아들이 없어 종손이므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응아 닦아달라던 어린애가 어느덧 저리 자라
    듬직한 어깨를 가진 청년으로 변했는지....


    초등 학교 입학식 때 엄마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던 큰 눈망울...
    아빠한테 자전거 배우던 날 처음 혼자 타게되자 볼이 발개져 들어와
    기어이 나를 끌고 운동장에서 자랑해 보이던 개구쟁이 내 아들...
    잦은 병치레로 날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던 아이.....
    우수한 누나에게 가려 항상 야단을 더 맞던 불쌍한 아들...


    이것저것 잔소리만 하고 사랑한다는 말 해본지가 언젠지 ...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니느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 자신 적응하기 바빠 무심한 엄마였다는 자책...
    사내아이라 사춘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서로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나보다 흠씬 커버려 언제부터인가 품안에 꼭 안아주지 못했는데
    벌써 내 곁을 떠나는구나.....


    가만히 아들 곁에 선다.
    해질녘의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둘 다 말이 없다.
    너무 아름다워 비장함까지 든다 .
    아들이 팔을 내 어깨에 두른다.


    매번 "구여운 우리엄마" 하며 놀리면
    '임마, 그래도 넌 내 배에서 나왔어" 하고 엉덩이를 치곤 했는데,
    해가 서서히 바다로 들어가는걸 보며 아들에게 말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이 안가지? 너랑 나도 그래.
    네가 바다이고 하늘일 수도 있고 내가 하늘이고 바다일 때도 있고....
    가족 떨어져 어디 가든 힘이 들 때면 지금 우리 보고있는 이 바다 생각해
    망망한 끝이 없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저녁노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조그맣게 여겨질 거야 아주 하찮은 거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과 깜깜해진 바다를 한참 더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도 다짐을 한다.
    아들이 떠난다고 슬퍼하지 말자.
    강보에 싸인 애기를 저만큼 키워 사회로 내보내는 내 책임을
    다했으니
    뿌듯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내 삶을 생각해 보자.
    그 애만 졸업한 게 아니라 나도 양육에서 졸업한 거다.
    이제 엄마의 손길은 필요 없으니 나도 애들로부터 독립해야 할 때다 .


    졸업여행
    여행이 끝나 어디론가 입학해야 하는데 나는 어느 학교에 입학해야 할까?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아들애를 기숙사에 넣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를 붙들고 있는 화두이다.



    글/필라







..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글/사라




지슬라브 백신스키/ Zdzislaw Beksinski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세상의 온갖 직업과 모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종교의 신앙마저도
      행복의 열쇠를 찾아 나서는 행위이자 몸부림이다.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가꾸는 것이다..
      규격화 된 행복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을 느끼는 체감온도는 사람마다 또는 지역과 풍습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개가 일의 성취감, 승리의 만족감, 사랑의 쾌감과 설렘 등에서
      행복의 체감온도가 상승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만족감과 포만감도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마치 행복을 만나는 것이 가파른 언덕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면 불행을 만나는 것은 언덕 위에서 내리막길로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속도와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른 모래를 가득 쥐고 있는
      포만감이 행복이라면 마른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빈주먹뿐인 허탈감이
      불행인 것이다.


      행복이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와 정진에 의해 쟁취하듯 얻어지는 것이라면
      불행은 생활의 틈 사이와 세월의 시간사이로 솟아 나오는 잡초와 같아
      잠시만 방일하거나 방심하면 무성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은 언제나 곤충의 더듬이처럼 무척추 동물의 촉수처럼 끊임없이
      행복거리를 찾아 분주하다.


      짐승들의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본능처럼 사람의 온갖 행위는 바로 이 행복을
      위한 몸부림이자 치열한 싸움인 것이다. 학교에는 시험지옥이지만 다녀야 하고
      직장은 스트레스의 창고지만 버릴 수 없는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다.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얼 모르고 덤벙대며 하는 게 결혼이지만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그 배경은
      혼자의 힘겨움보다는 둘이서 뜻과 힘을 모아 행복의 집을 설계하고 짓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이 지나고 7년쯤에 접어들면 뜻과 힘이 모아지기는커녕
      삐걱대며 불거져 나오는 생활의 파편에 서로 상처만 안고 으르렁대기 일쑤이다.
      연애와 약혼시절의 애정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생활의 뼈만 생선의 가시처럼
      앙상히 남아 불편한 관계로 서로 등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으르렁거리고 등 돌리며 불편한 이유도 철저히 계산된 행복에 대한
      손익계산서 때문이다. ' 내가 저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저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하며 과대망상을 하는 것도 보다 나은 행복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에 있어 목마름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이혼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목마름마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온몸의 나사가 모조리 풀린,
      포기하고 체념하고 사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이 포기하고 체념하는 무관심은
      숱한 눈물과 한숨 속에서 체득한, 자기만이라도 더 이상 망가지지 않기 위한
      생명보전적 욕구 때문이다. 이 생명보전적 욕구는 언젠가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을 거라는 가냘프나마 행복해질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혼하는 길이 더욱 불행해지고 처참해지는
      선택이라면 누가 주위에서 이혼을 권해도 단연코 마다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숱하게 고민하고 번민의 나날을 보내다가
      최후의 선택인 이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결혼은 마치 관습처럼 처녀 총각들이 의무이행이나 하는 것처럼 뭘 모르고
      덤벙대며 하는 것이지만 이혼은 결코 결혼처럼 가벼울 수 는 없는 것이다.
      결혼과 이혼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전자는 축하객이 많이 몰려들지만
      후자는 냉소와 손가락질과 입방아질이 몰려든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결혼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면 이혼에는 커다란 포기, 크나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늦을수록 좋지만 이혼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에도 후회나 아픔이 따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결혼은 신중할수록 좋고 이혼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장거리버스나
      기차를 탔을 경우에도 그날의 옆 좌석 사람에 따라 여행길이 즐거울 수도 짜증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루 이틀도 아닌 일생을 마주보며 잠자리를 함께 해야 하는 경우라면
      선택의 신중함이 배가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혼만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얼마큼 합께 살아가다 보면 발톱과 손톱은 물론이고 오장육부의 움직임까지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


      참고 또 참으며 삭혀 보지만 결국 둘의 만남이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보다 더 큰
      고통이라면 망설임 없이 갈라서야 되는 것이다. 빠를수록 좋다는 이유는 간단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부서진 수레보다는 젊음과 건강이 남아 있을 때가 홀로 서기에도
      재출발에도 든든한 활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라한 더블보다는 화려한 싱글 쪽이 어느 면을 보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화려한 싱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정적인 능력이 으뜸이 될 것이고 두 번째로는 예술이든
      학문이든 노동이든 생활의 활력과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그에 따른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은 곧 행복과 연결되는 고리이자 다리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마저 잃어버린 싱글은 차라리 초라한 더블 쪽에서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뒤이어 그럴 바엔 해보고 후회하겠다며 모두들 결혼 쪽으로 기울고 있는
      세상이다. 결혼생활은 끊임없는 게임의 연속이다. 알량한 자존심대결, 치사한 먹거리
      투정, 습관과 성격이 다른데서 온 이질감, 사소한 이해관계로 벌어지는 틈, 드러나는
      발톱, 쪼그라드는 인격, 거기에 따르는 실망과 배신감, 이쯤 되고 보면 상대방의
      몸에서는 단내가 나기 마련이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은커녕 의욕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보는 것만도 역겹고 힘겹다. 상대방만 미운 게 아니라 그의 부모도 그의 형제자매와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에 각자가 현명하게 주머니를 따로 차는
      경우가 허다하지만....물론 최악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리라 본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결혼생활에 있어 분명한 진리는 죽는 날까지
      해로하는 금실 좋은 부부일지라도 남편은 남자였고 아내는 여자였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아내를 묶어둘 수는 있을지 모르나 여자의 본성은 잡아둘 수 없는 것이며,
      아내는 남편을 묶어둘 수는 있을지 모르나 남자의 본성은 잡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하거나 이혼하거나 아니면 독신으로 살거나 궁극적인 삶의 지향목표는 보다 나은
      행복의 추구에 있다. 이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는 삶에 대한 집착 그 자체이며
      생명의 뿌리와도 같은 원초적 본능인 것이다. 종교와 신앙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도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자는 데에서 신앙이 발돋움하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신앙의 새싹은 발아되지 않는다. 불안하고 괴로운 슬픔과 좌절
      속에서 모든 신앙은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르므로 신앙인 이라면 누구나
      안락한 생활, 편안한 마음, 평화로운 나날을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를 전면 부인하고 괴롭고 슬픈 형벌의 삶을 살지라도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또는 갖은 고행(苦行)을 몸으로 실천하며 부처가 되겠다고 벼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나름대로 그 행위 자체서 위안과 희망, 또는 행복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심지어는 자살하고자 결심하는 사람, 이미 자살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으로서는
      그 방법만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죽어있는 시신을 발견하고 가족이나 동료들, 아니면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추구의 명예부분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자살은 단순한 포기가 아닌 또 하나의 앙갚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결심하고 결행하는 사람이 복잡하게 앙갚음에 대한 반사여론까지 계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지 모르나 자살하는 자는 대개가 유서를 남기거나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그것을 사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결심하고 결행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 자살자로서는 그 방법만이
      괴로움을 잊을 수 있고 편안히 잠들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에 이르게 하는 행위가 곧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온갖 행위는 곧 행복의 열쇠를 찾아 헤매는
      몸부림이자 게임의 승리를 위한 노력인 것이다. 생존경쟁은 행복을 위한 싸움이며
      행복의 체감온도에서 온갖 희열과 번민이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행복의 만족도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변화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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