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행
어제 공장에서 대충 얘기를 다 끝내고 오늘은 정말 "책임"이란 글자를 훌훌 벗어던지고 혼자 지내고파 산행을 결심했다.
새벽까진 구름이 짙게 드리워 비라도 오려나 했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아직도 남은 여름의 해가 내리쬔다.
그래도 마음먹은 나만의 휴일인데 싶어 등산화끈을 조이고 산으로 향했다.
늘 날 맞아주는 금정산이 바로 동네 뒤에 있어서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어릴 때 소먹이면서 노닐었던 산이기에 어느 누구보다 정감이 가는 산이다.
동네를 빠져 산 초입에 들어서니 벌써 바람에 떨어진 도토리들이 발아래 밟힌다.
옛날 같으면 서로 한알이라도 더 주워서 묵을 만들어 끼니에 보태려고 했었는데...
나 자신부터 그런 걸 추억으로만 여기고 지나치니 세상살이가 조금 나아지긴 했나보다.
평일! 내 혼자 정한 휴일이어서인지 사람 한 사람 얼씬 않는 산길이 더욱 구미를 당긴다.
오늘은 마지막 여름의 햇살을 머리와 얼굴 그대로 맞는다.
꼭대기를 돌아서 내려오리라 마음먹고 한걸음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중간쯤은 온 것 같았다.
7부능선 즈음에 자리한 절로 향했다.가는 길목에서 얼굴에 세월의 골에다 흰 수염이 가득한 노인을 만났다.
옆에 있는 동료분이 올해 연세가 90 이라신다.
우와! 순간 놀랐다. 그 연세라면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바로 "대단하십니다. 조심해 가십시오."라고 깍듯이 절을 올리고 발길을 계속 옮겼다.
아직도 지난번 물로 불어난 계곡물이 명경지수처럼 맑게 흐른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조그만 소를 이루어 맴도는 모습이 마냥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이다.
초등학교때의 동요가 생각났다.
"시냇물은 졸졸조올졸~"하는 동요가 말이다.
때묻지 않고 자랐던 60년대의 어린 내친구들아!
이젠 어느듯 머리엔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이미 멀리 가버린 친구도 있다고 전해 들었다.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내리는 땀방울이 옷을 흠뻑 적시는 멋진 산행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노라니 눈에 띄는 나뭇잎들엔 벌써 한 여름의 짙푸름은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조석으로 울어대는 귀뚜라미소리만 듣다가 여기 나무들을 보노라니 절기를 아는 삼라만상이 또 한번 신기로울 따름이다.
아, 세월이여!
나무꼭대기의 나뭇잎 사이로 파란하늘을 이고 흰구름이 두둥실 걸렸다.
어느새 절에 닿았다.
아무도 없는 절마당의 평상위에 배낭을 메고 먼저 도착한 한 아주머니가 쉬면서 책을 읽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행중이라면 으례하는 인사로
"반갑습니다."라는 말이라도 건네겠지만 그러지도 못하겠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것 같아.
"좋지! 맑은 공기 마시며 책읽는 저 순간이.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시도 좋고 우리네 삶을 얘기한 수필도 좋을 것이고...."
라는 생각을 하며 절을 둘러보니 절도 벌써 가을 채비를 다 끝낸 것 같다.
텃밭도 갈아서 아마 배추씨라도 심은 듯 골이 정연하다.
한켠에 발갛게 익어가는 고추들이 평화스러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
발길을 재촉하다 옆길로 잠시 들어서서 그늘진 바위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본다.
그리운 이여!
계속 오르려니 저번 비가 핥고 간 자국이 너무나 선명하다.
길이 군데군데 패여서 돌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랄까?
저번 비로 물에 잠긴 김해 한림정의 친구가 또 생각난다.
이제 회복이 좀 되었는지...
당장 전화라도 해봐야지.
억새풀군락지에 닿았다.
가을이 이 아름다운 산을 만산홍엽으로 물들일 때 즈음에,
특히 해가 서산에 기울 때 즈음 여기 오르면 억새꽃의 군무는 묘한 실루엣현상으로 환상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벌써 억새꽃이 다 피어서 하늘거린다.
어릴 땐 뱀이 많던 곳이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 흔했던 화사마저도 구경하기가 힘들다.
때마침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을 양팔벌려 맞이하며 산세를 관망하다가 정말 "아름다운 조국"이라고 스스로 찬탄해본다.
산까치의 노래소리,
끝으로 치닫는 여름에 항거라도 하는 듯한 매미들의 울음소리!
허리 높이로 자란 억새풀 사이로 나타난 빨간 고추잠자리가 돋보인다.
어느새 부근이 잠자리들의 군무로 또 장관이다.
어릴 때 특히 해질녁 산에서 풀을 먹이고 소를 몰고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떼지어 날아다니던 그 잠자리들!
그것들을 제비가 잡는다.
날으면서 주둥이에 잠자리를 낚아채는 날쌘 제비들의 모습들이 불현듯 스친다. 그나마 이제 그것마저도 인간이 배출한 각종 오염으로 볼 수가 없으니 차차 인간의 곁을 떠나는 자연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산성을 넘어서니 시원한 낙동강 바람이 불어온다.
언제 왔는지 길목을 지키는 막걸리 장수를 보노라니 한잔의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여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땡전 한푼없고 달랑 열쇠고리만 잡힌다.
아까와라!
몇 년전 불이난 자리에 심어둔 나무들이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러나 '언제 곁의 나무만큼이나 키높이가 같아지는 걸 보게될까'하는 작은 인생여정의 끝을 예상하니 크나큰 우주속에 한낱 점도 이루지 못할 내 자신의 존재가 정말 가소롭고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느 싯귀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주변의 내 친구들을 더 고운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햇살이 아직 따가와 발길을 재촉하려니 저만치 큰 바위틈에 자라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어릴 때부터 있었건만 그야말로 모진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버티고 있는 저런 자태를 바로 오상고절이라 했던가?
차라리 올라가기 힘든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오늘까지 왔으리라.
아니면 벌써 분재에 눈독들인 사람이 살리지도 못하면서 파갔을텐데...
저렇게 크는 동안 우리동네 많은 어른들은 먼 길을 가셨건만...
특히 여름방학때 소를 산에 풀어놓고 친구들과 계곡에서 멱감고 노는 사이 자기 논에 우리 소가 들어가서 벼를 작살내었다고 그 어린(지금도 작지만) 나의 멱살을 잡고 "죽일 놈, 살릴 놈!"하셨던 그 분도 이미 먼 길을 가셨는데 이 소나무는 그래도 좋은 바람과 이슬을 머금으며 버티어온 것이 나의 작은 인생사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계속 길을 가려니 무릎까지 자란 풀속에서 그 옛날의 낄낄이(배짱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름방학숙제로 등장하는 밀짚으로 만든 낄낄이집이.
새삼 뇌리를 스친다.
우리집 머슴을 졸라서 만들어 달라해서 갖고 갔던 기억들이...
좁은 등산로 옆엔 분홍색 패랭이꽃이 티없이 맑고 고운 색갈을 뽐내고 다소곳이 숨어있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풀잎들이 초록의 파도를 연출하며 품고 있던 더운 열기를 내 얼굴에 쏟아낸다.
소나무가 드리우는 바위위에 앉아 친구가 사는 동네를 내려다보며 찡한 가슴을 쓸어내리려니 호랑나비가 멋지게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
오, 살아있는 자연이여!
사느라고 공장에서 들이킨 먼지들을 다 쏟아낼 욕심으로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