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밤, 우리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방송을 지켜보다가 당선자 확정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무리와 낙담하는 두 무리의 상반된 표정을 동시에 보았다.
당선자 쪽의 열광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과 감동이 복받쳐 올랐고 낙선자 쪽의 침통한 표정을 보노라면, 연민이랄까, 통분의 아픔에 빠져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어느 한 쪽을 지지한다는 생각이 당초 결여되었던 탓이었을까 ?

다음날 20일 오전, 노무현 후보가 선관위에서 당선자 증서를 받을 무렵, 이회창 후보는 눈물의 정계은퇴 선언을 하였다. 고락을 함께 하던 당원들을 버려 두고 홀연히 정계를 떠나갔다. 특히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이 후보와 그 측근들이 함께 흘리는 눈물의 현장은 많은 국민들도 애석한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인생은 부단한 승부 경쟁의 연속이 아닌가. 지난 가을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가 보았던 치열한 경쟁과 무수한 승부의 희비와 함께 각종 선거전 역시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해 볼 때,너무 비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경기가 그렇듯이 많은 경쟁자들 가운데 1위 승자는 언제나 하나 뿐이다. 내가 이기면 다른 상대가 눈물의 고배를 마셔야 하고, 다른 경쟁자가 이기면, 내가 패배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승부 세계의 이 냉엄한 현실을 예상하지 않고야 어찌 싸움터에 출전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공적 선거- 특히 대선은 개인의 승부욕을 충족하는 경쟁이기 이전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봉사할 지도자를 선정하는 순수 공익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사람이 낙선했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결행하는 모습은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들에게 너무나 실망스럽게 비쳐진다. 이겼다고 열광하는 승자 보다는 실패에 의연할 수 있는 패자가 더욱 훌륭하다.

물론, 정치인이라 해서 인간의 희로애락 본능조차 절대 억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선 후보자라면 낙선 결과도 예상할 줄 알아야 하고, 또 낙선 결과에 불구하고 정치적 투지를 견지하며 의연히 대처하는 자세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후보는 과거 8년의 정당생활에서 당을 이끌어왔던 지도자가 아닌가. 진정 용기있는 지도자라면 먼저 선거 패배 후 당원들을 위로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 정치 지도자에게는 항시 개인의 기분에 앞서 공적 책무를 앞세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많은 승객을 싣고 달리던 기관사는 갑자기 기관차에서 내릴 자유가 없는 것이다. 원내 과반을 훨씬 넘는 거대 정당의 전국 당원과 한 번의 협의도 없이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은 정치를 너무나 이기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말이 될까 ?. 그의 정치적 소양이 의심스럽다. 정치가 어디 개인의 소유물인가 ?

김대중 대통령도 한 때 대선에서 낙선한 뒤에 전격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부랴부랴 영국으로 출국하여 은둔한 적이 있었다. 이번 이회창 후보의 경우도 마치 이런 무책임하고 옹졸한 선례를 뒤따르듯 결행되었다는 점에서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이 승부는 무상한 것이다. 실패를 모르고 승리만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정치가가 아니다. 무덤에 들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을 승리했다거나 패배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거 없는 것이다. 오늘은 이겼다가 다음엔 패배하기도 하고, 오늘은 졌다가도 다음엔 승리하는 일이 허다하다.

설령, 내가 영원히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좌절당하지 않는 지도자야말로 훌륭한 정치가이다.
변화부쌍한 권력의 세계에 뛰어들어 결전에 임한 장수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용기와 각오가 있어야한다. 당장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기억에 남는 그런 지도자를 우리는 바라고 싶다. *






2002년의 12월도 끝나간다.
세월 가는거....
나이 먹는거.... 정말루 나는 싫다.

나이 먹으면 아는것두 많구 이해심도 많아지구??얼씨구~
싫타!!그래두 난 나이 먹는거 싫타구!!
온갖 선인들의 좋은 말씸 다 들먹여두 나는 싫타구여!!!엉엉엉엉~

시냇물 같은 쪼잔한 가슴팍이 파란 동해안이 된다해도.....
너그러움이 차고,넘쳐 부처님을 닮는대두.....
또 한해가 저무는 이맘때면 우울하다,슬프다,억울하다,괴롭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뭘 했다구 일년이 휙~~ 가버리구...
아니 도대체 내가 얼마나 살았다구 벌써 40+7 이나 되는지......
귀가,코가,눈앞이~ 다 막히는구만.......

나처럼 싫다는 넘은 나이 안 먹으면 안되나??
얌죤히~사양 하구 싶은데 어쩌지?
밥 안 먹어도 배 부른것두 아니구......

알고싶다, 먹은 나이 어디 반납하는데 없는지?....
넙죽넙죽 해 만 바뀌면 나이 먹는거 정말 싫은데??ㅋㅋㅋㅋ

사람같잖게 산 이 아줌씨같은 사람은 나이를 한살씩
깎아야 되는거 아닌가?? ㅋㅋㅋㅋ
벼룩도 낯짝이 있지~
철이 안 들어 깝죽대는 나 같은 뇨자의 나이는 뺏아 가야 된다구~
어떻게 공평하게 똑같이 나눠 주시는지? 나원 참~

대신,착하고 이뿌게 산 사람들은 두어살씩 듬뿍듬뿍 주고 말이다.
그래야 빨리빨리 그 좋아들 하는 노인공경!"어른"이 될 테닌까~~~~히

아아아아~~~~~~악~
12월도 13일 남았다!

40중반에 접어드니 사람꼴이 아니,여자꼴이 영 말씀이 아니건만......
40대 초반엔 쉰살이란게 아득한 달나라 같더구만.....
나이가 쉰이 다 됐다구??
어쩌면 좋다냐......ㅋㅋㅋㅋㅋ
50이 머언~별나라가 아니구 바로 코 앞이라니??......

그래,그랬지......
어릴땐 난 "나이 많은 여자"가 되질 않을꺼다!
짧고,굵게 살다가 서른이 되면 죽으리라.......
멋지구,아름답구,짧게,치열하게 살다 서른이면 죽으리......

그래,그러구선 이 나이까지 왔지 않은가?ㅋㅋㅋㅋ
쫌 더 나이 먹어 볼까나??
골고루 사이좋게 나눠 먹는데 억울할거야 없지 않은가??

12월도 끝나 간다.......
이렇게 철이 부족해 빈혈에 시달려 헛소리만 해 대는데도
한 살 더 먹어야 하는 시간은,세월은 가는것을........
,,
,,
,,
이마에 열이 제법이네?
쉰소리,미친소리 그만하구~
약 한알 먹구~~ 나가는 정신을 챙기자,그려!!!!!~~~~~~~~


(2002.12.19. 화성여자님이 지은 글)


제16대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흔히들 축하한다고 말 하지만, 결코 축하할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땀과 고초를 떠 넘겨받아야 하는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다 나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 어찌 대통령 당선을 영광으로만 여기고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안일하게 임기만 무난하게 채우고 떠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무언가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병폐를 무리없이 개혁해 나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째, 정치인의 귀족화 내지 귀족정치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한다면서 근래 우리정치는 개인 영달의 도구로 변질되어왔습니다. 국회의원이나 하다못해 지방의회까지도 사회적 출세 영달의 길로 변질되면서 봉사하는 민주정치가 아닌,신관료주의로 정착한 느낌입니다.
모든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진정한 희생 봉사자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청치가 치부의 수단으로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일체 선거의 공영제를 실시하여 선거비용을 줄이고, 청치자금 모집이나 재벌 헌금도 근절하지 않으면 정경유착이나 부패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틀을 깨야 합니다.

셋째, 청치인의 청렴성을 뿌리내려야 합니다. 재물 욕심 나는 사람은 사업을 하고 정계로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처럼 정치인이 수십억 정치자금을 떡고물 처럼 주무르는 세상엔 결코 부패 권력은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 성장도 중요하지만 다수 대중의 생활향상을 위한 분배정책에 더 큰 관심을 기우려 주기 바랍니다. 국민은 어제의 마음이 어쨌던 지금 부터 한마음으로 새 대통령을 충심으로 성원하여 21세기 우리의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다져 나갑시다.*


인식(認識)의 한계(限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몇 퍼센트나 진실이며 얼마나 정확할까? 나의 인생관, 가치관, 국가관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내가 신봉하는 종교의 경전과 교리와 교주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대포장은 없는 것일까? 내가 믿는 이념에 과연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허상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지성인이라면 자기 종교, 자기 민족과 국가, 자기 이념이 과연 올바르고 정확한 것인지 한번 쯤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의 한계
민족과 국가의 한계
종교의 한계
이념의 한계를 벗어나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에 보고 듣고 배운 것 외에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대하여 배타적인 인식의 한계에 둘러싸인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청년이 있어 제아무리 자본주의를 선호한다할지라도 만일 저가 북한에 태어 났더라면 소리 높여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고향마을은 매우 시골이었는데도 어린 코흘리개 시절에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그 마을뿐으로 이 세상의 중심지 정도나 되는 줄로 알았었다. 그런데 여덟 살 때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논산 읍내를 가보니 거기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건물과 사람들이 많은 거리가 있고 자동차가 있고 기차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놈의 화장실 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동안 갇혀있다 엉엉 울기도 했지만 아무튼 논산의 모습은 내게는 그때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나의 인식의 한계가 확장되기 시작한 셈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런저런 갈등이 많았는데 20 세기의 석학이라는 토인비는 과연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 보기로 큰 마음을 먹고는 서점에 가서 그가 지은 세계사(부제-인류와 어머니 되는 지구)를 구입하여 그 두툼한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린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로 내용은 거의 모두 잊어 버렸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나의 종교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구절이 하나가 있다.

기독교는 모든 일을 성경을 통하여 해석하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성경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토인비의 견해였다. 아 ! 토인비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그 후 나의 인식은 교회의 담을 넘어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마음은 갖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력서를 쓸 때면 취미와 특기란 에서 한참동안 펜을 움직이지 못하는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면서도 마음속은 온갖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항상 복잡하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병이 날 수 밖에 더 있으랴 ! 몇 년 전부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더니 급기야는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투병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인식의 일대 전환을 시도하여 즐겁게 생활해 보리라고 혼자서 단단히 다짐을 했다. 헬스도하고, 등산도 하고, 카페에 가서 맥주도 마셔보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근무도 더 열심히 했다. 가정생활도 더 충실히 하며 어휴 ! 바쁘게 되었다. 그동안 철옹성같이 사수해오던 원리원칙 주의의 인생관, 가치관을 좀 수정하여 사물을 자유롭게 인식하자는 것이 요즘 나의 주장이다.

우리는 과거의 일제침략과 6.25 전쟁시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면서도 월남파병시의 우리의 과오에 대한 반성은 거의 없음을 본다. 물론, 이 말은 국가의 부름에 따라 만리타국의 전선에서 순직한 영령들의 희생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월남전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하려는 월남민족의 독립전쟁으로서 프랑스와 바톤터치를 한 미국이 개입했다가 결국은 패전한 무모한 전쟁에 우리도 말려들게 된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의 한계를 초월하여 생각해볼 때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월남민족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요즘 붐을 이루고 있는 한류(韓流)문화를 들고 떳떳하게 월남으로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가끔 언론을 통하여 북한의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남한에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사회체제는 붕괴되고 식량과 물자의 부족으로 2000만 동포들을 생지옥으로 몰아 넣고 있는 북한의 지도자들을 보며 공산주의에 의식화되고 인식의 한계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배운다. 오래전에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 킬링필드의 장면 중에서 총칼을 든 나이 어린 아이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릴 적에 미국의 서부개척 영화를 보면서 징그럽게 생긴 인디언들이야말로 악마의 화신쯤으로 알았었다. 그런데 지금 한번 생각해 보자.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아무런 죄도 없는 인디언들이 소위 개척자, 민주주의의 선봉, 정의와 인권의 주창자이며 사랑의 기독교를 주로 믿는 미국인들에 의거 참혹하게 멸족을 당한 역사의 가슴 아픈 뒤안길을! 어려서 듣고 배운 미국에 대한 무조건 좋은 나라로서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 났기에 이런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도 무소불위 최강의 미국이 테러조직의 소탕을 위하여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아프카니스탄에 항공모함과 폭격기에 정의의 폭탄을 가득 싣고가서 쏟아 붓고 있지만, 생각해보라 과연 무엇이 정의인가를 ! 2000년 동안 아니 창세 이래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고 난민이 되어 떠돌아야 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억울함을 풀어 줄 정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힘이 없으면 흑인노예처럼, 인디언처럼, 태즈메이니아인처럼, 팔레스타인처럼, 일제 하의 한민족처럼, 나치하의 유대인처럼, 영국 지배하의 인도인처럼 살아야 한다면 과연 정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

중동 이슬람 문명권의 지도자들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다운 지성인들이라면 21세기 초두의 인류를 테러의 공포와 전쟁의 함정으로 몰고 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아랍민족을 적으로 보는 인식에서 일대 전환을 하여 팔레스타인의 한을 풀어주는데 서방국가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을 하는 저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고서는 중동의 문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소리 없이 억누르고 있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물을 인식을 할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민족, 종교, 이념 간에 상호갈등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핑계 삼아 불가사의로 묻어 두려는 것들이 있다. 고대문명의 흔적들과 UFO 에 관한 정보들이 바로 그렇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대 문명과 UFO 의 실체를 믿는다. 지구상에서 고대에 현 인류 이외의 문명이 존재했었고 지금도 인류 외에 어느 행성에 다른 고도의 문명체가 있어 인류와 교류를 한다고 생각 해보자. 지금까지의 인생관, 가치관, 종교관, 내세관 ~~~ 그야말로 우리의 인식체계가 완전히 뒤바뀌어야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혹시 특정한 정보기관들이 이런 저런 사유로 UFO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가 우주 끝까지 확장되기를 기다리면서......,

잠실 베레모


고구마

어제는 고구마를 캤다. 해마다 회당터 밭에 고구마를 심는다. 땅이 사토라서 물이 잘 빠지고 가파른 뒷산에서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와 거름이 되어주므로 별도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해마다 곡식들이 잘 자라는 좋은 밭이다. 그리고 고구마는 연작을 해도 잘 자라주며 병충해가 없어 농약을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자연 식품이다.

고구마를 계속 심는 까닭은 순전히 어머니의 고집 때문이다. 고구마는 봄에 심어 두고 수확 때까지 내버려 두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수확량이 다른 작물보다 상당히 많은 것이 어머니가 고구마를 고집하는 까닭이다.
즉,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기에 다른 작물보다 후해 보이기 때문이리라. 참깨 같은 작물들은 선심을 써도 양이 적어 주는 입장에서는 면이 서지 않지만, 고구마는 몇 개 담지 않아도 한 자루가 되니 얻어 가는 사람은 먼저 그 부피에 우선 기뻐한다.
고구마를 나누어주고 나면 어머니의 살림 장에는 선물이 가득하므로 어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가득하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기분이 좋다. 물론 내가 반 강제로 선물을 지정 해 주지만.

올해는 고구마가 예년에 비해 두 배정도 크게 자랐다. 이렇게 씨알이 좋은 해는 드물다. 굵은 놈은 어린애 머리만 하다. 4 등분하여 삶아 한 쪽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사람이 심었지만, 고구마는 자연의 섭리에 충실하게 따르며 자라난다. 어떤 해에는 씨알이 쥐 불알 만하여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어떤 해에는 평년작으로 자라나고, 올해에는 엄청 크게 자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갓 식물이지만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의 이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고구마가 같은 땅에서 이처럼 크기가 해마다 다른 이유가 참 재미있다.
봄에 고구마 싹을 잘라 꽂아두면 뿌리가 내린다. 뿌리가 내릴 때에 물을 잘 주거나 비가 많이 오면 활착이 잘 되어 뿌리의 활력이 넘치게 된다. 그런 후에 날이 가물면 이 싱싱한 뿌리는 땅 속의 습기를 찾아 넓고 깊게 퍼져나간다. 즉 습기가 없어 목마름을 느낀 고구마는 살기 위해 뿌리를 있는 힘을 다해 땅 속을 파고든다. 살기 위한 에고이즘을 이 녀석들은 알고 있다.
이때 뿌리가 느끼는 것은 극심한 목마름이며, 배고픔이리라. 얼마나 주렸으면 깊은 땅 속으로 마구 기어들어 가겠는가. 이렇게 가뭄에 시달리며 습기를 찾아 뿌리가 무성해 진 후, 단비가 내리면 고구마는 '목마름과 주린 시절'을 잊을 수 없어 있는 힘을 다해 영양분을 축적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행한다. 힘차게 땅을 파고든 그 무성한 뿌리로 갈증과 주림의 기억을 되살려 영양분과 수분을 최대한 저장한다. 그 결과가 어린애 머리통 만한 고구마를 땅 속에 달고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한다.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던 인간이 갑자기 먹고 마실 것이 생기면, 곡간이 터지도록 많이많이 저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배움에 굶주린 사람이 책을 대하면 마구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반대로 뿌리내릴 그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뿌리는 약하다. 겨우 한 치 정도를 파고들어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후에 비가 많이 와도 뿌리가 약해서 영양분을 많이 빨아들일 힘이 작다.
그래도 약한 뿌리로 어느 정도 씨알은 만든다. 이것은 평년작이며 보통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사람도 어느 정도 기력이 있어야 먹을 것을 주어도 회복이 빠르다. 어릴 때 잘 먹지 못해 키가 작고 체력이 약한 사람에게 청년기에 갑자기 보약과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준다고 해서 키가 훨씬 커지고 힘이 세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부작용으로 고생을 할 뿐이다.

심고 나서부터 줄곧 비가 많이 오면 어떻게 될까.
고구마를 심고 나서 계속 비가 잦으면 그 해는 고구마 농사는 망쳤다고 봐야한다. 처음부터 고구마는 고생을 모른다. 뿌리가 조금만 생겨도 빨아들일 수분이 많으므로 작은 뿌리로 만족하며 그 크기에서 성장을 멈춘다. 늘 수분이 곁에 있으므로 목마름과 배고픔을 모르는 고구마 녀석은 도대체 저장할 줄을 모른다. 하늘만 믿고 언제까지나 마실 것을 내려 주리라 생각하고, 마냥 게으름 피우며 지내다가, 그저 심은 사람의 노고를 생각한답시고 숟가락 만한 알맹이를 달랑달랑 달고 있을 뿐이다. 이런 해는 작황이 최악이며, 어머니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돈 많은 집에서 호의호식만 하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늘 배가 부르므로 힘써 일할 필요가 없다. 마음 속에 용렬한 자만심과 허영으로 가득 채운 채, 돈만이 말을 하는 부평 같은 세상을 살아 갈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먼 장래를 바라보면, 비 많이 맞은 고구마와 같지 않겠는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이 마지막에 거둘 수 있는 것은 비 많은 해의 고구마와 같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자이면서도 자식 교육을 잘 시켜 이 사회를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은 대개 훌륭하며 그런 사람은 대를 이어 부를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주림의 고통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가뭄에 시달린 고구마 처럼.

우리는 어릴 때, 심한 고난을 격은 사람이 장성하여 큰 일을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어릴 때 부모의 덕으로 고생을 모르고 호의호식하며 자라나서, 교육을 등한시하여 머리가 텅 빈 채,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일찍이 소진시키고,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배회의 인생을 살다가, 말년에는 남에게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도 많이 보아왔다.

한 식물의 종일 뿐인 고구마의 삶이 우리 인생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천채물리학자인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참나무와 우리 인간은 먼 친척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마와 인간도 먼먼 친척임에 틀림없다. 자연계에서 이웃하여 함께 살아온 모든 생물들은 이토록 자연의 섭리에 스스로 순응하고 감응해 오는 동안, 진화의 과정에서 갈래갈래 갈라져 서로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그 본성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두고 성현들은 '진리는 모든 것에 통한다'라고 했음이리라.

도연명의 시
'해와 달은 조롱 속의 새요, 우주 만물은 물위에 뜬 풀잎이라'라는 시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올해는 봄 가뭄이 심하다가 적시에 비가 많이 내렸다. 우리 고구마가 역경을 딛고 크게 성장한 것이 나에게는 무언의 교훈을 주는 것 같아, 한 입 베어먹고 가만히 내려다보니 못 생긴 것이 오늘은 나의 참 스승처럼 느껴진다.

내일이 주말이라서 고구마 가지러 몰려 올테니, 그만 먹고 배급 보따리나 싸 둬야겠다.













    겨울연가(1)


    무게만큼 가벼운 웃음을 싣고
    내리는 너의 얼굴들이
    젖은 발아래 숨는다.

    하얀 색으로 유혹하는가
    밤이 두려워 순백의
    옷을 입혀 보내는 하늘나라.

    낮은 데로 향하는 입맞춤의
    향연에 취하는 산과들이
    백색노을에 젖는다.

    연인들이 찾아오고
    직립으로 사라지는 맑고 고운
    반짝임이 거부할 수 없이
    어머니의 황토밭에 안긴다.

    파란생명은 하얀 옷으로
    붉은 나무는 더욱 붉은 색으로
    덮어주기를 희망하는 강산,

    모든 만상이 저토록
    엶은 미소로 사랑하자고
    찾아온다면................


    2002.11.17.

    글/박종영
    music/눈이내리네/guitar solo/













소공동의 겨울


롯데의 치졸한 폭포가
산사 절집과
협곡의 물노래를 그립게 하는 밤


인종끼리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이 로비의 귀퉁이에서


나는 홀로
그대 마음에 얼어붙은
고드름을 녹이는 연습을 하고 있네


사랑하는 일.....
그 찬란한 아픔을 삭여
지리산에 묻고 왔건만


그대 만나기전
소공동의 낯선 이 돌집에서
나는 이미 오열하고 있네











가벼운 존재








    2000.11.13 밤에 대전 누이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시골 노모가 개한테 물려 병원을 다녀오셨다는 데 그후 전화를 영 안
    받는다는 전갈이었다. 깜짝 놀라 내가 시골에 전화를 걸어도 수신되지
    않았다.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은 방정맞은 생각조차 들었다.
    몇 차례의 시도는 실패. 한 삼십 분쯤 기다리니 오히려 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11.13일) 아침 여덟 시경에 이웃집 개가 또 왔기에 개를
    붙잡아서 주인에게 '제발 개 좀 묶어 두라'고 하면서 건네다 줄
    요량이었단다. 작은 개도 늙은 노파를 얏 보았는지 손가락과
    손바닥을 세차게 물었다는 것이며, 노파 역시 '너한테 질소냐'하면서
    한번 움켜진 개를 악착같이 붙잡아 자루에 넣었단다.
    이 과정에서 물렸다는 것이다.


    무모한 행동. 피를 흘리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병원에 급히
    가야 한다기에,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체질이라 버스를 타지 아니하고,
    십리 길을 걸어서 읍내에 나가 치료를 받았단다. 열 한시간이 지난
    일곱 시경의 밤인데도 노모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 당혹감과 낭패감 그리고 분노에 떤 목소리였다.
    흥분한 노모의 목소리를 가라 앉혀야 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에 개를 묶어 두지 아니하고 놓아먹이는 개가 너무 많다며 바로
    이웃집인 뽀족집의 황씨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단다.
    그게 마음이 걸려 하나뿐인 우리집 개를 묶어 집안에 가두었다는 소식
    일전에 들었다. 문제는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개를
    열댓 마리나 키우는데 본집에서는 여덟 마리의 개중 큰 개 한 마리만
    묶어 두고 나머지는 놓아먹이며, 사랑채에 사는 사람 네는 여섯 마리를
    키우는데 다섯 마리를 놓아먹이는 바람에 이들이 온통 동네를 싸질러
    다니며 말썽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 집과 우리집의 거리는 불과 일 백 발자국.


    이웃집의 개들이 우리집 울안 뒤꼍까지 들어 와 糞尿를 퍼 지르는 바람에
    汚物로 집 안팎이 지저분하여 성가시다고 누차 말씀을 하셨다.
    심지어 한산 세모시의 재료인 모시를 햇볕에 바래는데 이 위에 똥을 싸고
    뭉갰단다. 또 노모는 한 마리뿐인 이쁜이 개밥을 끓이기에도 힘이 벅찬데도
    불구하고, 우리집 개는 입이 고급이라 먹이를 잘 먹지 않고, 대신 이웃집
    개들이 항상 울안으로 몰래 들어와 개밥을 훔쳐먹는 것을 못마땅했단다.
    더욱이 개 때문에 피해가 있다며 항의하는 이웃집 뽀족집(지붕이 뾰족함)
    으로부터 애매한 소리를 두어 차례 들었다는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던
    차였단다. 그래서 우선 먼저 우리집 개를 묶어 두었으며, 그 후에 개구멍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뻔질나게 울안에 파고 들어오는 얄미운 개를
    붙잡겠다는 옹심으로 그 기회를 노리고 계셨단다.


    결국 붙잡았으나, 남의 집 개한테 물린 분함과 狂犬病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아들한테 꾸중을 들을 일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 이였다. 다행히도
    의사가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며 노모를 위로한 모양이고 또 이틀 후에
    병원에 다시 한 번 오라고 했단다.



    포획하여 포대 자루에 가둔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마을會館의 마이크로
    방송하였어도 개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단다. 정작 개 주인이라고 짐작되는
    아랫집의 여편네는 "자기네 개가 아니다"라고 발뺌을 하였으나 그의 姻戚은
    의뭉스럽게도 "개를 어서 풀어 주라. 그렇지 않으면 벌받는다"고 했단다.
    그러나 동네의 多數意見은 당연히 주인이 나타나야 개를 인도해 주는 것이지
    개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개를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더욱이 사람을 물은 개는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이웃집의 한 노파는
    그런 벌이라면 당신이 대신 받겠다며 노모를 감쌌다 한다.


    불과 일 백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야랫집(아랫집의 사투리)의
    개라고 여겨지는데도 병원비를 부담할까 싶어서 '자기네 개가 아니다'라고
    짐짓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노모는 개 주인이 개한테 사람을 물으라고
    시킨바 가 아니므로 개 물림에 대해서는 당신의 불찰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다.


    문제는 개 임자가 묶어 두지 아니하고 많은 개를 놓아먹인 것
    (그것도 일곱 마리)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 어떻게 많은 개를 단속할
    것인지를 약속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제 어머니의 또래에 달한
    이웃집 노파에게 악살을 부린 이웃 아낙에 대한 응징이 될 모양이다.
    제 시어머니도 때려 주었다는 고약한 여편네에 대한 미움이 숨겨져 있었다.


    아내는 화요일에 급히 시골로 내려갔다. 서울 사는 며느리가 읍내에 와
    있음을 먼저 발견한 동네 사람이 노모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려 드렸단다.
    이에 노모는 서울의 아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너희가 그렇게 걱정을 하면 自盡해서 더 못 살겠다"는 투의 가벼운 꾸지람
    속에는 은근히 며느리가 대견하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며느리가 익일 수요일 아침에 노모를 모시고 읍내의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할머니. 요것 때문에 서울시는 며느리 내려오라고 했어요?'라면서
    우스개 소리를 했단다. 면구스러워 狂犬病 때문에 걱정하였다는 노모를
    의사는 따스한 말로 부담을 덜어 주었단다. 아내는 수요일 오후 차로 귀경했다.


    문제는 포획한 개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難題다. 서울시는 아들은 단호히
    그 개를 餓死시키라고 말씀 드렸다. 평소에는 사소한 생명조차 소중히 여기는
    성미였으나 사람을 문 행위는 응징을 해야 하므로 포획한 개에게 먹을 것을
    일체 주지 말라고 일렀다. 作爲가 아닌 不作僞로도 너끈히 개를 처단하는
    방안이었다. 개가 죽거든 나무뿌리 아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死體를 묻어
    버리라고 말씀을 드린 터였다. 이는 개 주인에 대한 無言의 示威였다.


    우리집의 개 발발이(이뿐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영리하여
    평소에 주인인 노모가 먹이를 주려고 접근을 시도해도 動物의 警戒心을
    발동하여 항상 이삼 메타의 거리를 두어서 노모의 접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금번에는 노모에게 붙잡히는 수모를 당했으나 결코 주인을 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웃집 개는 이웃집 노파에게 붙잡히는 과정에서 손가락 손바닥 및
    팔뚝을 물었다는 罪名으로 조만간 생명을 빼앗기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평소에 동. 식물을 사랑하는 나도 이번 일에는 어쩔 수 없다.
    사나운 것은 淘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동정을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 없다.


    아내는 포대 자루를 들어보았더니 가벼운 무게였다며 안쓰러워 했으나 단호한
    시어머니의 결심에 감히 제 의견을 제시하지 못 하였다고 했다. 개를 가둔지
    나흘째 밤 목요일에 아내는 '가벼운 존재'인 개를 풀어 주라고 나에게 간청하였다.
    아내의 말을 좇아 노모에게 풀어 주라고 전화를 하였건만 노모의 대답은 단
    하나였다. 오히려 가슴이 멕힌다는 것이었다. 가슴 멕힌 것이 개 물림의 후유증과
    직접 연관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노모가 '아프다'는 이유라면 '가벼운 존재'는
    어쩔 수 없는 죽음뿐이다(제 어미의 말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불효이므로 노모의 말을 믿어야 하는 아들의 입장임을 해량하기 바란다).


    노쇠하여 파리해진 노모의 건강이 점점 얇아진다. 하나의 생채기가 되어 客地에서
    사는 아들의 마음을 찢는다.


    2000.11.17(금)바람의 아들 최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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