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길다란 줄에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 하얀 와이셔츠와 아기의 기저귀가 바람에 나부끼는 여자의 작은 행복을 그린 시를 건네 준 한 사람이 생각난다.
그것이 프로포즈였다고 들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빨랫줄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보면 시속에 풍경이 주는 하얀 평화스런 모습과 작은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잘하는 중에 하나가 빨래하는 거다. 며칠 것을 한꺼번에 모아두었다가 하는 게 아닌 아침저녁과 수시로 하는 편이다. "당신 빨래하는 게 재미있어? "가끔 주머니 속에 있는 것까지 세탁해서 속상할 때도 있지만 빨래는 잘해..." 남편의 말이다.
빨래가 조금이라도 쌓여있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느껴 여행에서 늦게 돌아왔어도 빨래는 해놓고 자야 속이 시원하다. 한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알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빨래를 잘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집 앞에 냇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숫대야에 빨래를 담아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힘차게 두드리다가 흐리는 물에 이리 저리 헹구어서 손으로 비틀어 짜면 떨어지는 물방울의 촉감에 마음까지 게운 해진다.
옛날 어부들이 오랫동안 바위에서 생활하게 되면 옷을 벗어서 배 끝 모서리에 매달아놓는다 한다. 그러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이 물살에 다 빨아지고 아마 그런 원리로 세탁기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맑은 하늘아래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할 때면 작은 송사리 떼들이 지나가다 발을 간질여 놀라기도 하고, 물풀이 떠내려오다가 발에 걸려 미끄러지기도 하며 건너편에 아는 친구라도 보이면 "이제 온 거야 ? 하며 안부를 물었던 그런 빨래터였다 .
그때 비누는 양잿물로 만든 시꺼먼 비누, 그 특유의 냄새는 싫어하지만 비누를 살 때 가끔씩 냄새를 맡아보고 산다. 옛날 그 빨래 비누 냄새가 조금은 느껴지기 때문에 지금도 세제보다는 비누를 좋아한다
이런 우리 동네에 주말이면 시내에서 빨랫감을 잔뜩 리어카에 싣고 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시골 장터와 같이 북적거린다.
빨래터를 아예 길다랗게 작은 높이로 3-4층으로 만들어 놓은 탓으로 1층까지 물이 차있을 때는 2층에서 하면 되었고 물이 없을 때는 바닥으로 내려가 돌 위에 앉아 옷을 허벅지까지 말아 올리고 발을 담그고 빨래를 하면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대야에 물에 띄워놓고 다슬기와 조개를 잡고 고무신으로 물고기 잡느라 시끄럽고 즐거웠던 소풍 같은 주말 빨래터...
날씨 좋은 날에는 곳곳에 아예 솥단지 까지 가져와 빨래를 삶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에 작은 숲 나뭇가지에 빨래를 말려가기도 했다. 깊은 곳에서는 남자들의 수영 구역이었고 얕은 곳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수영장이기도 했으며(옷을 입은 체) 밤에는 동네 사람들이 물가로 나와 목욕을 했었던 곳... 모두 함께 즐기는 여름놀이 장소였던 것이다.
때론 남자들이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기도 하고 몇 개의 어항을 가지고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잡은 고기 중에서 색시 붕어의 선명한 색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얼마나 색깔이 이뻤던지...
후에 우물대신 작두 (물을 넣어 펌프 식으로 물을 퍼 올림 )가 나와 물이 차갑고 시원하긴 했지만 물이 달라서인지 빨래 때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나무 빨래판에 대강 주물러 세탁한 다음 농구공 넣듯이 옆에 세탁기를 향해 던지는 손빨래를 주로 많이 하는 편이다
일본여자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빨래판을 사 가지고 간다는 얘기를 오래 전에 들었다. 빨래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다.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우리들 정서를 얼마나 빼앗아 가고 있는지... 풍경화에서 나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방망이로 두드려가면서 냇가에서 빨래하는 풍경이 그리운 여름이다.
또 겨울철에는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라 호호 입김을 불어 가며 빨래를 하기도 했고 많은 빨래를 하는 사람은 장작을 지펴가면서 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빨래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씻어내기도 했던 좋은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그렇게 한 다음 햇볕에 말린 빨래의 뽀송한 느낌... 풀을 하여 아직 덜 말린 이불빨래 같은 것은 다듬이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구김살을 편 다음 햇볕에 말리면 빳빳해진 빨래 사이로 숨바꼭질하다 혼났던 기억들...
말린 빨랫감을 손잡이 달린 동그란 다리미에 시뻘겋게 달군 숯을 넣고 엄마와 둘이서 붙잡고 하던 다림질 불과 30-40년 전 일인데 꼭 이조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저녁 늦게 잠결에 들었던 엄마의 다듬이 방망이 소리 그 어떤 절묘한 악기소리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소리가 아직도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다니..
이젠 볼 수 없는 그래서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그나마 아주 잊어버릴까봐 기억을 더듬어 써본다 . 벌써 아이들에게 딴 세상 동화처럼 되어버렸지만...
이름 값을 생각하며..
개여울
아주 오래 전 신문에서 아름다운 한글 이름을 공모했는데 대상을 받은 이름이 참, 아름, 다움, 이란 이름을 가진 형제들 이였다. 자녀 셋을 순 우리말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지어서인지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부모의 소망이 담겨진 이름 대로 잘 사는 것이 이름 값을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너무 귀하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그 이름 값을 못한 사람도 있고 그 이름에 걸맞게 이름 값을 한 사람도 역사에 많이 있다.
귀하고 화려하게 지으면 貴人縛命이라했던가? 잘났다고 뽐내면 귀신도 시샘하고 명도 짧아진다 해서 평범하게 오래 살라고 붙인 서민들의 이름들을 보면 재미있다. 개똥이 쇠돌이, 마당쇠, 돌쇠 ,먹쇠 ... 향단이, 향심이, 곱단이 ...
여자는 시집가면 그나마 아예 이름도 없이 누구 엄마 어멈 아니면 원주댁. 서울댁 그리고 첫째야. 둘째야. 이렇게 불렀고 이름도 길례. 말례. 분례. 순례. 복순이. 영순이. 말순이. 끝순이 등....
또 일제 시대의 영향으로 끝에 子 가 많이 들어간 영자. 순자. 춘자. 명자... 자녀가 많다보면 첫째가 순태인데 여섯 째 막내 이름은 태순이 아들이 소원인 집에 딸이 나서 섭섭이 그만 낳으라고 붙인 이름이 끝순이. 말순이 별 뜻도 없이 붙여진 많은 이름들.
그런 이름들 때문에 부모원망을 하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고친 사람이 주위엔 많이 있다. 내 친구 중 옥순이란 친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촌스럽고 싫다고 동희라고 부른다. 깜박 잊고 "옥순아"하고 부르면 놀라 정색을 하며 싫어한다.
역사책에서나 떠들썩한 사건 뒤에 신문 방송에서 불려진 이름을 보며 자기 이름 값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노력이 필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중히 여긴다 예수란 이름은 (저희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했으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로( 이스라엘)로 축복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수제자 어부 시몬은 베드로(반석)란 이름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으니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지어준 이름들이고 그렇게 살다간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아들을 낳았을 때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고른 이름이 曉敏(새벽 효 민첩할 민) 秀敏(빼어날 수 敏민첩할 민) 두 아들의 이름이다. 새벽처럼 맑고 부지런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 같은 사람이 되고 민첩하고 빼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좋은 이름이 많았지만 이 정도는 적어도 부모의 바램이 아닐까 ?
내가 아는 목사님은 아들이름을 勝我 (승아 )라 지었다. 자신을 이기라는 뜻인데 의미가 있어 좋아 보인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려운데 ... 이름 값을 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본다.
엄마는 결혼한지 10년이 넘어서야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외삼촌이 지어준 이름이 愛永이다 여자는 보통 永자를 잘 안 쓰지만 사랑 받고 오래 살라고 지어준 이름 하지만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한다. 사랑을 많이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그것처럼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자기 이름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면 그렇게 되려고 적어도 노력을 하며 산다면 이 세상에 나를 보내주신 하나님과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될 것이고 나 또한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훗날 자녀에게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제헌절을 전후하여 아내의 재가를 얻자 이런 저런 이유로 김삿갓처럼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푸른 파도가 펼쳐지는 동해바다를 따라서 망양의 하얀 모래를 밟아도 보고, 흰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를 가슴에 안으며 강원도로 미끄러져 간다.
바다가 보이는그린 캠퍼스 국립삼척대학교가 건립한 해신당공원에도 들렸다. 처녀총각의 애절한 사연과 남근의 전설로 유명한 갈남 2리의 공원은 영상수족관을 비롯 어촌의 옛 모습과 체험공간 등 어촌 생활사를 전시하였으며 애랑과 섶넘이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이 있어 관광객의 발을 머물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번의 여행 목적지는 영월이다. 애달픈 단종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고장을 두루 섭렵하고팠기 때문이다. 단종의 유폐지는 청령포이다. 청령포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
(청령포 지방기념물 제5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에 깊은 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뒤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서 300척, 남북 470척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는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시작하셨다.
고도(孤島) 아닌 이 절묘한 고도, 이 곳처럼 절묘한 지형도 드물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영월 근교에 이르러 300도 정도의 곡선을 그리는 곳이다. 따라서 3면이 강물인 그 속은 숲이 우거지고 뒤에는 육륙봉의 험난한 산이 서 있어 유폐시키기 알맞었을 것이다
제한 구역 끝머리 제1봉 중턱에 세워진 망향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아리게 한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1.5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탑, 그러나 그 탑의 의미는 어느 탑보다 애처롭다. 어린 몸으로 이 이상 높게 쌓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단종은 여기에 오르면서 돌을 하나씩 나르면서 서낭당을 만들려고 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청령포의 이모저모)
어린 단종은 여기에 올라 설 때마다. 산너머 멀리 있는 그의 비인 정순왕후와 한양을 못내 그리워하였다니 어찌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앞에 놓고 아비규환의 세계를 생각하면 삶이 무엇이고, 영욕이 무엇이관대 하는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한 두번 억울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세상 시름 다 잊고 한 번 쯤 이런 곳에 올라 한 걸음 뒷발치에서 조용히 삶을 관조해 보는 여유야말로 이 세상 괴롬 다 잊게 하지 않겠는가?
망향대에서 정면에 바라보이는 곳이 노산대이다. 단종은 수시로 이 곳에 올라 시를 짓고 읊었다 한다. 또한 노산대는 단종이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를 따라 온 신하와 궁녀들이 낙화처럼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곳이기도하여 한참동안 눈을 감아 본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갑자기 도시에서 사람들이 밀려온다 물 있는 계곡엔 텐트의 물결 도로가에 선 차들의 기름 냄새 고기 굽는 냄새 물놀이 고스톱 술판 늘어진 낮잠 부채질. 한 밤 중에 고기잡이 우당탕 푸당탕... 대낮부터 만취해서 늘어진 사람, 그 옆에서 부채질하는 사람(여자다) . . . 자유 천지다
내 낚시터, 붕어 메기들은 놀라서 숨 죽이고 있다
그럼 나도 텅빈 도시로 나가서 피서나 할까
거들먹거리며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밑을 갈 짓자 걸음으로 험험 헛기침하며 걸어봐야지
할 일 없이 지하철타고 왔다갔다도 해보고
코가 향하는대로 가서 도시의 단맛으로 세치 혀도 즐겁게 하고
혹시 두둑한 친구를 만나면 팁 주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와 함께 농밀한 터치도...
계곡에 밀려왔던 사람들이 다시 도시로 와서 잠시나마 정들었던 도시의 거리를 차지하면 난 계곡으로 와야지
나는, 6남매의 막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맨 위에 형님이고 중간에 누님들이 넷이었고 막내로 내가 태어났으니 동기간들의 사랑은 무던하게 많이 받았을 터였다.
나에게 형님과의 첫 번째 기억은 군복을 입은 형님의 모습이었다. 형님은 무척 늦게 군대를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들의 면회가 허용되던 시절이라 시골의 부모님들은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는 주말이면 온갖 음식을 장만해서 이고 지고 훈련받느라고 고생을 하는 아들을 찾아갔었다.
그 시절에는 논산훈련소가 참으로 무서운 곳이었다. 여름철에 날씨가 무더우면 하루에도 훈련병들이 몇 명씩 죽어가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날씨가 더울 때면 오늘은 몇 명이나 죽었을까 하는 것이훈련소 주변 사람들의 화젯거리였다. 어떤 날에는 무려 일곱 명이나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기는 그럴 수밖에... 어린 내가 보아도 누런 황토 흙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신병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지보다도 더 흉했었다.
피부는 새까맣게 타고 굶주려 바싹 마른 말라깽이에다 훈련복은 너덜너덜 다 떨어져 보기에도 상거지 같았으니 오늘날의 민주화된 군대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님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소냐 !! 나의 어머님도 큰아들을 뒤늦게 군대에 보내 놓고는 매주일 면회를 갔었고 그 중에서도 내가 몇 번쯤 따라 간 기억이 있다.
면회 가는 좁은 길, 포장도 되지 않아서 먼지가 마구 일어나는 도로로 군용 트럭이 마구 달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또, 어디인지 지금은 잊어 버렸지만 길가의 흙벽돌집에서 고향마을 출신의 어느 가족이 살고 있었다는데, 어찌나 굶었는지 지나가던 군인이 보고는 하도 불쌍해서 짬밥을 한 삽 퍼주었다는데...
그 가족들... 며칠이나 굶었던지 넘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짬밥을 퍼먹은 까닭에 온 가족이 먹은 밥으로 인해 급체를 해서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뻔했단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소....훌쩍...훌쩍...
이야기를 바꾸어, 그 형님이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 군복을 입고는 커다란 자루 백을 메고 온 형님이 무척 멋있게 보였다. 더구나,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는 앞에서 자루 백을 열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낼 때는 마치 형님이 마술사라도 된 것 같아 보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C 레이선 !!! 캔을 따고 한 조각씩 나누어주던 형님의 그 거룩한 모습 ... !!1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 (2)
형님이 멋진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다.
시골 아이들은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기를 좋아했다. 내가 일 곱살 때였던가... 그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앉아서 타는 스케이트도 없었고 내가 직접 만들 실력도, 연장도, 자재도 없었다. 나는 좀더 큰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스케이트가 한없이 부러웠다. 흥...! 좋아 ! 형님한테 졸라 봐야지...
- 형아 ! 나 스케이트 하나 만들어 줘... - 얘는... 무슨... 하고는 형님은 무심결에 내가 형님한테 하는 최초의 부탁... 그 어렵게 한 부탁을 거절하고 말았다. - 엥 ?
나는 너무나 충격이었다. 아니 이 귀여운 막내의 청을 무지막지하게 거절을 하다니...?? - 엥 ? 엉 ? 우와 !! 엉 엉 엉 엉 엉 !!! 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엉엉엉 대성통곡을 하면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 어 ?? 어럽쇼 ?? 형님은 그만 나의 날카로운 공격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어 !!! 야 !!! 태종아 ! 가만히 있어라 !!!
흠... 그러면 그렇지... 내가 얼마나 아이큐가 높은데... 결국 형님은 그날로 아주 멋진, 우리동네에서 제일 멋진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귀여운 막내의 손에 들려주었다. - 봐라 ! 얘들아 ! 내 스케이트가 너네들 것보다 훨씬 멋있다 ! 나는 스케이트를 타는 것보다도 아주 매끈하게 생긴 스케이트를 들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런데, 얼음판에 가서 그 스케이트를 타고는 씽씽씽 마구 달린다가 방향을 조절하는 솜씨가 서툴러서, 다시 말해 운전실력이 없어서 !!! 마구 달려서는 그만 방향을 못 잡고 논둑에 얼굴을 들이 박아버렸다 !!
어이쿠 !! 눈에서 열불이 나고 대낮인데도 눈에는 별이 번쩍 번쩍거렸다. 당연히 코피는 터져 줄줄 흐르고... !! 지금 생각해도 아이쿠 우스워라... ㅎㅎㅎ 나는 그 스케이트를 애지중지 하면서 3년도 더 사용했다.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5)
기울어 가는 가문의 안타까운 형님의 모습!!
형님은 군대 시절에 늦장가를 들었고, 그 무렵 우리 집 경제는 형편이 없었다. 부친께서 병환 중이셨고, 종답을 두고 집안끼리 송사가 벌어졌고 또 형님이 장가드시는 비용 등등하여 집안 경제는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였다.
본래 호방하신 성품의 부친께서는 형님과 승부수를 띄웠다.
- 야 ! 시종아(형님 이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병들어 기운이 없고 이 쌀 30가마니가 우리 집 마지막 재산이다. 네가 큰아들이니 이 쌀 30가마니를 가지고 장사를 하든지 논 선작을 사서 농사를 짓던지 네 마음대로 해서 집안을 이끌고 가거라 !!
어 !! 어버님 이것이 무슨 말씀이오니까 ? 참으로 30세가 안된 시골의 청년 형님께는 날벼락일 것이었다. 군대는 겨우 갔다왔지만 초등 학교 2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세상 경험도 아무 것이 없는 형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님, 조카딸, 누나 셋, 그리고 나 이렇게 무려 아홉 가족의 가장을 일거에 물려받았으니...
시골집 한 채 밖에는 재산은 아무 것도 없고... - ....... ...... 몇 일간이나 형님 묵묵 부답.....
형님은 장사의 장자도 모르던 분이었으니 무슨 도리가 있었으리요. 부친께서 물려주신 쌀 30가마니로 가족들 1연치 식량을 남겨두고는 나머지 쌀 20여 가마니로 고향에서 논산 읍내 가는 길옆... 그러니까... 정확하게 논산 관촉사(동양 최대의 석불로 유명한) 앞들에서 선작 12 마지기를 사서 일년 내내 뼈빠지도록 농사를 지었으나...
겨우 본전을 찾기에도 부족했고 에라 ! 도시로 가자 ! 그래서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공항면 (지금 서울시 강서구 공항동)에 있는 외가의 친척 되는 분이 경영하는 안전제약소(당시로서는 꽤 큰 회사였는데) 에 취직을 하여 고향을 등지고 탈 시골에 성공하였다.
나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소! (마지막회)
형님의 마지막 편지 한 장
내가 고리에서 근무하던 어느 겨울날, 뜻하지 아니한 형님의 편지가 날아왔다. 참으로 처음 받아보는 형님의 편지요, 그 내용이 또한 너무 간절하였다.
- 동생, 내가 그 동안 술을 많이 마시고 집안살림도 돌보지 못해 동생에게 미안하네. 동생도 어머니 모시고 고생이 많겠으나 내가 그 동안 밀린 막걸리 값이 20만원인데 좀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는 마음을 잡고 바르게 살겠네....
아 ... !! 우리형님이 마음을 잡으신 단다 !! 나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뛸 것만 같았다. 그 때가 음력설 보름 전쯤이었으니 설날 고향에 가서 20만원 막걸리 값 갚아 드려야지..!!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편지를 받고서는 불과 며칠이 안 된 어느 일요일 오후 한가한 시간에... 따르릉 ! 따르릉 !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네? 아니, 뭐라고요 !!?? 전화소리에 예민하신 어머님이 먼저 눈치를 채시고는.. - 얘 ! 무슨 전화니 ? 엉 ! 무슨 전화냐 ??
전화에서는 어머님께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나 상황이 어떻게 숨길 처지가 아니었다. - 형님이... - 뭐 ! 얘야 ! 빨리 가자 !
오히려 앞장을 서시는 어머님을 떼어둘 방안도 없어서 급히 동네 약국에 가서는 현금 70만원을 빌려 가지고는 택시를 불렀다. 경상도 고리에서 충남 연무읍 까지... 나, 어머니, 아내, 아들 둘을 모두 태우고서 밤 택시는 고속도로의 공기를 갈랐다. 나는 어떻게 형님의 장례를 치렀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형님의 돌아가신 얼굴 모습이 무척 평안해 보였다는 것과 마지막 가시는 상여를 붙잡고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일 곱살 때 형님에게 스케이트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가 처음에는 거절을 당하고 엉엉 울었듯이, - 엉 엉 엉 ! 엉 엉 엉 ! 내가 너무 슬프게 우는 바람에 다른 가족들은 미쳐 울지도 못했단다.
나는 부친 산소 앞에 형님을 모시고 그 위에 차가운 흙이 덮일 때 다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는 울어댔다. - 엉 엉 엉 ! 엉 엉 엉 ! 이 미련한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형님이 마음을 잡는다고 좋아하다가 살아생전 단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다니...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고, 지금도 형님께 한없이 미안하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 세고의 외상값을 모두 정리하였다. 형님 ! 먼길을 편안히 가소 !
처음 딸아이가 신형으로 바꾼다며 버린 휴대폰을 주워 내 것인양 쓰게 됐을 때, 아직 쓸만했던 그 폰엔 이런 글이 새겨졌다. [솔향 폰 갖다] 그땐 글 넣을 줄도 몰라서 딸이 새겨준 말..
해가 가고 달이 가고.. 그 폰은 아주 아주 꼬진 탱크폰이 되었고.. 어느 때는 터지지도 않는 벙어리폰이 되었기에..
큰 맘 먹고 새 폰을 하나 장만하던 날, 나는 꽤나 엄숙한 포즈를 취하며 빛나는 새폰에다 이런 글을 꾹꾹 눌러넣었다. [새롭게 살자]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말.. 그러나 정말이지 그무렵의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주 새로운 삶을 살고싶다는 어떤 간절함에 속절없이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으니..
그러다 얼마쯤 후, 나는 그 말을 외출에서 돌아와 화장을 지우듯 쉽게 폰에서 지워냈다. 이유라면...글쎄.. 새겨진 말처럼 날이갈수록 새롭게 살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태의연함에 물들어 '새로움'을 향해서 전혀 '전진함'이 없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는데.. 실은 그게 "난 왜 이렇게 밖에 못 사는 거야..."하는 우울증 비슷한 '허무'로 '나'를 등떠밀고 있었던 것.
그 허무 앞에 맥없이 무너져내리기는 싫었던 건지 지금의 폰엔 다시 새긴 글귀 하나, 거대한 플랭카드인양 펄럭이며 떠 있다.
[생각했다면 행동하라]
속을 메우고도 허물어져내리기 일쑤인 '생각'들을 모질게 다잡아보고 싶었던 나름의 메시지.. '생각'하고도 '행동'하지 못한 게 얼마나 많았던지.. 그래서 얻지 못하고 잃어버린 게 많다는 '생각'을 했기에..
'생각'이 '생각'을 낳고 낳고 또 낳는 관념의 울타리 속에 갇히어 살았던 내 과거. 행동의 결과물이 불행일까봐.. 得이되기 보다는 失이 될까봐.. 그렇게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흐릿함이, 초조함이, 우유부단함이 이토록 가슴을 저려올 줄이야 몰랐었기에..
[생각했다면 행동하라] 지금, 이 짧은 글귀를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나가다 보노라니 슬며시 엄숙한 미소가 가슴을 치받고 오름을 느낀다. 머쓱해진 마음에 당장 무엇인가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나온 세월의 흔적만큼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뱃살이라도 흔들어 빼기 위해 동네 산자락이라도 올라야만 할 것 같은.. 흠,,,이 얼마나 엄숙함인가..^^;;
ㅎㅎ 다음엔 또 어떤 말이 휴대폰 첫화면에 불을 밝히며 새겨질 지는 알 수 없지만 슬며시 미소가 떠올려지는 엄숙한 이 글귀가 아직은 좋다. [생각했다면 행동하라].....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