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정어머니의 팔십세되시는날입니다
원 생일이 오늘이지요
오빠가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드리고
점심은 외식을 하기로 하였읍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세째동생이 아침에 참석을 못하여서 그리되었읍니다

예약된 식당에 모두모여서 즐거운 식사를 하였읍니다
오빠덕에 맛있는 일식을 먹어본다며 우리 네딸들은 즐거워하였는데

친정아버지가 하시는말에 모두들 숙연해졌읍니다
"아 오늘 내가 한마디 하마,
얘들아 난 너무 행복하다"하시더니 말끝을 못맺고 흐느껴 우시지 뭡니까
울딸들도 모두들 영문도 모른채 눈시울을 붉히고....

아버지는 눈물을 거두시더니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나온단다
하시며 애써 변명처럼 말씀하시고는

조금있다가 또 흐느껴 우십니다
여기있는 너희들 모두다 행복하고 너의에미도 다 행복한데
나만 불효다 하시며 목놓아 우십니다
젊어서 헤어져 생사도 모른채 반백년을 넘게 살아오신 아버지
부모님께 효도한번 해보지 못한채 다 저세상으로 가신듯하여
목이 메이십니다
당신은 아들딸에 둘러쌓여 생일날 어버이날 명절날마다
자식들에게 효도받으시는데
정작 당신은 하고싶어도 할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다시금 아버지의 눈물에 나도 눈믈이 납니다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으시면 삼촌들은 만날수 있을거예요
우리 오빠보다도 한살이 아래라는 막내삼촌이나 그위의 고모는
만날수 있을거라며 위로를 해드리고 점심을 끝냈읍니다
6.25의 비극은 아직도 끝날즐을 모르는군요






내 고향 고양과 파주

돈암초딩 시절에 방학하면 쪼~르르 달려가던 고향
서울역서 90원 짜리 기차표 사고
일산역서 내려 산과들을 지나고 논밭의 푸르름을 만끽하며
걷다보면 울 할머니는 오이밭에서 머리에 수건 두르시고 일하시다가
반갑게 달려오시던 그곳~~~

지금도 그할머니는 살아계십니다
압구정동 우리집을 오시려면 택시기사님한테 악기동 가자 했다는데
신기하게도 알아듣고 모셔다 주더랍니다

그곳에서 20 리에 파주 금촌은 외갓집
일산서 싫증나면 또 그곳으로 이동~~
20 리 길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이모하고 나무이름 맞추기
산에 들어가 항아리 버섯,싸리버섯,기와버섯등...따고
산나물도 뜯고 했기에..

넘 방갑게 맞아주시며 옥수수,감자,단호박, 쪄 주시고
원두막에 나가면 참외,수박밭에서 냠~냠 하다가
강가로 나가 배도 타다가 수영도 하다가
팬티 하나만 걸치고 (ㅋㅋㅋ) 강으로 풍덩~하면 고기반 물반....
보리새우,버들붕어,송사리,미꾸라지 등...
손으로 더듬어 고기잡아 강아지풀에 아가미를 꿰어 가져오면
외할머닌 털래기(?)란 수제비도 뜯어넣고 고추장 풀고 버섯도 따다가
맛갈나게 끓여 주셨는데...외할머닌 몇년전에 하늘나라로...

소근소근 귓속말: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에 이모랑 토끼먹이 풀 뜯으러 산에 갔다가
쉬~~하고 나니 빨간 피가 보이는거예요
이모는 억센 풀에 베었다고 했고 외할머닌 빨래를 하시곤
급하게 제 방학 숙제등을 챙겨서 기차타고 칙칙폭폭~~
집에와서 부랴~부랴~~엄마랑 소근소근---시장가서 하얀 애기 기저기감
끊어다가 거시기 접는법을 아무리 갈쳐줘도 난---몰랑
히히히 키가 반에서 뒷줄이었으니---첫 생리를 시작 했던거죠
우~하하하하 엄마가 깨끗이 삶아 말려 다시 갈쳐주는데 울 남동생이
이거 뭐하는거야? 하는데---난...얍~~! 이것 니 마스크 해라~ 하면서 입에다 갖다 대보고...
ㅋㅋㅋ 철부지가 와 그리 빨리 첫경험을 했는지..

지금은 그곳 보라,하얀 도라지꽃밭이 있던 외가집터는 모두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렸어요 너무도 아름다웠던 내 어릴적 고향이 말입니다

경산님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고향이 절 부름을 느낍니다
1 시간이면 자유로~~금방 가는 길인데...
가까운 날을 잡아 그곳에 가렵니다

그리운----일산 & 파주여~~~~~~~~




<사패산 헤매기>

- 1 -
9시반에 김선생을 만나기로 했다. 나이먹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약속시간을 일찍도 잡았다. 어제(6.8) 사패산 가자고 전화가 왔길래 시간 장소를 정하라 했더니 회룡역에서 9시반이란다. 전철갈아타는 시간이 좀 걸려서 약속시간에서 6분 늦었다. 김선생은 벌써 나와계신다.

화장실에 들러서 큰일을 보고 슈퍼에 가서 청하 한병을 샀다. 요즘 계속 그 모양이다. 속이 안좋다. 하루에도 몇차례 화장실신세다. 그래 소주를 끊었다. 이젠 소주한테 진다. 번번히 지는 것을 안진다고 빡빡 우겨봐야 나만 곤해지니 이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끊은지 벌써 한달이다.

김선생이 이런다.
< 아 지도를 가져온다하다가 깜빡 잊었지 뭐요. 안주는 챙겼는데... 요즘 이 모양이라니까...... >
사실은 나도 집에서 나와가지고 한 10분 후에 아차 했다. 나도 지도를 깜빡한 거다. 왜 그러는 거야... 나이도 어린 사람이...

- 2 -
회룡골 매표소를 통과했다. 등산객이 별로 없다. 부근에 구멍가게 한개하고 음식점 한개뿐이다. 김선생은 요즘 인절미를 등산점심으로 가지고 다니시는데, 오늘 인절미를 사지 못해서 여기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려했지만, 빵도 없단다. 손님이 없으니 빵을 들였다가는 상해서 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하늘엔 고가도로가 높고 웅장하게 걸려있다. 등산로는 차가 다닐만큼 너르고 포장이 잘되어있다. <사패산 터널 신설반대> 플래카드도 보인다. 한 십년전인가 여기 왔댔는데, 그땐 아파트도 없었고 고가도로도 없었지...

코스를 어떻게 잡을 거냐고 물었다. 사패산에 올랐다가 송추계곡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회룡으로 되돌아오든지 란다. 일단 정상에 올라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숨차고 힘든다. 왜 그러지? 전엔 안그랬는데... 김선생은 저만큼 앞서서 잘도 간다. 작은 키에 깡마른 분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차림새도 멋지다. 등산화에 긴양말, 니커보커바지, 등산복 상의에 망으로 된 조끼, 멋진 모자, 빨간 배낭을 메고 오른손목을 빨간 손수건으로 동였다.

나는 어떤가? 내 차림새엔 <등산용>인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따라 거치적거리는 게 싫어서 등산화를 신지 않고 그냥 운동화를 신었다. 바지는 그냥 작업복바지. 셔츠도 어제 입던 것. 모자도 어제 쓰던 것. 바지주머니 세간도 없앴다. 지갑도 놓고 오고 핸드폰도 배낭에 넣었다. 배낭은 어떤 구두가게가 폐점세일할 때 천원주고 산 거다. 양말도 보통 때 신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이 자꾸 흘러내린다. 등산시작한지 20분도 못되어서 양말이 발바닥에 걸려있다.

- 3 -
회룡사입구를 지나서 석굴암에 이르렀다. 길은 거기까지 너른 포장도로다. 마땅치 않다. 절에 다니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산속에 그렇게 너른 포장도로를 내서 자동차소음과 매연으로 산을 오염하는 게 영 마땅치 않다. 득도를 원한다면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고 숨찬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좋은 수행일 것인데...

석굴암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피해 은신했던 곳이며, 선생의 필적이 돌에 새겨져 있다한다. 선생은 해방이후에도 이곳을 자주 찾았으며, 자필 명문을 조각하여 준공식을 하던 1949. 6. 26에 선생은 피살되었다. 아주 커다란 돌 두개가 기대어 서있다. 그게 암자 입구다. 거길 지나 조금 가면 석굴이 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가서 석문을 지나 석굴에 들어갔다. 촛불이 켜져있고 위패가 모셔져있다. 합장을 하고 나오다가 석문을 당겨보니 움직인다. 신기하다. 옛날에는 돌쩌귀로 무엇을 썼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에도 쇠가 있었을 테니 쇠돌쩌귀를 썼을 게다. 쇠가 없었다면 청동을 쓰면 될게고... 정 없으면 박달나무로 하더라도 꽤 오래 쓸수 있을게다. 통짜배기 돌로 만든 문을 처음 본 터라, 내심 겁을 먹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을 다시 신으려고 계단에 앉았는데, 아무래도 무슨 수를 내는게 좋을 것같다. 맨살이 운동화에 이칫거려서 오른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힌 거다. 옳지, 방법이 생각났어. 여기저기 살피다가 끈을 찾았다. 공사용 마대자루 아가리에 있는 끈이다. 김선생한테 라이터를 얻어서 끈을 두뼘쯤 잘라냈다. 끝을 녹여서 뾰족하게 만들고 그걸로 양말모가지께를 꿰었다. 그리고 신발뒤에 있는 고리에 묶었다. 이젠 됐다. 흘러내리지 않을게다.

난 꼭끼는 것이 싫어서 헐렁헐렁한 양말을 신는다. 사람은 발이 편해야 한다. 그래야 피도 잘 통하고 정신도 편안하다. 당뇨병있는 사람은 특히 발을 잘 모셔야 한다. 맨발이 제일 좋지만, 왜 그런지 맨발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들을 한다. 맨손은 괜찮고 맨발은 나쁘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도 맨발로 잘 다녔다고 기억한다. 공연히 서양사람들 예법을 들여와서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서양사람들은 양말은 물론이고 신발벗는 것도 싫어한다.

어쩔 수 없이 양말을 신어야 한다면 할 수 없지. 헐렁한 양말을 신어야지. 그런데 이렇게 오르막길에서는 문제란 말이야... 더 잘 흘러내리거든. 10년내에 헐렁하면서도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을 만들어 내겠다. 사실 아이디어는 대충 되어있다. 언제 돈을 들이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 4 -
한창 대웅전 공사중인 석굴암을 아래에 두고 또 올라간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안개가 약간 있는 날씨다.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숨을 헥헥거리며 김선생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두달만에 하는 등산이라서 그런가? 요 며칠 잠을 적게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 진짜로 맛이 가는 중인가? 등줄기에 땀이 흘러서 팬티까지 흥건할 지경이다. 하여튼 회룡능선에 올랐다. 좀 더 가니 큰 바위가 나온다.

아아~~ 시원하다.
시원한 바람과 탁트인 시야와 널찍한 바위.
한동안 머리카락으로 가슴으로 바람을 흘리다가 끄응 주저앉았다.
허리띠를 풀려고 만지작 대다가 그만 끊어져 버렸다.
허리띠 장식 이빨이 허리띠를 물어끊어버렸다.
이런이런... 요즘 배가 나와서 좀 꽉 묶고 다녔더니 그랬나?
바지가 흘러내릴 테니 허리띠를 빼고 다닐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띠를 더 잡아당겨서 맬수 밖에...

- 5 -
사패산(賜牌山) 정상이다. 정상은 아주 너른 바위로 되어있고 남쪽으로 보이는 병풍같은 산들이 장관이다. 왼쪽으로부터 포대능선--자운봉--오봉능선--상장능선이 이어지고 그 뒤로 인수봉과 백운대는 보일듯말듯 하다.

사패산은 도봉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북한산 국립공원안에서 제일 사람의 때가 덜 묻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울창한 숲은 원시림에 가깝고 물가 큰 바위를 뒤덮은 두터운 이끼는 이곳이 얼마나 깨끗한 곳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단다. 얼마전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었던 덕분이란다.

키가 작고 잎사귀가 무성한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허리를 곧추 세우면 머리가 소나무가지에 닿는다. 신문지를 깔고 먹을 것을 꺼낸다. 김선생에게 싸온밥을 반으로 잘라서 드렸다. 반찬은 간단하다. 깻잎장조림, 햄부침, 김치, 표고버섯기둥장조림, 계란 두알. 요즘 치과에 다니기 때문에 술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오늘 옅은안개가 좋고 시원한 바람이 좋으니, 청하 한잔 좋겠다.

허리띠를 풀어제끼고 다리는 편하게 주욱 뻗치고,
밥 한 젓가락 먹고, 반찬 하나 집어넣고, 청하 한모금 꿀꺽.

앞으로는 병풍같은 산봉우리와 능선,
바위 저 아래로 펼쳐진 푸르른 숲,
산 병풍 바로 위에는 뾰죽뾰죽한 소나무 잎새.

뒤에서는 경상도 사나이 몇이서 얘기판을 벌인다.
50대 후반인 듯하고 국민학교 동창들인가보다.
< 내가 ㅇㅇㅇ선생님을(미인처녀 선생님인듯) 엄청 좋아했다는 거 아니가? >
< 그 선생님, 글씨를 아주 잘 쓰셨지, 지금도 답장편지를 가지고 있지...>
얼마전에 명퇴를 한 모양이다.
< 빨리 시작해야 돼... 돈 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을 한다고 생각해야 돼... >
< 얼마전에 들은 얘긴데... 며느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아버지가 누군지 아나?
개인택시 운전사래. 술먹지 못하지, 서비스업이니까 친절하지, 그러니까 곱게 늙을 수 밖에.
나도 봐서 개인택시 해볼까 생각하고 있지...>

김선생은 한잠 주무시겠단다.
하긴 나이 60에 바삐 올라왔겠다, 술 한잔 걸쳤겠다, 곤하기도 하겠지.
난 그 30분 동안 다리를 제멋대로 뻗고 앉아서 건너편 산들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마를 소나무가지에 기대니까 훨씬 편하고 또 조금 졸립기도 했다.

- 6 -
생각해보기로 했었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송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다. 지도를 안 가지고 왔으니 그냥 짐작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내려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그나마 조금 가니 길이 없어진다. 가파른 바위가 끝이다. 이렇게 세군데를 다녔지만 길은 없다. 바위보다는 땅이 안전할 것이어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웬 낙엽이 이렇게 많은가. 미끄럽고 푹푹 빠진다. 낙엽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곳도 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고, 나무는 빽빽하다. 모기도 있다. 그렇게 미끄러지고 헛발디디면서, 나무줄기에 의지하면서, 갈 방향을 가늠하면서, 엉금엉금 내려간다. 그러다 <숲속의 빈터>를 찾았다.

주위는 나무들이 들어찼는데, 거기는 비었다. 앉아서 잠시 쉬기로 한다. 이렇게 헤매는 건 불안하기도 하지만 재미도 있다.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정신이 집중된다. 잡생각이 안난다. 김선생도 나처럼 무엇을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분이다. 그래서 같이 말하기가 좋다.

< 당신은 왜 좋은 길 놔두고 길이아닌 길로만 갈려구 그래? >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갈 때(10년쯤 전), 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그래야 더 재밌으니까) 그때마다 집사람이 내게 하던 말이다. 사실 그건 등산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니다. 발명을 한다고 책을 쓴다고 이리저리 헤매기를 밥먹듯이 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한우물을 판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사람들이 <쓰잘데 없는 짓>을 한다고 했었지. 어쨌든, 오늘 이곳 사패산에서 다시 헤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즐겁다.

한참을 헤매다가 오솔길을 발견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풀과 나무가지들이 오솔길을 침범했다. 손으로 머리로 이리저리 헤치며 내려간다. 한 시간이 걸려서 계곡에 도착했다.

계곡은 말라있었지만 가다보니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곳이 있어서 거기 앉았다. 세수할 곳을 만들었다. 모래와 돌멩이를 퍼내고 물을 흘려내보내서 깨끗하게 한 다음, 출구를 막으면 된다. 세수를 하고 오이를 씹으면서 청하 남은 것을 마셨다. 아까 산에 오를 때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나무가 상당히 울창하다. 이쪽 계곡쪽으로는 소나무는 거의 안보이고 거의 활엽수다. 참나무종류가 많다. 내려오면서는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렇게 울창한 숲속 오솔길을 호젓하게 걸으니 기분이 점점 더 좋아진다.

젊은 여자 둘하고 여자아이 하나 그리고 예쁘게 치장한 푸들강아지 한마리를 마주 쳤다. 좀 더 내려가니 넓은 계곡 가에 젊은 여자 둘이 누워있다. 푸들 강아지와 일행이란다. 10년전부터 여기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왔단다. 물어보니 여긴 송추계곡이 아니란다. 계곡 양쪽이 물에 많이 소실되었다. 길도 가다가 끊어지곤 한다.

- 7 -
가다가 계곡바닥에서 아주 너른 바위를 만났다. 50평은 족히 되어보인다. 거기서 한참을 쉬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다. 계곡에 있는 나무는 잠잠하고 조용한데 저 산위에 나무들은 푸르르 떨고 솨아 소리를 낸다. 내 뒤 어느 풀끝이 하얀고깔인가 했더니 너풀너풀 계곡을 건너서 수풀로 사라진다. 내가 나비를 본게 언제였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계곡상류쪽으로 큰 상만한 바위가 있는데 그 뒤쪽위로 갑자기 콩새가 올라앉는다. 고개를 몇번 갸우뚱거리더니 계곡아래쪽으로 낮게 날아간다. 이상한 일이다. 여지껏 한시간을 내려와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우리를 마중하러 온 것인가? 그런데 한 5분 지났을까... 잠자리 한마리가 높이 날아서 계곡아래로 내려간다. 이게 무슨 조화람......

사패산을 즐거이 헤매었다. 하긴 이제껏 내 생활이 그러했다.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제멋대로 놀기를 좋아했다. 부모님말씀 선생님말씀을 잘듣는 모범생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못된 <꾸러기>가 들어있었나보다.
이젠 다시 중심을 잡아야하나 ? 너무 늦지 않았을까 ? 아니야... 그동안 한 실패가, 그 경험이 나를 도와줄거야. 나비도 콩새도 잠자리도 축하행진을 해주었지 않아?

이제 가자. 가다가 빈대떡하고 동동주 한사발 해야지...
가는 길에 벚나무에서 버찌를 좀 따먹었다.
그리고 한움큼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집사람 갖다주어야지...


작은큰통.2002.6.10.




뜨거운 바람에 시들한 풀잎을보고
일어서 보려고 애쓰는 시들은 화초의 모습도 봅니다

길가에서 아직도 갈곳을 모르고
동전 한닢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도 듣습니다

행인의 발길은 여전히 분주한데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스쳐가는 시들은 모습도 봅니다

냄새도 지독하고 을씨년 시럽지만
칙칙한 여름날 처마밑도 그리운날입니다

오늘은 하얀 하늘에서 비가내립니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비오는 그림자만 쳐다보고있으니
뚝뚝 낙하하는 비의 모습을보고

오늘 점심은 시인이 운영하는 우동집에서
모리소바로 식사를 했습니다

한잔술은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두잔술은 여자이게 만들고
세잔 술은 여자를 추하게 만든다고 누가 써 놓았습니다

재미있다 생각을했습니다
정말 멋지게 썼구나 해서
여기에 옮겨 보는 것입니다

차안도 시원해서 좋고 점심도 맛있다 생각을하니
기분도 좋았습니다

문뜩 돈 을 더 벌고 싶은생각이 납니다
이젠 벌어서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주고 싶습니다

몇채의 집도 어늘날인가는 다 팔아서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포도를 달리는 내 차는 시원하고 신이 납니다
우산을 받쳐든 여인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길옆 프라타나스 나무는 더 풍성해 보입니다
이런날 잘가든 영동 고속도로를달려
강릉 경포대도 가서 오징어 순대가 생각이 납니다

비에젖어 뛰어가는 애들을 보니 더 신이납니다
우습고 그래서 빙그레 웃어 봤습니다.

잊었던 갈매기 노래가 들려오는것 같습니다
갈매기 바다위에 .........

그 갈매기가 그렇게 좋아 보였습니다
비오는 포구 모습이 슬며시 눈에 다가 옵니다

금방 서울에서 전화가 오니
이시간 금상첨화가 됐습니다

오늘은 비가오면서
난 사랑의 기쁨을 누립니다.
아득한 사랑의 노래가 들립니다.


************************************************************************************************************


*******************


잠시 나를 되돌아 본다.
평생 나는 많은 직업을 가졌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오늘을 살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우리나이로 18세 정확하게 태어난지 16년 7개월 되던 때
나는 첫 사업을 시작했다. (내 아들은 14년 5개월 16일만에 프로바둑에
입문 개인 사업자가 됐으니 나보다 빠르다)

미국 유학과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의 장학금 및 체제비 일체를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6개월 정도 부산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울산에서 소금공장을 인수하여 첫 사업을 시작
했지만 7개월 정도 됐을 때 사고로 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건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겠다고 낮에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수백편의 시와 3,000매 이상의 원고를 채워서 신춘문예에
응시하기 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내 글을 본 친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리곤 내게 술을 엄청나게 마시도록 하더니 내글을 전부 태워버렷다.
이유는 당장 이 글이 제출되면 당시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글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박정희 같은 불한당이 정부를
전복하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박정희 같은 독재자는,,,,,,,,,,,,,,,,,,,

,,,,,,,,,,,,, 친구들이 놀랠 수 밖에,,,,,,,,,


나는 야간대학에 진학했고 먹고 사는 일이 급해서 낮에는 건설회사에
취업을 했다. 내가 입사하면서 내세운 조건은 월급은 받지 않겠다.
숙소만 제공해 주고 최대한 빨리 건설업에 대하여 익힐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3개월후 나는 조그만 현장의 감독이 되었고 1년후에 현장소장
2년후엔 그회사 수십개 현장의 총괄책임자가 되었고 3년이 되던 해엔
설계,견적,입찰을 담당하는 회사의 두뇌로 자리 잡았는데 73년 22세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자,,,,,,,,,,,,
사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너는 내가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큰 곳으로 가서 네 뜻을
펼치도록 하라면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놨으니 내가 주는
건설장비를 가지고 가서 네 사업을 시작해라,
사장님은 덤프트럭 3대분의 건설장비를 주면서 나를 보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 건설업계가 놀라도록 빨리 성장했고 28세에는 당시의
최고 기술인 지하철공사를 수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나는 손을 뗐어야 했다. 약간의 모은 돈으로 원래 돈을 벌려고 한
이유인 내가 원하던 물리학의 공부와 나사에 연구원으로 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여
충분한 돈을 벌때까지,,,,,, 3년후 친구의 배신, 회사 정보의 경쟁사
유출로 나는 회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이 후 해외 현장을 전전한다.

돌아와서 결혼하고 다시 회사를 차리고 처분하고 도시락 두개를 싸들고
새벽 네시 남산 도서관으로 직행 법학과 씨름했고 대학원에 다시 진학
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몇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3대 안전기관의 하나를 설립하고 내분야 최고의 법인을
세우는 등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없다.
안전기관 역시 정말 힘들어 하던 인간을 도와 발탁하여 중책을 맡겼더니
정부와 손잡고 나를 배신하여 7년간의 긴 투쟁과 승리 후 허탈감으로
3년 이상의 방황이 시작됐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10여년의 힘든
싸움이 나의 나아갈 길을 막고 내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두집 살림을 해야하는 운명으로 직업도 항상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민생고 해결용, 또 하나는 명예를 위하여
내게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형님이 계시다. 그 형님 때문에 어머니가
내 집에 계시지 못하는 것이고 나는 두집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어쩌면 불합리하다 하겠지만 내가 해야할 당연한 일로 아직 한번도
짜증 내본적이 없다. 내 아내 역시 마찬가지고 내가 이혼을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여자라면 어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황 후 재건하는 사무실은 이제 안정을 찾아간다.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평생 여유롭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궁색한 삶은 면할 수 있다. 내 직업엔 정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병이 도진 것이다.
무언가 부딪치고 개척해야 하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도전,
그건 평생의 숙제로 어차피 풀지 못하겠지만 이 병이 나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어차피 나는 첫 사업을 시작하던 18세에서
멈추어 있으니까?

안주해야 하나? 다시 뛰어야 하나?

답은 이미 내려졌다.

버려진 10년을 되 찾기 위하여
내게 안주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고 이루도록 노력해야겠지,,,,,,,

그것만이 나를 지킬 테니까?

당분간 카페에 들리지 못합니다.
항상 즐겁고 유익한 날들이 되소서,,,,,,,,,

_勳_
======================================================================================================





지리산의 운해 <자료출처:지리산통신>

남도기행 2박3일(셋쨋날)

님..보셔요

보내주신 남도기행 2박3일 계획해주신 일정표대로
일산에서 땅끝마을 그리고 완도
완도에서 보길도 그리고 구례 지리산까지,

화엄사에서 노고단과 뱀사골 실상사 그리고 일산으로 돌아온
여정에서 보고 느낀 조국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피력하고자 자판을 두드립니다

늦은 아침 빗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에 잠이 깹니다
간밤에 마신 찬이슬이 깊은 숙면을 취하게 하는 수면제였나 봅니다

어제밤에는 오래도록 별을 기다렸는데 온통 석탄처럼 캄캄할 뿐
하늘은 무심도 하셨습니다

님께서 자랑하시던 고향의 아름다운 별밭이 내게는 그저
어두운 밤하늘 뿐........
간밤에 별들이 숨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비구름이 온통 별들을 감춰 버렸었나 봅니다
늦은 아침을 산채나물과 재첩국으로.. 남도의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스럽고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천천히 체크 아웃을 하고,,빗속에서 화엄사로 향합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계곡의 물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화엄사 입구를 빗 속에 우산을 받쳐들고 걷는 그길은
산사의 아침을 더욱 운치있게 해줍니다

빗 속에서 마주 대하는 이름모를 야생화는 다소곳하게
머리 숙이며 인사를 합니다 안녕?..

수백 간 규모의 그곳 화엄사는 웅장한 대웅전과 여래전 범종 등등..
국보급 보물만도 여러 점..아름다운 노송 ,적송,울창한 대숲,
부처님의 모습도 여러 모습..손을 마주 잡으신 분,양손을 모두 드신 분..
한없이 자애롭고 측은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는 모습..

우리는 빗 속의 화엄사를 뒤로하고,,성삼재 쪽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천은사를 지나고..해발 1100 키로미터의 성삼재를
곡예 운전을 하면서 오금이 저리는 자연 앞의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오릅니다
천은사 지나면서부터 그치기 시작한 비는 오를수록 청정한 하늘로
변하였습니다

하늘은 아주 가깝게 손에 닿을 듯이 가깝습니다
시암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산아래 운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지금 산 위 구름 속에서 신선처럼 떠 있습니다
저 아래 보이는 저곳은 우리가 그리도 아둥바둥하며 사랑과 미움을
반복하고 욕심과 번뇌를 버리지 못하고 지극히 인간답게 사는 곳이구요

이곳은 신선의 영역 같습니다 웬지 낯선 이방인 같습니다
다시 더 높이 올라 성삼재..
아..그곳은 정말 무아지경..구름 속의 산과 산사이의 운해..
그리고 운해의 바다..피어오르며 사라지는 영원의 구름연기여..
나는 그곳에서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착각 속에 빠져봅니다
어제 아름다운 지리산의 별밭은 보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오늘 저에게
이 운해를 보여주십니다

다시 산아래로 내려옵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을 지나
구비구비 심산유곡을 지나 뱀사골 상류를 만납니다
골짜기가 뱀처럼 심하게 곡류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이름..
장장 총길이 14키로미터 울창한 수림..100 여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잠시 발을 담근 계곡의 물은 섬뜩 하리만치 냉기가 감돌고..
계곡의 물빛은 쑥색..

다시 남하하여..우리는 산내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섭니다
님이 멜로 보내주신 그곳 실상사..그곳을 꼭 보라하셨지요
편지에 있는 실상사는 만수천을 건너 님이 어린시절에는
징검다리로 건너셨다는 그곳에는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다리 건너에는 한 뿌리에 세 그루가 같이 자리하고 있는 신기한
오래된 커다란 정자나무와 돌장승 두 분이 실상사 입구를 지키고
서 계셨습니다
얼굴은 두 눈이 튀어나오고, 뭉툭하고 커다란 코에 벙거지모자를 쓰신 돌장승..

평평한 길을 지난 그곳에 천년 사직을 담은 실상사가 오랜 침묵 속에
이끼낀 늙은 나무들과 많은 보물들과 보수하지 않은 오랜 세월
그 모습으로 오염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보물은 청동으로 만든 아주 커다란 좌불상,빼어나게 아름다운 동탑,
쌍탑 ,,보기드문 조각의 석등,동종 등등..

극락암 가는 길..오랜 세월 속에 이끼 낀 담장 기왓장 위에 피어있는
버섯과 들풀,담쟁이는 한없는 연민과 그리움이 무심한 흔적이 배어있었습니다.

졸졸 흐르는 작은 도랑물이 풀숲 사이로 작은 연못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곳에는 잉어들이.. 연꽃이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대숲 속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바람이 불어오고..그곳 도랑물가에는
검은 날개에 몸체는 연두빛 아름다운 물잠자리가 나비처럼 날개를 접고
우아하게 앉아 있더이다

님..기억하시나요?
어린시절 그곳으로 소풍을 가셨다 하셨나요?
참으로 아름답고 정감이 드는 사찰이었습니다

아참,,그리고 절집에 수양회온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이 적토로,황토로
흰색 티셔츠을 염색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았답니다.
염색하여 입은 옷도 보았는데 제주도의 감물들인 그 색이었습니다

기수를 돌려,,인월에서,남원으로 광한루를 보고..전주에서 .삼례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나..일산으로
아름다운 조국을 ,,남도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배려와 우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2001,8.15 일산에서 현정드림.




눈덮힌 뱀사골 <자료출처:지리산통신>







<해골의 속삭임>


내가 X레이같은 눈을 가졌고,
너도 X레이같은 눈을 가졌다면,
나는 네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너도 내 속을 속시원히 볼 수 있지.

그렇지만 너무 잘 보여서 좋을까?
과연 우리 마음이 통할까?
난 네 입술을 보아야 키스가 하고싶고
넌 내 눈을 보아야 내 맘을 짐작할 수 있지않아?

기껏 보이는 것이래야 희미한 얼굴윤곽속에
두개골과 눈구멍, 콧구멍, 옥수수같은 이빨과
턱뼈 움직이는 것밖에 없지않아?
그래, 좀 우습다. 그치?

사실 난 이게 어려웠댔어.
네 표정이 너무 잘 보이는 거있지?
그리고 어려운게 또 있어.
얼굴에 내 마음이 바로 뜨는 거있지?

그래서 난 편해,
재밌기도 하고.
해골인 나와 해골인 네가 마주 보고 있는게...
턱뼈만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하는게...

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네 말이 더 크게 들려.
그리구 여긴 잡음이 없으니
네 말이 더 또렷이 들려.

난 내 맘을 들키지 않고
네 말을 들을 수 있지.
표정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네 말을 음미할 수도 있지.

너도 그래?
하긴 너도 좀 별종이었지.
내가 이따금 얼마나 당황했다구.
그렇지만 지금은 편해.

아까부터 뚫어져라 보고있으려니
네 얼굴이 보일듯해.
너도 내 얼굴이 보이니?
이제 키스해도 될까?


작은큰통.2002.6.5.



"Beksinski's powerfully unique paintings are
such as I have never before seen"

** 벡진스키의 그림읽기**
(열린마당 카페 별장 갤러리에서 옮겨 옴 No:498)







스코틀랜드 선술집 간판 <자료출처:네이버 생활과 디자인>

오래 전에 직장에 다닐 때 영국에서 일이지요.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유물들을 세계 각국에서 약탈하여 가지고
그것을 대영제국 박물관에 전시를 하였더군요.

세계의 유명한 유물 중 이집트의 피라밋부터
미이라까지 정말 많은 것을 빼앗아간 대단한
민족이지요.
바이킹의 후예답게!!!!
3000년 전 알프스 얼음 속에서 박제된 양치기
소년의 시체까지 전시를 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지금도 영연방은 전세계 올림픽처럼
100여 개가 되는 소속 국가들이 모여서
체육대회를 한다지요.

그리고 런든 시내에는 수많은 공원과 몇 백년된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된것을 보면 부러움이--

그 중에서도 그들의 음주문화는 Pub이라는 주막에서
시작된다지요.
저두 고풍스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2차로 가끔씩 펍에 가기도 했지요.
거기에서 맥주와
감자튀김 정통 스테이크를 안주로---

중세풍의 낡은 탁자와 의자들, 한쪽에는 당구대와
화살던지기 과녁이 붙어있고, 벽난로와 투박한
맥주잔들이 놓여있는 곳에서 일하고 온 농부나 공장에
갔다오는 사람이나 맥주잔에 감자튀김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었지요.

개인주의인 영국이지만 이펍 때문에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산다고 하는군요.
꼭 우리나라의 대포집 문화처럼--

이펍은 서민들의 사랑방으로 유명시인도
찰스왕세자도 애용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문화속에 비틀즈가 탄생하고,
이펍 때문에 영국인을 인간미 넘치게
한다지요.

영국에선 교회와 펍 없는 마을이 없다고 합니다.
전국에 7만여 개의 펍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양 산업에
속하여 줄고 있다고 하더군요.

펍은 퍼블릭하우스의 준말로서 17세기 전에는 우리나라
주막처럼 숙박과 술집을 겸하였는데 17세기 이후는
술집으로 분리 되었다 합니다.

우리도 힘들고 가슴이 답답할때 저렴한 술집에서 마음을
달래듯 이런 분위기를 비교하면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2차로 호프집과 같다고 할까요?

세상사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삶이 힘들때 형편에 맞게 술한잔 할 수 있는 친구와
호주머니에 따라 벗하고 마실 수 있는 곳은
정말 한국이 최고이지요.

오늘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월드컵 때문에
한국 특집을 내면서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이라고 칭하며
'정열적인 한국.... 음악, 춤, 술을 즐긴다고 소개했지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