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 무 리 *




어젯밤,
달무리가 지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다.

꽃샘추위 속에
하얗게 피었던 백목련도
이제 다지고
가지에는 초록의 새 잎이 돋았다.

방문을 활짝 열고 산을 본다.

촉촉히 내리는 빗속에
마주한 산이 물안개에 묻혔고
습기 머금은 하늘은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해 보인다.

먼 데서 봄꿩이 울고 있다.

산자락을 돌아
빗속을 더듬어 들려오는 산꿩 울음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함이 묻어난다.

감자 캐는 계절이 채 오기도 전에
새알 크기의
어린 자주색 감자를 너무 먹었을 때,

가슴이 아려오는 듯한
그런 기억의 아릿함에
우산 하나만 든 채 들길을 나서 본다.

보리밭,
아직 덜 여문 이삭이지만 후끈함이
콧끝을 간지런다.

풋풋한 보리내음에 문득
그 옛날 춘궁기의 보릿고개가 생각난다.
우리의 가난은 보릿고개를 넘느라
그렇게 헐벗고 굶주렸나보다.

하루 세 끼니를 제대로 못먹어
얼굴에는 온통 솜털이 보송보송했고
꺼칠하게 핀 마른 버짐이 떠날 날이 없었다.

노루꼬리만큼씩 자꾸 길어지는 봄날이
허기를 달래기에는 천 년같이 길어
산과 들을 쏘다니며 진달래(참꽃) 꽃잎과
산딸기(뱀딸기)를 따 먹느라

입술과 혓바닥은 늘
퍼렇게 꽃물이 들었고,보리깜부기를
꺾어 먹은 날은 까맣게 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웃느라 배가 더 고프기도 했다.

눈과 코는 없어지고
하얀 이만 커다랗게 얼굴을 차지하고
벌죽대는 게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토담 옆 장독대 주위에 떨어진
떨떠름한 감꽃이 유일한 주전부리였지만
어쩌다 개떡이나 밀떡이 생기면 그게
그렇게 꿀 맛일 수가 없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고 소다를 넣어 부풀린
이름 그대로의
밀떡 개떡 송기떡 쑥떡이었다.

봄비 내리는 넓은 들판에는
파랗게 쑥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채
그냥 쑥밭으로 자라고 있다.

이른 봄,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봄이 오는 들녘에는 바구니를 든
흰 옷 입은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나물 캐러 봄의 길목을
해가 저물도록 서성거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 때는 늘상 술도가(양조장)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행열이 있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술을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酒粕)와
아래기를 얻기 위해 지루한 줄도 모르고
두어 시간을 기다린다.

사카린을 넣은 단맛에 먹다가
그만 취해서 그날 오후부터 하루 낮과 밤을
얼굴이 벌개져 정신없이 잠만 잤었다.

그 후 한 달이 넘도록 속병이 나서
무던히도 고생을 하는 바람에 밀밭 근처에만 가도
취하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전설처럼 멀리 떠난 보릿고개,
우리의 가난 고개였고 눈물과 배고픔에
허기졌던 시절이었다.

내리 삼 년 가뭄 끝에
첫 달무리가 밤하늘에 걸렸을 때
어둑어둑한 밤길을 서둘러 달려가
보리밭 두렁에 나란히 앉아서

"저 놈이 어서 여물어야 할낀데.."

달무리를 연신 올려다보며
마디 굵은 손으로 내 어린 손을
꼭 잡으시던 아버지, 지금은 경산묘원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와 같이
조용히 누워 계신다.

밭에서 돌아온 그날 밤
마당가에는 해거리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이
소복소복 하얗게 떨어졌고
그해는 풍년이 들었다.

봄비가 내리기 전날,
달무리를 볼 때마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우리 어린 날들의 기억들이
해거름 봄비 속에서 자꾸만 떠오른다.

우산 끝에 맺히는 빗방울 너머로
먼 데 산꿩이 울고 있다.

(2002.4.22. 魚來山님이 쓴 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둥지로 쪼로록 달려가 노랗고 따뜻한 닭 알을
가슴에 품어보곤 엄마에게 가져 다 주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이였던가 봅니다
우리집에는 알을 낳는 닭이 두 마리 있었습니다
매일 낳는 닭 알은 나와 동생들에게 신발이랑 과자랑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신기한 요술구슬이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두개씩 들어 있던 닭 둥지의 알은
달랑 한 알 밖에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닭은 모두 울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는 둥지로 가서
주위를 살피더니 하나밖에 없는 알을 보고

“이제 늙어서 알은 낳지않고 헛울음만 지르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엄마의 허탈한 목소리와 함께
그 다음날 부턴 나는 둥지에 있는 한 개의 닭 알을
깨어 질세라 조심스레 꺼 내어 엄마에게 가져 다 주곤 하였지요

약 보름간을 그렇게 나의 닭 알 나르는 심부름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이제 늙은 닭의 울음소리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십 여 일이 지난 어느날 이였던가 봅니다
난데없이 방앗간 옆 헛간에서 들려오는

“꼬꼬대 꼬꼬 꼬꼬대 꼬꼬 “ 하는

닭의 울음소리에 헛간으로 달려간 나는 헛간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보리짚단을 뒤적이다 깜짝 놀라 소스라 칠번 하였습니다

보리짚단 속에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노랗고 따뜻한 닭 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늙은 닭은 방앗간 둥지를 떠나
아무도 가지않는 이곳 헛간창고에서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소복이 담겨 있는 탐스러운 닭 알을 보는 순간
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닭 알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보배로만 여겨졌거든요

오십 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 날들을 찬찬히 돌이키며 생각해 보아도
그 때만큼 내 마음이 부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저녁상에 계란 요리가 올라오면
보리짚단 속에 소복이 쌓여있던 닭 알을 떠올리며
예닐곱 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 깊은 행복감에 젖어 봅니다



-길벗-









미루나무 되 살리기...



미루나무님들~~

무더위에 안녕하세요.
많은 식구들이... 새로운 카페로...
운영자로... 그렇게...떠나들 가시고
너무나 조용하시군요.

저 역시나..
글이 ..그 못났지만..우스운 글이 씌여지질 않습니다.

제.. 향수를 불러일으킬.. 제 자리 탓이였던 것도 같아보여,
님들께...
이런 글, 용기내어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칼럼지기님들...

숲길로 글을 올려주셨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지금 이 말씀 드리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이 두근대고 ..글은 횡설수설입니다.

한달 간.. 동안,,,
귀하신 옥고를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숲길로 다 올리려니..
좀,,무린 것 같습니다.

한 달 뒤에... 정리 되는대로
미루나무 곧추 서 보겠습니다.

더운 날...
건강하시기를...바라며,

미루/이요조 드립니다.

2002년 7월11일 초복에


























































십여년간을 병원신세를 지는 작은 놈이었습니다.

고놈이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7급 재검판정을 받았지요.
그날은 온종일 악다구니로 보냈습니다.
울지않으려고,
더 행동은 거칠었더랬습니다.

가족회의를 여러번 했고.
본인의 의사가 입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떳떳하고 건강한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전 현역입영의 길을 택했습니다.

복무 중인 큰놈이 걱정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어쩌시려구요.
안보내는게 더 나은거 아닐까요?"

두달을 온몸으로 뛰었지요.
남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뛴다던데...
바보 밥텡이 엄마는 군대에 아들을 보내려고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8일 3급으로 현역입영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열아홉 아들놈은
3급 판정의 서류를 들고 벙싯벙싯 웃음입니다.
내 찢어지는 가슴속은 아랑곳 않구요.
우리집의 애물...
떠나간 이가 그렇게 불렀지요.
애물이라니요.
아닙니다.
고놈이 있어 제가 요만큼이라도 겸손해 질 수 있었던걸요.
고놈이 있어
지금의 시간을 견디어내는 것을요...


그날 저녁
화장실에 물 틀어놓고 엉엉울었습니다.
16년의 세월을 뛰어서...
첨 병원에 갔던일이 떠올랐기 때문에요.
암담함...
처절함...
두려움...
공포...

그리고 기도...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에미란 이름으로
나는 고놈앞에서는
울지 못합니다.
에미란 영원히 자식들에겐 하늘인것을요...

며칠전,
아니 6월 30일,
서해안에서 북한과의 교전이 있었더랬지요.
그곳과 가까운 곳에 큰놈이 복무 중입니다.
경기도 파주...
안타까운 마음에 전화를 넣었으나 비상이었는지 전화가 불통이었습니다.
한밤을 꼴딱 새우고,
종종걸음으로 무릎꿇었었지요.

다행히 큰놈에게는 별일이 없었지마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다섯목숨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제가 꼭 작은 놈에게 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은놈이 오늘 아침 나를 울렸습니다.
별 것 아닌 일이 었는데 내 설움에 고놈에게 포악을 부렸습니다.

학교를 보내놓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울었습니다.
기대어 울 어깨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슴도 없이,
꺼이꺼이 내처 울었더랬습니다.
항상 씩씩한 옥이도,
오랜 외로움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이 여자인 모양입니다.

난 바보 미련 곰탱이입니다.


절영에서
옥이이모.






◎ 이름:엄마

2002/6/28(금) 14:29 (MSIE5.0,Windows98;DigExt) 211.222.168.49 1024x768



사랑하는 내 막내 아들..종열이 보아라  





click~☞이등병의편지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열차시간 다가올때 두손잡던 뜨거운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한장 고이 접어 보내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이등병의편지 김광석 노래



종열아~

네가 입대하는 오늘 아침

늘 별렀지만 막상

이 엄마는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구나...

기껏 고기 몇 점 구워준 것밖에...



할머니의 기도와

중언부언한 에미 기도,

그리고 오렌지 3개 건네준 것 밖에...



형,때도 그런 것처럼...

엄만 현관 배웅만하고

아빤...큰 길까지 따라 나서셨지

이넘아

아빤,,,역까지 걸어가는 너를

대로변에 서서 한없이 바라다 보셨다는데

넌, 친구들이랑 이야기에 빠져

뒤도 한 번 돌아 보지 않았다는구나.

못된넘~

지에미 닮아 무심한 넘~  



12시에 논산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있다구?

그래... 엄마는 시각이 바뀔 때마다

온통 너, 생각 뿐이었다.



오후 한시...

모여서 점호 할테고,

오후 2시면....한참 차렷자세로

연병장 뙤약볕에 서서 지시를 받을테고

오후3시쯤 되면...그제사

연병장을 흩어지겠지 하는생각,

오후 6시면...부대에서 이른저녁을 배식받을 너...

음식이 입맛에나 맞을란가?



밤 10시가 되자  

난, 느그 아버지에게 말했다.

"여보 지금, 우리 종열이 소등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네요"

피곤해서 곯아 떨어질 네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버진 아무말씀 없으셨다.

시계걸린 벽쪽으로 멀거니 시선을 두신채,



오늘 아침... 일어나

네 텅빈 침대를 보며...

왜 그리 허전한지..

왼통 집이 다 비어버린 것만 같구나.



오늘 아침에 식탁에서 말이다.

니가 빠진 빈 자리에서

네가 언젠가 식탁 유리밑에 무심결에

끼우던 그 사진 말이다.



아빠가 꺼내실려고 하시는거다.

누나도, 엄마도 왜 거기다 그걸 넣냐고 나무랐던...

우표딱지만한, 네 증명사진 말이다.



엄마가 그랬단다.

"왜요? 나, 우리 종열이 보고싶으면 한번 보고,...

밥 먹으며...또 보고...나는 좋구만요"

했더니...



느그 아버지 말씀이

"유리 아래 깔려서 안쓰럽다시는구나"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넌 알 것이다.



외려 엄마 보다도

느그 아버지가 더 사랑이 많으시다는걸,

니는 알 것이다.



아버진.. 식사 때마다 네 생각에

목이 메이실 것 같아 그러실게다.





종열아,

엄마...

기도하듯 니 한테

부지런히 글 쓸란다.



3년전... 니 형이 군대 갔을 때에도

엄마는 장문의 편지를 종종 보냈다.

그런데... 너무 집 생각나면 안된다고

편지 보유기간이 일주일인가 열흘이란다.

그 이상 갖고 있음... 안된단다.

그래서 다 없앴다는구나.

저를 낳아 길러... 22년만에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절절히 쓴 엄마편지를....

좀 서운하더구나



해서

난, 이제 보관도 할 수 있단다.

프린터로도 빼서 보내고도 영원히 남겨 둘 수도 있단다.

에미 편지 자주 보내마..

종열아...

오늘은 훈련 첫째날,

무척 힘들쟈?

그러나

넌, 내 아들~

화이팅!!! 이다.







2002년 6월 28일 엄마.








낯 선 손님들은 항상 손주냐고 물어보는 문제의 사진!
우리 종열이 아가 때,,,


이 엄마가 찰칵!! 순간포착!!

1982년 무더운 7/8일 생이니..태어난지가 아마 한달 쯤 됐나보다.

그 사진을 액자 채... 디지털 카메라도 어제 엄마가 또 다시 찰칵~



2002년7월 9일... 니 생일 담날... 종열이를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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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화첩기행" -藝의 길을 가다-를 읽고




*금강산도 느끼고 최북도 만나보고.....




이 요조


책을 읽다말고
나는 가슴이 뜨뜻해져 왔다.
책을 덮어버리고 나는 한참을 속울음으로 울었다.

北은 나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금강산도 아직 한 번 다녀오질 못했다.

남의 일인 것처럼 無心하게 살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글 한 귀절이 일순 내 가슴에 슬쩍 와 닿더니....
알지못할 슬픔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것일까

책을 덮고도 한동안...그 어떤 슬픔에...
시야가 뿌우옇게....촛점이 잡혀 오질 않다가

내마음 내가 달랠 요량으로,
뭔지모를 썰물이 밀려나가듯 쏴한-
마음의 갯가에서 조갑지를 줍듯....그렇게 글을 줏는다.

그의(김병종) 글과 그림으로 옷 입혀진
화첩기행을 읽으며,
"그의 눈부신 감성은 놀라운 招魂의 능력을 지키고 있다"는 書評의 글이나..


(병실에서 이 글을 쓰며....쓰다가 말다가 끊기다가..
글의 맥락이...감정이... 잘 이어지질 않는다.
책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
넘쳐나는 감정의 흐름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내버리는 이 아쉬움~~)

금강산!
그 금강산에 대한 글을 단 몇 줄의 표현으로도....
그는 오랜세월, 단절된 더케의 아픔을
내게 단 몇줄의 글로 무겁도록 안겨주었다.

난,
최남단에서 전쟁이 터지던 그 해.
무더위가 시작된 그 달에 태어났어도...
北과의 피비린내나는 처절했던 전쟁의 상흔에 대한.....그 무감각의 무딤과..
작금에 희미해진 이데올르기의 상실시대에 살아오면서...
쓸데없이 보낸 우리 조국의 억울한 그 세월의 허망한 이념껍데기를 본다.

김병종님의 "화첩기행을 읽으며....藝를 다루는 사람들의 기인성과 천재성을 접한다.

광기는 때로 예술가의 힘이라 했던가?
광기와 천재성이 실로 함께 반뜩이는 예인들...
조선조 회가 최북, 이름을 破字 (北-七七)하여 칠칠이-칠뜨기라 자칭한 그의 기인성....
금강산 구룡연에서 몸을 날렸으나....살아남았던 그....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지만 최북은 자기의 눈을 찔렀다한다.
화가에게 눈은 바로 생명이다.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 최북을 위협하는 권세를 부리는 이에게
차라리 내눈을 내가 찌르고 말리라며.....
한 쪽 눈을 찔러 실명케 된 최북...

그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60이후를.. 빈궁하게 살다가...
만취한채 길거리에서 동사한 불운한 화가였다.




毫生館(호생관) 최북(崔北)의 '풍운야귀도上'와'공산무인도下'





스스로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호생관이란
호를 지은 것을 보면 낭만적 기질보다는 자조적 기질이 많았던 최북...


그 최북이 젊어서는
저자거리에서 그림을 파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하며 신광수는 다음과 같은 싯구를 남기고 있다


"장안에서 그림을 파는 칠칠이를 보소.....문을
닫고 하루종일 산수화를 그려대네.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을 먹고,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네....."


또 신광하 같은 문인은 '칠칠이의 그림은 싸다"라고
할 정도니 당시의 최북 그림은 예술성을 높게 인정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그러나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기에 남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초절한 작품도 상당히 있다.천성이 오만하고 수 많은 기행을
일삼었던 그도 그림만은 반대로 얌전한 작품이 많아 의아스럽기
까지 하다.


공산무인도...폭포와 마주하고 있는 정자

"빈산에 사람이 없으나,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라는 왕유의 詩에서 따온 화제가 맵시있는 반행(半行)의
흘림체로 씌어있어 그 내용과 함께 일종의 선미까지 느끼게 해준다.
공허한 산속의 정취,왼쪽의 풍부한 농묵과는 반대로
정자옆에는 마른나무를 그리고 기이한 물안개까지 피어오르고...이같이
호쾌한 기상이며,"기이하면서로 예스럽다"는 찬사에 남김없이
값하는 명품이다.(참고도서;학고재 간,이태호 유홍준 편저,조선후기의
그림과 글씨 중에서)



숨겨진 예인들의 많은 이야기들을 새삼 다시 들으며....

그 분들이(우리 선조들의 藝人) 나, 즉 내 마음안으로 접목되어지는 듯.....
한결 가까와져 옴을 느낀다.

"문학과 미술의 용호상박이란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모든 것이..."
모든 무명의 기인들이 그의 손 끝에서 영혼이 다시 살아 일어 설 것만 같은,
그래 바로 그 것이였다.
김병종(현 서울대 미대 교수) 바로 그가 기인이었음에...
나는 그의 그림에 글에 매료되었다.

* 금강산의 예인들* 에서

그는 금강산을 뒤로 두고 떠나면서..이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금강산을 뒤로 두고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화구를 챙기는데 붓이 울고 있었다.
내 귀엔 그렇게 들려왔다.
불현듯 만물상을, 옥류동을 다시 보고 다시 그리고 싶었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피부에 불이 붙듯 그 감정은 절실해진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평생 그리던 여인을 만나자말자 다시 헤어져야하는 것처럼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묶으려던 붓을 다시 풀자 그것은 싱싱한 성욕처럼 일어서며 나를 부르르 떨게했다.
..................................





이 글을 읽으면서... 난 그의 감정이 나에게로 전이되어 옴을 느꼈다.
오죽 그리고 싶었음에...오죽하였으면...


다시 금강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기 그의 책에서...갑자기 내 마음을 뜨끈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의 글,
단 몇 줄이나마 들고나왔다.


"엊그제 꿈에는 비로봉을 보았다. 잘생긴 산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잘생긴 산이야, 산이 생기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라면서 눈을 떴다.
서둘러 서재에 들어가 내가 그려온 <금강화첩>을 펼쳐보았건만 꿈에 본 그 산이 아니었다.
둔하고 못난 손. 이렇지가 않았어. 나는 애꿎은 손에만 짜증을 내었다.

폐일언하고, 나는 요새 '금강산 정(情)떼기'에 골몰하고 있다. 사람들이 물으면 무슨
억하심정 가진 사람처럼 이렇게 말한다.

"금강산 그거 갈 거 못돼요. 요사한 계집처럼 사람을 마구 홀리더라니까.
하마터면 화가 최북이도 거기서 죽을 뻔했잖소,...아무튼 쌍녀러산이야." 용서하시라.
민족의 성산(聖山)을 두고 마구 비속어를 쓴 나를.

그러나 금강산 유람 동안 버스의 옆자리에 동승했던 한 노인도 나처럼 그렇게 말했다.
버스가 온정리의 한 마을 가까이로 둥글게 돌아갈 때 말 없이 앉아 있던 노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 저기야. 저 산등성이 넘어 학교를 다니곤 했어. 알겠어? 저기라고, 저 고개말이야.
우리집이 저 고개너머야."

노인은 숫제 내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차가 그곳을 멀리 벗어났을 때에야 노인은 털썩 앉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거지같애. 별것아니면서...50년이나 못오게 하고...환장할 세월을 살았는데...거지같애."

나는 노인의 마른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못 본 척 했다. 말은 안해도,
바로 이 상처와 후유증이 무서워 차마 금강산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떠나온 그 세월이 너무 애달퍼 단 며칠 그 땅을 밟고 휭하니 되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겠기에,

그러기에 격한 마음 뜨거운 가슴 가진 사람들일수록 조심할 일이다.

금강산행을,





(오늘 이 글을 .....잠 오지 않는 밤에 단숨에 쓰곤 난 내일 후회할른지 모른다.
내 되잖은 글 솜씨에... 부끄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내일 쑥쓰러운 못난이 글이 될지라도.....
단 한 번의 추고를 거치지 못한 뒤죽박죽의 글일지라도....올릴것이다.
솔직한 내 마음을.... 내 느낌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




11월 17일 새벽에..


디지털 카메라로 처음 찍은 책...
유홍준의 화인열전 2
"여름날의 낚시"

(최북은 유흥준의 "화인열전" 도 참고했음)




-늙어봐야 안다.-


나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늙기 시작할까?
그것이 늘 궁금했다.
50이 지나면서 새치가 늘어도 나는 늙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머리야 일찍 세는 사람이 있지. 젊은이도 새치는 있으니까."

60 이 지나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이를 누가 물으면 적당히 얼버무리며 딴 소리를 했다.
"나이가 문젠가, 그 사람의 건강상태가 중요하지. 사람에 따라서 10년의 차이는 생긴다고 보거든……."

그러는 동안,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남들은 나를 할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제 정말 늙은 것일까?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수평 대에도 오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면서
이젠 나도 정녕 늙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노인의 마음!
그걸 누가 알까?
자신이 늙어봐야 노인의 사정은 알게 되리라.
세상에서 점차 소외당하는 느낌,
만사를 허무로 돌리는 마음,
잘못을 보고도 관용하려는 여유,
사회적 유대에서 풀려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자식들이나 다른 젊은이들은 형식적으로 노인을 위하는 것일 뿐,
진정한 노인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늙어봐야 늙은이 마음을 알듯이
죽어봐야 진정 죽음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야 돌아간 부모의 노년기 마음을 하나씩 헤아리게 된다.

시집간 딸이 가져온 머루술 한 병
하얀 도자기에 붉은 머루술
감악산 머루술은 이름 높은 명주란다.

얼마나 향기로울까
병마개를 딸듯하다가
나도 모르게 멈춘 손길

술을 좋아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또 목이 메인다.

아버지 가신 뒤 세 번째 가을이 가고
어머니 눈감은 뒤 두 번째 봄이 오는데
내 머리는 희어져도
어머니는 보고 싶다.
아버지가 그리워 서럽다.

-2002, 1, 21. 청춘극장에 올린 글-








일주일만인가?
아마 꼭 일주일만에 전화를 했을꺼야.

" 나 많이 아퍼."하는 니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겨우내 몸살을 달고 지내는 니 모습이 내내 안스러웠는데......

봄이 되어도 넌 예전의 너로 돌아오지 못하고
늘 어딘가 기운없는 모습이었어.

"나이가 들려나봐"
당연하지
니 나이가 몇인데?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때
그때 넌 열 여덟 난 아마 스물이었을꺼야.
근데 벌써 우리 나이가 넌 마흔다섯,난 마흔 일곱

마흔다섯이 되도록 짝을 찾지못하는 니 모습을 보며
안스럽기보다는 혼자 당당하게 독립해서 사는 모습이 좋아보이고
어떤땐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지금 누군가 널 챙겨줄 사람이
아니 이렇게 몸이 아플때 나말구 누군가에게
"나 많이 아퍼"란 말을 할 그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니가 쌓아가는 담이 자꾸만 높이와 깊이를 더해가
어떤 땐 감히 엿볼수조차 없는 커다란 것으로 느껴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남에 대한 배려가 지극한
어디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친구란다.

혼자라고 끼니 거르지 말고
늦도록 일한다고 잠 시간 놓치지말고.

니가 계획하는 현리의 집이 완성되면 내 재봉틀을 옯겨 놓고
옷감에 찍어주는 니 판화작품으로
근사한 우리만의 작품을 만들려면
너하고 난
아직은 누구보다도 건강해야한단다.

내 친구 정매야!!
몸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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