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老시인 김춘수님을 티브이 모니터를 통해 뵈오며,
평생을 시로 점철된 그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잔잔하지만 깊게 울리는
감동을 느꼈다.
개인적인 체험을 시속에 옮기기를 철저하게 삼가 했던 시인이지만,
작년에 아내를 삶 저편의 세계로 먼저 떠나보낸 이후로는 아내에 대한
애절한 애도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시 속에 묻어난다는 말씀을 하시며
조용히 웃으시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적이시던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껏 모든 청춘의 들끓는 가슴속으로, 꽃보다 아름다운 '나’와 '너'
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시 [꽃]을 쓴 시인이지만 최근 30년간은
거의 '무의미’의 시만을 쓰셨다는 시인 김춘수님.
그의 무의미 시란,
시에 나온 모든 언어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달지 말고 그저 느낌으로
읽고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시라고 말씀 하신다.
시를 쓴 시인이 그러하였듯이 읽는 이도 그렇게..
아니, 그래야만 하는 그런 시 읽기....
老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스님의 불경소리를 듣는 듯 그저 자연스럽게 그 불경의 내용 보다는
들려오는 음률의 울림을 따라서 리듬으로 들으라는....
그래서, 시란 분명한 표제가 있는 베토벤 보다는 음의 조화가 돋보이는
모짜르트의 음악 같은 것이라신다.
그의 이런 시에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다는가에 대한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실 때, 티브이 모니터 앞의 나는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해 혼자 깔깔거렸다.
고교에서 국어교사를 하고있는 시인의 제자가 어느 날인가 사관학교의
입시에 나온 문제라면서 시인의 시에 대한 질문이 담긴 시험지를 들고
왔었다고 한다. 그래 그 문제를 보시고는 손수 답을 적어서 주셨더니
다음날 다시 찾아온 제자의 손엔 답지에 맞춰 채점된 어제의 바로 그
시험지가 들려있었고, 시험지를 보자 무심코 건네 받은 시인은 그만
깜짝 놀라셨는데...그 이유가 바로, 시험지에 채점된 시인의 점수가
겨우 40점 이었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시를 쓴 작가가 그 시에 관한 문제를 직접 풀어서 40점의 점수를 받았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느냐시며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한 컷의 사진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다.
너무도 자연스런 시를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이 낳은
너무도 인위적인 문제점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자연스러움을 얻기까지엔 老시인에게도 젊은 날의,
얼마나 많은 노력(창작의 과정)이 뒤따랐을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시를 두고 형식주의니 기교주의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신 老시인의 이런 말씀을
기사화된 활자로 읽을 수가 있었으니까..
"예술과정이란 곧 창작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많은 노력 끝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제 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에
불과해요. 진정한 자연스러움이란 오랜 예술적 수련을 거친 뒤에야
생겨나는 법입니다."
그토록이나 오랜 세월동안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회자의 말에 예나 지금이나 깡마른 얼굴에 굵은 테 안경알 속으로
아직도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맞추며 老시인은 말했다.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다만 시를 쓰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쓰게 되고..
그래서, 생활하듯이 자연스런 일이 바로 '시 쓰기’ 라고..
그러기에 '시 쓰기’가 평생 유일한 업(業)이자 취미이며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며 아이처럼 순하게 웃으시던 시인..
팔십 평생 아직 한번도 은행엘 혼자 가 본 적이 없다는 老시인의 한 마디에,
나는 현실속의 그가 얼마나 많은 것에 부인을 믿고 의존해 왔을지에 대해
조심스런 상상을 해보며 혼자만의 미소를 지어 본다.(남편에게 이런 저런
은행일을 은근슬쩍 떠맡기기 좋아하는 나의 모습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시란 현실을 멀리하고 떠날수록 더욱 현실에 관여하게 되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말씀 하셨었나보다.
언제쯤인가..
나도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형식과 기교의 알찬 땀흘림의 과정을 거친 후,
진정한 노력의 산물로만 주어질 정말 자연스러운 그런 시를 말이다
솔향
별장 문화가산책 글번호:113 날짜:2001/07/13 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