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남녘..

          마냥,
          기달릴 수만은 없어
          쉬엄쉬엄 봄을 찾아 나선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를 넘어 가는 길
          남해에서 동해로 휘어지는
          해안길이다.

          휘황한 카페의 불빛이 떠있는 해변
          파도에 젖은
          푸른 달을 띄워올리는 포구..

          멸치배가 새벽을 깨우는 어촌들이
          바다를 향해 엎드리고 있다.

          그 바다에는
          음력 중순으로 가는 깊은 밤
          밤바다를 밝히는 꽉찬 달도 만날 수 있다.

          바다에 해가 뜨면
          앞바다에서는 싱싱한 봄멸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질이 한창이다.

          달맞이고개..

          언덕 위의 해월정은 달을 보기 좋은 곳
          바닷물에 얼굴을 씻고
          물을 뚝뚝 흘리며 솟구치는
          월출이 장관이다.

          바다에서 순식간에
          떠오르기 때문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월출 순간을 놓치고 만다.

          달맞이길은
          열다섯번을 굽어진다고 해서
          15곡도(曲道)로도 불린다.

          아래쪽은 청사포
          예전에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포구였지만
          지금은 그 운치가 사라졌다.

          송정해수욕장..

          백합 껍떼기가 많이 섞인 백사장
          모래가 유난히 희고 반짝거린다.

          앞바다에 떠있는 죽도가 파도를 막아주어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송정역은
          동해남부선 철도가 해운대에서
          달맞이 벼랑길을 넘어 쉬고 가던 정거장

          정동진 못지않은
          아름다운 '바다역'이다.

          동암리 해안은 바위절벽이다.
          오랑대는 동해남부 지역에서 첫손 꼽히는 명승지
          유배 시절의 고산 윤선도가 자주 찾았던 곳이다.

          대변항구,
          멸치잡이 항구로 유명한 큰 어항..

          부산에서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들어오는 고깃배의 정겨운 풍광은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밤이면 수십척의 고깃배들이
          기장 해안에 불을 밝혀 불야성을 이룬다.

          포구에서 그물을 끌어내려
          멸치를 털어내는 모습은 가히,
          삶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그물에서 툭툭 떨어져 퍼득거리는 멸치떼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멸치에 눈이 부실 정도다.

          어부들은 멸치를 털어내며
          노래를 부른다.

          "어여차,어여차~"

          흥겨운 가락에 맞춰 그물을 쥐고
          왼쪽으로 한번,오른쪽으로 한번 당겨가며
          멸치를 터는 모습은 어촌에서만 볼 수 있는
          바다의 힘찬 약동이다.

          노랫말이 따로 없다.
          즉흥적으로 선주를 흉보기도 하고
          독수공방 부인을 위로하는 노랫말도 나온다.

          동해와 남해가 섞이는 곳에 위치해
          바다의 물살이 빠르다.

          최근 대변항이 유명해진 것은
          멸치보다는 영화 '친구'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 넷이
          튜브를 타고 놀던 바닷가가 이곳이다.

          "조오련이하고 거북이하고
          수영 시합하면 누가 더 빠르노?"

          주먹계의 보스로 성장한
          장동건이 터를 잡았던 부두도 이곳에 있다.

          밤이면 야시장처럼 즉석에서
          횟감을 내놓는 난전이 들어서기도 한다.

          용궁사..

          춘원 이광수가

          바다도 좋다하고 청산도 좋다거늘/
          바다와 청산이 한 곳에 묀다 말가/
          하물며 청풍명월 있으니/
          여기가 선경인가 하노라/ 라고 노래했던 경승지..

          바다와 맞닿아 있어
          '수당법당'이라고 불린다.
          바다를 향해 서있는
          해수관음대불은 높이가 33자나 된다.

          용궁사 너머에는 일광해수욕장이 있다.
          1965년 김수영 감독의 영화
          '갯마을'의 촬영 현장이다.

          당시에는 갈대밭과 해변 풍광이 아름다워
          '섬색시' '제3의 청춘'등의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해안도로는 임랑을 거쳐
          울산 간절곶으로 이어진다.

          장안읍 임랑 역시
          월출이 아름다워 차성팔경의 하나다.

          해안도로 한 굽이를
          꺽어 돌 때마다 색다른 바다를 만나는
          기장 해변..

          남녘의 햇살을 담은
          바람과 잔잔한 파도에서는 벌써
          봄내음이 짙게 묻어난다.

          나는 지금 봄을 안고
          천년 고도 서라벌로 가고 있다.

          하마,

          내마음은
          봄햇살이 내리는 절마당
          석가탑 아래서 조용히 두손을 모운 채

          솔거의 그림을 향해
          날아가는..

          한마리의 하얀 산새가 되어
          탑을 돌고 있다.

          ..











    고등학교 때 읍내에 나가 자취를 했다.
    그리고 주말엔 일주일치 김치와 밑반찬을 가지러 집으로
    왔다.

    누나와 형님들은 결혼을 하였거나 돈벌러 객지로 떠나고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인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읍내의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 여자는 읍내의
    여고를 다녔는데 그 여자도 주말엔 늘 시골집으로 왔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 읍내가는
    방향에 있다.

    토요일 저녁이면,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사랑채에서 일찌감치 주무시고 읍내에서
    돌아온 하얀 피부의 그 여자가 우리집에 놀러오면 어머니는
    슬며시 일어나 이웃으로 마실을 나가셨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 여자와 나는 거의 말이 없었다.
    방문을 조금 열어 놓고 그저 서로 말없이 TV를 보다가 그녀가
    "나 그만 갈께!" 하고 일어서면 나도 같이 일어나
    그 여자의 집까지 바래다 주곤 했었다.

    그 여자네 가는 시골의 밤길은 늘 한적했다. 논가엔
    개구리가 울고 밭에는 하얀 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산에서 소쩍새가 울면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고 부엉이가
    울면 무서웠는지 그 여자는 내게 바짝 붙어 걸었다.
    그럴 때 그 여자의 앞 가슴이 내 어깨에 스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 짜릿함에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가엔 늘 수많은 꽃들이 피고 졌다.
    제비꽃이 피고, 할미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찔레꽃이 피고,
    아카시아꽃이 피고, 밤꽃이 피고, 싸리꽃이 피고 지었다.

    그 길은
    아버지들이 소달구지 몰고 읍내에 장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내 형님 누이들이 돈 벌러 밤 도망을 쳤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어머니들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을 눈물로 기다리던 길이다.

    내가 그 여자를 바래다 주던 첫 사랑의 길, 바로 그 꽃길이다.

    그 때 내가 바래다 준 그 여자는
    허리를 조여맨 하얀 윗도리 교복을 입은 여고 2학년 이었다.


    그해 유월 막 장마철이 시작될 무렵의 토요일 오후
    나는 여느 때처럼 왼손엔 빈 프라스틱 김치통을 싸맨
    보자기를 들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그 여자도 저편에서 한손에 보자기를 들고 나타나서
    나를 보더니 씨익하고 쑥스런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땐 김치통을 들고 다니는 게 제일 창피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리면서 오늘 저녁에도
    우리집에 가겠노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그날 저녁 바쁜 들일에 지치신 아버지와 어버니는 일찌감치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그 여자와 난 말없이 TV에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지붕에서 우당탕탕 큰 소리가 들렸다.

    그땐 대부분의 농촌에선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집을 함석지붕
    으로 개량 했는데 비올 때면 그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그 여자가 돌아갈 밤 열 시가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우린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었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키스하는 장면등 그 당시엔
    미성년자 관람 불가 정도의 영화 같았다.
    이상한 장면에선 쑥스러움에 TV에서 눈을 떼고 딴 곳을
    쳐다보곤 하였다.

    영화가 다 끝나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마 그날이 첫 장마비가 시작되는 날이었을 게다.
    우린 어쩔수 없이 일어나 겨우 헌 우산 한 개를 찾아 같이
    쓰고 그 여자네 집을 향해 나섰다.
    영화에서의 야릇한 감흥을 가슴에 남긴 채..

    그 여자가 후레쉬를 들었고 난 한 손엔 우산 그리고 다른 손은
    그 여자 어깨에 올렸으나 그 헌 우산은 성인이 다 된 우리 둘을
    세찬 장마비로부터 막아주지 못했다.

    옷은 점점 젖어오고 그 여자의 추워서 흔드는 어깨 떨림이
    내 가슴에 따뜻함으로 전해왔고 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뛰는 가슴을 들킬까봐 그 여자의 어깨 등뒤에서 내 몸을
    떼고 싶었지만 그 여자가 추울까봐서 그럴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었으나 침 넘기는 소리를 들킬까봐 삼킬 수도 없었다.

    침은 점점 입안 가득히 차 오르는데 뱉을 수도 없었다.
    그 여자가 기분 나빠할까봐서..

    참으로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젖은 소매자락으로 입 안에
    고인 침을 슬며시 훔쳐내기 시작했다.

    난 야릇한 감정이 입 안에 그렇게나 많은 침을 고이게 하는 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후에 이발소에서 예쁜 면도사 아가씨가 면도해 줄 때
    가끔 침이 고일 때도 있었지만ㅎㅎㅎ...)

    난 또 이미 빳빳해진 내 신체의 한 부분이 그 여자의
    히프에 닿지 않도록 불편한 걸음을 걸어야만 했다.

    이십여 분을 걸어 그 여자의 집 앞에 왔을 때는 이미 옷이 거의
    다 젖어 있었고, 그 여자의 젖은 몸이 그 집 앞 가로등에
    어렴풋이 비쳤을 때 난 그만 호흡이 멎는 줄 알았다.

    나는 이상해져버린 내 감정과 커져버린 신체 일부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잘 자란 말도 못하고 얼른 뒤돌아서서 걸어나왔다.

    마을을 벗어나도 이상해진 나의 몸과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여자네 동네 입구의 정자나무 뒤에 숨어 혼자 바지를 내렸다.

    부르르 떨림과 거친숨..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고 바지를 올렸다.
    괜시리 혼자 부끄럼에 우산을 접어들고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해 추석이 돌아왔다.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돈 벌러
    서울로 올라갔던 경숙이 등 시골친구들이 내려왔다.

    우린 방안에 남녀 둘씩 넷이 둘러 앉아 손목맞기 화투를 쳤다.
    손목을 때리기 위해 처음으로 그 여자의 하얀 손을 잡아봤다.

    그 여자의 손은 너무 부드러웠고 손 떨림이 내게 전해졌다.
    그 여자는 유난히 하얀 피부에 살결이 약해서 나중에 보니
    맞은 자국이 하도 선명해 오랫동안 내 맘이 아팠다.

    고 삼이 되자 입시공부를 하느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했다.

    그때 우리집에 불행이 닥쳤다. 큰 형님 회사 부도와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겐 겨우 논 여나무 마지기만 남겨졌다.

    난 아버지의 뜻대로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의 면서기 시험을
    치뤘고 그 여자는 도시의 대학에 입학했다.

    발령은 쉽게 나지도 않았지만 난 왠지 시골의 공무원이 싫어서
    아버지 몰래 군에 지원해 입대를 하였다.

    서울 근교의 부대에 배치를 받았고 어느 뜨거운 여름날 주말
    그 여자가 부대로 면회를 왔고 난 외박을 얻었다.

    버스를 타고 서오능으로 갔다. 능 뒤 오솔길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태양과 남의 시선을 막아줄 떡깔나무 아래
    에 손수건을 펴고 나란히 앉았다.

    한참 말이 없다 어설픈 첫 키스를 시도했다. 그리고 난
    그 여자의 앞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크게
    뛰었는지 모른다.(지금도 뛰네 ㅎㅎㅎ)

    그러다 갑자기 그 여자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깜짝 놀란 나는 왜 우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난 지금도
    그녀가 왜 울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날 밤 녹번동의 한 여관을 잡았다.
    난 끈질기게 시도를 했고 그 여자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뒤 몇 번의 면회가 있었고 다음 해인 것 같다.
    면회 온 그 여자의 머리가 생머리에서 파마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이내 그 여자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거의 밥을 못 먹으며 가슴앓이를 했다. 차츰
    그녀를 잊어 갔지만 그 여자를 잊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2년 전 시골 초등학교 첫 동창회에 그녀가 나왔다.
    피부는 여전히 하얗고 고왔다.

    난 그 여자에게 "잘 사니?"하고 딱 한마디만 물었고 다른 여자
    동창들에겐 짖궂은 농담도 많이했다. 그 여자도 "응"하고
    딱 한마디 대답뿐이였다.

    지금 그 여자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친구들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 번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관두리라. 다시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겨울이라는 철은 봄을 안고 있다.

산야(山野)로 도시로,
겨우 잠들려 하는 바다 얼굴 위로,
기분 좋게 하늘가에까지 날아보고

때로는,
너무 딱딱하리라 생각해온 참나무 고목에
눈을 호두 알처럼 힘주어 뜨고
뒷생각도 없이 부딪혀 보는
겨울,


그 겨울이
조금씩 미워지기 시작해
나는 봄을 빌리려 작정했다

잎눈 많은 능수버들 한가지
남이 보든 말든... ...

뚝 꺾어 움켜 쥐고, 등 뒤로 감추고는 휘파람 불며,
유유한 사나이처럼
하늘만 올려다 보면서 걸어갔다.

크지만 높지 않은 소나무 아래에
아직은 참새 눈만한 꽃눈을,
양지 볕에 들키고 부끄러워 하는
진달래도 몇 가지 와드득 분질러 모아 들고
보지 않는 척하면서 두리번거리며 집에 왔다.


매일매일 벌컥 소리 나게 물 마시던
노란 물통에
훔쳐 온 봄을 꽂았다.

누구에게도 내 봄을 보여주기 싫고
가지고 온 봄이 고향 그리워할까...
음악을 틀어 놓고 같이 들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아주-

하루, 이틀, 열흘...
거실 물통 속 내 봄은 꽃이 안 핀다.

화초 영양제를 한 통 모두 쏟아 부어주었다

한나절 지나고 시들해 지더니
딱,
하루가 지나자
잎눈 꽃눈이 다 떨어져 버렸다.

내 봄이 그렇게 죽은 것이다.

나는,
내 가슴으로 보고자 했던 봄을
14층 위에서 던져 버렸다.


나풀나풀 날면서
화단,
또 다른 봄 위로 비로소 꽃들이 피어 춤추며
진짜 봄은 그렇게 꽃만 말고
내 마음도 따가고 있었다.










★야 임마! 난 네가 보고싶다 ★


이 새벽 문득 눈뜬 지금
오늘은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가난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 싶은 우리집에
오리 새끼처럼 못 생긴 막내는 엄마를 서너시간 아프게 하고
28년전 오늘 아침 이 암담한 세상에 삐죽이 나왔드랬습니다.


뭘 보겠다구 그리도 극성을 부리고 나왔는지...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후 밤이면 슬그머니 다가오는
옆지기에게 열심히 모자를 뒤집어 씌웠건만
이 풍진 세상에 뭘 보겠다구,
불량모자를 뚫어가며 기어이
이 못난 엄마에게 아양을 부리며
슬그머니 내 뱃속 한자리를 차지한 막내....


옆지기도
無대책으로 삼 남매를 만들어 놓은 게 미안스러웠던지
예비군 훈련소에서 병원으로 직행,
아름다운 간호사의 손에 히죽 웃으며
영원히 자유로운 '거시기'로 만들어 왔더군요


그런 서러운 막내는
끝내 책임지기를 포기한 아빠 손에서 자라지도 못하고
강원도 화천 38선 지뢰밭 한가운데서 더덕을 한 뿌리 케면
이크 이건 울 엄마 꺼!
두 뿌리 케면
이크 이것도 울엄마꺼! 하다가
98년도에 제대를 하곤
뒤숭숭한 대~~한민국의 앞날을 보더니 복학을 포기하고
엄마 짐 덜어준다며
팬티 한장 달랑들고 넓은 나라로 휭______ 날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저 닮은, 오리 새끼 같은 아들 하나 만들어서
며늘아이 하고 다음 달에 둘만 내 보낸답니다
저는 내년에 나온다나 뭐라나 하면서......


에궁~~~~~
미안하지만 막내야
난 임마, 니가 더 보고 싶단말야~~~~~~



솜사탕:2003/03/17 06:12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날씨만큼이나 시중 인심들이 썰렁해지면서
너도나도 옷깃을 세우며 움츠러드는 것을 보니 동장군의 등장과 함께
우리네 심사도 겨울나기만큼이나 시큰둥한가 보다.


하나 반만년 역사를 앞세우고 내달려 온 배달의 자손들인 우리가 누구인가 ?
이 역시 가볍게 이겨낼 수 있는 저력들을 각자 지니고 있지 않을까 .


아득한 옛적 일들이 떠오른다.
당시 산부인과 병동에서 인턴 직책을 맡으면서부터는 이상스런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었지.
그 때의 대학 병원 산부인과에는 애들을 밴 산모들은 별반 보이지도 않고
극히 위중한 산모들이거나 이런저런 합병증으로 인하여 자연분만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그것도 은밀히 입원하여 소리소문도 없이 퇴원해 버리던 시절이었지.


주로 찾아오는 분들은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이거나 결혼은 잘 했는데
후속 반응들이 없어 생 고민하던 부부들이나 찾아드는 요즘의 산부인과
형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래 진료실은 온갖 커튼으로 칸칸이 다 막아놓아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한 미로로 인해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못한 초짜 인턴들은
아무 데나 급한 걸음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다간 새치름한 간호원들이나
선배 의사들로부터 눈총을 맞아야만 하는 왕따 신세들이었다.


하루는 출근 하자말자 선배 의사로부터의 엄명이 떨어졌었다.
지금 즉시 가서 정자를 구해 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


잠시 님들의 이해를 돕고자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
당시엔 애기를 가지지 못하는 부인들은 거의 대부분 대학병원 산부인과로
몰려들었고 검사결과 난소나 기타 임신 유지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지면
배란기에 맞추어 인공으로 정자를 주입하여 임신을 유도하게 되는데 마침
그 날 정자를 주입시켜야 할 환자가 예약되어져 있음에도 선배인 의사는 잊어버리고
아침을 맞았다가 급히 생각난 김에 만만한 나에게 총알보다 더 빨리 급하게 준비해
오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만 ...
대학 시절 우리들은 부속병원을 거쳐 강의실로 가게 되어있는 길목에서 늘상
선배의사들이나 교수님들이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게 눈에 자주 목격되어지곤 했었다.
그러면 대개들 자신은 "언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저 곳 패러다이스와도 같은
병원 안에서 꿈의 날개들을 펴 보고 살꼬? " 라든지 ,


멀리서도 잘 들리는 병원 안내방송을 통해 "닭갈비님 ~ 응급실로 !" ,
"오리발님 ~ 중환자실로! " , "동강아지님 ~ 수위실로!" 등의 매스컴은
언제 타보나 ... 가 그냥 작은 소망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눈앞으로 흰 가운
입은 천사( ? ) 들만 보이면 거의 자동으로 고개가 굽실거려지곤 하였지.


그러다 아주 가끔씩 그 천사님들이 "야 ~ 너 이리 좀 와."하고 손짓이라도 하면
드디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한테 안면이라도 좀 팔릴 일이 생겼구나 ~
하면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 위를 쳐다보면 십중팔구는
"너 실험 좀 하는데 도와 달라 ~ ." 라거나
"피 좀 빼자." 라는 주문들이 대부분이었지.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과가 바로 산부인과인데 그기에 걸리는 놈은
거의 대부분이 "물 쫌 빼라 !" 이다.
그 엄명을 듣는 즉시 속으로는 "아이고 선배님 살려 주이소." 이지
겉으로는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십 분이면 됩니다." 하고는 건네주는
play boy 잡지 같은 야릇한 책 두서너 권과 시험관 튜브들을 받게 되지요.


그걸 받아 쥐고는
"아이고 ~ 내 신세야 ~ 이 넘들이 애비를 잘못 만나 엄청 생고생을 하는구나."
하면서도 어렵사리 생산하여 가져다 받치면 심드렁하게 받으면서
양이 많니 적니 , 색깔은 왜 이 모양이냐는 둥 온갖 트집이나 잡다가 기분이라도
좀 좋으면 "내 이름 달아놓고 밥이나 한 그릇 먹고 가거라." 하거나 ,


자기 기분이 영 별로 이면 "너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라고 강압적으로 나오는데 ,
그러면 "하이고 ~ 아무 것도 먹고 싶은 것 없습니다요! 안녕히 계시다가 앞으로
또 뺄 일 있으면 불러 주이소." 하고 나오면서 18 을 백 번 이상 연발탄으로
쏘아 젖히곤 했었지.


이제 나도 비록 인턴이지만 어엿한 의사가 됐으니 이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지
식전부터 열심히 근무하려는 후배의사를 잡고 급하게 물이나 빼오라고 시켜대니...
게다가 학생들이나 등교를 했으면 나도 덩달아 좀 시켜먹을 수도 있을 텐데 시간이
너무 일러 학생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


자존심이야 엄청 상하지만 '인턴 주제에 갈 길이 천리만리인 판에
찬밥 더운밥 따져대다간 그나마 잘 못 보여 찍히면 평생 의사길 오그라들게 뻔한데
이 지경에 뭘 마다 하누 ...' 하면서 ,
"알겠심다." 하며 적진을 코앞에 둔 용감한 진진돌이가 되어 시험관 튜브 몇 개를
들고 나와서 병원 건물에서 제일 후미진 곳이 수술실 옆에 붙어있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갔었다.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선배를 염두에 두고 작업에 충실하긴 했는데 너무 몰입을
하다보니 ,
아뿔싸 ~
이게 마지막 단계인 조준에 실패하여 그 작은 시험관 튜브 속으로 쏙 들어가질 않고
몇 방울만 명중하고는 대부분이 상. 하. 좌. 우로 지들 마음 데로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


애고 ~
이를 어쩌나 ~
어렵사리 만들어 낸 아기들이 각자 다들 지 기분 나는 데로 도망가 버렸으니 ...
도망간 그 넘들을 일일이 시험관 속으로 붙들어 집어넣고는 다시 거울보고 엄숙한
매무새 갖추고는 냅다 달려 아기들을 갖다 바쳤는데 ...


이런 쓰발 ~
"양이 왜 이리 적냐 ? " 느니 , "좀 깨끗하게 갖고 올 수 없냐?" 느니 ...
온갖 투정 다 부려대는 데 ...
하이고 ~ 인턴의 세월이여 ~
영원할 것이라면 내사마 다리 밑으로 다이빙이라도 할 끼다 고마 ~


하나 엄연한 현실 앞에서 꿀 발라놓은 벙어리가 되어 조용히
그리고 얌전한 내시처럼 읍소한 자세를 유지하며 다음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
하기사 요즘 인턴들은 그딴 짓 하는지 안 해도 되는지는 내사마 그 놈의 과를
안 하니 그 내막이야 알 바도 아니고 ...


그라고 ~
그 여자 분들 열이면 열 ! 모두 하나같이 부탁하는 게
"꼭 쫌 의과대학생 것으로 부탁해요." 한다나 ...
나 참 !!! 죽여라 죽여 ~


요즘은 정자 은행이 생겨나고 냉동기술 또한 발전하여 인공수정에서 유전자
조작까지 가능한 시절이 되었으니 ...
하나 그 은행만큼은 여러 님들의 힘을 모아서라도 망하지 않게 막아야지
생사람 잡습니다요 ~


덤으로 ..........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 님들께 간곡히 부탁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혹은 지하철을 기다리시다가 아님 육교를 오르시다가 저처럼
생겨 먹었거나 아님 비슷하게라도 생긴 아기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저를 본 듯 따뜻하게 격려라도 해 주시길 빕니다.


가들이 무신 죄가 있겠습니까요 ?
해서 요즘 지가 밤이면 밤마다 편치가 않답니다.
금융 위기 !
그거 빨리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들 ~ !!!




















어느 시인에게 보내는 메일 From Tokyo-5


To. J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다.

오늘도 수고하고 지친 이들이 목로주점에 모여 앉아

담배 연기를 뿜고 있다.



시 고맙게 받았다.

매일 매일 보내 주는 글은 모으면

어느새 시집 한 권 만들겠다.

너의 글을 받는 건 즐거움이다.



시를 읽는 건 순간에 불과하다.

잘 익은 포도주의 내음을 맡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걸 와인 글라스에 담아

나의 일터 한켠에 놓아두고

다음 글로 그 잔이 다시 채워 질 때까지

들며나며 홀짝 홀짝 들이 마신다.

그러다가 마음이 취하여 오면 답글을 쓰기도 한다.




    어느 시인에게 보내는 메일 From Tokyo-4


    To. J


    이야기 1.

    더러는 바쁜 날도 있어야 밥 먹고살지...

    맨날 한가해서야 어쩌겠어.... 그러면서 오늘 하루는 정신없이 볶아쳤다.

    뭔 할 일이 이리 많아... 오늘이 아니구 어제 오후부터 그랬다.

    그건 그렇고 3일간 연휴가 있었던 것은 회사가 좋아서가 아니다.
    주5일제야 이미 한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그리고 또 하루는 공휴일이다.
    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치면 월요일이 공휴일이 되니까.
    그런데 토요일이 공휴일과 겹치면.... 그냥 꽝이 된다.
    즉 토요일은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그랬든 어쨌든 주 40시간 이상 근무하면 시간 외 수당을 주라는 게 원칙인데
    우리 회사에서는 시간외 수당은 줄 수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 주의다.
    그러나 알다시피( ㅎㅎ 아니 아마 모를 거다) 내 성격이 완벽 주의자라
    하던 일 내 팽개치고 집에 가는 일은 절대 못하구....
    그래서 내 목 내가 조이며 미치겠다니 죽겠느니 투덜투덜 살고 있다.

    나 한국에 있을 때는 주 5일제란 택도 없는 얘기였다만,
    어떨 땐 한달 동안 하루도 못 쉬기도 했다만... 하하 좋은 세상이다.
    이게 다 미국 본떠서 생긴 제도이니, 미군 철수 절대 반대당 !!
    어쨌든 근무시간을 줄여야 실업률이 낮아진다.
    둘에게 줄 월급 셋에게 나누어주자... 일본의 길고 긴 불경기의 터널을
    그나마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은 나누는 정신이다.
    일도 줄고 월급도 줄고.... 다 참을 테니 목은 치지 마라.... 그러고 들 사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매일 바쁘다.



    이야기 2.


    니 소개 시켜 줄 일본 여자 찾아보았다만.... 눈에 안 띤다.
    제일 먼저 물어 보는 말이 돈 많은 사람이냐?.... 근데 대답을 못하겠다...ㅎㅎ
    얼마 전 메일에 책 써도 별로 돈은 안 된다고 그랬잖냐.....
    그냥 밥은 먹고산다고 그럴 수밖에..... 일본에 놀러 다닐 여유(시간적)
    없잖아? ㅋㅋ 신문쟁이들은 바쁘다며.
    그렇담 돈 많고 시간 억수로 많은 과부를 잡아야 하는데....
    할머니거나 뚱뚱하고 못생겼거나 마르고 신경질 적이거나 의심 많은 사람밖엔 없다.
    너의 빈 가슴 채워 줄 만한 여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으랴.......
    내가 질투??? 우하하 .... 지금 대답은 하지 말자.
    사람의 속이 안 보이는 건 정말 위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꽤 뚫어 보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건 비극의 시작이리니.
    너나 나나 그 속마음을 그 옛날에 다 꽤뚫었었더라면
    그 옛날에 이미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파장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그리운 마음으로 이제 재회하는 것도
    그때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에게

    어제 저녁 너의 긴 글을 받고 프린트를 했다.
    가방에 넣고 출퇴근길에 되풀이 읽었다.
    인쇄물 세대라서 그런가, 화면의 글보다 종이 위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웹사이트에서 너의 이름을 발견한 건.... 그것은 한 줄의 부음이었다.

    ▲○○○(△뉴스 국제부장)씨 모친상
    = 20일 오후 7시 30분 XXX 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53)959-4441 (서울=연합뉴스) (끝)

    그걸 읽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한참 동안 너를 찾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이게 처음이다.
    그래도 너는 참 행복했구나.
    어머니께 빚을 갚으려면 자결을 할 것이 아니라 행복 하려무나.
    네가 어머니께 불효를 했다면 그것이 그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일지니.


    우리 어머니에게 나는 절망이었다.
    내가 딸이라서 가 아니다. 아들이었던 딸이었던 임신 그 자체가 절망이었으리라.
    우리 어머니는 날 임신 할 당시 여군 장교였다.
    결혼은 했으나 아직 혼인 신고는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근무하고 있던 육군 본부에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꿈도 많았으리라.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임신을 한 것이다. 퇴역을 결정하며 그녀는 절망하였으리라.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항상 히스테리였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날이면 나는 어머니의 폭력을 감내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모인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늘 가출을 꿈꾸었다.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어린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잘 견디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웠었던가는 모르신다.
    거의 30년 전에 아버지와 헤어지신 채 지금은 내가 보내 드리는 돈으로
    생활을 꾸리신다.


    우리 아버지에게 나는 꿈이자 희망이었다.
    인민 해방군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던 운명의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3년
    반공 포로로 포로수용소를 나왔을 때 그는 아직 20을 갓 넘어섰던 청년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띠다.
    즉 나는 아버지가 만24세에 보신 첫 자식이자 희망이었다.
    그 뒤로 남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도 아버지의 사랑은 내 것이었다.
    옷도 사다 입히시고 신발도 직접 사다 신기셨다.
    등에 업고 그리고 품고 주무셨다.
    머리가 커지며 당신의 뜻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딸에게
    절망 이상의 배신감 마저 느끼셨으리라.
    지금도 나만 보시면 얼굴이 환해지시는 아버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
    "내가 제일 기대를 했던 건 큰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이라면 뭔가 되어 주리라 기대를 했는데..."
    장남은 지금도 불만이다. 어려서 자기는 줄창 누나 그늘에서 찬밥 신세였다고.
    그런데 그 넘이 제일 출세를 했다. 아버지도 그 넘이 모신다.


    울 외할머니.... 나만 예뻐하셔서 ...
    시어머니 무서워서 기를 못 피던 우리 외숙모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제야 하시는 말씀이
    "어머님은 친손주 보다 외손녀를 더 예뻐하셨는데 그때는 그게 서운하더니만...."
    아들을 낳아도 딱 한번 미역국 끓여 주고는 그만이었단다.


    그런데 난 모두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보다
    어머니께 학대받았던 기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나는 절대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너처럼 슬퍼할가? ..... 네가 부럽다.


    지금 우리 어머닌 날 너무 사랑했다고 하더라. 지금도 사랑한다고.
    근데 난 어머니가 가없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다.


    오늘은 바람이 차다. 이젠 집으로 가야지.
    텅 빈 사무실에 남아서 너에게 답글을 한 시간 이상이나 쓰고 있다.


    난 언제나 너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널 다시 찾아내는 건
    언제나 내가 아니더냐? 이게 세번 째다... 넌 잊었겠지만..... ㅎㅎ
    아... 아니다 내가 사라졌던 적도 두 번 정도 있나 부다...ㅋㅋ


    그래도 그렇다. 찾지도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날보고 그리운 이라 할 테냐?



    멜론































법구경에 이르기를,
“산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이나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고 했다.

저 말... 우리네 인생 삶에 있어서 어둠 속에 빛이 될 道튼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당연하지. 세상의 경전은 대부분 도튼 이야기들이니까! 내가 이상한 헛소리를...)
그리고 잘하면 사이버의 글 사이트에서도 적용할 만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작업 시~작!


사이버란 어떤 자리인가?
사이버에선 싫든 좋든 남들과 한자리에 모여 부대끼는 자리다.
게임방의 고도리 한 판이 그렇고 사이트의 글 게시판이 그렇고
남들이 글을 읽어 봐주고 댓글 달아 주는 것이 그렇다.

글을 올리는 것과 댓글... 그것 또한 남들과의 부대낌이다. 이 말 전부 동의할 걸?
암....! 당연하지.
남이 봐주지 않으면 오늘부로 칼럼이고 게시판이고간에 글이 하나도 안 올라 올 걸?
대화방에 가 보니 먼지바람만 휘~잉 일고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장 분위기 같다면 주변을 어리둥절 훑어 보고는 잽싸게 후다닥
도망 나올 걸? 컴에 귀신이 붙었나 싶어서...

나 혼자로는 항개도 의미 없는 사이버다.

사이버가 등장하고부터 세상은 온통 작가 투성이가 되었다.
정말 클날 뻔 했어. 이 수많은 작가들, 시인들.....
초야에 묻혀 있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당송 팔대가, 황진이의 문장과 재치를
뺨치는 숨은 재줏꾼...
사이버가 없었다면 어디서 이들의 솜씨를 구경할 수 있을소냐!
그들 역시 턱까지 차오른, 살아 펄떡이는 文才를 어디에다 발산할소냐!
사이버가 없었다면 얼마나 클날 뻔 했겠어!

*** 저겨어... 사이버란 남과의 부대낌이라고 하는 말 이젠 다 동의하시죠?
부대낌이란 말이 정 거슬리면 함께 함이라고 고치죠. 뭐.
단어 가지고 넘 그러지 마세요.
‘남과 함께 함’이란 말의 숨은 의미를 함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그건 말이죠... ‘어떤 동일시’ 랍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잃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래라 저래라, 그건 된다, 안 된다 오만 가지 간섭을 받으며
자신이 판단하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사회적 관습에 의해 본성이
다 파괴되었다. 자아는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것...그건 사람들의 본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아를 찾기가 매우 힘이 든다.
그걸 혼자 찾는 사람은 도사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고 부처고 노자고 성철스님이다.
보통사람은 죽었다 깨도 어렵다.

그 바람에 우리는 잃어버린 자아를 남에게 의존해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남에게 내 자신의 ‘어떤 동일시’를 바라는 것이다.
그중에 남녀간의 사랑은 어떤 동일시에 으뜸 장땡이다.
“당신이 있어 난 행복해요”라든지 “당신이 최고예요.” 등의 말을 들으며
날 평가받고 만족하고 늘 자아찾기를 상대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달콤하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상대가 좋은 말로 속삭여 주니까... 오메! 뿅 가는 것!

비단 이성간의 사랑만이 아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 또한 자아를 찾기 위해 용쓰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댓글은 정말 쥑인다. 자기의 작품을 보고 남이 해 주는 어떤 말을 듣는 것
그건 진짜 가만히 있어도 마구 굴러오는 자아찾기이다. 쥑이지! 암...행복해!

*** 근데요... 댓글이 칭찬이라야 잃어버린 자아가 충족이 되지요.
만일 비방하거나 남들이 별 신경을 안 쓰면 오히려 자아가 손상되지요.
그만큼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지요... 그쵸? 인정하시죠?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작용한다.
칭찬의 댓글은 ‘나 행복해요! ’ 가 마음 가득한 희망이지만,
비난의 댓글은 ‘나 지금 슬슬 뿔따구 나고 있어!’의 절망이다.

글을 올려 보고 그 경험을 한 사람은 그걸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글에 무조건 좋은 쪽의 댓글을 일일이 달아준다.
왜? 자신도 그렇게 남의 댓글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자아 찾기를 위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 간청이자 윽박(?)이다. 나에게도 기분 좋을 댓글을 달아 달라고...

자신의 글이 대단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자아를 충족받기 위해 어떤 심리 상태로 가는가?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며 잘 쓴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계속 존경받아야
한다.
매일 자신을 향한 존경심 내지는 멋있는 사람임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에고가 유지된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더 인기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나타나면 질투가 생기고
(=나에게로 향하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에 대한 절망,
내 자아찾기의 상실... 그게 질투다.)

혹은 무슨 주제로 급히 글을 썼다가 쪼매 마음에 안 들지만 평소처럼
칭찬의 댓글이 올라올 줄 알고 올렸더니 웬 걸?
자기의 팬, 독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냉담하거나 비평이 바글바글하면
그길로 삐져서는 그 사이트를 떠난다, 어쩐다, 투정조의 글이나 또 올려보고….
그게 다 그놈의 에고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평하는 걸 듣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도 잘 된 평으로……. 잃어버린 자아를 대신 충족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법구경이 어디 시시한 소리를 했을소냐!
사람 사는 것 또한 다름 아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 또한 자아 충족용이다.
남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 것이다.
길을 걸어가며 수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원하는 것도 자아 충족이다.
에고의 만족이 그것이다.
미인의 시선집중 자아 만족, 부자가 돈으로 자아 에고 만족, 권력자가 힘으로
자아 만족......

빗나간 주제지만 사이버를 자주 찾는 사람은 현실에서 자아 찾기에 비교적 약한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더 주변을 의식하고 사는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들은 사이버에서 비로소 안식처를 찾았기 때문이다.
대개 그들은 남을 해코지 못하는, 악당일 수 없는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각설.

그래서 사이버란 현실에서 자아를 많이 잃어버린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도 하다.
대리만족을 위한 공식 게시판이 있고 댓글이라는 자아찾기 공식 위임장이 있는 곳
이거든.

그리고 글쓰기에 별로 자신이 없는 사람, 심지어 댓글마저 끙끙 자신 없는 사람조차
읽기만 하고 나가면서도 ‘난 누구 못지않게 감상은 할 줄 안다!' 고 은근히 자기
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사람들이 엄청 들락거리는 대화방은 어떤가?
동호회나 대화방 또한 자아찾기에 적격의 장소이다.

A 녀 : “오빠~! 멘트 목소리 쥑여요!” (CJ :뿅~~~~~@%#!)
3분후...
목소리 최대한 가다듬은 CJ: 언제나 상냥한 A녀 님 오늘도 오셨구요,(A녀: 뿅~~@$!)

남에 의해 자아를 찾기 보다는 남의 말에 부동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작 자아는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법구경이 이미 수천 년 전에 가르쳤다. 남에게 자신을 위임하지 말라고.

“산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이나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사진 최민식,045 : PUSAN, 1975




스승은혜 ....클릭





    1960 년대 가난했던 시절
    6. 25 이후 4년만에 태어나 소작농으로 살다가 근처 초등학교에 다녔다


    1년 농사는 쌀 5가마가 수확인 천수답 뿐...
    그 쌀을 가지고 5식구가 살림하고 밥을 먹어야 되니 점심은 다반사로 굶었다
    어쩌다 먹는다고 하면 찬밥 한 그릇에 물을 넣어 끓여서 양을 늘리고
    김치로 배를 채웠다.


    그 때 구세주가 있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옥수수와 탈지 분유
    지금 반미니 친미니 해도 그 당시 미국은 감사하기만 했다.
    한국사람들 굶어죽지 않은 것이...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다.
    얼굴에 버짐이 생기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으니 쓰러질 것 같다.
    점심 때 종이 울리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드디어 점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울리면
    집으로 빈 그릇을 가지러 간다.
    숟가락과 옥수수죽을 얻어먹을 밥 그릇
    그 때 얻어먹는 꿀꿀이죽, 옥수수죽은 진짜 꿀맛이다.
    아! 더 좀 먹었으면 불과 세 숟갈을 2분만에 먹고 나니 죽이 없다..


    양으로 치자면 옥수수 가루는
    정량의 3분의 1인 애들 손으로 한 움큼 정도밖에 안 된다.
    그 1학년을 맡은 송 ㅇㅇ 아줌마 선생이 눈치를 준다
    나가라는 눈치..

    "소사!"
    죽을 떠주는 소사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배고파 더 먹으려고 서 있는 거지 새끼 아이들.."
    그 앞에서 말한다.
    "한번 주고 더 주지 말란 말이야."
    "맨날 얻어먹으러 오는 거야 저 ㅇㅇ 들은."


    그 때 여선생의 치켜 뜬 눈초리
    그 눈초리가 나는 40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양실조에 걸린 저 거지 새끼들에게는 무상으로 주는 꿀꿀이죽조차도
    더 주지 말라는 매서운 눈초리......


    30 년이 지난 나중에야 알았다.
    여자 동창으로부터.. "넌 그것도 몰랐니.?
    그 때 나온 옥수수가루, 탈지분유를 그 여선생이 횡령하여 팔았다는 사실을,
    자기가 아는 친척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것을 횡령하기 위해서 정량도 못 먹게 하였던 것이다
    '벼룩이 간을 떼어먹지 ..'


    그 때 이후 나는 다짐했다.
    나는 나중에 커서 가난한 자들 것을 절대 떼어먹지 말기로 하자.
    그러면 죄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선생님은 초교 4,5,6학년 담임이셨던 최광훈선생님이 나를 부르신다.
    못사는 학생 중에도 특히 다 떨어진 옷을 입은 나를 부르신다.
    아이들 다간 다음에 조용히 학교에 남으라고 하신다.


    둘이 앉아 있다.
    이 선생님 자기 웃옷을 벗는다,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신다.
    "이 상처가 무엇인줄 아는가?
    내가 돈이 없어 학교 다닐 때 일하다 다친 상처다.
    너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잘살 수 있다.
    근검 절약하면 잘 산다.
    너도 희망이 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나에게 옷 한 벌을 주신다
    이거 입으라고, 내가 얻어 온 것이라고,
    선생님 월급으로 샀으면서도 얻어 온 것이라고 스스로 낮추는 그 모습.


    그 때 나는 월남으로 가는 부대 앞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하며 노래를 부르는 부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주워 팔아서 그 때 돈 10원씩을 매일 저금했다.
    먹고 싶은 엿도 못 사먹고 아까워서 몽땅 저금했다.


    그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일부러 나에게 칭찬을 하신다.
    "저 학생 같이 열심히 일하고 저금하는 것을 본 받아라"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 격려의 말씀이 지금도 나에게 교훈이 된다.


    그래, 나는 지금도 그 때 두 선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의 말씀과 인품이 그 학생의 앞날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
    나는 그 선생님의 교훈으로 지금 그래도 중산층으로 살며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글/유정천리




          답글.......낭만


          봄은 부끄러움
          노란 현기증 자존심이었다.

          꽁보리밥 도시락
          아지랑이 때문이다
          쓰러지던 초등 4년 11살 소녀.

          배고픈 어린 자존심
          뜯고 뜯던 노란 민들레
          민들레 꽃 눈물.

          꽁보리밥 도시락
          가방 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보채던 봄.




        나에게 있어 봄은 현기증입니다.
        가난이 부끄러움으로
        아롱아롱 피어나던
        아지랑이에 쓰러지던 어지럼증입니다.

        유난히도 가난했던
        초등교 4학년 봄 소풍.
        춘궁기와 노란 어지러움과
        허연 버짐 피던 눈만 큰 소녀를
        떠올립니다.

        팔랑 팔랑 날던 노란나비 떼는
        꼬르륵거리던 허약한 다리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던 꿈이었습니다.

        애꿎은 잡초만 손에 풀물 들도록
        뽑고 또 뽑아대던 아픈 기억의 봄.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예쁘고
        앙징맞게 피어나던
        봄 언덕은
        다시는 가볼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남쪽의 낭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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