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날씨만큼이나 시중 인심들이 썰렁해지면서
너도나도 옷깃을 세우며 움츠러드는 것을 보니 동장군의 등장과 함께
우리네 심사도 겨울나기만큼이나 시큰둥한가 보다.


하나 반만년 역사를 앞세우고 내달려 온 배달의 자손들인 우리가 누구인가 ?
이 역시 가볍게 이겨낼 수 있는 저력들을 각자 지니고 있지 않을까 .


아득한 옛적 일들이 떠오른다.
당시 산부인과 병동에서 인턴 직책을 맡으면서부터는 이상스런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었지.
그 때의 대학 병원 산부인과에는 애들을 밴 산모들은 별반 보이지도 않고
극히 위중한 산모들이거나 이런저런 합병증으로 인하여 자연분만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그것도 은밀히 입원하여 소리소문도 없이 퇴원해 버리던 시절이었지.


주로 찾아오는 분들은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이거나 결혼은 잘 했는데
후속 반응들이 없어 생 고민하던 부부들이나 찾아드는 요즘의 산부인과
형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래 진료실은 온갖 커튼으로 칸칸이 다 막아놓아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한 미로로 인해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못한 초짜 인턴들은
아무 데나 급한 걸음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다간 새치름한 간호원들이나
선배 의사들로부터 눈총을 맞아야만 하는 왕따 신세들이었다.


하루는 출근 하자말자 선배 의사로부터의 엄명이 떨어졌었다.
지금 즉시 가서 정자를 구해 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


잠시 님들의 이해를 돕고자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
당시엔 애기를 가지지 못하는 부인들은 거의 대부분 대학병원 산부인과로
몰려들었고 검사결과 난소나 기타 임신 유지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지면
배란기에 맞추어 인공으로 정자를 주입하여 임신을 유도하게 되는데 마침
그 날 정자를 주입시켜야 할 환자가 예약되어져 있음에도 선배인 의사는 잊어버리고
아침을 맞았다가 급히 생각난 김에 만만한 나에게 총알보다 더 빨리 급하게 준비해
오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만 ...
대학 시절 우리들은 부속병원을 거쳐 강의실로 가게 되어있는 길목에서 늘상
선배의사들이나 교수님들이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게 눈에 자주 목격되어지곤 했었다.
그러면 대개들 자신은 "언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저 곳 패러다이스와도 같은
병원 안에서 꿈의 날개들을 펴 보고 살꼬? " 라든지 ,


멀리서도 잘 들리는 병원 안내방송을 통해 "닭갈비님 ~ 응급실로 !" ,
"오리발님 ~ 중환자실로! " , "동강아지님 ~ 수위실로!" 등의 매스컴은
언제 타보나 ... 가 그냥 작은 소망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눈앞으로 흰 가운
입은 천사( ? ) 들만 보이면 거의 자동으로 고개가 굽실거려지곤 하였지.


그러다 아주 가끔씩 그 천사님들이 "야 ~ 너 이리 좀 와."하고 손짓이라도 하면
드디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한테 안면이라도 좀 팔릴 일이 생겼구나 ~
하면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 위를 쳐다보면 십중팔구는
"너 실험 좀 하는데 도와 달라 ~ ." 라거나
"피 좀 빼자." 라는 주문들이 대부분이었지.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과가 바로 산부인과인데 그기에 걸리는 놈은
거의 대부분이 "물 쫌 빼라 !" 이다.
그 엄명을 듣는 즉시 속으로는 "아이고 선배님 살려 주이소." 이지
겉으로는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십 분이면 됩니다." 하고는 건네주는
play boy 잡지 같은 야릇한 책 두서너 권과 시험관 튜브들을 받게 되지요.


그걸 받아 쥐고는
"아이고 ~ 내 신세야 ~ 이 넘들이 애비를 잘못 만나 엄청 생고생을 하는구나."
하면서도 어렵사리 생산하여 가져다 받치면 심드렁하게 받으면서
양이 많니 적니 , 색깔은 왜 이 모양이냐는 둥 온갖 트집이나 잡다가 기분이라도
좀 좋으면 "내 이름 달아놓고 밥이나 한 그릇 먹고 가거라." 하거나 ,


자기 기분이 영 별로 이면 "너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라고 강압적으로 나오는데 ,
그러면 "하이고 ~ 아무 것도 먹고 싶은 것 없습니다요! 안녕히 계시다가 앞으로
또 뺄 일 있으면 불러 주이소." 하고 나오면서 18 을 백 번 이상 연발탄으로
쏘아 젖히곤 했었지.


이제 나도 비록 인턴이지만 어엿한 의사가 됐으니 이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지
식전부터 열심히 근무하려는 후배의사를 잡고 급하게 물이나 빼오라고 시켜대니...
게다가 학생들이나 등교를 했으면 나도 덩달아 좀 시켜먹을 수도 있을 텐데 시간이
너무 일러 학생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


자존심이야 엄청 상하지만 '인턴 주제에 갈 길이 천리만리인 판에
찬밥 더운밥 따져대다간 그나마 잘 못 보여 찍히면 평생 의사길 오그라들게 뻔한데
이 지경에 뭘 마다 하누 ...' 하면서 ,
"알겠심다." 하며 적진을 코앞에 둔 용감한 진진돌이가 되어 시험관 튜브 몇 개를
들고 나와서 병원 건물에서 제일 후미진 곳이 수술실 옆에 붙어있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갔었다.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선배를 염두에 두고 작업에 충실하긴 했는데 너무 몰입을
하다보니 ,
아뿔싸 ~
이게 마지막 단계인 조준에 실패하여 그 작은 시험관 튜브 속으로 쏙 들어가질 않고
몇 방울만 명중하고는 대부분이 상. 하. 좌. 우로 지들 마음 데로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


애고 ~
이를 어쩌나 ~
어렵사리 만들어 낸 아기들이 각자 다들 지 기분 나는 데로 도망가 버렸으니 ...
도망간 그 넘들을 일일이 시험관 속으로 붙들어 집어넣고는 다시 거울보고 엄숙한
매무새 갖추고는 냅다 달려 아기들을 갖다 바쳤는데 ...


이런 쓰발 ~
"양이 왜 이리 적냐 ? " 느니 , "좀 깨끗하게 갖고 올 수 없냐?" 느니 ...
온갖 투정 다 부려대는 데 ...
하이고 ~ 인턴의 세월이여 ~
영원할 것이라면 내사마 다리 밑으로 다이빙이라도 할 끼다 고마 ~


하나 엄연한 현실 앞에서 꿀 발라놓은 벙어리가 되어 조용히
그리고 얌전한 내시처럼 읍소한 자세를 유지하며 다음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
하기사 요즘 인턴들은 그딴 짓 하는지 안 해도 되는지는 내사마 그 놈의 과를
안 하니 그 내막이야 알 바도 아니고 ...


그라고 ~
그 여자 분들 열이면 열 ! 모두 하나같이 부탁하는 게
"꼭 쫌 의과대학생 것으로 부탁해요." 한다나 ...
나 참 !!! 죽여라 죽여 ~


요즘은 정자 은행이 생겨나고 냉동기술 또한 발전하여 인공수정에서 유전자
조작까지 가능한 시절이 되었으니 ...
하나 그 은행만큼은 여러 님들의 힘을 모아서라도 망하지 않게 막아야지
생사람 잡습니다요 ~


덤으로 ..........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 님들께 간곡히 부탁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혹은 지하철을 기다리시다가 아님 육교를 오르시다가 저처럼
생겨 먹었거나 아님 비슷하게라도 생긴 아기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저를 본 듯 따뜻하게 격려라도 해 주시길 빕니다.


가들이 무신 죄가 있겠습니까요 ?
해서 요즘 지가 밤이면 밤마다 편치가 않답니다.
금융 위기 !
그거 빨리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들 ~ !!!




















어느 시인에게 보내는 메일 From Tokyo-5


To. J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다.

오늘도 수고하고 지친 이들이 목로주점에 모여 앉아

담배 연기를 뿜고 있다.



시 고맙게 받았다.

매일 매일 보내 주는 글은 모으면

어느새 시집 한 권 만들겠다.

너의 글을 받는 건 즐거움이다.



시를 읽는 건 순간에 불과하다.

잘 익은 포도주의 내음을 맡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걸 와인 글라스에 담아

나의 일터 한켠에 놓아두고

다음 글로 그 잔이 다시 채워 질 때까지

들며나며 홀짝 홀짝 들이 마신다.

그러다가 마음이 취하여 오면 답글을 쓰기도 한다.




    어느 시인에게 보내는 메일 From Tokyo-4


    To. J


    이야기 1.

    더러는 바쁜 날도 있어야 밥 먹고살지...

    맨날 한가해서야 어쩌겠어.... 그러면서 오늘 하루는 정신없이 볶아쳤다.

    뭔 할 일이 이리 많아... 오늘이 아니구 어제 오후부터 그랬다.

    그건 그렇고 3일간 연휴가 있었던 것은 회사가 좋아서가 아니다.
    주5일제야 이미 한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그리고 또 하루는 공휴일이다.
    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치면 월요일이 공휴일이 되니까.
    그런데 토요일이 공휴일과 겹치면.... 그냥 꽝이 된다.
    즉 토요일은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그랬든 어쨌든 주 40시간 이상 근무하면 시간 외 수당을 주라는 게 원칙인데
    우리 회사에서는 시간외 수당은 줄 수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 주의다.
    그러나 알다시피( ㅎㅎ 아니 아마 모를 거다) 내 성격이 완벽 주의자라
    하던 일 내 팽개치고 집에 가는 일은 절대 못하구....
    그래서 내 목 내가 조이며 미치겠다니 죽겠느니 투덜투덜 살고 있다.

    나 한국에 있을 때는 주 5일제란 택도 없는 얘기였다만,
    어떨 땐 한달 동안 하루도 못 쉬기도 했다만... 하하 좋은 세상이다.
    이게 다 미국 본떠서 생긴 제도이니, 미군 철수 절대 반대당 !!
    어쨌든 근무시간을 줄여야 실업률이 낮아진다.
    둘에게 줄 월급 셋에게 나누어주자... 일본의 길고 긴 불경기의 터널을
    그나마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은 나누는 정신이다.
    일도 줄고 월급도 줄고.... 다 참을 테니 목은 치지 마라.... 그러고 들 사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매일 바쁘다.



    이야기 2.


    니 소개 시켜 줄 일본 여자 찾아보았다만.... 눈에 안 띤다.
    제일 먼저 물어 보는 말이 돈 많은 사람이냐?.... 근데 대답을 못하겠다...ㅎㅎ
    얼마 전 메일에 책 써도 별로 돈은 안 된다고 그랬잖냐.....
    그냥 밥은 먹고산다고 그럴 수밖에..... 일본에 놀러 다닐 여유(시간적)
    없잖아? ㅋㅋ 신문쟁이들은 바쁘다며.
    그렇담 돈 많고 시간 억수로 많은 과부를 잡아야 하는데....
    할머니거나 뚱뚱하고 못생겼거나 마르고 신경질 적이거나 의심 많은 사람밖엔 없다.
    너의 빈 가슴 채워 줄 만한 여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으랴.......
    내가 질투??? 우하하 .... 지금 대답은 하지 말자.
    사람의 속이 안 보이는 건 정말 위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꽤 뚫어 보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건 비극의 시작이리니.
    너나 나나 그 속마음을 그 옛날에 다 꽤뚫었었더라면
    그 옛날에 이미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파장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그리운 마음으로 이제 재회하는 것도
    그때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에게

    어제 저녁 너의 긴 글을 받고 프린트를 했다.
    가방에 넣고 출퇴근길에 되풀이 읽었다.
    인쇄물 세대라서 그런가, 화면의 글보다 종이 위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웹사이트에서 너의 이름을 발견한 건.... 그것은 한 줄의 부음이었다.

    ▲○○○(△뉴스 국제부장)씨 모친상
    = 20일 오후 7시 30분 XXX 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53)959-4441 (서울=연합뉴스) (끝)

    그걸 읽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한참 동안 너를 찾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이게 처음이다.
    그래도 너는 참 행복했구나.
    어머니께 빚을 갚으려면 자결을 할 것이 아니라 행복 하려무나.
    네가 어머니께 불효를 했다면 그것이 그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일지니.


    우리 어머니에게 나는 절망이었다.
    내가 딸이라서 가 아니다. 아들이었던 딸이었던 임신 그 자체가 절망이었으리라.
    우리 어머니는 날 임신 할 당시 여군 장교였다.
    결혼은 했으나 아직 혼인 신고는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근무하고 있던 육군 본부에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꿈도 많았으리라.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임신을 한 것이다. 퇴역을 결정하며 그녀는 절망하였으리라.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항상 히스테리였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날이면 나는 어머니의 폭력을 감내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모인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늘 가출을 꿈꾸었다.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어린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잘 견디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웠었던가는 모르신다.
    거의 30년 전에 아버지와 헤어지신 채 지금은 내가 보내 드리는 돈으로
    생활을 꾸리신다.


    우리 아버지에게 나는 꿈이자 희망이었다.
    인민 해방군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던 운명의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3년
    반공 포로로 포로수용소를 나왔을 때 그는 아직 20을 갓 넘어섰던 청년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띠다.
    즉 나는 아버지가 만24세에 보신 첫 자식이자 희망이었다.
    그 뒤로 남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도 아버지의 사랑은 내 것이었다.
    옷도 사다 입히시고 신발도 직접 사다 신기셨다.
    등에 업고 그리고 품고 주무셨다.
    머리가 커지며 당신의 뜻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딸에게
    절망 이상의 배신감 마저 느끼셨으리라.
    지금도 나만 보시면 얼굴이 환해지시는 아버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
    "내가 제일 기대를 했던 건 큰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이라면 뭔가 되어 주리라 기대를 했는데..."
    장남은 지금도 불만이다. 어려서 자기는 줄창 누나 그늘에서 찬밥 신세였다고.
    그런데 그 넘이 제일 출세를 했다. 아버지도 그 넘이 모신다.


    울 외할머니.... 나만 예뻐하셔서 ...
    시어머니 무서워서 기를 못 피던 우리 외숙모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제야 하시는 말씀이
    "어머님은 친손주 보다 외손녀를 더 예뻐하셨는데 그때는 그게 서운하더니만...."
    아들을 낳아도 딱 한번 미역국 끓여 주고는 그만이었단다.


    그런데 난 모두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보다
    어머니께 학대받았던 기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나는 절대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너처럼 슬퍼할가? ..... 네가 부럽다.


    지금 우리 어머닌 날 너무 사랑했다고 하더라. 지금도 사랑한다고.
    근데 난 어머니가 가없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다.


    오늘은 바람이 차다. 이젠 집으로 가야지.
    텅 빈 사무실에 남아서 너에게 답글을 한 시간 이상이나 쓰고 있다.


    난 언제나 너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널 다시 찾아내는 건
    언제나 내가 아니더냐? 이게 세번 째다... 넌 잊었겠지만..... ㅎㅎ
    아... 아니다 내가 사라졌던 적도 두 번 정도 있나 부다...ㅋㅋ


    그래도 그렇다. 찾지도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날보고 그리운 이라 할 테냐?



    멜론































법구경에 이르기를,
“산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이나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고 했다.

저 말... 우리네 인생 삶에 있어서 어둠 속에 빛이 될 道튼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당연하지. 세상의 경전은 대부분 도튼 이야기들이니까! 내가 이상한 헛소리를...)
그리고 잘하면 사이버의 글 사이트에서도 적용할 만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작업 시~작!


사이버란 어떤 자리인가?
사이버에선 싫든 좋든 남들과 한자리에 모여 부대끼는 자리다.
게임방의 고도리 한 판이 그렇고 사이트의 글 게시판이 그렇고
남들이 글을 읽어 봐주고 댓글 달아 주는 것이 그렇다.

글을 올리는 것과 댓글... 그것 또한 남들과의 부대낌이다. 이 말 전부 동의할 걸?
암....! 당연하지.
남이 봐주지 않으면 오늘부로 칼럼이고 게시판이고간에 글이 하나도 안 올라 올 걸?
대화방에 가 보니 먼지바람만 휘~잉 일고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장 분위기 같다면 주변을 어리둥절 훑어 보고는 잽싸게 후다닥
도망 나올 걸? 컴에 귀신이 붙었나 싶어서...

나 혼자로는 항개도 의미 없는 사이버다.

사이버가 등장하고부터 세상은 온통 작가 투성이가 되었다.
정말 클날 뻔 했어. 이 수많은 작가들, 시인들.....
초야에 묻혀 있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당송 팔대가, 황진이의 문장과 재치를
뺨치는 숨은 재줏꾼...
사이버가 없었다면 어디서 이들의 솜씨를 구경할 수 있을소냐!
그들 역시 턱까지 차오른, 살아 펄떡이는 文才를 어디에다 발산할소냐!
사이버가 없었다면 얼마나 클날 뻔 했겠어!

*** 저겨어... 사이버란 남과의 부대낌이라고 하는 말 이젠 다 동의하시죠?
부대낌이란 말이 정 거슬리면 함께 함이라고 고치죠. 뭐.
단어 가지고 넘 그러지 마세요.
‘남과 함께 함’이란 말의 숨은 의미를 함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그건 말이죠... ‘어떤 동일시’ 랍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잃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래라 저래라, 그건 된다, 안 된다 오만 가지 간섭을 받으며
자신이 판단하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사회적 관습에 의해 본성이
다 파괴되었다. 자아는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것...그건 사람들의 본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아를 찾기가 매우 힘이 든다.
그걸 혼자 찾는 사람은 도사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고 부처고 노자고 성철스님이다.
보통사람은 죽었다 깨도 어렵다.

그 바람에 우리는 잃어버린 자아를 남에게 의존해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남에게 내 자신의 ‘어떤 동일시’를 바라는 것이다.
그중에 남녀간의 사랑은 어떤 동일시에 으뜸 장땡이다.
“당신이 있어 난 행복해요”라든지 “당신이 최고예요.” 등의 말을 들으며
날 평가받고 만족하고 늘 자아찾기를 상대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달콤하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상대가 좋은 말로 속삭여 주니까... 오메! 뿅 가는 것!

비단 이성간의 사랑만이 아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 또한 자아를 찾기 위해 용쓰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댓글은 정말 쥑인다. 자기의 작품을 보고 남이 해 주는 어떤 말을 듣는 것
그건 진짜 가만히 있어도 마구 굴러오는 자아찾기이다. 쥑이지! 암...행복해!

*** 근데요... 댓글이 칭찬이라야 잃어버린 자아가 충족이 되지요.
만일 비방하거나 남들이 별 신경을 안 쓰면 오히려 자아가 손상되지요.
그만큼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지요... 그쵸? 인정하시죠?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작용한다.
칭찬의 댓글은 ‘나 행복해요! ’ 가 마음 가득한 희망이지만,
비난의 댓글은 ‘나 지금 슬슬 뿔따구 나고 있어!’의 절망이다.

글을 올려 보고 그 경험을 한 사람은 그걸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글에 무조건 좋은 쪽의 댓글을 일일이 달아준다.
왜? 자신도 그렇게 남의 댓글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자아 찾기를 위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 간청이자 윽박(?)이다. 나에게도 기분 좋을 댓글을 달아 달라고...

자신의 글이 대단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자아를 충족받기 위해 어떤 심리 상태로 가는가?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며 잘 쓴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계속 존경받아야
한다.
매일 자신을 향한 존경심 내지는 멋있는 사람임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에고가 유지된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더 인기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나타나면 질투가 생기고
(=나에게로 향하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에 대한 절망,
내 자아찾기의 상실... 그게 질투다.)

혹은 무슨 주제로 급히 글을 썼다가 쪼매 마음에 안 들지만 평소처럼
칭찬의 댓글이 올라올 줄 알고 올렸더니 웬 걸?
자기의 팬, 독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냉담하거나 비평이 바글바글하면
그길로 삐져서는 그 사이트를 떠난다, 어쩐다, 투정조의 글이나 또 올려보고….
그게 다 그놈의 에고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평하는 걸 듣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도 잘 된 평으로……. 잃어버린 자아를 대신 충족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법구경이 어디 시시한 소리를 했을소냐!
사람 사는 것 또한 다름 아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 또한 자아 충족용이다.
남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 것이다.
길을 걸어가며 수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원하는 것도 자아 충족이다.
에고의 만족이 그것이다.
미인의 시선집중 자아 만족, 부자가 돈으로 자아 에고 만족, 권력자가 힘으로
자아 만족......

빗나간 주제지만 사이버를 자주 찾는 사람은 현실에서 자아 찾기에 비교적 약한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더 주변을 의식하고 사는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들은 사이버에서 비로소 안식처를 찾았기 때문이다.
대개 그들은 남을 해코지 못하는, 악당일 수 없는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각설.

그래서 사이버란 현실에서 자아를 많이 잃어버린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도 하다.
대리만족을 위한 공식 게시판이 있고 댓글이라는 자아찾기 공식 위임장이 있는 곳
이거든.

그리고 글쓰기에 별로 자신이 없는 사람, 심지어 댓글마저 끙끙 자신 없는 사람조차
읽기만 하고 나가면서도 ‘난 누구 못지않게 감상은 할 줄 안다!' 고 은근히 자기
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사람들이 엄청 들락거리는 대화방은 어떤가?
동호회나 대화방 또한 자아찾기에 적격의 장소이다.

A 녀 : “오빠~! 멘트 목소리 쥑여요!” (CJ :뿅~~~~~@%#!)
3분후...
목소리 최대한 가다듬은 CJ: 언제나 상냥한 A녀 님 오늘도 오셨구요,(A녀: 뿅~~@$!)

남에 의해 자아를 찾기 보다는 남의 말에 부동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작 자아는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법구경이 이미 수천 년 전에 가르쳤다. 남에게 자신을 위임하지 말라고.

“산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이나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사진 최민식,045 : PUSAN, 1975




스승은혜 ....클릭





    1960 년대 가난했던 시절
    6. 25 이후 4년만에 태어나 소작농으로 살다가 근처 초등학교에 다녔다


    1년 농사는 쌀 5가마가 수확인 천수답 뿐...
    그 쌀을 가지고 5식구가 살림하고 밥을 먹어야 되니 점심은 다반사로 굶었다
    어쩌다 먹는다고 하면 찬밥 한 그릇에 물을 넣어 끓여서 양을 늘리고
    김치로 배를 채웠다.


    그 때 구세주가 있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옥수수와 탈지 분유
    지금 반미니 친미니 해도 그 당시 미국은 감사하기만 했다.
    한국사람들 굶어죽지 않은 것이...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다.
    얼굴에 버짐이 생기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으니 쓰러질 것 같다.
    점심 때 종이 울리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드디어 점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울리면
    집으로 빈 그릇을 가지러 간다.
    숟가락과 옥수수죽을 얻어먹을 밥 그릇
    그 때 얻어먹는 꿀꿀이죽, 옥수수죽은 진짜 꿀맛이다.
    아! 더 좀 먹었으면 불과 세 숟갈을 2분만에 먹고 나니 죽이 없다..


    양으로 치자면 옥수수 가루는
    정량의 3분의 1인 애들 손으로 한 움큼 정도밖에 안 된다.
    그 1학년을 맡은 송 ㅇㅇ 아줌마 선생이 눈치를 준다
    나가라는 눈치..

    "소사!"
    죽을 떠주는 소사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배고파 더 먹으려고 서 있는 거지 새끼 아이들.."
    그 앞에서 말한다.
    "한번 주고 더 주지 말란 말이야."
    "맨날 얻어먹으러 오는 거야 저 ㅇㅇ 들은."


    그 때 여선생의 치켜 뜬 눈초리
    그 눈초리가 나는 40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양실조에 걸린 저 거지 새끼들에게는 무상으로 주는 꿀꿀이죽조차도
    더 주지 말라는 매서운 눈초리......


    30 년이 지난 나중에야 알았다.
    여자 동창으로부터.. "넌 그것도 몰랐니.?
    그 때 나온 옥수수가루, 탈지분유를 그 여선생이 횡령하여 팔았다는 사실을,
    자기가 아는 친척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것을 횡령하기 위해서 정량도 못 먹게 하였던 것이다
    '벼룩이 간을 떼어먹지 ..'


    그 때 이후 나는 다짐했다.
    나는 나중에 커서 가난한 자들 것을 절대 떼어먹지 말기로 하자.
    그러면 죄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선생님은 초교 4,5,6학년 담임이셨던 최광훈선생님이 나를 부르신다.
    못사는 학생 중에도 특히 다 떨어진 옷을 입은 나를 부르신다.
    아이들 다간 다음에 조용히 학교에 남으라고 하신다.


    둘이 앉아 있다.
    이 선생님 자기 웃옷을 벗는다,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신다.
    "이 상처가 무엇인줄 아는가?
    내가 돈이 없어 학교 다닐 때 일하다 다친 상처다.
    너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잘살 수 있다.
    근검 절약하면 잘 산다.
    너도 희망이 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나에게 옷 한 벌을 주신다
    이거 입으라고, 내가 얻어 온 것이라고,
    선생님 월급으로 샀으면서도 얻어 온 것이라고 스스로 낮추는 그 모습.


    그 때 나는 월남으로 가는 부대 앞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하며 노래를 부르는 부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주워 팔아서 그 때 돈 10원씩을 매일 저금했다.
    먹고 싶은 엿도 못 사먹고 아까워서 몽땅 저금했다.


    그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일부러 나에게 칭찬을 하신다.
    "저 학생 같이 열심히 일하고 저금하는 것을 본 받아라"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 격려의 말씀이 지금도 나에게 교훈이 된다.


    그래, 나는 지금도 그 때 두 선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의 말씀과 인품이 그 학생의 앞날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
    나는 그 선생님의 교훈으로 지금 그래도 중산층으로 살며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글/유정천리




          답글.......낭만


          봄은 부끄러움
          노란 현기증 자존심이었다.

          꽁보리밥 도시락
          아지랑이 때문이다
          쓰러지던 초등 4년 11살 소녀.

          배고픈 어린 자존심
          뜯고 뜯던 노란 민들레
          민들레 꽃 눈물.

          꽁보리밥 도시락
          가방 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보채던 봄.




        나에게 있어 봄은 현기증입니다.
        가난이 부끄러움으로
        아롱아롱 피어나던
        아지랑이에 쓰러지던 어지럼증입니다.

        유난히도 가난했던
        초등교 4학년 봄 소풍.
        춘궁기와 노란 어지러움과
        허연 버짐 피던 눈만 큰 소녀를
        떠올립니다.

        팔랑 팔랑 날던 노란나비 떼는
        꼬르륵거리던 허약한 다리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던 꿈이었습니다.

        애꿎은 잡초만 손에 풀물 들도록
        뽑고 또 뽑아대던 아픈 기억의 봄.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예쁘고
        앙징맞게 피어나던
        봄 언덕은
        다시는 가볼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남쪽의 낭만입니다-























딸아이의 남자친구는 군인이 되었다.
그 남자친구가 입대한 다음날부터
우편함을 보는 딸아이의 눈길이 봉숭아 꽃봉오리처럼 상기되는가 싶더니
언제인가부터 곱게 물든 갈잎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전화를 걸거나 집에 올 때면 의례 첫 질문은
“엄마, 편지 안 왔어요?”
“응”
“한 통도?”
“응”
늘 선배다 친구다 군사우편이 넘쳐 나던 우리집 우편함이 어쩐 일인지 요 몇 일
텅 빈 채로 문을 열 때마다 내게도 시니컬한 미소를 보내오니..대답하기가 민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집 우편함엔 잡다한 우편물들과 함께 청색 소인이 너무도 분명하게 찍힌
편지 두 장이 환한 빛으로 가로누워있는 게 아닌가.
가끔씩 본 적이 있는 선배의 이름과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이 또박또박하게
적힌 편지 '군사우편'…
흠…반가워라
금새 환하게 웃음짓는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 처녀적,
그렇게도 내 마음 설레게 만들던 군사우편!
세월의 흐름은 유수와 같다던가….
너무 많이 써먹어 일상어로 퇴락해버린 그 말이 이럴 땐 또다시
가장 빛나는 언어처럼 불쑥 떠올라 제 자리를 찾는다.
군사우편을 손에 들고
나는 쉼 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거슬러오르는 듯 후훗~ 하고
묘한 웃음소리를 내어본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앞선다.
딸아이가 이 편지를 보려면 앞으로 4일은 더 기다려야 된다는 사실.
"그래 이 편지를 기숙사로 보내자."

나는 딸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편지를 받아보게 해주고 싶었다.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는 분명하게 기숙사 주소를 쓴 후,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의 빨간 문 안으로 고이 들이밀었다.
이틀 후면 딸아이의 손에 닿으리라는 계산과 함께...
"잘 가주렴 편지야.."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얘야, 편지가 지금 너를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단다"했더니
“우와~ 엄마 고마워”
“그런데 이왕이면 택배로 보내지 그랬어요? 헤헤”
“에구..못 말리겠구먼 내 딸”
“암튼 엄마, 무지 고마워요..사랑해..”

이틀 후,
그렇게도 좋아하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풀이 죽어 들려온다
“엄마..편지가 안 왔어요”
“조금 더 기다려봐. 내일쯤은 충분히 도착할 꺼야”
“응”

사흘 후,
“엄마, 정말 제대로 보낸 거 맞아요?”
“기숙사 주소를 불러보세요”

나흘 후,
“엄마 난 몰라…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울먹인다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참담함을…편지를 집에다 가만히 뒀더라면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오늘은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을...

닷새 후,
딸아이를 마주보며 뭐 먹고싶은 거 없냐고 물어본다.
“…싫어…”

엿새 후,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등기가 아닌 일반 우편물일 경우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우체국 직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을 뿐…수화기를 내려놓는 내 가슴 속으로 쓰라린 후회가 몰려왔다.

택배는 아니더라도 등기우편이라도 이용할 것을…
급한 마음에 동네 우편함으로 달려갔으니 이럴 어쩐단말인가...

딸아이의 손전화기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본다
“딸의 마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한 엄마야,,”
띠디딕~ 하고 금새 답이 온다.
“아냐 엄마..골 내서 미안해 기다려볼께”

이레와
또 여드레 날이,
먼 바다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달팽이의 걸음처럼
아주 길고 느리게 우리의 곁을 지나갔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지 9일째가 된 어제,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편지가 왔어요”
예전의 그 밝은 목소리가 아닌 왠지 조금 갈라지게 들리는 딸의 음성..

“정말이야? 정말 다행이네..그래 뭐라고 했던?”
“응..그냥 시시해..ㅍㅍ”
“그래? 시간이 없었을 거야 너무 실망하지 말렴”
“엄마한테 짜증낸 게 미안해서 그러지…”
"엄만 괜찮아"

하하하 호호호 까르르 깔깔
수화기를 타고 울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9일간이라는 참으로 긴 날 동안 우리 모녀가 함께 겪어야했던 고통도 끝이 나고 있었다.

여자의 삶..
아니 나의 세월들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남편에게,
두 아이들에게,
나를 묻어버린 지난 세월들...그러나 그게 절대 쓸쓸함 만은 아닐 것이다.

딸아이의 군사우편을 통해
지난날을 잠시 반추해보며 눈가에 잡힌 주름살들을 정겹게 세어본다.


(2002.11.8. 작가--솔향)































그림/이수동


한 때의 젊은 날을 같이 보냈던 친우,
이윤' 仁兄에게 보내는 부치지 못한 편지.



윤 仁兄!
仁兄과 소식이 끊긴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사회의 소금 같은 존재로 살고있을 仁兄에게,
이미 10년 전쯤에 보냈어야할 편지를
이제서나마 이런 공간을 빌려 보냅니다.


1973년 봄이었으니, 꼭 30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화창한 3월의 봄날.
그 해의 봄도 여느 해처럼 어김없이 화창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던 어느 날의 얘기입니다.
仁兄이 알다시피,
그 해는 내가 아버지를 영영 잃었던 해이기도 하지요.
(그 땔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인형이 알다시피,
내게는 오누이처럼 지내던 S가 있었지요.
그 아이는 우리들보다는 한 살 아래.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이었건만,
양쪽 집안에서 자유스런 왕래를 별로 간섭하지 않는 사이였지요.
그 집은 딸 부잣집(8녀), 우리집은 딸이 생산이 잘 안 되는 집이었습니다.
(아버지 형제들이 얻은 자식들 총14명, 그 중에 딸은 단1명)


S의 식구들은 이상하리 만치 내게는 무조건 친절했고...
우리 부모들을 그 아이를 친딸같이 대했습니다.
이것저것을 사주시며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정말 한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요.
그 아이와 나와의 이러한 관계는 仁兄을 포함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세상을 하직하며 내게 여러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종가의 장손으로서의 기본책무, 어머니를 위로하라 등등.
거기에 덧붙여, 장성하면 "S를 너의 짝으로 맞아라." 하는 말로 유언을 마치셨습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줄곧 상복을 입었던 걸 기억하고 있나요?


워낙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오던 나'는
그때까지 아직 그 누구에게서도 "異性"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던,
아니 표현하지 못하고 지내던 시절이었지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후의 어느 봄날에,
그 아이와 나는 집에서 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동산으로 봄소풍을 갔습니다..
봄나물을 뜯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


한참을 이곳저곳 헤매다 둘은 양지바른 곳에 앉았습니다.
"오빠! 아버지 말대로 할거야?"
"뭘?"
"나 말이야, 나중에 오빠와 살게 되냐구?"
"글쎄에....., 어쩌면...., 그렇지만 난 우선 군대부터 가야 돼"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오빠! 나 오늘 좀 슬픈데, 나 좀 안아주면 안되나?"
"......."
난 그날 처음으로 그 아이를 이성으로 안아봤습니다.


仁兄이 기억하는 대로 그 애와 나는 많은 우여곡절 속에
결국은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지요.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던 날.
"신랑입장!" 하는 소리를 들으며 식장 입구에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오빠! 나 왔어."
갑자기 피가 역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아! 주간지에 내 이름이 나겠구나.'하는 생각도 스치고......
발걸음이 앞으로 나가질 않더군요.


"걱정 마, 그냥 보낼 수 없어, 축하하러 온 거야."
이 말을 끝으로 그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열 일곱에 만난 그 아이를 스무 일곱에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 후에 나는 정말로 한 곳에 붙어있질 않고
아내도 자식도 아버지가 당부하던 장손의 길도 버린 채
이 나라를 떠나 수많은 곳을 헤매며 살아왔지요.


10년 전 귀국해서 仁兄의 집에서 仁兄과 소주를 한잔 기울이던 날이었습니다.
仁兄의 어머님이 내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지요.
"애, ㅅㄱ야! S가 시집을 안 가고 사는 건 너 때문이다."
넌 그 애를 그렇게 버릴 수가 있었더냐?
그 애가 가엾지도 않더냐?
그 애의 불행한 모습을 보고,
우리 윤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속상해 했는지 알기나 하냐?
그 앨 버린 네가 잘 살 수 있었을까?
버릴 거라면 더 일찍 버리든지!"


S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난 그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후의 S에 관하여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仁兄이 그 애 때문에 오랜 기간을 고심했다는 사실입니다.


며칠 전 大阪을 거쳐 京都 그리고 岡山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되돌아오는 신간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술을 한 잔 했습니다.
왠지 예전의 그 삼십 년 전의 날들을 생각하며,
혼자 슬픔에 잠겨 맥주 캔을 여러 개 비웠습니다.
열차는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지요.
나도 그렇게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시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숙소에 도착해서도 내내 잠을 설치다 귀국했습니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게 있습니다.
그 아이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다는 것과
仁兄이 그 아이를 맘속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모든 게 내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맘속에 무언가가 남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십여 년 전에 마음속에 써두었던 편지를
오늘 이렇게 밖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예전의 자기중심적이었던 나를 부디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仁兄에게서 또 S에게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빼앗고 말았다는
사실을 영영 잊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윤 仁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仁兄과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주먹다짐하다 코피를 흘렸던 그 날로,
바둑 한 수 물리지 못해 막말을 뱉어내던 그 날로,
등산 갔다 호우를 만나 이틀 밤낮을 산 속에 갇혀있던 그 날로,
그 때의 그 날로 진정 우린 되돌아갈 수 없는 걸까요?


제발 어디선가 仁兄이 이 편질 꼭 읽어주길 바랍니다.
仁兄의 건투를 마음속으로나마 빌어봅니다.


2003년의 어느 봄날에, 예전의 仁兄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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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다지




오솔길



 
시/채홍조



무수한 낯선 언어들
켜켜이 누워있는 산 길
저마다 은밀한 사연 품고
일제히 숨죽인 고요
산새 한 마리 푸드덕 하늘을 가른다 .


찬바람에 나신 되어 흔들리는
잠들 수 없었던 인고의 꿈
앙상한 어깨 포개고
새까만 잔가지로
황량한 잿빛 하늘 쓱쓱 쓸고 있다.


조각조각 흩어져
떨어지던 붉은 열망
발등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차가운 집념
발아래 묻어둔 연두 빛 소망.


어느 님이 떨구고 간
외로운 눈물 한줌
이끼 낀 바위틈에 촉촉이 묻어나고
연인들이 흘리고 간
다정한 이야기 꽃
푸새 위에 손잡고 하얗게 웃고 있다.


이제 다시 내일을 노래할 때
발아래 꿈꾸던 상념을 깨워
설레는 아침 사랑을 얘기하자.
아지랑이 조울 거리고
양지바른 언덕 밑에
노란 꽃다지가 방싯 웃지 않느냐.






사진/변승완


















◎ 이름:홀詩/이요조

님의 향기.......꼬리글과




      原題/님의 향기
       



      홀로쓰는




      한 사람을 소유한다는데
      깊이 생각 해 보았는가

      그것은 온전한 독점이 아닌
      공유(共有)라 불러야 한다

      한 사람에게
      그대의 전부를 줄 수 없듯,

      그러나 가랑비에 젖어
      늙소걸음으로 흔들거리는 이 어둠

      선 잠결에 붙잡은 허공가득
      그대의 체취가 찬란히 부서지고 있다

      아.........
      나는 지금 그대에게 오장육부를 내어주고 있구나






          副題/Re:그 사랑




          이요조

          그러는 그댄,
          곧 바스라질 것 같은 달팽이 등의
          얇은 껍질을 보았는가?

          그보다 박사(薄紗)얇은
          어미 고동의 껍질 이야기를 들었는가?
          모든 것 아낌없이 다 내어준 채

          잔잔한 물결위로 티끌처럼
          둥둥~ 가비얍게 홀로 떠 가는
          눈물의 껍질을 만나 보았는가?

          생명을 불어넣은 가 없는
          어미의 사랑이 거품으로 잦아들고 말,
          물그림자의 우울을 아는가?

          마지막 생명불 끝까지 지켜주마던
          그대 생명 온전히 지킬 촛불같은
          사랑의 도, 언약도 그에 버금가니

          모진 폭풍우 지나간 뒤
          사랑과 믿음만으로 견뎌 낸 미루나무 우듬지의 까치집과
          빛 속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잎새의 갈채를 보라

          사랑한다면...
          이 모두가 사랑이라면...
          깨어질 목숨 하나 그저 내어준들..무슨 대수라고,

          황사와 바람과 눈물로 얼룩진 이 봄 날에
          레테의 강에 띄워 보내야 할... 꽃잎이어든..아~~
          끊어져버린 연(燕)실을 차마 거두지 못하고

          선 잠결에 붙잡은 허공 가득
          임의 체취가 찬란히 부서지는 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아프게, 아프게, 단장(斷腸)되는..








      *광목천에 안료화 "태양"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원제 수선화에게-정호승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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