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에 시들한 풀잎을보고
일어서 보려고 애쓰는 시들은 화초의 모습도 봅니다

길가에서 아직도 갈곳을 모르고
동전 한닢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도 듣습니다

행인의 발길은 여전히 분주한데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스쳐가는 시들은 모습도 봅니다

냄새도 지독하고 을씨년 시럽지만
칙칙한 여름날 처마밑도 그리운날입니다

오늘은 하얀 하늘에서 비가내립니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비오는 그림자만 쳐다보고있으니
뚝뚝 낙하하는 비의 모습을보고

오늘 점심은 시인이 운영하는 우동집에서
모리소바로 식사를 했습니다

한잔술은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두잔술은 여자이게 만들고
세잔 술은 여자를 추하게 만든다고 누가 써 놓았습니다

재미있다 생각을했습니다
정말 멋지게 썼구나 해서
여기에 옮겨 보는 것입니다

차안도 시원해서 좋고 점심도 맛있다 생각을하니
기분도 좋았습니다

문뜩 돈 을 더 벌고 싶은생각이 납니다
이젠 벌어서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주고 싶습니다

몇채의 집도 어늘날인가는 다 팔아서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포도를 달리는 내 차는 시원하고 신이 납니다
우산을 받쳐든 여인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길옆 프라타나스 나무는 더 풍성해 보입니다
이런날 잘가든 영동 고속도로를달려
강릉 경포대도 가서 오징어 순대가 생각이 납니다

비에젖어 뛰어가는 애들을 보니 더 신이납니다
우습고 그래서 빙그레 웃어 봤습니다.

잊었던 갈매기 노래가 들려오는것 같습니다
갈매기 바다위에 .........

그 갈매기가 그렇게 좋아 보였습니다
비오는 포구 모습이 슬며시 눈에 다가 옵니다

금방 서울에서 전화가 오니
이시간 금상첨화가 됐습니다

오늘은 비가오면서
난 사랑의 기쁨을 누립니다.
아득한 사랑의 노래가 들립니다.


************************************************************************************************************


*******************


잠시 나를 되돌아 본다.
평생 나는 많은 직업을 가졌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오늘을 살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우리나이로 18세 정확하게 태어난지 16년 7개월 되던 때
나는 첫 사업을 시작했다. (내 아들은 14년 5개월 16일만에 프로바둑에
입문 개인 사업자가 됐으니 나보다 빠르다)

미국 유학과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의 장학금 및 체제비 일체를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6개월 정도 부산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울산에서 소금공장을 인수하여 첫 사업을 시작
했지만 7개월 정도 됐을 때 사고로 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건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겠다고 낮에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수백편의 시와 3,000매 이상의 원고를 채워서 신춘문예에
응시하기 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내 글을 본 친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리곤 내게 술을 엄청나게 마시도록 하더니 내글을 전부 태워버렷다.
이유는 당장 이 글이 제출되면 당시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글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박정희 같은 불한당이 정부를
전복하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박정희 같은 독재자는,,,,,,,,,,,,,,,,,,,

,,,,,,,,,,,,, 친구들이 놀랠 수 밖에,,,,,,,,,


나는 야간대학에 진학했고 먹고 사는 일이 급해서 낮에는 건설회사에
취업을 했다. 내가 입사하면서 내세운 조건은 월급은 받지 않겠다.
숙소만 제공해 주고 최대한 빨리 건설업에 대하여 익힐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3개월후 나는 조그만 현장의 감독이 되었고 1년후에 현장소장
2년후엔 그회사 수십개 현장의 총괄책임자가 되었고 3년이 되던 해엔
설계,견적,입찰을 담당하는 회사의 두뇌로 자리 잡았는데 73년 22세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자,,,,,,,,,,,,
사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너는 내가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큰 곳으로 가서 네 뜻을
펼치도록 하라면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놨으니 내가 주는
건설장비를 가지고 가서 네 사업을 시작해라,
사장님은 덤프트럭 3대분의 건설장비를 주면서 나를 보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 건설업계가 놀라도록 빨리 성장했고 28세에는 당시의
최고 기술인 지하철공사를 수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나는 손을 뗐어야 했다. 약간의 모은 돈으로 원래 돈을 벌려고 한
이유인 내가 원하던 물리학의 공부와 나사에 연구원으로 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여
충분한 돈을 벌때까지,,,,,, 3년후 친구의 배신, 회사 정보의 경쟁사
유출로 나는 회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이 후 해외 현장을 전전한다.

돌아와서 결혼하고 다시 회사를 차리고 처분하고 도시락 두개를 싸들고
새벽 네시 남산 도서관으로 직행 법학과 씨름했고 대학원에 다시 진학
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몇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3대 안전기관의 하나를 설립하고 내분야 최고의 법인을
세우는 등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없다.
안전기관 역시 정말 힘들어 하던 인간을 도와 발탁하여 중책을 맡겼더니
정부와 손잡고 나를 배신하여 7년간의 긴 투쟁과 승리 후 허탈감으로
3년 이상의 방황이 시작됐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10여년의 힘든
싸움이 나의 나아갈 길을 막고 내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두집 살림을 해야하는 운명으로 직업도 항상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민생고 해결용, 또 하나는 명예를 위하여
내게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형님이 계시다. 그 형님 때문에 어머니가
내 집에 계시지 못하는 것이고 나는 두집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어쩌면 불합리하다 하겠지만 내가 해야할 당연한 일로 아직 한번도
짜증 내본적이 없다. 내 아내 역시 마찬가지고 내가 이혼을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여자라면 어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황 후 재건하는 사무실은 이제 안정을 찾아간다.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평생 여유롭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궁색한 삶은 면할 수 있다. 내 직업엔 정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병이 도진 것이다.
무언가 부딪치고 개척해야 하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도전,
그건 평생의 숙제로 어차피 풀지 못하겠지만 이 병이 나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어차피 나는 첫 사업을 시작하던 18세에서
멈추어 있으니까?

안주해야 하나? 다시 뛰어야 하나?

답은 이미 내려졌다.

버려진 10년을 되 찾기 위하여
내게 안주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고 이루도록 노력해야겠지,,,,,,,

그것만이 나를 지킬 테니까?

당분간 카페에 들리지 못합니다.
항상 즐겁고 유익한 날들이 되소서,,,,,,,,,

_勳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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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운해 <자료출처:지리산통신>

남도기행 2박3일(셋쨋날)

님..보셔요

보내주신 남도기행 2박3일 계획해주신 일정표대로
일산에서 땅끝마을 그리고 완도
완도에서 보길도 그리고 구례 지리산까지,

화엄사에서 노고단과 뱀사골 실상사 그리고 일산으로 돌아온
여정에서 보고 느낀 조국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피력하고자 자판을 두드립니다

늦은 아침 빗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에 잠이 깹니다
간밤에 마신 찬이슬이 깊은 숙면을 취하게 하는 수면제였나 봅니다

어제밤에는 오래도록 별을 기다렸는데 온통 석탄처럼 캄캄할 뿐
하늘은 무심도 하셨습니다

님께서 자랑하시던 고향의 아름다운 별밭이 내게는 그저
어두운 밤하늘 뿐........
간밤에 별들이 숨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비구름이 온통 별들을 감춰 버렸었나 봅니다
늦은 아침을 산채나물과 재첩국으로.. 남도의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스럽고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천천히 체크 아웃을 하고,,빗속에서 화엄사로 향합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계곡의 물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화엄사 입구를 빗 속에 우산을 받쳐들고 걷는 그길은
산사의 아침을 더욱 운치있게 해줍니다

빗 속에서 마주 대하는 이름모를 야생화는 다소곳하게
머리 숙이며 인사를 합니다 안녕?..

수백 간 규모의 그곳 화엄사는 웅장한 대웅전과 여래전 범종 등등..
국보급 보물만도 여러 점..아름다운 노송 ,적송,울창한 대숲,
부처님의 모습도 여러 모습..손을 마주 잡으신 분,양손을 모두 드신 분..
한없이 자애롭고 측은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는 모습..

우리는 빗 속의 화엄사를 뒤로하고,,성삼재 쪽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천은사를 지나고..해발 1100 키로미터의 성삼재를
곡예 운전을 하면서 오금이 저리는 자연 앞의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오릅니다
천은사 지나면서부터 그치기 시작한 비는 오를수록 청정한 하늘로
변하였습니다

하늘은 아주 가깝게 손에 닿을 듯이 가깝습니다
시암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산아래 운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지금 산 위 구름 속에서 신선처럼 떠 있습니다
저 아래 보이는 저곳은 우리가 그리도 아둥바둥하며 사랑과 미움을
반복하고 욕심과 번뇌를 버리지 못하고 지극히 인간답게 사는 곳이구요

이곳은 신선의 영역 같습니다 웬지 낯선 이방인 같습니다
다시 더 높이 올라 성삼재..
아..그곳은 정말 무아지경..구름 속의 산과 산사이의 운해..
그리고 운해의 바다..피어오르며 사라지는 영원의 구름연기여..
나는 그곳에서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착각 속에 빠져봅니다
어제 아름다운 지리산의 별밭은 보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오늘 저에게
이 운해를 보여주십니다

다시 산아래로 내려옵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을 지나
구비구비 심산유곡을 지나 뱀사골 상류를 만납니다
골짜기가 뱀처럼 심하게 곡류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이름..
장장 총길이 14키로미터 울창한 수림..100 여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잠시 발을 담근 계곡의 물은 섬뜩 하리만치 냉기가 감돌고..
계곡의 물빛은 쑥색..

다시 남하하여..우리는 산내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섭니다
님이 멜로 보내주신 그곳 실상사..그곳을 꼭 보라하셨지요
편지에 있는 실상사는 만수천을 건너 님이 어린시절에는
징검다리로 건너셨다는 그곳에는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다리 건너에는 한 뿌리에 세 그루가 같이 자리하고 있는 신기한
오래된 커다란 정자나무와 돌장승 두 분이 실상사 입구를 지키고
서 계셨습니다
얼굴은 두 눈이 튀어나오고, 뭉툭하고 커다란 코에 벙거지모자를 쓰신 돌장승..

평평한 길을 지난 그곳에 천년 사직을 담은 실상사가 오랜 침묵 속에
이끼낀 늙은 나무들과 많은 보물들과 보수하지 않은 오랜 세월
그 모습으로 오염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보물은 청동으로 만든 아주 커다란 좌불상,빼어나게 아름다운 동탑,
쌍탑 ,,보기드문 조각의 석등,동종 등등..

극락암 가는 길..오랜 세월 속에 이끼 낀 담장 기왓장 위에 피어있는
버섯과 들풀,담쟁이는 한없는 연민과 그리움이 무심한 흔적이 배어있었습니다.

졸졸 흐르는 작은 도랑물이 풀숲 사이로 작은 연못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곳에는 잉어들이.. 연꽃이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대숲 속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바람이 불어오고..그곳 도랑물가에는
검은 날개에 몸체는 연두빛 아름다운 물잠자리가 나비처럼 날개를 접고
우아하게 앉아 있더이다

님..기억하시나요?
어린시절 그곳으로 소풍을 가셨다 하셨나요?
참으로 아름답고 정감이 드는 사찰이었습니다

아참,,그리고 절집에 수양회온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이 적토로,황토로
흰색 티셔츠을 염색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았답니다.
염색하여 입은 옷도 보았는데 제주도의 감물들인 그 색이었습니다

기수를 돌려,,인월에서,남원으로 광한루를 보고..전주에서 .삼례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나..일산으로
아름다운 조국을 ,,남도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배려와 우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2001,8.15 일산에서 현정드림.




눈덮힌 뱀사골 <자료출처:지리산통신>
















*감*


동시

감씨를 깨물면
그 안에 숨겨진
작고 하얀
숟갈 하나



저가 말랑말랑 푹 익으면
떠 먹으라고
고이 간직한
쪽 숟갈 하나


이요조





click
흐르는 음악은 모짜르트의 '장난감교향곡'/ 입니다.



















<해골의 속삭임>


내가 X레이같은 눈을 가졌고,
너도 X레이같은 눈을 가졌다면,
나는 네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너도 내 속을 속시원히 볼 수 있지.

그렇지만 너무 잘 보여서 좋을까?
과연 우리 마음이 통할까?
난 네 입술을 보아야 키스가 하고싶고
넌 내 눈을 보아야 내 맘을 짐작할 수 있지않아?

기껏 보이는 것이래야 희미한 얼굴윤곽속에
두개골과 눈구멍, 콧구멍, 옥수수같은 이빨과
턱뼈 움직이는 것밖에 없지않아?
그래, 좀 우습다. 그치?

사실 난 이게 어려웠댔어.
네 표정이 너무 잘 보이는 거있지?
그리고 어려운게 또 있어.
얼굴에 내 마음이 바로 뜨는 거있지?

그래서 난 편해,
재밌기도 하고.
해골인 나와 해골인 네가 마주 보고 있는게...
턱뼈만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하는게...

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네 말이 더 크게 들려.
그리구 여긴 잡음이 없으니
네 말이 더 또렷이 들려.

난 내 맘을 들키지 않고
네 말을 들을 수 있지.
표정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네 말을 음미할 수도 있지.

너도 그래?
하긴 너도 좀 별종이었지.
내가 이따금 얼마나 당황했다구.
그렇지만 지금은 편해.

아까부터 뚫어져라 보고있으려니
네 얼굴이 보일듯해.
너도 내 얼굴이 보이니?
이제 키스해도 될까?


작은큰통.2002.6.5.



"Beksinski's powerfully unique paintings are
such as I have never before seen"

** 벡진스키의 그림읽기**
(열린마당 카페 별장 갤러리에서 옮겨 옴 No:498)





다시 바다를 닮은 그 무언가를 만나고 싶다.
height="450">



바닷강아지



바닷가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도 철썩~~

저녁에도 철썩~

해조음에 나날이 귀가 먹어서

잘 짖지도 않습니다.

"차르르르르~```````"

자갈밭에 바닷물 빠져나는

소리에도 무심합니다.

왼종일 바닷가를 헤집고 다니다가

뼈다귀처럼 바래버린

하이얀 자갈돌 하나

뒤적거려 보다가 이내 시들해서는

수평선만 멀거니 바라봅니다.

바다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바다안에 있는

보잘것 없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는

찝찔한 갯내에 쩔다 못해

뭍 속으로 사라진

또 한 마리 강아지의

향수는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다....그 파도소리의 교향곡을'






이요조


한 삼사년 전인가?
바다가 너무 고팠다.
남편은 실컷 보라고 보라고 동해시로 날 데려다 주었다.

바다를 끼고 거슬러 올라오다가
어느 곳인지
바다가 인접한 동리에서 한 끼니를 때우고는
헛헛한 마음의 끼니를 때우고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멀거니 눈에다 담고 있을 때...

그 때
때에 쩔어
흰색이 변한 갈색의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바닷가 갯자갈밭 위를
천천히 산책하고 있었다.

바쁠 것도...
짖을 이유도....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다 해탈한 듯한
강아지 한 마리를...

난 그 때....
바다를 본 게 아니라
바다를 닮아버린 강아지를
바다 대신 마음의 눈에다 담아 왔었다.





몇년전 시작노트를 뒤져 보며....
글/이요조






























*폭풍의 눈*


병원에서
집에만 오면 불안했다.
밤에는 잠이 오질 않았다.

낮엔...
괜스레 컴이라도 잡고 있어야지 아니면 내 마음 둘 데를 몰랐다.

한 이태전에도
내 아이는 양성이지만..
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주로
청년기에 걸리는 골육종들로
앳된 청소년기 아이들이 있는 암 병동이였다.

청소년기는 뼈에
장년기는 근육에
노년기는 내분비계에 암이 성행했다.

요즘은 많이도 낳지 않는 아이들...
에미들은
암 치료차 들른 병원에서
또래의 엄마들 끼리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그들의 절망과 어두움을 찾아보랴

그들은 즐거웠다.
간호하면서도
울고 있질 않았다.

웃었다
건강한 여늬 사람들과
똑 같았다.

"엄마! 엄마~"
자꾸만 불러대는 아이
"싫어 나 니 엄마 안할래"
......
"저기요 아줌마!"
엄마와 아이는 그렇게 웃었다.

집에가면 집안에서
동네에서 이웃들이
모두 수군댄다고 그랬다.
"저집 아이 암이래"
"어머 어쩜!!"
마치 엄마와 아이는 무슨 죄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고 했다.
눈치보기에도 지겹다고 했다.

그러다가 병원에 와서
같은 처지의 같은 이웃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단다.
그렇게 마음편할 수가 없단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다가설지 몰랐단다.
함께...병원주방에서
아이들 김밥을 말고
함께...횟감을 사다 먹이고
엄마들은 주방에서 모여 앉아
숨겨온 소주들을 한 잔씩 하는 모양이였다.
마치 수확여행나온 엄마와 아이들 같았다.

머리를 박박 민 아이들은
(어차피 보기싫게 빠지므로)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에서 즐거운 경주를 했다.


아니면 어찌 견디랴...
그 시련을...
아...
이제사
그 때 그 일이
이해가 가는 ...
새록새록...수긍이 가는 일인줄..

재차 입원한
병원,
내 아이 곁에 가면..
그 불안 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불면의 밤으로
한없이 뒤척이던 잠이
작은 보조 베드에서는 사라진다.
차렷 자세나 겨우 웅크린 새우잠으로
잠 투정할 겨를 이 없다.
눈에 보이면 덜하다.
막상 아무렇지도 않아 좋다.

키를 늘이는 정아..
양쪽 다리 모두
무거운 이자이로프를 끼운 채
나사를 돌려야 하는데..(하루 네 번)
거꾸로 돌렸놨다.
(나사가 하도 많으니까)
주치의 왈
" 아~~ 키 줄이려고 오셨구나~ "
병실안은 일순 모두
너무 웃어...
배를 잡는다.

그래...
막상 폭풍의 눈 속은 이리도
고요한 거구나
아무런 걱정 근심도 없어 보이는 것이로구나...

나도
딸 아이랑 씨잘때기 없는 이야기로
키들거려본다.
주치의 간호사...흉도 봐가며....
마치 피크닉 나온 사람들처럼,

그랬었다.
폭풍의 눈이였다.
눈,
그 가운데는 오히려
잠잠하고 고요했었다.

반 발작만
벗어나도
숨 쉴 겨를없이
감겨오는
회오리임을....


그 한가운데
늪 속의
죽음처럼
무겁고
깊은 고요임을....


글/이요조








그대여
당신은 아십니까?
폭풍우 속에 그토록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날 때
어찌하여, 나는
더욱 강해지고
삶에대한 확신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풍우를 사랑합니다.
자연속의
그 어떤 물상 보다도
몇 배나 더 사랑합니다.


1912, 8,14. 칼릴지브란.
















*밤의 눈(어둠을 지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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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선술집 간판 <자료출처:네이버 생활과 디자인>

오래 전에 직장에 다닐 때 영국에서 일이지요.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유물들을 세계 각국에서 약탈하여 가지고
그것을 대영제국 박물관에 전시를 하였더군요.

세계의 유명한 유물 중 이집트의 피라밋부터
미이라까지 정말 많은 것을 빼앗아간 대단한
민족이지요.
바이킹의 후예답게!!!!
3000년 전 알프스 얼음 속에서 박제된 양치기
소년의 시체까지 전시를 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지금도 영연방은 전세계 올림픽처럼
100여 개가 되는 소속 국가들이 모여서
체육대회를 한다지요.

그리고 런든 시내에는 수많은 공원과 몇 백년된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된것을 보면 부러움이--

그 중에서도 그들의 음주문화는 Pub이라는 주막에서
시작된다지요.
저두 고풍스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2차로 가끔씩 펍에 가기도 했지요.
거기에서 맥주와
감자튀김 정통 스테이크를 안주로---

중세풍의 낡은 탁자와 의자들, 한쪽에는 당구대와
화살던지기 과녁이 붙어있고, 벽난로와 투박한
맥주잔들이 놓여있는 곳에서 일하고 온 농부나 공장에
갔다오는 사람이나 맥주잔에 감자튀김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었지요.

개인주의인 영국이지만 이펍 때문에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산다고 하는군요.
꼭 우리나라의 대포집 문화처럼--

이펍은 서민들의 사랑방으로 유명시인도
찰스왕세자도 애용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문화속에 비틀즈가 탄생하고,
이펍 때문에 영국인을 인간미 넘치게
한다지요.

영국에선 교회와 펍 없는 마을이 없다고 합니다.
전국에 7만여 개의 펍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양 산업에
속하여 줄고 있다고 하더군요.

펍은 퍼블릭하우스의 준말로서 17세기 전에는 우리나라
주막처럼 숙박과 술집을 겸하였는데 17세기 이후는
술집으로 분리 되었다 합니다.

우리도 힘들고 가슴이 답답할때 저렴한 술집에서 마음을
달래듯 이런 분위기를 비교하면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2차로 호프집과 같다고 할까요?

세상사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삶이 힘들때 형편에 맞게 술한잔 할 수 있는 친구와
호주머니에 따라 벗하고 마실 수 있는 곳은
정말 한국이 최고이지요.

오늘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월드컵 때문에
한국 특집을 내면서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이라고 칭하며
'정열적인 한국.... 음악, 춤, 술을 즐긴다고 소개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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