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안녕*이라는 국산 영화. 김진규, 엄앵란, 조미령... 어린 첩과 서방님 시앗을 본 아내의 질투.. 오빠처럼, 아빠처럼, 애인처럼 서방님을 사랑한 어린 첩.. "아빠 안녕"하고 떠나는 어린 아내며 애인이며 첩인 여인... 극장 안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하였지. 나 역시 여주인공 엄앵란이 가엾어 눈물을 찔끔거렸고.
그런데 내게는 말일세. 눈물을 찔끔거리며 진지하고도 슬프게 그 영화를 감상하였으면서도 그 영화를 유치하다고 경멸하고자 똥폼 잡는 이중사고가 있었으니. 아니, 나의 진실한 감정모체가 그렇다기보다는 그것은 일종의 위선이었음이 정확한 표현일걸세.
온전한 사고의 평등을 이루려면 지금까지 요원한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그 시절은 특히. 대중문화와 순수문화..그대의 찬손과 동백아가씨 야담과 실화와 현대문학.. 구두와 찌까다비..포마드머리와 상고머리....... 위선적 똥폼 잡기가 풍미하던 시대.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표지가 보이게 끼고 다니던 대학생의 머릿속에는 철학적 사유 한 조각 있었을까. 누런 서류봉투 끼고 다니면 이른바 인텔리들은. 식모가 감동하는 영화와 대학생이 감동하는 영화는 달라야 한다는 그 위선적인 사고.
정진우 감독의 ‘초우’의 주인공들의 역할이 자연스레 공감되어 히트하였던 그때. 어쩌면 나 역시 허영과 위선의 시대관념에 희생된 피해자였을는지. 여보게들, 확실히 지금보다는 그런 이분법적인 통념이 지배하였던 분위기였음을 자네는 전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섬유공장 근로자인 소녀가 밤낮 없이 혹사당하다가 모처럼의 황금 같은 휴일을 기다리고 기다려 만나보는 신성일에 대한 선망, 그 열정의 치열함과 이미자의 노래를 부르며 인생과 사랑의 오의를 느끼는 그 고양된 감정의 진지함을 우리는 짐짓 똥폼으로 깔아뭉개지 않았던가 말일세. 저급문화의 유치함으로서.
지사적인, 지식인적인, 문화인적인, 적어도 저급문화가 아닌 그런 종류의 것들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심각한 착각. 정말 꼴같잖은 엄숙주의. 표피로서만 주름잡는 거드름......똥폼.
여보게, 인생의 오의란 겪어야만 깨닫는 그런 것이런가. 무슨 교향곡에 심취한 척, 유행가 따위는 능멸하는 듯한 똥폼을 잡는 어떤 녀석은 막상 실연을 해야만 배호, 이미자, 심수봉의 그 절절한 가락이 가슴 깊이 사무쳐 와 닿는 그런 것이런가.
나는 부끄럽고 부끄럽네. 한참의 세월이 지나 내가 철이 좀 더 들었을 때에야 나는 인생에는 유치한 구석이 없다 는걸 깨달았네. 아아, 진실로 어느 필부필부의 인생에 있어서도 추호라도 유치함이란 없다네.
그러므로 나는 인구에 회자되는 영화평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짓거리야말로 참으로 부질없는 영화감상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네.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에 감동한다는 것은 제 멋에 겨운 매우 독창적인 행위일세. 나름대로의 정서와 감수성과 역정과 경험과 환경과 느낌으로 영화를 즐기면 되는 것이지, 무슨 얼어죽을 누구나 보편적으로 좋아해야 할 영화가 있단 말인가. 성실하고 진지하게 제작된 영화라면 제 멋에 겨워 보는 게 바로 영화라는 얘길세. 요즘은 하도 시각디자인과 카피가 화려하여 선택의 고민이 따르겠지만.
데자뷔라고 하나? 기시감이라고 번역되는 어휘 말일세.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경우를 때로 경험한다네.어디서 본듯한, 내 심층심리 속에 숨어있던 어떤 정황이, 분위기가, 풍경이,대사가 있는 화면.. 또 늘어놓는 영화들.
*비운* 벤센트 미넬리 감독. 글렌 포드, 잉글릿 듀린, 샤르르 보아이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묵시록의 네기사’가 원제.. 아르헨티나는 2차대전전까지만 해도 부유한 강대국.대저택의 대가족 나치 추종자와 연합군 측으로 갈려 파괴되는 비극적인 가족사...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김승호. *아파치 요새* 존 웨인, 헨리 폰다.. 패전의 삶보다 죽음을 택하는 기병대장.전멸하는 기병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박노식, 조미령 *팔월 십오야의 찻집* 말론 부란도, 글렌 포드...말론 브란도의 일본인 분장은 웃겼었지.. *내가 설 땅은 어디냐* 문정숙, 최무룡...북한 부수상이었던 허헌 딸의 수기를 영화화.. 남과 북..그녀가 설땅은 어디..당시의 연좌제는 삼엄하였고..
*성난 능금* 신성일, 방성자, 최남현.. 고독하게 성장한 고아..아버지 곁에서 생활하고 싶은 열망.. 상실의 회복.. 의무적 사랑... 라스트신이 그럴 듯. *혈맥* 김승호, 황정순, 신성일, 엄앵란... 유현목 감독이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지극히 오발탄적인 분위기의 영화.. 빈민촌.. 벗어날길 없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군상...
*지옥의 대지* 공룡영화... *천국과 지옥* 박노식.. 탈옥수..불신과 배신.. 믿을 놈은 이 세상 없다.. *청춘교실* 신성일, 엄앵란... 어머니에 대한 반항.. 연애... 방학이 끝나고 시험걱정을 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들..아마 일본 소설을 각색한 것.. *4인의 무뢰한* 챕 찬드라 *푸른 꿈은 빛나리* 신성일, 남석훈, 태현실.. 당시는 일본 청춘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한 것이 많았는데 이 영화도 그러할 듯..
*전쟁과 정조* 하워드 킬, 티나 루이스... 사랑하였던 여인은 적국의 스파이..자신의 총으로 쏘아 죽이고 나서.. 그녀는 나를 진정 사랑하였나? . .멍하게 걸어가는 폐허의 거리.. *성난 코스모스* 김진규, 엄앵란 *혈* 탈옥영화는 늘 재미있었지..흑백의 화면.. 사실적인 묘사.. 끈질기게 탈출구멍을 파는 탈옥수..
*하타리* 존웨인..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배경인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삽입곡인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가 생각날걸세. *대평원* 김석훈, 이경희.... 패잔병.. 거지,, *내 무덤에 비를 세우지 마라* 제임스 다렌, 에드워드 G 로빈슨.. 아편중독자..주정뱅이.. 변호인.. 시카고의 범죄골목.. 이 곳을 탈출하라.. 그리고 이름 없이 뒷골목에서 죽어간 내 무덤에 비는 세우지 말라는 포스터 카피...
*방랑의 검호* 스튜어드 그렌저, 실바 코시나, 크리스티네 카프만.. 팬싱은 일종의 무용적인 느낌. *5인의 독수리* 신영균, 박암, 엄앵란... 황야의 7인의 한국판 아류.. *엘 시드* 찰톤 헤스톤, 소피아 로렌...스페인을 점령하였던 사라센 제국..전설적 영웅 엘시드.. 백마에 몸을 싣고 창을 비껴들고 바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영웅 엘 시드.. 찰톤 헤스톤은 역시 역사극에 어울리는 배우.
*빨간 마후라* 신상옥 감독, 최무룡, 신영균.. 산돼지 나관중..파일럿.. 지금 다시 본다면 전투기의 공중전은 되게 유치할 것..그러나 조종사들의 낭만은 그런대로.. *가슴에 꿈은 가득히* 신성일, 장동휘.. 사생아.. 사생아라는 쓰레기들의 표상이 되기 위하여 이겨야 한다.. *식모* 김지미 *평양감사* 신영균, 최은희, 김혜정
*맨발의 청춘* 김기덕 감독, 신성일, 엄앵란 ...흥행 대성공이었던 영화...송충이는 솔잎 운운.. 정사..그러나 그들은 순결하였다는 마지막 세리프.당시의 소박한 관중은 감동의 물결..신성일 연기 폼의 아류들이 양산되었었지.. *아편전쟁* 신영균, 박암
*악마의 제자* 버트 랭카스터, 커크 다그라스.. 신도 역사도 인간도 시간도 믿을 수 없다.. 불신..오직 믿을 수 있는 건 악마뿐이다..세기말적인 대사들.. 제도와 법률로서의 처형..아무리 가장하여도 살인은 살인이다.. *양자강* 박노식, 김혜정 *살아야 할 땅은 어디냐* 김진규, 주증녀.. 간첩 *불가사리* 최무룡, 엄앵란
*검은 장갑* 박노식, 문정숙... 문정숙은 참 독특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배우..이만희감독은 신상옥, 홍성기, 유현목, 김기영 등과는 다른 참 유니크한 스타일의 감독... *나바론* 그레고리 팩, 안소니 퀸, 데이빗 니븐, 제임스 다렌.. 철벽 요새의 기지 폭파.. 한때 밋밋한 젖가슴의 여자를 나바론이라고 놀려 주었던 기억.. *무명가* 리처드 위드마크.. 리처드 위드마크의 스토익한 표정은 갱의 캐릭터에는 적역..
*노트르담의 꼽추* 안소니 퀸, 지나 로로 부리지다.. 짚시 에스메랄다.. 꼽추 카지모도.. 적역의 연기...카지모도는 얼마나 순정한 영혼의 시인이었던지..시인뿐이었겠는가, 행동인이기도 하였지..에스메랄다와 카지모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심장을 후벼파는 아픔이 있는..노트르담의 꼽추 ..에스메랄다는..시인이었지.
*부리바* 율 부린너, 토니 커티스, 크리스티네 카프만.. 몇 번째 영화화되었지..고골리 원작.. 아들을 죽이는 부리바..이런 주제는 알퐁스 도오테의 단편에도 감동적으로 묘사되었고.. *정글지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3류 극장에서 보았는데, 기대도 하지 않고 들어갔던 극장에서 의외로 좋은 영화를 만났던 것일세.
신이라는 의미.
신을 부정하고, 신의식을 비웃는 철저한 무신론자, 록 허드슨. 인간의 신경조직을 조정하면 누구나 신의식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변증을 자신하는 오만한 과학자. 그러므로 신은 시험관 속에 있다는 그.
전형적인 물질주의자며 이성과 논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합리적 사고를 자랑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형이상학이란 하나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 비변증법적인 모든 사유방법은 호모 사피엔스의 존엄을 모독하는 허황된 잠꼬대라는 사고.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정글에서 홀로 방황하게 되지. 그야말로 단독자로서 원시자연 속에 내던져진 것. 시시각각 엄습하는 고독과 초현실적인 공포. 인간이란 근원적인 실존으로서 자신의 모든 외부의 것들과의 벌거벗은 배면.
처절한 공포와 단독자의 고독 속에서... 마침내 신학적인 명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부르짖기 되네. “Oh My GOD!"
그 때에는 늦가을이었을 게야. 나는 앉은자리에서 두 번을 연거푸 보고서 어두운 거리를 지나 서늘한 바닷바람을 뺨으로 맞으며 영도다리를 건넜지.
가슴 속 소용돌이치는 명제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신의 존재.. 난해한 신학과 철학의 책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명제. 신은 있는가? 아니, 신은 있어야 하는가?
어줍잖으나마 진지하게 신을 사유하는 계기가 바로 삼류 극장의 한 이름 없는 영화에서 비롯되었다면.. 영화의 효용성은 한낱 오락으로 서만으로 설명되어질 무엇은 진정 아닐 걸세.
그후. 이제껏 목숨을 살아오면서 나는 정글 속 록 허드슨의 상황 속에 내던져서 '오 마이 갓'을 부르짖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중년의 이혼남이 인터넷 재혼 사이트에서 채팅으로 만난 여러 여성들과 신나게 놀아나다 고교생 아들의 파토 내기로 끝장 나고 쇠고랑까지 찼다. 이 중년의 카사노바는 대담하게도 만나는 여성들을 집으로 데려와 결혼 할 사이라며 아들에게 인사까지 시켰고 이에 여성들은 깜빡 속았을 것이다.
큰 업체를 운영하는 이혼남으로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에게 많은 여성들이 만남에 응했고, 그 여성들은 삼사십대 중반의 전, 현직 여교사들이나 간호원으로서 대부분 전문직 여성들이 걸려들었다는데 아마도 그런 여성만을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렇게 만난 여성들과 결혼을 전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며 수천만을 갈취하였단다.
이 남자는 주중에는 가까운 서울과 일산, 분당에 사는 여성들과 즐겼고, 주말에는 천안이나 울산에 사는 여성들을 만나러 지방으로 내려갔다니 전국을 무대로 하느라 바빴을까? 신났을까? 하지만 이 남자는 아버지의 파렴치함에 환멸을 느낀 아들의 폭로로 결국 파국을 맞은 것이다.
어머니와의 이혼이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임을 알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메일 아이디를 빌려 아버지가 울산의 K여인과 주고받은 낯뜨거운 내용의 편지를 아버지의 서울 연인 L씨에게 보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실을 알게된 L씨의 고소로 혼인빙자 간음으로 구속되었단다.
이 남자는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들을 믿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성격의 소유자일까? 아들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닮는다는데 자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어 어찌하려 했는지 정말 간 큰 아버지였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 개인적인 사생활이야 뭐라고 하겠냐만 자식에게만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자식까지 결론적으로 자신의 범행에 끌어들인 결과를 낳은 그 아버지는 자식에게 당해도 싸다.
오늘도 방황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그대를 지켜보고 있는 아들을 두려워하라.
동반 자살
선진국인 프랑스 같은 나라에선 모든 것이 너무나 잘 보장되었기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무료한 삶을 끊는 일명 염세주의자들도 있긴 하단다. 과거 우리도 낭만주의에 심취해 인간적인 고민을 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아쉬움을 남긴 소위 인텔리들도 있다.
하나뿐인 귀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까 마는, 오죽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까 싶기도 하지만, 이즈음엔 그 이유가 대부분 카드 빚에 시달리다 궁지에 몰려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접 할 때마다 착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부산 금정산에서 이십대 청년 두 명이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고 한 명은 중태에 빠졌다. 이들은 불어나는 카드 빚을 청산 할 길이 없자 강도 짓까지 하게 됐고 좁혀지는 수사망에 마지막 길을 택한 것이다. 한창 꿈에 부풀어 희망찬 내일을 설계 할 나이의 푸른 젊음들이 불과 명함 한 장 크기의 플라스틱 쪼가리 한 장 잘못 사용하여 그들의 인생을 끝장내고 말았으니 어쩔거나!
물론 분수를 모르고 살다 그리됐으니 그 책임이야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들에게 분수를 가르쳐 주지 못한 책임은 우리들 세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고기를 낚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잡은 고기를 주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기 한 마리 낚기에 얼마의 노고와 인내가 필요한지를 모른 채 얻은 고기를 편하게 먹는 것밖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쓰는 즐거움만 배운 그들에게 카드는 부모님의 호주머니처럼 요술 방망이였을 것이다. 기계에 넣기만 하면 지폐가 콸콸 쏟아지는 그 조그만 카드 한 장이 그들에겐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원하면 펑펑 쏟아낼 줄만 알던 기계가 어느 날부터 나오지 않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참을 수 없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여기 저기서 이리 때우고 저리 꾸려가다 결국은 신용불량자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물론, 무한정 책임 질 수 있는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예외겠지만...
우리 전후 세대의 부모들 고생 안하고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이 한이 맺히도록 뼈저린 고생을 해보았기에 내가 하던 고생을 내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기 싫다는 그 맹목적인 자식 사랑이 오늘날의 무능한 젊은이들을 양산하게 된다. 나 하나 고생으로 자식들만은 호강시키겠다는 잘못된 자기만의 욕심에 모든 사회적 비리가 파생된다.
내가 살아가던 그 시절에 비해서 지금은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그렇지 않아도 고생을 모르고 사는데 자기가 가진 분수만큼 사는 방법도 가르치지 않은 채 위로만 올려다보게 길러 놓으면 어쩌나.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 말, 옛 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 제발, 자식을 기르는 일 만이라도 옛말을 거울 삼았으면 한다.
아까운 이 땅의 젊은이들이 피지도 못한 채 저 세상으로 사라져 가는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
여행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로 시작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만나 새로운 체험을 하거나 가슴이 넓어지는 기회가 된다. 여행이라 하여 꼭 집을 떠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집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여행도 있다. 나는 그를 일러 ‘독서 여행’이라 부른다.
책 속에는 신기한 볼거리가 있는가 하면, 때로 달콤한 맛도 있고, 가슴을 적시는 감동도 있다. 그래서 나는 ‘독서 여행’을 즐긴다. 내가 가까이 에서 곁에 두고 자주 꺼내보는 책을 세 권쯤 고르라면 ‘진홍가슴새’ ‘무소유’ ‘세상을 보는 지혜’를 고르겠다.
‘진홍가슴새’는 열 두 편의 동화 모음집이다. 동화는 맑고 따뜻한 영혼이 담긴 책이다. 아이들을 위한 설교조나 교훈조의 이야기라고 하찮게 여기지만 사실 동화는 마음의 고향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순진무구함 속에는 어떤 글에서도 찾을 수 없는 환상의 세계가 있고, 불가능한 한계에 도전한 의기가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열고 하늘땅을 비롯하여 짐승과 꽃나무, 풀 포기까지 만든 다음 그들에게 낱낱이 이름을 붙여 주셨을 때의 이야기야. 온종일 작업을 하시던 하느님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잿빛 깔의 새 한 마리를 만들어 내셨지.
“네 이름은 진홍가슴새야.” 하느님은 그 새에게 말씀하셨어. 난 한 장의 빨간 날개 털조차 없는데 어째서 저를 진홍가슴새라 부르시는지요?”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하지만 네 마음가짐 하나로 너는 빨간 날개 털을 정말로 받을 수도 있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많은 새알에서 아기 새들이 태어났지. 진홍가슴새는 여전히 잿빛의 새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새들은 진홍빛 날개 털을 지니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보았지. 가슴이 활활 타도록 깊이 사랑을 했었어. 사랑의 불길로 날개 털이 빨갛게 물이 들지 모른다고.
‘온종일 노래하고 또 해서 가슴이 부풀어올랐을 때, 이 뜨거움이 날개 털을 붉게 물들여 주지 않았을까’ 다른 새들과 겨루어 힘을 키워도 봤지. ‘끓는 투지로 날개 털이 빨갛게 물이 들 거야.’ 그랬지만 우리 새들의 노력은 실패였어.
어느 날, 잿빛 새들의 둥지가 있는 언덕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어. 예루살렘 성문이 열리고 말을 탄 무사와 병졸들, 사형집행인과 재판관, 울부짖는 여인들, 그리고 재미있어하며 따라오는 구경꾼들.
“이게 무슨 일이람. 나쁜 사람 셋이 십자가에 못 박히러 끌려가고 있네. 어쩜, 인간은 저렇게 잔인할까, 십자가에 못박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그 중 한 사람의 머리에 가시관까지 씌웠구나. 이마에 가시가 박혀 피가 흘러내리고 있네. 그런데 저 분은 나쁜 사람 같진 않아. 아, 저분이 괴로워하니 내가 못 박힌 것같이 가슴이 아파 오는 걸.”
잿빛 깔의 작은 새는 가시관을 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람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잇따라 흐르는 것을 보았지. “나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새지만 괴로워하는 저분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작은 새는 용기를 내어 가시관을 쓴 그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 하나를 주둥이로 뽑았지. 그때 그분의 피 한 방울이 새의 가슴에 떨어졌어. 핏방울은 곧 번져서 짧고 부드러운 날개 털을 빨갛게 물들였지. 그러자 십자가의 그분은 입술을 움직여 속삭였어. “너는 조상이 세상 첫날부터 애써 구하던 것을 너는 그 친절한 맘씨 하나로 얻었구나.” “가슴이 빨개요. 들장미 꽃잎보다 더 빨개요!”
아무리 멱감아도 가슴의 진홍빛은 지워지지 않았어. 아기 새들 모두 그들의 가슴에 핏빛과 같은 진홍 날개 털이 빛나기 시작했어. 지금까지도 그 빛깔은 가슴에서 빛나고 있는 거야.
독서여행(2)
법정스님과는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20년 전부터 샘터라는 작은 책에 스님의 고정칼럼을 읽으며, 그 담백한 맛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스님의 단행본들은 물론 얼마 전 스님의 산상모습이 방영된 일요스페설까지 빠짐없이 보고 있다.
스님은 인간이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게 될 때 닥쳐 올 재앙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과잉소비와 포식사회가 오늘과 같은 온갖 질병과 환경위기를 불러들인 것으로 삶의 원천을 망각한 우리 인간들의 탐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커다란 생명체인 이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깔볼지 모른다. 우리가 어머니인 대지에 소속되려면 먼저 그 대지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대지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맨 먼저 개울물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산토끼와 노루를 벗삼으며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과 대화를 나누는 오두막에서 버리는 삶을 실천하고 계시는 법정스님. 진리는 미로 찾기가 아니라 단순함을 강조한다. 삶은 맑고 향기로운 삶이기를 원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 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
좋은 글을 읽은 날은 그 여운이 오래간다. 세상을 살맛 나게 한다. 잠자는 의식을 깨우기도 하고, 무딘 감정을 되살리게도 한다. 법정스님의 글은 한 번 읽고 말글이 아니다. 맛을 음미하듯 조금씩 두고두고 읽어도 새롭다. 스님이 단행본으로 펴 낸 책들도 거의 내 책장에 꽂혀있다.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못 알지 말아라. 어떤 종교든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 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 없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밖에 있는 스승은 다만 우리 내면의 스승을 만나도록 그 길을 가르쳐 줄뿐이다. 받아들이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어 있으면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어지럽힌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은 글들이 어디 이 뿐이랴.
독서여행(3)
빌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이다. 인생의 지혜에 대한 교훈은 일상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할 내용이다. 따라서 이 교훈서에서 많은 일상적인 일들을 발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경구들은 대가적인 풍부한 정신력, 사고력, 위트, 서슴지 않는 패러독스로 번쩍이며 신랄한 재치, 빛나는 언어, 통찰에서 우러나온 인간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개선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훈 등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바보가 마지막에 하는 일을 현명한 자는 처음에 한다. 둘 다 같은 일을 하지만 때가 다르다. 전자가 좋지 않은 때에 하는 것을 후자는 제때에 할뿐이다. 일단 이성이 한번 뒤틀린 사람은 매번 일을 바꿔한다. 왼쪽 일을 오른쪽 일로 만들고, 아울러 매사에 좌익으로 쏠린다.
내면을 들여다 보라. 대부분은 사물은 그 외양과 내면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외양, 껍질만 꿰뚫어 보다가 내면에 이르면 착각은 사라진다. 착각은 피상적인 것,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피상적인 것을 빨리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되고 옳은 것은 깊이 물러서서 자신을 숨긴다.
점잔빼지 마라. 재능이 많을수록 잰 체하지 마라. 이는 비열하고 볼품없다. 치레는 하는 사람에게는 괴롭고 보는 사람에게는 역겹다. 신경을 써서 치레하는 것은 고문 같은 일이다.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마치 우리의 천성에서 나온 완벽함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 안에 들인 노고를 감춘다.
생각하라.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을. 모든 우둔한 자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파멸한다.
그들은 결코 사물 속에 있는 본질의 절반도 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노력은 미미해서 자신에게 오는 피해나 이로운 점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큰 가치를 두고, 중요한 일은 경시하는 등 항상 거꾸로 생각한다.
영리한 자는 매사에 대해 차이를 두고 생각해 본다. 귀한 것을 발견할 전망이 있으면 더욱 더 몰두하여 깊이 파고 들어간다. 때로는 거기에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숙고를 통해 처음에 감지한 것을 나중에 파악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 그저 감사하고 맑은 물을 보면 왜 그렇게 반가운지, 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요동치는 느낌을 여러분은 경험하셨나요..!
그런데 참으로 가슴아프고 슬픈 것은 전국 각지 그저 후미지고 은둔적인 지역에는 여기저기 각종 쓰레기가 쌓여 아름다운 자연이 신음하고 고통받는 것도 보셨겠지요..! 크게는 살아있는 지구가 신음하고 있지요.. 태양계에 속한 지구는 9개의 행성 중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별이지요.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여 밤낮을 갖게 하고 1년에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4계절의 변화를 우리에게 주는 선택된 별이지요.. 우주에는 1000억 개 이상의 태양 같은 별을 가진 은하계가 있다하니 우리 지구는 얼마나 고귀한 행성인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도 슬픈 사실은 생산자(녹색식물), 소비자(초식동물, 육식동물) 분해자 또는 환원자(세균류), 무기환경(빛, 온도, 공기, 토양, 물, 무기염류 등..)으로 구성되어있는 생태계의 파괴랍니다.
결국 생태계의 이 4가지 요소가 평형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어느 요소가 망가지고 있다는 말로 생태계의 물질순환에 병목현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생물권에 큰 손상을 줌으로써 죽어가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너무도 답답한 것은 지구 종말 중 우주의 대변화에 의한 우주론적 종말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생태계 관리 잘못으로 기인하는 생태학적 종말로 소중한 지구호를 스스로 자멸시킨다면 그 무책임한 인간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너나 나나 인간의 적은 이익 때문에 큰 손해를 자초하는 환경오염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요즘 제가 자연을 돌아보며 울고 싶은 심정으로 주말을 맞아 님들께 호소하는 것은 우리의 앞서가는 열린마당 모든 님들이 환경보호 파수꾼이 되시어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으로 되돌릴 수 있도록 우리 우리가 솔선한번 해보시지 않으실래요?
여러분 자연을 사랑하는 님들은 적어도 제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참으로 좋은 품성을 가지신 님들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이제 행락 철이 돌아오고 있음에 걱정되는 벤치마킹이 오늘 제가 좋아하는 네티즌들이 제일 많이 계시는 이 마당에 들려 그냥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제 저녁에 오랜만에 찾아오신 반가운 이들이 있었다. 남자 나이 55세, 여자 나이 52세의 부부인데 한참 후배인 우리 내외가 멋지게(?) 사는 것 같아 마음에 드니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는 제안이다. 흔쾌히 동의하곤 모처럼 모 호텔의 13층 전망 좋은 일식 집에 자리하여 담소하는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어 조심스러워진다.
이틀에 걸쳐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서 이혼서류를 챙겨 법원에 갖다 주고 오는 길이라 한다. 나름의 학식과 경륜을 겸비한 부부이건만 딱히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 이혼문제를 맘 편하게 상의 겸 하소연 할 수가 없음을 토로한다.
잠시 우리 부부는 혼란에 빠져 난감하였다. 아주 다정한 부부로 기억되고, 지금도 곧 이혼 할 사이라곤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로 바라보는 눈빛조차 사랑스럽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을 편하게 대하였다. 세상 경험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자칫 미묘한 부부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다간 좋은 자리의 분위기마저 어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의보다는 하소연을 하기 위한 자리라 생각되기에 되도록 두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들으며 경청하였다. 간간이 부부간에 얽힌 추억담을 서로 나누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전혀 애정이 식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혼을 결심하고 진행하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결혼 30년 차라는 그 분들은 사랑하기에 이혼한다며 이구동성이다. 어느 소설이나 영화제목 같은 그 소리에 바짝 당겨드니 절절한 내용이 다음과 같다. 서로의 대화체로 꾸며 보았다.
부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의 장단점을 모두 알아요. 급한 성질에 숨 넘어 가듯 막말을 해 대는 것 때문에 속도 많이 상했지만 그것도 견딜만했고 그 외에는 사람 좋아하고 솔직한 면이 맘에 들어요.
남편: 난 바람을 피우고도 저 사람에게 이실직고하고선 잘 해결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거짓말은 못해요.
나: 남자들은 화나면 절제치 못하는 막말 때문에 결국엔 여자에게 지게 되지요. 대신 성질 급한 사람들은 뒤끝이 없는 장점도 있잖아요?
솔직하다는 말에 남자 분이 오버하는 것 같아 거들면서 화제를 이어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부인의 한숨소리가 깊더니 못 마신다는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어간다.
부인: 그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데 내 스스로 그만큼 남편에게 해 줄 수가 없음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유로이 해 드리고 싶어 결정한 거예요. 저인 아양떨며 상냥한 여인을 많이 바라는데 전 그게 안 되거든요.
남편: 큰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처리하며 오히려 누님 같은 든든함은 좋은데 여자의 가장 기본인 애교가 없으니...
부인: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저와는 다른 그런 여인을 찾아보세요. 저도 활달했던 당신이 우울해 하는 걸 보면 많이 속상해요. 제가 딴 생각으로 가려는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남편: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러기에 속박되지 않는 당신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 또한 이혼에 동의를 한 거 아니겠어?
또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른다. 사랑하기에 이혼한다는 논리가 어디 있느냐며 이해가 안 간다는 아내의 항의에 두 사람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부부 사이란 타인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베일에 쌓여있는 일들이 많다지만 여타 더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곰곰 생각하니 나로서는 두 사람의 결정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대개의 경우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서로의 악감정으로 표독스러워지며 원수보다도 더한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여느 다정다감한 연인처럼 애정을 보이며 자연스레 이혼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헤어져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술 마신 조수가 감히 기사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물어보았다.
“당신 언젠가 내 사랑에 겨워 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 유효한가?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한테 장가든다는 얘기는 없던 걸로 했는데.”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운전만 하던 그녀를 집에 도착하여 달래기까지는 진실 어린 변명으로 한참을 애먹었다. 분명히 지금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오늘 생각하니, 그건 당신에게 죄악 같아 더 좋은 남자를 만나라는 배려라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털 알레르기 중증이 있는 같이 근무하는 지혜모친(친구)의 핸폰이 어느 날은 몇 차례 부산스러웠다.
9개월 전에 입양해 온 강아지 깐돌이의 몸뚱이 털 삭발행사를 위해 애견 미용실에 데불고 갔더니, 워낙 난리 블루스를 하는 바람에 손도 못 대고 치를 떨며 동물병원에서 임시 마취시키려 한다는 지혜의 다급한 보고들이었다.
익스프레스 사업을 하는 그녀의 옆지기가 우째저째한 사연으로 얻어 온 새끼 강아지.. 제법 족보 있는 명견인줄 알았더니 키우면서 보니 하찮은 변종(便種)이어서 실망이 우라지게 컸다나~
울 집에는 기본적인 미용기구가 있어서 깐돌이의 털깎이 청탁을 간절히 해왔지만, 아무리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3개월 기어서 배운 내 시원찮은 두발 깎기 실력이지만 자존심이 있지 어찌 사람털도 아닌 개털에 잘난 목숨을 거랴!~
대답은 단연 노!~노!~노!~ 였다.
희비가 엇갈린 곡절을 넘긴 강아지 민둥머리 만들기는 퇴근하면서 찾아다 놓으라는 지혜의 엄명에 지 어무이 순종하는 흉내는 내었지만, 깐돌이 때문에 부딪치는 남다른 스트레스는 그녀 뿐 아니라 사무실 직원들의 일과장에 빼곡이 쓰고도 남으리라.
친구 옆지기를 비롯, 그녀의 쌍둥이 딸들은 엄마의 기분에 좌우 될 깐돌이의 운명에 온 촉각을 곤두세웠기에 어디로 귀양을 보낸다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체념했지만.. 수시로 개 기저귀를 대신해야 했기에 애매한 벼룩시장紙는 꽂아 놓는 이가 미워 할 만큼 날마다 때마다 자전거로 실어다 날랐고..
철 바뀌어 가며 각양의 패션에 과분할 변견 옷을 만들기에 점심요기를 축내 가는 열심을 더하거나.. 하루 일정한 간식을 위해 아빠는 300원 짜리 소시지 하나씩 일수 찍듯 하고.. 딸들은 방학중 번갈아 계란 프라이, 라면 끓여 내기 바쁘고..
미워하는 와중에도 친구는 혼자 집 지킴이 안쓰럽다고 설교 테이프 종일 틀어 개 더러운 성질 자중되어지길 기도하며 "은혜는 울 집 개새끼가 내 대신 다 받잖아~" 더니
유난히 개껌은 싫다하고 아무거나 물어 뜯어놓는 못된 버릇 없애려고 출근하며 던져주는 사탕의 수만큼 깐돌이가 커가면서 부딪치는 씨름접기는 절대 아니올씨다였다.
오죽 허니~ 사무실 청양고추 따봉 좋아하는 부산 아지매.. 친구의 개사랑, 개푸념, 개재롱 듣자하니 부화 터지고 속 뒤집어져서 날이 갈수록 상상 저울로 달아진 무게를 어림 읽고는 5인분..7인분..되뇌며 "그 개새끼 된장은 은제 바를 낀데?" 월매나 침 삼키며 벼르고 별러 샀는지.
개 사료먹이 뿐 아니라 온갖 사람먹이는 가리지 않고 다 먹는 변종 중에 변종은 제 주인 닮아서 유난히 잘 먹는 것 하나있는데.. 허연 무우 먹어치우는 날렵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여서 자고로 킬러 급에 도전했었다.
벌써 도마 끝에서 무를 썰라치면 깐돌이의 귀는 각별한 센서가 작동하고.. 무가 특별히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바삭거리는 비스킷의 흥도 아닐텐데 그 무덤덤함이란 아삭거리는 기분으로 속되게 먹는 맛을 느끼는 건지..
하루는 저기압에 심드렁해진 친구가 장난으로 "에이~씨, 청양고추인들 니 녀석이 못 먹을까 보냐~" 싶어 눈감고 하나 넌지시 던져준 게 지나친 화근이 되어서 한 번 베어 물고 화다닥~ 두 번 베어 물고 안저리 부저리~ 세 번 베어 물고 캑캑 토악질~
눈동자까정 붉어지면서도 계속 먹는걸 웃음을 참고 보다못해 쉽게 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그리 생각했다나?
"역시.. 변견의 아이큐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간을 능멸할 주제는 못되는구나!" 하고 글씨.......
그는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연구자나 전문가들이 내놓은 경제학(그의 전공)에 관한 것을 쉽게 전달하는 책이나 역사책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 단체의 성명서와 선언문을 수 도 없이 썼고, 중편소설로 등단도 했으며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 대본도 써 보았고 신문의 시사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MBC 백분토론과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했음을 또한 우리는 안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 사회에서 선호하는 '엘리트 지식인' 이라는 호칭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그런 그가 이제 새 정당을 만들고 국회로 갔다. 그 첫날, 그는 국회에서 의원선서를 하는 그의 첫 '일'에서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부딪힘'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의 복장의 문제였는데, 의사당에서는 양복을 입는 관례를 무시하고 면 바지에 면 티를 입은 평상복 차림의 그를 다른 선배 의원들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다음날 와이셔츠에 타이를 맨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나와서 의원선서를 했고, 그날 함께 의원선서를 하게 된 다른 두 의원보다는 다소 긴 인사말을 통해 "어제 옷을 그렇게 입은 것은 튀려고 그랬던 것도, 넥타이 매기가 귀찮아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 국회는 나의 일터가 되었으니 일하기 편한 옷을 입어보겠다는 뜻으로 그랬다" 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선배의원들 앞에서 싱글거리며 자기주장을 끝까지 피력하는 그의 여유를 보면서도 왠지 나는 유쾌하지만은 않음을 느꼈다. 튀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날 분명히 튀었고, 일하기 좋은 복장이란 말 또한 선서를 하는 그날의 '일'에는 별 해당사항이 없어 보였다.
그날, 그의 홈피에는 찬사와 격려의 말들이 쏟아졌다. 양복입고 싸움질 이나 하는 국회의원보다는 평상복에 일하겠다는 의원이 얼마나 좋으냐, 의사당에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퍼포먼스라도 좋고 시선 끌기라도 좋습니다 등등.... 참 좋은 말들이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건다는 것, 우리에게 그럴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사실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러나, 한번쯤은 생각해볼 일이다. 국회를 열어놓고 욕지거리와 패싸움질 같은 양상을 보이던 그들에게 양복이 아닌 평상복이 입혀져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보다는 몇 배 더 흉악한 우리의 국회의원 꼴상을 보게되지는 않았을까....
한 벌의 털옷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동물과는 달리 때와 장소를 따라 옷을 구별하여 입을 줄 아는 衣服의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옷이 가져다 주는 시사성은 참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의원선서를 끝내고 돌아서는 그에게로, "다같이 소중한 관례는 지켜나갑시다" 라고 말했다는 박관용의원의 말을 그가 흘려 듣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너무 치켜세우지 않아서, 그가 자칫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그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의 '일함'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며, 혹시라도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 있다면 바른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식인의 敵은 '자기확신'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확신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도 곤란하겠지만, '자기확신'만이 너무 강해서 다른 이의 주장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못하는 정치인은 더더욱 곤란하다. 그것이야말로 옛 중동의 바벨성에서 야훼께서 흩어버린 교만의 바벨탑을 다시 쌓는 일이 될테니말이다.
선거유세를 할때 재래시장을 돌면서 그가 "내가 당선이 되면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공약을 하자 측근의 한사람이 "왜 그런 지키지 못할 말을 하느냐"고 했고, 그 말에 "꼭 어려운 경제의 재래시장을 살려보고싶은 마음 에서 그런 말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아무 대책도 내겐 없으니 그 말은 그야말로 公約이 아닌 空約이 되어버렸군요"라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그 말의 뒤에는 당선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나도 모르게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하며 씨익~하고 웃었을 그를 떠올리며 말없는 기다림의 응원을 그에게로 보내어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지금처럼 그가, 정치꾼이 아닌 바르고 멋진 정치인이 되어주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