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목마
      글 / 남도사랑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산드라는 예언능력을 지닌 대표적인 선지자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
    (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리었다)에 BC4000년 경 트로이 또는 트로야라고
    불리는 대 제국이 있었다.


    바다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으나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
    (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 왔다.


    이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헤카메의 딸인 카산드라는 오디세우스의 계략으로
    그리스 군이 남겨둔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자 결국 트로이는 목마에서 나온 군대에
    의해 멸망되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새롭게 출범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에 노무현은 당당히 취임했으며 그의 취임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의 역사가
    쓰여질 것으로 우리 모두는 축복의 박수를 보냈었다.


    이제 취임 4개월 여 남짓 그와 그의 정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같다.

    한 사람의 예언자가 아니라 수많은 카산드라의 예언을 물리치고 멋스럽게 당당히
    공포한 특검법에 의하여 설치된 대북 송금에 관한 특검의 결과가 발표되자 온
    나라는 벌집을 쑤신 듯이 시끄럽지만 그는 이를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특검을 주장했던 세력들은 더 강화된 특검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국회에
    제출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있으며, 남북이 서로 대화와 타협을 하면서 평화공존을
    이루는 것이 이 땅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력들은
    특검의 수사결과 발표를 보고 그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 6월 15일 한반도의 전 민중을 감격의 환희에 떨게 했던 저
    남북정상회담이 돈을 주고 산 것이라는 특검의 판단에 이제 노무현은 대답을
    해야한다.


    그 돈이 1억불이던 1원이던 만약 이 특검의 발표로 남북관계가
    다시 예전의 북괴 또는 남조선 괴뢰정부로 되돌아간다면 그 책임은 이 특검법을
    수용한 노무현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지만, 이를 빌미로 더 강경해진 미국이
    북한을 무력공격하고 북한은 남쪽을 폭격하여 이 땅이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 몰린다면 노무현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가봉 공화국을 아는가?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면적 26만 평방키로미터의 작은 땅에 약 120만 명 정도가
    사는 국민소득 3000달러정도의 소국인 이 가봉공화국의 봉고대통령이 지금 기억도
    가물가물한 박정희 정권 시절에 우리나라를 국빈으로 방문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물론 20년이 훨씬 지났으니 당시의 국민소득은 아마 500달러 내외나 되었을까?


    그러나 이 봉고 대통령을 환영하러 우리의 어린 학생들은 태극기와 처음 보는
    가봉공화국 국기를 양손에 나눠들고 연도마다 동원되었었다. 비동맹 외교라는
    북한과의 외교전쟁을 치르던 중이라서 지구상의 어떤 나라라도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어주면 감지덕지 하던 시절의 얘기를 지금 새삼 들추는 것은 당시의 외교와
    정상회담들에 지금도 밝혀지지 않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노태우의 북방외교 시절에 구 소련에 보낸 30억불의 차관 중 6억4천만달러를
    탕감해 줬다는 사실에 대해선 어느 정치인이나 언론 심지어 시민단체 마저도
    문제를 삼지 않고, 남북관계에서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렸던 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남북이 비밀회담으로 북한에 남한 쌀 40만 톤을 지원하기로
    깜짝쇼를 했던 사실들은 인도적 지원이란 이름아래 당시의 전 언론을 통해서
    홍보되었으나 누구 하나 그 절차적 정당성에 대하여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송두환 특검은 정부 지원금 1억 달러가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이 돈의 성격이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성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발표하였고
    모든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도 임동원의 해명은 귀퉁이를 채우는 형태로
    이제 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은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매도되어 버린
    것이다.

    트로이 제국은 카산드라의 예언을 무시하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는 우를 범해서
    그 목마에서 나온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노무현은 특검이 이 나라의 장래에 엄청난 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여러 예언들을 무시하고 그 절차적 불법성은 따져봐야 한다는 이유로 수용
    공포하였으나 기실은 반 김대중 여론이 팽배했던 보수주의자들과 영남정서를
    달래서 친 노무현화로 돌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검이 끝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한나라당을 필두로 이 땅의 메이져 언론인 조중동을 비롯하여 영남의 국민정서까지
    친 노무현으로 여론이 돌아섰으며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출범시의 약체정부를
    탈피해가고 있는가? 미안하게도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이 정부는 벌써
    레임덕 현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95%로 지지를 보냈던 호남 민심은 속심은 감췄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50% 내외로 절반의 지지층이 떨어져 나갔고 친 노무현 성향이던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 서민들은 앞길을 모르게 추락하는 경제난에 생업에 허덕이면서
    등을 돌리고 있고, 특검을 주장하고 동조했던 친 한나라당 세력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하게 똘똘 뭉쳐서 내년 총선에서 과반수 확보를 장담하며 내각제로의 개헌을
    야심만만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 땅의 목마였던 대북 송금에 관한 특검은 이제 끝났다. 그러나 취임 4개월에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레임덕현상에 빠져든 이 상황을 자칭 정치 9단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이 어떻게 수습해 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트로이전쟁


























70점 짜리 남편과 사는 친구 이야기 / 별빛







부제: 이런 남자 있으면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한 번 해볼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열두 어명의 친구들이 친목계 비슷하게 뭉쳐 다녔다.
이상하게 생일들이 1월(물병자리)에 거의 있었고, 개성(?)들이 강해서
남들이 볼 때 그렇게 같이 다니는 게 이상하다고들 했다.


대부분 애인은커녕 남친들도 없었고, 그 중에 나만 유일하게 남친이 많아
미팅이나 소개팅, 여행, 그때는 통금이 있어서 미드나이트(자정 전에 끝나는 건데,
30대 이후는 잘 모를거야ㅋㅋㅋ) 가는 것도 쉽지 않아서 모든 오락 연예부분을
부킹까지 때로는 내가 도맡아 섭외를 해야 했다.


또 친구 모친들이 나만은 유난히 믿음직하게(범생?) 생각하셔서 나랑 있다면
쉽게 외박이나 여행도 허락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내가 끌고 다녀야 했다.
하긴 친구들 중에 나 덕분에 처음 외박을 해보고, 텐트 잠도 잤으니까,
내가 그 친구들 물 버려 놓은 부분도 많이 있긴 하다.


그리고 꽤 늦은 나이까지 그렇게 몰려다녀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거나
35세 넘어 늦게 결혼을 했다.
우리 모두들 지긋지긋하게 결혼들을 하지 않아서,
친구 어머니들이 너희들이 뭉쳐있어서 결혼을 안 한다고 노처녀 소리를
들을 때쯤부터 나를 좋아했던 분에게도 구박을 많이 받았다.
하긴 그 중에 아직까지 결혼 안한 친구가 4명이나 되니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론이 너무 긴데,
그 친구 중에 하나가 36세쯤 결혼 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 남편이 사람은 괜찮은 거 같은데,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라 그런지
알코올 중독이 심각했고, 결혼 초기에 기 싸움도 어지간히 했다.
그러나 내 친구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의 남편을 휘어잡고 예쁜 딸 하나 기르면서
남편이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꼬박 집에 와서 먹는다고 투덜대면서도 잘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 친구가 자기 남편을 평가하기를 70점이란다.
그러면서 만일 다시 누군가를 선택해야할 때면 자기 남편을 다시 선택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끼와 감성, 그런걸 만족하기에는 남편만으로는 아니었는지,
몇 년 전부터 독일인 보이프랜드가 있다.
독일에 있으면서 매일 메일이 오고, 거의 일주일에 대여섯 번 전화가 오고,
하루에 두세 번씩 통화하는 적도 있다고 한다.
친구는 남편도 자기 아내 보이프랜드 독일친구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지는 모를 거라고 했다.


나는 그 흔한 결혼 한번도 못해보고 남자친구는 많이 있어도
보이프랜드는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건만 그 친구는 늙어가면서
가장 이야기 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근데 얼마 전 친구 딸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긴지 뭔지를 겪으며
친구랑 심하게 기 싸움을 하고 있는데, 딸이 불리하면 아버지를 끌어들인단다.
하루는 보이프랜드가 선물로 보내준 일제 하트모양의 유담포(일종의 핫백)를 가지고
아버지한테 말하겠다고 하다가 실제 아버지에게 그걸 보이프랜드가 보내줬다고
고자질을 하드란다.


그 친구는 워낙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자기 흠 잡힐 일은 안 하는 친구였기에
자기가 떳떳하다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이 딸 방에 놔둔걸 딸은 아버지가 그것으로
엄마를 공격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말한 것이다.


딸이 기대했던 아버지의 반응과는 달리 그 남편은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너 참 치사하다. 여자가 여자 편을 들어야지,
너 그러다가 왕따 당하면 네 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단다^^


딸이 기대한 것이 무참히 꺾인 것도 재미있지만, 그 남편의 말이
매우 신선하게 생각되어 그 남자 70점이 아니라 한 90점쯤 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 있으면 나도 남들 다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한번 해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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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소녀/박수근





      빨간 지갑


      글/바위


      며칠 전 강남역에서 용인으로 버스를 타고 오는데 발 밑에서
      무언가 걸리는 게 있어 집어보니 빨간색의 두툼한 여자용 지갑이었다.


      앞, 뒤에 아무도 없어서 주워들고 '이걸 어떻게 하지?' 하다가
      집에 가서 지갑에 연락처가 있을 테니 돌려주면 되겠다 싶어
      가져오게 되었다.


      집에 와서 지갑을 열어보니 주민등록증, 학생증이 2개(각기 다른 학교),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5개, 전화카드 5매, 교통카드, 사진 몇 장,
      극장 공연티켓 지난 것, 만원 짜리 상품권 그리고 현금 오 천 원 등
      가득 차 있는데, 어디에도 연락 전화번호가 없어 그냥 있다가
      다음날 아들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더니 하는 말이,


      "아빠, 요즘은 잘못하면 소매치기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
      우체통에 넣거나, 버리는 게 나아요."
      라고 하기에 그도 그럴 것 같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아침, 또다시 그 문제의 빨간 지갑이 눈에 뜨이는 게 아닌가?
      "아! 저걸 잃어버린 아가씨는 얼마나 속을 썩일 것인가?"
      나도 얼마 전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다시 발급 받으려고 읍사무소,
      면허시험장 등을 몇 번씩 다니고 카드회사에 전화해서 일일이 대답하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원망했던 일이 생각나서 그래도 본인한테 알려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갑의 학생증에 있는 용인의 Y대 학생처, 국악과 사무실 등을
      수소문해 겨우 연락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01x-xxxx-xxxx로 전화하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문자로
      "황x주씨 지갑을 잃어 버렸으면 연락바람.01x-xxx-xxxx."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후 전화가 와서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황x주씨 맞습니까?"
      "네"
      "이거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 어디입니까?"
      "서울인데요,
      '여긴 용인 신갈인데 지갑을 전해 주려고 서울에 갈 수는 없고,
      내가 오전에 밖에 시간이 없으니 학교 갈 때 신갈에서 전화하면
      줄 수 있으니 그렇게 하지요"
      "네" 하고 끊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분 후 내 전화로 문자가 들어 왔다.
      "나 안 갈 거야 지갑 샀어 "
      그래서 허, 참. 요즘 애들은 그런가 하면서
      내가 문자를 괜히 보냈나봐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황x주 지갑가지고 계신 분 맞지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맞는데 황x주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누구지요?"
      "저는 황x주의 오빠입니다."
      "그래서요"
      "그 지갑을 우편으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우편이고 뭐고 본인하고 통화해서 준다고 했는데 온다고 했다가,
      다시 안 온다고 하더니
      이번엔 웬 오빠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보내 달라니
      우편으로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서 우편취급소는 약 1km정도 떨어져 있다.


      "꼭 본인이어야 하나요?"
      "네, 본인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그럼, 그만 두지요" 라는 대답.....


      우리 같은 노인들에겐 지갑 속에 용인과 청주에 있는
      두개의 대학의 학생증이 있는 것도(동일인이)이상하고, 또 대학생 정도면
      자기가 잃어버린 지갑을 보관하고 있으면 고마움을 표시 할 수 있을 텐데,
      반말로 문자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래서 내가 소매치기로 오해받고는 절대 돌려주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서랍 속에 던져 넣고 한 시간쯤 지났는데, 전화가 울렸다.


      "아, 거기 황x주씨 지갑 습득하신 분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지갑을 습득하시면 규정에 파출소에 가져다주게 돼 있습니다"
      "대체, 당신은 또 누구시요?
      내가 주운 건 여자 지갑인데 왜 남자들이 전화해서 난리요?"
      "예, 여기 수서 파출소입니다."


      "규정이 어떻게 된지는 몰라도 난 지갑에 카드도 있고 해서
      본인한테 주려고 하는데 웬 경찰이 나타나 전화하고 그러슈.
      난 그렇게 못 하겠으니 본인이 직접 연락하든지 하시요."


      "물건을 주웠으면 당연히 파출소에 가져다줄 일이지
      이거 질이 나쁜 사람이구먼,"
      "뭐 질이 나빠? 당신 말 다했어? 파출소건 뭐건 난 그렇게 못하겠다"
      "이거 안 되겠구먼" 하면서 찰깍 끊는 게 아닌가?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발신전화번호로 전화했다.
      "수서 파출소 xix경사입니다."
      "방금 전 지갑 때문에 전화 받은 사람인데 통화한 사람 바꿔 주쇼.
      아니 지갑을 주워서 돌려주려고 연락했더니
      이젠 소매치기로 의심하는 지 그 놈 좀 바꿔 보시오."


      "지금 나가고 없습니다. 신고한 본인을 바꾸어 드릴까요?"
      "난 내가 통화료 내고 통화하기 싫으니 잃어버린 당사자보고
      당장 전화하라고 하시요"라고 하며 끊고 나니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 전화 건 경찰관의 이름을 묻는 걸 잊은 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또다시 문제의 그 오빠라는 작자의 전화가 왔다.
      하도 화가 치밀어서 "니가 황x주의 오빠인지 어떻게 아냐 이 나쁜 놈들아,
      잃어버린 본인이 직접 전화하지 않으면 이 지갑 버릴 테다.
      나도 너만 한 아들이 있는데 무슨 전화를 이따위로 하고 그러냐, 이놈아."

      "아저씨, 제가 말을 잘 못한 것 같네요, 그냥 그거 갖으세요."
      아!


      이때 옆에서 내가하는 말만 듣던 아내가
      "무슨 전화를 그렇게 흥분해서 막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젊은애들을 차분히 타일러야지 싸울 듯이 큰소리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에요."
      라며 나서는 게 아닌가?


      결국 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작은 말다툼까지 있었다.
      여러분 내가 정말 잘못한 건가요?
      50대와 20대의 대화가 이렇게 잘 안 되는 건 내가 잘못 풀어서 일까?
      그놈의 빨간 지갑이 버스에 없었다면, 또 아들 말대로 우체통에 넣었더라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고, 이런 꼴을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빨간 지갑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부딪치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고 화가 치민다.






야옹이 오라버니, 우리랑 함께 놀래요 ^^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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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굿맨의 자전적 소설











    베리굿맨의 자전적 소설 그1

    "베리굿맨의 봄은 잔인했다."



    봄은 과연 잔인한 것인가?

    봄!
    가슴 설레게 만들고, 희망을 불러오고,
    꼭 올 봄에는 내게 봄처녀가 와 줄 것만 같은 싱그러운 봄을 맞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내게는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잔잔한 슬픔이 몰려온다.


    1960년 4월의 봄.
    별채에 올린 글-어느 소녀에 대한 추억-에서 약간은 언급이 되었지만,
    내가 태어나 첫 번째로 맞게된 시련이 그 해에 시작되었다.


    4월 혁명.
    어린 나는 그게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지도 모른 채
    '탱크를 몰고 온 군인아저씨들'이 나눠주는 별사탕과 건빵에 현혹되어
    졸졸졸 뒤를 쫓기도 하고, 피투성이의 진명학교 누나들이 길가에 무참히
    쓰러진걸 보고, 겁도 없이 옆에 붙어 앉아,
    '누나 왜 이래? 어디 아파?' 이런 말을 묻기도 했다.


    그러길 몇 날.
    어느 날 밤, 아버지의 손에 끌려, 멀고도 먼 어느 산골자기 초가집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쌀이 없는 게 엄청난 고생이란 걸 심각하게 체험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어느 소녀에 대한 추억'을 남겨놓고 그 잔인한 4월에 대한 기억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숱한 고비를 넘고 고향인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데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다른 나라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생겼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1973년 3월의 봄날.
    국립중앙의료원-메디컬센터라는 말로 익숙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과과장님이 만나자고 한다.
    며칠 전, 아버지가 그 곳에서 간세포조직검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얘기다.
    이미 아버지에게는 '검사결과서-이상없음'이라는 형태로 전달된 상태라,
    특별히 내가 의사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나자니까 일단은 찾아갔다.


    의사:"환자(아버지)의 보호자가 특별히 없으니(어머니가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기 곤란하여), 자넬 오라고 한 걸세."
    나: "특별히 중병은 아니라는 서류를 이미 주셨지 않아요?"
    의사: "내 말 잘 듣게. 오늘부터 집에 가면, 이유불문 아버지께 온갖 효도를 다하게."
    나:" ...... 얼마 남지 않으셨군요? 몇 년이나 사실 수 있을까요?"


    순간 러브스토리의 주제곡, 비슷한 홍콩영화의 진추하가 부른 노래...
    이런 것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의사:"오늘 가시건, 내일 가시건 이상할 게 없네. 의학적으론 이미 사망의 단계를
    넘으셨네. 간암 말기 중에서도 중증이라네. 무조건 효도하게.'


    그렇게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어 눈물범벅으로 귀가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동생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누운 상태에서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의사가 매일 왕진을 오고..... 아버지는 심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내는 소리를 차마 옆에서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기를 몇 날 몇 일.
    난 평택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분은 내 얘기를 듣자마자 '아~,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착하게 살아온 M.S.이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이냐'하시며,
    한 동안 대성통곡을 하시더니 의료기구와 약품 몇 가지를 챙겨서
    급히 나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3시간이 넘는 동안을 택시 안에서 의사할아버지와 나는 계속 울면서 왔다.

    난 지금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진정시키며 진찰을 하기 시작하셨다.
    "얘, M.S.아! 크게 어려운 병은 아니니 시간이 좀 지나면 차도가 있을 게다.
    요즘 스위스에서 좋은 약이 생산되고 있으니 조만간 내가 사 가지고 올 거다.
    통증이 심한 것 같으니 모르핀을 좀 주마.
    푹 자거라' 이런 얘길 여러 번 되풀이하시며....."


    또 하루가 지났다.
    아버지는 기어코 장내출혈을 일으키셨다.
    호흡을 할 때마다, 입에서 코에서 범벅이 된 피가 올라온다.
    온 방안이 피투성이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무려 1리터 이상의 출혈이 있은 후, 아버지는 탈진상태로 빠져들고...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약간의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는 내게 속이 시원해지는 걸 달란다.
    사이다를 한 컵 따라서 한 모금 한 모금씩 흘려 넣어 드렸다.


    희미하나마 잠시 의식을 찾은 아버지의 유언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동생과 S의 흐느낌.
    끝내 어머니는 유언을 다 듣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가고...
    "S.K.야! 어머니를 위로하거라. 네 동생 잘 보살피거라.
    S는 심성이 고운 아이고 행동거지가 바른 아이다. 장성하거든
    꼭 그 아이를 너의 배필로 맞아, 아버지의 며느리로 삼아다오.
    고해성사를 못 하고 가는구나......"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것을 난 그 때 처음 알았다)


    다시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의사할아버지와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무언중에 알고 있었다.
    의사할아버지는 모르핀을 여러 대 주사하였다.
    (라이언일병 구하기란 영화를 보면, 총에 맞은 위생병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모르핀처방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다)
    잠이 든 아버지 옆에서 몇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서 떠났다.


    3일 후, 할미꽃이 피어오르는 동산에 아버지를 묻었다.
    관이 놓여지고 내가 한 삽의 흙을 뿌리는 순간,
    청천하늘에선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아이고, 이 분이 가시는 걸 하늘도 서러워하나 보군' 모두가
    이런 말들을 되뇌는 속에 아버지는 그렇게 차디찬 땅 속에 육신을 눕히셨다.


    내게 두 나라의 말을 가르쳐주시고, 천자문을 가르쳐주시고,
    양반철학을 새겨주시던 아버지. 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그 해의 봄은 내겐 잔인한 달이었다.







오윤/할머니




    베리굿맨의 자전적 소설 그2

    "베리굿맨의 봄은 잔인했다."



    봄은 잔인했다

    1974년의 봄.
    그 해의 봄날을 나는 진해훈련소에서 맞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나는 한 사람의 해병대원의 길을 가고 있었다.
    66킬로그램의 몸무게가 훈련소를 수료할 때는 56킬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눈에서는 광채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해병대 제267기 군번9390878'이라는 영광의 표식이 내게 주어졌다.
    「누구나 될 수 있는 해병대원이라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다」는,
    멋들어진 말 한 마디로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해군행정학교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갔던 나는,
    해병대창군이래 최고점수(600점만점, 598점수료)로 그 곳을 수료했다.
    注:해병대는 오로지 상륙전이나 기습공격을 전제로 한 '공격전문군대'이기에
    행정교육부서나 의료부서가 없다.(물론 '후퇴전술'이라는 개념도 없다.
    뒤쪽으로는 바다만 있을 뿐인데 어디로 후퇴하나? 옥쇄작전 뿐이다.


    그러니까, 용감무쌍한 거다.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택했으니 더욱 용감하다.)
    해병대복장을 하고 있는 군의관이나 위생병은 모두 해군에서 온 사람들이다.
    위화감을 없애려 그들에게도 해병대원복장을 입힌다.
    따라서, '펜대 굴리는 공부시키는 행정학교'가 해병대에 있을 리 없다.
    해군이나 육군에 필요한 인원만큼의 해병대원을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한 후
    되돌려 받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작대기 하나 짜리 이등병'이, 타군이 운용하는 교육 부서에 가서
    최고점수로 수료하자, 해군교육기관의 장(長)이었던 해군교육단장(장군)은
    감사하게도 내게 10일의 휴가명령을 내렸다.
    나는 어느 새, 최고의 전투력(기습특공대원1기, 특등사수, 태권도 5단 등)과
    행정능력을 겸비한 한 사람의 해병대원으로 변해 있었다.


    1975년의 봄.
    내게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작대기 짜리 사병이지만 '비밀취급인가자'의 위치에 있던 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해병대와의 합동훈련을 위하여
    어떤 함정에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어느 날,
    암호(알파, 브라보, 호텔, 로미오 등으로 사용하기도 함)로 수신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자식을 앞세웠다는 쓰라린 심정으로 살아가시던 할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내게 전보가 도착한 때는 이미 장례가 끝난 후.
    나를 지극히도 아껴주던 또 한 분을 그렇게 잃었다.


    내겐 할머니가 여덟 분이 있었다.
    57세까지도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의 집념의 결과다.
    그분은 아버지를 낳아주시고, 그래서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할머니였다.
    족보에 오른 세분의 할머니 중, 한 분이다.


    봄은 또 하나의 상처를 내게 남긴 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해병대의 시계도 그냥 돌아가고 있었다.


    1976년 8월 18일에 일어났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미군 장교, 사병 수명이 목숨을 잃었다.
    즉각 '데포쿤 투'가 발령되고, 그 시각부터 우리 해병대원들은
    하루 온종일 24시간을 완전무장한 채로 대기했다.
    화장실조차도 배낭 메고, 총 들고, 수류탄차고, 착검하고, 철모 쓰고 갔다.


    물론, 잠도 완전무장 그 상태대로 잘 수뿐이 없었다.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이 내려지면, 우린 구룡포 앞 바다에 떠 있던 미7함대의
    항공모함에 타기로 되어 있었다.
    '아아~, 낼모레가 제대인데.... 난 원산이나 해주 앞 바다에 뼈를 묻는구나, 아~~!'
    북쪽의 사과와 책임자처벌, 문제의 미루나무벌목을 조건으로 그들의 행위는 용서되고,
    '데포쿤 쓰리'로 비상태세는 한 등급 하강.
    1976년 9월 14일.
    드디어, 난 예비군복 한 벌로 전역을 했다.


    내게는, 고령으로 세상 떠날 날만 기다리던
    또 한 분의 할머니가 동쪽바다건너 이국 땅에 있었다.
    '조선'이 해방되어 어쩔 수없이 이 땅을 떠났던 그 분은
    나를 불러드려 자신의 곁에 두고자 했지만(할아버지는 4월 혁명 후에 사망),
    난 그분과 만나,
    '한국에서 한국의 가족 곁에 살아남기'로 했다는 뜻을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분은 나를 끌어안고 몇 일 몇 날을 통곡을 하셨다.
    내게 피를 나눠준 분은 아니지만,
    오직 나 하나만을 자손으로 알고 한 평생을 살아오던, 그분의 임종도 결국은 못했다.


    우리의 부모들에겐 해방된 조국이었지만,
    그분은 갑자기 여기가 '남편의 조국에서 낯선 땅'이 돼버리고...
    눈물로 귀국했던 그분은,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손자를 한 평생 기다리다,
    그 손자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곳,
    동경의 어느 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KEIKO TAKAHASHI, HAYASHI 할머니!
    이제나마 손자가 먼데서 명복을 빕니다.






밀레/휴식





    베리굿맨의 자전적 소설 그3

    "눈밭에서의 재기"



    어떤 남자가 외국생활 수십년만에 귀국했습니다.
    외국마눌도 같이. 제법 큰 기업에 간부로 불려온 거지요.
    그런데, 살다보니 여간해서 적응이 안되드랍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주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였지요.

    1.운전할 때
    외국 : 엉금엉금 기어가도 누가 뭐라 안함.
    여기 : 야! 이 똘아이빙신아! 운전도 못하는게시리..뒈질라고..퉤퉤.

    2.직장
    외국 : 가만히 있어도 일한 만큼 돈줌.
    여기 : 일보다는 눈도장을 잘 찍는 넘이 무조건 출세.

    3.핵교
    외국 : 명문 비명문은 있지만, 일단 회사 들어가면 같은 조건으로 승부.
    여기 : 외국핵꾜는 소용없음. 동창 힘을 못 빌림.

    4.술집
    외국 : 혼자 가도 됨.
    여기 : 혼자가면... 오빠! 실연 당했어? 마눌 도망갔어?

    5.식사
    외국 : 한식, 양식, 일식 이런 게 값이 대개 같음.
    여기 : 일식, 이거 정말 뒈지게 비쌈.


    좌우지간, 살아가기가 여러모로 힘들었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결국 노이로제에 걸렸지요.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더랍니다. 만사 의욕상실-이렇게 되었답니다.


    서른 몇 살 먹은 그, 스물 세 살 먹은 그의 마눌.
    그 : 밤이 무서버!
    그녀 : 날 좀 어케해봐!
    이런 결과가 되었답니다.


    직장에 휴직원내고, 다시 그녀의 나라로 갔답니다.
    요양을 간 거지요. 가족소유의 어느 별장에 처박혔답니다.
    신(辛)라면 몇 개, 술 왕창, 쌀 쬐끔... 이런 걸 가지고 그 별장에 진을 쳤답니다.
    그 곳은 별장촌이라 별장만 5백 채 정도 있는 곳이랍니다.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데가 없다지요, 아마.
    중국 따롄에 가면 대만사람들 별장촌이 있는 데, 그 곳과 거의 흡사하다고 합디다.


    그런데, 계절이 아닌 때(한겨울)에 갔기에, 오로지 이 사람네 부부만
    그 별장촌에 원시인처럼 남은 거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야산에 오르고, 내려와서는 온천욕하고-욕탕물이 온천수-,
    아무 때나 밥 먹고, 아무 때나 술 먹고, 티브이 안보고, 신문 안보고,
    전화조차 떼어버리고..... 그렇게 살았답니다.


    오후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한 십 킬로쯤 걸어가 '시골 파칭코'에서
    하루에 10만원정도 벌기도 하고...
    반경 5키로 이내에 사람이라곤 개미새끼하나 없는 데서,
    이런 모습으로 두 달여 간을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흰 눈이 엄청나게 내렸답니다(해발1500m정도의 곳).
    오고 또 오고... 내리고 또 내리고, 펑펑 내리고....... 무릎까지 덮일 정도였답니다.


    이 때, 이 분이 마눌을 끌고 밖에 나왔답니다.
    별조차 꺼진 밤에 오로지 불켜진 집 딱하나.
    온세상이 눈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한참을 마당에 내려서서 죽은 듯이 눈 내리는 하늘을 보았답니다.
    그렇게 한시간도 더 지나고... 추워오기 시작했답니다.
    오돌오돌 떨었답니다.


    마눌이 그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부비며 몸을 녹여주었답니다.
    그리고 위로도 해주었답니다. 이런 말로.


    아나타!
    이마노 마마노 안타오, 에에엔니 아이스루요.
    제히 간밧테요.
    아타시와 안타노 타메니 이키테루와.
    하나시타구나이카라 스테나이데 네.
    (번역)
    여보!
    지금이대로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제발 힘 좀 내세요.
    저는 당신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요.
    헤어지는 건 싫으니까 버리면 안돼요.

    이 친구, 빠져나갔던 용기가 한순간에 되돌아오더랍니다.

    "그래! 나에겐 적어도 응원군이 한사람은 있구나.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가,
    이 여자에게는 삶의 전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참아왔던 눈물과 용기와 욕망과... 이런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답니다.
    하얀 눈 위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뒹굴고, 뒹굴고 또 뒹굴었답니다.

    실로 일년이 넘도록 참아왔던 모든 응어리를 한번에 털어 내듯
    두 사람은 오열과 눈물로 눈밭을 녹였답니다.
    십분 이십 분....시간이 또 흐르고,
    눈이 녹아내려 눈(雪)물과 눈물이 같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물이 한껏 흘러내리고......

    그들은,
    그 이튿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답니다.
    두 손을 꼬옥 잡은 채....

    (그 후의 그의 마늘의 전언)
    내게 있어서 '최고의 밤'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눈을 내려준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천리포 수목원


참 아름다운 나무와 숲이 있었네


20세기 소년



해안선이 단조로워야 파도가 세고

파도가 세야 깎는 힘이든 쌓는 힘이든 세다.

굴곡이 심한 서해안은 좋은 백사장이 적다.

백사장이 좋아야 해수욕장이 될 터인데..




태안반도 끝자락 유명한 해수욕장 만리포.

긴 해안선에 백사장이 곱다.

그 옆이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로 작긴 해도 다 고만고만한 해수욕장이다.

거기 아름다운 천리포에 놀라운 곳이 있다.

천리포 수목원.




귀화한 독일계 미국인 민병갈씨가 1970년에 설립한 곳이다.

식물원은 초본식물과 목본 식물을 다 포괄하는 개념인데

수목원은 주로 나무식물원이다.




수익을 위한 곳이 아니라서 일반인은 입장할 수가 없는데

인연이 있어 메모리얼데이 연휴를 맞아 고교등산회의 이벤트로

그 곳 '감탕나무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됐다.




동료들이 잠든 이른 새벽 혼자서 둘러본 수목원의 아침산책은

내내 행복한 숲 속의 남자 요정이었던 순간이었다.

오전 10시 정말 요정 같은 도우미 아가씨의 정식안내를 받아

코스를 돌면서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실을 또 한번 실감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충북대 임학과를 다니다 휴학을 하고

이 곳에서 공부를 하며 지내는 요정 같은 이양의 얘길 주로 옮긴 것이다.




아침산책 때 보니 열매를 매단 채 그물 망 우리에 갇힌 10여 그루의

나무를 보면서 '야 되게 비싸고 귀한 나문갑다..혹 이 게 세계에서

우리 나라 밖에 없다는 그 미선나무 아닐까...' 이런 망상을 했다.




이양의 설명인 즉, 민병갈씨가 어릴 때 블루베리를 좋아했단다.

고향의 블루베리를 10여 그루 옮겨와 고향생각 하면서 아껴 먹는 것인데

새들도 매우 좋아해서 접근을 막느라 그물망으로 가두어 둔 것이란

얘길 듣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 곳이 보유하고 있는 수종이 1만 여종인데

표찰에 우리 이름이 씌어 있질 않은 게 절반이 넘는단다.

4, 50여 국에서 도입된 수종이라 딱히 명명할 필요성도 없고

마땅한 이름도 없었으리라...내 한 마디 거들었다.

"누가 나에게 이름을 붙여다오

네게로 가서 너의 나무가 되어주마"




곰솔원 가는 길에 근사한 나무가 있기에

'야 이 거 되게 비싸게 생겼다' 했더니

가장 아름다운 나무 셋 중 하나란다.

마로니에, 히말라야 시다와 더불어 금송. 무령왕의 관으로도 사용됐던 나무로

일본특산종인데 당시에도 왜와 깊은 인연이 있었노란 또 다른 웅변인 셈이다.



그 역으론 일본 국보 1호인 목제 미륵반가사유상은 일본에 없는

강송이 재질이란 사실인데 우리 땅에서 완제품을 제작했는지

재료만 가져갔는지 누가 제작했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




그 금송이 비싼 이유는 번식이 힘든 나무이고 성장도 더딘 탓이리..

수목원의 기능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유전자의 보전과 그 번식에도

의의가 있어 임산자원을 통한 국부의 증진이 포함됨도 당연하겠다.




참나무 숲에 이르러 상수리,떡깔,신갈,졸참,갈참,굴참나무가

다 참나무며 별도로 참나무라는 건 없다는 설명이었다..

나무가 탈 때 자작나문 자작자작타며, 회양목 닮은 꽝꽝나문

꽝꽝하고 타며. 집에 심지 않는 버드나무는 남편이 바람날까 해서고,

등나무는 집안 일이 꼬일까 봐서인데 등나무 집의 흰 꽃피는 등나무는

밑동이 버혀진 채 벌을 받고 있었는데 얘 때문에 좋은 소나무가 두 그루나 죽었단다.




나무를 감고도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아이비 종류완 다르게

숨을 못 쉬게 하여 감고 올라가서 다른 나무를 죽인단다.

너 죽고 내 살자는 식물의 세계에도 있어 저 역시 벌을 받고 있다.




굴거리나무란 놈은 새 싹이 난 끝자락 10센티 정도는 하늘로 향하고

바로 아래 작년 것 10센티 정도는 땅으로 향하고 있는데 아우에게

보다 많은 햇빛을 주려고 양보하느라 그런 이질적인 방향성을 보여준단다.

인간의 살이나 식물의 살이나 알고 보면 다를 게 없다.




역설로 보면 이해가 빠른, 돈나무는 똥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무의 향취가 너무 좋다보니 많은 벌레나 새들이 꾀어들어 똥을 싸제낀다나

그래서 똥나문데 본성과 다르게 사람들도 싫어하게 된 나무란다.

바람둥이들이 이쁜 여잘 안 고르는데도 깊은 이유가 있었네 그랴~~




그리고 잎 끝이 새의 부리 모양인 조구나무는 많은 열매들이

그냥 달린 채로 인데 그 열매를 새들이 사양한 결과란다.

대극과 식물의 대부분은 독성을 지녀 그렇다는데 새 똥에 섞인 씨가 있는

그 열매는 먹어도 안 괜찮겠나...싶다.




후박나무-잎이 매우 넓은, 법정 스님이 다이호우잉의

"사람과 아 사람아'를 후박나무 잎에 돋는 빗소리를

들으며 읽다가 울었다는-후박은 기실 '일본 목련'이고

진짜 후박은 잎이 작고 나무도 전혀 다른 나무인데

울릉도에 군락을 이루고 있고 유명한 울릉도 호박엿은 사실 후박엿이란다.




말채나무로 말 채를 만들며, 오이풀나무는 오이냄새가나며,

모감주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며, 마취목이 피어리스며,

낙엽이 깃털처럼 떨어지는 침엽수인 낙우송과 가로수로 식재 되어,

또는 살아있는 화석으로도 불리는 메타세콰이어는 분간하기 힘든 데

엇나기 잎과 마주보기 잎으로 구분하며 후자가 메타세콰이어.

자주색 꽃이 아주 크고 이쁜 녀석의 이름은 어김없이 꽃아카시아 이지만

아카시아란 잘못 부르는 이름일 뿐 아카시가 맞단다.




만 종의 나무에 만 가지의 사연이 왜 없으랴만 임학도인

이양이 다 알겠나, 그렇다고 내가 다 알며 시간이 무한하랴...




꽃이 진 꽃자루가 저리 예쁜가 하며 다가가서 본 미포비아.

그 자체가 꽃이라는데 단단한 통꽃이라 오해를 불러올 만 했겠다.

꽃자루를 살짝 치니 꽃꿀이 손등으로 살랑살랑 떨어진다.

많은 희귀 초본들도 잘 가꿔져 있었지만 여기선 나무 얘기로 그치는 게 좋겠다.




숲길을 걸으며, 나무를 보며, 만나며 숲이 주는 향기와 평화 속에서

수목원을 도는 두어 시간은 행복어 사전을 뒤지는 순간이었다.

이 곳의 여러 면을 자세히 보려면 통합검색해서 천리포수목원

사이트로 들어와서 샅샅이 살펴보면 그 자체로도 너무 좋다.






천리포 수목원의 앵초



천리포 수목원의 나무






















안녕하십니까?








어느 날의 일기 글/이슬초



어제 낮에는 근처 목장엘 다녀왔다.
크리스틴의 친구 집인데 헐러데이인을 가는 길목에서
왼쪽으로 난 철길 옆길로 접어들어 한 15분 정도만 가면 되는 곳이다.

이곳은 시외로써 수돗물이 공급이 안되고 자가펌프수도이며
피자 배달이 또한 안 되는 곳이란다
가는 길목엔 유채꽃밭이 아름답게 펼쳐있었고 목장 앞은
넓은 푸른 초원과 휀스로 이어진 전형적인 미국농가였다


그녀의 집은 높은 나무들 속에 서 있는 오래된 목조 집으로
옛날의 한 영화를 누렸음직한 푸르고 넓은 초원 깊숙이 자리잡은
높다란 기둥이 위풍스레 받쳐진 3층 짜리 하얀색의 부모님 집과
그 옆쪽으로 위치한 조금은 허름한 2층 농가주택이었다.


뒤쪽으론 일하는 사람들이 기거했음직한 2 베드룸 컨테이너 하우스
또한 여기 저기 지어진 높은 지붕의 말구유 간들과 닭들과 염소들의
축사들, 농기구들을 넣어두는 헛간, 광 등 그야말로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그런 곳이었다.


집안은 오래된 목재들로 빛 바랜 갈색들이었으며
창과 문틀, 카펫바닥과 여닫이방충망 부엌의 찬장 등은 허름했으나
집안에서 맴도는 구수한 빵 냄새와 말린꽃 향 항아리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 오래 된 손때 묻은 피아노와 골동품 같은 가구들,
철제 페치카와 창가의 라일락 꽃병, 시골스런 커튼 등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었다


널찍널찍하게 짜여진 아래층 생활공간들과 푹신한 카펫으로 덮여져
아이들이 미끄럼 타며 깔깔대며 오르내리는 비좁으나 정겨운 층계와 나간들,
이층의 아이들 놀이방들과 침실 다락방에는 이리저리 인형이며
장난감과 침구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널려있었고 쪽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마구간과 목장 안에 말들의 풍경은 창가에 늘어진 단풍나무 그림자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안 주인인 "엔 마리아"는 30세 전후한 남미 풍의 검은 속눈썹이 유난히
고운 미인인, 알고 보니 크리스틴네 집에서와 그 밖의 장소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특별히 상냥하고 친절하였던 여자로 기억되는 여자였고,
그 남편은 블루진이 멋지게 어울리는 "커튼"이라는 훤칠한 잘 생긴 남자였다.
에니이과 케롤라인이라는 4살과 5살의 예쁜 두 딸들이 있었고
이들은 목장에 있는 동물들과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크리스틴이 가져온 외할머니 도로시의 레시피로 피자를 만들었다.
그 레시피의 피자는 나도 좋아하는 것으로 여러 번 크리스티나와 만든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쿵쾅거리며 요리조리 드나듦이 많은 방들을 위아래 층으로 몰려다니며
재잘거리고 네 군데나 있는 밖으로의 출입문은 쉴새없이 "탕탕"거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이들 놀이기구 뒤편 초원에선 4 마리의 건장한 말들이
줄지어 늘어 선 나무그늘아래 휀스 너머로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밖을 내다보는 나를 보고 앤마리아는 나가서 보라고 권한다.


그들이 피자를 만드는 동안 나는 젖소무늬의 오버롤를 입은 카멜라를 안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잘 다듬어 놓은 넓은 잔디밭 옆 긴 휀스를 따라
야생마들처럼 힘차게 오르내리는 말들 옆으로 다가가 보았다


얼마나 털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건실하게 잘 생겼는지
몸집이 우람하게 큰 엉덩이와 근육의 탱탱함이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키 큰 나무로 이어진 휀스 아래 그늘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누런 황토색이 드러난 그 그늘에서 서로 목을 기댄 채 쉬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니 또 한바탕 앞발을 높이 들며 달려나간다.
덩달아 나머지들도 내닫는데,
푸른 초원 언덕을 배경으로 힘차게 달리는 그들을 보며
"아! 멋있다"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무 아래 휀스 옆으로는 천연의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넓은 정원가로 거닐며 흰색의 부모님 집 뒤쪽을 보니
오색의 파라솔과 썬텐 의자들이 놓인 넓은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은 넓은 덮개로 덮여있지만, 한여름에는 온 식구가 즐거이
퐁당거리며 바비큐 파티를 열고 놀았을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는 만들어진 피자를 먹고 바로 어젯밤에 태어났다는
망아지를 보러 케롤라인과 에니이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얼른 자기들의 부츠를 신고 앞장서 달린다.
높은 지붕 말구유간으로 들어선 우리는 살금살금 "쉿쉿"
숨 죽여가며 다가갔다


거기에는 아기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앞머리에 흰v자가 새겨진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예쁜 망아지 한 마리가 눈만 끔벅이며 쳐다보는
엄마 옆에 붙어서 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긴 다리는 아직은 힘이 없는지 가끔은 비척거린다.


3 살 짜리 킴벌리, 5 살 짜리 새뮤엘 에니이와 케롤라인은 4단 높이의
가로막대에 올라가 제 딴에는 조용히 한답시고 쉬쉬 거리며 눈들을 반짝인다.
그 큰 마구간에는 10여 개 이상의 마구간들이 두세 칸으로 줄줄이 있었다.


하기는 앤마리아 말로 말들이 30여 마리란다.
우리는 목장 밖의 야외우리를 따라 아이들이 안내하는 한 달 짜리
망아지를 보러 따라갔다.
이리저리 꼬불꼬불 말우리 사이의 풀밭 길로 따라가는데,
우리 속의 말들이 고개를 내밀고 다가온다.


킴벌리가 소리를 치며 무서워하여 치켜 안고 도망을 갔다.
가는 동안 에니이와 케롤라인은 고개를 내민 말 콧등을 쓰다듬으며
이름을 부르고 휀스 안으로 배도 쓰다듬고 하면서 간다.
그들도 다 이 아이들을 아는 모양이다.


한 달 짜리 망아지도 웬만한 조랑말만 하였다.
그는 아직도 엄마의 두 젖을 이리저리 번갈아 빨고 있었다.
우리는 또 한 달이 조금 지났다는 세 번째 망아지도 보았다
역시 탐나게 예뻤다.


다음은 여유롭게 드러누워 마른 짚을 씹어 먹는 젖소우리를 지나
염소우리로 갔다. 모양이 특이하게 밤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가
두 줄로 머리로부터 엉덩이까지 줄쳐진 귀여운 작은 몸집들이었지만
성질은 괴팍한가 보다.
풀을 따서 디밀어주는 새뮤엘에게 머리의 두 뿔로 팡팡 휀스를 부딪친다.
휀스 구멍사이로 박힌 뿔을 빼느라 안간힘을 쓰는 염소를 보고
아이들은 좋아라 웃는다.


다음은 옆에 붙은 닭장으로 가야하는데, 아이들은 키가 작아
가로로 올려진 말 울타리 사이를 벌써 물살처럼 빠져나갔으나,
키가 큰 크리스틴과 나는 휀스를 올라가 말구유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휀스를 타고 넘는 재주를 부려야 했다.
9달 짜리 카멜라는 손에서 손으로 날아서 넘고.


닭우리의 닭들은 목이 긴 수탉 한 마리만 풀숲마당에 나와 있었으나
이 녀석이 "꼬끼오~~"하고 울어 제치니 신기하게도 닭우리의
조그만 문 하나로 한 마리씩 한 마리씩 "꼬오 꼬꼬댁" "꼬오 꼬꼬댁"하며
암탉들이 나오는 것이다.
하얀 닭, 붉은 닭, 흰줄, 검은 줄 닭, 벼슬 높은 닭, 새끼 닭, 줄줄이, 줄줄이
아마도 수탉이 무슨 말들을 전한 것 같다.
"애들아 나와라, 여기 이상한 동물들이 왔다 하고"


그 동안 앞머리 털이 길어 숏커트를 시킨 4 마리의 쫄랑쫄랑 강아지들과
우람한 몸집이지만 착하기 그지없는 누렁이 한 마리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말 우리에는 들어가지 않고 앉아 있다가 눈치보며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갈라 치며 말들이 "히히힝"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다가 다시 쫓아와 우리들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부비며 알은 체를 한다.
그러다 저쪽 휀스 밖에서 그 잘 생긴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덜거덕 덜거덕" 달려갈 때면 갑자기 두 발을 힘껏 내저으며
그들을 쫓아 휀스 사이로 휭하니 사라져 버린다.


다음은 옥수수와 완두콩, 토마토와 허브들을 심어놓은 채마밭으로 갔다.
앤마리아 말로는 흙이 좋지 않아 잘 안 된단다.
보기에도 그랬었다 스프링쿨러는 두 군데나 있었지만
이 넓은 곳들을 다 관리하려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 듯 땅이 메말랐다.


에니이와 케롤라인은 들쥐같이 민첩하였다.
아직은 꼬마숙녀들인데 착 달라붙는 칠부 바지에 부츠를 신고 잘도 높은
마구간을 오르내린다


우리는 한바퀴를 돌아서 이번에는 고양이와 개들이 함께 뒹굴며 노는
헛간으로 안내되었다.
이곳 역시 마구간같이 높고 큰집으로 오만가지 잡동사니의 집합소였다.
입구 쪽으로부터 말안장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세어보니 10여 개가 놓여있다.
아까 처음 오다가 뵌 할아버지가 아주 깔끔하신 분인 것 같았다.
헛간이나 목장도 구석구석 아주 깔끔하게 잘 정돈된 모습이 보인다.


이곳에도 앞으로 죽 늘어선 모형말 위에 안장들과
그 뒤 벽에는 수십 개의 말기구들이 안장과 어울리게 걸려있었고
"ㅁ"자로 한바퀴 돌게 만들어진 광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선반을 만들어
무엇에 쓰는 물건들인지는 모르나 빼곡이 가득 차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캄캄하여 크리스틴과 더듬더듬 들어가는데
앞서간 아이들이 "ㄱ"자로 꼬부라진 한쪽에서 빨리 오라고 성화다.
우리는 더욱 캄캄한 속을 무엇인가에 머리를 부딪칠까 조심하며 가보았더니
새뮤엘과 에니이가 여러 겹으로 쌓아놓은 타이어더미 위의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서 무언가 열심히 보며 재잘거린다.
아래선 3살배기인 킴벌리가 저도 올려달라고 안달을 하고....


멀리 뒤쪽으로 보이는 열어 논 광 문과 옆쪽에 희미하게 비치는 창문 빛
사이로 유심히 바라본 담벼락 서랍사이로 무언가 두개가 빤짝인다.
올라선 두 꼬마는 "쉿쉿"하며 미야우 새끼란다.
자세히 보니 정말 새카만 고양이 새끼였다.
킴벌리를 안아 올려 보이며 자세히 다시 보니
아니 반짝반짝 요리조리 움직이는 눈동자가 4개가 아닌가.


두 마리의 새카만 아기고양이는 갑자기 찾아 온 불청객들에 주눅이 들어
자꾸만 숨을 곳 없는 서랍사이로 파고들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와~~, 미야우, 미야우,"하고 외치고
이곳의 타이어는 에니이와 케롤라인이 자주 매달렸는지 캄캄한 중에도
반들반들 윤이 나 있었다.


우리는 "ㅁ"를 한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에니이와 케롤라인은 모형틀 위에 올려놓은 말안장 위로 올라가 부츠로
몸을 치며 달리는 놀이를 한다
할아버지가 아이들 몸에 맞게 잘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자기들의 말채도 있고 말 이름도 있으며 아주 익숙하게 장단 맞춰
채찍질을 한다.. 아마 자주 말들을 탔을 것이다.
우리가 밖에서 말우리들을 돌며 구경할 때도 "커튼"은 말을 타고 목장을 돌며
훈련을 시키는지 원을 그리며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보았다.
크르스틴이 배고프면 피자 먹으라고 소리치니
"OK ~~~"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에니이는 더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지 컨테이너 앞에서
오라고 손짓한다. 들어가 보니 소파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진
투 베드룸의 빈집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카펫 방들은 채광이 밝아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밖으로 나오니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문 앞에서 뒹굴고 있다.


앤마리아와 이야기를 해보니 그녀는 꽤 인텔리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고 2년 전에 졸업했고 수학이 부전공이란다.
이곳으로는 2년 전에 이사와서 부모님들과 함께 산단다.
여름 더울 때는 아무 때나 와서 수영도 하라며 친절하다
크리스틴과 나는 다음 번에 다시 와서 사진도 찍어야겠다고 하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오는 길에 아직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강아지풀이
있기에 반가움에 한가지를 따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돌아오며 이곳에 사는 에니이와 체롤라인 그 들은 이 다음에 커서
정말 좋은 유년시절을 추억할 마음의 보고를 간직할 것이다란 생각을 하였다.















..


















그림/서루나


한 여자가 있었네


Peace


한 여자가 있었네.
그 여자 물푸레나무처럼 가냘펐었네.
지 몸속의 초록 이파리 물에다 띄워놓고
가끔은 속눈썹 적시며 눈물도 흘렸네.


어느 날 그 여자
구름을 물고 있는 하늘을 잡아당겨
새(鳥) 점을 쳐보네.
까치가 노래하면 기쁜 소식인가요?
까마귀가 울면 슬픈 소식이 들리던가요?
그 여자 감나무 가지에 귀 기울여
새들의 음색을 밝히려하네.


그 여자 한 사람을 사랑했네.
나무숲이나 바위틈에 가려진 그 사람
눈을 감아야 만이 볼 수 있고
마음의 별들이 반짝거려야 만이
만질 수 있는 그 사람.


그 사람 저 수평선 너머 썰물처럼 멀어졌다
못견디게 그리워 밀물되어 다가오네.
그 여자 멀어지는 슬픔과
다가오는 기쁨을 악보에 그려넣네.
그 여자 결코 울지 않으려하네.
구속하지 않으려하네.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풀어 놓으려하네.


한 여자가 있었네.
물푸레나무처럼 가냘픈 그 여자
맑은 물에 띄워놓으면
지 몸속의 초록물 아낌없이 우려주는
수정목 물푸레나무.


한없이 퍼주고도 못내 아쉬워
바닥까지 다시 들여다 보는
한 사람을 사랑한 그 여자.
낮은 바람까지 쓸어모아
악보에 그려넣고
나무잎에 달려있는 햇볕을 쪼으면서
새 처럼 자유롭게 사랑을 노래하네.
물푸레나무같은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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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 지방대학

    글/핸섬보이


    작년 이맘때는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로 희망이 넘치는 나라였다.
    그리고 질서 정연한 응원을 보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을 볼 수 있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우연한 기회에 실망을 많이 했다.
    요즘 공장에서 기계 및 금형 고급설계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이 계통 공부는 이제 인기가 없어 서울대학조차 인원미달을 걱정해야할 지경이니,
    지방대학은 학과 자체를 폐지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부산에 있는 어느 대학은 부도가나서 내년부터는 비인기 학과인 이공계 학과는
    더 많이 사라질 것 같다.
    우리가 젊을 때는 일본이나 독일 스위스 등 선진국에서 어렵게 기술공부를 하고
    어떤 제품을 개발할 때도 창조적인 방법으로 개발해 보려고 무진 고생도 하고
    노력도 많이 했다.


    이젠 그런 엔지니어들이 우리세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깊어간다.
    나는 어렵게 배운 기술자료들을 지방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몇 년 전부터
    부산의 B대학에서 무료로 또는 약간의 강의료를 받아가면서 틈나는 대로 열심히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학교도 작년에 그만 이학과를 폐지하고 말았다.
    우리는 청자 기술의 맥이 끊어진 것을 잘 알고 있다.


    기술천시, 기술자의 열등감 등 여러 가지로 맥이 이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엔지니어들의 직장이 불안정하고 사회적으로 좀 뒤쳐지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요즘 공대생들의 일반적인 생각들이다.
    오늘아침 관계하는 대학교수와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일찍 학교에 갔다.
    교수는 삼십 분 후에 도착한다고 해서 연구실에서 기다리려고 가보았다.
    연구실 한 쪽을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몇몇 알고 있는 3학년생과 1.2학년 여학생 둘 어제 저녁 늦게 까지 일하고
    토의한다고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스티로폴을 갈고 여덟 명이 엉켜서 자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의 실상인가!


    우선 창문을 열고 고함을 질러 기상을 시켰다.
    평소 잘 아는 학생들이라 허둥대며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세수하고 모이라고 했다.


    "오늘은 너희들의 선배로써 너희들의 생각 좀 들어보자.'

    여학생보고
    "외박을 하면 부모님 걱정이 많을 텐데 걱정을 하니?"
    "사정해서 허락을 받았으니 괜찮습니다 했다.'

    남학생에게
    "허구한날 소주만 마시면 너의 미래는 어떻게 되니?" 하고 물어 보았다.
    "고학년들은 벌써 지방대학의 핸디캡을 안고 취직이 되겠습니까?
    너무 걱정이 많이 됩니다,
    저학년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 입학 시험을 보려 하는데
    부모님 반대로 시험을 보지 못해 화가나 요즘 집에도 안 들어갑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줄까~~ 생각 하다가
    일본의 만년 연구생 다나카 고이치씨 생각이 나서 이야기를 좀 해주었다.


    "야, 다나카는 지방대학 출신으로 대기업 시험에 여러 번 떨어져 지방 중소기업에서
    만년 연구주임으로 노벨 화학상까지 받았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느냐.
    출세나 수입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 해보는 것도 젊은 날의 행복이 아닌가.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면 무엇하니, 그 장비 하나 개발하지 못하는 나라.
    초박판 티비 수출해보아야 일본에 이득만 주고 액정을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 해야하는 실정인데. 공대생들이 할 일이 많다.
    다나카씨 책을 한번 읽어보고 힘 좀 내라."
    그리고 악수하며 간단한 위로를 해주고 끝냈다.


    정부의 전문 관료들을 정치인이 아닌 전문 분야 출신들 가려 써야한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수산대 출신이 했다면 일본하고 해양협정시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설부는 건축과 출신이 각분야에 이공계 출신을 좀더 많이 뽑아주고 대기업도
    이공계출신 임원들을 많이 발탁한다면 지금처럼 비인기 학과는 면할 수 있을 텐데,
    교육은 백년대계라 기술인력이 부족한지금 지방대학과 이공계를 살리는 길이
    나라의 백년대계다.
    지방대학. 그리고 이공계대학 후배들아 힘 좀 내라, 파이팅!








    나마스떼

    글/핸섬보이



    날씨가 더워오니 나의 마음의병이 슬슬 도지려고 한다.
    우선 더워지면 마음이 답답하여 어디론지 며칠 일상을 버리고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몇 개월은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더운 날씨가 되면 인도가 생각난다.
    인디아.~~ 처음 갈 적에 정말 호기심이 많은 나라였다.
    인구도 많고 극과 극을 달리는 나라 가야국의 허황후 고향.


    이런저런 호기심으로 봄배이 공항에 내렸는데, 첫인상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도시는 소음과 매연으로 가득하고 소와 개와 돼지 염소가 수많은 사람과 뒤섞여
    어슬렁거리고 자동차는 끓임 없이 경적을 울려되고 매연과 소음으로 묘한 냄새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십 루피 백장을 환전하여 한시간도 안되어 돈 달라고 손을 내미는 아이들에게 주다보니
    정작 주어야할 식당에서는 주질 못해 미안해하고 아무튼 첫인상은 그렇고 그랬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때 강렬한 힘과 강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이 존재하는 나라 신을 선택하는 나라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태어난다는 것은
    신비이고 죽음을 축복으로 아는 나라.
    인도 사람들의 크고 검은 눈동자엔 자비가 가득하다 .
    No problem .You are happy. I am happy.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가진 것은 없어도 늘 마음은 부자인 사람들 타골과 간디의 나라다.
    그리고 세계최고의 세공기술은 인도 사람들인 것이 분명하다.
    딱딱한 상아 조각과 타지마할의 대리석 조각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인도인 집을 방문 해보면 나마스떼 하고 정중히 인사하고 맞아준다.
    나는 뜻도 모르고 그냥 나마스떼 하고 같이 합장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신이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나마스떼를 많이 하고 다녔다.
    가는 곳마다 신비가 가득한 나라다.


    나라가 크다보니 삼분의 일도 못보고 왔다.
    아! 인도에 가고싶다.
    타지마할의 신비로움...갠지스강의 풍경들. 한낮의 스콜
    나마스떼, 나마스떼
    인도여 기다려라~~~~







    http://column.daum.net/opened/열린마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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