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나날들의 일기 中 에서...











1987 x월 x일



빌어먹을,,,

타인과 입을 떼며 얘기해본지가 20일이 넘어간다.
그 동안 입술을 움쭉거린 것은 "세인즈베리"에서 마켓 캐셔에게
"How much?"뿐이다.
그 몇 초간의 즐거움이라도 부질없는 위안을 위한 쓸데없는 쇼핑!
아무리 물을 들이켜도 입안이 껄끄럽다.
입 속에서 내 핏속 고독함이 모래알처럼 나뒹굴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은 더 이렇게 견뎌내야 한다.
개강 후 노랑머리 친우들에게 난 이렇게 거짓말을 할 꺼다.
"우아~! 정말 즐거운 방학이었어. 그렇지 않았니?"

외로운 모습, 아둔한 모습, 나약한 모습들은
절대로 뉘들에겐 보이지 않으리라!

수면의 나락도 그 끝없는 시간의 관용 속에서
이미 더 이상의 휴식으로써의 즐거움을 이탈했다.


자고,,,또 자고,,, 끝없이 자도 날은 밝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천형이라 했다.
내 말도 못 쓰고, 내 음식도 못 먹고,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난,,난,,,친구가 필요해!



1987 x월 x일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돈이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공부 열심히 하라고,,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도 부모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나는,,,
지진아임에 틀림이 없다.

다행이다.
적어도 난 굶주린 아귀가 되어버린 승냥이 새끼처럼
끄르륵거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집에 가고프다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와 산이 인접한 곳.
(영국의 남부--소설 "테스"의 배경장소)

귀신의 안식처라는 언덕 위 古城속의 학교.
옛 던전(dungeon- 城내의 지하감옥)이었던 연습실에서
밤늦도록 맴도는 肉없는 그들을 벗삼아 악착같이 연습에 매달리다가,,,,

큰길을 벗어난 한없이 구불구불한 길.
가로등의 문화혜택도 없는 그 길을 약 3마일쯤 돌아 들어가면
Broadhampston 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지요.
그곳에 마구간을 개조한 저 혼자만의 자그마한 오두막이 있었답니다.
철저한 고독 속으로 잦아들음으로써, 완전한 자학을 즐김이었을까요?

그 Stable Cottage에서 나의 태생을(사람, 언어, 음식)을
완벽하게 무시당한 4년간을 지냈습니다.

슬픔에 압사되기 직전에 잠기듯이 찾아들어 오열하던 그 바다에서
그 분은 제게 말씀을 주셨지요.

"아가~! 나의 아가야~ 울지 마라.
네가 채우는 물잔은 포도주가 될 것이니..."

스스로의 환각이었을까요?



전 사실은,,그 시절의 멍은 조금만 끄집어내져도 너무나도 아파서,,,,
이렇게 긁어내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내야만 회복될 상처....
파래지다가, 시커매지다간,,,,,,,,,
그러다가 언젠가는 아픔 없이 회상할 수 있는 관망의 색을 찾겠지요.



26th,Sep.,2002 이쁜몬스터

















친구가 추석 쇠고 만나자고해 어제 밤에는
무교동에서 그와 술 조금 푸고 헤어졌습니다.
무교동은 낙지골목으로 유명하지만
골목마다 비지니스 크럽이 벌겋게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경기라서 그런지 직장인들이
출입하는 이곳은 겨울 밤처럼 썰렁했습니다.
그 친구와 열 한시 쯤 헤어지고 종각을
지나 종로 2가 쪽으로 혼자 내려 가야
했습니다.
왜나면 내가 20 대 초반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놀다 통행금지에 쫓겨 허겁지겁
배회했던 곳이고 지금은 서울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북적거리는
먹자 골목으로 음식이 무지하게
싸고 맛 있어 두발로 걸어와 네발로 기어
나가는 대표적 명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므로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듯이
이곳에서 그 어린시절의 나를 찾아 보고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마음의
거울로 확인 하고 싶어 헬리우스 라이트
크럽을 지나 KFC가 있는 곳까지
걷는 동안 썰렁한 무교동과는 달리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휘청거리는데
4, 50 대의 남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이곳은 이미 나의
구역이 아닌 젊은이들에게 빼앗긴
땅이었습니다.

세상은 넓지만 50 대인 나의 구역은
자꾸만 침범당하고 젊은이들에게
탈취당해 동네 노래방이 나의 유일한
땅이 돼버린 지금 , 내 마음은 이 거리가
황량한 황무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거리는 완전히 낮선 건물로 탈바꿈 해
내가 조잘거리던 어릴 적 골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라이트 크럽이며
카페며 노래방이며 주막들이 무섭게
활활 불타고 있었고 20대들의 자유분방함과
건강미가 철철넘치는 부러운 힘과 원색의
세련되고 화려한 옷과 빨갛게 오색으로
물들인 헝크러진 머리들이 아름답게
휘날려 어느 낮선 미지의 세계에 온
기분이었답니다.


이곳은 용강로처럼 뜨겁게 끓는 젊은이들의
천국이었고 골목에서 연인끼리 껴안고
키스하는 흉물의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마음의 거울로
구부다 보지 않아도 될 자연스런
현실이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다된 흉물이었습니다.

50대인 내가 추억인지 뭔지를 비춰 볼려고 낡고
녹슨 마음의 거울을 들고 거리를 걷는 자체가
흉물이고 공자 맹자 이야기나 하는
구닥다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요즈음은 공자 맹자보다도 더 깊고 복잡한
최첨단 소프트 웨어가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을 통제하는 벅찬 밀레니엄
시대이니까요.

세월이 정말 무섭게 뒤집히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그들에게
쳐지지 않으려고 항상 몸과 마음을 갈지만
내가 낄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들과 대등하게 낄려고 노티나는
양복 대신 청바지에 야한 티까지 걸치고
이들 젊은이들과 나란히 섰으나 역부족이었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호홉하기에는 강물이 흘려도
너무나 아스라히 흘러가 버렸고
흘러간 강을 그리워하는 나는 역사의 퇴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무지를 걷다보니 인사동 골목 입구가
검게 보였습니다. 얼마 전 모 카페 모임이
그 곳에서 있었고 나는 처음 보는 낮선 회원들과
철없이 떠들고 어울렸는데 오늘 밤 여기
젊은이들이며 내 어린 시절이 그리워 흉내 내느라
그토록 몸부림 친 주책이었나 봅니다.


나이 때문인지 서글픈 어둠만 한없이 쌓여
나뭇꾼처럼 밤을 무겁게 등에 진 나는 이
어깨의 짐을 확 털어 버리고 나도 신나는
20 대가 되고 싶습니다.진정 몸도 마음도
녹슬지 않고 늙고 싶지 않습니다.

...............................................................................................................................



천운이 순환하면 역사가 바뀌고 세월이 가면 강산이 변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하여 민족이 분열되고 국토가 분단되었던 지구상의 몇몇 나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세계의 등불로 불리어오던 5천년 찬란한 역사의 우리는 아직 지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6. 25전쟁을 비롯하여 무수한 무력 충돌이 이어져 수십만 동포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고, 최근에도 서해 상에서 남북 함정이 불시로 교전하여 무고한 우리의 자식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

우리 겨레의 끝없는 눈물과 통한을 어디에 비할 것이며, 그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입니까 ? 또 조국 광복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순국하신 선열들 영전에 무슨 말로 사죄해야 한단 말입니까 ?

그 동안, 여러 차례 남북 정부간에 평화 통일을 위한 협의가 있었고 공동 합의문도 발표한 바가 있었지만, 이제 까지 별 성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겐 실망과 불신만 깊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눈물을 닦고 새로운 희망을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경의선 철도와 동해안 교통로를 개통하는 기공식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반신반의했는데, 몇일 전에는 평양에서 남북교향악단의 합동 연주회가 있었고, 또 9월 27일에는 평양대극장에서 이미자의 평양동백아가씨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상상치 못했던 감격스러운 장면들이었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공연을 관람하는 북녘 동포들의 뜨거워진 눈 어저리를. 그들은 과거 공산주의 혁명전사의 살벌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증오나 경계심 대신, 천진한 웃음과 순수한 예술적 감동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노래 공연 중, 그들의 뜨거운 열기는 겨레에 대한 사랑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역연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 백 명의 조선 선수단이 날아왔습니다. 이번 기회는 아시아의 축제일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북 겨레가 진정으로 화합하는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또 속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제 우리는 한 많은 지난날의 일들을 깨끗이 씻고 우리 남북 동포가 함께 어우러져서 즐거운 봄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를 날이 꼭 오기를 기원합니다.
이대로 휴전선 철조망을 걷어냅시다. 백두에서 한라산까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어디든지 걸어갑시다.

그런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저주스러운 휴전선을 마주 보며 혈육이 총을 겨누고 살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는 일도, 무력증강, 전쟁 준비에 국력을 허비하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 동족 상잔의 조국이 싫다며 국외로 유랑하거나 유리걸식하던 내 동포 형제들이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요 ? *

-바람과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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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야기] <<「이광수」와 소설 「이순신」>>


- 서 부 련 -



얼마 전 딸아이가 하도 재밌다고 추천하는 바람에,
"신라의 달밤”이란 영화를 Better-half와 본 적이 있다.

젊은 애들 수준으로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 황당한 만화버전 오락물 정도였다.


수학여행 간 고교생들이 광란의 파티 장에서 노래를 하는데
순진한 모범생인 박영준(이성재분)이 분위기에 안 맞는
청승스러운 “신라의 달밤”이란 노래를 부르자,


야유가 쏟아지며 마이크를 뺏어 그들의 호프 최기동(차승원분)에게
넘겨서 다시 싸이키한 음악의 광란의 도가니로 빠지자
박영준의 멍청하고 겸연쩍은 표정이 클로즈업되고 이어서 집단
패싸움이 벌어지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중엔, 경주 수학여행의 그 날의 패싸움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모범생이던 박영준은 조폭의 중간 보스가 되어 깡패의 길을 걷고,


깡패 같던 문제아 최기동은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훈육하는
서로 상반된 인생길을 걷는다는 것이 영화의 골격이다.


영화! 영화는 이렇게 “쪼다”를 “짱”으로,
“짱”을 “쪼다”로 만들 수도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설도 얼마든지 한 인물을 작가 마음대로
각색할 수 있는 분야이다.


하물며, 역사적인 실존인물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실존적 존재의
의미가 묘한 존재로 둔갑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시대 때 자칭 민족지(?)라고 자부하던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이 아닌가 한다.


이광수는 민족사의 구국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 “이순신”을
우리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부각시키는데 교묘하게 이용하여
“친일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광수가 “이순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시기(1931.5.30~1932.4.2)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켜 중국대륙의 침략을 시도하던 때이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일본으로서는 조선정벌을 실패하게 만든 천추의 한이 된
"조선의 구국영웅”이 아닌가.


그런 인물을 일제식민지 시대에, 그 것도 중국을 침략하려고
만주 사변을 일으킨 해에 조선민족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물을 주제로 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도록 했으니---,


그 당시 일본 놈들의 머리가 돌지 않았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선에서는 일본제국의 운명을 걸고 피 터지게 싸우는 판에,
후방에서는 왜적을 물리친 조선의 “호국영웅”을
자칭 민족지(?)라는 “동아일보”에 연재하게 하다니---!


“만세”만 불러도 감옥으로 가는 그 암울하고 살벌한 시국에 ---- ?

당시, 조선 총독부가 제정신이라면 “동아일보”를 폐간하고,
이광수를 당장 서대문 형무소에 처넣었을 것이 아닌가!


조선총독부는 그렇다 치고, “이광수”와 “동아일보”는 죽기를
작정하고 “민족혼”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휘발유를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신문뿐만 아니라 출판물에 연재하는 창작물은
모두 지금이나 그때나 그 집필의도와 대강의 줄거리를 사전에
편집자와 협의 또는 고지하도록 하는 것이 관행이다.


대충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당시, 조선총독부와 동아일보, 이광수의 관계가------.


이광수는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 자리를 때려치우고
귀국한 다음, 조선과 그 민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했다는데 -----.


그는 1922년 자신이 발표한 “민족 개조론” 이라는 글에서,
전국에서 일어 난 3.1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일으킨 사건” 이라며,


조선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게으르고, 믿을 수 없고,
비겁하고, 이기심으로 얼룩진 더러운 종족”이라고 비난하고,
그러한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은 독립능력이 없다고
못 박았다 한다.


이광수 왈, 우리는 조선민족의 존재를 버리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민족으로 통째로 바꾸어야 하며,


우리와 같이 더러운 민족성을 가진 "조센진"은
독립일랑 꿈도 꾸지 말고 문명국가 일본제국의 보호와 지배를 받아야
“타락한 민족성”을 개조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적극적인 친일파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하며 묘사한 임진왜란 당시(1592년, 선조25~31)의 조정대신들은,


허구한 날 당파 싸움이나 일삼고 계집질이나 하며 중국(명나라)에나
의존하다 나라를 말아먹은 병신들의 집단이었다.


또한 그 당시 조선국왕은 우유부단한 겁보에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소심한 소인배이고, 백성은 한심한 족속들의
무리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순신”만큼은 사리사욕에 들끓는 아귀다툼의
당파 싸움 속에서도 초연하고 간신무리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백의 종군"하여 나라를 구한 유일한 "호국영웅"으로 묘사하였다.


이광수는 “이순신”을 부각 시킨다는 것을 빙자하여,
조선의 임금은 물론 조정대신들과 백성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자연스럽게 쓰레기들로 묘사하여,


일반 대중들(독자들)로 하여금 조선민족이라는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스스로 모멸감을 갖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의
"소수의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쨌든, 이광수는 임진왜란 때 비록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지 못했지만, “이순신”같은 걸출한 영웅이 없는
지금의 시대(일제식민지 당시)에 탐관오리들의 후예들만 판을 치던
"조선은 망해도 싸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민족은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전파 시켰던 것이다.


그와 같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해에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토록 한 것은 “망해도 싼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정의의 징벌”이고, “침략”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의식을 암암리에 조선백성들에게 심어주고자 한
조선총독부, 동아일보, 이광수 등이 치밀하게 계획한
야비하고도 파렴치한 작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 -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신화 “도오고오”는
누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영국의 넬슨이야 감히 내가 견주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제가 신발에 끈을 맬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더구나, 조선 민족이면 누구나 추앙해 마지않는
“이순신”을 소설로 이용하여, “이광수”는 그 반대급부로
이순신을 제외한 모든 조선인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고도 철저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 여파가 면면이 계승되어, 일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은 아직도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어서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지금까지 갖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 후부터 "엽전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유행했다나!


즉, 이광수는 소설 “이순신”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열등함을 자학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썼던 것이다,
문학을 통한 세뇌교육은 그토록 무섭고도 질긴 것이다.


임진왜란이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본은, 처절한 100년 동안의 세력다툼을 거처
"도요또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방금 섬나라를 통일한 시기였다.


싸움이 이제 막 끝나 뒤숭숭한 섬 나라에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사무라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득실거리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고
불안하여, 그 쓸모가 없어진 “싸움 꾼 사무라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아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의도된 전쟁이 아니던가----!


석 달이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장담한,
싸움으로만 단련된 일본이 조선민족의 끈질긴 7년에 걸친
처절한 저항 끝에 결국 퇴각하게 된 저변엔,


이광수가 그렇게 한심한 족속들로 매도한 조선백성들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선비는 붓 대신 칼을 들고, 농부는 농기구를 무기삼고,
아낙네는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며, 승려는 목탁 대신 창을 들고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30만이 넘는 사무라이들을 상대로
석 달이면 족하다는 전쟁을 7년이나 버티다 끝내는 물리쳤던 것이다.


그런, 조선민족의 면모를 이광수는 “이순신”이란 연재소설을
빙자하여 그렇게 매도하며 친일에 앞장섰건만,
민족의 단죄는커녕 해방 후에도 위대한 소설가로 추앙 받도록
교육을 시킨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나라인가!


독립투사의 자손은 못 먹고 못 배워 병약한 몸으로
길거리를 배회하고, 친일파의 자손은 해외 유학에
물려받은 재산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이 나라---,


하긴 독립군을 뒤쫓던 일제시대 때 경찰간부가 해방 직후에도
경찰간부로 행세하던 나라꼴이라니!


요즘 이런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모두 “아니요”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제기랄! 아서라, 말아라.
그런 광고 믿다간 멍청한 “쪼다”되기 십상이지---, 순진하셔!
그래도 나는, 자기에게 불리할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는 순진하고 멍청한 쪼다(영악한 놈들 눈엔)가 좋더라!.

- 시나브로 핀 연꽃 -


2002.2.20 .y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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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늘 소 한 마리가 매여 있다. 삼촌이 사오고 우리 어머니는 삼촌을 도와 꼴을 베어 먹이고 해서 새끼를 낳으면 그 송아지는 어머니 몫으로 하기로 했다.
아직 큰 소가 되기에는 멀었지만 우리 마당에 들어올 때 벌써 송아지를 밴 상태였다.
순하게 생긴 얼굴, 커다란 두 눈, 귀에는 군청에서 달아준 노란 번호표를 달고 있다.

인간이 원시농경사회 이래 소와 함께 살아온 것은 2천 년도 넘을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만 해도 소는 재산 목록 1호였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어린 시절의 소에 대한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여름이면 산에 소 먹이러 가는 일은 아이들의 몫이었고 그 소먹이에 대한 추억은 정말 무지개 빛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소의 목에 걸어 둔 풍경이 딸랑딸랑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머루 다래를 따먹고 씨름판을 벌이고 호수에서 물장구 치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은 이제 장년의 나이에도 새롭다.

거친 콩깍지와 볏짚 썬 것을 푹 삶아 주기만 해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다. 식성도 좋아서 큰 가마솥에 끓인 쇠죽을 한 끼에 다 먹어치운다.
소는 걸음걸이가 무척 느리지만 그 걷는 속도는 일정하다.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을 때나 아무것도 싣지 않았을 때나 그 걸음의 속도는 비슷하다. 바빠도 무거워도 한가해도 가벼워도 소는 항상 뚜벅뚜벅 같은 속도로 걷는다. 그리고 끝내는 갈 길을 다 가고야 만다.
미련하다고 하는 그 소의 걸음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람은 힘이 남는다 싶으면 너무 조급히 내달리다 벼랑에 떨어지고, 조금만 힘이 들면 주저 앉아버리는 인간들의 속성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70 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사람들은 대학을 상아탑이란 말 대신 우골탑이라고 불렀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을 대학 학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드디어 소를 팔기로 한다. 소가 뭐 대단하냐고 하지만, 그 당시의 소는 열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 소를 팔고 나면 힘든 농사일은 사람이 감당해야했다. 소가 하던 일을 사람이 하려면 너무나 힘이 들기에 온 집안 식구가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리 학자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음에야 어떻게 하나. 자식의 장래를 위해 부모는 등골이 휘어지는 고초를 각오하며 소를 팔았던 것이다.
팔기가 아까워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울면서 소를 팔았다. 우리는 이런 부모와 소 덕분에 가까스로 공부를 한 세대이다.

소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신뢰의 상징이며, 인간과 영혼으로 교감을 하고 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는 순간부터 집안에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 저 소가 크면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고 새끼 낳으면 막내 학비 마련되겠지 하면서 큰 기대를 하고, 소는 그 기대를 져버리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예전의 시골의 밤은 무서웠다. 큰 고개를 밤에 홀로 넘으면 범과 같은 짐승들이 사람을 노리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밤에 큰 고개를 넘어야 할 때, 사람들은 소를 몰고 갔다.
캄캄한 밤 고개 모퉁이에서 황소가 숨소리를 크게 내쉬며 떡 버티고 선다. 순간 앞에는 뭔가 날쌘 짐승이 휙 지나간다. 사람도 소도 얼어붙은 채 서로의 교감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소는 주인이 있기에 힘을 얻는다. 사람은 소가 있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 둘의 교감에서 얻어진 기는 어떠한 짐승도 이겨 낼 수 있다. 넘어야만 하는 고개이기에 소는 콧김을 내뿜으며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소는 주인을 믿고 주인은 소를 믿고 캄캄한 밤 고개를 넘어간다.

절대적인 신뢰의 힘이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함께 도모한다면 세상에 못 이룰 것이 있겠는가. 친구, 부부, 형제자매, 동업자, 회사의 동료간에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만 형성된다면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소는 덕의 상징이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할 뿐, 절대로 게으름 피우거나 투정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과 뼈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 모두 인간을 위해 베풀고 간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은 정말이지 소만도 못한 사람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축생계에서 인간계로 올라오는 마지막 윤회의 삶이 소의 생애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덕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은 소 대신에 경운기로 농사를 지으므로 소는 오로지 사람을 위해 고기를 줄뿐이다. 그래도 소는 그 성스러운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소를 가만히 보면 너무나 배울 것이 많다.

오늘 우리 소가 팔렸다. 삼촌이 급히 돈이 필요해서 팔아야 한다고 어머니와 합의가 되었다.
왠지 섭한 마음 떨칠 수가 없어 오늘 저녁은 맛있는 사료와 풀을 많이 주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정을 쏟고 나면 이별은 결코 기쁨은 아니다.
몇 달을 내 손으로 먹여 키워 낸 것이 떠난다니 서운할 뿐이다.
내일 아침해가 뜨기 전, 새로운 주인에게 넘겨질 때는 나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작가 : 느티나무, 2002.9.18.)


* 사친가(思親歌)를 부르며 *



아버지!



억새꽃 숲이 차지해 버린 가을빛

한껏 들이켠 수면 같은 하늘은

낮달의 목 울음에 차 있습니다.



오늘따라 고독할 수밖에 없는 설운 이유는

학처럼 긴 당신 목에 걸쳐 있는

얄찍한 가을빛 때문에...



한 생애의 유년이 하늘로 치솟던

내 인생의 분수령

엄격하셨던 그 앞에서

마음 놓고 함부로 딩굴어 보지 못한

가난한 사랑 때문인지

요즈음 유독 아버지를 부르고 싶습니다.



꽃물살 일렁이며 햇살 잘게 바스라지는 날엔

초록 하늘에 하얀 뭉게 그린 파장을 보내며

당신 목 솜털 하나 하나에 심어 본

못 다한 자정(慈情)

그곳에서도 못난 딸이 걱정되십니까.



이별은 또 다른 해후를 내포한 것

계절 흘러 억새꽃 바람에 지듯

나 또한 떨어져 다시 태어나면

또다시 당신의 딸로서 만나고픈

서러운 자위(自慰)

우리 만날 수 있는

뛰는 희망으로 연소(燃燒)되길 원하면서



아버지의 그리움

온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붉은 혈맥 속에서 울고 싶은

사친가를 목놓아 불러 봅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혜 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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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짚기/오해 ...............꺼꾸리


딱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주 내내 그런 기분으로 지내야 했다.

몇 년 전 한 학부형이 교실로 찾아와
자녀에 대한 상담을 하고 갔는데
그녀가 떠난 자리에 웬 비닐 백이 남겨 있었다.

그 땐 학부형이 찾아와도
봉투라던가 선물 같은 걸 안하던 때라
의외의 기분으로 슬쩍 봉투 안을 넘겨다 보니
이게 웬 일!
거기엔 생리대가 얇은 비닐에 담겨져 있지 않은가!

이걸 선물이라고 주고 간 것일까?
담임한테 물건을 주면 안된다니까 이런 방법을 쓴 것일까?
이걸 끌러봐?
아니면 아이 편에 돌려 줘?
좀 정신 나간 여편네 아니야?
담임을 완전히 뭘로 본거야?
내가 혹 칠칠맞게 옷에 묻히고 다닌 적이 있었나?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그 주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한 열흘 후엔가
그 엄마가 급식 당번이이어서
급식실에 왔다가 일 끝나고 교실에 들렀다.

나는 그 때까지 그 엄마가 놓고 간
비닐 백을 내 책꽂이에 살짝 밀어 놓고는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그 비닐 백이란게 짙은 남빛에
가운데 세로 줄 무늬가 두 줄 쳐져 있어서
책만 꽂아둔 곳에서 얼른 눈에 띄었던지

그 엄마가 내 책꽂이에 눈길을 주다가 얼굴빛이 붉어지며 한다는 말이

"어머머! 선생님! 저거, 저거...."

"예? 아, 그거, 맞아요. 엄마가 접 때 두고가신... 그런데 애 편에 돌려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약국에서 정신없이 돈만 주고 그냥 왔나보다고만 생각했어요.
여기다 놓았으리라곤 전혀 생각을 못하고요. 할 수 없이 가다가 하나 또 샀지 뭐에요."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그 엄마에 대해서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며... //


얘기를 하다보면 금방 풀릴 것도 꽁한 마음에 입을 닫고 있으면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부르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할 얘기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지만 말고
스스럼 없이 털어놓을 일이다.
아무 얘기나 수다스럽게 하자는 말은 아니고...




...................................................................................................................................................


<좋은노래는 아름다운 자식을 낳는다.>




푸르른 날개를 희번덕 펄럭이며
태양을 향해 아들달라고 손짓하는
그대 살갖의 울툭불툭 크고 작은 잔털.

욕심으로 끌어 모운 영양 물들을 태워서 생산되는 생명.
소담소담 꾸미는
머리,
등,
허리에
차곡차곡 쌓여
버팀목이 된 그대 앞에서
뭍으로 차오르는 연습을 한다.


조직사회에 길들어진 몸체는
땀을 뻘뻘흘리며 찾아왔는데

그대는 투명한 침묵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쪼그라드는 마음은
마냥 지나쳐가는 뜬구름 닮아간다.


그대여
비를 맞이하여
눈을 맞이하여
생명을 일구어내는 골짝을 보여줘.
바람을 몰아가는 어설픈 능선도 보여줘.

태고적부터 중심점을 위하여
살을 도려내고
뼈를 갉아내어
완만하게 정립된
삼각,
사각,
오각,
다각 뼈대에 시시각각 변모하는 당신의 얼굴
화사하게 색칠한다.

계약으로 가꾸어 놓은 울타리
얽혀진 실선들을 풀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대 닮은 미소 기다리이까?


오늘도 뜸직한 그대
어깨 위에서 어둠을 걷어내는
햇님이 빙그레 웃는다.

보고 그대 듣고,
보고 웃음 듣고,
보고 울림 듣고,
밝게 웃는 아침.

뜸직한 그대에 내가 들어가 또 다른 나른 기다린다.

사랑했다는 향기풍기며 ...



한곰 ...


소담소담: 소담하다:(형용사)생김새가 탐스럽다.
사물이 수수하게 풍족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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