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야경

 

경주 야경

 


 여행 첫 날은 토요일이라 무척 붐볐다.

일찍 정오경에 입실을 할 때는 한적했었는데, 주차장에 밀물처럼 끝도 없이 몰려드는 차들 인해,

밤에는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요즘 경주는 야경이 좋대~

하면서 형제 부부 팀들의 절반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동생들에게 로비에 가서 안내에게 야경이 어디 어디가 좋으냐고 물어 보고 오랬더니

천마총이란다.

나중에사 해석해보니..아마도 천마총 부근이란 뜻인가 보다.


막 나서려는데..남아있는 팀의 남편이 "그렇게 입고? 춥지...." 그러는 바람에 인사치레로

그저 점퍼 외피만 빼서 입는 시늉을 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안압지 이르기 전 계림, 야경을 바라보며 유령 숲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야경이 멋진 게 아니라 으스스하다.


먼저 안압지에 들렀는데...차에서 내리자 마자 막내 올케는 도저히 추워서 못 보겠다며

관람권 끊어 놓고도 바로 차 안으로 가 버렸다. 연못에 물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나도 추웠다.

정말은 안압지 저 건너편으로 한바퀴 빙돌아 건너가야지만 정원 야경도 좋고  안압지가 둘로

나뉘는 물그림자의 확실한 야경을 얻을 수 있는데,  별수 없이 나도 덜덜 떨렸다.

실내와 같겠지 생각한 잘못이다.

입구에서 요리 뱅글 한 장,  조리 뱅글 두어 장 찍고는 나도 얼른 되돌아 차에 올랐다.

괜시리 입장료만 날린 셈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 이기도 하다.

 

 

여행 첫 날 밤에는 안압지와 첨성대의 야경을 보고는 시내로 나와 야경을 구경했다.

조선호텔 정문이 그 중 제일 나았다.

 

 

이튿날 아침 일출에는 그 많은 불빛도 스러지고, 사람들의 수선거림도 스러졌다.

이튿날은 동해바다로 나가서 한나절을 보내고 들어오니...웬걸, 주차장이 텅 비었다.

일요일 주말 끝이라 사람들이 다 몰려 나갔나보다.

붐비던 오일장터의 무싯날처럼 너른 주차장엔 휑한 바람만 불었다.

나이 든 우리들만 남은 것 같아 스산함에 좀은 서글펐다.

일출

 

이튿날 밤에 전날 밤 다녀온 곳을 생각해 보니 천마총을 깜빡잊고는 다녀오지 않았다.

저녁 산책삼아, 운동삼아 나가자고 부추겨서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어제 토요일 밤은 그렇게나 쌀쌀하더니 일요일 밤은 산책하기 딱 좋은 기온이다.

오늘이 바로 음력 대보름이 아닌가?  천마총은 입장시간이 늦어선지 모두 무료입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보다.  그래서? 불이 다소 꺼졌는지...어두컴컴했다.

산책길에 바로 지금 흐르는 가야금 가락이 흘러 나와 보름달밤의 운치를 더했다.

좋다. 행복한 한가로움이다.  달빛아래 온 가족이 두런 두런 이야기 나누며 산책을 한다는 게,

 

 

천마총 산책길 나무 한 그루도 허수히 여기지 않는 고적지 본연의 모습,  바로 이런 상생의

마음이 길이 보존될 때...우리는 세세토록 무궁한 역사의 긍지를 가질 수 있을게다.

지역사람인지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지만...뛰는 사람은 없었다.

ㅎㅎㅎ 이 음악을 듣고 그 누가 뛰어 다니겠는가 말이다.

경주는 그런 연유로 정적인 사색의 도시가 분명하다.

 

천마총 내부 전시실로 들어갔다.

바로 이 식구들이 몇 년 전 여름에도 이 곳을 찾았는데, 얼마나 더웠는지  큰 능만 가득했지 

그늘진 쉴 곳이 없던  무서운 폭염의 기억들이...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과 천마도장니()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불국사 갔을 때는 또 어쩌고? 불국사 경내는 무슨 영화촬영으로 인산인해~ 출입은 금지되고

내려오는 길에는 스콜 같은 소나기를 만나서 다들 쫄딱 젖고서 일행은 모두 흩어진 채 나중에

모두는 차 안에 올랐지만  와이퍼가 무용지물일 정도로 억수같은 비가 무섭게도 쏟아내린 기억에

그 쪽은 이제 별로 쳐다보고 싶은 맘도 없어졌다.


오늘 밤은 실로 쾌적하다 그야말로 여유 자적이다.

밤에 다닐 일이다. 경주는, 게다가 무료입장이지 않은가? ㅎㅎ~~

천마
미추왕릉지구의 155호 고분이 천마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중 백화수피(자작나무껍질)에 하얀 말이 흰 구름을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신라인의 말에 대한 신앙이 깊음을 느낄 수 있다.


(천마가 그려진 자작나무 수피인데..후래시 조작 실수로 그림이 판독불가~)

 

신라금관은 천마총에서 시신의 머리에서 직접 수거한 것이라 한다.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고 투구처럼 마스크처럼 시신 얼굴에다가 씌운다 한다.

진품은 경주박물관 소장이고 그림의 천마총에 있는 금관은 모조품인 모양이다.

 

신라금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주수목 형상의 입식이다. 이 나무 형상의 상징물은 신라금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고대 금관에는 공통적으로 나무 형상이 주요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다.

금관에 표현된 나무들은 평범한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신령한 힘을 가진 신비로운 나무다. 즉 천계를 항해 상징적으로 뻗어 오른 나무를 뜻한다는 것이다.

금관에 달린 나뭇잎 모양의 장식은 원형과 나뭇잎의 아래 끝이 뾰족한 심엽형이 있다. 금관에만 달려 있는 수엽은 신라인이 숭배하던 나무 중 백화나무(자작나무)의 잎을 본 뜻 것으로 보인다.

금관의 산(山)자형 또는 출(出)자형 입식은 생명수를 상징하는 수지형으로 직각형과 자연형이 있고, 수지의 단은 어느 왕계의 초대왕인지 2, 3, 4대를 계속해서 등극한 왕계인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금관 중 4단 입식이 달린 금관은 천마총 금관과 금령총 금관 뿐이다. 두 금관 모두 왕이나 왕의 형제인 인물이 사용하던 것이다. 두 금관 중 크기나 디자인의 화려함은 천마총 금관이 뛰어나다. 높이나 직경도 크다. 뿐만 아니라 천마총 금관에는 수많은 곡옥이 달려 있는데, 금령총 금관에는 단 한 개 곡옥도 달려 있던 흔적이 없다.

금관의 입식이 나무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나무에 달려 있는 곡옥이 생명의 열매라면 곡옥이 달려 있는 금관의 주인공은 많은 생명, 즉 많은 자손을 낳은 사람이고, 곡옥이 없는 금관의 주인공은 자손이 없는 인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 左

새 날개 모양 금관 장식
신라시대 관(冠), 또는 머리에 꽂았던 듯한 장식물로 큰 새의 날개 모양이다. 전면에 정교한 당초(唐草)무늬가 투각되어 있으며 원형의 영락(瓔珞)을 금실로 매달아서 화려함을 더하였다. 줄기 부분에는 어딘가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으며 반으로 접었던 흔적이 있다. 

▲ 右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함께 금제 조익형관식이 발견되었는데, 폭이 59cm로 아주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핀 것 모양을 하고 있다. 신라무덤에서 새의 날개가 출토된 것은 천마총이 처음이다. 이 또한 신라인에게 흰 새 사상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上 곡옥
한국문화에 곡옥이 등장하는 것은 신석기시대 천하석으로 만든 반결형부터이다. 그것이 청동기시대에는 평북 대평리 유적이나 안면도 고남리 패총의 경우처럼 꼬리와 머리를 갖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곡옥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지만 곡옥의 모양은 태아 즉 생명을 상징한다는 해석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신라금관의 디자인은 나무를 숭배하는 기마민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것이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곡옥들은 나무의 과실로 생각할 수 있다. 과실은 생명을 이어가는 씨앗을 품고 있으므로 신라 금관은 생명의 탄생과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곡옥은 대를 이어 왕이 된 가계의 인물들이 착용했던 금관에만 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천마총 내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관객은 우리 가족들뿐이었다.

정말 찬찬히 마음껏 구경할 수가~  해서 덕분에..실례의 촬영도,

후래시 터트린 죄를 언니가 대신 인사드린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천마총 내부전시실 모습

 

날씨가 포근하다.

천마총 동네가 바로 경주 황남동이다.

정문 옆에 큰 빵 가게가 즐비하다. 언니는 원조 할머니 황남빵 가게를 안다면서

천마총 오른쪽으로 난 길로 총총히 사라졌다. 자연스레 두 패거리로 나뉘어졌다.

오능의 희미한 야경

 

나와 우리팀들은 오릉 쪽으로 다가갔다.  도저히 사진에는 잘 나오질 않는다.

계림도 그러더니... 계림숲의 야경이 얼마나 으스스한지 천년 원혼들이 곧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음산함~~

 

계림숲은 음산하면서도 그 괴기스러움이 멋졌지만 내 카메라는 그 성능이 불가항력!

모름지기 야경 사진을 찍으려면 관광객들이 붐비는 토요일 밤에나 오면 좀 더 밝을래나?

안압지와 첨성대 말고는 그 외 모든 야경이 인터넷에 떠도는 야경과는 전혀 딴 판이다.

아니다~ 검색사진을 보니 안압지도 분명히 조도를 달리했음을 알겠다.


전력절약차원에서 줄였나? 아니면 아직은 손님이 뜸한 겨울이라서?

아무튼 내가 원하던 멋진 야경 사진은 얻을 수 없었다.


대신 오능 옆에 있는 정체불명의 구옥 한 채의 모습과 천마총의 정월 대보름달은 얻었다.

야경의 조도가 낮은 대신에 정월 대보름 달은 확실하게 만끽한 경주의 밤이었다.

 

내일은 경주 남산아래 있는 포석정을 둘러 본 후 또 다른 여정 길에 올라야겠다.

황남빵을 보며 생각했다.

토담, 그래 바로 우리 전통고유의 토담에 박힌 돌멩이처럼 그다지 눈에 낯설지 않는

내츄럴함이다.

황남빵은,


글:사진/이요조.....중간중간 검색 발췌문

오능안에 있는 빈집

 

 

 

 

 

 

 

황병기님의 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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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대와 입장료는 각자부담
65세 이상은 신분증 지참시 무료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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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요시간/8시간(중식시간포함)
3. 버스요금/일반(대학생포함)12,000원  학생(초중고포함)10,000원
4. 사적지 입장료및 중식/개인부담
5. 출발시간 매일 ①08:30출발~16:10종료②10:00출발~18:10종료
6.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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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첨성대

 

 

피사의 사탑, 경주 첨성대


어! 이상하다.

 

사진을 캡쳐하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첨성대 사진을 열 장 가까이 찍었는데....한결같이 사진이 삐딱하게 나온 것이다.

할 수없이 고르고 골라 그 중에서 구도가 반듯한 듯한 사진을 그나마 하나 골랐다.

여러분들도 경주에 가시면  아무 스스럼없이 자연스레 사진을 찍어 확인해 보시기를,

묘하게도 약간 기울어진 첨성대를 손쉽게 얻으실 수가....

첨성대가 정말 피사의 사탑처럼 되어 가는군요.

(미욱하게도 첨성대가 기울었다는 사전 지식이 내겐 없었지요~)

 

 

나는 아직도 첨성대를 바라보면 잘 모른다.

지금의 옥상만도 못한  방범초소 같은 장소에서 무슨 천문대 관측을...?

그런 생각을 그 때도 했었다. 그냥 첨성대가 석조물로써  그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어렸을 적)

어른이 된 지금은 그저 고정된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별자리의 이동을 알면 달력이 없던 시기에 그나마

농사 절기를 알아 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정도였다.

 

음...그러니까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나는 다 아는 척

했다.  동양철학으로는 심오한 주역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천문대라고도 하는데, 거기 까지는 나의 나의 한계 밖이고,

 

첨성대는 언제나 별 볼 것 없다는 실망만 안겨 주었는데,'아는 것만큼 보인다' 는 말을 이젠 알 것 같다.

불교와는 전혀 무관한, 과학적인 석조 건축물이었으니,

 

지역 주민들에 의하면,  6·25 전쟁 이후 첨성대의 기울어짐이 심해졌다고 증언했다며

“당시 첨성대 북쪽에 포병부대가 있었고 탱크들이 지나다녔는데 그것이 지반 약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다.

그런 문화유산이 밤에는 화려한 조명아래 정작 그 아픈 흉터를 가리고 섰으나..

그 훼손의 복원은 우리가 맡아 해야 할 몫인 것을....

 

 

 

 

 

2006년 2월11일 밤,

글:사진/이요조

 

 

 

내용/검색글 편집▼

 
 첨성대가 기울고 있다.
 
북쪽 7.2㎝, 동쪽 2.4㎝  지반 무르고 수분 많은탓

 

 

 

기울어진 첨성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斜塔)처럼 첨성대의 기울기가

‘현재 진행형’인지 여부이다. 2003년 12월의 1차 조사 결과와 오는 9월부터 착수할 2차 조사 결과

를 비교해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붕괴 가능성’을 막는 방법으로 이어질 것이다.

첨성대가 기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제시됐다.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땅을 분석한 결과 북동쪽이 상대적으로 덜 단단하고

 

▲첨성대 밑 북동쪽 땅에 수분이 많이 포함돼 있는 점

 

▲지하 부분에 대한 레이더 검사 결과 기초에 사용된 돌(일명 호박돌)이 많이 깨지고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 右上 전체가 기울면서 틈새가 벌어진 모습도 보인다. 左 이에 비해 189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첨성대가 똑바로 서있고 틈새고 발견되지 않는다.   右 첨성대가 기울어진 모습은 눈으로도 쉽게 확인된다. 첨성대 아래 '기단석'은 수평과 비교할 때 북측으로 1.91도 동쪽으로 0.745도 기울어져 있다.

 

 

정성스런 설명의 검색이미지

 

 

경주 첨성대

 

 

개요

 

      ㅇ  
신라 선덕여왕때 세워진 첨성대는 천문관측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되고 유일한 석조
           구조물이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높이9.17m, 윗지름3.1m, 아랫지름이5.17m,
           지대석 한 변의 길이가 5.35m이다. 
           이중으로 지어진 지대석과 기단은 네모 형태로 8매와 15매의 장대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27단으로 원통형의 본체를 쌓았는데,밑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윗부분은
           수직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사용된 석재 수는 1년을 나타내는  365개이며, 1단의 높이는 약30cm 이다. 정상에는
           우물  정(井)자 석이  2단으로 쌓여있는 데 이  위에  어떤 관측기를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
           된다.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이 정(井) 자석이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동서남북의 방위 기준이 되었다고도 한다.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보이나 석조부분
           만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매우 보기 드문 유적으로,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 가치

 

ㅇ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경북 경주시 인왕동 안에 보존.

ㅇ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는 634년(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에 세워

졌다.

ㅇ 또한 이 <첨성대>는 종교적 건물을 제외하고는 현재 전하는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기능

 

ㅇ 이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것 외에도, 4계절 24절기를 정하는 역할을 맡아 보았으며,

해석하기로는 신라의 도시계획연구소였을 가능성도 있다.

 

 

모양

 

   ㅇ 전체 계단 수 = 30단(음력으로 한 달 30일을 나타냄)

   ㅇ 밑둘레 기단 돌 = 12개(1년 12개월을 나타냄)

   ㅇ 계단 본체 = 27단(신라 27대 선덕여왕을 나타냄)

   ㅇ 꼭대기의 네모진 이중 석재 = 각각 동, 서, 남, 북을 나타냄(방위)

 

 


종목 : 국보 제31호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 : 1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 : 신라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모양의 원통부(圓筒部)가 올려지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가 얹혀진 모습이다.

원통부는 부채꼴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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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석굴암 일몰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9번지.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석불사, 석굴암

 

 

어린 날의 수학여행, 그 토함산에 다시 올랐어라~

 

 

경주여행 첫 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들(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제 1의 타깃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집에서 싸가지고 간 간단한 점심을 먹고는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었다.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강원도 첩첩 두메산중 길 마냥 꼬불꼬불 실로 구절양장이다.


산길에 눈이 수북히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담임 선생님께서 일일이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주며 잠에 취한 어린 우리들의 등을 떠밀던

바로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의 귀함도 전혀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용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안마용 등 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칠기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모두는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씩이나
이를 닦다가 피가 나는 아이~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 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단숨에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산에 오르기 힘들었다는 기억뿐이니...이거야 원,

어디에서 뭐가 잘 못된 것이었는지..?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머리가 희끗한 나이에 이제서야 천년고도의 여행을 곱씹으며 불교문화와 신라 문화유산이나 뒤늦게사

공부하며 짚고 넘어가야겠다.

 

 

석굴암 향하는 길을 승용차로 오르며 모두는 어린 초등시절, 걸어올라왔던

수학여행길을 반추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도 이렇게 한참 힘겹게 오르는 길을..?

꼬불꼬불 구절양장이 따로 없다. 영낙없는 강원도 두메산길이다.

몇 번 토함산 계곡 절경을 찍으려 멈추어 섰지만 육안으로는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는데 안개때문에

카메라에는 다 잡히지 못했다. 그냥 차 안에서 찍은 근경만 두어장 올려보며...

눈쌓인 설경을 휙휙 뒤로 하고...토함산 정상이 해발 700이 넘는다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그렇다면 석굴암은 못해도 어림잡아 600고지 이상은 족히, 될 것이 아닌가?

 

 

사진에는 다 담아오지 못했지만 토함산의 산세나 수목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국제적

관광도시, 경주의 명산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국사, 석굴암, 보문관광단지, 무열왕릉 등 신라

고적관광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조용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산림내 휴식공간이란다.
그러게...산세가 그 멋이 뭔가 다르더라니 다음에 경주에 올 때는 불국사에서 필히 토함산을 올라야겠다.

토함산 정상에 올라 천년고도의 정기를 다시금 느껴봐야겠다.

 

 

[토함산]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5명산 중의 하나로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또한 소나무, 참나무 숲으로 덮여 녹음이 짙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굴암이 나타나는데 이 길은 산허리를 따라 돌아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관광객들이 이용한 길이다.
60년대 이전에는 이 길을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오르내렸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이 산이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산이 바닷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토함산 자연휴양림(휴양림사무소 054-772-1254)

 

 

주차장에다 차를 두고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다시 걸어야 한다.

눈바람이 차면서도 상쾌하다.

바지런히 걸어가며 불쑥 어린 날 언니의 난데없는 옛 이야기에 모두는 까르르~ 자지러졌다.


너무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눅눅하고

으스스한데, 사천왕도 싫고 무섭고..." 까지꺼 이거 볼려고 힘들게 올라왔나?' 싶어서 들고있었던

지팡이로  겁도 없이 X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로 만든 차단 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꼽을 쥐었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내가 그랬다면 또 몰라도?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ㅎ~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조금 힘들다가 웃음보가 터지는 바람에 가뿐하다.

 

↓ 복원된 바깥 모습 ↑

 

석굴암 도면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
(重祠)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 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복원하며 교체된 구조물들, 귀중한 신라인의 손길이 스민 소중한 유물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랑할만한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시티N님들과 공유하곺은 욕심에 그만,

처음 들어오자 잽싸게 찍느라...센터도 틀어지고, 그랬다. 점점 대담해져서 위엣 사진을 찍었지만

 아미타불  이마에 보석은 일제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눈에 반짝! 되비쳤다.
개보수 때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잘 박혀 있었다.

 

석굴암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그대로 비친다.

석불사 전경

 

무척 단아해 보이는 석불사 사찰 경내, 출입금지란 푯말이....못내 서운~

 

석불사 마당의 감로수 ~ 정말로 물맛이 달았다.

 

↑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을 뒤로 바라보며 ↓

 

토함산 일출은 유명하다.

경주 토함산과 석굴암의 일출 장면은 우리의 자랑거리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끼고 있는 토함산은 동해의 햇살이 가장 먼저 와 닿는 땅이다. 바다가 끓어 오르듯 붉은 구름을 피워 올리다가 순식간에 솟구치는 해돋이는 정초에 한 번쯤 가져 볼 만한 경험일 것이다.

 

내가 만난 토함산 일몰

 


 

석굴암의 건축 개요가 설화에 기인하자면,

이 설화(아래내용글)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는데....

 

니체가 그랬던가?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미래를 알려면 지금 행하고 있는 나를 보면 된다는,

 

되돌아 나오는 길에 일출 못잖은 토함산 일몰을 만났다.


'석굴암 일출' 대신이다.

 

역시나 유수깊은 천년고도 경주의 토함산다운 장관이다.

 

 

 

 

 

글/사진:이요조(2006년2월11일)

 

 

 

 

'토함산 - 송창식'

 

 


김대성 [金大城, 700~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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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를 끼고 달리는 그 맛!

 

 

 

드라이브코스 7번 국도, 화진해수욕장

 

 

 

탁 트인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싶은가?

도시의 일상을 벗고 대자연의 감동을 느끼고 싶은가?

최고의 바다, 드라이브 코스인 포항~ 영덕간 7번 국도에 있는 포항 화진 휴게소에서 잠시 바다를

바라보자.

동해바다를 끼고 달리는 그 맛!

바다가 가슴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상쾌함~~

사람들은 무언가 가슴이 답답할 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 여행일수록 탁-트인 바다를 바라 볼 일이다.

 

 


영덕 강구항을 찾아가는 길목이었다.

영덕 강구항을 찾아가는 길목이었다.

영덕 53km해안선 도로는 최남단 남정에서부터 최북단 병곡까지 나 있다.

특히, 강구에서 축산까지의 918번 26km길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운취있고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가 아닐까한다.
빼어난 기암괴석의 절벽 위로 난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차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듯한 착시현상은 수시로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해안변 곳곳에 조성된 야생꽃길과 소공원,잠시 휴식을 취하며 광활한 초록바다와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
한 폭의 그림처럼 소박한 어촌풍경과 어우러져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할 것이다.
이곳 해안은 가는 곳마다 낚시를 즐길 수 있어 피서와 휴가 시즌이 아님에도 늘 낚시꾼들로 성황을 이룬다.

실은 한 5~6년 전  좀은 한적하고 낭만이 서린 칠포해수욕장에 여장을 풀고 조금은 더 넓고 북적대던

월포해수욕장까지도 원정을 나가 보았던 피서길이었다.

 

포항 화진해수욕장이 한 눈에 다 바라보이는 화진휴게소는 일출의 명소라한다.

정말 그렇겠다.

망망대해의 수평선이 멋진 일직선으로 한참을 내처 그어졌다.

 

화진해수욕장~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화진포해수욕장'과 이름이 같아 착각을 하는 화진해수욕장이다.

같은 동해바다지만....화진포는 거의 통일 전망대쪽에 위치한 공식 해수욕장으로는 동해안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잡은 해수욕장이고 '화진해수욕장'은 포항시 소속이다.

 

포항 시내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휴게소에서 바다를 등지고 찍은 사진이 멋지다.

부부가 찍었으면 더 멋질 뻔한데....

아까운 장소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최불암 박원숙 양택조 최진실, 박상원, 송승헌, 서유정이 출연했던

'그대 그리고 나' 라는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영덕 강구항이 나오고..드라마 속, 하얀 등대도 나오고,

백줴 남자 둘만 달랑 세워서 찍고 나중에사 보니...증말 아끕따!

간만에 쪼메 개안코 깨끄탄 바다 배경이었는데.....에혀~


 

 

화진 휴게소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은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파랬다. 그리고 조용했다.

겨울바다치고는 의외로 사람들의 발길이 술렁이는 것은 마침 우리가 간 날이 음력 대보름이라...

용왕에게 기도하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관광차들이 더러 있었다.

절에서는 스님들이 인솔해서 나온 불자들, 혹은 용왕님께 개인적인 치성을 드리러 무속인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로 군데 군데는 기도판과 굿판이 벌어졌다.

 

그냥 진종일 서서 구경해도 아무도 괴이치 않는....

 

 

글:사진/이요조

 

 

 

●  가는 길

1.

대중교통의 경우, 부산 대구 경주 포항터미널에서 동해해안도로 운행. 모든 버스 영덕?강구 정차

(포항 20~30분 간격, 부산 3시간 소요)/강릉, 울진 터미널에서 동해안도로 운행. 모든 버스 영덕

강구에 정차 (20~30분 간격. 비수기 1시간 간격. 강릉에서 3시간 소요)/영덕읍=>강구항 10분

간격 군내버스 운행.

 

2.

자가용의 경우 경주=>7번 국도=>강동=>28번 국도=>포항 흥해=>7번 국도=>영덕=>강구항/강릉=>

7번 국도=>남행=>영덕=>강구항/중앙고속도로 제천 IC=>5번 국도=>안동=>34번 국도=>청송 진보=>

영덕. 영덕군청(054-734-2121)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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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교통 시내.시외버스 5분마다 운행50분 소요
도로안내 시내에서 동해안 7번국도이용 영덕방면으로 30km 지점
현지민박 포항 수협 지도과 (054) 247 - 0856
 
 
세부정보

위 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개 요 

포항시에서 북으로 20km가량 떨어진 화진해수욕장은 백상길이 400m, 폭 100m 평균수심 1.5m , 총 10,000평의 백사장에 하루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나무가 많고 물이 맑으며 주위 경관이 좋아 가족과 함께 피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게다가 송라면 보경사 12폭포를 인근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경하고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들릴만한 곳이다. 

개장기간
7 월 중순 ~ 8월 20일

위락 편의 시설

샤워장 , 탈의장 , 공중화장실 등 5개소
식당 상가
대중음식점 , 간이음식점 , 소매점
주차 시설
900평방 m (50대 수용)

현지 교통

포항에서 해수욕장까지 영덕. 울진 방면. 시외버스 15분마다 운행 50분 소요

도로 안내
시내에서 동해안 7번국도이용 영덕방면으로 20km 지점
현지 민박
포항 수협 지도과 (054) 247 - 0856
문의/번영회 (054)262 - 1333 
화진해수욕장

054-000-0016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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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인에게 더 인기 짱인 해운대 숯불갈비


                                        

                                    지역인 에게 더 인기 짱인 해운대 숯불갈비집

 

                                                 서산농원

 

오래전 옛날부터 ‘해운대 암소 갈비집’은 관광객들에게 더 잘 알려져 유명세를 띄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여행지에 가면 타지 여행객이 찾기 쉬운 관광요지에 있는 식당보다는

그 지역주민들이 선호하는 식당을 잘 찾아 다녀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해운대, 바닷가가 아닌 ..관광경로도 아닌,

해운대 신시가지 아파트촌 깊숙이 있는 고깃집, 무싯날 아니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서산농원은 숯불갈비로 그 해운대 거주민들에게 더 유명하게 알려진 곳이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택시 기본요금 거리입니다.)

                   

 

 

한 4년 전 내가 다음 카페에 열정을 보일 때,

서울에서 부산, 지역모임까지 주선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여명 넘는 회원들이 미처 예약을 하지 않은 나의 불찰에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움직여야만 했던 결례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오늘,

우리 가족은 일층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빙 종업원의 사분사분 건네는 말이 고기는 때에 따라 그 맛과 질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는 설명의 말이 더 믿음감이 간다.


고추하나도 너무나 싱싱하여 입에 넣고 깨물어 보니,

와사삭~ 그 소리가 상큼하다. 가히 주인의 세심한 정성이 느껴지는 깔끔함이다.

 

 

먼저 들어 온 버섯스프는 너무 고소하고 맛나서 죽을 좋아하는 나는 더 주문해서 먹었다.

동치미 백김치도 색깔 맞춰 얼마나 곱게 담아냈는지...

 

주문을 요청할 일이 있어 벨을 눌릴 때 마다 바로 방문 앞에 지키고 서있어서

바로바로 대처해주는 기분 좋은 서비스~


고기를 먹은 후, 나오는 열무냉면은 또 얼마나 깔끔하고 맛있는지, 나무랄 데 없는 맛이다.

맛, 품질, 가격, 친절에 골고루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어른들을 모시기에

더 적합할 듯한 장소, 가족들의 외식장소로 손색없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겨울인데도 바깥 큰 창 아래에 둔 화분도 조화 같아 보일정도의 예쁘고

화사한 꽃들로 구석구석 세밀하게 정성을 들였다.

주차장은 따로 안내인이 없고 주차시 잘못은 각자 조심하라는 문구가 조금 서운하지만,

대체적으로 직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한결같은 친절도 가슴에 와 닿고


혹시 부산 해운대를 찾으실 일이 있으시다면 기억하시게끔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외식장소이다.


글/사진: 이요조

                

 

 

                

 

 

 

 

 

 

냉면값은 1500원, 냉면이 싫다시면 따듯한 국수 온면도 있다.

 

 

 

 

 

 

 

         

 서산농원 ( 부산 > 해운대구 > 한식 > 음식점-숯불갈비전문

 

051-747-4333 
주소 : 부산 해운대구 중1동 153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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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첫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이참에 검색하여 문화유산이나 공부하며 짚고 넘어갈 일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경주여행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언니 말이 더 우습다.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집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으스스해서 그 지팡이로
부처님 떵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를 잡았다.
무지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그 것만해도 힘들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여러님들과 공유하자는 욕심에 그만,
부처님 이마에 보석은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누에 반짝! 비쳐왔다.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 Vitalli Chaconne - Zino Francescatti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비친 모습이 더 재미난다.

나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다.
일출대신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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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 송창식

 

 

흐르는 곡은 이수인작곡의 "석굴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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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운대 동백섬 일출

  

                              2006,2,10 금요일 아침 조선비치호텔 입구 일출광경

 

                                                                 인어상/동백섬   

해운대전경

빌딩은 아침 햇살에 반짝 세수를 하고 물에다 빛을 되비추고 있다.

동백섬에서 바라 본 해운대

멀리 작은 바위섬, 오륙도가 보이는

오늘이 음력으로 13일, 정월 대보름전야를 앞두고 바윗돌 틈새마다 좋은 자리를 잡아 용왕님께

정성들인 갖은 음식으로 고사 지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었다.

토템이라  폄하 치부하기에는 가족의 안일을 거대한,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자연 앞에 기원하고자 하는

그 사랑, 그 마음....

인어상 있는 부근에는 바윗돌들이 전부가 다 미끄러웠다.

왜냐면?........기도하는 촛농이 녹아 내려서...

아마도 바다로 향한 기원들이 수시로 행해지는 곳인가 보다.

 

[누리마루란?]

 

'세상의 맨 꼭대기'는 누리마루의 말뜻이다.

일반 개방 첫날인 지난달 20일에만 1만 4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후 하루 8000여 명이 찾을 만큼

관광 명소가 됐다.

원래 이름은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전 세계 경제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을 포함해 21개 회원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가진 곳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누리마루란

이름을 가질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경관마저 감탄을 자아내니 더 이상 말할 나위 없다.

2월 말까지 일반에 무료로 공개된다.

누리마루 뒷쪽,  사람들은 누리마루 정면만 주로 사진에다 담지만 뒷면도 송림이 우거져서 멋진 곳이다.

동백섬 등대와, '부시'태통령이 묵었던 조선비치호텔,

새해 벽두 까치를 길조로 여겨 함께 찍어 보려니 비치호텔 특유의 붉은 지붕이 잘려져 나갔다.

학창시절, 시험기간만 지나면 해운대 너른바다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동백섬, 누리마루를 지켜주는 등대도 아침 햇살에 말그라니...세수를 하고,

 

 

물그림자를 드리고 선 고층 아파트들, 바닷가에 바로 인접한,

 

 

동백섬에서 광안대교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고...

 

 

동백꽃은 먼-바다로 향해 피어난다.

 

 

아마 해풍이 동백을 키우나보다.

 

 

동백섬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끔...동백도 많고 산다화도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산다화 산책길

 

고향이 부산인지라 고향을 여행 이야기로 분류하자면 왠지 쑥쓰럽다.

자기 집 자랑같아서,

내겐 마냥 좋은 곳........

 

늘,

그리워 쫓아가면 고향 집처럼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바다,

쉼 없이 살아....늘, 파도치는 바다.

 

해운대는 이제 세계적인 명소로 등장했다.

누리마루는 10시에 개장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단다.

2월 말까지는 무료 관람이라는데...보고싶지만, 관광버스까지 몰려온다는 바람에..포기

 

아직은 일출시간이라...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만,

새벽운동을 바닷가 섬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천혜의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막상 살 때는 잘 모르고 지낸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잘 모르는 것처럼....

 

이요조.

 

 

 

 

해운대 동백섬 검색이미지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해운대 비치호텔입니다.

뒷편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누리마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후....

멀리 보이는 곳은 대변항입니다.

청사포가 까마득히 아래로 보입니다.

 

청사포로 내려가는 길에...

동해남부선이 청사포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다닙니다.

청사포는  달맞이 고개너머 산 아래 협곡에 위치한 동네라서 평지로 진입은 없습니다.

횟집은 많지만...

동해남부선이 산 언덕위로 개설이 되면 기찻길은 육로가 되고,

어쩌면 청사포는 거듭 잠에서 깨어날 곳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청사포에 내려왔더니 갈매기 천국입니다.

 

청사포에  방파제를 만드느라...여기저기 데트라포트가 나 뒹굽니다.

오른 쪽 까마득한 바로 위로는 달맞이 고개의 정자가 보이는 곳입니다.(사진에는 안 보임)

역광으로 찍어선지...그림자 뿐입니다.

 

 

 

 

 

 

 

 

부산역에서 해운대 동백섬, 비치호텔까지 대중교통

 

 

*일반버스:

38 [해운대 신도시], 36 [해운대],  5 [해운대 신도시], 63 [해운대],
63-1 [기장], 139 [송정동], 235 [해운대 신도시], 40 [해운대 신도시], 140 [송정동]
141 [송정동], 109 [해운대 신도시],

 

*좌석버스:

 

302 [좌동(좌)], 240 [해운대 신도시(좌)] ,239[기장(좌)],142[기장(좌)]

 

*특별버스:

 

버스번호 [종점] , 2002, 2003 : 특급버스 , 좌 : 좌석버스

 

 

*택시: 일반택시, (모범택시) 호텔마다 배치

 

*지하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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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지방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충주호

 

 

청풍호를 끼고 드라이브, 옥순대교와 도담삼봉

 

청풍호를 옆으로 끼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그 맛!

월악을 돌아 돌아 가며 산이름에 악(岳/큰산)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그 큰 이름 만큼 그 산세가 당당하고도

우람함을 진작에 알아 차렸어야 하는데, 산이 깊으면 물도 깊은 법,

월악산! 그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산이기에 대단한 물길을 거느리고 섰다.

 

 

물안개라면 좋으련만 마침 내가 간 날은 물안개가 흐드러져 정오가 가까운데 도심의 스모그 현상같다.

아무튼 물안개의 뒤끝이리라...

좀 더 일찍왔더라면 물안개의 도도한 흥취에는 푹 빠졌을지 몰라도 사진은 한 장도 못 건질 뻔 하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충주호라 부르지 않고 청풍호라 즐겨 부른단다.

아마, 수몰된 청풍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리라.

댐 건설로 진짜 청풍이 수몰된 지 25년. 그 동안 제대로 부르지 못 한 만큼, 이제라도 제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충주호는 남한강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이다. 강원 태백의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지역마다

저마다의 이름을 지녔다.

태백에서 창죽천이다가도 정선에서는 골지천이다. 영월에서는 동강으로 불리고, 충청도로 넘어 오면

충주호가 된다. 경기 여주에서는 여강으로 갈음한다. 이쯤 되면 청풍호를 고집하는 주민들을 나무랄

이유가 없어진다.

충주댐 건설로 생겨난 호수의 길이는 97.2km. 충북 단양, 제천, 충주 등 3개 지역의 마을이 수몰됐고,

이중 제천 지역이 42km로 절반에 가깝다. 청풍은 29개 마을(리)중 27개가 물에 잠겼다. 청풍호가 아름다운

것은 말마따나 청풍명월이 고스란히 물속에 담겨 있어서 일 터이다.

충주호를 절반 정도로 나눠 서쪽은 충주, 동쪽은 제천, 장회나루부터는 단양에 속한단다.


 

짙은 주황색의 철골이 인상적인 옥순대교는 다니는 통행이 별로 없어 늘상 졸고 있는 다리같다.

다리 위로 다니는 차량보다 다리 아래로 다니는 유람선들에게 위용을 자랑하고자 선 다리같다.

날씨가 어찌된 셈인지 물안개가 덜 걷혔는지...영 흐린 게...... 풍광의 기대치는 마뜩찮다.

하늘을 담아 있는 호수라더니...오늘은 하늘빛도 햇빛도 .... 다 잠에서 덜 깨어났나 보다.

 

너무 일찍 서둘렀나?

아직은 오전, 은은한 호반은 물안개를 걷고 마악 잠에서 깨어나려는 중이었다.

늦잠을 즐겨 자는 탓에 미려한가?  아무래도 그 탓이지 싶다.

 

"여보세요오~ 잠에서들 깨어나세요~"

 

 

날이 맑고 해가 난 날이면 잔잔한 물 너울마다 햇살이 찰랑찰랑 담겨서 반짝거릴텐데..

강우량에 따라 수위는 달라질 터,

유람선의 잦은 발걸음에....잔잔한 너울이 만들어 낸.....물의 숨결~ (上)

 

 

기암절경과 충주호의 수려한 풍취를 보여주는 유람선은 오늘도 분주하게 바쁘기만하다.


구담봉

 

충청북도 단양. 단양읍 단성면에서 제천. 수산면에 걸쳐있음

 

기암절벽의 암형이 거북을 닮아 있어 구봉이라 하며, 물속에 비친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 하여 구담이라

부른다. 

조선 인종 때 백의재상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넝쿨을 구담의 양안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여 보는 사람들이 신선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절경에 퇴계 이황 선생도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 시를 읊었다는데... 

벽수단산계 (푸른 물은 단양의 경계를 이루고)

청풍명월루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는데) 

선인불가특 (선인은 어찌 기다리지 않고) 

소창촉귀루 (섭섭하게 홀로 배만 오는가) 

 

 

겨울 가믐이 들었다.

바위산들이 물 자욱이 선연한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나마 유람선이 오가는 옥순대교 부근은 늘 잔잔한 여울로 호수를 흔들어 얼진 않았는데...

유람선이 다니지 않는 강들은 표면이 모두 다 하얗게 얼어 있었다.

유람선은 물너울을 일으켜 강이 얼어 잠들지 않게끔 매일 가만가만 흔들어 일깨우나 보다.

 

上/옥순봉

날씨가 흐려서 그 느낌을 불러 올 순 없지만 수묵화처럼 수려한 山水가 마치 옛 성현들을 대하 듯

그지없이 그윽하고 깊은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저 억겁을 말없이 그 자리에 있어도....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찡한.....한 폭의 그림!

 

上/장회나루터 부근

 

도담삼봉

 

 

도담삼봉 -- 충청북도 단양. 매포읍 하괴리

도담삼봉 유람선 문의 : (043)422-5593

 

삼봉 중에서 가운데 봉이 남편봉이고 그 옆에 다정한 작은 봉이 첩봉, 좀 떨어진 곳에 딸들을 품에 안고

돌아앉듯 자리한 봉이 처봉이란다. 남편이 딸만 낳은 아내를 내쫓고 첩과 다정히 앉아있는 모습이라는,  

그야말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드라이브 길

godam005.jpg 

 

↑36번 국도 장회재 구간,  아래 사진은 장회 나루터가 보이고....검색이미지 두 개 가져 왔습니다. ↓


godam006.jpg

등산하며 찍은 사진인 듯,


월악의 한 고개마루 휴게소의 돌산 /이름, 잘 모르겠음

지난 가을에 갔을 때 한창 공사중이었음...아마도 멋진 바위가 묻힌 것을 알고는 흙을 떼어내고

바위만 노출시키는 공사를 한 듯....그 당시에도 대충 윤곽은 잡혔있었다.

 

청풍호를 뒤로 하고 서 있는 장승, 그 표정이 하 기막히도록 좋아서,

만약 이 장승이 입을 열어 말을 한다면 천천히....이래유~~ 저래유~~ 할 것만 같다.

이 표정에 어눌한 듯 웃음 머금어 느린 말 투,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명철한 속내를 숨긴 듯한 해학적인 모습,  이 어이 이 곳에서 해탈한 자의 모습을 만나 보는가?

청풍호를 뒤로 한 채 명월처럼 웃고 있는 장승 아저씨....요즘 세상에 어디 이리 멋지게 생긴 사람있으면

정말로 딱, 한 번 만나봤으면 쓰겄다.

 

 

이요조.

 

 

 

■여행정보■

 

[교통]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로 빠져나가 금성면소재지 방향으로 5 97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10여 분 달리면

청풍대교가 나오는데 다리 를 건너 1분만 가면 청풍나루터. 청풍대교 건너기 전 좌회전해서 ES 리조트

앞을 지나 계속 가다보면 옥순대교에서 옥순봉을 감상할 수 있다. 옥순대교를 건너 단양방면으로 좌회전

하면 장회나루터가 나온 다. 용하구곡으로 가려면 청풍대교를 건너 597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가 36번

국도와 만나는 수산면에서 좌회전, 덕산면소재지에서 594번 지방도로 쪽으로 우회전, 덕산초등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 월악산으 로 들어가면 된다.

 

옥순대교 쪽에서도 갈 수 있는데 다리를 건너서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수산면, 좌회전, 덕산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매표소를 지 나 2분쯤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걸어서 용하구곡을

감상하면 된다. 입장료 1,300원, 주차료 2,000원.

월악산 관리사무소 ☎ 043-653-3250 [유람선]

 

충주호에는 충주댐, 월악, 청풍, 장회, 신단양 등 모두 다 섯 개의 나루에서 유람선을 이용할 수 있다.

신단양은 물이 많을 때 에나 연결되고 평소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코스에 따라 소요시간과 요금이 달라진다.

충주 / 월악.청풍.장회 1만1,000원(2시간), 월악(회항)이나 충주댐( 회항) 7,000원(1시간), 청풍.장회

왕복 9,000원, 편도 5,000원(1시간 소요). 유람선은 2층 구조의 대형선, 1층 구조인 쾌속선 두가지.

청풍나루 ☎ 043-647-4566,

월악나루 ☎ 043-851-5482

 

 

 

이루마 - kiss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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