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여행팁

이런,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하셨다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공항에 일찍 나오셨다구요?
설레는 마음에 서둘러서인지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하고 말았다면,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남은 시간 무얼 하며 보내야 하냐구요?

①,②로 나눠 올립니다.

 

 

◎인천공항 느긋하게 즐기자!!

인터넷 사용 장소


정보통신센터(2층 중앙)에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합니다.

출국장 안에는 4층 동,서쪽 환승라운지와 탑승게이트 12번과 30번 부근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맛사지 받을수 있는 곳




출국수속 전에는 지하 1층 볼링장 맞은편에 있는 발맛사지 숍 (30분 기준 40,000원)을 이용하실 있고 출국수속 후에는 보세구역 4층 동, 서쪽 환승 라운지 옆 맛사지룸에서 발맛사지 및 스포츠 맛사지 등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구두 닦는 곳 위치

☞ 지하 1층

동편끝 사우나에서 구두를 닦을 수 있습니다.

☞ 2층

중앙의 조흥은행 옆, 우체국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500원짜리 동전만 사용가능)

 

어린이 놀이방 위치


출국심사를 마치신 후, 3층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시면 탑승게이트 12번과 29번 옆에 각각 두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출국전 간단하게 샤워할 수 있는 곳(출국장 안)
 

출국장 4층 동, 서쪽 양 환승라운지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용요금 : 30분에 8,000원)

 

 

우체국 위치




우체국은 2층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기 주차장 가는 방법


1층으로 나가셔서 3A나 9B 정류장에서 공항 셔틀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단기 주차요금 : 소형기준 기본 30분 1,200원 ; 1일요금: 12,000원
장기 주차요금 : 소형기준 1시간마다 1,000원 ; 1일요금: 8000원


수하물 보관 위치



출국 수속 전 : 3층 B와 L 카운터 뒤편에 위치
출국 수속 후 : 공항안내카운터 근처에 있는 무인보관함 이용
      (공항안내카운터에 탑승권을 맡기신 후, 무료로 이용)

 

환승호텔 위치



환승호텔은 출국 수속을 마치신 뒤 보세구역으로 들어가시면 4층 동, 서쪽 양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인용 스탠다드룸을 쓰실 경우 6시간 기준 40,000원이며, 탑승권을 소지하신 분이나 환승여객에 한해 이용이 가능합니다.

 

휴대폰 충전할 수 있는 위치



유료 충전소는 1층 서쪽에 있는 편의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료 충전소는 3층 출발층 B 카운터, L 카운터 근처와 출국수속을 마친 후에는 동·서편 안내카운터 주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흡연실 위치



출발층의 경우 1, 2, 13, 14번 출구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착층의 경우 7번과 8번 출구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행용품(가방, 의류, 기념품 등) 판매 매장

3층 중앙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유아 휴게실 위치



1층 A입국장과 B입국장, E입국장과 F입국장사이 3층 D체크인카운터 뒷편과 J카운터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유·기저귀 교체 및 간단하게 씻길 수 있는 시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항 셔틀버스





화물터미널 가는 셔틀버스는 3층으로 나가시면 3번, 12번 출구에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장기주차장으로 가는 셔틀버스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동식물 검역소



동물 검역소는 2층 우체국 뒤편에 있으며, 식물 검역소는 3층 중앙 신세계 백화점 뒤편에 있습니다.

 

해수피아 온천탕


해수피아 온천탕에 가 보려고 하신다면 해수피아에서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습니다. 오전 9시 20분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1A 정차장에서 출발합니다.

 

인 천
국 제
공 항

해수피아 → 공항

 첫차 오전 9:10 막차 오후 6:10 (배차간격 1시간)
 휴일은 8:10 첫차
* 12시 20분에는 운행되지 않습니다.
공항 → 해수피아
 첫차 오전 9:20 막차 오후 6:20 (배차간격 1시간)
 휴일은 8:20 첫차

  ◀ 해수피아 셔틀버스

  셔틀버스 이용요금은 무료입니다.

  대기버스가 없으면 운행중이므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 공항 셔틀버스





화물터미널 가는 셔틀버스는 3층으로 나가시면 3번, 12번 출구에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장기주차장으로 가는 셔틀버스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호텔 리무진 승차장
 
호텔행 리무진은 1층 밖으로 나가셔서 4A나 10A에서 대한항공 리무진을 타시면 됩니다. 

 

 


 
♣ 일반택시, 대형택시 요금
 
교통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점을 유의하시고 톨게이트 비용을 제외 한 미터기 표준요금이 일반택시는 36,000원, 모범택시는 63,000원 정도입니다. 서울시청까지 콜 밴 택시 요금은 톨게이트 비용을 제외한 미터기 표준요금이 대략 42,000원 정도입니다. 
 

♣ 공항버스 안내 (버스노선 안내 참조)

서울역 가는 버스요금은 공항 리무진이 11,000원이고 공항 좌석 버스인 601, 605번은 7,000원입니다.
공항 리무진은 4B, 605번은 6B, 601번은 6A에서 타시면 됩니다. 버스표는 정류장에서 구입하시거나, 여기서 가장 가까운 4번 출구 옆에 위치한 버스안내 카운터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http://www.airport.or.kr/guide/transportation/bus.jsp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tip !

      장기 주차장 가는 방법

      1층으로 나가셔서 3A나 9B 정류장에서 공항 셔틀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단기 주차요금 : 소형기준 기본 30분 1,200원 ; 1일요금: 12,000원
      장기 주차요금 : 소형기준 1시간마다 1,000원 ; 1일요금: 8000원

       

      * 공항 바로 앞에 위치한 단기주차도 어차피 많이 걸어야 됨,

      좀 거리가 먼-장기 주차장을 이용, 오가는 것은 셔틀버스 주차장으로 무료 이용하면 더 편리하다./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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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평대군 묘(麟坪大君 墓) 및 신도비,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인평대군의 제문을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네 임금이 직접 짓고 쓰신 어제어필을
    비석에 새긴 것인데 인평대군묘 좌측에 비각을 짓고 두 개의 쌍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합니다.



    인평대군 신도비

     

     

     

     

    지정번호 : 130
    명칭 : 인평대군묘 및 신도비
    수량/보유종별 : 일원
    소유자(보유자 ): 전주이씨

               인평대군파종중종회
    소재지 : 신북면 신평리 산 46-1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2, 6,5

     

     

     


    묘역은 곡담이 둘러져 있고 묘비1기 상석1기 문인석 4기(소형2, 대형2)향로석1기 망주석2기 장명등1기가 배치되어 있다. 묘역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묘비에는 유명 조선국 인평대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경공지묘 복천부부인오씨부좌(有明朝鮮國麟坪大君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忠敬公之墓 福川府夫人吳氏 左)의 명문과 무술구월초삼일(戊戌九月初三日) 의 건립기문이 있다.

    상석의 고석(鼓石)은 사면에 사자상이 양각으로 조식되어 있고 문인석, 장명등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묘역은 묘전을 장대석으로 치장하였고 장명등은 안상문(眼像文),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하였다.

    원형의 호석을 두른 봉분은 직경 550, 높이 175cm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을 진설할 때 사용하였던 판석이 놓여있고 마주하여 묘비의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문인석은 두손으로 홀을 잡고 있는 모습이며 관복의 앞자락에는 운문(雲文)이 조식되어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60여m 전면하단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총고325, 폭115, 두께35cm의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사실적표현의 정교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은 오정일(吳挺一)이 한것으로 되어 있다.

    인평대군 이요(李 )는 인조의 3남, 효종의 동생으로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서예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어 제자백가에 정통했다. 인조8년(1630)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부왕을 남한산성에 효종했다. 인조18년(1640)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효종1년(1650)부터 4차에 걸쳐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병자호란의 비분을 읊은 시가 전해온다. 호는 충경(忠敬)이며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등이 있다.

    묘역은 1800여평으로 매우 광대한 편이고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어필로 된 치제문비가 있어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인평대군 묘소인지 몰랐습니다.

    한음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묘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경기도 포천 신북면, 경복대학 부근일 거라고 찾아갔는데...

    경복대학을 기준으로 경복대학 우편(남측)에 묘소가 있기에 달려갔더니 .....

    오성과 한음을 찾아서 다니다가 어부지리로 간 곳이었습니다.

    이덕형님의 서원은 경복대학 왼편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묘소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 했고 석양은 날카롭게 눈을 찔렀습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나 친필을 직접 새긴 것이라기에

    궁금해졌습니다.

    글시체를 볼 수 있다기에, 전 보았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도 카메라도 석양빛을 버거워했습니다.

    묘소 둔덕에 올라가니 얼마나 바람이 쎈지 칼바람이었습니다.

    묘소 앞에 인석과 석물이 잘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묘소아래 사당도 열어 보았습니다.

    사당 앞에는 묘소를 지키는 분의 집인지 인가가 한 채 있엇고

    추운 날씨 탓에 텅빈 주차장엔 쌓인 눈이 추위에 엉겨 있었습니다.

    귀한 문화재를 만난 기쁨,

    추운 날시 탓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포천하면 예로부터 물이 좋아서 온천도 유명하고 막걸리도 유명하지요.

    막걸리 두어 잔에 온천욕 보다는 역사탐방을 하고 선조들의 발자취 흔적을 보고

    포천 일동 막걸리에 이동갈비도 아무렴 좋지만....

    쨍한 바람에 역사적 문화체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바쁜 절구질에도 손 들어 갈 짬 있다는데 이 추위에 어느 하루 포근한 날 없을까요?

    자~ 아이들과 함께....우리 떠나 보실까요? 

     

     

     

    글:사진/ 이요조

     

     

     

     

    인석(人石)혹은 석인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무덤앞에는 이런 인석을 두는 걸 우리 선조들은 좋아했습니다.

    무덤을 잘 지키라는 뜻이겠지요.

    인석에는 아주 다양한 모습과 종류가 많습니다. 아마 검색해 보시면 재미 있으실 듯~~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인평대군의 묘소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묘소는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경볻대학 가기전 진입로 1Km 전방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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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중인 아이와 함께 학습탐구 여행하기


    (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오성 이항복(李恒福)


    오성 :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 경주(慶州)
    호 :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별칭 : 자 자상(子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주요저서 : 《백사집》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 ·박사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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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텁텁한 막걸리와 감칠맛 나는 갈비만 논하랴” 한북정맥 산줄기에 기댄 ‘물의 고을’

     

     


    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면서 43번 국도를 타고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축석령을 넘으면 포천시 소흘읍(蘇屹邑)이다. 읍소재지인 송우리는 조선시대에 강원·함경의 양도에서 한양으로 드는 길목이었지만, 소나무가 무성해 ‘솔모루’로 불리던 마을답게 제법 운치 있는 동네였다. 허나 이건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즘은 아파트 공사 차량 등으로 매우 번잡하다. 택지개발이 한창인 것이다.

    소흘과 이웃한 가산면 궁말은 ‘오성과 한음’의 개구쟁이로 유명한 오성대감,
    곧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고향이다. 방축리엔 이항복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금현리 벌판 한쪽의 나지막한 언덕엔 그의 묘소가 있다.

    장난기 많아 해학의 현신으로도 불리는 이항복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당파 속에서 살았으나 어느 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평생을 대처럼 꼿꼿이 살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구하려 힘쓰는 등 집권당파의 부당함에 저항하다 관작을 박탈당하고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유배 가는 길에 불렀다는 이 시조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엔 그의 충심이 구절마다 드러나 있는데, 유배지에서 지은 다른 한편의 한시 ‘雪後(설후)’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참 쓸쓸하다.

    눈 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시내 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다.

    화로에 묻은 불은 열기가 모락모락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유배지 북청의 눈 덮인 산속, 사립문조차 굳게 닫힌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그는 홀로 밤을 구워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그토록 호방하고 장난기로 가득 찬 백사 이항복에게도 이런 쓸쓸한 내면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럽다. 허나 앞길 불투명한 유배지에서 모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유도 엿보인다. 홀로 먹는 그 군밤은 어떤 맛이었을까.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간 그해 5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항복은 곧 복관됐고 청백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살아있을 땐 그토록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죽은 뒤 이렇게 챙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어쨌든 이항복의 유해는 북청에서 이곳 포천으로 옮겨와 금현리 선산에 묻히게 됐다.

    풍수가들은 무덤 자리가 주산인 한북정맥 죽엽산(600.6m)에서 청룡이 평지로 쏜살같이 내려왔다가 몸을 틀어 일어서면서 들판으로 달리다 여의주를 물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오르려는 형국, 곧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라 한다.
    조선조에 8 정승과 3 대제학, 178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주이씨들의 활약은 조선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이러한 명당자리에 이항복을 잘 모신 덕이라고 한다.

    잘 단장된 묘소는 명당이라 그런지 차분한 맛이 있다.
    작은 공장들이 붙어있는 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철마다 피어나는 무덤가 들꽃들이 장난꾸러기 대감의 넋을 위로하는데, 이번에 들렀을 때엔 갑자기 묘소 앞 수풀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의 날갯짓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성대감이 이 가난한 길손을 놀래주려고 꿩을 날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빙긋 웃음이 나왔다.

     

    이상은 검색글인데...어찌나 공감이 가든지,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다 쓰신 듯, 재 검색해서 저자의 이름을 알려니.....실력이 너므 조아 재검색 불가

     

    43번 국도에서 316번 지방도로로 올라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서울 근교의 어설픔이 물결치는 비닐하우스와 공장과 너른 인삼밭과
    들판을 가로질러 1.9Km쯤 달리면 오른쪽으로 가산면 금현리 궁말로 가는 길이 나온다.
    궁말로 들어서면 큰 길 옆보다 더 많은 공장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어 마을 이름 '궁말'이 풍기는 시골의 정취는 찾아 볼 수 없이 산만하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이 항복이 살다가 고을은 풍광좋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을 터이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


     

    바로 이 글도 검색,

    더 말해 무엇하리요. 실제가 딱 그러한데...사람의 느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어차피 내가 글을 빌어 그 광경을 옮겨 쓰드라도 이와 다를 바 없어 이 사람의 글을 도용했다 할 것이고 나는 순순히 오성 이 항복님의 묘소 입구 전경은 남의 글을 빌어 올 수 밖에 달리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무척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신북면에서 잘 가르쳐 주셔서 찾아가긴 했는데, 겨울, 짧은 해는 꼴깍 넘어가 버렸다.

    묘소까지 이정표가 딱 2개,

    그나마 입구 동네가 어둡고 퀴퀴해서 막내 아들 늠이랑 함께 가지 않았으면 이정표도 놓치기 십상 아마도 그 주변을 헤매다가 왔을 것이라~~

     

    LG시그마 주유소 부근이랬는데...건너편 SK주유소 옆에 작은 이정표가 있었다.

    Sk주유소를 끼고 골목길로 진입

     

    이하 설명 불가 .....

     

    다음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숱하게 갔던 길을 되돌리고 다시 묻고.....캄캄해졌다.

    다행히 이정표를 찾았다. 아들이...


    어림짐작으로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마을 어귀에서 동네 사람을 만나다. 동네사람 말로는 외딴 인가가 한 채 있고 바로 그 곳이 생가터란다.

    바로 그 위라고 그랬다.

    .................찾기 쉬울 것 같았다.

    아니~ 다 찾은 거나 진배 없는 줄 알았다.

     

    불도 꺼진 빈 집이 한 채가 있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농기구나 넣어두는 창고로 쓰는 듯한 너와집이었다.

     

     

    그 집 앞에 비가 하나 있었는데...글씨가 없다.

    오랜 풍화작용에 그냥 돌같은 비이다.

    이 비석이 맞겠거니 생각하는데...새로 단장한 비가 나란히 서 있다.

    검색을 하니 산소 초입에 비가 있다고 된 것을 분명 읽고 갔었다.

    벌써  500년이 넘게 흘렀으니~~


    나란히 곁에 있는 걸로 어림잡아 아래 사진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 비를 재건립한 듯 하였다.

    구릉 아래 평지에 세워져 있는 비(묘소와는 200m 정도의 거리)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한문에 능통하지도 않지만 비석글은 커녕 어느 묘소가 어느 묘소인지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양 언덕으로 묘소가 빽빽하다.

     

    한쪽 둔덕에 대충? 15~20기씩? 무덤들도 다들 잘 가꾸어져 있다.

    무덤마다 비석마다 높은 관직을 했는지..비석들은 갓머리를 쓰고 있고 묘소앞에는 인섯(석인)

    들이 각자 제 주인 무덤을 지키느라 옹송그린 추은 겨울 밤이다.

     

    오른 편은 대충 훓어보니...그렇게 오래된 비석들은 없는 듯 하여 골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구릉 입구에 크고 시커먼 향나무가 길을 가로 막을 듯 서 있었다.

    무덤들은 양지쪽 잔디가 좋아서 쌓인 눈들은 다 녹았지만....

    산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순간...

    20m 전방에서 뭔가 휙 나타났다.

    일순 멧돼진가 싶어 놀랐으니...개처럼 다리가 긴 걸로 보아...사슴이나 노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

    아무튼 아무리 묘소가 좋아도 기분은 으스스했다.

    앞 글에서도 찾아 간 분은 까투리에 놀라 웃었다고 했지만  음력 11월 20날 밤은 더구나 묘지뿐인

    산 속에서  좀 머시기 했으나 ....산으로 스적 스적 오라갔다.

    아들을 끌고 방금 뭔가 산 쪽 숲 사이로 사라진 윗쪽으로 올라가 후래쉬를 터트렸다.

     

    아니면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에.

     

    선조들 묘소 위로는 자손이 누울리 없으니 그저 생각한 것인데..

    집에 와서 검색이미지와 일치 했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참으로 세월은 무섭다.

    500여년만에 돌도 풍우에 삭아 내리다니,

    곰팡이 피 듯. 검버섯이 피는구나, 돌도 늙으니...


     

    부인은 권율장군의 딸이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산 둔덕 밑, 비석(상)까지는 차가 갈 수 있었던 길,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그 외 다른 곳에 있어 둘러보지 못했던  오성 이항복의 '화산서원'/다음 기회에 찾아 볼 기약을 하며,

     

    ...............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 46호
    지정년월일: 1975년 9월 5일
    소재지 : 가산면 방축리 산 16-1

     

    창건 당시에는 백사서원이었으나 지금의 자리인 '꽃뫼'로 이전하면서 화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1868년(고종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이때 모시던 위패를 땅에 묻었다가 포천유림에 의해 향사를 이어왔으며 사우인 인적전을 복원하고 지속적으로 동·서재 담장, 내·외삼문, 동·서협문, 각 세칸의 필운재와 동강재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1580(선조13)알성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승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입니다. 이항복 선생의 영정과 '문충공배사이항복'이라고 쓴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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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개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0호인 용연서원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선생과 용주 조경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있는 서원이다.

     교통안내
      자가용 : 포천동에서 운천방면 43번 국도 기지리에서 좌회전 344번 지방도 이동 직진,
      신평에서 우회전 진행

     

     

    1561(명종16)~1613(광해군5)

    포천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5㎞쯤 가면 “서원말” 입구라는 돌 표지판이 왼쪽으로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약 1㎞쯤 가면 신북면 신평리 서원말에 이릅니다. 이곳에 임진란 때 명재상 한음 이덕형과 대제학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청백리 조경을 배향한 용연서원이 있습니다.

    이덕형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급하였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만을 위하여 지혜와 정력을 받쳐 난국을 헤쳐나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은 세 정승중의 한분이십니다.
    임진왜란하면 이순신과 권율을 생각하는데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분은 유성룡이고 이 두 장군이 공을 세울 수 있게 정치적으로 뒷받침한 분은 이항복과 이덕형입니다. 이덕형은 포천 신북면 용연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이덕형의 자는 명보(名甫), 호는 한음(漢陰)입니다.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입니다.
    포천시 자작동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며 양사언 문하에서 수업하고 1580년(선조13) 이항복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홍문관에서 이항복과 같이 근무하였는데 당시 대제학이던 율곡선생이 두 사람을 보고 장차 이 나라의 동량이 될 인물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박사, 수찬, 교리 등을 거쳐 이조좌랑, 대사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25) 31세로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하였습니다.

    1573년(선조26) 병조판서에 승진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 당상을 겸임하였습니다.
    1595년(선조28)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부체찰사(副體察使)를 지냈으며 1598년(선조31) 38세로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서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訓練都監 都提調)를 겸임했습니다.
    1601년(선조3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후의 민심수습과 군대정비에 노력하였습니다.
    1602년(선조35)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06년(선조3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1613년(광해군5) 정인홍, 이이첨의 무리가 왕의 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이 역모를 한다고 꾸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였습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폐모론을 일으키니 이를 극렬 반대하다 모든 관직이 삭탈되자 양근(지금의 양평)에 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가 덕형은 필마단기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한 것은 한몸을 바치어 순국하자는 의지요, 명나라에 청병하여 나라를 구한 것은 청사에 빛날 공훈이라 마땅히 공신록에 책록되어야 한다는 유시를 내렸으나 일단 이의가 발의되었으니 책록을 받지 않는 것이 “선비”의 길이요 신자의 도리라 하고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한음의 고상한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음 : 이덕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
    호 : 한음 ·쌍송 ·포옹산인, 시호 문익
    별칭 : 자 명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작품 : 《한음문고》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정확성 검색 이미지.

     

     

    1692년에 '용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경기도 내 남인(南人) 세력의 유력한 근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화를 면했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사우와 강당이 남아 있다. 사우에는 이덕형과 조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주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제도를 새로이 하고 관리를 등용함에 공평하였다.
    숙종 17년(1691)에 처음 세워졌으며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되었다.
    그 후 용연서원은 경기도 내의 성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해왔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한음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안전하였다.
    처음 서원이 세워질 당시에는 사당· 강당 · 동재·서재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사당만 남아있다가 1986년에 강당을 복원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앞면 1칸은 퇴칸 으로 개방하여 제사기능에 들어맞도록 하였다.
    양 끝칸의 양쪽 벽에는 이덕형, 조경 두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가운데 칸의 벽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경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풍양(豊壤)
    별칭  자 사척 시호 장의(莊毅)
    활동분야  군사
     
     
     
     
    본문
    본관 풍양(豊壤). 자 사척(士惕). 시호 장의(莊毅).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부사(江界府使) 때,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優待)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황간(黃澗) ·추풍(秋風)에서 싸웠으나 패배, 그 뒤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상처를 입었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水原府使)로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율(權慄)을 응원, 이듬해 권율과 함께 행주싸움에서 대승,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이 되고, 그 해 훈련도감의 설치로 우영장(右營將)을 겸임, 1596년(선조 29)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나는 물론 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한다. 통상일반인들은 용연서원 전체가 이덕형(한음)만 모셔진 것으로 안다. 안내도 없이 서원 사당에 들어섰을 때 솔직히 좌우로 영정사진이 전혀 다른 두 사람임에 놀랐다. 어느 분인지는 검색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그냥 왔는데... 이런 일이 있나? 서원을 다녀간 사람들의 오보인가 보다. 왼편의 좀 젊고 둥그스름하고 잘생긴 붉은 옷 입은 사람을 이덕형이라 (대개는)내 세웠다. 내가 알기로는 붉은 옷은 무관을 뜻하는 것 같은데, 오른편 영정은 푸른 옷을 걸치고 연세가 지긋하셨으며  깡마른 얼굴에서 느껴짐이 냉철함을... 포천시에서 꾸미는 홈페이지에는 물론 깡마르고 연만하신 분의 사진이다. 어째서 문무가 나란히 한 곳 서원에 모셔지게 되었는지... 다만 깊이 알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또 하나 이번 일로 재미있는 사실을 안 것은 조경이 권율장군을 응원해 행주산성에서 대승했다는데.. 권율장군의 딸이 바로 오성(이 항복)의 아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당연히 친분이 있고 막역한 세 사람임에 분명하다.

     

     

     

     

    오성(이항복)은 가산면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화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한음(이덕형)은 포천읍 자작리에서 출생하여 신북면 소재 용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는 우리시의 명현으로서 맑고 큰 눈을 가지고 재치가 넘치는 어린 도령의 모습을 통하여 어린이에게는 미래의 꿈과 희망을 주고, 어른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용연서원 전경

     

    .
    .

    강당 안 / 龜(땅이름 구)가 뒤집혀 있다.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아 그 후손들은
    이 일대에서 아직도 넉넉하게 잘 사는 것으로 검색글에서 읽었던 것 같다.
    서원에서는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대대로 선출하는 듯 강당에는 사진이 순번대로 걸려 있었다.
    그 직책을 **라 하던데 ...검색까지는 하고(읽고는/재검색 난이도 ㅎ~) 잊었다.
    아마도 성씨가 다른 걸로 보아  덕행이 높으면 그 외손들 중에서도 선출 되는 듯...(제 생각)


     

       

      ▲ 사당의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입니다.
      옆에 붙은 판자를 '풍판'이라고 하는데 그 밑 부분을 둥글게하기도 하고
      직선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풍판'의 형태도 지붕의 형태처럼 윗쪽은 둥글게 하는 형식이 많고
      경상도 지역은 직선으로 나타내는 게  그 특징 같습니다만(검색 후, 제 생각)
      풍판의 역활은 비바람을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재가 길면 무위사 극락보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처럼 지붕이 좌우로 쭈욱 길게 나오니
      비바람이 어느정도는 들이치지 못하겠지만,
      목재난이 심각했던 조선조의 맞배지붕들은 그렇게 긴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지붕의 좌우를 짧게 하고, 대신 풍판을 댔던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겠지요.

       

      좌우로 영정 사진이 둘 있었는데...

                                                             용주 조경선생           

       

       

                                                                이덕형선생

       

       

       

       

       

       

       

       

      찾아가는 길에 /경복대학 오른 편, 경기도 포천 신북면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지난 2005, 을유년의  닭은 문제의 알을 많이도 낳은 알의  한 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김치 기생충알 파동, 줄기세포 난자(卵子) 파동까지~
    한국사회를 집단 우울증으로 까지 몰고 간...

     

    12월 나 역시 모질게도 우울했다.
    맨 처음 황우석 박사의 손을 쉽게 들어 준 나는 초지일관 분명 말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혼자 생각하며 반드시 기대에 부응 할 옳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 했었다.

     

    한국의 과학자들의 관계는 매우 좁다고 했다.
    몇 안되는 과학자중에서도 특히나 황우석과 노성일은 예사 친분관계가 아닌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한다.
    나는 11월서부터 불거져 나오던 사건이 12월내내 내 마음까지도 뒤흔들어

     '누가 암까마귀인지 누가 숫까마귀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문득 오성과 한음의 관계가 떠 올랐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부터 배우던 오성과 한음
    경기도 포천 어디쯤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검색을 하고 12월 21일 눈 온뒤 매서운 날
    막내 아들넘과 같이 포천으로 향했다.

    먼저 그나마 찾기가 쉬운 한음 이덕형의 '용연서원'부터 찾아갔지만 ,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제 글은 맨 아래, 위치로 연결)

     

     

     

     

     오성과 한음은 누구인가요?
    조선 시대 중기의 인물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오성(鰲城)이라는 호를 가진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이라는

    호를 가진 이덕형(李德馨)이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우리에게는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라는 일화로 오랫동안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이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親舊)로 지내면서 장난(作亂)이 심(甚)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傳染病)으로 일가족이 몰살(沒殺)한 집에 시체(屍體)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膽力)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부인 : 오성이 한음부인(夫人)과 정(情)을 통(通)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부인을 오성을 초청(招請)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부감(新婦)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음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政丞)까지 할 것이란 예언(預言)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칙간(집x則間)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칙간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따.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놓았던 정을 도로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은 방문에 주먹을 찔러놓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 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문학으로서 가치가 있다.
    내용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그외의 이야기

    어느 시골 길을 지나다 똥이 마려워 똥을 눕자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러자 하는수없이 길가에서 앉아있다가

    번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쓰고있던 흐름한 번거지를 버서 그 똥을 덮은 다음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기 금으로된 새가있으니

    꼭 누루고 있어요 하면서 그 곳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그 지나가던 사람은 오성이 오지않자 모자 밑에서 있는

    금새를 손을 넣어 꼽잡아 주웠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인변, 떵이었으니.....!

     

     

     

     

     

     

    :+:+:+:+:+:+:+:+:+:+:+::+:+:+:+:+:+:+:+:+어른들의 오성과 한음:+:+:+:+:+:+:+:+:+:+:+:+:+:+:+:+:+:+:+:+:+:+:+:+:+:+:+:+

    오성(鰲城) 이항복과 한음(漢蔭) 이덕형의 우정(友情)

                   

     오성(鰲城)은 바로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 명종 11-광해군 10) 선생이며, 그의 아호(雅號)는 백사(白沙)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서 장인(丈人)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더불어 전란(戰亂) 극복에 힘쓴 결과,

    호종(扈從) 1등 공신(功臣)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어,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그를 오성대감

    (鰲城大監)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최종 벼슬은 영의정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변호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적극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死後)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입니다.

     

     오성이 함경도로 귀양가는 길에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인 철령(鐵嶺)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어, 후일(後日) 이 시조 내용을 광해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령(鐵嶺) 노픈 봉(峰)에 쉬여 넘난 져 구룸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사마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다리.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3

     


     오성 이항복 선생의 절친한 친구가 바로 한음(漢蔭) 이덕형(李德馨) 선생입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 명종 16-광해군 5)은 아호가 한음(漢蔭)이며, 오성 이항복과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명군(明軍)이 오자 그들을

    맞이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서울 수복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한 죄(罪?)로 파직되어 병사(病死)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들은 광해군은

    울면서 한음을 복관(復官)시켰다고 합니다. 한음의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입니다.

     


     일찍이 한음(漢蔭)이 명(明)나라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러 갈 때 그와 오성(鰲城)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성(鰲城)은 친구 한음을 전송(餞送)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우리나라 의주(義州)]에서

    찾게나.”

     


     한음은 대답하기를,

     “아닐세. 만일에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거든 자네는 나의 시체를 노룡[蘆龍 ; 명나라 황성

    (皇城)]에서 찾도록 하게.”

     


     말을 마친 두 사람을 굳은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고 합니다.

     서로의 사후(死後)까지 부탁하며 비장하게 작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우국지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던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 제거와 인목대비 폐출 사건 때 이를 반대한 대표적 충신이었고, 오성이 탄핵을 당해

    북청(北靑)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자 평생의 지기(知己)를 잃게 된 한음은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진 후 연일 귀가(歸家)할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합니다.

     


     이 때 그가 지은 시조(時調)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큰 盞(잔)에 가득 부어 醉(취)토록 머그며서

     萬古英雄(만고영웅)을 손고바 혀여보니

     아마도 劉伶(유령) 李白(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0

     


     이렇듯이 오성(鰲城)과 한음(漢蔭)은 서로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났지만 평생토록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유별나게 돈독했던 우정에 관한 숱한 일화(逸話)들은 지금까지도 야담(野談)으로 각종 책(冊)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객지(客地)에서 만난 사이에 서로 마음이 통하면 10년 미만(未滿) 차이의 범위 내에서 벗으로 지냈으며,

    10년 차이가  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兄)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는 공자(孔子)님과 주자(朱子)님도 인정하신

    관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전통을 오래도록 지켜 내려왔습니다. 

     


     특히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는 동갑내기 출생이 드물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 입학하면 다섯 살 정도 차이

    나는 동급생(同級生)이 많아 서로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고,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장기간 존속했던 군사 문화(軍事文化)의

    영향으로 군대에서 군번(軍番) 순서를 따지듯이 요즘에는 친구도 한두 살 차이 범위 내에서만 사귀게 되어, 그 이상만

    차이가 나면 무조건 형(兄)이나 선배(先輩)로 깍듯하게 대접하는 신풍토(新風土)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스운 것은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시어머니 언행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70년대와 80년대의 이른바 386세대의 운동권 출신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면서도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선후배사이에

    일일이 학번(學番)을 따져서 한 학년이라도 차이가 나면 군대(軍隊)의 고참(古參)과 졸병(卒兵) 관계처럼 서로를 상대

    (相對)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관행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386세대가 젊은이들의 주류(主流)가 되면서부터 보다 널리 일반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아무리 대학교 입학 선배라 할지라도 후배가 선배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는 요청을 하기 전에는

     선배가 함부로 후배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무조건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고, 심지어는 학과(學科) 후배나 동아리(서클) 후배들에게 체벌

    (體罰)까지 加(가)하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도 입학년도(入學年度), 즉 학번(學番)이 늦어 후배가 된 사람에게 기강(紀綱)을 잡겠다며

     매를 때리거나 함부로 하대(下待)를 한다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인권적(人權的) 측면에서 이보다 더 부당(不當)

    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해 상반기(上半期) 연예가(演藝街)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는 ‘방송국 개그맨 선후배 구타사건’의 경우도 알고 보니,

    나이가 한참 어린 선배가 나이 많은 후배 개그맨을 구타하여 입원까지 시킨 사건이었다더군요.

     30년 군사문화의 잔재(殘滓)는 역설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선후배간 질서에까지 심대(深大)한 영행을 끼쳤고, 입학

    년도(入學年度)의 학번(學番)이나 나이 한 두 살 차이 때문에 양자(兩者)가 종속관계 내지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악습

    (惡習)은 이제 너무 일반화(一般化) 내지 고착화(固着化)한 감(感)이 있습니다.

     


     정녕(丁寧)코 현대인(現代人)들은 민주화(民主化)가 이루어진 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면서 우리의 선인(先人)

    오성(鰲城)과 한음(漢蔭) 두 분처럼 서로 마음에 맞으면 나이 몇 살 따지지 않고 평생지기(平生知己)로서 지낼 수 없단

    말입니까?

     

    예문/검색글 포함

     

     

    '용연서원'은 굳게 닫혀있었고 뭐라고 써 논 글은  겨우 새겨 듣고는 담배가게로(슈퍼) 갔더니

    안내도 하지 않고 선뜻 열쇠를  건네 준다.

    "신분증을 못 가지고 왔지만 서원 사진을 좀 찍을까 하려고요" 란 말이 전달이 됐나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 간 서원은 한음 이덕형의 초상화와 제사드리는 위패와 문중에서 선출한 

    서원을 감찰하는 이들의 사진이 아래 준비하는 제당에 걸려있었고

    몇가지 전해 내려오는 제문을 새긴 목판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한음의 서원을 보고 오성 '이항복'의 묘소를 어렵게 (위치가 찾기 어려움)물어 물어(신북 면사무소에 문의)

    찾아 들어가니 시간은 그리 깊진 않아도 인가가 없으니 캄캄절벽이었다.

    그나마 눈이 있어 좀 덜한 것 같아 보였다. 쌓인 눈을 밟고 가지니 뽀드득 뽁뽁...소리가 났다.

    "어머니...어두운데...어느 게 '오성'님의 묘손지 알아 볼 수 있겠어요?"

    그 부근 묘소는 이씨의 선산으로써 포천 국회의원 이한동님의 선소인 듯 두 언덕을 나뉘어서 수십개의 봉분이 

    너무나 잘 손질되어서 막상 어느 게 '이항복'님의 묘소인지 구별이 안갔지만,

    "따라 오너라 본시 조상의 무덤 윗쪽에다가는 자손의 묘를 쓰지 않는 법이니 맨 위에 있는 묘소일게다"

    어림잡아 올라갔더니 어둠속에서 산짐승이 후다닥 놀라 숲에서 뛰어 달아난다.

    혹? 멧돼진가 싶어 겁이 더럭났으나 다리가 긴 모습이 건들건들 뛰어 가는 것으로 봐선 오루나 사슴 뭐 그런 것

    같아 보였다.

     

    무섭기도하고 대충 사진을 찍어서 집에서 검색사진과 비교를 하니 역시나 내 말이 맞긴 맞았다.

    맨 위에 계신 것이었다.

     

    이로써 오성과 한음의 발자취도 밟았는데...오성 이덕형님의 서원도 있다한다.

     

     

     

    오성과 한음 1,2,3으로 나눠 올리겠습니다.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Bar ? & Cafe ? or  차이니스 레스토랑 ?   로맨틱한 분위기~


     

          

    Peeona + Sauce 187

     

     

     
    ...이름부터 특이하다.
    ...피어나 프러스 소스 187?
    ...이렇게 읽음 되나 ?

    ....되게 어렵다. 이름이,

    ....그러나 그 이유는 단연코 있었으니...

     

    ....‘Peeona’란 이름을  듣고

    ....어느 나라 말인가 싶었는데 우리말이란다.

    ....우리말 ‘피어나’의 발음을 영어식으로 풀어 쓴 것.

    ....그 이름대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이 항상 피어나는 곳이다.

    ....어눌하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꽃과 맛이 어울린 집이란 뜻일 것 같다.

    ....이름그대로 꽃과 귀한 소스의 맛이 살아있는 집임에 틀림없다.

     

    ....혹시 마음에 담아 둔 연인이 있다면 식사와 함께 자연스레 (식사 전에 부탁한) 준비된 꽃다발을 그녀에게 안긴다면?

    ....이런 분위기있는 장소에서? 이런 맛난 레스토랑에서? .....물어 보나마나한 입 아픈 일일터~ (어디 타임머신 읍쑤?)

      저녁을 먹으러 들렀는데, 웬 꽃집?  뜨아하게 만드는 꽃 터널, 기분이 가히 나쁘진 않다.

      식욕보다 호기심 궁금증이 먼저 밀려든다.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나무 계단 입구부터 심상치 않더니  실내에 들어서자 연두색 장미인 슈퍼그린과 커다란 심비디움이 화려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이곳은 플라워 숍, 차이니스 레스토랑인 Sauce 187, 플라워 카페인 Peeona가 함께한  플라워 테마 공간. 입구의 플라워 숍에 전시된 꽃들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밝혀주고 곳곳에 생화가 장식되어 있다.
      가볍게 차를 마시러 온 손님들도 꽃을 구경하다가 꽃다발을 하나씩 만들어간단다.

      왜 아니랴 나도 그러고 싶다.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 장식을 이집에다 부탁하면 거의 환상이겠는걸....

       

      차와 커피뿐 아니라 스테이크 메뉴와 중국요리도 같이 맛볼 수 있는 분위기 독특한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다. 

      중국 출신의 조리장이 딤섬과 특선 중국요리를 선보이고 있어 모임 장소로도 적당하다.

      영업시간 플라워 숍은 오전 8시부터, 카페는 오전 10시~밤 12시 특이사항 일주일에 세 번 열리는 플로리스트의 플라워아트 강좌를 신청할 수 있단다. 물어보진 않았지만...아마도 주인이 요리와 꽃을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상반(相伴)관계, 그런 사람인가보다. 나도다. 나도 그러고 싶은, 요는  희망사항이지만....

       

      .

       

      연말  N서울타워 '빕스'를 허탕치고 1월1일 신정에는 성북동 Peeona + Sauce 187 에서 새해를 가족과 함께 장식~  딸아이가 좋은 데라고 해서 간 곳이다. 시티N에서 맛집 소개를 잘도 하더니만 음식을 두고 사진을 찍는다는 게...손님이 앉아있는 음식점을 찍는다는 게 예삿일이 아닌가 보다.  사진이 죄 흔들렸다.

       

      아빠가 약주를 좋아하시니 공부가주를 주문했다. 125ml짜리가 12,000원이란다.

      나도 먹어보니 웬 걸 달착하면서 개운한 게 39도짜리라곤 믿기지 않는다.평소 술이라곤 입에도 못 대는데.. 어쩌면 내겐 독주가 더 맞을지도(ㅎㅎㅎ~ 한 번 고려해 볼 일이다) 딸아이가 지난 가을 몽골여행에  모래사막에서 낙타타기, 초원에서 말 타기에 너무 지쳐 밤이면 너무 춥고 몸도 으슬거려  묘령의 술을 한 잔 받아 마시고는 잘 잤다는.....그 주범이 바로? 우선 먹기에 맑은 맛이 목으로 술-술~  가볍게 잘 넘어가는 듯,  내 입맛에도 딱이다.

       

      여느 중국집같이 빨강천 일색이지만...거슬리는 빨강색이 아니고 품위 있는 버간디(와인)색이다.

      그릇을 포개어 놓은 곳을 (사진/아래 右上)보니 그릇 사이사이 붉은 천으로 포개포개 넣어둔 것이 왜 맘에 끌리는지....참말로 그릇을 포개어 둔 살강도 이렇게 멋스럽게 변할 수가 있다니....

       

      정말 맛있는 건 누룽지 탕이었는데...사진빨은 영 형편없고(에혀 맛집 탐방 실습은 꽝이다.) 실은 예전부터 누룽지탕 맛은 너무 좋아해서 연구?랄 것 까진 없지만 ...직접 만들어 볼까하고 알아본 바로는 중국요리 기본 재료로 구입할 수 있는데...찹쌀로 누룽지처럼 만들어 재료로 파는 것이란다. 그러니까...맛나지 무슨 보통 누룽지가?  그런 맛을 낼 리 만무하잖은가?

       

      탕수육은 별로 달진 않았는데...마치 고기정과처럼 들면 핏자에 치즈처럼 엿물이 하얗게 늘어나는 게 첨 봤다.  맛있다.

      메인 식사는 간단하게 면 종류와 게맛살 볶음밥 정도로 3개만 시켜 나눠 먹고도 계산은  술값 1,2000원 빼면 일인당 2만원 꼴이다.

       


       

       

       

       

      아래 야채를 그냥 데쳐낸 듯한 요리명이 '비타민'이라는데 무슨 소스를 넣었는지 맛이 거의 환상이었다.

      이집 이름이 'Sauce 187' 가히 짐작이 간다. 소스가 187가지나 된다는 그런 뜻인가?  모양은 그냥 데친 나물 같은 데...대체 그 소스는 무엇이었을까?

      탕수육만 해도 그렇다. 야채가 하나도 없이 스테이크처럼 넙적한 모양이 들면 물엿? 아니지 빳빳하니까..

      설탕? 그런 맛도 아닌데...여튼 달콤한 줄이 직-지익 늘어나는 게...핏자의 치즈를 연상한다면 될까? 재밌고 맛난 음식이다.

      이집의 특징은 풀코스보다는 그저 편한대로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한다는 데 있다.

      메뉴판을 보고,  선택한다는... 주문하면 대량이 아니어서 조금씩 여러 종류의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동반 친구들 모임 회합, 신년조례회 정도도 무난하겠다.

      좌석은 넓고 코너별로 분리되어 있어서 카페 혹은 레스토랑 분위기와 흡사하다고 보시면 된다.

      물론 연인이랑 단 둘이...차를 마시거나 음료, 간단한 술도 가능하니 언제 대학로에 나가는 길 있으시거든 한 번?

      (기본택시요금) 

       

      분위기 excellent!

       

       

       

      글:사진/이요조

       

       

       

       

      공부가주(孔府家酒),

      공부가주는 2,000여년 전인 명대부터 양조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술은 공자 집안에 의해 계승되어 공자의 제사에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청대에 황제가 맛보고 술이 너무 맞있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그후로부터 계속 궁에 진상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500ml 125ml 도자기 병에 든 공부가주는 알콜도수 39도짜리의 빼갈종류에 속하는데 그 특이한 향이 우리 입맛에 맞아 한국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는 술이다.
      공부가주는 말 그대로 공자가문의 술이라는 뜻인데 공자가 직접 술을 빚기 시작했다는 설도있고 그 전부터 가문에서 내려오던 술이라는 설도 있다.
      이 술은 중국에서 제삿술로 많이 쓰이고 있고, 값이 비싸지 않아 우리나라 소주처럼 서민들에게 친근한 술이다.
      공부가주는 1987년 중국포장장식평비회에서 금상을 수여 받았고, 제5차 우질주(優質酒)로 은상을 받았다. 공부가주는 중국 내의 명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외국에서도 유명한데 이 술은 중국의 백주중 생산량이 제일 많은 술중의 하나이다.

      39도이면 사실 고량주중에서는 순한 편이라 할 수 있고 향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죽엽청주처럼 뒷끝이 달지 않아 입맛에 딱 맞는 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서민적인 술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서민술의 대표인 소주도 호주에서 마시려면 한병에 거의 이만원 가량을 지불해야 하고 높은 도수를 감안하면 지금 이 술을 마실때 내는 비용이 과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고량주 등을 마실 때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타는 듯한 독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위스키보다는 동양적인 고량주나 민속주가 입맛에 더 맞는 편이다. 마실때는 독하지만 깰 때 뒷끝 없이 깨끗하기 때문에 더 좋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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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식/리치(과일:현지에서는 여지)

       

      위치 성북동 언덕 삼거리

      전철 4호선 한성대앞 5번출구(성북동사무소)로 나와서 계속 직진 1km지점 쯤

      외환은행 이층 ☏ 02) 741-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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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렸다. 이순신이 향수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그를 예찬하는 현상은 오늘 정치인들에 등을 돌린 민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기침체와 우울한 현실정치에 식상한 국민들은 이순신같은 영웅을 갈망하고 있다.  그는 권력다툼에 빠지지 않았고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노량해전에 온몸을 던졌다. 요즘 ‘이순신 신드롬’은 정치,경제, 문화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다. 이순신에게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그리고, 경제인들은 이순신에게서 CEO 의 자질을 배우자고 한다.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듯이  선조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이순신을 의심하고 제거하려한다.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답답한 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사랑했고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그는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우직스럽게 나라에 충성하는 삶을 살았다.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하기 위해 권세가의 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당시는 대과에 급제해도 권세나 세도의 문중에 드나들지 않거나 끄나풀을 잡지 못하면 벼슬에 오르지 못하던 때였다. 당시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가 되어 공의 사람됨을 알고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으나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애석해 하자 이순신은 “일가간에는 서로 볼 수 있지만, 그 분이 지금 상당한 지위인 이조판서로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무공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지덕을 겸비하였던 문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조에서 그의 재능과 뛰어난 시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바닷가 저무는 가을빛에
         추위에 기러기 높이 날아 진을 쳤도다.
         근심하는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
         새벽달만 활과 칼에 비치는 도다.

        해진 영중에서 나라 걱정을 하느라 가을 풍경 속 저녁놀 비끼는 하늘의 안행에도 전진을 연상하고 잠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새벽에  싸늘한 달빛이 활과 칼날에 비치는 것을 예리한 시적감각으로 표현했다.
        그의 시조에서 애끓는 애국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그가 효자였던 것은 난중일기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인군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죄를 받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했더니 어버이 또한 가셨도다!”

        오늘 이 시대는 이순신 같은 인물을 갈망하고 있다. 모처럼 한국인의 가슴에 피어오른 이순신신드롬이 모든 분야에 확장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들이 많이 배출되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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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02 08:11:28

       

      일출과 일몰을 함께,

       

       

      ♨ 추울수록 좋다 겨울온천!  ☜ *스파비스온천탕 사진 click~

      에 연이은 두 번째 글

       

       

      1월1일은 첫 날이 주일인지라 가족과 함께 하느라 일출을 보지못해 애석해했다.

      그랬는데...

       

      그는 애주가인지라 어디든 나갔다하면 돌아 올 때는 언제나 내가 운전해야만 한다.

      1월1일 저녁엔 눈발도 좀 날리다가(높은 산 등성엔 눈) 비도 좀 흩뿌리다가 하니.....

      마눌 운전이 불안하다고

      올라오는 길은 차도 밀릴텐데 편하게 기차여행을 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기차예약을 했다.

      (알고보니 장항선은 예약없이 대체로 가능...무시 때는 그냥 나가셔도 무방)

       

      http://www.korail.go.kr/2005/html/ticket/index.html  ☜ 기차 예약안내.

      http://www.barota.com/barota_index.html ☜ 뭐든지..'바로타' 탈 것 예약 안내

       

       

      온양, 스파비스 테마온천~

      기차는 용산을 시발지로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있었다.

      아침에 전철을 타겠다고 출발지인 용산까지 나가는데...이런, 어제 못 본 일출이다.

      분명 병술년 새해들어 처음 만나보는 일출이다.

      유난히 붉디 붉다. (08:11)  

       

      기차는 용산역을 출발지로해서 영등포, 수원을 거쳐......... 장항까지 가는 장항선이다.

      용산(출발)→ 온양온천역(도착)을 검색하면 된다.

      새마을과 무궁화가 있는데   시간은 ▲(上)기차예약안내↑를 참조하시면 되겠고

      용산에서 온양온천역까지 요금은

       

      ☆새마을호/소요시간 1시간 19분:일반요금/9,100원

      ☆무궁화호/소요시간 1시간 28분:일반요금/6,100원

       

      ★ 기차편 이용을 참 잘했다 싶은 게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는 둘 다 심히 지쳐 나락같은 잠에 떨어졌다.

      남편들은 가족들과 놀아주느라  온종일 피곤을 무릅쓰고 상행길에 밀리면서 졸음을 쫓느라 고생하느니

      연계만 잘 된다면야 기차가 당연히 편할 것 같다.

      짐이야 고작 수영복 정도면 다 해결될텐데.....기차여행 방법을 단연코 강추!!!

       

      아니면 어린이를 동반할 경우 서울, 2곳에서 정기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해도 좋긴하겠다. 미리 예약 필수,

      대신 중간에 어린이 학습관광이나 온양시내에서 식도락을 즐길수 없다는 점이 흠이긴 하다.

       

      * 정기운행버스(1인/37,000원): 1일 1회 왕복운행, 덕수궁(9시 출발)과 반포 뉴타운(9시 30분 출발)출발,

      스파비스 (17시)출발 (1일전까지 예약 이용, 예약문의 02-544-6363)

      (내역/왕복운임 스파비스자유입장권   5,000권식사 티켓증)

       

      ★고속도로 승용차 이용은 ① 번 글, ♨ 추울수록 좋다 겨울온천! 에 click ☜  상세한 안내가 있습니다.

       

      .

      .

       

      온양에 내렸더니 역앞, 맞은 편에서 출발하는 (100-1번)버스는 방금 떠났다고 그런다.

      1시간에 한 대 꼴이라니...소요시간은 20분이란다.(안 탄 게 아니라 못 타봤지만,)

      우리가 온양온천역에 도착한 시각은 10시16분, 건너편 버스 정류소를 찾느라(역에서나와  왼편 건널목 건너서

      좌로 50m ) 좀 머뭇거렸더니  버스가 방금 떠났다 한다.

       

      아마도 버스는 15분에서 20분사이가 아닐까?.......ㅎㅎ 장담하노니....(알아서들~ 새겨 들으삼)

      택시에 올랐다. 스파비스까지 10,000원

      그랬슈? 했슈? 하는 충청도 사투리의 친절한 택시 기사아저씨는 우리를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한 이 충무공묘소

      앞에도 데려다 주었다. 사진을 두어 장 찍고 다시 출발~~

      온천 후 (100-1번)버스를 타고(온양시내행) 나오다가  민속박물관에 내려서 구경을 하고 그 맞은 편에서

      현충탑 가는 버스(차편이 많다고 함)를 타고 현충탑을 구경하고 온양역으로 나오시면 된단다.

      스파비스에 물어보면 나오는 버스 시간을 알 수가 있단다.

      먼저 스파비스에 들어가기 전에, 안내에게 물어보니 매시(30분~40분) 사이에 버스가 온단다.

      그렇게 알고 들어갔으나 나올 때, 온천 바로 정문앞에서 버스가 출발 하는 줄 알았더니 2~300m쯤 비스듬한

      언덕길을 걸어내려 가야한단다. 세월아 가거라...낭창낭창 산책 행보로 꾸물댄 것이...

      (에혀...달리 논네라 그러능감?)

      그만 버스를 또 놓치고 말았다. 우리만 놓친 게 아닌가보다. 더러 있다.

      민속박물관은 생략하고 현충탑으로 가기위해 택시를 탔다. 손님이삭 주을 택시는 많으니..걱정은 사양,

      스파비스에서 현충탑까지 9,500원 나왔지만.......10,000원이다.(자진납세)

       

      아! 참,참, 현충사를 다 둘러보고 나오니 현충사가 바로 버스 종점이라 편히 타고 온양온천역까지 나갈

      수가 있었지요.^^*

      물론 친절한 버스기사님의 안내를 받아....운행도중에 가로수 길이 너무 길고 좋아 사진을 찍었더니

      천천히 가 주시더군요. "가을에 오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시는 아저씨 말씀이 은행나무라네요.

      가을엔 온통 샛노란 숲길 사이로 달리는 기분~ 상상만해도 대단할 것 같지 않으세요?

      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는 유난히 키들이 위로만 쭉 쭉 뻗어있어 겨울 스산한 운치를 덧보태고 있었습니다.

      길이 물을 따라가는 듯 천(川)이 죽 이어져 있었는데...삽교천으로 흐르는 곡천(曲川)이라네요.

      휘어져 흐른다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삽교방조제도 가보면 좋을텐데 아쉽더군요.  끝없이 죽- 이어진 가로수길~

      총 몇Km인지 못 물어 봤군요.  아름다운 긴- 길이었는데...

       

       

      아산 현충탑은 어쩌다보니 둘 다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번 KBS드라마 '이순신'을 열렬히 보고는 드라마로 재조명된 그 분의 충성심에 다시금 감복하여 팬이 된

      우리는 이순신의 얼이 잠긴 곳을 안 보고 갈 수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을 뵈러 가는 길에 온천 목간(목욕)도 칼클케(깨끗하게) 했겠다.

      뺨에 느껴지는 바람이 무척 상쾌했다.

       

      노천탕에서 뜨거운 물에서 맨살로 탕밖에 나오던 짜릿한 그 추위에 비교하면야....

      옷으로 무장했으니...거~ 날씨 한 번 되게 시원하다.

       

       

      산책삼아 한바퀴 천천히 다 돌고나니 어느새 서산에 해가 까무룩~ 지고있었다.

      병술년!  나름대로는 첫 해를 보고 나와서 (1월2일) 지는 해도 보는 감동의 순간이다.

      병술년 새해맞이를 온천으로 때웠으니 ...이만하면 태평성세~ 서민이 어찌 족하지 않으랴~

       

       

      떠오르는 해나, 지는 해는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가다듬게 만든다.

      해 앞에 서면 모든게 용서가 되고 참회가 되고...분주하고 복잡한 모든 것들이

      자연의  위대한 태양앞에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래서 고요하고 편안하다.

      무수히 얼키고 설킨 마음가닥이 조용하게 올곧게 가다듬어지는 순간이다.

      언제나

      일출이나 일몰, 그 앞에 서면...

       

       

       

      글:사진/이요조

       

      아산 현충사 광장에 지는 해/카메라 정보: 2006;01:02 16: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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