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남자친구는 군인이 되었다.
그 남자친구가 입대한 다음날부터
우편함을 보는 딸아이의 눈길이 봉숭아 꽃봉오리처럼 상기되는가 싶더니
언제인가부터 곱게 물든 갈잎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전화를 걸거나 집에 올 때면 의례 첫 질문은
“엄마, 편지 안 왔어요?”
“응”
“한 통도?”
“응”
늘 선배다 친구다 군사우편이 넘쳐 나던 우리집 우편함이 어쩐 일인지 요 몇 일
텅 빈 채로 문을 열 때마다 내게도 시니컬한 미소를 보내오니..대답하기가 민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집 우편함엔 잡다한 우편물들과 함께 청색 소인이 너무도 분명하게 찍힌
편지 두 장이 환한 빛으로 가로누워있는 게 아닌가.
가끔씩 본 적이 있는 선배의 이름과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이 또박또박하게
적힌 편지 '군사우편'…
흠…반가워라
금새 환하게 웃음짓는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 처녀적,
그렇게도 내 마음 설레게 만들던 군사우편!
세월의 흐름은 유수와 같다던가….
너무 많이 써먹어 일상어로 퇴락해버린 그 말이 이럴 땐 또다시
가장 빛나는 언어처럼 불쑥 떠올라 제 자리를 찾는다.
군사우편을 손에 들고
나는 쉼 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거슬러오르는 듯 후훗~ 하고
묘한 웃음소리를 내어본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앞선다.
딸아이가 이 편지를 보려면 앞으로 4일은 더 기다려야 된다는 사실.
"그래 이 편지를 기숙사로 보내자."
나는 딸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편지를 받아보게 해주고 싶었다.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는 분명하게 기숙사 주소를 쓴 후,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의 빨간 문 안으로 고이 들이밀었다.
이틀 후면 딸아이의 손에 닿으리라는 계산과 함께...
"잘 가주렴 편지야.."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얘야, 편지가 지금 너를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단다"했더니
“우와~ 엄마 고마워”
“그런데 이왕이면 택배로 보내지 그랬어요? 헤헤”
“에구..못 말리겠구먼 내 딸”
“암튼 엄마, 무지 고마워요..사랑해..”
이틀 후,
그렇게도 좋아하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풀이 죽어 들려온다
“엄마..편지가 안 왔어요”
“조금 더 기다려봐. 내일쯤은 충분히 도착할 꺼야”
“응”
사흘 후,
“엄마, 정말 제대로 보낸 거 맞아요?”
“기숙사 주소를 불러보세요”
나흘 후,
“엄마 난 몰라…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울먹인다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참담함을…편지를 집에다 가만히 뒀더라면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오늘은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을...
닷새 후,
딸아이를 마주보며 뭐 먹고싶은 거 없냐고 물어본다.
“…싫어…”
엿새 후,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등기가 아닌 일반 우편물일 경우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우체국 직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을 뿐…수화기를 내려놓는 내 가슴 속으로 쓰라린 후회가 몰려왔다.
택배는 아니더라도 등기우편이라도 이용할 것을…
급한 마음에 동네 우편함으로 달려갔으니 이럴 어쩐단말인가...
딸아이의 손전화기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본다
“딸의 마음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한 엄마야,,”
띠디딕~ 하고 금새 답이 온다.
“아냐 엄마..골 내서 미안해 기다려볼께”
이레와
또 여드레 날이,
먼 바다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달팽이의 걸음처럼
아주 길고 느리게 우리의 곁을 지나갔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지 9일째가 된 어제,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편지가 왔어요”
예전의 그 밝은 목소리가 아닌 왠지 조금 갈라지게 들리는 딸의 음성..
“정말이야? 정말 다행이네..그래 뭐라고 했던?”
“응..그냥 시시해..ㅍㅍ”
“그래? 시간이 없었을 거야 너무 실망하지 말렴”
“엄마한테 짜증낸 게 미안해서 그러지…”
"엄만 괜찮아"
하하하 호호호 까르르 깔깔
수화기를 타고 울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9일간이라는 참으로 긴 날 동안 우리 모녀가 함께 겪어야했던 고통도 끝이 나고 있었다.
여자의 삶..
아니 나의 세월들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남편에게,
두 아이들에게,
나를 묻어버린 지난 세월들...그러나 그게 절대 쓸쓸함 만은 아닐 것이다.
딸아이의 군사우편을 통해
지난날을 잠시 반추해보며 눈가에 잡힌 주름살들을 정겹게 세어본다.
(2002.11.8. 작가--솔향)
'공부합시다 > 퍼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댓글과 자아찾기...................... sumok (0) | 2003.03.13 |
---|---|
선생님 ! 갈 길을 묻습니다 ................유정천리 (0) | 2003.03.07 |
부치지 못한 10년전의 편지-윤 仁兄 前! ..........베리굿맨 (0) | 2003.03.04 |
오솔길..............................채홍조 (0) | 2003.03.04 |
님의 향기 & 그사랑.....................홀로쓰는詩/이요조 (0) | 2003.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