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럭쿨럭..."
목 저 너머에서 끓어오르는 비릿한 그 소리.
그의 가슴엔 구멍이 세개나 뚫리고 있는 중이었다.
인생이 허물어지는 소리...
운명을 맞 서 저항하던
그의 깊은 눈빛이
한 번 움찔 용을 쓰다가 다시 감긴다.
화장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노모 혼자서 한 뙈기 텃밭과 손바닥만한 천수답도 힘에 부치는데
그게 가당키나 하랴!
그의 머리맡엔 녹슨 깡통이 하나, 마치 주인 곁에 철없는 강아지마냥 쪼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마다 그의 허리굽은 노모는 밤새 타들어간 자신의 가슴속 재끌까지
탈탈 털어서 함께 쏟을 테지.
갓 스물 앳된 소녀는 초연한 얼굴로
방안을 조심히 둘러보고는
이내 그의 눈꺼풀이 다시 열리면 마주칠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우 숨을 돌린 그가
쌕쌕... 기관지의 바람 새는 소리를 애써 비집고
계속해서 힘에 부치는 행군을 하려한다.
"내가 정말 다시 살 수 있을까요?"
간절한 기대를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을
차마 배반치 못하고 소녀는 또렷한 음성으로 대꾸 한다.
"물론, 그러셔야죠."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벽에 걸린 검은 양복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커다란 검정 양복.
마흔다섯 중년남자, 그의 소망은
언젠가 그 옷을 다시 입고
부산 나들이를 한바탕 휘돌아치는 일이란다.
"가끔씩 저 옷을 입어봐요. 이젠 허리가 커서 둘은 들어가게 생겼어요. 쿨럭쿨럭..."
소녀가 옷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겸연쩍은 듯 그렇게 말했다.
부산의 어느 여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쓰러졌다는 그.
폐결핵 중증 판정을 받고
세상을 작별하려고 극약을 먹고 산등성이에 누웠단다.
"엄청 많이 먹었는데 사람들에게 발견이 되어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어요."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아내도 아이를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난지 오래라고 했다.
그저 스무살짜리에 불과한 철없는 소녀를 붙잡아 놓고
무슨 성녀라도 만난듯이 고백성사를 계속하던 그.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할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지긋지긋한 고문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고 맘 먹었는지
내장이 쓰리고 꼬이고 낭창낭창 헤어져도
한움큼씩 되는 알약을 꾸역꾸역 입에 털어넣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그 무의미한 고문을 줄기차게 부추겼던 야멸찬 소녀.
그의 부음 앞에서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기꾼이 된 기분.
거짓말이 탄로난 기분...
솔직히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마치 그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져야만 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그의 노모가 소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다.
내키지 않는 무거운 걸음을 무릅쓰고 찾아가니
마당 전에 붙은 고추밭 이랑에 수건을 눌러쓰고 앉았던 노파가
손보다 눈물이 먼저 나오며 소녀의 팔에 매어 달린다.
"난 이제 어찌 살아요?"
병든 아들이 노파에게 해 준 게 뭐 있다구
그 아들이 없어서 못 산다는 건가?
차라리 진저리 나는 병수발 끝이 났으니 짐 하나 던 셈인데...
온갖 머리를 짜 보아도
소녀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 해 어쩔줄 모르고 서 있었다.
노파는 병자가 머물던 방으로 소녀를 이끌었다.
땟국 절었던 무명이부자리가 없다.
반사적으로 벽을 쳐다보니
그의 까만 양복도 없다.
낯 선 느낌만이 휑하니 그녀를 밀어낸다.
-너 이젠 필요없다...
더 이상 너를 믿지도 않는다...그러면서-
노파가 구석을 가리킨다.
"저거... 박선상이... 아가씨에게 주면 안되겠냐구 해서..."
책이 두어 다발 노끈으로 묶여 있다.
가슴이 철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싹 진저리가 쳐지게 두렵기도 했다.
책 갈피갈피 죽음이 묻어있는 것 같아서...
책 무더기 위에
그의 검고 커다란 눈이 붙어있는 것 같아서 얼른 외면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진심을 푸근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철부지 속알머리를 들킬까봐 전전긍긍 창피함과 미안함이 범벅이 되었다.
"아니요, 생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사양했는 걸요.
언젠가... 사모님과 아드님 오시면 그 분들 드리세요."
그렇게 약삭바른 말로 그 난처한 유품을 거절했다.
그랬다.
"제가 뭘 드리고 싶어도 마땅히 드릴만한게 없네요.
제가 가지고 있던 책들이 있는데 좀 가져가시지 않을래요?"
그때는 그의 이별을 준비하는 행동에 동의하기가 싫어서
"나중에 직접 골라서 주세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가 작별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무리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모친에게 떼를 써가며
애써 그 책들을 따로 가려 놓았단다.
오래도록... 그의 아들과 아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다는 소문은 듣지 못한 채
소녀는 그 곳을 등지고 신세계를 향해 떠나야 했다.
무심히 세월은 흘렀고 이제는 잊힐만도 한데
겨울이 되면
감기에 걸린 사람들의 기침소리에 묻어
그의 기억이 쿨럭쿨럭 되살아 난다.
야윈 몸과 커다란 눈과 젖은 기침소리가
한번씩 소녀의 가슴을 휭하니 휘돌고 지나감을 느낀다.
채 몇 달 되지 않는 동안의 짧은 인연이
어째서 이토록 긴긴 세월동안
가슴에 스러지지 않는 기억의 불씨로 살아있는지
소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노파가 생존해 있을 때
한 번쯤 찾아가 만나보지 못한 것이
종종 후회가 되기도 하면서...
2003. 1. -하닷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