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絶唱)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함께 약 25년간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 관전평을 집필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바둑계에선 '박국수'(朴國手)로 불렸다.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내 사랑은*


한 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춰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주리라



詩/박재삼






소년처럼 수줍게 웃던
해맑은 그를
안다.
시조를 통한
소박한 만남이였다.

참 예술인의 고통 이전...
그는 너무 괴로운 육신이였다.
아무것도 마시거나 먹지 못하면서...

그는 삐걱이는 낡은

나무계단을 오르는

2층 기원에서

생을 살라먹는 중이었다.

 

병마 속에서도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맑은 곡주뿐...

 

단 한 병의 淸河
그 맑은 알콜 몇 방울이
그를 몇 년 더 지탱하게 했을까?

물보다 더 맑은 알콜은
늘 그와 타협 할 수 있었다.
멸치 서너마리와 함께...
멸치처럼 말라가는 그를 보았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비 온 뒤 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에서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구름이 될 물안개 같은

그의 살아 움직이는 서정의 魂을 만나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글/이 요조
2001년 글에서~~   http://blog.daum.net/yojo-lady/54299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선생님 가시고 9년이 되어갈 이제사 찾아 뵌 셈이다.

 

삼천포가 사천과 합해지고 지금은 사천으로 불리우지만...

사천은 비행장으로 먼저 기억해설까? 

왠지 은빛 뱅기 날개의 금속성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삼천포라는 옛 이름은 엄마의 살냄새가 묻어있는 베잠뱅이처럼 그렇게 정겹다.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이름!

삼천포!

이 얼마나 정겨운 포구의 이름이던가!

 

 선생님은 자랑하셨다.

바로 이 글씨체가 씌인 명함을 내보이시며 인쇄업을 하는 아들이 만들어 준 거라시며

명함에 적힌 이 이름 글자체를 무척 사랑해서 자랑하셨다.

 

일제감점기 때 다 불살라버린 향교

이제 삼천포에도 호연재가 다시 지어지고 호연지기가 살아났다고들 한다.

삼천포가 길러낸 문인 박재삼!

노산문학상을 받으신 노산공원 이 곳에 살아생전 시비를 건립하다.

 선생님의 브로마이드 앞에서 깜짝 놀라다!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설치)

 방명록을 쓰고

 천천히 일이층을 관람하면 된다.

 

 

 평소 소장하신 책과 생활집기들을 전시한 곳! 안경,만년필 등....

 

 

 

 

 

 詩碑는 삼천포 대교가 바라보이는 바다를 향해 건립되었다.

 

 제게 주신 선생님의 친필,

시비제막식에 양주분이 참석한 사진이 책 안표지에 프로필로 대신

 

삼천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노산공원

그 공원에서 바라본 바다!!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빨간 등대도 보인다.

선생님의 詩 어딘가에 냇가에 발 담근 여인의 빨간 칠한 발톱 색깔같아 보이는....

 

 

 

노산공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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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야경 (동백섬뒤로 다이아몬드 브릿지도 살짝 보인다)

                             

 

부산사람이 부산글을 쓰려니 참으로 찐맛없다.

마치 자기 소개서를 쓰는 기분처럼 자랑을 하려니 그렇고 안하자니 그렇고 늘 보아오던 곳이라

별로 무덤덤한 감흥이니 좀 그렇고...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풍광에 매료된다.

별로 유별나지 않아도 처음보는 풍경엔 입이 다물어지지 못한다. 그만큼 마음을...감성을, 혼신을 다해 쥐어짜게 뒤흔드는 감흥이다.

그래서 멋진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이 그리고 싶고,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나타내고 싶고...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악상이 떠 오를테고...

무용을 하는 사람이라면 몸짓으로 그와 비슷하게 나타내고자 할 것이다.

난, 느을~~ 그런 엑스터시를 느끼려 초지의 낯 선 여행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풍경도 아침저녁으로 보면 무삼심해진다.

 먼-길을 떠나 낯-선 관광지에 도착하면 그 곳 지역민들은 역으로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관광을 떠나는 걸 종종 보고는 그냥..씨익 웃었다.

산다는 게 뭐 다 그런게 아닐까 하고...살다가도 문득 다람쥐 쳇바퀴돌 듯 어지러히 돌아가는 일상에서 문득 일탈하고 싶은 마음, 마음들.....

 

 

바다에 닿을 수 있는 인생은 아직도 쓸만하다.
고통과 슬픔, 배신과 절망,허무와 혼란등으로 제조된 지뢰가 늘 무시무시하게 깔려있는 불길한 현실 속에서 영혼의 다리 한 쪽을 날렸다면  바다에 다다르는 시간은 좀 축약 될 것이다.  가슴이 답답한 사람들은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 사람들도 연어처럼 죽음을 앞두었을 때 바다를 그리워한다.
 

 

나 역시나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서구관내에서 (부산지방에서는 내륙?) 태어나고 자란 나 역시나 바다가 뼈저리게 보고싶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시험기간만 앞두면 어찌그리 탁-트인 바다가 어른거리는지...

그러다가 시험만 끝나면 그 생각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곤 했다. 아마도 무언가 압박을 받기시작하면 그 것을 토악질 하고 싶은데....

자력으론 무리였던게비~~

....그래서 바다에 나가면 뭔가 뒤로 끌어댕겼다가 탁...쌔리버리는 그 파도의 힘에 의존하고 싶었던게비~

 

 

 해운대는 대단하다.

광안리에 사는 동생은 젊음의 바다는 광안리라고 한다. 그러자면 해운대는 중후하다고나 할까?

 7월1일부터 해수욕장 개장을 앞 둔 해운대는 .......그 준비에 바빠있었다.

자꾸만 침식되는 모래해안을 사력을 다해 북돋구고 있었다.

 

나 어릴 적 기억의 해운대 백사장은 까마득하게 넓었다.  빽빽하게 줄 이어 선 소나무와 눈부시게 너르고 긴 백사장~

그 백사장이 점점 씻겨 사라져간다. 사람들이 자꾸만 매립을 해대니 바다수위는 오르고 애먼 해수욕장 모래는 자꾸만 씻기어간다.

모래를 비싼돈으로 자꾸만 갖다 붓는 매 해 반복하는 일이 없다면 3~4년도 못가 백사장은 아예 사라질 것도 같다.

해운대의 풍광은 뭐니뭐니해도 바다바람을 마시고 자라나는 해송밭이었다. 해안을 따라 죽-이어지던 멋드러진 해송은 다 버혀지고 동백섬쪽에만 조금 남아있을 뿐~~

빌딩들이 그 자리엔 도로와 이런저런 잡동사니 경계물들이 다 차지하고 앉았다. ....

 

친정에 가려면 노상 해운대를 가지만 인근 사람들은 막상 장산에 오르지 해운대엔 별로 가지 않는 편이다.

등하불명이라고 했던가?

그런 해운대바다가 바로 코 앞에 펼쳐지는 곳에서....나의 생일겸 친구들 모임을 주선했다.

 

노상 눈높이에서 바라보던 해운대.. 기껏 동백섬에 올라 바라보던 해운대 물빛은 그냥 느낌이 바닷빛이었다.

묘하게 남동쪽에 위치했지만 해운대 바다는 동해다.

그랬는데...별로 높지도 않는 14층에서 바라본 바다는 제주도 우도의 쪽빛바다나 별 다를 바 없다.

해운대를 한 샷에 다 담을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 아닌가?  해운대바다의 물빛을 이렇게 바로 내려꽂 듯 바라볼 수 있어서 참말로 좋다.

 

 

해운대의 밤

 해운대의 낮

백사장에 비치는 서치라이트 빛줄기가 군데 군데 빛을 발하는 ...

 

 

아직은 동해바닷물이 엄청 차서 살을 에일텐데.....하기사 한겨울 북극곰 수영대회도 열리는 해운대잖는가!

.. 

. 

.

 아무리 줌인으로 찍어도 ...클림트의 키스인지?  포옹 생각나는 ......

 

 

 # 상어퇴치기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쪽빛인 고운 바다도 이젠 안전할 수가 없단다.

지구온난화로 상어위험지역이 되었다 한다. 7월1일 개장을 앞두고 상어퇴치기를 가진 수상보트들이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인명을 지켜줄 것이라 한다.

상어퇴치기란 1.8볼트짜리 전류로 수심 45m까지 6~7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한다.

그 전류의 세기는 인체의 혓바닥에 갖다대면 찌릿할 정도라는데, 상어가 이 전류를 예민하게 반응하고 무척 싫어한단다.

<죠스가 나타났다> 란 말이 이젠 해운대에도 통용이 된다니....이렇게 투명한 바다,,,그 어디에 그런 포악한 놈들이 숨었다가 잇빨을 드러낼지...

상상만으로 충분히 으스스하다.

이렇게 바닷물이 명경지수로 맑으면 망루에서 망원경 하나로도 인근에 나타나는 그 놈의 행적을 낱낱이 알 것만 같다.

 

 

 

관망하는 입지적 조건은 제일 나은 곳이다.  문만 열면 파도소리도 귓전을 때리고,

해운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은지 좀 오래되었지만 한국콘도는 그 전망이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세월은 흘러 이젠 토지공사의 디자인대로 흡수되어야할지....말지,  마지막 힘겨루기 안까님으로 버팅기고 있는 중이다. 

 

해무가 잔뜩끼인 바다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해무는 군무처럼 살아있어 바람에 이리저리 쏠려다닌다.

 

 

미포의 낮

 이곳은 해운대하고도 <미포> 그림의 왼쪽 상단위가 <달맞이 고갯길> 그 고개를 돌아 벼랑아래가 <청사포>

해운대의 끝,  꼬리尾~  미포의 아침

 저 길을 걸어 들어가면 청사포로 갈 수 있을까? 

오륙도를 한 바퀴 돌아 올 수 있는 유람선이 드나드는 선착장이다.

모터보트도 나가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다. 파도가 발목을 간지른다.

 6월 14일 주말 해수욕장 인파...

한 쪽에서 모래작업이 이루어지고...  

빌딩숲과 바다....럭셔리한 조화긴 하다. 

소나무숲이 죽 이어진 해변의 청량한 모습은,,,빌딩숲에 가려지고  겨우 해운대 초입부분(동백섬) 해송만 남아있다.  

 

      해운대의 초여름 밤은 또 이렇게 하루가 저물고....

      텅-빈 백지의 백사장은 무슨 꿈을 꾸며 잠이 든 것일까?

      흔적 하나 없는 고운 모래사장으로 침묵하기엔 감당치못할 만큼 너무 외로워서...

      무더운 뙤약볕에 ,,,무수할 사람들의 발자국....

      그 발자국을 그리는 걸까?

      ....................................................

       

      .....................................................................................이요조(2009년 6월 13~16일의 해운대

 

 

 

 

 

 

 Raul Di Blasio ... Oto AI (파도소리)

 

 

비오는 날, 경상북도 군위군 대율리 한밤마을 물안개 번져나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 그대로였다.

제대로 찍지못한 사진이지만 카렌다 속의 풍경과도 흡사해서 photo 액자를 카렌다풍으로 만들어 보았다.

 

 

 # 1, 아름다운 돌담 과  길  

 

팔공산자락의 비내리는 운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산자락 아랫동네~

그 동네는 온통 돌로 치장되어 있었다.

나무와 돌, 흙, 이 세가지가 어우러져 주거문화를 이루고

햇볕, 그리고 물, 바람과 함께 자연속에 공존하고 있는 한밤마을~

 

 

대율리 대청▲

 

도유형문화재 제 262호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858

 

이 마을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대청건물은 조선초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그 후 효종과 숙종때 각각 다시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의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32년에 다시 건립되었으며 학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의 건물로 서측퇴간(西側退間)에만 간주(間柱)가 서있는 누각형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상매댁(上每宅)▼

 

문화재 자료 357호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768

 

아래의 사진은 돌담을 빼고는 거의가 군위에서 제일 규모가 큰 상매댁으로 그 당시 최고의 가옥으로

남천고댁 (南川古宅)으로 불렀다.

본 가옥은 250여년 전에 부림홍씨 우태(禹泰)선생의 살림집으로 그후 주손(胄孫)들로 이어지면서

수차에 걸처 중수하였으며, 사랑채 대청 상부에 "숭정후 상지즉위이년 병신삼월십칠일 신시

수주 상량"(崇禎後 上之卽位二年 丙申三月十七日 申時 竪柱 上樑)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이 시기는 헌종 2년(1836)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가옥의 형태는 "흥"(興)자형의 독특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해방후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모습만 남아 있고 대문채는 옮기면서 향(向)을 바꾸었다.현재는 ∩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 돌담으로 경계를 이루고있다.

 

 

 

 상매댁의 안채 앞마당

그저 무심히 보아 지나치던 돌덩이들이 이렇게 정감있게 살아 숨 쉴 줄이야~~

앞 마당에 빼곡하게 박힌 자연석돌,

대리석이나 그 어떤 화려한 타일보다 더 아름다운....

그 위에 빗물마저 적당히 흩뿌려지고 돌들은 빗물 속에 제마다 빛을 달리 내고 있었다.

군청색, 흰색, 감색, 황토색, 검은색깔의 돌들이.....서로 서로 어깨를 곁고 벙싯거리며 마당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상매댁의 후원으로 가는 길

잔디와 돌들이 서로 도드라지지 않고 공존하는 뜰 

 

 

 

이런 멋들을 제쳐두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어디를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고불고불하고 조붓한 돌담길이 무척이나 정겹다. 마냥 건조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정서를....

한국적 정원의 조경들....고즈넉한 풍경을 앞문으로 뒷문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심신의 안정감을 준다.

햇살이 들면 돌담 아래 날아온 민들레가 곧이라도 피어날 것만 같은 돌담길~

 

 

  

 

비에 댓돌이 젖고 있었다.

 신발벗어 놓는 댓돌이 길게 있고 또 하나 덧대어 놓은 돌이다.

골목길이나 마당 잔디밭에 돌을 자연스레 박아놓았는데, 그 모습이 하나도 도드라지지않고

구순하게 잘 융화되고 있었다. 

 

 

-돌멩이들은 꽃이되고 별이 되고-

 

                                                                       - 이요조- 

 

봄이되면 파릇하니 돋아나는 새싹과
계절 맞춰 피는 별꽃만 예쁜줄 알았습니다.
돌은 그저 돌인줄 알았습니다.


발뿌리에 채여 아픈 돌멩이거나
위험하게 굴러 떨어지거나 인간을 위협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감정도 사유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돌멩이도 제 자리를 찾으면, 제 소임을 찾으면
아름다울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돌들은 담장이 되어 숨을 쉬고
억겁을 두고 반짝일  별 조각이 되고
사시사철 낙화를 모르는 뜨락의 꽃으로 피어있었습니다.

 

 -한밤마을에서-

 

 

# 2, 여인네의 드러나지 않는 삶과 돌

 

 

 멧돌과 떡메를 치는 떡메판인 것 같습니다. (사각 네모난 평돌)

 이 장독대 앞에 한참을 머물면서 벗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닥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도 않은 장독대의 모습을 찬찬히 보노라니 이집 맏종부의 손길을 직접 만나보는 것 같아

가슴이 잔잔히 방망이질 쳐왔습니다. 

이런 장독간 앞에 서있으면 여인들의 드러나지 않는 삶들이 보이지 않는가요?

바지런한 손놀림.. 조용히 다가와서  늘 장독대를 씻고 닦았을 그 손길을...빈 항아리를 채우던 그 수고로움을요.

여자의 살림살이....장독간의 옹기도 당대의 사람보다는 수명이 길 것입니다.

시할머니께 물려받은 옹기,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거....맏종부 손녀며느리가 사 온 꼬막단지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번 명절엔 맛있는 별미를 만들까?   좀 힘이 들겠지만 돌아오는 할아버지 제사엔 음식을 넉넉하게 해서

동네 일가 어르신들께 칭찬을 들어야지~> 여인들의 한과 소망이 장독간에서 소근거립니다.

 

 

흔히 만나지는 문화재 고택의 빈 장독간-

그냥 치장으로 둔 것이 아닌....살아있는 ,

어느 여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배인 장독간 풍경,   돌확, 돌절구, 돌분마기......

필자가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

믹서기, 분쇄기, 블렌더, 핸드블렌더, 녹즙기, 쥬서기.....등등이 다 될 수 있는 돌로 만든 조리용구들!!

 

 

정지깐 위에 누마루 1는 부엌에서 제사음식을 만들어 높은 곳에 놓아두는 곳의 용도라고 합니다.

음식이 더디쉬며,  제례지낼 음식이므로 먼지도 덜 탈 뿐 아니라...금기시된 장소!!

맛있는 냄새에 철없는 어린아이나 고양이나 쥐, 그리고 강아지들로 부터 벗어나는 곳~

 

 

각종 절구도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 애지중지하며 용도가 제각각 다르게 쓰였을 크고 작고 올망졸만한 돌그릇들,

필시 어느 여인의 일손을 덜어주는 사랑을 흠뻑 받았을 것입니다.

 

 

요즘 아주 작은 돌절구도 50,000원 가량 한답니다.

  

 

절구의 모양도 각각이지만....

어떤 용도로 쓰였길래 돌절구 안의 물 듦이 다르다.

약초를 짓찧어서  천연염색이 되었을까?  어언- 오랜세월의 사용에 돌절구도 그만  물이 들었다.

 

 

그릇에 맞는 절구공이도 어딘가에 있을텐데...

절구공이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필자도 돌을 좋아라해서 대여섯점 가지고 있는데.... 한 군데 모아두어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집에 가면 나도 장독대에 이렇게 함께 자연스레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이 모양은 분마기라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예전에는 숙취헤소에 쌀물을 갈아서 마시게했다.

쌀물은 체내의 독성을 중화시켜준다고 했다.

 

며느리, 즉 여인네들은 이 분마기에 곡물을 갈며 삶의 애환도 질곡도

恨과 미움도 회한도 번민도 함께 갈았을 것이다.

갈고 또 갈아서 가루가 바람에 훨훨 날릴 때까지.....

 

 

아무렇게나 던지듯 두어도 마치 오래 전 제자리인듯 어울리는 돌확~

 

 

여러 형태로 용도를 달리했었을....

숱한 이 집안의 여인 대대로 물려져 내려왔을....여인의 속내를

한숨을 다 알고 있을, 돌의 침묵들!!

 

몽당빗자루를 들어 구석구석 쓸어 쓰다듬던 여인네의 손길로

돌은 여인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그 흔한 요리책 한 권 없어도 맛깔스런 음식으로  집안의 가족들 건강을 책임져 왔던

우리네 어머니의 어머니...그 어머니들의

한과 손때가 묻은 돌들이여~

천년을 하루처럼 이어갈.....네 자태여!!

 

 

한밤마을을 둘러보며....이요조/2008년 11월 9일

 

 

  한/밤/마/을  

팔공산순환도로 삼존석굴에서 아래로 약 1km정도 내려오면 전통문화 마을인 대율리(속칭,한밤마을)가 나온다. 부림홍씨 집성촌으로 되어 있는 이마을은 수백년된 전통가옥이 수두룩하고 집집마다 온통 돌담으로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또한번 발길을 멈추게 한다. 마을 한가운데는 보물988호인 석불입상과 유형 문화재262호인 대청이 있다. 마을주변 동산계곡에는 20여개의 크고작은 폭포가 팔공산의 절경을 뽐내고 있어 자연의 진미를 느끼게 한다. 

 

교통
승용차/대구-팔공산순환도로-한티
     휴게소-부계남산리-대율리(35km,
     50분소요)
버스/대구(북부정류장)-군위효령면
     -부계면(시내버스)-대율리-남산리
      (50km,90분)
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군위IC
     -효령면-부계면-대율리-남산리

숙박   
호텔,여관,민박,야영가능 - 각종
    토산음식과 농산물 구입가능

 

 

 

 

 

 

  1.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본문으로]

 

 

 

 

본역1을 찾아갔다.

화본역(花本驛)은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1리에  위치한 중앙선 간이역이다.

1938년 일제 감점기때 지어진 역사라 증기기관차의 급수대와 역사가 일제시대 건물로 보존이 되고 있는 곳이란다.

끝간데없이 이어진 간이역의 철길을 바라보노라면 그 무엇에 대한 향수, 아련한 그리움과 이어져있음을 느낀다.

 

 

 어릴적 철로길에 귀를 대노라면 뭔가 다른 세상 끝하고 연결 되어졌을....이상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었을테다.

기차를 타면 기차가 먼-꿈속의 세계로 데려다 줄것만 같은.....그런 묘한 그리움이 있었다.

어찌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복잡한 역에서 그런 생각이 들까?  

한적한 간이역, 그 모퉁이에 혼자 가만히 기차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은 그런 생각이 이어져 끝없이 달려가는 추억!!

누군들 그런 아련한 추억 한 자락 없을까보냐~

 

 

찾아가는 화본역에 대한 미리 얻은 정보라야 기껏

역 구내에 급수탑이 아직 남아 있으며,  화본역은 산 속에 둘러싸여 접근성은 상당히 떨어지지만 하루에 상행 두번 하행 두번이지만 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아직은 주변마을 사람들의 의존도가 높다 한다.  역 광장에 박해수 시 '화본역'의 시비가 있다며 해설사님은 정말 산첩첩 물겹겹인 군위군 화본 간이역의

젖꼭지같은 詩를 낭낭히 읊어주는 속에 도착한 버스는 화본역마당에 우리들을 게워놓았다.

 

 

 

처음 맞닥뜨린 화본역은 핑크빛으로 아담하게 단장되었다.

예전의 모습은 탈피하여서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긴하다.

여느 간이역처럼 그저 깨끗하고 앙징맞고 고즈넉하다.

그런데....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마치 지금은 다 늙어버린 나를...내 모습을 누군가가 실눈을 지그시 뜨고 아득한 시절, 그 예전의 아릿따웠던 젊은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 내려는

情人의 자세로 말이다. ㅎ~

필자는 어릴적 일본인의 주택에서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 보냈다.  

역사가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본래의 제 모습을 잃고 많이 변모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을  驛舍의 모습을 작금에 손에 잡힐 듯 

반추해 본다는 것은.....  내겐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나잇살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과연 역사의 옛자태를 제대로 가늠이나 할 수나 있을까?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을 미처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화본역사는 그 옛날 일인들의 건축물이 다 그러하듯, 아름다운 목조건물이었을테다.

지금은 이중 하이샤시 구조로 되었지만 격자로 짜여진 자잘한 나무로  이어진 홑 유리창문이었을테다.

요즘에사 유리가 잘깨어지지도 않고 한 번끼우면 갈아낄 일도 없어 실리콘으로 고정시키지만....예전 유리야 어디 그런가?

둘러보면 깨어진 유리창은 꼭 있기 마련이고 유리창도 자잘해서 증기기관차가 무서운 굉음을 내며  드나들 때마다  자그마한 유리창들이

일제히 사시나무 떨 듯  덜덜대며  달그락거렸을 것이다. 

아니, 좋게 표현하자면...드나드는 기차에게 환호의 박수갈채를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지붕의 모습은 아니고 기와지붕이었을테다. 

벽돌로 지은 집도 아니고 쪽을 낸 대나무를 지지삼아 그 속에 흙을 채운 나무와 흙으로 만든 건물이었을 게다.

역사의 정면은 손님들이 하나 둘 모여들므로 가운데 현관지붕은 비맞이 정도로만 되어있고 역사 뒷쪽은 한꺼번에 내린 승객들의 집표를 할라치면

역사구조는 테라스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서 한꺼번에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의 비나 눈을 가려주어야 할 것이다.

나무기둥으로 덧댄 테라스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역무실로 들어갔더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기차여행을 하려면 이왕지사 이 곳에 내려 어떤겅로의 교통을 이용해야느냐고 여쭈었더니....난감해하시는 낯빛으로

기차가 닿는 시간과 하루에 몇 번 있는 버스 시간대가 맞지 않단다.

역무실에 들어오시면 콜택시를 불러줄 수가 있고 대략 요금은 2~ 30분 거리에 1~1,5000원 정도라 한다.

군위군은 불교문화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을만큼 둘러볼만한 사찰과 문화유뮬이 아주 많은 곳이다.

한 군데는 잠시 들러서 경유하고  두 군데 사찰정도는 한 샷에 너끈히 방문을 할 수가 있을 듯 싶었다.

아쉽지만 기차여행은 그런 경로 뿐이었다.(화본역 ☎ 382-7788 )

 

 

 

필자는 수인선 협궤열차도 타 보았던 증기기관차를  기억하는  세대다.

요즘의 ktx화장실은 마치 비행기의 화장실처럼 페달을 밟으면 무서운 압력에 의해서 소리를 내며 깨끗이 사라지는 그런 화장실이다.

그 때는 증기기관차의 화장실은 높이가 달랐다. 덜컹거리는 열차, 퀴퀴하고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는 좁은 화장실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바들바들떨며 높은 곳에 딛고 올라서면 화장실의 구멍은 달리는 철로가 휙휙 지나가는 그런 화장실이었다.

아참참!! 미리 옷을 대충 벗고 올라서야지 위에서 두 손을 이용해서 옷을 벗다가는 화장실 바닥에 내다곤지르기 쉽상이다. 그 요령이이 매우 중요하다.

철로위에 배설물이 비명을 내지르듯....흩어져 산산이 부서지던....

지금의 철로와는 좀 달랐다. 역사내의 철길은 그 골이 얼마나 깊이 움푹 패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차가 역구내에 들어올 때와 벗어날 때 사용을 금지했었던....그런 웃지못할 시절도 있었다.

 

 

 

뾰족한 지붕곁에 나무로 굴뚝처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페치카의 굴뚝맞다.

그 굴뚝과 연결된 건물의 중앙이 바로 손님맞이 방인데 우리나라 계절 특성상 겨울은 길다.

기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때, 이 곳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추위를 녹여주는 난방역활을 했던 벽난로 굴뚝의 모습이다.

지금은 그냥 건물의 기둥처럼 보여져서 아무도 모르고 지나치지만 바로 실내에서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역활을 한 셈이다.

물론 불을 지피는 재료는 증기기관차 시대이니 당연 기차역에는 석탄이 넘쳐난다.

건물은 가벼운 흙벽에 홑 유리창문이지만....상상컨대 철도 역무원들의 방바닥은 절절-- 끓었을테고,

한낮에는 손님맞이 방에 지금은 벽이되어 침묵하고 섰지만 기둥 아래에는 땔거리 석탄과 쇠로 만든 부지깽이와 갈탄에 찌들은 시커먼 쓰레받이가

놓여지고  그 아궁이에는 갈탄 덩어리가 빨간 혀를 낼름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을테다.

그 주위에 사람들은 옹기종기 서거나 앉아 세상을 이야기하고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을 것이다.

지금의 그 난방굴뚝(실제의 페치카2)은 70년 전의 시치미를 뚝 떼고는 거울을 하나 달고 서 있었다.

 

 

 

단 한가지 의문점으로 가득 찬 것은 증기기관차의 급수탑이다.

70여년의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담쟁이의 흔적이 마치 노파의 주름진 손등처럼 힘줄이 툭툭 불거진것처럼 담쟁이 덩쿨이 그 세월의 궤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급수탱크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 생각은 기우였다. 첨성대처럼 중간 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져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름다운 아주 작은 창문이다. 옛 모습 그대로인 창문 맞다.

어떻게 급수를 했을까? 기차가 들어오면 물을 대어야하고 그 물이 있어야 기차위에서  화구에 석탄을 불때고, 그 불로  물을 끓이고 그 증기에서 힘을 얻은 

기관차는 '기차화통을 삶아먹었나' 라는 속담을 낳을만큼  정말이지...  어렸던 기집애는 양 손으로 귀를 막고도 공포에 질리고도 남을 만큼의 상상할 수 없는

굉음을 맘껏 내지르며  무섭도록 크고 시커멓고 육중해보이는 쇳덩어리가 탄력을 받으면 가볍게 달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궁금하면 물어봐야한다.

오늘은 포스팅을 하다말고 화본역에다가 전화를 했다.

이우섭님(010-3520-0154) 이 받으셨다. 고맙게도 탑내부의 사진과 그 방법을 알아서 멜로 보내주신단다.

 

화본역의 궁금점과 아름다움에 흠씬 눌러 앉고 싶은데...그러고 싶은데,

팸투어 화본역을 마지막 여정으로 서울로 향할 길을 재촉하느라....아쉬운 귀경길에 올랐다.

 

 

 

기차역에서 내리면 만나지는 화본역 뒷모습, 아래 집표함이 아직도 있고. 자전거도 어울리는 풍경으로 세워져 있다.

보이는 창문들은 모두 나무문이고 그 나무문에는 자잘한 격자틀사이로 홑 유리창이 끼워져 있었을테다.

지금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난로, 페치카의 굴뚝이 지붕위 나무로 덮씌워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급수대

오랜세월의 담쟁이 넝쿨과 작고 아름다운 창문

급수대 창문은 나무창틀 그대로 온전하게 있는 것 맞다.

화본역 가을풍경

역전앞? 역전상회

  

이용객들의 숱한 사연들의 발자국이 스쳐지나간 화본역 앞길

 

 

코레일의 프로젝트의 하나, 간이역의 아름다움을 살려보자는

간이역의 이름이 '김유정' 시인의 이름을 지니기도 하고....간이역 마다에 시비를 세우기도 하고....

간이역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화본역 이용객은 주로 가까운 신녕과 영천을 오가는 지역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지역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기차시각 변경 알림표가 나붙었다. 

 

오래된 花本驛의 페치카

 

지금은 기둥으로 시치미떼고 선  거울이 달린 바로 이 벽의 기둥이 난로였단다.

국화화분이 놓인 자리에 갈탄이 놓여져 있고 그 기둥은 막혔지만 언제나 따뜻한 열기로

열차 이용객들을 추위에서 보호해주는 불길이 붉게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였다고 한다.

 

 

역사 앞마당의 버짐나무(푸라타너스)는 붉게 낙엽으로 물든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얼마간 뚝 떨어져 내외하듯  그렇게

시무룩~ 무심한 듯 섰다.

푸라타너스 잎이 푸른 계절에는 그 그늘이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겠다.

푸라타너스를 보니 갑자기....'헨델의 라르고' 음률이 떠오른다.

'옴브라 마이 퓨~♪ 리베제....타아비레~ ~♬'

콧노래를 가만히 흥얼거리며

상경길 버스에 올랐다.

 

 

 

글;사진/이요조

 

 

 

군위군 문화해설사님도 막연히 급수대라고만 하기에

급수조쯤으로 상상,  알고 갔었는데....

막상 현장에서 만나 본 급수대의 모습은 의아하게도 군데 군데 창문이 뚫렸고

내부를 보니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우섭님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증기기관차에다가  급수를 했는지...

님도 자세한 방법은  잘 모르겠다는군요,

이참에 잘 알아보고 멜로 연락을 주겠다 했으니

급수대의 사용방법 전문이 도착하는대로

첨부하겠습니다.

 

 

 

 

급수대 내부 모습은 이렇답니다.

급수대로 들어가는 문이 없어서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상상을 한 번 해 보세요!!

퀴즈로 낼까요? 

.

.

댓글에 요리왕님이 정답을 맞추신 듯 하여이다.

 

 

 

 

 

아름다운 사진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수인선 합궤열차가 무언가요? ㅡㅡ? ㅎㅎ

 

이런일이....수인선협궤열차 대답을 못했군요,
전 40년 전에 타보았지요.수원인천간,,말 그대로 철로가 아주 아주 좁은(표준궤도의 절반인 76cm) 예전 전차길보다 좁은같 길의 기차지요.
그러니 그 열차란 폭이 얼마나 좁은지 상상이나 되겠어요. 전철처럼 마주 앉았지만...사이좋게 바라볼 수 밖에요.
아주 정감이 물씬 풍기던   그런 열차였답니다.

그 당시엔 수인선을 타면 요즘처럼 여행객들이나 카메라를 든 사람은 없구요.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생업에 찌들은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라....기차안은 다라이나 짐보따리들이 사람보다 더 많았지요.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에 데가 탄 듯......아주 분위기는 <하하호호 화기애애>했더랬지요.
배고픔에 싱싱한 오이도 댕겅 잘라 나누면서 말입니다.
여행객인 제게도 건네주었는데요.
그 향기가 아직도 콧끝에 살아있답니다.

서쪽 바다로 난 풍경은 죽 ~ 연이어 눈부시게 흰 염의 풍경이 이어진답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웠는지....
지금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세계적인 명소>아주 좋은 관광열차가 되었을텐데....

세월은 야속하게도 야금야금 옛것을 다 갉아먹고 시멘트 건물이 자리잡고 텃세를 부리고 있답니다.

...................

훈아님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검색해도 충분한 자료를 얻겠지만 실제 ,협궤열차>를   타 본 세대에게서 듣는 이야기란...더 리얼하겠지요?

 

  1. 화본역/소재지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1리 위치한 중앙선의 역이다. 좌표 북위 36°7′37.35″, 동경 128°41′39.88″ 개업일 1938년 8월 단말기 코드 183 역사 1938년 8월 : 보통역으로 영업개시 2006년 12월 22일 : 역사 지붕 개량 및 보수 2006년 12월 28일 : 간이역 시비가 세워짐 [본문으로]
  2. 페치카/러시아와 만주를 비롯한 극한(極寒) 지방에서 쓰는 난방 장치. 돌·벽돌·진흙 따위로 만든 난로를 벽에 붙여서, 벽을 가열하여 방 안을 따뜻하게 한다. ‘벽난로’로 순화. [본문으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음풍영월하던 장소'학소대' 

 위천1 학소대 절경 

 

 

 

고로면 화북리에서 석산리로 가는 길에 보면 인각사 맞은 편에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로 위천이 흐르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 학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다고 하여 학소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학소대 좌우로는 송림이 우거진 석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는 明鏡止水로 위천이 조용히 흐르고.....

학소대 앞에는 기린을 닮았다는 화산의 뿔에 해당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인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인각사2가 있다.

 

 

 

 '이로운한우직판장' 부근 위천 전경

 

 

위천강 하구언 뚝방옆에 자리잡은 군위의 한우직판장 유명업소 '이로운한우'

축산농가 단 6집이 똘똘뭉쳤단다.

차 넘버를 보니 대구에서도 고기를 사러들 오는데....줄을 서야 겨우 살 수가 있었다. 

 

 

군위 위천일대가 조행하기에도 좋다는데..과연 그렇겠구나 싶은 위천의 경관

 

 위천강 갈대숲의 아름다움

 

 

본역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화본역은 군위에 위치한 중앙선의 열차 간이역이다.

1938년 일제 감점기때 지어진 역사라 증기기관차의 급수대와 역사가 일제시대 건물로 보존이 되고 있는 곳이다.

 

화본역으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나는  왼쪽줄 좌석에 앉아있었는데,  처음에는 나는 무슨 사고가 난 줄 알았다.

모두들.....버스안에서 일시에 괴성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앉은 사람들이 동시에.....와우도 아닌....<우우~~~> 하는 이상한 괴성을 동시다발로 내뱉았던 것이다.

일순<사곤가?>했던 나는.......일행들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쳐다보았더니.....분명 사고는 사고였다.

 

흐드러지게 핀 갈대 군락지였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늪지로 조성된 아주 귀한 볼거리로 갈대는 가을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에에이....새마을과장님두 차암~ 이 좋은 곳을 왜 둘러보고 가라고 말씀 안해주셨을까?'

참 다행이다.  화본역 가는 길에 아름다운 위천을 맞딱트렸으니......

 

가다말고 팸투어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당연 잠시정차를 하고 모두는 카메라를 들고 우르르 바깥으로 몰려들 나왔다.

위천은 강이 아니라....아름다운 늪지로 변해있었다.

람사르총회가 생각났었다. 늪지의 정의란  marsh (영어),  배수가 불량하며 간헐적으로 물에 잠기거나 늘 물로 덮여 있는 곳 인데

군위군 위천에도 좋은 늪지가 생성된 것이아닌가 싶게  생각되어진 참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가을의 진면목,위천의 모습이었다.

 

 

 

 

억새야 상등성에서 너르게 분포한 장관을 봐왔지만...

갈대를 이런 장관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저 멀리서부터 점점이 붉게 이어진 가로수길 

갈대밭

 

 

 

 

위천의 가을은 만추로 푹 무르익었다.

  화본역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화본역을 보고 되돌아 나오며,

갈대숲 오른편의 위천모습

 갈대숲의 반영이 아름다운 위천!

 

산이 먼저였는지...위천의 갈대숲이 먼저였는지 몰라도 가을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경북 군위군의 위천!!

물이 흐르는 곳, 이 좋은 관광명소 풍경을 두고.....사람들은 억새만 만나러 가을 산을 오른다.

군위군은 '인각사' 학소대를 필두로해서 '화본역'까지 푸르게 이어져 흐르는 위천의 갈대숲 관광도 아주 좋은 메리뜨가 될 것이라고 본다.

 

팸투어를 끝내고. 이요조:글:사진

 

post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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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치 경북 군위군, 의성군, 상주 유역면적 (지방1급하천) 1,403.06㎢ (지방2급하천) 690.16㎢ 길이 (지방1급하천) 유로연장 113.5㎞, 하천연장 29.5㎞ (지방2급하천) 유로연장 84㎞, 하천연장 79.58㎞ [본문으로]
  2.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약전리에 있는 절. 은해사(銀海寺)의 말사(末寺)로,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라고 하며, 경내에 일연 보각 국사의 탑과 비가 있다. [본문으로]

 

 

 

푸른 잎사귀에 가려 떫은 맛으로 숨어 지내다가

가을오면 꽃처럼 붉디붉은 낙엽마저 다 떨구고 나면

환한 등불을 촘촘히도 달고서서 산촌을 밝히는 가을!

감 속살은 부드럽고도 농염한 꿀 맛으로 익어가는...

.......이요조

 

가을이다!

감을 따는 사람들, 감을 꼭 먹으려고 따는 건 아니다.

가을날에 붉게 주렁주렁 열린 감을 보고 어찌 장대를 한번 허공으로 내지르고 싶지 않을까?

감을 따는 게 아니라.....계절을 따고 추억을 따는 사람들,

 

봉화 계서당에 갔을 때 일이다.

한달전에도 들렀건만 감나무는 미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딱 한달 하고도 3일 후엔 계서당이 주인이아니라....웬일로 감나무가 돋보이는 게 아닌가?

종손의 허락으로 갑자기 고택답사가 아니라...감따기 체험장으로 바뀌었으니,

잠시 모두는 도시에서는 꿈꾸지도 못할 장대로 감따기를 시도했다.

 

여기야 여기....여기에 홍시가 달렸어!!

보기보다 감장대는 겨냥도 어려울 뿐 더러 몇번 허공에서 헛손질 하고나면

팔힘이 무척 쓰인다는 걸 할게 되고....알게되면 바로 팔힘은 다 빠져 나간 후다.

후둘거리는 팔로 허공에 헛장대를 휘두르게 된다.

 

 

계서당 사당모습이다. 사당입구에 선 감나무다.

 

 

내년 종자로 쓸 모양이다.

 

 

얼마든지 따서 드시라는

창녕 성씨문중 12대 종손님의 허락에

 

 

모두는 여기저기서 감을 따기 시작했다.

 

 

아세요?

감을 따는 사람은 입이 헤~ 벌어진다는 것!!

물론 구경꾼들도 입이 벌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야 홍시가 떨어지면 입으로 쏘옥?

ㅎ`ㅎ`ㅎ`

 

 

사진으로 구경하는 나도 헤~ 벌어지는 입!

 

요기요기..조오기~~

이렇게 모두 어울린 신나는 놀이가?

 

감나무는 쉽게 올라가서 딸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은 모든 과실수들을 키를 작게 하지만...

감나무는 올라서면 부러지기 쉽상이다. 위험천만이다.

언제나 장대로 따는 게 정석인 셈!!

 

 

 따 내린 연시는 꿀맛이다.

이런 감나무는 농약도 전혀 치지 않았으니.....그냥 먹어도 좋고,

 

 

오올치..옳치!!

 

 

이사람 저사람.... 감따기체험을....

팔이 후들거리고....보기완 달리 의외로  ...에렵다.

 

 

헤....역시나 입이 헤~~

감이 주머니로 쏘옥..

그래..그래 그렇게 비틀어야해~~

 

일단 손에 힘을 다시 주고 뱃심을 주곤,

 

 

요렇게 돌려서 뚝 잡아따면 되지~~

 

 

요기도 있네...아냐 여기가 더 많은데....

 

 

 올라가기도 전에....

아래에서 더 난리들이다.

 

 

모드는 잠시 감따기 놀이에 전력집중!!!

가을엔.....감따기 체험이 최고야요!!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물야면 가평리의 昌寧 成氏 마을은 몇백년째 내려오는 동족마을이다.
창녕 성씨 마을의 종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 성이성이 현종 1년(1631)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계서당이다.
계서는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강계 등 4개 고을 군수를 역임하였고 후에 부제학을 추서 받고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계서당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영남반가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앞쪽의 대문채는 바로 앞에 논이 연이어 있지만, 낮은 경사를 이용해 집을 지었기 때문에 뒤쪽의 안채는 높직이
앉아 있다. 안채는 정면 5칸이고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명 3칸의 팔작지붕집이며, 사당채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자집으로 종가치고 그리 규모가 큰 편은 아니나 매우 아담하고 짜임새가 있다.
후대에 증·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서당을 둘러본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하기로 하고 계서당 뒷산(용봉산)이 풍수지리학상으로 볼라치면 소가 누운 형상에서 어미 젖의 자리라고 한다.

 9월27일 감나무가 한 달 뒤 10월 30일은 익어서 아주 빨갛게 홍시로 매달려있었다.

 

 

 

청량산을 찾았다.

한 달 전에 본 푸른 청량산이 만산홍엽으로 변해있을  물든 청량산이 보고싶었기 대문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등산로로 접어들자 비내리는 평일이라 아무도 없지 생각은 기우였다.  많은 등산객들 인파에 좁은 등산로.....

얼마전 이미 가 본 길이라 미끄러운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등산로가 하나 둘이 아닐텐데, 굳이 가 본 길을 또 오른다는 것은 별로 흥미가 당기지 않아서이다.

비는 어느새 그쳤지만....운무는 산봉오리마다 무겁게 이고 있었다.

청량산에 올라본들 하늘다리에 올라본들 ...운무에 가려서 지척이나 분간하면 다행이겠다.

그 날 먹었던 진짜배기 도토리 묵이나 한 점 먹어볼까 하였지만....낮에 먹었던 점심이 아직도 소화되기엔 멀었다.

몇몇은 그냥 쉬엄 쉬엄 길을 되짚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유난히 좁고 미끄러운 등산로 말고 좀은 편하고 너른 다른 산행길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어느 고장인들 하루 이틀 구경하고 다 했다면 거짓말일게다.

봉화를 한 달 격차로 두 번을 찾았건만 정작 보고싶은 곳은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다.

청랑정사1 고산정2이다.  유교의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유적지!

언제 다시금 개인적으로 꼭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이퇴계 선생의 유적지라면 나라에서 봉산으로 부여받은 청량산 아니던가?

 

 

산첩첩 물겹겹 아름답다 내 나라여!!

노산 이은상님의 싯귀가 생각나는.....산첩첩의 그림자!!

 

천천히....찬찬히..... 

등산길(소롯길)은 너무 좁다,

내려오는 사람 비켜줄레라 뒤에 오는 사람 신경 쓸쎄라

어디 이리 맘놓고 만산홍엽을 즐길수나 있단 말인가!

비에 젖은 도로가 고즈넉하여 애잔하다. 

가물어서 말랐지만 내는  

웅덩이에 고인 물 정도였다. 

안개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운무는 우-우- 몰려다니듯 피어오르고, 

무럭무럭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모양이 비는 금세 개일 모양이다. 

봉우리 이름이 뭔지? 참 기이하게도 생겼다. 

꽃보다 예쁜 단풍! 

이뻐서 꺾었으면 버리지나 말지~ 

 돌탑 정수리에 도롱이 벌레집이 조로롱~~

곱다 .....

..... 

꽃소식은 남녘에서 북녘으로 

단풍은 북녘에서 남녘으로... 

장인봉 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래 <두들마을>까지만 가보자.

장인봉 가는 길

 

외산(外山)의 주봉(主峯)인 장인봉은 청량사(淸凉寺) 유리보전(琉璃寶殿)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870m)이다. 봉우리 중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축융봉(祝融峯)과

관리사무소에서 보았을 때 그 위용이 가장 잘 드러난다. 원래 이름은 대봉(大峯)이었는데 신재 주세붕

(愼齋 周世鵬, 1495-1554)이 중국 태산(泰山) 장악(丈岳)의 장인봉에 비유하여 지은 이름이다. 정상에서

 굽어보면 산 아래는 빼어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늘어서고, 눈앞에 펼쳐지는 원근 수 백리의 크고

작은 산맥과 하천들이 연출하는 장관은 예부터 선인들의 아낌을 받아 왔고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산, 부산, 울산 관광버스등이 내 눈에 들어왔다. 평일이니 가까운 경남쪽 사람들이 많나보다.

내려오는 길에 아주머니들...<부산>운운하길래 반가운 맘에 출생년도를 다 대어보고 헤어졌다.

일찍 올라간 이들이 서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하늘다리로 해서 장인봉으로 거쳐 내려오는 사람들이었는데....한결같이 행색들이 엉망이었다.

우중에 산행을 했으니 바지가랭이는 흙범벅이고 온 몸은 땀인지 빗물인지 후줄그레 젖어있었다.

주중이라 아주머니들이 많았는데,  한결같이 다들 건강해보여서 좋았다.

 

 

천천히 산을 오르며 빈집도 좋은 그림소재가 될까하여 부지런히 여러각도로 찍어왔다.

빈집에는 큰 자루가 하도 많이 쌓여서 뭘가 궁금해 봤더니 고추꼭지다.

뭐에 쓸려고 이렇게 쌓아두었을까? 제발 허튼 먹거리 작난에 동참하려는 곡간은 아니겠지...좋게 생각하려 들었다.

<도대체가 이 많은 고추꼭지로 도대체...뭘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용도를 모르겠다. 사료도 아니되는 것을...? > 

산이나 오를 것이지 온 국민의 건강 먹거리까지 걱정하는 나! <너나 잘 하세요!!>

 

낙엽이 너무 많이 쌓였다.

  

 

 

수녀님도 거꾸로 가시네요!!

거봐요! 지난 번 청량산행기에서 죄다들 거꾸로 내려온다고 했잖아요!!

수녀님도 예외없다니까요!!

등산객들도 울긋불긋~

올라가며 찍을 땐 몰랐는데....내려올 땐 길도 미끄럽고 경사가 져서 .......*.*;;   

 쉬엄쉬엄이 꽤 올라왔다.

이러다가 일행들 하산시간에 맞추려면 늦을테지

 

수녀님이 거꾸로 가시며 손을 흔든다. 

 활달하신 수녀님!

 아마도 성당에서 단체 소풍산행을 왔나보다.

 감도 산 한자락을 책임지고 붉게 비추고....

빗물을 튀기며 하산한 일행을 태운 버스는 떠나고..... 

 또....하산하고....떠나고...

 내일은 또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찾을테지~

누가 밟아서 허리가 틀어졌나 건드렸더니

특유의 성깔로 뎀비려든다. <그러게...그렇게 정신 차리라니까!! 추위에 하루라도 더 견디려면....>

 황금빛 은행이다.

가물어서 올해는 단풍이 좀 시원찮은데....그래도 여긴 제대로 곱다.

 

 

운무를 피워올리 듯....산은 그렇게

우리들을 품었다가 내려놓는다.

 

 

마을을 눈 앞에 두고 내려왔다.

한 집인가 두 집이 있더라는 하산객들의 말,

아마도 우편배달은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만인가 보다.

 

 

 

청청한 소나무와 단풍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청량산 가을!

 

 

미끄러운 내리닫이 등산로를 하산하면서도...

<와 좋다!!>는 감탄사를 인사치례로  잊지 않고 산에게 보내는 .....산꾼들의 예의!

 

 

 쉬엄쉬엄 윗 주차장까지 걸어오르자

빠른 일행은 벌써 내려와 있고 젊은 몇몇은 하늘다리를 올랐다는 소식!!

 단풍이 산불처럼 뭉글뭉글 옮겨붙고...

 

가을단풍에 물들었나 보다.

올 가을 단풍구경을 잘했는지 나, 길손 마음 덩달아 알로롱 달로롱~~

 

글:사진/이요조 

 2008,10월31일 청량산 장인봉 30여분 오르다가 말다.

  1. 경일봉아래 김생굴밑, 유리보전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다. 이중봉이 쓴「오산당중건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선생이 남기신 뜻을 받들어 사림의 합의로 조선 순조 32년(1832)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으며, 1896년에는 청량의진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당 10칸, 부속건물 6칸으로 되어 있고 당은 오산당, 헌은 운서헌, 요는 지숙요, 문은 유정문이다. [본문으로]
  2.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성성재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로 축융봉 아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데, 이곳이 바로 도산구곡 중 제 8곡인 고산곡을 말한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오고갈 때 여기에 자주 들려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본문으로]

 

 

블로그 기자단 팸투어~ 영주, 풍기온천

 

풍기온천이 물이 참 좋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는 내 쓰지 않으리라!

 

죽령옛길을 죽령 고갯마루에서 거꾸로 달음박질하다시피 한달음질로 내려오니....그제야 제법 오솔길 다운 면모를 보인다.

땀이 축축하다. 고깟 2.5키로랬나? 길을 걷고는....샤워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음은 온천욕이다.  누가 요렇게 프로그램을 잘 짰지? (냐하하!!)

 

죽령옛길도 풍기온천도 빠트리면 안된다는  담당시직원의 말씀 받자와 촉박한 시간에 샤워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사진들 찍어서 포스팅 해주세요오~>

<아니 목욕탕 사진을 어케 찍으라고...> <여자들은 벗고 입고 머리말리고,,,,화장고치고 그 시간이 얼만 줄이나 알고..?>

<일단 소백산 정기어린 온천수라니 몸이나 한 번 풍덩 담궈보지 뭐~~>

<탈의장 사진만 몇 개 올릴 수 밖에~~~>

<자~ 사진 찍어여~~><뻥이요> 뻥튀기 아자씨처럼 큰 소리내고 찰칵!!

카메라 있대도....여자끼리라  하던 행동 멈추진 않는다.

카메라를 물품보관함에 맡기고.....땀을 샤워로 씻고 물에 몸을 담그니.....<와우 좋다!!!>

거꾸로 곤두박질친 산행이라 허벅지 위에가 뭉쳤다. 시퍼렇게 맑은 물이 매낀거리고 우선 쾌적하고 드넓은 욕조들.......

소백산자락 계곡에 몸을 잠근듯......이리도 시원할 수가,

 

대충 몸을 풀었으니 나가야지~   몸을 건져 물기를 딱고 아직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흐르는데,  온천장 안주인 헐레벌떡

들어오셔서 내부사진도 좀 찍어 올려달란다.

<헉, 어케 내부를 차마 찍으라는 말씸?>

옷은 대충 껴 입었지만  카메라 놀랠깨비  애기처럼 타올에 감싸안고  수증기 자욱한 욕실로 다시 들어갔다.

물이 시퍼런 수영장만큼 디따 큰 욕조 하나만 찍고, 사우나실로 안내....건식습식을 골고루 다 찍어주길 원했지만....

따라 들어가서 셔터를 누르는 내나, 영업중인 사우나실을 찍어 달라는 주인이나... 둘 다 도낑게낑이다.

뭐가 나와야 말이지....

흐흐....분명 도촬은 아닌데....여자가 여자 욕실을 찍는 기분도 쩌메 얄라궂긴하다.

온천장 여주인님 욕심이 보통아니시다. 꼭 잘 써 달라신다.

<흐.....젤 못 쓰는 날 붙들고. 허기사 남탕에 쳐들어 갈 순 없었으니...망정이지>

<근데...내 카메란 온전할까?>습기 많고 뜨거운 데를 들락거렸으니

나와서 시범으로 찰칵!! <음 잘되는군~>

<카메라야 너 쥔장 잘못 만나서 맨날 주방에서 고추가루 양념 묻은 손으로 밀가루 손으로 주물러대다가

오늘에야 난생처음으로 스팀 사우나 한 번 자알 했다 그쟈?>

바깥으로 나오신 아주머닌 여전한 열정으로 영주 관광지를 소개하느라 열을 올리신다.

영주는 참으로  발전해 나갈 고장이란 확신이 든다.

요소요소  영주를 사랑하고 아끼고 홍보하는 <영주 지킴이>들이 눈이 퍼렇게 살아 있더라고....

근데  그 게 영주 사람이면 모두가 다 그런 것 같다는 게...참으로 대단햐,

 

바깥으로 나오니  고단세 난데 없는 가을비가 추적추적내리고 있었어<에이, 나 젖은 머리도 제대로 못 말렸는데...>

<까딱했으믄 비 맞으며 죽령옛길 트래킹,  할 뻔 했잖아!>

트래킹에 좋았던 죽령옛길 다음 글로 재미나게 엮어볼께요!!

 

 

이요조글

*죽령옛길을 트래킹 후, 근거리에 있는 풍기온천을 하시면 좋습니다.

 

 

 

 

 

 

 

 겨우 한 장 건진 게 이 모양

 

 

사우나 끝낸 카메라 이상 무!!

 

 

지하 800m 심층에서 분출하는 100% 천연 원수 공급
  • 주소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 345번지
  • 전화번호 : 054-639-69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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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령옛길1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서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

 

 

  1.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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