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이 나면 나가려고 줄을 서서 기디리고 있는 차량 행렬들

물 속에 잠긴 이 길은 언제 그 모습을 드러내줄까?

 


참으로 가끔은 섬에도 갇히고 볼 일이다.

의외로 섬에 갇히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용만 쓸 일이 아니라...

이렇게 슬며시 그 끈 한자락을 놓아 버리는 일도 오히려 지금처럼 여여하게  홀가분해지는 그런 느낌은 아닐까?

 

제부도에 길이 닦이지 않았던 옛시절에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한다.

조개를 캐다가 쌀을 팔아오고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무리하게 건너 다녀야만 했던 푹푹- 빠지는 진흙에 장화 하나 제대로 살 돈이 없어 새끼줄로 발을 칭칭 동여매고 바닷길을 건너서는 볕바른 곳에 앉아 새끼를 풀며 젖어 언-발을 녹이던..... 그런 곳이란다.

물때를 못 맞추어 억지로 건너가다가 여럿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던,

그러던 그 곳이 85년 주민들이 저들의 생계를 위해 힘을 모아 모래톱이 쌓인 그 위로 얇프당한 시멘트 길을 손 쉽게 생긴대로 구불구불 내어놓고

이제는 그 먼-길을 걸어 다니며 물길에 변을 당하는 일도 없겠다 한숨을 돌렸더니,
각 매스컴으로, 입소문으로 알려지자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단다.

그 길이 제부도 주민들의 생계수단을 바꿔놓을 줄이야~


물길이 트이도록 기다리는 자동차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가 건너올 때는 양 옆으로 찰방거리는 바닷물에 정신이 팔려...어디를 어떻게 왔는지도 몰랐다가 물길만 열리면 나가려고 기다리는 긴 행렬에 줄을 세우고는 먼-빛으로 바라보며 과연 물에 잠긴 길이 어디로 날까? 궁금증에 어림짐작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기를 두 시간도 이내 흘러갔다.

물길이 갈라지기를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것은 제부도에서는 또한 빼놓지 못할 볼거리다.

물길로 막힌 제부도 입구에는 철제 대문을 닫아 걸어두었다.

입구에 높은 탑처럼 세워진 전광판에는 물길이 열리는 시간을 알리는 빨간 전광문자가 흐르고,

차들이 건너갈 수 있을 시간이 되자 경찰차가 먼저 선도하고 우리는 바다로 난 길로 줄줄이 긴- 행렬로 이어졌다.

좁은 길 양옆으로 막 갈라지는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반대편에서도 이내 차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차창에는 앞차 옆 차에게 튀겨진 바닷물로 하얀 소금꽃 얼룩이 금세 생겨났다.

자동차 타이어는 바닷물 질펀한 도로 위를 구르며 지금 짭짤한 바다 맛이 어떤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바다로 난 길은 이리 저리 꼬불거리며 나 있어 오리(2,3?~ 2.7Km?)가 족히 넘었다.


나는 알았다. 황급히 돌아 나올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나는 보고 느꼈다.

참으로 가끔은 섬에도 갇혀 볼만하다는 것을.......

갇힌다는 것은 곧 한 쪽을 놓음이다.

놓음으로 해서  그 소중한 모든 것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날개를 가진다.,

하루에 물길이 두 번 나는 섬에 갇힌다는 건  행복한 구속이다.

가끔은 날개를 다친 새처럼 섬에 앉았다 쉬어가기도 하고,

비단, 섬이 아닌 사람에게서도 갇혀보고 자기에게서도 갇혀본다면

나와 너를 차분히 드려다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도 같다.

 

백중사리(음력 7월 15일/양력 8월15일 쯤)는 일년중 가장 만조가 높다.

산허리 물 그림자로 보아하니...아마도 다리난간 아래 대략 1m 정도만 두고 찰랑거리는 아주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정도 된다면 마치 배를 탄 듯, 다리위에서도 어지러워 멀미가 날 듯 한데....

물 위를 걷는다는 그런 멋드러지고 신비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몰려오던, 멀리서만 지켜보던 두려운 파도, 태양에 반짝이는 파도의 등 지느러미를 타고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이랄까.....

올 여름 백중사리엔 서해의 만조를 보러 나가기 위해 카렌다에 붉게 표시를 해 둘 일이다.

물길은 평상시보다 아주 짧게 잠깐만 열릴것이다. 모르긴해도~

 

가고싶다.

그 섬에 다시 가서 온전히 갇히고싶다.

 

아! 이래서 시인들은 외로운 섬을 위한 노래를 하는가보다.

 

 

 

글:사진/이요조

 

그릇에 가득 담긴 물처럼 찰랑찰랑 바다가 한 가득이다. 서해의 또 다른 낯 선 얼굴이다.

 

먼-수편선이 둥그스름하게 보였다.

 

 

햇살이 밝아보이지만 바람이 불어 너무 추운 날씨였다.

 

 

만조의 파도는 다리난간 어디쯤 부딛쳐서는 다리위에까지 파도가 들이쳤다.

갯벌위로 난 씨멘트 다리보다야 출렁이는 흰 파도 위를 걷고싶다면 필히 만조의 섬에 갇히고 볼 일이다.

간조만 이용, 잽싸게 왔다가 잽싸게 빠져 나가면 바다는 그 진면목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서해바다는......

 

 

누가 외국만 풍광이 좋다고 했는가? 늘 바라다만 보던 파도. 그 파도의 등을 타고 걷는 길이다.

 

 

데이트 하기로는 그저 그만인 바다로 난 끝없이 이어진 다리 같다.

추운날씨에도 연인을 보았다. 가까이 내려가서 파도를 보다가....그만 파도가 짖꿎게 장난을 걸었다.

등 뒤에서 그런 재미난 광경의 사진을 두어장 찍고는 명함을 받았다가 며칠 뒤, 사진을 보내주었다.

 

 

 

바다로. 섬으로 향하는 염원은 행렬로 이어진다.

제부도에 가면,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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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나들이로 '꽃마중' 어떠세요?

봄, 나들이로 '꽃마중' 어떠세요?

 

봄! 봄이다!!

겨우내 기다렸던...눈이 시다.

얼마나 화사한지, 미리 앞당겨 봄을 맞으러 간  마음과 눈과, 코에는 봄이 얼마나 알싸하게 배어왔는지, 서둘러 꽃마중 나온 봄을 맞으려는 나들이 인파들로 허브농원은 무척 붐볐다.  의외로 멋쟁이 젊은 상춘객들이 많아서 나는 또 다른 청춘의 봄을 눈요기로 만끽했다.

 
 

꽃샘바람인지 어제는 난데없는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봄은 곧 올 듯, 올 듯 멀기만 합니다. 오늘은 비 그치고 날씨도 좋아 성급한 봄맞이를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포천 신북면으로 가는 길에는 산위에나 길가에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이 곳은 어제 눈이 왔나 봅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만 오후가 되니 이내 누그러졌습니다.

포천 신북면에 위치한 '허브아일랜드'를 찾아 나선 길이었습다.                                                                       

 

 

로즈마리가 얼마나 잘 자랐는지 꽃이 다 폈습니다. 저, 처음 봅니다. 로즈마리에 꽃, 핀 거.... 보라빛  꽃이 앙징하니 살뜰하게도 오종종 달리는군요.                                                                                                                   

 

 

'한련화'가 지천입니다. CF 에서,  허브 비빔밥위에 화사하게 얹혀진 한 송이 꽃 혹? 보셨어요? 바로 이 꽃이랍니다.   

식용가능한 허브가 많습니다. 간혹 독성있는 것도 있지만...

허브가 뭐 별 건가요? 우리가 늘 즐겨먹는 파, 마늘, 깻잎, 쑥, 취, 부추, 미나리, 제피, 산초, 고수 같은 것이 죄다 허브인걸요.

 

 

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뒤로는 쉼없이 애써 가꾼 사람들의 노력이....                             

 

동행한 가족들입니다. 모두는  꽃의 자태와 그 향과 색깔에 푸욱~ 심취해 있습니다.      

정원이 무척 예쁘네요. 이 곳은 가끔 오는 곳인데,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조형도 더 멋지게 설치되었군요.     

                          흰 프리뮬라? ..........                                                                    

           예쁜데 이름을 모르겠군요. 큰 나무가 있는 걸로 아는데...원예종인가봐요. 

                               

만지면 향이 ..마구 흔들려요~~믿기세요?   이 곳에선 만져봐도 되요~                                                   

                겨우내 칙칙한 것만 보아왔던 눈이 다 행복해져요~                                             
 

나무팻말이 예뻐서 아이디어를 훔칠 겸...찍어봤어요. 왜냐고요? 소녀적, 제 꿈이었던 꽃가게를 아직 접지 못했거든요.


             드라이플라워와 나무계단이 내츄럴하게 매치가 되네요~                                       
 

허브랜드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코너, 꽃으로 치장된 한 벽면 이랍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은 선물을 사느라...한 눈을 팔고 이 곳은 잘 올려다 보지도 않는군요. '포토 포인트'로 정말,,예쁜데...

"보라색 창문 곁에 서서 사진 찍을 부운~~~~.아무도 없어요??"

 
 

멀리서 바라보니...더 멋지군요. 파라솔이 활짝펴지면 그 아래서 따듯한 허브차를 나눌 친구,연인과 함께~~        

 
 

선물가게들입니다.  모두 허브와 관련있는....봐도 봐도 사고싶은 것 뿐이랍니다. 특히 어린이와 여성분들, 지갑 단단히 부여잡으셔야 해요~                                                                                                              


 
 

천정에 매달린 드라이플라워 모습이 장관을 연출합니다.

이 곳을 들어설 때 신발을 벗는 현관에서 목 뒤에다 허브 엑기스 향을 소량으로 찍는 듯 마는 듯 발라줍니다.

공짜로 주는 허브향을 한 잔 마시고,  허브 사탕도 한 알 줏어 먹고,  지하 매장,  이층 골고루 돌다가 나오면 그제사 목 뒤가 향긋한 물파스를 바른 듯,  화~ 한 느낌이 납니다.

돌아오는 내내....그 느낌이 상쾌합니다. 온 몸이 다 개운해지는 느낌이군요...으음, 그래서 허브가 몸에 좋은 거였군요.

집에 온 한 사흘간은 그 날, 입고 갔던 옷에서 허브향이 내내 폴~폴~ 풍겨 나왔습니다.

 
 

바깥에 나와 주변 건물들을 대충 렌즈에 담아보았습니다. 입소문이 났는지 관람객들이 엄청나더라구요~

이 곳에는 허브베이커리, 허브음식점, 이동갈비집도 생겼더라구요. 구경도하시고 꽃도 사가시고...출출하면 식사도 하시고....관람료? 걱정마세요~  그 건 무료예요!

그냥 필요하시다면 봄 화분용 거름이나...허브꽃? 아님...작은 선물용? 바게뜨? 그  건 다 관람객 마음이랍니다.          

 
 

▲보이는 작은 방갈로는 숙박시설이 되어있어 예약을 하면 사용 할수 있답니다.                     

 
 

98년 10월에 개장한 포천 허브아일랜드는  약, 10,000여평이 넘는 부지에 야외정원과 실내정원등이 잘 조성된 곳이다.
허브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도록 꾸며놓았다.
허브를 이용한 각종 허브공방, 허브카페 레스토랑, 체험실 등의 시설도 갖춰져있어서 가족들이나 연인과 함께하면 좋다.

 

★서울 도심에서 자가운전은 강북 강변도로를 달리다가 동부간선도로를 이용, 포천으로 들어오면 아주 쉽습니다.

포천, 시내에서는 포천의료원▶신북온천방향으로 가시다 보면 안내 팻말이▶포천허브 아일랜드★

 

상세한 길 안내/ 오시는 다양한 길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허브아일랜드 http://www.herbisland.net/

 

※주변에는 [신북온천]이 있습니다.

 
 

 

 

▲ 각종 다양한 체험 이벤트

 
 
 

글/사진:이요조

관련업소 샵블로그 바로가기
허브아일랜드

031-535-6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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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아일랜드

031-535-6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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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 매바위의 진혼곡


2월 26일은 바람이 불어 얼마나 추웠는지, 내일 모레라야 음력 이월이고 영동할미 바람 올리는 달인데,

벌써 앞당겨 부는 맵찬 바람 맛을 보여주는 전초전인지 무슨 바람이 이리도 거센지 모르겠다.

체감온도는 아마 영하 십 몇도 더 너머 될 것 같았다.

사진을 찍는 내내 금속성 카메라는 저도 덩달아 얼음처럼 차디차서 손이 얼어서 곱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늘 좋은 것만, 늘 예쁜 것만 눈에 보이는 게 아닌가보다.

이 태전 쯤 처음으로  모세의 기적이라는 제부도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조개를 또한 처음 먹어보는 나는 체했는지, 아니면 조개구이용 착화탄 가스를 마셨는지,

어찔어찔 어지럽고 속이 답답한 게, 영 기분이 마뜩찮았던 기억이 난다.


일행을 식당에 두고 혼자 바깥바람 쐬러 나왔다가 바라다 보이는 매바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때는

바야흐로 봄의 시작인 4월이었다. 멀리 보이는 드러난 작은 바위섬 그 땐 이름도 몰랐었다. 묘하게

생긴 돌 섬 정수리, 그 위에 진달래가 한 무더기 붉디붉게 얹혀있었다.

마음이 부쩍 끌린 나는 그 곳에 꼭 한 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동행들은 담소하느라 구경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나는 불편한 속을 진정시키느라 생각만으로 그쳤었다.


제부도에는 약국이 없다.

그 때 안 사실이다. 함께 간 언니가 조개구이를 먹다말고 역시 그런 증상이 왔다.

얼마나 놀랬는지... 나중에사 깨닫고 보니 지난 일도 생각나고, 착화탄의 일산화탄소 때문인 것 같았다.

영종도에 조개구이 집은 죄다 가스불인데 제부도는 모두 착화탄이다.

겨울 실내에서는 환기에 조금 신경 쓸 일이다.

언니 바로 코앞에서 새우마저 구웠으니, 새우구이 냄비 아래 깔린 소금이 구워질 때 나는 냄새는

또 얼마나 머리가 아픈데... 역시 아직까지 약국이 없었다.


섬에는 갇혔고 식당 주인이 건네준 정체불명의 캡슐 알약을 급한 대로 받아먹고는 그런대로 진정되었다.

무슨 약이냐고 물으니...중국제 소화제란다.  아무튼 그 덕인지 좀 나아졌다.

종업원 지나가는 말로 저희들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단다. 저런!

제부도에서 착화탄 조개구이를 먹을 때는 환기가 잘 하며 먹을 일이다.


우린 밀물 때라 섬에 갇혀버렸다. 물길이 틀 때까지 오도 가도 못하는 나그네가 된 셈이다.

섬에 갇힌, 간혹 이렇게 갇혔다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그 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려 그 당시에는 야생화에 반했던 적이라  처음 보는 라이락

비슷한 갯가 언덕에 서식하는 분꽃나무 꽃을 두어 장 찍고는 겨우겨우 운전을 하고 돌아왔었다.

언제나 이런 곳에 오면 비주류파인 나는 유일무이, 전천후 운전대를 잡아야하므로...

..........

 

그 때 못가 봤던 안타까운 심정에 추위가 아무리 모질어도 매바위를 끝까지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식사 전에 매바위 부근을 갔다.

식사 후라면 또 못할 뻔 했다. (환자가 생겼으므로)손이 곱아서 잘 펴지지 않는데도 계속

강행군했다. 바닷바람이 무척 찼다. 제일 서쪽에 있는 마지막 매바위는 사람 얼굴을 닮아 있었다.

서쪽 먼-바다를 바라보는, 바다에 떨어지는 석양빛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그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엇!

이 게 뭐지?

모르긴해도,  좀 섬뜩했다.

얼핏봐도 방금 다녀간 흔적이다.

혹? 이월 영동할미 바람제를? 아니네~  음력 이월은 낼 모렌데....그럼? 

누가 여기서 목숨을 던졌었나 보다. 그래서 그 원혼을 달래주려는 모양이다.

왜 사람들은 물에 빠질 때 꼭 신발을 벗어두고 가는지? 해서 신발 신고 가라는 뜻에서 새 신발과

귤하나에 초 하나, 커피 한 잔을....커피가 든 종이 컵은 바다에다 찌꺼렸는지 너머지 조금 남았는데

쓰러져졌고 작은 초는 바람에 꺼져 있었다. 

 

그 곳 바위에 굴 딱지가 더덕더덕 붙은 걸 보면 여기는 물에 잠기는 곳이다.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망자는 하필이면 무수한 곳 다 두고 이 곳까지 찾아 와서 얼마나 혼자서 깊은 고뇌를 했을까?

물이 찼을 때... 매바위에 올라갔다가 바다에 첨벙, 뛰어내렸을까?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스스로 밀물에 갇혔다가 엉겁결에 당한 사고였을까?


위를 올려다 본 순간 나는 일순 멈칫! 했다.

외로운 소나무 하나가 구부정히 날 먼저 내려다보고 있다. 혹..저기서?

추운 날 바닷가에서 나는 웬일인지 정말 쓸데없는 상상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었다.

밀물일 때 이 곳에 왔다가 이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갔단 말인가?

바위산은 이렇게 가파르다. 여자 같은데....  록클라이머 아닌 담에야....설마~

이 깎아지른 듯한 난공불락의 절벽을....아냐, 아닐 꺼야~

마침 물이 서서히 차 오르기 시작했다.

날 바라보는 눈이 또 있었으니, 바로 그 부근에 있는 갈매기 한마리가 오리처럼 물가에 떠 있다.

아픈가? 자맥질도 않고 괜스레 하릴없이...


물에 빠진 여자? 아가씨? 그녀의 원혼일까?


아마도 오늘이 그 날이거니~~ 딸을 위해 기도하러 온 엄마를 보러 가까이 왔을까?

그래서 차마 가지 못하고 맴돌고 있나보다.

아무튼 유난히 귤을 좋아했던 젊은 여자임에 틀림없을 거란 혼자만의 상상을 했다.

갈매기는 처음엔 날 보고 움칫하다가 내가 키를 낮추고는 쪼그려 앉아서 엉금엉금 다가가자

마음을 놓은 듯....

경계를 풀고는 계속 그 자리에 유유히 떠 있었다.


기분이 묘하다.


매바위를 떠나와서 식당에서 내려다보니 벌써 물이 들어와 있다. 정말 금세다.

매바위는 이내 바닷물에 그 허리를 잠그고 섰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는 어찌됐을까?  지금쯤 바다 위를 둥-둥~  떠가고 있겠지...

아까 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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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이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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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만해도 이랬었는데....되돌아나와  금세 식당에서 바라 보니...▲

 

** 괜시리 봄날에 너무 무겁다구요?  까이꺼 머..그람..우리, 웃음으로 확~ 날려 버리자구요!

 


▼ 내 보기에는 아래 바위 얼굴들이 우리 심심한데...우심뽀나 하는 것으로 비쳐보인다.

흐, 나으 상상력이란  아무튼~  ##$%^!! 

각도는 제대로 나왔는데, 오른쪽 석상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원전을 읽었는지, 불편하다고 코를 깎아내는 성형을 시도했나보다. 아마도... 대충, 둬번은 더 해얄 듯,  
                                                                          

 

  숨은 그림찾기 고래를 찾아라!/국보 285호

 

숨은그림찾기,고래를 찾아라! 

 

 

반구대(盤龜臺) : 거북이를 닮았다하여 반구대라 부른다.사진은 거북이 머리모습,

혹은 포은(정몽주)대라 부르기도...

 

녹음이 짙은 여름인데도 대곡천이 말랐다.

아마도 심한 여름 가뭄인 듯.../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위치설명

암각화 까지는 입구에서 대략 2Km

오른쪽 하단부/반구대 집천정

왼쪽아래/ 반구서원, 유허비 팻말을 2~300m 지나온 곳,  

중간 붉은 표지/ 공룡발자국화석이 있는 바위

대곡천 마지막 부분/암각화가 있는 위치는 더 내려가서 있다네요. 그러니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진을 보고 어림짐작한 개인적인 생각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조만 하시라고,

 
 
 

경치가 그냥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부근에 '선사문화전시관' 을 세우느니..말도 탈도 많다.

반론의 주장은 요는 물이 오염되면 암각화가 그 영향을 받을까 우려해서이고 울산시 당국은

폐수처리로 문제없다고 큰소리 친다는데..... 

 
 

 

겨울이라 건천이 된 모습, 그 덕에 암각화는 요행으로 볼 수 있었다.
바짝 가까이 가 보는 것은 겨울 건수기에도 드물다 한다.
누가 놓았는지...징검다리대신 폐타이어를 놓아서 겨우 가까이 다가갈 수가...

 
 

암각화 부근, 역시나 침수되는... 

 
 

이 곳이 물로 가득 찬다고 한다 일년중 8개월이 만수라는데...동안 암각화는 물 속에 잠긴다.

 

여행후기


 

나 어렸을 적에는 울산이라면 맨 처음 고래를 연상했었다.

40년도 더 전에 일이니, 봄이 오면 리어카에 고래 고기를 실은 아저씨들이 고래 고기를 사라고 외치고 다녔었다.

울산 방어진에서 잡은 고래라며 고래 고기는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맛이 더 난다하였지만 어렸을 적 먹어본 고래 고기 맛은 처음엔 맛있다가 이내 어린 아이 입맛으로는 질리게 만들었다.  내 유년의 입맛에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울산을 물어보면 아마도 고래보다는 공업도시로 먼저 쉽게 떠 올릴 것이다. 그 울산에 고래그림이 있단다. 반구대라는 경치 좋은 곳에, 그런데 일년 12달 중 8달은 물에 늘 잠겨있단다.

울산 공업도시로 물을 대기 위한 댐이 건설되고 이 암각화는 그만 물 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암각화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말이 많았을 터이지만... 암각화의 발견은 그 후의 일인 듯 하다. 1995년 6월 23일에 국보 285호로 지정되었으니,

 

절경이라기에 들어섰는데,  두동 방면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길이 좁고 가파르고, 과연 그런 귀한 그림을 만나 볼 있을까 부쩍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 곳은 지금 KTX의 굽은 철로를 천성산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통과할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차 들어갈수록 길이 좋아지며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뭔가 소중한 보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보물보다는 주변경관이 좋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인데도 푸른 대나무 숲과 굽이 흐르는 물길과 아주 큰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닌가?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없다. 인가도 보이지 않는다.


울산은 나 어릴 적의 실체도 보지 못한 그림 속의 기억만 가진 지구상의 제일 큰 동물! 그 고래가 많이 잡히는 줄 알았는데, 그 고래는 이 곳 그림을 보니  먼-옛날 선사시대부터 포경되어 왔었나보다.


울산 태화강 상류, 이 조용하고도 멋진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이 골짜기에 고래그림이 있단다. 믿기지 않 는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자는 노래는 있지만 이 첩첩산중 오지에 고래그림이라니..? 의아했지만 분명 있었다. 그림은 선사시대 것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미하게 보였다.

숨은그림찾기처럼 고래, 사람, 사람 얼굴, 물고기, 배, 그물...

그 외, 고래는 자세한 해설을 빌리자면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이다.

'새끼고래를 업은 어미고래, 작살이 박힌 고래, 등에서 물을 내뿜는 고래등 48마리의 고래 떼가 절벽 바위그림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또한 함정에 빠진 호랑이, 새끼를 밴 사슴, 교미하는 멧돼지, 토끼등 육지동물도 있다.

그 사이로 7명의 사람들이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고래사냥에 나섰고 가장 꼭대기에 한 사내가 크고도 긴 나팔을 남근이 곧추서도록 힘껏 불고 있다.

일본벽화에서도 더러 나타나는 이런 그림은 신성한 것으로 종족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례에도 직접 벌거벗고 남근을 과시, 상징했다고 한다.

국보 제 285호로 지정된 반구대의 암각화, 바위그림을 일컬어 바위동물원, 사냥 그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부분 참조

울산이 공업화하면서 공업용수를 대기위해 댐을 만들고 이 곳은 댐 물이 가득 차서 겨울 건수기 때가 아니면 볼 수가 없다는 곳을, 겨울도 비가 잦으면 가까이 볼 수도 없다는데, 요행히도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보니 돌비석에 새긴 글씨를 알아보는 기간은 대략 500년 전후였다. 장소가 마침 좋아서 풍화작용이 덜 한 곳은 7~800년까지도 가는 걸 보았지만 아무리 바위에 바로 새긴 거라지만, 선사시대의 그림이 여태까지 있다니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다가가서는 설명이 없었다면 어디에 무슨 그림인지 정말로 숨은그림찾기 해야 할 듯 하였다.

그 말 많던 도롱뇽보호 때문에 대구에서 부산까지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던  KTX가 새로 뚫리는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이 곳!

산 너머 바깥에는 21세기 고속철도가 다니는데 산 안쪽에는 수려한 풍광자체도 마치 선사시대의 모습 그대로 정지된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있는 곳이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그 학덕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고 대나무 숲을 벗어나면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터도 나오는 그런 선사시대의 냄새마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다.

 

 "우리나라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라고 한 '유 홍준'님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어로(漁撈)의 행위를 묘사한 고기잡이배와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실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빌고 그들에 대한 위령(慰靈)을 기원하는 주술 및 제의(祭儀)를 행하던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는 안내 글을 접하며 그들의 성소이자  그림은 그들이 추구하는 기도 같은 신앙임을  알 것 같았다.

산길이라 굽이굽이 좁은 길을 되돌아 나오며 마치 오래전 옛날로 꿈을 꾸듯 거슬러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사진/이요조

 

 

 
 
 
울산공업단지가 설정된 후인 1960년대 중반 공업용수를 위하여 범서읍(凡西邑)사연(泗淵)에다
반구천(盤龜川)의 하류를 막아 사연댐을 축조하자 집수(集水)로 수위가 높아져서 귀중한
암면각화가 수중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 아래는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 도중 사진 중앙부에 너럭 바위에 '공룡발자국화석' 이 있는 곳이다.

 

 

○ 다리도 건느고.....

 

 

○ 대나무 정원을 지나는 스치는 바람처럼...한참을 더 지나쳐 가야한다.

 

 

○ 대나무 정원을 바로 지나 (右/공룡발자국화석)

한참을 더 걸어들어가면 드디어 나타나는 곳! '반구대암각화'

 


 

암각화를 보기에 제일 좋은 건수기라는데도 징검다리를 두 개나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 

 

 

▲ 盤龜臺 부근 모습, 겨울과 가을 단풍모습(가을이미지검색) ▼

 
 

○ 가로지른 직선으로는 1Km 도 안 되는 지척인 곳에 또 다른 그림이 돌에 새겨져 있다는데.

이름하여, '천적리 각석'

 

 

 

○ 이 곳 절경은 산 속에 묻혀서 계속 알려지지 않다가 고려말엽 포은 정몽주 선생이 유배되자

언양요도에 귀양와서 우거할 때 여기를 자주 찾아와서 경관을 즐기면서 알려졌으며, 그를 찾는

유생들에게 학문의 영향을 주게되었다 한다.

 
 

▲ 반구대 포은선생의 유허비/거북의 머리자리에 비각이 서있다.

반구대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맞은편에는 중창한 반구서원이 있다.

 

▼ 대곡천 집청전

집정천 오른편에 아마 반구서원이었지 싶은데...조금 들어 앉은지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지역인들의 힘으로 다시 중창했다 한다.



 

 

○ 울산대곡리반구대 암각화

종   목   국보   285호
명   칭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  (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분   류   각석
수   량   1기
지정일   1995.06.23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시   대   기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울주군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 여행정보

좀 더 상세한 학술적인 것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 :  www.ulju.ulsan.kr/bangudae


 

 

▲ 암각화의 그림들/실제로는 가려내기 힘들 정도로 무척 희미하다.

▼ 홈페이지에서 가져와 편집한 이미지

 
 

 

여느때는 이 곳에서(약 300m거리)암각화가 어디쯤에 있을거라는 짐작만 하고 간단다.  

 

 

 

▼ 반구대 공원 조성길에서 암각화 상징 벽화

 

 

◈또 다른 볼거리

◈대곡리 공용발자국화석.


이곳의 공용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용들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공용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근기가 반복되고 열대 역풍의 영향을 내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광야 일대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대천곡에는 여러 장소에서 공용발자국이 확인되지만 이곳의 공룡발자국화석은 보존 당대가 가장 양호한것이다. 이곳의 공룡발자국은 약 100m 넓이의바위에 세겨져 있으며 용각류 팔용과에 속하는것 (60)톤급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것 고성 용족인 등 24개 다 일정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공룡들도 이 일대를 평화롭게 배회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이곳의 지층은 정상계 하향층군 시연지층 중회색 사질이 암층에 속하며 이 공용발자국 화석은 지질시대 울산 지역에 대한 자연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바로 이 대나무 숲을 돌아 나가면 제법 큰 너럭바위가 나오고 안내팻말이 서있고,

 
 

○ 일억년 전, 공룡 발자국이 여러군데~ 그 흔적이 널려 있었다.

 
 
 

○ 찾아가시는길

 

교통안내 : 1) 공항, 역->울산시외버스터미널->언양시외버스터미널->반구대,천전리각석 입구하차
           2) 울산공항 -> 울산시외버스터미널 : 1-2,126,305,313,314,315,317,318,319,327,345번
           3) 울산역 ->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305,313번
           4) 울산시외버스터미널 ->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513,515,516,313,314,317번
           5)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두동,두서방면 : 361,365,369,373번

정보제공자 : 울산광역시청 관광과 052-229-3852
 
 작성기준일   2005년 11월16 일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daum여행마스터 이요조의 블로그

 

'나비야 청산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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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귀한몸 나가신다! 왕우럭조개 

이름부터 특이한 왕우럭조개를 찾아 여수 앞바다에 나왔는데요. 남도엔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히구....징그러~~   (상하 이미지는 검색)                                 

 

 

이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2월15일자 영종도 기행..
그 중 먹거리 자료를 두고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보니 오늘(3월 4일)아침, 7시?  KBS2
[세상의 아침]에 왕우럭 조개가 나오더군요.  허걱! 저거 내 시티N에 쓸 자룐디, 워쪄?

여수 앞-바다에서 잡아 오는 족족 일본으로 나간다네요.
쩝!  왜 좀 맛나고 귀한 거는 몽땅 일본으로 보내야 하는지...

거.우리도 맛 좀 보고 삽시다!


어릴 때는 맛을 잘 모른다.
어른이 되고보니 맛도 철이 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린 입맛에 아무런 맛도 없던 조개맛을 이제야 머리가 희끗해서야 안 것이다.
조개의 참 맛을 알았으니...사흘이 멀다 않고 서해로 출정을 나간다.

지난 주말(2월 26일)에도 조개구이를 먹으러 제부도엘 갔다가 '코끼리조개'를 콜! 했더니
생뚱맞은 종업원이 시침미를 떼며 모른단다. 사장님께 쪼르르 다녀와서는 그 조개는 없단다.
맛을 아니까, 맛있으니까..먹고싶고, 나는 코끼리조개에게 당장 수청 들라 일렀고..

돈을 암만 줘도 정말로 물건이? 없어서 못 구해드린단다...실갱이~
(꽃을 보면 응당 따고싶고, 만지고싶고...머시냐 음냐음냐!! 맛을 아니 당연지사 묵고자프고
내가 으원나리라면..이제는 국민이 끌어내리는 그런 법에 따악 걸리는 구케으원 제 1호가
되게따...요상시런 발언으로~)

 

 

요즘 웰빙바람으로 모 호텔에서도 인기가 급부상한다는데..

미국에서도 인기인 초대형조개,왕우럭은 구이덕(Geoduck)이란 이름으로 귀하신 몸값이

여타 조개의 10배란다.

 

 

허걱....웬만하면 말리고 싶었다. 모처럼 만찬 식탁위에다...이 무슨 해괴망칙한,

 

요조생각▶어허이~ 보아하니 생긴것이 상것 같은데 냉큼 바닥에 내려 앉지 못할꼬오~~고연!!

 

요조▶"아줌니...넘 넘 징그럽사옵니당"

 

주인▶"아니와용 손님...드셔보시고 말씀하시와용, 그 맛은 펴엉쌩 잊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용"

 

 

나으독백▶이걸 먹으라능겨? 말라능겨? 워메 징그러~ 입맛 떠러지능거...워째야 쓰까이?

 

 

주인님▶ 불위에서 늘어질대로 늘어지고 커진 넘을 욜케 껍닥은 가위로 잘라 번지시쑈~

 

요조▶ 뜨아!!!!!!!!!!!!

           잘라진 수관말고 몸피를 보셔야는데...어쩌믄 달랑 양쪽으로 동그란 거시 영낙읍는

           쌍X울 가튼거이....   에혀~ 더 이상은  말 모텨~

 

 

주인님▶드셔보씨셔~  이 코끼리는 말이씨...날 거로도 회쳐 묵능당게요~ 초밥으로 일본넘들이 월매나 조아하는디...

 

나으독백(차마)▶ ㅋㅋㅋ 아줌니 모양이 참말로 요상하네요 잉?

 

 

나▶없다. 죽었부럿쏘....말 시키지 마삼.....사진도 이 걸로 끄읕~

사진에 그 긴-것이 잘라진 즉시 없어진 거 보이남유?

나, 비싼 전복 좋아하는데....맛이 비슷하기도...아니기도 ...씹히는 치감이 살캉살캉, 오도독...

 

나▶ 아덜아, 넘 마시따....(아! 이 압축된 말은 맛난 먹이를 두고도 눈물, 콧물, 찔끔의 모성애!  맛있는 것을 두고 새끼에게만 권하는.....곁에 있는 냄푠 무시, 사랑은 절때 내리사랑)

 

아들▶엄니~ 나는 별론디요 ??

 

나▶긍게 이늠아, 입맛에도 철이 있다잖냐.....싫음 말엇!

 

.

.

.

.

.

 

한 열흘 뒤 제부도에서 코끼리조개를 애터지게 부르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누가 이 조개(코끼리)를 모르시나요?"

 

누굴까요??

 

 

 

 

▶코끼리 조개구이를 하는 집 찾아가기 /을왕리 마시란해변

 

 ☞ 마시란 해변, 설원에 지는 노을  ☜ click~

★클릭하시면 마시란해변의 정취와 풍광을 감상하실 수가 있습니다.

볼거리와 먹거리가 함께 하는 곳!   찾아오시는 길 안내가 있습니다.

 

 

마시란 해변가에 조개구이집들입니다.

(동민네는 끝(위)에서 두 번째 집입니다)

 

 

 

 

 

 

글:그림/이요조

* 아래는 검색글입니다.

 

 

 

  海松貝 (みるがい 미루가이) - 왕우럭조개

學名ミルクガイで、海松(ミル)という藻が殼に生えているために、この名がついたといわれる。ミルガイはこれを短縮した通稱。早春から初夏にかけてが旬で、すしネタには固い黑皮におおわれている水管をさっと熱湯に通してこの皮をむいて用いる。身、ヒモ、柱は刺身などに添えるとよい。

ミルガイは鮮度が落ちてくると殼の色が白っぽくなってくるので、選ぶときにはなるべく色の黑っぽいものを。千葉·富津産、愛知·蒲郡産を使用。

 
학명은 미루쿠가이로 껍질에 미루라고 하는 해조류가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짧게는 미루가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왕우럭조개라고 불린다. 스시에 이용되는 것은 검은 껍질에 싸인 수관(水管)으로 살짝데쳐 껍질을 벗겨 준비한다. 몸통과 패주 부분은 사시미 등에 곁들여도 좋다. 왕우럭조개는 선도가 떨어지면서 껍질의 색깔이 하얗게 변하므로 구입할 때에는 가능한한 껍질의 색깔이 검은 것을 고르도록 한다. 여기서는 치바현의 훗쯔(千葉·富津), 아이찌현의 가마고오리(愛知·蒲郡) 산을 사용하였다.

 

 

 

 

 

왕우럭조개 스시(ミル貝, 미루가이)
견패 혹은 미루가이라 불리는 조개류다. 대부분의 조개는 살을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기고 있다 꼭 필요한 때만 드러내는 데 비해 왕우럭조개는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에 두툼한 몸집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 전복처럼 오도독 씹는 맛이 있고, 깔끔한 감칠맛에 비린내가 거의 없다.
●최적기 1~6월

 

 

 

 

 

 

담백하고 쫄깃한 맛 일품
수험생·직장인 건강식 인기
소량 생산·대부분 수출
영계와 보신탕을 능가하는 보양 식품이 있다.
수심 20m깊이에서 자라는 왕우럭조개가 그 주인공.
왕우럭조개는 개량조개과, 왕우럭속에 속하는 비부착성의 대평 조개류로서 남해안의 여수, 거제, 사천, 남해 연안에 서식하는 종으로 잠수기 어업에 의해 어획되며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하는 고급 조개류이다. 하지만 성패로 성장하는데 약 3∼4년 이상이 걸릴 뿐만아니라 어획강도의 증가 및 어획장비의 발달로 현재 자원량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왕우럭조개는 각 지역마다 명칭이 다른데 여수에서는 ‘우럭조개’라 부르고 거제에서는 ‘껄구지’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 3년이상 자라야 채취가 가능하며 중량은 1.5㎏을 넘는 것도 있을 정도다.
일반적으로 키조개나 개조개와 함께 살고 있는 경우가 많고 수심 20m 전후의 깊은 모래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잠수부가 분사식 고압 물펌프를 사용해 주변의 모래펄을 헤집고 잡는다.
왕우럭조개는 약 80℃정도되는 더운물에 1분정도 살짝 데치면 수관부의 껍질이 그대로 벗겨지고 패각으로부터 육질이 쉽게 분리된다.
특히 100g당 단백질(16.4g), 칼슘(85mg), 철분(6.3mg), 비타민A 중 레티놀 등이 많이 함유된 육질은 연한 살색을 띠는데, 큰 것 한 마리의 육질은 영계보다 클 정도라고 한다. 이 육질을 잘게 썰어 인삼과 찹쌀, 마늘, 참기름 등을 넣고 푹 곤 후 잣을 띄워 먹으면 여름철 음식으로 보신탕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다. 최고급 조개로 취급받는 일본에서는 초밥을 만든다거나 회로 즐겨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회로 즐겨 먹는 경우가 많으나 숯불에 구워 먹는 것도 담백함을 즐길 수 있어 선호하는 조리법이다.
주로 가장 많이 생산된 12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가 제맛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담백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의 우럭조개는 많이 잡히지 않는데다 대부분 수출을 하고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값도 다른 조개의 10배에 이르는 1kg당 1만8천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여수지역에서는 국동 잠수기 수협 인근 횟집을 찾으면 싱싱한 왕우럭 조개 요리를 맛볼 수 있다.-es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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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네(조개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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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산 자재암/원효와 요석의 사랑을 찾아~

       

      소요산 가는 길

       

      지난 밤 때 아닌 춘설이 내렸으니  춘색이 완연한 때에 미처 올리지 못한 폭설 사진, 글을 이제사 올립니다.


      2월 7일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산에 가고싶어서 준비를 하고는 너무 많이 오는 것 같아 밍기적대다가 소요산을 갔었습니다.

      도봉산보다는 소요산이 인적이 드믈고 산세가 깊기 때문입니다.

      웬걸 집을 나서니 눈은 그쳤고 벌써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다소 녹아내렸을 거란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소요산 인적이 거의 끊긴 공원 산책로엔

      제설차가 일차 지나가고  염화칼슘을 뿌리는 차가 들이닥쳤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따뜻한 날씨에 눈은 곧 녹을 터...괜시리 길바닥에다 돈을 뿌립니다.

      아무리 관광지라곤 하지만 인적도 별로 없는데 그냥 가만 놔두면 좋지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쌓인 눈을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냐구요?

      아닙니다.

       

      각종 조류들이 소음에 놀라거든요.

      요즘 산에 올라 야호~도 외치지 말라는 세상에 제설차,1,2,에다가....산이 다 흔들릴 지경입니다.

      눈살이 찌푸러졌습니다.

       

      전, 겨울 찬바람에는 귀가 아픈 알러지가 있어 언제나 귀를 가리는 모자를 즐겨 씁니다.

       

       

       

      차들이 다 지나가고 정적이 감돌 때...그 모자를 벗었습니다.

      가만히 귀를 열어보면 새소리가 들립니다. 소요산은 희귀한 새들이 많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곤줄박이, 파랑새,어치도 살고...어치란 넘은 다른 새들의 울음흉내도 곧잘 낸답니다.

      새들은 각양 각색의 울음과...음악보다 더 고운 그 소리 색깔이 저마다 다 다릅니다.

      어디가서... 온 산이 울리도록 새들이 서로 이야기 하는 듯  맑게 지저귀는 귀한 소리를 듣는답니까?

       

      어치

       

      전 한여름 적막한 높은 산에서 파리 한 마리의 앵~ 거리는 소리에서도 기쁨을 느낍니다.

      무더운 한여름, 아니면 큰 비바람 폭풍우 뒤에 저는 산을 잘 오릅니다.

       

      늘 듣지 않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비 온 뒤에는 콸콸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듣기에 그리도 좋습니다.

      시냇물들이 마치 소풍가는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 처럼 즐겁게 앞다투어 목청높여 수다스럽게 흐릅니다.

      그 소리가 경쾌하여~ 참으로 나는 듣기 좋아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마구 느끼게 됩니다.

      곤줄박이

       

      눈이 목화꽃 핀 것 같이 보기 좋습니다.

       

       

      제설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에어(air)로 눈을 쓸고 있었습니다. 고맙지만...이런 곳에다가 모래나 염화칼슘을 뿌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용하게~~ 쉬잇! 소리없이.....가만가만~~

       

       

      수행하는 길은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르는 것 같습니다.

       

       

       

       

      자재암, 산사에 들었습니다.

      제가 불자가 아니라서 언제나 그냥 모른채하고 지나치던 절입니다.

      오늘은 반갑게 인사하고 친한 척 해보려 합니다.

       

       

      자재암 바로 앞의 폭포입니다.

      돌계단 형태로 쌓은 축이 특이합니다.

       

       

      폭포가 꽝꽝 얼었습니다.

      추우면 얼어주고 따뜻하면 녹아내리는 물의 선한 성정이 참으로 좋습니다.

      얼었다가 멈추어 쉬어가는 그 여유자적한 흐름이 참 편안합니다.

       

       

      마음을 열고보니 사찰의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답습니다.

      나는 오늘 자재암 절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눈으로 어루만져 볼 심산입니다. 

       

       

      눈 속에 갇힌 것 같다는,,,이런 기분 참으로 신선하군요. 비록 제 발로 걸어 들어 온 산이지만,

       적막뿐인  고요한 눈 쌓인 산사에서

       

      눈사람, 셋을 만났습니다.

       

      자분자분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그 옆에 제법 귀하신 신분인 듯한(행장을 보아하니) 분이 침묵으로 가만 지켜보십니다.

       

      황량하고 빈 겨울 숲도 마다않고 새들은 청아하게 노래합니다.

      얼음장 밑으로 졸졸 녹아 흐르는 시냇물은 ...잠시도 게을리 않습니다.

       

       

      소나무 가지가 휘어질 듯 하는군요.

      이래서 눈오는 겨울 밤 깊은 산사에서는 눈에 지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야심한 밤중에 온 산을 메아리로 울린답니다.

       

       

      전나무입니다. 받을 것은 받고 버릴 것은 버렸더니....'나' 곧 '자아'가 형성됩니다.

       

       

       

       

       

       

      禪한 線은 仙의 경지에도 닿을 듯 합니다.

       

       

      선은 곧 무애의 길과도 맞닿아 보입니다.

       

       

       

      자재암  전경입니다.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윤회를 거듭함입니다.

       

       산사의 눈 덮인 지붕 끝에서 求道 를 찾아 봅니다.

       

       

       

      어찌보면 처마가 위로 약간 치켜진 모습이 아래에서 바라다보니 약간 빙긋이 미소를 띄는 것도 같습니다.

       

      요석(공주)궁지를 나타내는 비석입니다. 요석공주는 소요산 아래 작은 집을 짓고 원효를 바라보며 머문 곳이라 합니다.

      이 곳은 햇살도 바람도 흐르는 물도  원효와 함께 느낄 수 있는, 하여 공주의 그리움을 씻어줄  자재암과는 지척인 거리입니다.

       

       

      저도 오늘 자재암과 안면을 트니...

      이런 멋진 모습도 보여줍니다. 절 뒷편으로 돌아가니 말입니다.

       

       

      무언가 설법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큰 바위 얼굴 같습니다.

       

       

      산사는 온통 흑백 뿐입니다.

       

       

      내려가는 길에...

      "어이~ 친구! 눈도 쌓였는데 뭐가 그리 바쁜가? 한 잔  어때?" 라며 유혹하는군요!

       

      서유기의 손오공이 타고 다님직한 근두운이 하루종일 눈 녹이느라 애쓴 햇님을

      모시러 나왔다가 제게 따악 들키고 말았습니다.

       

       

      폭설이 쏟아지는 봄... 흑백의 아련한 외출에서 마악 돌아왔습니다.

      까슬하게 건조했던 심신이 축축하니 물기를 되찾아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든 가까운 곳이라도 대문밖만 나서면 제게는 여행입니다.

       

      눈이 많이 온 날은 제 집 마당안의 뜰도 낯설어 보입니다.

      늘 보아오던 자리도 낯 선 여행지가 되어주는 눈이 내려 쌓인 날에는,

      먼-곳을 떠나 돌아 온 듯  설레는 만남의 귀한 시간이 되어 가슴에 안깁니다.

       

       

       

       

      글:사진/이요조

       

       

       

       

       

       

      소요산 가시는 길

       


      위    치 :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 


      관 리 처 : 소요산 관리사무소(031-860-2065)
                 483-100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1번지

      홈페이지 : www.ddc21.net

      개    요 : 동두천시 소요동에 있으며 한수 이북 최고의 명산, 또는 경기의 소금강 등으로 불린다. 서
                 울에서 44km, 동두천 시청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의 거리에 있는 소요산 (587m) 은 해발은
                 낮아도 수목과 폭포, 봉우리가 줄지어 있다. 소요산에는 곳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
                 야기가 스며 있다.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별궁터와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도 있고 정
                 상인 의상대 옆에 있는 공주봉(원효가 요석공주를 두고 지은 이름)도 있다.
                 산 중턱의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으로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심
                 산유곡인 이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
                 여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자재암 주변엔 아담한 물줄기
                 의 폭포가 널려 있다.  원효폭포, 옥류폭포, 청량폭포, 선녀탕 주변엔  여름철마다 피서객
                 들로 북적댄다.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신비롭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원효 (元曉 617-686) 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 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
                 선교활동을 펴,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
                 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
                 배,  몽매하고 늙은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고 거문고를 켜
                 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알게 되었다.

                 김춘추의 둘째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
                 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51세) 부왕인 태종무열왕의 과부공주인 요
                 석과 만나 얼마후 설총을 낳고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

                 결혼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
                 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를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원효의 결혼에의 관심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
                 만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보이리라는 사상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소요산에 가면 원효가 과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높은 산 불끈 솟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들 곳이요,(원효대)
                 푸른 소나무 깊은 골은 수행자가 깃들 곳이니라.(자재암)"

                "주리면 나무열매를 먹어서 주린 창자를 달랠 것이요,(소요산)
                 목이 타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힐 것이니라.(원효폭포)"

                "메아리가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하는 법당으로 삼고,(나한전-굴)
                 슬피우는 기러기를 기쁘게 마음의 벗으로 삼을 것이니라."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세조 10년에 간행된 반야바
                 라밀다 심경약소 언해본이 완벽하게 발견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으
                 로도 유명하다. 의상대는 소요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어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장관이다.

      이용요금 : - 어    른 : 2,000원
                 - 학    생 : 1,200원
                 - 어 린 이 :   650원
                 - 주차요금: 2,000원(소형)
       
      등 산 로 : 1) 관리사무소  매표소 → 일주문 → 백운암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선녀탕 → 자재암 → 관리사무소(5.71km, 1시간 30분)
                 2) 관리사무소  매표소 → 일주문 → 백운암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 상백운대 → 선녀탕 → 자재암 → 관리사무소(6.21km, 2시간 30분)
                 3) 관리사무소  매표소 → 일주문 → 백운암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 상백운대 → 칼바위 → 나한대 → 금송굴 → 자재암 → 관리사무소(6.89km,
                    3시간)
                 4) 관리사무소  매표소 → 일주문 → 백운암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 상백운대 → 칼바위 →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 → 구정터 → 일주문  →
                    관리사무소(8.19km, 43시간)
                
              ※ 소요산은 소요산역이 있는 소요동이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입구에서 중간의 주차장과 상
                 가를 지나  그저 평탄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소요산 자재암' 이라 쓰인 현판을 단 일주문
                 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조금 오르면 기암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원효폭포가 있고 그
                 폭포아래 속리교라는 다리가 있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으로  난 계곡
                 길을 따라 오르면 남쪽 능선 위,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587m)로 바로 오르게 된다.
                 속리교를 지나  왼쪽의 난간으로 난 길을 계속 오르면  절벽을 이룬바위가 나타난다. 원효
                 대사가 수도 한 곳이라는 전설이 서려있어 원효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양쪽으로 치솟은 암
                 벽 사이의 숲길을 오르면 곧 세심교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백운암 돌담 옆을 지나면 곧 자
                 재암에 닿는다. 자재암 옆에는 나한전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굴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주
                 맛있는 물이 솟아나온다.(원효샘물)이 물은 최고의 차맛을 내기로 유명하여 이곳은 예로부
                 터 시인묵객들의 담론과 산책을 유도한 우리나라 차문화의 산실이다. 그 옆에는 높이 20여
                 미터의 청량폭포가 있고  청량폭포를 지나면 중백운대로 이어지는 능선길과 계곡으로 계속
                 되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중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암릉길이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 (535m) 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밋밋한 길이지만 능선 남쪽은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다. 상백운대에서 선
                 녀탕이 있는 계곡으로 바로 내려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나한대를 거쳐 정상인 의상대까지 간
                 후 원효폭포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또한 의상대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 계곡 쪽으로
                 난 하산길이 있다. 이쪽 능선에서의 하산길들은 경사가 급한 편이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산 입구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선생 추모비" 가 있다. 

      소요단풍축제 : 매년 10월중 10일간 소요아가씨 선발대회, 노래자랑, 사진전시회,
                     등산대회, 주부백일장등 축제행사가 있다.
        
                     다목적광장 : 1,000명 수용(야외음악당)
                     야외예식장 : 1개소

      교통안내 : 1) 의정부역에서 경원선으로 소요산역 하차(의정부역에서 매시 20분 출발)
                 2) 버스로는 수유리(4호선 수유역)에서 36번, 39번, 136번(좌석), 139번(좌석)을 이용
                    소요산 입구하차
                 3) 승용차 : 3번 국도를 타고 의정부에서 25Km
                    (서울 → 의정부 → 3번국도 → 동두천시 → 전곡 방향 3번 국도 → 5.3km → 소요
                     동에서 우회전 → 400m → 소요산 주차장)
                         
      현지숙박 :  동두천관광호텔(031-862-7171), 유림관광호텔(865-2101)
                  동백장여관(862-4600), 다래파크(864-4235)
                  국보장여관(862-6839), 모텔카라(864-4915)

      주변명소 : 열두계곡, 재인폭포, 신북온천(031-535-6700), 산정호수, 베어스타운, 한탄강

      관광안내 : 소요산 관리사무소  031-860-2065
                 소요산 매표소      031-867-8313
                 의정부역  031-875-7788
                 소요산역  031-865-7788
                 문화공보과 관광담당 031-860-2066
                 자재암    031-865-4045


      정보제공자 : 1) 483-100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1번지
                              소요산 관리사무소 (031-860-2065)

       

                                                                  

      이루마 - kiss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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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를 찾아 나선 기행

       

       

      대게로 장식된 입구 식당 광고 조형물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 강구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까지꺼,,,,입구에 있는 식당들 좀 선전해주지 뭐, 큰 게딱지 광고판이 차 막히고 좁은 강구 어시장

      바닥에서 하도 그 위용을 자랑해서리...

       

      일요일이라 그런지...

      강구항에 도착, 식당이 즐비한 대게거리 입구에 접어들었건만 당췌 차가 막혀 나가질 않는다.

      작은 다리를 하나 새로 놓았더라만 그도저도 마찬가지로 정체다.

      막히는 차를 기사만 버려두고 우리 모두는 하차해서 바닷바람도 쐴겸 시장길로 접어 들었다.

      입구에 큰 식당들이 대거 운집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큰 대게를 달아 놓았다.

      식당에 들어가면 어련히 잘 해줄까마는 강구항에 한 두번 온 것도 아니고

      우리팀들은 깊이 깊이 시장길로 접어들었다.

      큰 시장에는 물론 좋고 온전한 대게를 팔겠지만..우리 팀들은 시장 안쪽으로 다가가서 직접 흥정~`

      게를 산 가격의 10%를 내면 삶아주는 식당으로 안내하고 ....일인당 3,000원의 자리세만 내면

      되는 알뜰형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단순한 게 맛만 보고 일어설 거라면 그 게 더 낫다.

       

      눈으로 확인하고...다리가 한 짝  떨어져 나간 늠을 덤으로도 두어마리 너끈히 받아 올 수도 있고, 

      발품을 판 만큼 저렴하다. 나머지 돈으로는 해초도사고 전복도 사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저녁에는

      전복회도 실컷 먹고 나머지로는 죽도 끓이고, 했다  알뜰 주부9단이 몇 명인가?

       

      그러나 이 곳 강구항을 잘 알지못하고 게도 잘 볼 줄 모른다면 입구에 있는 큰 식당을 권한다.

      박달대게라 불리는 속이 꽉찬 최상품 대게는 90% 이상이 살로 채워져 있고, 이 와 반대로 속이 텅빈

      수대게는 살대신 물이 찬 대게를 일컫는다. 이 중간쯤에 반물대게라 해서, 속이 70% 가량 찬 대게가

      있다. 식당에서 판매되는 대게들은 박달대게나 반물대게들이므로 최상품 대게를 맛 보고 싶다면

      다소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는 대게거리의 식당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게를 골라내어 흥정하려는 듯,

       

      줄지어 늘어선 식당 앞에는 이렇게 떡 찌는 것같은  대게 찜기가 있어서 그야말로 한 번씩 열 때마다

      수증기가 뽀얗게 서리는 것이...바로 강구항의 겨울 풍속도다.

       

       

      바쁘다 바뻐~ 오늘(일요일)이 장날이제...

       

      주차장 모습이 아니다. 나오는 차량은 없고 들어가려는 차들로....마비상태~

       

      거리엔 온통 대게 전문 식당뿐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사람들 대개는 대게가 커서 대게라 불리우는지 알고들 있다. 나 역시나....ㅎ~

      대게는 게가 커서 대게가 아니고 게 발이 마치 대나무같다하여서 대게로 불린단다.

      쭉쭉 뻗어 있는 다리가 대나무처럼 생겨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란다.

      그래서 옛날에는 ‘죽해(竹蟹)’라고 쓰기도 했고, 식당 간판에는 그 뜻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Bamboo Crab'이라고 적어놓은 데도 많다.

       

       

      대게잡이용 그물이란다.

      마치 거미줄 같이 가늘고 그물의 간격은 성글다.

      게는 아마도 그물앞에는 움씬도 못할 것 같다. 도대체...몸에 길게 붙은 10개의 다리 중 한 개의 다리만

      걸려도 포획되게 생겨먹었으니 오호 애절타!

      오징어 잡이 배마냥 탐조등이 많이 걸려 있었다. 저렇게 발고운 그물 손질을 언제 다 끝내나?

       

       

      대게는 11월 1일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5월 31일까지만 잡을 수 있다한다.

      매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먹을 수 있는 대게는 겨울이 깊어갈수록 살이 차고 알이 충실해져

      맛이 좋아진다. 통상 영덕대게라고 부르지만 최근에는 울진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두 지역 간 원조 논쟁이 불붙어 있다. 영덕이나 울진 모두 잡아올리는 대게가 커다랗고 맛있다.

      울진이나 영덕 두 군데다 대게축제를 4월 중순경에 가지며....원조 설전은 여전하다.

       

       

      아마도 대게잡이 배가 정박하여 그물에서 게를 털어내는 장소이자 경매 시장인가 보다

      바닥에 게 다리가 무수히 떨어져 있고 인접한 바닷물위에도 떨어진 게발이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시장 더 깊숙히 들어가자 작은 배위에서는 직접 팔기도 하는데....

      설마 직접 잡은 것이겠지? 수입산은 등에 점이 있고...색깔도 선명하게 예쁘지 않다던데,

       

      직접 눈으로 보고 골라서 흥정하는 재미도 강구항에 와서 빼 먹으면 섭섭하다.

      게만 있는 게 아니라...각종 횟감, 매운탕용 생선 해초류등...찬거리가 눈요깃거리로도 푸짐하다. 

       

       

      저기 등대가 보인다. 바로 저 등대가 '그대 그리고 나'에서....송승헌이 바다에 나간 어부 아버지

      최불암을 기다리던 그 곳? 울진과 영덕의 원조 대게 원조 공방전은  아무래도 영덕이 김주영의

      장편소설 ‘천둥소리’의 배경이기도 하고, 인기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였다는 게 그

      메리트가 되지 않았나 싶은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갈매기도 끼룩대고...시원한 바닷바람도  좋고  비릿한 선창가의 냄새도 좋다.

       

       

      언제나 어시장은 북적이기 마련..그래서 추운줄도 모른다.

       

       

      아늑한 강구항을 눈여겨 볼 정신도 없을만큼....이미 일요일 점심시간은 돗때기 난장판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바로 그 게 산다는 것이고  그 어수선하면서도 생기있는 삶의 현장 ~

      그 게 사람들을 여기까지 불러 오게하는 재미가 아닌가?

       

       

      게를 손질하여 찜솥에 넣고...집에서는 실은 게를 찔 마땅한 그릇들이 잘 없다.

       

      씻어서 준비한 게는...

       

      이렇게 대략 20분 뒤면 새빨갛게 다 쪄진다.

       

      한 사람이 두 마리씩...먹으니...밥 들어 갈 자리가 없다.

       

      아래는 블로그에 예전 글,  자료중에서


       

      어느날 남편이 선물받았다며 가지고 온  대게 두 박스...

      그럼 바로 이 건 정확한 수입산?  껍질이  더 두텁고,대체적인 등딱지는 선명했으나 그 중 간간이 어두운

      낯빛을 한 바로 그 넘들이 있어 국적이 탄로났다. 게 색깔은 별 다름 없는 것 같은데...아무튼 게는 다 맛있다.

      게는 지방이 적어 소화가 잘 되는 대신 쉬 변질하기도 싶다.

      물론 어획 시기도 겨울이지만 가능하면 동절기에만 먹도록 하자.

       

       

      4월 중순경이면 울진, 영덕 두 군데서 각 3일씩 대게 축제를 엽니다.

      해마다 일정이 조금씩 바뀌므로 (주말포함) 잘 알아 보신 후 가시면 되겠습니다.

       

       

       

      글:사진/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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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신라인의 숨결이 흘러 흘러 머금어 전해지는 포석정

       

      경주 여행 3일째,
      떠나오는 길에 포석정엘 들렀다.
      역시 예전 수학여행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가차이 들어갈 수 없도록 얕은 돌로 담장을 둘러쳤을 뿐,

      그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왕이 술잔을 띄우면 흘러 흘러 자기 앞에 올 때까지 詩를 한 수 지어야 한다고
      요는 풍류를 즐기는 어른들의 놀이터쯤으로 새겨들었다.

       

       

       

      입장료는 쌌다.

      매표소에 안내판 글에는 내가 알고 있던 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역사가 씌어져 있었고,

       

      경애왕이 고려의 침략으로 이 자리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먼 훗날, 후손들은 그저 객관적인 평가로는 ...

      "음 그래, 그랬으니까 패망했지...그따위 향락에 빠져 노닥였으니...최후를 여기서 맞지"

      인과응보적인 단순한 생각으로 누구든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버릴테니...

       

      과거 일제강정기 때 우리 왕조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낭설이라고 하는 말도 있고,

       

      그런데...그 게 아닌 듯하다.

      새로운 학설에 귀를 기우려 보니...정말 그 말이 어쩌면 기우였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 전문적인 새로운 학설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대체적으로 경주는 입장료가 좀 비싼 편이다.
      예사로 4.000원 5,000원인데 500원이다. 포석정안에 아무도 없다.
      아저씨 한 분이 비를 들고 포석정 내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송림이 울창하다.
      포석정 물길이 깨어져 지금 같아서는 그 깨어진 곳의 이음새를 막아 어찌 물이
      돌아 돌아 흐른다면 죽었던 경애왕이 되살아 나고...패망한 신라가 다시 번성의 꽃을 피우련만

      어찌, 그 게...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대체? 어떻게 물이 흘렀을까?

      그 물은 남산 자락을 깔고 앉은 포석정은 남산계곡에서 대통으로(지금의 수도관)

      이어져  큰 돌거북의 입으로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그 돌거북은 어느 무덤으로 옮겼을 거라

      추정해 보지만 찾을 길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복모양같다고 하여 전복(포어:鮑魚)鮑石亭地

      정말 나는 鮑石亭이 전복에서 따온 이름인 것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물길 바깥경계는 전복껍질이요.

      안쪽 경계는 전복살의 모양이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전복모양으로 만든 것도 다 과학적인 이치가 닿아 흐르는 물의 와류를 이용해서 술잔이

      흐르다가 꺽이다가 하기를 아홉구비를 지나...자기 앞에 당도하면 그동안 詩를 한 수 마련했다하니

      얼마나 멋진 곳인가?

      그러나 그렇게 늘상 즐기고 노는 자리가 아니라...

      경주남산 자락은 바로 불교신앙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한다.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난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한다.

       

      안내 팻말에 씌인대로 하자면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는데,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신성한
      제사장소이기도 했다는 반론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포석정은 연회도 베푸는 곳이었지만 신성한 남산자락 아래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단다.

      포석정이 자리한 곳이 경주에서  춥기로 유명한 냉골이라는 산동네 바로 앞인데 경애왕은

      미리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고 이리로 피신을 왔다는데, 연회가 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공격을 받은 때가 음력 11월이였다는데...양력으로는 12월 말이나 1월 초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을 천 년 전에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엄동설한 야외에서 술자리를 벌렸을리 만무할터....

      포석정엔 물마저 얼어 붙었을 한겨울이니  그건  억측에 불가하다는 주장이 자명한 사실이라는

      학설이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타당성 짙은 내용이라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경주를 방문할 때는 등산을 했으면 한다.

      경주의 상징인 토함산과  경주의 성지인 남산을...

       

      경주남산은, 신라천년 불교문화의 흔적이 산골짜기마다 탑과 불상과 절터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노천 불교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우는 경주남산은 나즈막하여 오르는데 1시간정도의 거리로 신라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산으로,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고적답사를 겸해서 오는 아름다운 산!
      그 남산 아래에 위치한 나정과 포석정도 둘러 보면서 신라의 흥망과 신라천년의 세월을 느껴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발걸음을 뒤로하며, 이 번 여행에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역사관을 올곧게 정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여행에서 얻은 귀한 소득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앎을 위하여~  나의 여행은  계속해서 지속 될 것이다. 

       

       

       

       

      글: 이요조

       


      *현재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는 포석정

       

      잔을 띄워 술을 마시도록 즐겼다는 별궁의 하나이다. 남산의 저수지와 같은 곳에서 물을 대나무통이 이어 이곳까지 끌어왔다는데 대단하다.

       경주 포석정 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에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통일신라시대 때에 만들어 졌으며,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고, 옛 신라 왕실의 향락의 쉼터이고, 포석정에서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데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잔을 마셔야한다고 ‘난정수희도’에 기록되있다.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다 빠져 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이나 5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를 돌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포석정은 유체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유체학적으로 와류(회돌이: 주 흐름의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현상)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보존상태는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조 구조만이 남아있다. 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던 데에서‘어무산신무’ 또는 ‘어무상심무’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1호이며 왕과 신하들이 쉬면서 시를 짓거나 잔치를 하던곳이다.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http://www.shilla.or.kr/historic-remains/nam_san/po_suk_jung.asp



      -------------------------참고 ----------------------------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적 1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입니다.
      포석정하니까 혹시 정자를 떠올리실 분도 계실테지만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이 포석정입니다.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다고 전복포자를 써 포석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석정은 지금까지 신라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둘러앉고,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는데..
      술잔이 멈추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비운의 현장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이 침입해오는지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신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중요한 이유로 얘기돼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포석정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이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성지인 경주 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포석정.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가로 5m, 세로 10m 정도 크기의 인공수로로 이뤄져있고..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아 포석정으로 불립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927년, 음력11월, 겨울에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때 왕은 왕비 궁녀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줄도 몰랐다는 기록이..
      그 근거였습니다.

      경애왕은 정말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붙잡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견훤이 쳐들어온 시기는 음력 11월 한 겨울입니다.
      이때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제기의 첫번째 이유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동 11월이면 양력으로 치면 12월.
      이때 추워서 야외에서 논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이때는 물이 얼어서 유상곡수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무리 왕이 정치에 등한히 해도..
      적이 지금 쳐들어오는데 거기서 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견훤의 군대는 경주에서 불과 25km떨어진 영천을 지나..
      시시각각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습니다.
      포석정의 위치도 의문스럽스만 합니다.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이 남산자락에 있는 것입니다.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130여곳의 절터, 400여개의 불상과 탑들이 들어서 있는 신라의 성지입니다.
      따라서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은 정신세계 신앙 그자체. 그 만큼 남산내에 남아있는 유적이 많고..
      포석정 자체도 남산내에 포함되는 곳으로..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성소의 의미로 파악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산에 위치한 포석정은 성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엔 신라 건국과 역사에 관련된 수 많은 유적지들이 자리하고 있죠.

      포석정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나정.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로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의 첫 궁궐터라는 창림사지도 포석정 근처에 있습니다.
      포석정에서 불과 1km 거리에 위치한 오릉.
      박혁거세를 포함한 신라 4명의 박씨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왕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남산은 박씨에게 상당히 중요한 발상지입니다."

      "포석정이 성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삼국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유포석정연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로 해석되고 있는 유포석정연오.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다(유)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록에서 유자는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중 경덕왕 유백률사 이야기에서는..
      "절에 갔다"이지 "놀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이 포석정에 유했다고 하면 그것을 놀러갔다고 번역을 하는데..
      다른 부분과 연결하면 무조건 놀러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왕이 절에 갔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을 왕이 절에 놀러갔다 이렇게 번역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중요한 그속에서 그걸 보면 유포석정..
      포석정에 갔다는 그저 놀러갔다고 번역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포석정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인식돼 왔습니다.
      그 결과 경애왕은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다 피살된 인물로, 포석정은 신라멸망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시대 기록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신라멸망의 당위성, 새로운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기록이라고 볼 때..
      그이후 놀이문화 퇴폐 향략문화로 전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입니다.

      신라의 혼이 담겨 있는 많은 유적지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
      그 주변 상황을 볼 때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성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성스러운 지역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연회를 베풀고 놀이를 즐겼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외국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공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지였는데요.
      안압지는 674년 문무왕때 만들어진 인공연못입니다.
      지난 1975년 발굴 당시 이 연못에서 3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엔 연회때 사용하던 놀이기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에서는 이런 흔적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이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석정은 도대체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포석정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의 헌강왕 관련 기록에 처음 나타납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임금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옆에 있던 신하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왕만이 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장소였으며..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만났다는 것 또한..
      이곳에서 행해진 제사의식을 통해 신과의 교류가 이뤄졌음을 뜻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엔 왕들이 참여해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고..
      왕과 신령의 세계가 직접 교류한다는 것이 왕권의 안정, 특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며..
      다른 일반인이 신과 교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신과 교류해 왕권의 안정 국가의 안정을 기원해..
      왕이 직접 제사하는 친사의 경우가 많았던 것이 바로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러면 경애왕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포석정에 간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포석정에서 이뤄졌던 제사의식이 호국제사인 팔관회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때는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팔관회를 열은바 있습니다.
      신라의 팔관회는 토속신앙과 불교의식이 결합된 것으로 호국제사의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이 호국제사는 고려때까지 이어졌으며 모두 매년 11월에 개최됐습니다.
      견훤의 침입을 받은 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았던 때도 11월이었습니다.

      팔관회는 주로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했던 의식이었다는 공통점을 나타냅니다.
      시기가 일단 음력 11월로 맞고 궁예도 11월에 했고 고려때도 11월. 신라도 기록에보면 11월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던 그때..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았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닐까요?

      "왕건에게 군사적 요청을 내놓은 상태에서..
      아마도 왕은 왕실 또는 측근과 남산에 있는 호국신에게 나라가 지탱될 수 있게..
      또는 왕건의 군대가 빨리와서 견훤의 군대를 막아달라는 제사의례를 지내러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포석정은 호국제사를 지내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석정이 이처럼 성스러운 곳이었다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가 이뤄졌다는 돌로 만든 물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것을 유상곡수라고 합니다.
      유상곡수 - 굽이치는 물위에 술잔흐른다는 뜻으로..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진 포석정.
      당시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유상곡수터만이 남아있습니다.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즐겼다는 유상곡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유상곡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방탕한 연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상곡수는 구곡으로 흐르는 물가에 술잔을 띄우고 술한잔 먹고 시한수 낭독하고..
      자연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정을 시로 표현해..
      후대에 남기는 청류의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당시 문인이나 현사들이 놀이를 하는 것 중에 가장 깨끗하고..
      왕들은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법으로 이것을 했습니다."

      이처럼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 행해지는 신라의 성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놀이를 벌이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포석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유상곡수터만을 가지고 포석정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포석정이 놀이터가 아니라 호국제사가 행해지던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해석들이 제기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포석정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유상곡수터만 남아 있지만 신라시대 포석정 주변엔 수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남산을 포함한 포석정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성지였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포석정.
      현재 포석정 근처의 일부 건물터만이 발굴됐지만..
      이 일대에 대한 발굴이 좀 더 진행되고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포석정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펌글)

       

       

      포석정 안에서 담장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민가를 촬영해 보았다.

      경주는 문화관광도시라...허가없이 취향대로 집을 짓거나 개보수 할 수 없다한다.

      경주시내에는 민가는 거의 기와지붕을 필수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주변경관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리라~~

      남산을 벗어나며 간혹 양옥이나 스라브지붕이 눈에 띄었지만...대개는 기와집으로 여느 집은

      문화잰가 보다 할 정도의 멋진 집들도 더러더러 눈에 띄었건만,

       

      포석정에 바로 인접한 이 집 지붕은 조금 그렇다.

      말이 기와지 흉내만 낸 기와모양의 프라스틱 같기도 하고...분명 흙으로 구운 기와는 아니다.

       

      폼새가 영 그렇다.

      그 느낌이나 모양새가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여실하다.

      경주에서는 그 많은 입장료들을 받아...주민들의 개보수도 제한하면서 지붕 이을 돈은 어떻게

      장기 저리 융자로 마련을 해주는 방법은?  분명 있겠지만...

      흙으로 구운 기와보다 나은 실용성을 따졌는지. 경제성을 따졌는지 몰라도,

      제대로 된 기와집이었으면 하는 나의 욕심은 너무 사사로운 이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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