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금사가 들어간 색동비단으로 만든 골무가 하나.
자주 비단에 보랏빛 테를 두른 골무가 두개.
그리고 제일 만만하여 자주 끼었더니
뾰족한 바늘귀에 등짝이 헐은 가죽골무가 하나.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언젠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골무들을 무슨 보석이라도 보는 양 들여다본다.
나는 다섯 살 즈음부터 어머니 곁에서 바늘과 오색비단을 가지고 놀았다.
그 시절 온 고을이 다 아는 선비이신 우리 아버지는 웬만한 집안일은
거들 떠 보지도 않으시는 분이셨고 적지 않은 농사일에
맏이도 아니셨지만 할머니께서 굳이 둘째 아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바람에
크고 작은 손님은 늘 그치질 않아 손에 물기가 걷힐 사이 없었던 어머니는
일에서 떠나 한가히 쉬시는 모습을 뵙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를테면 동네에서 가장 어려운 어른이셔서
모든 동네의 행사 기획은 아버지께 먼저 보고가 되었고
축문을 지어주시거나 이웃 간의 송사라도 생기면 중재자가 되어 시비를 가려주시기도 했고
사주단자에 넣을 혼서지를 써 주시거나 글 모르는 아주머니가 군대간 아들의 편지를 들고
이슥한 저녁 찾아와 읽어주기를 청하면
구성진 음성으로 곡조를 넣어가며 그 편지를 읽어주시기도 하고
뭐라고 답장을 써달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막힘없이 편지를 써서 읽어주시곤 했다.
때로는 동네에 불량한 아들이 있어 술 먹고 부모님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하면
꼼짝없이 불려와 무릎을 꿇고 일장 훈시를 들은 다음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는 다짐을 하고 돌아가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나는 당연히 아버지의 몫인 줄로 알았었다.
손재주가 뛰어나신 어머니는
동네 처녀들이 시집을 가거나 회갑잔치가 있거나 할 때면
옷감을 들고 와 옷을 지어달라고 사정하는 이웃아주머니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호롱불 곁에서 밤 이슥토록 새색시가 입을 한복을 곱게 지으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자투리 천에 모란이나 원앙을 수놓은 예쁜 베개모를 만들거나
올망졸망 골무도 만들고 붉은 천으로 꽃송이를 만들기도 하고 고운 복주머니를 지어
함께 선물을 하시곤 했다.
비단 천 냄새와 감촉, 매혹적인 색과 광택.
때때로 화로에 꽂힌 인두로 바늘땀 솔기들을 잠재우시던 익숙하고 차분한 손놀림.
신중한 표정 간간히 흘러나오던 가벼운 한숨소리......
반듯하고 하얀 가리마와 은비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추석과 설에는 반드시 할머니와 아버지와 나의 옷을 새로 지어주셨는데
내가 한복을 입고 나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고리 앞섶을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하며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하곤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려하지 않으셨다.
내가 나도 바느질을 하겠다고 조르면
“너는 이런 거 하지 말고 살아라.”하셨다.
어머니 말씀이 -바느질은 눈이 빠지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말 끝까지 한복 짓는 일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나는 자동모터가 달린 신식 재봉틀을 산지가 15년째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 주었는데 한창 홈패션이 유행할 때여서
이웃집 아낙들이 사들고 오는 천으로 식탁보며 테이블보며 아이들 가방이며
심지어는 갓난 애기의 옷까지 만들어 주며 즐거웠었다.
위층도 아래층도 옆집도 내가 만들어준 소품들이 중요한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런 일을 안하는 지도 꽤 되었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씩 나는 바늘을 잡는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골무들을 손가락 끝에 끼어본다.
원래는 세 개쯤 더 있었는데 얼마 전에 큰언니에게 몇 개를 주었더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머리가 하얀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하얀 아버지와 지금도 오순도순 지내신다.
가끔씩 뜨개질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이젠 돋보기를 써도 잘 안 뵈서 그조차 맘대로 안 된다고
서운 해 하시면서.........
너무 늦기 전에 어머니께 골무박는 법만이라도
제대로 배워 둬야 겠다.
2002, 4, 23.-하닷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