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을 운동회 시즌인가 봐요.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북소리 박수소리 마이크소리 함성이 들립니다.
열린마당에 출몰하시는 분들은 거의가 다 운동회 추억이 있을 텐데 거의가 도회지나 아니면 그 근처에 살던 분들 보단 나처럼 산간 오지의 초동학교의 운동회 추억처럼 신나는 게 없을 듯 싶은데요
어릴 때 운동회는 환상이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전날부터 가슴이 퉁탕대던 시절인데요.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온 동네 면 전체가 이날은 축제의 마당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이라도 이날은 밤을 삶아 오는 건 기본이었고요. 잘하면 오징어도 먹어 볼 수 있고 김밥도 먹을 수 있는 날입니다. 나는 늘 할머니께서 자반고등어를 구어서 김밥에다 가져 오셨으니 당시 김밥이라면 살만한 집안입니다. 우리 집은 30여 호 집이 있는 마을에서 부자였으니 당연했지요.
소풍날 할아버지는 언제나 하얀 본부석 천막에 교장선생님 면장 지서장 등이 앉는 일등 석 뒷줄에 늘 앉아 있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가 거기 앉아 계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손자인 내 덕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했거든요.
필경 조부께서는 내가 저 앞에 서있는 아무개의 할애비다 하시면서 천막 고급자석으로 오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운동회에서는 늘 선서를 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선서는 내가 했습니다. 목소리 크지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선생님 말 잘 듣지.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그렇겠지만 하여간에 6년간 운동회 선서와 반장을 도맡아 했으니 조부께서 당연히 자랑을 하셨을 건 뻔합니다.
내가 할아버지 연세가 된 지금 만일 내 손자가 예전에 나처럼 앞에서 호령하고 깃발 들고 아이들 데리고 다니고 상품 줄 때 선생님 심부름하고 아이들 운동장으로 들고나는걸 모두 데리고 가고 나오고 하는걸 보았다면 나도 본부석에서 큰소리를 치면서 앉아 있고도 남습니다.
조부의 즐거움을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네요. 혹여 손자가 있으신 분들은 공감을 하실텐데요.
요즘은 손자가 있다 해봐야 다 핵가족이라 아들들이 데리고 살고 있고 며느리 눈치보랴 지금의 노인들은 즐거워 할 틈도 없을 테지만 당시의 나의 조부는 엄청 즐거워 하셨습니다. 경춘선 철도를 놓을 때 철로목을 날라주고 받은 돈으로 사들인 전답. 자수성가를 해서 30여 호 되는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들었으니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는 왕이셨습니다.
운동회에서 당시는 기마전을 잘 시켰습니다.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국주의가 남아서인지 남자애들은 단체 기마전을 했는데 이것이 남자들에겐 더 없는 흥미였습니다. 기마전 아시죠 ? 앞에 한 애가 서고 뒤에 둘이 어깨를 집고 한 명이 올라타서 상대방의 모자를 뺐거나 하는 게임. 함성을 질러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게임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국어 책에는 화랑 관창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들어가 목이 잘려 와서 이걸 본 신라 병사들이 계백군을 물리 쳤다 하는 게 있었는데요. 물론 일제가 물러간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충성심을 일깨우는 것일텐데 이것을 보고 나도 화랑 관창이 되겠단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 기마전시합만 있다 하면 학교 운동장이 조용해 졌고 구경하는 학부모들은 거의 일어나서 응원을 하던 참이라 선수들은 거의 결사행진이었지요. 사고를 우려했음인지 선생님들이 총 출동되어 모자를 뺐기고 내리지 않는 팀에는 가차없이 끌어내리곤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깃발을 든 팀의 마지막 모자를 뺏어야 이기는 게임. 함성을 질러 대면서 적진으로 쳐들어갈 때면 운동회장은 모두 아연 긴장했습니다. 이것도 어릴 때부터 선천적인 재주가 있었던지 늘 우리편이 이겼는데 단 한번 땅에 거꾸로 떨어진 것 말고는 모두 이겼습니다.
잘난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즐거움. 지금 운동회서도 기마전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서 가는 손자의 모습. 할아버지도 정말 긴장 하셨을 겁니다.
잠을 자다가 거의 영감을 받은 듯한 충격으로 눈을 떴다..FM에서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너그럽고 조용한 행복함으로 거실 가득 메운다.
얼른 깨어나 컴퓨터를 열고 어제의 환상 같은 하루를 필력해 둬야 한다는 무언의 감지를 느낀다.
어제의 시작은.. 아픈 친구를 보면서 그저 속상하다 는..
아..참 속상했다. 친구의 말라비틀어진 손하며 얼굴의 그늘하며 우리는 그 친구가 맘 담고 있다는 마산의 조그만 선원을 찾았다..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들어가 보니 조용한 산사 같은 분위기.. 시내 한복판에서 들어보는 유난히 뗑그렁거리는 풍경소리가 흩어진 중생들의 맘을 주워 모은다..
그 친구.. 땀을 흘리며 가누기 힘든 몸과 맘을 두 손에 모아 108배로 내 안에 힘든 나를 털어 낸다..
기특하다..
선원에서 귀한 녹차 한잔 공양하고 돌아서 나왔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집에 내려주고 또 한 친구와 아직 해가 내리려면 한참이 남았음에 하루해가 너무 아까워 다시 차를 돌려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친구의 이모님이 거하고 계신다는 통도사 자락의 성전암으로..
아~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또 한번의 맘에 소요를 일으킨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산사의 풍경..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살갗을 투시해 들어오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싸늘한 공기의 기류. 그 느낌..
여기에 내 맘 내려놓고 퍼더버리고 앉아 고운 사람이랑 공시적 감각을 초월한 그런 맘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행복함으로 나를 꽉 채운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시간에 나의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가.. 아~난 어둠을 감싸고 있는 이런 산에서의 종소리는 드라마에서나 들음직한...그래서 내 귀를 잠시 의심할 정도로 가슴을 울렸다.
친구가 저녁 예불 종소리란다. 엉덩이에 가시 찔린 사람처럼 정신이 확 돌아온다. 그리움에 엄살 떨고 김빠진 삶이라고 자책하고 시무룩하게 하루를 대충 때우던 나에게 어떤 신선함과 숭고함을 경고하는 듯한 저 종소리.
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 순간 내 맘 얼른 국화꽃 한 다발 말아 쥐고 달려나가 부처님 전에 예쁘게 놓았다.
그 어떤 화려함보다 소박한 노란 소국 한 다발을 맘 다 비운 고운 미소와 함께 살포시 내려놓으며 멀미나게 향기로운 산사 마당의 천리향을 맘에 살짝 훔쳐왔다
어둠은 고요함을 붙들고 촘촘히 박힌 계곡의 물소리를 더 생생하게 울린다..
맛있는 밥도 배부르게 먹고 소박하고 다정한 이모님이 건네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귀한 차들을 대접받았는데 혀가 놀라 이 귀한 맛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연신 몇 잔을 마시며 음미했다.
중국에서 가져왔다는데.. 웅담에 재워 발효했다는 오룡차와 인삼에 재워 발효했다는 차.. 관음철 녹차..여러 가지 차와 어우러진 산사의 고요함을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안개의 두터운 몸피 너머 가물가물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뒤로한 채 좀 멀게 느껴지는 산 능선을 흐린 눈으로 구별해내며 조심조심 산을 내려왔다..
수음하다 들킨 소년처럼 몽환처럼 느껴지는 어젯밤 나를 깨운 기억들.. 영혼의 배고픔..이 글을 쓰면서 말간 커피 두 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숨겨둔 애인처럼 은밀한 기억을 여기에 저장한다.
70년대 후반 젊고 철없고 꿈이 많은 때였다. 나는 어느 연구소에 위촉으로 드나들고 있었고, 그곳 소장님의 여비서로 일하던 L 과는 서로 직장인 이상의 호감을 갖고있다 믿고^^ 있었고, 어찌하여 모처럼 일본에 일주일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상품은 비교적 귀한 편이었고 또 해외출장도 많이 다니지 못하던 때라 퇴근길 뻐스 속에서 큰 맘 먹고 L 에게 물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구... 한참 생각 끝에 L 은 크로쉐 바늘 쎗트 얘기를 했다. 크로바 상표라 했던가...
친구 하나가 그걸 갖고 있는데 참 좋다는 얘기며, 시내에서 구하려해도 참 구하기가 힘든다는 얘기며... 언제나 천사같이 곱고 예쁘던 L 은 그 작은 크로바 크로쉐 바늘 쎗트 하나가 얼마나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 것인가를 별로 어렵지 않게 내게 확신시켜주었다.
흠, 그 정도라면...경제적으로 별로 여유가 없었던 내게 L 의 조그마한 바램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참...세상의 총각놈들은 어찌 이리 모두 눈이 멀었을까?" 그때 L 은 25, 나보다 여덟살 아래, 어려서 고아가 되어 홀로된 이모님과 어렵게 살고있었고 좀처럼 혼사가 이루어지지를 못했다.
그날부터 나는 퇴근하면 집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크로쉐 얘기를 시작했고 또 아주 자연스럽게 이번 여행길에 바늘 쎗트 하나 사다달라는 주문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이제 됐다. 나는 이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L 에게 그녀가 그리도 원하는 크로바 바늘쎗트를 선물할 수 있다.
하느님 앞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어차피 집사람을 위해 하나 사는데 곁들여 한벌 더 사서 그리도 그걸 원하는 L 에게 준다하여 뭐 그리 탓할 일일까? 더구나 나는 L 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의 京都교또는 왜 그리 촌이었던지... 더구나 중심지의 백화점에서는 취급을 하지 않았고 시내를 거의 다 뒤져서야 오후 늦게 크로바 대리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고 나는 반가움에 무려 여섯 셋트나 쇼핑백에 집어 넣었고 귀국시 그중 두 셋트는 동행했던 친구의 짐에 슬쩍 넣어 왔다.
그래서 집사람은 네 셋트만 보았고... 동행했던 친구는 별 관심 없이, 짐이 잘못 섞였다 하며 그 소중한 두 셋트를 내 사무실로 보내왔다. 지금도 그 때 좋아하던 L 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시누들에게 하나씩 돌리던 집사람의 즐거움도 생각난다.
10 여년전 L 은 아직 혼자였고, 어느 이혼남 건축설계사와 혼삿말이 오가고 있었고, 우린 하룻밤을 이야기로(강조^^) 지냈는데 그때 그 크로쉐 바늘 셋트를 아직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